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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슈번의 1863년 攘夷戰에서 미국 상선에 첫 포격을 가했던 가메야마 砲隊 터에서 내려다본 시모노세키 해협. 이때의 포격이 근대 일본의 개막을 告하는 제1탄이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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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베 신조(오른쪽)와 그의 시모노세키 지구당 黨舍(왼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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伊藤博文 初代 1885.12~1888.4 5代 1892.8~1896.8 7代 1898.1~1898.6 10代 1900.10~1901.5 山縣有朋 3代 1889.12~1891.5 9代 1898.11~1900.10 桂太郞 11代 1901.6~1906.1 13代 1908.7~1911.8 15代 1912.12~1913.2 寺內正毅 18代 1916.10~1918.9 田中義一 26代 1927.4~1929.7 岸信介 56代 1957.2~1958.6 57代 1958.6~1960.7 佐藤榮作 61代 1964.11~1967.2 62代 1967.2~1970.1 63代 1970.1~1972.7 |
吉田松陰을 만나 학문에 눈뜬 19세 청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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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카스기 신사쿠. 그는 도쿠가와 막부 타도의 영웅이었다. |
신사쿠는 1839년 다카스기家의 1남3녀의 외아들로 조슈藩(번)의 성 밑거리(城下町·조카마치)인 하기의 菊屋橫丁(국옥횡정)에서 태어났다. 당시 다카스기家는 조슈번의 家臣團(가신단) 13등급 중 4등급인 大組(대조·오쿠미)에 속했다. 녹봉은 150石이다. 당시 쌀 1石은 지금의 18ℓ이다. 다소 여유가 있었던 中上級 무사집안이었다. 신사쿠는 12세 무렵부터 검술을 연마해 20세 전후에 柳生新陰流(유생신음류)의 免許(면허)를 皆傳(개전)한 검의 高手이다.
그는 藩校(번교)인 명륜관 등에 다녔지만, 구태의연한 학업에는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그러던 그가 19세(1857년)의 나이로 쇼카손주쿠(松下村塾)에 入塾(입숙)해 요시다 쇼인의 제자가 되고 부터는 救國(구국)의 實用학문에 눈을 뜨게 되었다. 요시다 쇼인의 독특한 교수법은 뒤에서 상술할 것이다.
신사쿠의 조부와 부친은 신사쿠가 쇼카손주쿠에 다니는 것에 반대했다. 훈장인 요시다 쇼인의 家格이 下級 사무라이인데다 그 정치노선이 과격한 尊王攘夷(존왕양이)였기 때문이다. 신사쿠는 집안 어른의 눈을 피해 밤중에 가만히 쇼카손주쿠에 다녔다.
1859년 10월, 쇼인은 막부의 최고위직인 老中(노중)으로서 열강의 위협에 굴복하여 開國노선을 추진하던 마나베 아키가쓰(間部詮勝)의 암살을 기도한 사실이 드러나 에도의 傳馬町(전마정) 감옥에서 참수당했다. 스승의 죽음을 전해 들은 신사쿠 등 쇼카손주쿠 문하생들은 복수를 맹세했다.
1860년 1월, 신사쿠는 양친의 권유로 「하기 城下의 최고 미인」으로 소문난, 藩士(번사) 이노우에 헤이우에몬의 차녀 마사(雅)와 결혼했다. 1861년 3월, 신사쿠는 번주의 世子 모리 사다히로(毛利定廣)의 小姓役(소성역: 측근 비서직)으로서 藩廳(번청)에 출사했다.
엘리트 藩士(번사)로서 순조로운 출발이었다. 그러한 신사쿠에게 轉機(전기)가 다가왔다. 1862년, 24세의 신사쿠는 藩의 추천으로 막부 파견단의 1人이 되어 淸朝 중국의 上海(상해·상하이)에 도항해 중국의 內戰과 열강의 동향을 3개월간 시찰하게 되었다.
『日本도 위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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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슈번 攘夷激派의 리더 구사카 겐즈이. 겐즈이는 다카스기 신사쿠와 더불어「松下村塾의 雙璧」으로 일컬어졌으나「禁門의 變」때 敗戰하자 현장에서 자결했다. |
막부가 이 시찰단을 보낸 이유는 上海에 무역의 거점을 설치하려는 계획 때문이었다. 이때 조슈번은 신사쿠에게 上海에서 「외국의 사정과 형세, 제도, 器械(기계)」를 견문하라는 특명을 내렸다.
당시, 중국에서는 「太平天國의 난(1851~1864년)」이 발발해 上海 교외까지 교전지역이 되어 총소리가 들려오던 시기였다. 아편전쟁(1842년) 후, 부패·무력한 淸朝를 타도하기 위해 봉기한 태평천국의 혁명군에는 많은 농민들이 가담하고 있었다.
상해港에 도착하면서 신사쿠 등을 놀라게 한 광경은 정박해 있는 유럽 열강의 상선·군함 수백 척과, 육상에 늘어서 있는 商館(상관)의 성곽과 같은 웅장함이었다. 20년 전 아편전쟁에서 영국에 패배한 중국은 南京條約을 조인할 수밖에 없었고, 이 조약에 따라 중국 측은上海·廣州(광주)·福州(복주)·廈門(하문)·寧波(영파) 등 5개 港을 개항했다. 열강은 이들 5개 港에 영사관을 설치해 治外法權(치외법권)을 누리면서 무역의 이익을 탐하고 있었다.
신사쿠는 上海 체재 중의 일기인 「遊淸五錄(유청오록)」에 『중국인은 외국인의 노예가 되었다. 우리 일본도 이와 같이 되지 않도록 힘써야 할 것』이라고 썼다. 이 일기에서 신사쿠는 『우리 일본도 막부의 虛弱외교로 인해 이미 (중국의) 전철을 밟고 있다』고 통탄했다.
특히, 신사쿠는 上海 체재중 사쓰마번(薩摩藩: 지금의 가고시마縣)이 上海 일대에서 세계를 상대로 密무역을 이미 개시했고, 장래에는 사쓰마로부터 歐美로 건너가는 항로를 개설할 계획이라는 정보를 입수했다.
신사쿠는 초조했다. 사쓰마번은 조슈번의 최대 라이벌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조슈번은 舊式 범선 군함을 2척밖에 보유하지 못했다. 이 정도의 軍備(군비)로는 만약 歐美 열강의 공격을 받는다면 한순간에 깨질 수밖에 없는 형편이었다.
上海로부터 규슈의 나가사키港에 도착한 신사쿠는 네덜란드의 무기상이 매도하려 했던 증기선을 매입하기 위한 계약을 독단으로 감행했다. 그러나 조슈번의 수뇌부는 그의 독단 구매계약을 추인하지 않았다. 번내에서 신사쿠의 독단에 대한 비난이 거세지자 네덜란드 측도 이 상담을 포기했다. 신사쿠는 번주 父子에게 귀국 보고를 한 후 에도(江戶·지금의 東京) 근무를 命(명) 받았다.
신사쿠의 에도 체재시, 조슈번에서는 「航海遠略策(항해원략책)」을 주장하던 나가이 우다(長井雅樂)가 실각하고, 藩論(번론)이 쇄국으로 방향전환을 해버렸다. 「항해원략책에 조정을 비방한 내용이 있다」고 구사카 겐즈이 등 攘夷派(양이파)가 京都(경도·교토) 조정 관계자와 통해 비난한 결과였다. 항해원략론은 쇄국을 포기하고, 서양열강처럼 해외로 진출해 국위를 떨치자는 구상이었다. 너무 앞서간 나가이는 결국 자기 배를 갈라 자결했다.
1862년 7월, 항해원략책을 파기한 조슈번은 藩論을 이번에는 코메이(孝明) 천황의 지론이기도 한 攘夷(양이·조이)로 돌아섰다. 조슈번의 건의를 받아들이는 형식으로 京都 조정도 「攘夷」 방침을 명확히 했다.
에도에서 신사쿠는 조슈번의 동지들에게 上海에서 느낀 「위기감」을 전달했다. 1862년 11월 신사쿠 등 10여 명은 가나가와(神奈川)에 있던 외국공사를 암살하려 했지만, 정보가 누설되어 중지했다. 이어 12월12일, 시나가와(品川)에 건설 중이던 영국공사관에 잠입해 방화했다.
여러 자료에 의하면 이 방화에 참여한 범인은 신사쿠 등 13명이었는데, 한국인에게도 잘 알려진 방화범의 이름은 다음과 같다.
구사카 겐즈이(쇼카손주쿠 修學 시절에 신사쿠와 더불어 「雙璧(쌍벽)」으로 불렸음), 이노우에 가오루(후일 외무대신과 駐조선공사 역임), 이토 히로부미(일본 수상 4회 역임).
게릴라 戰法의 민병조직「奇兵隊」창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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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메야마 포대 터. 1863년 5월10일 구사카 겐즈이의 지휘로 미국 상선을 포격했다가 며칠 후 美 군함 와이오밍號의 보격공격을 받아 궤멸했다. |
「攘夷」를 슬로건으로 내세운 조슈번은 1863년 들어 절정기를 맞았다. 그해 3월4일 칙사로부터 攘夷를 독촉받은 쇼군(將軍) 도쿠가와 이에모치(德川家茂)는 上洛(상락: 천황이 있는 京都로 올라감)했다. 쇼군의 上洛은 3대 이에미쓰(家光) 이래 200년 만의 일이었다. 그 배경에는 이 기회에 조정의 권위를 확립시켜 막부를 궁지에 몰아넣으려는 조슈번의 속셈이 숨어 있었다.
당시의 流行사상은 非현실적인 攘夷였다. 1863년 4월20일, 이에모치는 불가능한 일인지 뻔히 알면서도 世論에 밀려 「5월10일까지 攘夷를 단행하겠다」고 코메이 天皇에게 약속했다. 이미 歐美 열강과의 사이에 개국의 조약을 체결한 상황이었던 만큼 막부로서는 벼랑가로 몰린 꼴이었다.
이 무렵 신사쿠는 실력이 없으면서 목소리만 큰 조슈번의 攘夷 방식에 회의했던 것 같다. 진짜 攘夷를 하려면 정치게임보다는 우선 군사력을 비축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그러나 그의 무력증강 건의는 조슈번 상층부에서 받아들이지 않았다. 25세의 신사쿠는 돌연 삭발을 하고, 그 다음날인 3월15일 藩廳에 10년의 휴가를 신청해 허락을 받았다. 그는 스승 요시다 쇼인의 生家 근처에 은거했다.
그러나 시대는 신사쿠에게 讀書三昧(독서삼매)를 허락하지 않았다. 바로 그해 5월10일, 攘夷의 「急선봉」이던 조슈번은 시모노세키 해협에서 攘夷戰을 감행했다. 5월10일은 조슈번이 앞장서 무리하게 막부를 몰아세워 攘夷期限(양이기한)으로 선포된 날이었다.
1863년 5월10일 새벽 2시, 조슈번은 구사카 겐즈이(久坂玄瑞)의 지휘로 외국 선박에 대해 무차별 포격을 감행했다. 이날 시모노세키 해협을 통과하려고 하다 포격을 받고 혼이 난 선박은 미국 국적의 상선 팬브로그號였다.
공격을 받은 미국 측이 가만있을 리 없었다. 다음날, 미국 군함 와이오밍號가 보복 공격을 가해 가메야마(龜山) 포대를 쑥대밭으로 만들어 버렸다. 이 전투에서 조슈번의 군함 庚申丸(경신환)과 壬戌丸(임술환)은 침몰하고, 癸亥丸(계해환)은 대파당했다.
나흘 후에는 프랑스 군함 2척이 역시 보복을 위해 시모노세키 해협에 진입해 맹렬한 포격을 가한 후 陸戰隊(육전대)를 상륙시켜 해안 포대들을 점거·파괴하고, 民家도 방화하고 철수했다.
이때 은거 중이던 신사쿠는 藩廳에 게릴라 전법의 民兵조직인 「奇兵隊(기병대·키헤이타이)」의 창설을 건의했다. 그가 창설한 奇兵隊는 신분을 가리지 않고 전투력 위주로 대원을 선발·편성한 부대였다. 신사쿠는 기병대의 총독에 취임했다. 기병대에 이어 遊擊隊(유격대)·御盾隊(어순대)·集義隊(집의대)·力士隊(역사대) 등 민병대가 조직되었다. 이들 諸隊(제대)의 총병력은 2000여 명에 이르렀다.
藩廳은 농민·상인 등 일반 백성이 무장을 하고 武技(무기)를 배우는 것을 허락했다. 이것은 사무라이 계급만 무기를 소유하고 군사훈련을 받을 수 있도록 했던 막부 祖宗의 방침을 정면으로 무시하는 조치였다.
「8·18 政變」으로 추방된 조슈藩
이 무렵 조슈번의 「攘夷激派(양이격파)」는 조정의 급진적 公卿(공경)과 짜고 천황의 攘夷親征(양이친정)과 到幕(도막·막부타도)의 강행을 기도했다. 그러나 코메이 천황은 열렬한 攘夷論者이기는 하되, 攘夷는 어디까지나 막부를 중심으로 한 公武合體(공무합체)로 결행해야 한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公武合體에서 「公」은 朝廷, 「武」는 막부를 의미한다. 이것은 코메이 천황이 「막부의 타도」라는 현실정치의 변혁까지는 바라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그런데도 조슈의 攘夷激派는 산조 사네토미(三條實美) 등 自派 公卿들을 통해 천황에게 압력을 가했다. 그 결과, 8월13일 「攘夷를 위한 천황의 親征을 결행하겠다」는 詔勅(조칙)이 나왔지만, 力量上(역량상)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이에 조슈번의 라이벌인 사쓰마번과 京都守護職(경도수호직)을 맡고 있던 아이즈(會津)번이 조슈번의 攘夷激派를 京都로부터 추방하기로 합의해 비밀리에 동맹을 맺었다.
8월18일 새벽, 아이즈·사쓰마·요도(淀)의 세 藩에 皇居守衛(황거수위)의 명령이 떨어졌다. 3藩의 병력은 완전무장하고, 宮城의 9개 문을 엄중히 폐쇄하고, 召命(소명)이 없는 자는 예컨대 그가 關白(관백: 천황을 대리해 정무를 처리하는 최고위직)이라도 입문시키지 않았다.
朝議(조의)에서는 攘夷派(양이파) 公卿의 參內·외출·면회의 금지, 조슈번의 사카이마치門 경위 임무 免除 등이 결정되었다. 이 친위 쿠데타가 「8·18의 變(변)」이다.
조슈번 병사들은 사카이마치門까지 달려왔지만, 사쓰마번 병사들이 앞을 가로막았다. 사쓰마 번병들은 대포의 포구를 열어 놓고 발사할 태세였다. 兩軍의 대치상태에서 조슈번에 대해 「퇴거하라」는 칙명이 전해졌다.
상황은 조슈번에 절대 불리해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하루아침에 조정에서 쫓겨난 公卿 7명 및 攘夷派 사무라이를 포함한 2600명이 京都 북쪽 大佛妙法院(대불묘법원)에 모여 협의한 끝에 일단 조슈로 내려가 재거를 도모하기로 했다.
「禁門의 變」과 幕府의「제1차 조슈征討」
이러한 비상사태에 대처하기 위해 조슈번은 10월1일 신사쿠를 奧番頭(오번두)로 삼았다. 오번두는 번주의 측근 중 측근으로 사실상 번을 운영하는 役職(역직)이다. 당시 신사쿠의 나이 25세.
公武合體派에 의한 8·18정변으로 京都에서 쫓겨난 조슈번의 존양파는 1864년에 들어 上京 복수전을 감행할 움직임을 보였다. 조슈번 유격대 총독 키지마 마타베(來島又兵衛), 구사카 겐즈이 등이 강경하게 京都 진발을 주장했다. 신사쿠는 『편협한 視野(시야)에 의한 小攘夷를 버리고, 진정한 부국강병에의 길을 모색해야 한다』면서 進發派(진발파)를 설득했지만, 실패했다.
이때 신사쿠는 同門修學한 구사카 겐즈이 등 진발파를 설득하기 위해 藩命(번명)을 받지도 않고 2개월간 上京한 사실이 밝혀져 귀번한 후 즉각 城下의 野山獄(야산옥)에 수감되었다. 당시 「脫藩(탈번)의 죄」가 가볍지 않기는 했지만, 스피드 출세를 한 신사쿠에 대한 주위의 질투가 만만치 않았던 것 같다. 평소 신사쿠는 「直言直行 傍若無人(직언직행 방약무인)한 성격」이라는 인물평을 받고 있었다.
조슈 양이격파는 기어이 일을 저지르고 말았다. 조슈번은, 병력 3000여 명은 4隊로 나눠 京都로 진격했다. 1864년 7월19일 未明, 조슈번의 家老 후쿠하라 에치고(福原越後)의 부대가 京都 진입을 노리며 伏見(후시미) 街道를 북상하다 오가키·히코네藩 부대와 조우해 전단이 열렸다.
家老 쿠니시 시나노와 유격대 총독 키지마 부대는 2대로 分進해 하마구리門을 향해 쇄도했다. 백병전을 벌여 일시는 아이즈 藩兵의 수비선을 뚫고 궁궐 내부로 침입했지만, 새로 투입된 사쓰마·구아나(桑名) 번병에 의해 격퇴되었다.
구사카 겐즈이의 부대는 사카이마치門에 육박했지만, 포격전 끝에 패주했다. 겐즈이는 패전 현장에서 자결했다. 조슈의 4路軍은 모두 패전했고, 키지마 등은 전사했다. 이로써 조슈번 존양파는 거의 궤멸적 타격을 입었다. 이것을 궁궐에 대포를 쏘았다고 해서 「禁門(금문·킨몬)의 變」, 또는 최대 격전지의 이름을 따 「하마구리門의 變」이라고 부른다.
코메이 천황은 조슈번 追討(추토)의 칙령을 발했다. 궁궐을 향해 대포를 발사한 조슈번의 죄가 결코 가볍지 않다고 격노한 것이다. 막부의 조슈정벌軍(총독 德川慶勝)은 히로시마에 大本營(대본영)을 설치하고, 조슈번을 사방에서 포위했다. 15만 대군이었다.
그러나 열강 함대와의 「제1차 시모노세키 전쟁」에서 혼찌검이 나고 군사력도 피폐해진 조슈번은 항전을 포기했다. 조슈번의 俗論派 정권은 막부군에 恭順(공순)의 자세로 和平를 요청했다. 막부군은 「禁門의 變」 현장 책임자인 마쓰다(益田右衛門介) 등 세 家老(번의 최고위직)의 首級(수급)을 요구했다. 조슈번으로서는 삼키지 않을 수 없는 제안이었다.
조슈번은 세 家老를 셋부쿠(切腹: 자기 배를 갈라 자결함)시키고, 나카무라(中村九郞) 등 참모 4명은 참수했다. 세 家老의 수급은 즉각 히로시마의 막부 大本營에 전달되었다. 이로써 謝罪(사죄)의 세리머니는 끝나고, 강화 조건을 정하는 실질적인 담판이 시작되었다.
막부 측은 조슈 번주 父子를 감시하에 두기 위해 에도로 보낼 것을 요구했다. 조슈번으로서는 수락하기 어려운 조건이었다. 그러나 막부로서도 15만의 征長軍을 계속 유지하기 어려웠다. 대다수의 다이묘들이 유혈 사태를 회피하려 했다. 무엇보다 거액의 파병비용을 더 이상 지출할 수 없는 형편이었다. 1864년 2월 막부군과 조슈번 사이에 毛利 부자가 사죄·근신하는 등 막부의 체면을 세워 주는 선에서 협상이 타결되었다.
제1차 조슈정벌戰은 전투를 치러 보지도 못한 채 막부군의 승리로 끝났다. 하지만 막부 내부의 강경파는 화평조건에 불만이었다. 이럴 때 조슈번에서는 「討幕(토막)」을 주장하는, 자칭 「正義派(정의파)」가 쿠데타를 일으켜 항복노선의 俗論派를 숙청하고 정권을 장악했다.
討幕을 주장하는 강경파가 조슈번의 정권을 장악하고 있는 사태를 방관하고서는 막부의 위신이 설 수 없었다. 1865년 3월2일 쇼군 도쿠가와 이에모치(德川家茂)는 조슈 정벌을 위한 勅許(칙허)를 얻기 위해 上洛했다.
막부의 힘이 강한 때였다면 쇼군이 그런 勅許 따위는 애당초 받으려고 생각지 않았을 터이다. 그러나 이제 존왕양이파에 의해 잔뜩 고무된 천황은 종전처럼 고분고분하지 않았다. 코메이 천황은 막부의 제2차 조슈정벌에 딴지를 걸었다. 먼저 조슈번과 협상해 보고 그래도 정 말을 듣지 않으면 그때 정토하라는 따위의 간섭이었다.
이렇게 막부의 征長戰(정장전)이 자꾸 천연되는 상황에서 4개국 연합함대의 조슈번 공격이 더 빠르게 전개되었다. 1863년 5월10일부터 6회에 걸쳐 외국선에 대해 포격을 감행한 조슈번에 대해 4개국이 응징을 결의했던 것이다.
당시 藩命(번명)으로 영국에 유학 중이던 이토 히로부미와 이노우에 가오루는 급거 귀번해 「열국과 강화하라」고 藩廳(번청)을 설득했지만, 헛수고에 그쳤다. 「禁門의 變」이 발발해 궤멸적 타격을 받은 조슈번은 혼란상태에 빠져 있었기 때문에 전쟁회피를 위한 교섭대표를 파견할 여유가 없었다.
http://pub.chosun.com/client/news/viw.asp?cate=C03&mcate=M1004&nNewsNumb=2013121366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