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 성종 개태(開泰)년간인 1012년-1020년에 고려를 정벌하면서 포로로 잡아간 고려인을 모아 만든 삼한현(三韓縣)의 규모가 5000호(戶)이고, 그곳에서 징발하는 향병(鄕兵)의 수가 1만 명이나 되었으며, 이에 앞서 포로로 잡혀온 고려인들로 구성된 귀주(歸州) 거주 고려인들이 아직 문자를 몰라 학교를 세워 가르쳐 주기를 청하고 있는 기록이 있다.
출처: http://gusang.nationalculture.kr/03_content_03.asp?id=245
여기서 보니.. 3차례의 고려-거란전쟁에서의 거란에 끌려간 수가 5천호라는 걸 볼수 있습니다. 저지역은 내몽골지역이었다는 사실이고 따로 요나라에서 고려인들을 집단수용했음을 알수 있습니다. 그런데 1호당 5명으로 기준을 둘경우 2만 5천명이라는 것입니다. 성법맨님이 말씀하신 20만명의 포로중에 양규장군이 선전한게 3만명을 빼면 17만명이 됩니다. 그런데 기록에는 5천호 즉 2만 5천명수준입니다. 보장왕의 고구려 수복계획의 탄로이후 당이 고구려 유민들 20만명을 끌고간 2만5천호와 다른 규모입니다.
이걸 어떻게 봐야할까요? 저 년도기록대로라면 3차 거란전쟁이후가 됩니다. 17만명에서 2만 5천명을 빼면 14만 5천명이 남는데.. 이 사람들 대체 어떻게 봐야하는 것입니까?
그런데 여기서 의문인점이 하나 있습니다.. 사람수가 2만 5천명인데 징집 가능한 병력이 1만명이라는 수치가 나옵니다. 50%에 가까운 인원이 정병대상이상으로 상존한다는 사실에서 주목할때.. 이 숫자의 문제에서도 뭔가 의심적은 것이 있다는 생각이 들지만.. 이숫자를 의심해서 최대 포로를 5만명으로 잡는다해도 12만명의 숫자가 남게 되는 상황이 벌어진다 생각이 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