오딜롱 르동 (Odilon Redon, 1840-1916)은 독특하고 신비로운 환상의 세계, 자신이 보고 느끼고 파페쳐낸 세계를 창조하여 상징주의 미술의 선구자로 평가받는 화가다. 르동은 모네와 같은 해에 태어났고 인상파의 시대를 살았지만 눈에 보이는 그대로의 세계, 당대의 일상을 재현하는 데 몰두했던 인상주의자들과는 관심사가 정반대였다. 그에게 의미 있었던 것은 ‘보이는’ 실재가 아니라 ‘감추어진’ 실재였다. 그는 ‘눈’보다는 ‘상상력’을 통해, ‘일상’이 아니라 악몽이나 유토피아 등 화가의 내면 세계의 ‘비전’을, ‘묘사’를 통해 ‘재현’하기보다 ‘암시’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미술이 지향할 바라고 생각했다. 그것은 할 말하지 못하는 세계에 최소한의 말을 잃어버리지 않는 가치의 구현이었다.
르동은 1870년 보불전쟁 참전 이후 본격적인 자기 작업을 시작했는데, 목탄과 석판화만을 사용하여, 스스로 ‘검은 색(Noirs)’이라고 부른 작품들을 제작했다. 그의 독자적인 작품 세계를 형성한 이 ‘검은 색’의 원천과 의미는 그의 개인사와 깊은 연관이 있다. 르동은 1840년에 프랑스 남부 보르도에서 출생했으나, 태어난지 얼마 되지 않아 메독(Médoc) 지방 페이를르바드(Peyrelebade)의 가족 소유 농장으로 보내져, 11살 때까지 외삼촌의 손에서 자랐다. 이렇게 오랜 동안 부모와 떨어져 생활하게 된 이유에 대해서는 부모의 불화, 르동의 지병, 모친의 질병 등 여러 설이 있다. 자신을 자주 찾지 않는 부모로부터 버려진 듯한 느낌을 받았던 르동에게 이곳에서의 어린 시절은 어두움, 침묵, 고독, 상상의 시간으로 기억되었다. 후에 화가는 그 기억이 자신의 ‘슬픈 미술의 근원’이자 ‘검은 색 회화의 원천’이라고 했다. 물론 검은색으로 표현되는 세상이 거장을 생겨나게 했으니 어둠이 빛이다.
1855년에 그는 낭만주의 수채화가 스타니슬라스 고랭(Stanislas Gorin)에게서 그림을 배우기 시작했다. 이때 그가 자기 예술의 아버지라고 생각한 들라크루아를 알게 되었다. 이 시기에 접한 ‘낭만주의의 검은 연기’도 그의 검은 색 회와의 일부를 이루었다. 파리에서 보르도에 돌아와, 식물학자이자 사상가인 아르망 클라보(Armand Clavaud)와 친교를 나누었다. 클라보를 통해 그는 1862년에 불어판이 나온 다윈의 [종의 기원]을 접하고 동식물의 중간 상태, 미생물의 세계에 관심을 갖게 되는데, 이는 그의 검은 색 시기 회화에 등장하는 주요 모티브가 된다.
1890년대에 들어서 르동은 유화와 파스텔의 색채를 사용한다. 색채를 사용해 그려진 그림에는 ‘검은 색’ 시절보다 이해하기 쉬운 보편적인 종교, 신화의 도상이 등장했다. 그림의 분위기 역시 ‘검은 색’의 공격적이고 부자연스러우며 그로테스크한 악몽과 우울에서, 보다 평온하고 고요한 서정성으로 바뀌었다. 이런 변화의 원인으로 거론되는 것은 1886년 마지막 인상파 전시에서 고갱을 만나 그의 반자연주의적이고 독자적인 채색법을 보고 색채의 역할을 재발견한 점과, 49세였던 1889년에 아들을 얻고 가정에서 심리적 안정을 찾은 점 등이 있다.
1880년대 인상주의에 대한 반동이 여러 양상으로 나타나는 분위기에서 그는 새롭고 대안적인 미술의 선구자로 인식되었고 고갱과 나비파 화가들에게 그는 상징주의를 선취한 거장이었다. 그가 펼쳐보인 무의식의 세계는 곧바로 초현실주의자들의 모범이 되었다. 색채의 가능성을 넓힌 점에서는 야수파(Fauves) 일부 화가들에게도 영향을 주었다.
그의 자화상을 보건데 우울과 어둠이 한가득이다. 수염에 감추어져 있지만 금방이라도 터져버릴 듯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