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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나를 '슈퍼장애인'이라 부른다 |
[문화인물탐험] 연극배우· 방송인 한석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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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오성 레이버투데이 기자 dodash@labortoday.co.kr 사진 허태주 기자 tjheo@digitalmal.com 한석준씨(23)는 사랑이 하고 싶다고 했다. 세상은 비록 웃기고 자빠진 3류 슬랩스틱 코메디 판국이지만, 그는 정말 ‘찐한 멜로’ 한번 해보고 싶다고 했다. 불편한 팔과 다리로 무대에서 노래하고 이야기하듯 그는 ‘우리들의 사랑법’을 모두에게 가르쳐 주겠다고 한다. “멜로 영화 찍고 싶어요. 아주 분위기 있는 걸로요. 장애인도 남들과 똑같이 사랑하고 아파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요. 하지만 아직까진 한번도 내 마음에 쏙 드는 멜로영화를 본 적이 없어요. 그런데 실은...멜로 영화 보면 자요... 사랑이 뭔지 모르니까 그냥 자는 거죠. 그래서 배우고 싶어요... 그 사랑이란 것을..." 스물세 살 청년의 꿈 그랬다. ‘연애와 연예', 스물세 살의 혈기왕성한 청년에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뭐가 있으랴. ‘장애인의 사랑법’을 절절이 담은 '찐한' 멜로물의 주인공을 꿈꾸는 그에게 영화 「오아시스」는, 그래서 '불편한 기억'이다. 그는 “오아시스 역시 오래된 고정관념을 깨지 못한 것 같다”고 말한다. “장애인에 대한 영화나 드라마엔 언제나 두 가지 이야기가 있어요. 고생과 노력 끝에 모든 것을 극복하고 성공한 사람의 이야기거나, 아니면 너무 못 사는 불쌍한 사람들 이야기예요. 한쪽은 칭송하고, 한쪽은 아주 동정하고···. 절대로 중간은 없어요. 열심히 노력하며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는 없어요. 사람들은 보통 장애인들 생각하면 무조건 천사 같은 이미지만을 떠올리잖아요. 하지만 사실 그렇지 않아요. 아주 성질 더럽고 나쁜놈도 많이 있어요(웃음). 비장애인과 마찬가지로 각양각색이에요. 하지만, 오아시스 역시 그런 시각에서 못 벗어난 것 같아요. 무엇보다도 그 역을 진짜 장애인이 했다면 정말 좋았겠죠.” 이제껏 장애인을 대상으로 삼은 영화와 드라마는 숱하게 많았지만, 장애인이 스스로 주연이 된 작품은 거의 없었다. 단지 ‘대상화의 대상’을 넘어 스스로 주체가 되려는 ‘욕심’. 이 23세의 앳된 청년은 참으로 야무진 욕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에게 "꿈이 뭐냐"고 물어보면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결혼하고, 아이 낳고, 오순도순 살아가는 평범한 가정을 꾸리는 것"이라고 답한다. 그러데 그건 인생의 '두 번째 꿈'이란다. 그의 첫 번째 꿈은 대체 뭘까. "야이 병신아, 병신아!" 11월 5일 저녁, 대학로 외진 곳에 있는 한 교회. 문을 열자마자 난데없이 "병신"이라는 소리가 들려온다. 이 소리는 장애인 극단 '휠'이 다음 주에 열릴 정기공연을 앞두고 맹연습 중인 가운데 튀어나온 소리다. 뇌성마비, 시각장애, 언어장애 등 갖가지 장애를 지닌 젊은이들이 모여 대사연습에 몰두하고 있다. 휠체어를 탄 주인공도 있고, 목발을 짚은 조연도 있다. 이 중엔 아예 앞이 보이지 않는 '참관인'도 있다. 하지만, 이들에겐 '장애'가 아무런 벽이 되지 않는다. 교회를 울리는 쩌렁쩌렁한 목소리들은 '에너지' 그 자체다. 1인 2역의 중증장애인 한석준은 이 연극에서 '취객'과 '장난전화 거는 꼬마' 역을 함께 맡았다. 1인 2역이다. 고작 해야 잠깐 등장하는 단역에 불과하지만, 언어장애를 지닌 데다 전동스쿠터가 아니고선 무대에서의 이동도 쉽지 않은 그가 1인 2역을 맡은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아니나 다를까, 며칠 뒤 만난 그의 얼굴에 흉터가 하나 생겼다. "마지막 리허설을 하다가 무대에서 넘어졌어요. 취객 역할이었는데 발이 꼬여서. 원래는 누워서 잠 자는 걸 연기하면 되는 건데 한번 서서 자는 연기를 해봤어요. 많이 취한 사람은 서서 잘 수도 있잖아요. 연출하시는 선배님이 그게 좋다고 하시더라고요. 서 있는 게 쉽지는 않지만요." 그는 흉터 진 얼굴을 드러내며 환하게 웃는다. 결국 그의 상처는 그가 자초한 것이었고, 이는 온전히 그의 남다른 '끼' 탓이었다. 그의 끼는 공연 당일에 빛을 발했고, '단역 중 단연 최고'라는 평도 받았다. 게다가 뜻밖이지만, 그는 '방송인'이라는 '직함'도 가졌다. 그는 매주 월~ 목요일 오후에 방영되는 KBS 2TV의 장애인 전문 프로그램 '사랑의 가족'에서 사회자를 맡고 있다. 매주 수요일, '기획진단-함께 가는 길'에서 장애인이 겪는 사회적, 제도적 문제점들을 시청자와 함께 나눈다. '연극배우 겸 방송사회자'라는 '거창한' 타이틀을 달았지만, 실은 연극이건 방송이건 데뷔 1년을 넘기지 못한 '초짜'에 불과하다. 연극무대엔 올 2월부터, TV 브라운관엔 5월부터 얼굴을 내밀었다. 흔한 말로 '벼락출세'한 셈이다. "연극할 때 방송사에서 잠깐 취재를 왔는데, 얼마 뒤에 연락이 왔어요. 장애인방송의 사회자를 구하는데 해보고 싶냐고. 흔쾌히 응했죠. 원래 꿈이었으니까. 그런데 왜 날 택했는지 그 이유가 뭔지는 몰라요.(웃음) 지난 방송도 안 보고, 그냥 무작정 가서 내가 아는 것만 이야기했더니 호응이 좋았어요. 정확하게 기억은 나지 않지만, 어떤 장애인 한 분을 소개하는 장면이 있었는데 그 분이 몸도 자연스럽고 너무 이야길 잘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혹시 비장애인 취재한 것 아니냐'고 물었더니 다들 웃더라고요. 그날 바로 합격을 받았죠. 그런데 방송이란 게 굉장히 줄 알았는데 훨씬 편하더라고요. 왜냐면 내가 알고 있는 것, 경험한 것만 있는 그대로 이야기하면 되거든요." 그는 지금은 본인도 '깜짝 놀랄 만큼' 언어장애가 나아졌다고 말한다. 자칭 '인간승리'란다. 기자가 "말을 그냥 잘할 뿐 아니라, 참 재미있게 한다"고 추켜세웠더니 돌아온 대답이 이랬다. "이렇게 해야, 먹고 살죠(웃음)." "저는 손을 못 쓰니까, 말로 승부를 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어렸을 때부터 밖엘 못 나가니까 동네 아줌마들하고 많이 놀았어요. 아줌마들이 집에 놀러오면 같이 수다떨고 했던 게 제일 즐거웠어요. 그래서 그런가, 가끔 애늙은이라는 말도 많이 들어요(웃음). 특히 어머니가 제가 다른 사람들과 어울릴 수 있도록 많이 도와주셨어요. 친구들 집에 데려오면 너무 좋아하시고. 제 성격이 이렇게 밝은 것은 어머니 탓이 크죠." 놀랍게도 그는 소시적 '동네 골목대장' 출신이다. '골목대장'이라면 비장애인도 역임하기 어려운 유년 시절 최고의 '감투' 아닌가. 비록 어린 시절이지만, 그의 유달리 밝은 성격 앞에 '장애아'라는 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그때 애들이 내 휠체어를 끌고 다니면서, '대장' '대장' 했었다"고 자랑스레 말한다. 최고의 연예인이 되고픈 까닭 지금 그의 첫 번째 꿈은 '연예인'이 되는 것이다. '장애인과 연예인', 동정심을 유발하려는 방송사의 '흥행코드'에나 어울릴 법한 구도지만, 그의 바람은 절실하다. 그는 자신이 지금 '1인 시위'를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장애인이 연예인이 되면 정말 많이 바뀔 것 같아요. 연예인의 힘이 막강하기 때문에 그 힘을 이용하고 싶어요. 제 말 한마디에 모두가 주목해 준다면 정말 좋을 것 같아요. 그래서 저는 지금도 홀로 '1인 시위'를 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혼자 아무 데나 막 다니고, 일부러 지하철만 타고 다녀요. 우리집 면목동에서 대학로까지 리프트를 타면 비장애인들의 두세 배는 걸리지만, 그런 행동이 세상을 바꿀 거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평범한 가정을 꾸리고 싶은 제 꿈은 두 번째로 밀렸죠. 우선은 장애인들을 밖으로 끌어내는 게 중요하죠. 아직도 집에만 있는 장애인들이 많고, 제 몫은 그 사람들을 밖으로 나오게 하는 것 같아요." 어쩌면 이처럼 높고 견고한 ‘사회적 벽’ 앞에선 차라리 평범한 사람이 되는 것이 불가능한 꿈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의 이런 행동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보는 이들도 있게 마련이다. "제가 방송 나가고 이러는 것 보면서 어린 녀석이 설치고 다니는 것 아니냐는 소리도 들었어요. 제 행동을 이해 못 하시는 분들은 욕도 많이 하시죠. 그런 분들 보면, 너무 안타까워서 직접 만나서 이야기해 보고 싶어요. 저 같은 장애인들이 많아지면 우리나라가 달라질 거라는 기대를 왜 못 할까요. 사람들이 절 보고 힘을 많이 얻었으면 좋겠어요. 서태지처럼." '세상 밖으로' 나서다 그는 뇌성마비 1급의 장애를 가진 청년이다. 뇌성마비는 유전은 아니지만, 선천성에 가깝다. 태어날 땐 몰랐지만, 돌 때쯤부터 목을 전혀 가누지 못했다. 뒤늦게 장애를 발견했을 땐, 이미 늦은 시점이었다. 손발도, 입도 자유롭지 못한 그가 받을 수 있는 학교교육은 없었다. 동생이 다니는 학교에 엄마 등에 업혀서 딱 두 번 가본 게 '학교생활'의 전부다. 스무 살이 다 되도록 그는 유배 아닌 유배생활을 해야 했다. "평생 집에서만 지내다가 열여덟 살 때, 교회에 처음 나갔어요. 친구를 사귀고 싶어서. 굉장히 궁금하고, 또 두려웠어요. 난 그때까지 내 또래아이들과 이야기해 본 적이 없었거든요. 용기를 내서 장애인특별반으로 들어가지 않고, 일반 고등부로 들어갔어요. 처음엔 다들 경계하는 눈빛이었어요. 교회에 세 번째 나갔을 즈음인가, 누군가 인사를 했어요. 안녕. 그리고 그 친구가 이름이 뭐냐고 묻더군요. 그게 나이 들어서 제일 처음 사회적 경험을 한 것이었어요." 교회를 통해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 성격이 바뀌었다. 성격이 바뀌면서 생각이 바뀌었고, 그러자 모든 게 달라졌다. 그는 유배생활을 청산하고, 비로소 '세상 밖으로' 첫 발을 내딛었다. "지금은 부모님께서 '한씨 집안에서 네가 제일 출세했다'고 하지만, 전엔 달랐어요. 아버지는 그냥 집에서 몸 관리나 하면서 칩거하길 바라셨어요. 별 기대를 하지 않으셨죠. 두 살 아래인 동생에게 가장의 역할을 바라셨어요. 혼이 나도 동생이 더 많이 혼났고. 하지만 전 맏이로서 그 역할을 하고 싶었어요. 장애인들 보면 밖에선 물론이고, 집에서도 왕따를 당하잖아요. 그것만큼 비참한 것이 없어요. 저는 그런 가족들의 생각을 바꾸고 싶었어요." 이 나라의 경우 아직 장애인의 '존재'에 대한 인식은 천박하다. 온 몸에 쇠사슬을 묶고 지하철 철로에 뛰어들어 목숨 건 시위를 하거나, 심지어 온 몸에 불을 사르며 생존권과 이동권을 요구했음에도 세상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서울시 버스개편'이라는 천지개벽 속에 떡 고물처럼 떨어진 것이 아주 가끔 눈에 띄는 '저상버스'다. 그러나 여전히, 혹은 당연히 '가뭄에 콩 나듯' 오는 버스를 기다리는 장애인은 찾기 힘들다. 어쩌면 그들에게 세상은 더 악랄해졌을 수도 있다. 그래서 물었다. 예컨대 이동권을 위해 투쟁하는 장애인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그의 대답은 조심스럽다. "솔직히 잘 몰라요. 그렇게 제도를 바꾸려고 시위하는 것, 옳다고 생각은 해요. 그런데 왠지 갇혀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아요. 뭔가 철창 안에서 맴돌고 있다는 느낌. 그 생각이나 행동이 틀렸다는 게 아니라, 자꾸 그 안에 머물게 되는 것 같아요. 무슨 느낌인가 하면, 뜨질 못 한다는 거예요. 자신의 능력이 아무리 뛰어나도 그 자리예요. 저는 어떤 장애인이 능력이 있으면 그걸 사회적으로 띄워줘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렇게 장애인들이 잘 돼야, 우릴 보는 시선도 달라질 거라고 생각해요." 이런 그의 생각은 틀렸을 수도 있다. 게다가 충분히 위험하다. 어쩌면 현실을 외면한 '출세주의'라는 비판을 받을 수도 있다. 하지만, 23세 청년의 '자의식'은 아직도 현재진행형이고, 그의 고민을 포용하는 것 또한 우리 사회의 의무이고, 몫은 아닐까. 청년의 말은 이어진다. "장애인들이 비장애인들에게 너무 의지를 많이 하는 것도 문제예요. 너무 받으려고만 하니까요. 이를테면 함께 밥을 먹을 때도, 밥 그릇을 절대 안 치워요. 당연히 누군가 치우겠지, 하는 거죠. 말로는 비장애인들과 똑같다고 하고, 똑같아야 하겠지만 할 수 있는 걸 안 하는 경우도 많아요. 저 역시 마찬가지고요." 사람들은 지금 그를 '슈퍼장애인'이라고 부른다. 손발이 성치 않은 데다, 약간의 언어장애까지 겹친 그가 연극무대는 물론, 공중파에서까지 '맹활약'을 펼치는 것을 두고 어떤 '팬'이 그에게 '슈펴장애인'이란 별명을 붙여준 것이 계기였다. 조금 있다 그는 "이 별명을 퍼뜨린 것은 실은 나 자신"이라고 실토했지만, 그 별명이 너무 좋단다. 슈퍼장애인. 언뜻 형용모순으로 들리기도 하지만, 그처럼 '혈기왕성한 장애인'을 부르는 데 이보다 더 적절한 말은 없어 보인다. '희망의 휠체어'가 되어 하지만 그런 그에게도 '죽음'이 드리웠던 시절이 있었다. 3년 전, 자신을 끔찍이 아껴주던 한 형이 아파트에서 투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날마다 만나 고민을 나눴을 만큼 의지가 되던 사람이었다. "진짜 좋아하던 형이었어요. 장애인 단체 활동도 함께 했고. 저보다 세 살 많았는데... 그러니까 지금 제 나이 때 일이죠. 전 정말 몰랐어요. 그 형이 그렇게 힘든지. 항상 웃고 다녔고... 미소가 정말...천사 저리 가라 같았어요. 그 형은 저보다 손을 좀 썼고, 걷지는 못하고, 기어다니는 정도였지요. 아버지와 둘이 살았는데 매일 술에 쩔어 사셨어요. 미래가 없었나 봐요. 그래도 자살까지 할 거라곤 생각지 못했거든요. 그때 나도 자신이 없어지더라고요. 나는 그 형보다 손도 못 쓰고... 저도 같이 따라갈까 생각을 잠깐 했었어요.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서태지처럼 유명한 연예인으로 뜨고 싶다는 그의 바람은, 어쩌면 그때 비롯된 건지도 모른다. 우스꽝스러운 무좀양말을 신은 채 발가락으로 전동스쿠터를 조작하는 언어장애인이 방송에 나와 요란을 떨며 만인을 웃길 때, 많은 이들의 생각은 달라질 것이다. 그의 말대로 중요한 것은 생각이고, 그 생각이 바뀌면 모든 게 달라진다고 하지 않았던가. 문득 문득 '죽음'과 직면하게 되는 '장애형제들'에게 그는 '희망의 휠체어'가 되고 싶은 것이리라. 그 휠체어가 어두운 '장애의 벽'을 넘는 날, 그는 '두 번째 꿈'을 찾아갈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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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말 2004년 222호 편집부의 다른기사 보기 |
첫댓글 언젠가.... TV에서 본것같아요. 휠체어탄 장애인 몇명이 나왔었는데... 유명한 최고의 연예인으로 성공하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