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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암록 中
제31칙 마곡의 주장자를 떨치고〔麻谷振鍚〕
제32칙 임제의 한 차례 때림〔臨濟一掌〕
제33칙 자복의 일원상〔資福圓相〕
제34칙 앙산의 오로봉〔仰山五峰〕
제35칙 앞도 삼삼 뒤도 삼삼〔前三三後三三〕
제36칙 장사의 봄기운〔長沙春意〕
제37칙 반산의 마음을 구함〔盤山求心〕
제38칙 풍혈의 무쇠소〔風穴鐵牛〕
제39칙 운문의 황금털〔雲門金毛〕
제40칙 남전의 뜰에 핀 꽃〔南泉庭花〕
제41칙 조주의 크나큰 죽음〔趙州大死〕
제42칙 노방의 잘 내리는 눈〔老龐好雪〕
제43칙 동산의 더위와 추위〔洞山寒署〕
제44칙 화산의 북을 치는 뜻〔禾山打鼓〕
제45칙 청주에서 지은 삼베적삼〔靑州布衫〕
제46칙 경청의 미혹되지 않음〔鏡淸不迷〕
제47칙 운문의 육대(六大)에도 포함되지 않는 것〔雲門六不〕
제48칙 태부의 옷소매를 떨치고〔太傳拂袖〕
제49칙 삼성의 금빛 물고기〔三聖金鱗〕
제50칙 운문의 진진삼매〔雲門塵塵三昧〕
제51칙 암두의 최후의 언구〔巖頭末後句〕
제52칙 조주의 돌다리〔趙州石橋〕
제53칙 마조의 들오리〔馬祖野鴨〕
제54칙 운문의 손을 펴 보임〔雲門展手〕
제55칙 도오의 말할 수 없음〔道吾不道〕
제56칙 흠산의 화살 한 대〔欽山一鏃〕
제57칙 조주의 분별하지 않음〔趙州不揀〕
제58칙 조주의 함정〔趙州窠窟〕
제59칙 조주의 지극한 도〔趙州至道〕
제60칙 운문의 주장자〔雲門拄杖〕
제61칙 풍혈의 한 티끌〔風穴一塵〕
제62칙 운문의 보물 한 가지〔雲門一寶〕
제63칙 남전의 고양이를 벰〔南泉斬猫〕
제64칙 조주 짚신을 머리에 얹고〔趙州載鞋〕
제65칙 세존의 침묵〔世尊良久〕
제66칙 암두의 할〔巖頭作力〕
제67칙 경상(經床)을 두드린 부대사〔傳大師揮案〕
제68칙 혜적과 혜연〔惠寂惠然〕
제69칙 남전의 일원상〔南川圓相〕
제70칙 위산의 목도 입도 막은 뒤〔潙山倂却〕
제31칙 마곡의 주장자를 떨치고(麻谷振鍚)
(수시)
움직이면 그림자가 나타나고, 깨달으면(본래 맑은 물이지만) 얼음이 생겨난다. 그렇다고 움직이지도
않고 깨닫지도 않는다면 여우굴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투철하게 사무치고, 꽉 믿어서 실오라기만한
가리움마저 없다면, 용이 물을 얻은 듯, 범이 산을 의지한 듯하여, 놓아버려도 기와 부스러기에서
광명이 나오고, 잡아들여도 황금이 빛을 잃게 되어, 옛사람의 공안도 (직선 코스가 아닌) 빙 돌아가
는 것일 뿐이다.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가 말해보아라. 거량해보련다.
(본칙)
마곡스님이 석장(鍚杖)을 지니고 장경(章敬)스님에게 이르러, 선상(禪床) 주위를 세 바퀴 돈 후
석장을 한 번 내려치고 우뚝 서 있자
-조계의 모습을 쏙 빼닮았네. 끝내는 하늘도 놀라고 땅도 감동했다.
장경스님이 말하였다.
“옳지, 옳지!”
- 진흙 속에서 흙덩이를 씻는구나(쓸데없는 짓을 하는구나). 한 배 탄 사람들을 모두 속였다.
이 무슨 말이냐? 사람을 잡아매는 말뚝이다.
설두스님이 착어하였다.
“틀렸다.”
-용서해줘서는 안되지. 그래도 한 수 헤아렸군.
마곡스님이 또다시 남전스님에게 이르러 선상을 세 바퀴 돈 후 석장을 한 번 내려치고 우뚝 서
있자
-여전히 진흙 속에서 흙덩이를 씻는다. 전에 했던 짓을 거듭하는군, 새우가 뛰어봐야 통을 벗어나지
못한다.
남전스님은 말하였다.
“아니다, 아니야.”
-왜 인정하지 않는가? 사람을 죽이고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구나. 이 무슨 이야기인가?
설두스님은 착어하였다.
“틀렸다!”
-용서해줘서는 안되지.
당시 마곡스님이 말하였다.
“장경스님은 옳다고 하는데, 스님은 무엇 때문에 옳지 않다고 하십니까?”
-주인공이 어디에 있느냐? 이놈이 원래 남의 말을 가로채는 녀석이었군. 들통났구나.
남전스님은 말하였다.
“장경스님은 옳았지만 틀린 것은 바로 자네야!”
-사람을 죽이려면 반드시 피를 보아야만 하고, 사람을 위하려면 반드시 사무쳐야 한다.
많은 사람을 속였겠구나.
이는 바람의 힘〔風力 :번뇌〕에서 굴러나온 바이니 결국 사라지고 만다.
-과연 그의 올가미에 걸려들었군, 자기는 어떡하려구?
(평창)
옛사람은 행각을 할 적에 두루 총림을 편력하면서 ‘이 일’만을 생각하고, 선상(禪床) 위에 앉아 있는
큰스님들의 안목이 있는가 없는가를 판정하고자 했다. 옛사람들은 한 마디에 서로 통하면 머물렀지
만 그렇지 못하면 곧 떠나버렸다.
마곡스님이 정경스님에게 이르러 선상을 세 바퀴 돈 후 석장을 한 번 내려치고 우뚝 서 있자, 장경
스님이 “옳지, 옳다” 고 말한 것을 보아라. 사람을 죽이는 칼〔殺人刀〕과 살리는 칼〔活人劍〕은 본분작
가여야 쓸 수 있다. 그렇지만 만일 그대가 양쪽으로 이해한다면 설두스님의 뜻을 알지 못할 것이다.
그가 우뚝 서 있었는데, 말해보라. 그는 무슨 일을 하였는가? 설두스님은 “틀렸다!”고말하였는데,
어느 점이 틀렸다는 것일까? 장경스님은 “옳다”고 하였는데 무엇이 옳다는 것일까? 설두스님은
앉아서 판결문을 읽는 것과 같다.
마곡스님은 “옳다”는 이 한마디를 가지고 바로 남전스님을 찾아가 여전히 선상을 세 바퀴 돈 후
석장을 한 번 내려치고 우뚝 서 있자, 남전스님은 “아니다, 아니야”라고 하였는데, 살인도와 활인검
은 모름지기 본분종사여야 쓸 수 있다. 설두스님은 “틀렸다!”고 하였으며, 장경스님은 “옳지, 옳지”라
하였고, 남전스님은 “아니다, 아니야”라고 하였으니, 이는 똑같은 말일까 다른 말일까? 앞에서는
“옳다”고 했는데, 무엇 때문에 “틀렸다!”고 말했으며, 뒤에서는 “아니다”라고 했는데, 무엇 때문에
“틀렸다!”고 하였을까?
만일 장경스님의 말에서 이해하려 한다면 자신마저 구제하지 못하겠지만, 남전의 말에서 알아차린
다면 불조와 함께 스승이 될 것이다. 비록 그러하기는 하나 납승이라면 모름지기 스스로 알아야
한다. 절대로 남의 말을 가지고서 분별해서는 안된다. 그가 물은 것은 매한가지였는데 왜 한 사람은
“옳다”하고, 한 사람은 “아니다”라고 말했을까? 통달자재한 작가〔通方作家〕로서 완전한 해탈을 얻은
사람이라면 반드시 또 다른 생애가 있겠지만, 기틀〔機〕과 경계〔境〕를 잊지 못한다면 결코 양쪽에
막힐 것이다.
그러므로 고금을 분명히 판별하고 천하인의 혀를 꼼짝 못하게 하려면 반드시 두 차례 “틀렸다 !”라
고 한 말을 또렷이 알아야한다. 뒤에 설두의 송은 오직 이 두 차례의 “틀렸다!”는 말을 노래했을
뿐이다. 설두스님은 활발발(活鱍鱍)하게 드러내고자 이처럼 말했던 것이다. 만일 몸 속에 피가 있는
자라면 당연히 언구에서 이해하지 않고, 속박하는 말뚝 위에서 이러쿵저러쿵하지 않을 것이다.
어느 사람은 “설두스님은 마곡을 대신하여 두 차례 ‘틀렸다!’고 말하였다”고 하지만 이와는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옛사람의 착어는 중요한 관문을 꽉 막아버린다는 사실을 모른 데서 나온 말이다.
여기도 저기도 모두 옳으나 결국은 두 쪽 모두 아니다.
경장구(慶藏主)는 “석장을 짚고 선상을 맴돌며, 옳으니 옳지 않느니 하는 것은 모두 잘못이다”고
하였는데. 실은 이것도 아니다.
그대들은 듣지 못하였는가? 영가(永嘉)스님이 조계(曹溪)에 이르러 육조(六祖)스님을 친견할 적에
선상에 세 바퀴 돌고 석장을 한 번 치며 우뚝 서 있었다. 그러자 육조는 “사문(沙門)이란 3천 가지의
큰 위의〔三千威儀〕와 8만 가지의 구체적인 규율〔八萬細行〕까지도 모두 갖추어야 하는데 스님은
어디서 왔기에 그처럼 거만을 부리는가?”라고 하였다. 무슨 까닭에 육조는 그에게 거만을 부린다고
말하였을까? 그때는 옳다고 말하지도 않았고, 옳지 않다고 말하지도 않았다. 옳으니 옳지 않느니
하는 것은 모두 속박하는 말뚝이다. 오로지 설두스님만이 두 차례 “틀렸다!”고 하였으니,
그래도 조금은 나은 편이다.
마곡스님은 “장경스님은 옳다고 하였는데 스님은 왜 옳지 않다고 하십니까?”라고 하였는데,
이 늙은이가 눈썹을 아끼지 않고(상대를 일깨워주느라) 적지 않은 허물을 범하였다. 남전스님이
말하기를 “장경스님은 옳지만 바로 너는 틀렸다”라고 하였으니, 남전스님이야말로 토끼를 보고서
사냥하려고 매를 놓아보냈다고 말할 만하다.
경장주가 말하였다. “남전스님이 너무도 매몰차지 못해 마지못해. 다시 허물을 들추어 말하기를
‘이는 바람의 힘〔風力〕에서 굴러나온 바이므로 결국 사라지고 말 것이다.”
「원각경(圓覺經)」에서는 “나의 이 몸은 사대(四大)로 화합된 것이니, 이른바 털ㆍ손톱ㆍ이빨ㆍ가죽
ㆍ살ㆍ힘줄ㆍ뼈ㆍ골수ㆍ뇌 등 더러운 물질은 모두 땅으로 돌아가고, 침ㆍ눈물ㆍ고름ㆍ피는 모두
물로 돌라가며, 따뜻한 기운은 불로 돌아가고, 움직이는 것은 바람으로 돌아가나니 사대(四大)가
각각 떠나면 오늘의 이 허망한 몸은 어디에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저 마곡스님이 석장을 지니고 선상을 돌았던 것은 이미 바람힘〔風力〕에서 굴러나온 바이므로
결국은 사라지고 말 것이라고 하였다. 말해보아라! 결국 마음의 종지〔心宗〕를 밝히는 일은 어디에
있을까? 여기에 이르러서는 모름지기 무쇠로 주조한 놈이어야만이 할 수 있다.
왜! 듣지 못하였느냐? 장졸(張拙)이라는 한 진사(進士)가 서당장(西堂藏)선사를 참방하여 물었다.
“산하대지는 있습니까, 없습니까? 삼세의 모든 부처님은 있습니까, 없습니까?”
“있느니라.”
“틀렸습니다.”
“그대는 일찍이 누구를 참방하였소?”
“경산(徑山)스님을 참방하였습니다. 내가 묻기만 하면 경산스님은 모두 ‘없다’고만 말하였습니다.”
“그대는 권속이 몇이나 있소?”
“아내 한 사람과 두 자식이 있습니다.”
“경산스님에겐 권속이 몇 명이 있었소?”
“경산스님은 옛 부처〔古佛〕이시다. 스님은 그를 비방하지 마십시오.”
“그대가 경산스님처럼 되거든 꼭 ‘없다’고 말하소.”
그러자 장졸은 머리를 숙이고 말았다.
모름지기 작가종사라면 끈끈한 속박을 벗겨주며 (속박하는) 못과 쐐기를 뽑아주어야 한다.
한 곳만을 국집하지 말고, 종횡무진 자재(自在)하여야 한다.
앙산스님이 중읍(中邑)스님의 처소에 이르러 사계(謝戒 : 계를 받고 은사께 드리는 의식)한 행동을
살펴보라.
중읍스님이 앙산스님이 오는 것을 보고 선상 위에서 손뼉을 치면서 “큰스님(和尙)! ”하자,
앙산스님은 곧 동편에 섰다가 다시 서쪽에 서고, 또다시 한복판에 섰다. 그런 뒤에 사계를 하고
곧 뒤로 물러서자 중읍스님이 말하였다.
“어디에서 이런 삼매를 얻었느냐?”
“조계(曹溪)의 도장〔印章〕을 고스란히 찍어왔지요.”
“말해보라. 조계스님은 이 삼매로 어떤 사람을 제접하였느냐?”
“일숙각(一宿覺)을 제접했습니다.”
이어 앙산스님이 도리어 중읍스님에게 물었다.
“스님께서는 어느 곳에서 이 삼매를 얻으셨습니까?”
“마조(馬祖)의 처소에서 이 삼매를 얻었노라.”
이와 같은 대화를 한다면, 이는 하나만 들어도 셋을 밝히고 근본을 보고서 지말을 아는 놈이
아니겠는가!
용아(龍牙)스님은 대중법문에서 “참선하는 사람은 반드시 조사와 부처를 뛰어넘어야 한다.
신풍(新豊 : 동산 양개, 용아스님의 은사)스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다.
‘불조의 말씀과 가르침을 숙생(宿生)의 원수처럼 보아야 비로소 참선할 자격이 있다. 만일 뛰어넘지
못한다면 불조에게 속임을 당하게 된다’라고 했다.“
그때 어느 스님이 (용아스님에게) 물었다.
“불조께서도 사람을 속이려는 마음이 있었습니까?”
“그대는 말해보라. 강과 호수가 사람을 막아 세우려는 마음이 있겠느냐?” 또 용아스님은 말했다.
“강과 호수는 사람을 막아 세우려는 마음이야 없었지만 사람 스스로 지나가지 못하여, 강과 호수가
도리어 사람을 막는 격이 되었다. 그러니 강과 호수가 사람을 가로막는다고 말할 수 없다. 조사와
부처가 사람을 속이려는 마음이야 없었지만, 사람 스스로가 뛰어넘지 못하기에 부처와 조사는
사람을 속이는 격이 되었다. 그렇다고 부처와 조사가 사람을 속이지 않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만일 불조의 가르침을 뛰어넘으면 이 사람은 곧 불조를 뛰어넘은 것이다. 불조의 뜻을 체득해야지만
비로소 향상(向上)의 옛사람과 같을 것이며, 뛰어넘지 못한다면 부처를 배우고 조사를 배운다 해도
만겁(萬劫)토록 깨칠 기약이 없을 것이다.”
“어떻게 하여야 불조에게 속임을 당하지 않겠습니까?”
“스스로 깨쳐야 하느니라.”
‘이 자리’는 반드시 이래야만 비로소 얻을 수 있다. 왜냐하면 사람을 지도하려면 철저해야 하고,
살인을 하려면 피를 봐야하기 때문이다. 남전스님과 설두스님은 그러한 사람이었기에 감히 말할 수
있었다. 송은 다음과 같다.
(송)
이래도 ‘틀렸다’, 저래도 ‘틀렸다.’
-눈썹을 아껴라. 법령에 따라서 시행하였구나. 천상 천하에 유아독존이로다.
절대 말하지〔拈〕 말라.
-두 개의 구멍 없는 철추로다. 서령 천수대비〔千手大悲〕 관음이라 해도 거론하지 못하리라.
혹 말한다면 스님에게 삼십 방망이를 먹이리라.
사해(四海)에 물결이 잔잔하고
-천하의 사람들이 꼼짝하지 못한다. 동서남북이 모두 똑같은 가풍이로구나.
요즈음엔 비가 많이 내리는군.
모든 강물에 썰물이 빠졌다.
-적나라하여 말끔하구나. 자신도 편안하고 바다와 강물까지도 평온하다.
고책(古策 : 지팡이)의 가풍이 열두 대문보다도 높은데
-어찌 이 같으랴. 주장자에는 눈이 없다. 절대로 주장자 위에 살림살이를 하지 말라.
문마다 (장안에 이르는) 길 있건만, 텅 비어 쓸쓸하네.
-한 물건도 없구나. 그대들의 평상심〔平生〕을 속였다. 곁눈질했다 하면 장님이 되리라.
쓸쓸하지 않음이여!
-그러면 그렇지! 몸을 돌릴 곳이 있었기 망정이지. 벌써 장님이 되었군. (원오스님은) 후려쳤다.
선지식은 병 없는 약을 잘 사용하느니라.
-한 번 죽으면 다시는 살아나지 못한다. 하루종일 무엇 때문에 졸고 있는가?
하늘을 휘젓고 땅을 더듬어 무엇 하려고?
(평창)
이 송은 덕산스님이 위산스님을 친견했을 때의 공안과 같다. 먼저 공안을 가지고 두 전어(轉語)에
착어하여 하나로 꿰어놓은 뒤에 송을 한 것이다. “이래도 ‘틀렸다‘, 저래도 ’틀렸다‘, 절대로 말하지
〔拈〕 말라” 고 하였는데, 설두스님이 말한 뜻은 이곳에서도 한 번 틀렸고, 저곳에서도 한 번 틀렸
으니 절대로 말하지 말라는 것이다. 말하면 틀린다. 모름지기 이처럼 두 번의 ‘틀렸다’는 말을
착어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해의 물결은 잔잔하며, 모든 강물에 썰물이 빠졌다”는 것은 청풍명월(淸風明月)의 경지라 하겠다.
그대가 만일 이 두 번의 “틀렸다”라는 데에서 이해할 수 있다면, 눈꼽만큼도 일삼을 것이 없을
것이다. 산은 산, 물은 물이며, 긴 것은 긴 대로, 짧은 것은 짧은 대로이다. 닷새 만에 바람 한 번
불고 열흘 만에 비 한 번 내리는 태평성대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사해의 물결이 잔잔하고 모든
강물에 썰물이 빠졌다”는 것이다.
뒤이어 마곡스님이 석장을 지녔던 것을 노래하여 “고책의 가풍이 열두 대문보다도 높다”하였는데,
옛사람은 (말을 때리는) 채찍을 책(策)이라 하지만 납승가에서는 주장자를 책(策)이라 한다. (「祖庭事
苑」에서는 古策을 鍚杖이라 하였다). 서왕모(西王母) 선녀의 요지(瑤池) 위에는 열두 개의 붉은 문이
있다고 한다. 고책(古策)이란 곧 주장자인데, 주장자로 인해 일어난 맑은 바람이 열두 대문보다도
높다는 것이다. 천자와 제석천왕(帝釋天王)이 거처하는 곳에도 각각 열두 개의 붉은 대문이 있다고
한다. 두 번의 “틀렸다”는 말을 알 수 있다면 주장자의 끝에서 빛이 발생하여 고책 또한 쓸 필요가
없을 것이다.
옛사람(분양 선소스님)의 말에 “주장자를 알면 일생에 참구했던 일〔參學事〕을 끝마친다”하였고,
또 (영가스님은) “이는 모양을 내느라 괜히 갖고 다니는 것이 아니다. 여래의 보배 지팡이를 몸소
본받음이다”고 하니, 이와 같은 유이다. 여기에 이르러서는 일곱 번 자빠지고 여덟 번 넘어지더라도
언제나 완전한 자재(自在)를 얻을 것이다.
“문마다 길 있건만, 텅 비어 쓸쓸하네” 라고 한 것은, 길이 있기는 하나 쓸쓸히 텅 비어 있을 뿐이
라는 것이다. 설두스님이 여기에 이르러 스스로의 잘못을 알고, 다시 그대들에게 이를 다 파해주었
다. 그렇지만 그래도 쓸쓸하지만은 않은 곳이 있다. 만일 작가 선지식이라면, 병이 없을 때 먼저
약을 써야 하는 법이다.
제32칙 임제의 한차례 때림〔臨濟一掌〕
(수시)
시방(十方)을 딱 끊어버리고, 일천 개의 눈이 단박에 열리고, 단 한마디로 수많은 말을 꼼짝 못하게
하니, 일만 기틀이 싹 사라진다. 생사를 함께 할 사람이 있느냐? 고스란히 드러나 있는 공안을 처리
하지 못하겠거든 옛사람들의 말을 거량해보라.
(본칙)
정상좌가 임제스님에게 물었다.
“무엇이 불법의 대의입니까?”
-많은 사람들이 여기에 이르러 어리둥절해한다. 아직도 이런 사람이 있었구나.
허허, 어설피 무슨 짓인가.
임제스님이 선상에서 내려와 멱살을 잡고서 한 차례 뺨따귀를 후려치고 대뜸 밀쳐버렸다.
-오늘 탄로났구나. 노파심이 간절하다. 천하의 납승들이 뛰어봤자 벗어나지 못한다.
정상좌가 우두커니 서 있자,
-벌써 귀신굴 속에 빠져버렸다. 빗나갔다. 콧구멍을 잃었구나.
곁에 있던 스님이 말하였다.
“정상좌야, 왜 절을 올리지 않느냐?”
-잠자코 있던 제3자가 보아버렸다. 완전히 그의 힘을 빌렸구나.
동쪽 사람이 죽었는데 서쪽 사람이 슬퍼하는구나.
정상좌가 절을 하려다가
-부지런함으로 못난 것을 때우는구나.
홀연히 크게 깨쳤다.
-어두움 속에서 등불을 얻은 듯 가난한 사람이 보배를 얻은 듯하다.
잘못에 속아서 잘못을 더해가는군. 말해보라. 정상좌는 무엇을 보았기에 갑자기 절을 올렸는가?
(평창)
그가 이처럼 곧바로 출입하고 왕래한 것을 살펴보라. 임제의 정종(正宗)이었기에 이렇게 할 수
있었다. 이를 깨칠 수 있다면 하늘을 훌쩍 뒤집어 대지를 만들고 스스로 수용할 수 있을 것이다.
정상좌는 이러한 사람이었다. 임제스님에게 한 차례 따귀를 얻어맞고 절을 하다가 대뜸 귀착점을
알았다. 그는 북방의 사람으로 기질이 아주 순박하고 강직했다. 법을 얻은 이후로 다시는 세상에
나오지 않았고, 그후 임제스님의 대기(大機)를 활용하였다. 그는 참으로 빼어난 인물이라 말할
것이다.
하루는 길에서 암두ㆍ설봉ㆍ흠산 세 스님을 만났는데, 암두스님이 물었다.
“어디에서 오시오?”
정상좌는 말하였다.
“임제에서 옵니다.”
“화상(임제스님)께서는 안녕하십니까?”
“이미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우리 세 사람이 일부러 찾아가 뵈올려고 하였더니만 복이 없어 이미 돌아가시고야 말았구려.
도대체 스님께서 살아계실 때 무슨 말씀이 있었습니까? 상좌께서는 한두 칙(則)만 거량해 주십시오.”
정상좌는 마침내 다음과 같이 거량하였다.
임제스님이 하루는 대중 설법을 하셨다.
“여러분의 몸뚱이 속에 한 무위진인(無位眞人)이 있다. 그는 항상 그대들의 얼굴을 통해 출입하고
있으니 아직 깨닫지 못한자는 살펴보아라.”
그때 어떤 스님이 나와서 물었다.
“무엇이 무위진인입니까?”
임제스님은 대뜸 스님의 멱살을 잡고서
“말해보라, 말해봐.”
하였는데 스님이 머뭇거리자, 밀어 제쳐버리고 말하기를
“무위진인이 이 무슨 마른 똥덩어리냐?”하고 곧 방장실로 되돌아가버렸다.
이에 암두스님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혀를 쑥 빼물었다.
흠산스님이 말하였다.
“왜 무위진인이 아니라고 말하지 않았을까요?”
정상좌는 그의 멱살을 움켜잡고서
“무위진인과 무위진인이 아닌 것은 얼마나 차이가 있느나?
빨리 말해라, 빨리!“ 라고 하니, 흠산스님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얼굴만 누르락푸르락 하였다. 암두스님과 설봉스님은 가까이 앞으로 다가서서 절을 올리고 말하였다.
“이 수계한 지 얼마 안되는 종이 좋음과 나쁨을 모르고서 상좌의 비위를 거슬렸으니 자비로써
용서해주시기를 바랍니다.”
“두 노장만 아니었다면 오줌도 가릴 줄 모르는 이놈을 쳐죽여버렸을 것이다.”
또 한번은 진주(鎭州)에 있을 때 재(齋)를 끝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다리 위에서 쉬다가 좌주(座主 :
강사) 세 사람을 만났는데, 그중 한 사람이 물었다.
“선하(禪河)의 깊은 곳은 모름지기 밑바닥까지 궁구해야만 한다 하는데 무슨 뜻입니까?”
정상좌가 멱살을 잡고서 다리 아래로 던뎌버리겨고 하자 두 좌주(座主)가 허둥지둥 하면서 말렸다.
“제발 그만두십시오. 이 사람이 상좌의 비위를 거슬렸으니,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두 좌주스님만 아니었다면 강바닥까지 처박어넣었을 것을…….”
그의 이러한 솜씨를 살펴보면 모두가 임제스님의 솜씨가 있었다. 그럼 설두스님의 송을 살펴보자.
(송)
단제(斷際 : 황벽)스님이 사용했던 전기(全機)를 이어받았으니
-황하는 근원부터 혼탁하다. 아들이 아비의 일을 이어받았군.
받은 것이 어찌 점잖을 리가 있을까?
-어느 곳에 있을까? 어찌 이런 사람이 있을라고, 솜씨없는 사람이 그렇게 할 수 있을까?
거령신(巨靈神)의 쳐든 손 일격에
-되게 놀라게 하네. 뽐내지 마라. (원오스님은) 불자로 한 번 탁 치고서는, 다시는 이러쿵저러쿵하지
않았다.
천만 겹의 화산(華山)이 부서졌다.
-건곤대지가 일시에 노출되었다. 떨어졌구나.
(평창)
설두스님은 “황벽스님의 전기(全機)를 이어받았으니 받은 것이 어찌 점잖을 리가 있겠느냐”라고
송했다. 황벽(黃檗)스님의 대기대용(大機代用)을 임제스님만이 바르게 계승하여 이를 드러냄에
조금치고 머뭇거리지 않았다. 혹 주저하면 바로 미혹에 떨어진다.
「능엄경」에서는 “만일 내가 손가락을 튕기면 해인삼매(海印三昧)의 광채가 나타나지만, 그대들이
잠깐이라도 마음을 쓰면 번뇌가 먼저 일어난다”고 하였다.
“거령신이 쳐든 손 일격에 천만 겹의 화산이 부서졌다.”는 것은 거령신에게는 크나큰 신통력(神通
力)이 있어, 손으로 화산(華山)을 부셔 황하(黃河)에 흘려 보낸다고 한다. 정상좌의 의심덩이〔疑情〕가
산처럼 쌓여 있었는데 임제스님에게 한 차례 따귀를 얻어맞고 얼음 풀리듯 사라져버렸던 것이다.
제33칙 자복의 일원상〔資福圓相〕
(수시)
동서를 분별하지 않고 남북을 구분하지 않아, 아침부터 저녁나절까지 저녁부터 아침나절까지 무심
하니, 이러면 그가 졸고 있다고 할 수 있을까? 그러나 어느 때는 눈빛이 유성(流星)처럼 빛나기도
하니, 이러면 그가 성성(惺惺)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어느 때는 남쪽을 북쪽이라고 하기도 한다.
말해보라. 이는 마음이 있는〔有心〕것일까? 없는〔無心〕것일까? 도인〔道人〕일까, 범인〔凡人〕일까?
여기에서 뛰어넘어야만 비로소 귀착점을 알아, 옛사람은 이러하기도 저러하기도 했음을 알 것이다.
말해보라, 이는 어떠한 상황인가? 본칙을 거량해보리라.
(본칙)
상서(尙書) 진조(陳操)가 자복(資福)스님을 떠보러 갔는데, 자복스님은 그가 오는 것을 보고
일원상(一圓相)을 그렸다.
-정령(精靈) 이 정령을 알고 도적이 도적을 안다. 만약 너그러움이 없었다면 이놈을 어떻게
알았겠는가? 금강권(金剛圈)을 알아차리겠느냐?
진조는 말하였다.
“제자가 이렇게 와서 아직 앉지도 않았는데 일원상을 그리시어 어찌하자는 것입니까?”
-오늘 졸고 있는 놈을 만났다. 이 도적놈아.
자복스님이 곧 방장실의 문을 닫아 버렸다.
-도적도 가난한 집은 털지 않는다. (자복스님은) 벌써 그의 함정에 빠져버렸다.
설두스님은 착어하였다.
“진조는 겨우 한쪽 눈만 갖추었다.”
-설두스님은 정수리에 눈을 가지고 있다. 말해보라. 그의 의도는 어디에 있었는가? 일원상을 주었더라면 좋았을 걸. (설두스님의 착어는) 명쾌하군. 용두사미구나. 당시 한 차례 내질러 진조상서가 나아
가려 해도 문이 없고 물러가려 해도 길이 없도록 했어야만 했다. 말해보라. 어떻게 내질러야 할까?
(평창)
상서 진조는 배휴(裵休)ㆍ이고(李翶)와 동시대의 사람이다. 그는 스님을 만나면 먼저 재(齋)를 청하
여 삼백 냥을 보시한 후 반드시 그를 시험해보았다. 하루는 운문스님이 와서 만나자마자 물었다.
“유교의 서적〔儒書〕에 대해서는 묻지 않겠습니다. 3승 12분교(三乘十二分敎)의 경우에는
나름대로 좌주(座主 : 강사)가 있는데, 선승들이 행각하는 일은 무엇입니까?”
“상서께서는 지금까지 몇 사람에게 이 질문을 하였습니까?”
“바로 지금 처음으로 상좌에게 묻는 것이다.”
“바로 지금은 그만두고 무엇이 교학의 뜻입니까?”
“누런 종이에다 붉은 축(軸)으로 이루어진 경전이 그것입니다.”
“이는 문자언어일 뿐이니 무엇이 교학에서 주장하는 뜻입니까?”
“입으로 말하고자 해도 말이 사라지고 마음으로 좀 궁리하고자 해도 생각이 사라져버렸습니다.”
“입으로 말하고자 해도 말을 잃어버린 것은 말이 있다고 전제 했기 때문이며, 마음으로 좀 궁리
하고자 하여 생각이 사라져버린 것은 망상을 전제로 했기 때문입이다.
무엇이 교학에서 말하는 뜻입니까?”
진조가 대답하지 못하자 운문스님은 말하였다.
“상서께서「법화경」을 본다고 하던데 그렇습니까?”
“네.”
“경(經)에 이르기를 ‘모든 일상생활에서 하는 일이 모두 실제의 모습〔實相〕과 서로 위배(違背)되지
않는다’고 하였는데, 말해보시오, 비비상천(非非想天)에 지금 몇 사람이나 자리에서 물러났습니까?”
진조가 또다시 말하지 못하자 운문스님이 말하였다.
“상서께서는 가벼이 그러지 마시오. 스님들이 삼경오론(三經五論)을 팽개치고 총림에 들어와 10년,
20년을 지내도 (깨치지 못하고) 어찌하지 못하는데 상서인들 어찌할 수 있겠습니까?”
진조는 절을 올리고 말하였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또 한번을 여러 관리들과 함께 누각에서 여러 스님들이 오는 것을 멀리서 바라보며 한 관원이
말하였다.
“오는 사람들은 모두 참선하는 스님들인가 봅니다.”
진조는 말하였다.
“그렇지 않다.”
“어떻게 아닌 줄을 아십니까?”
“가까이 다가오면 그대에게 판별해주겠다.”
스님들이 누각 앞에 이르렀을 때 진조는 갑자기 “학인스님들!” 하고 불렀다.
스님들이 머리르 쳐들자 상서는 여러 관원들에게 말하였다.
“이래도 내 말을 믿지 못하겠느냐?”
오로지 운문스님 한 명만은 진조상서가 감파하려 해도 못 했으니, 목주(睦州)스님 밑에서 참선을
하였기 때문이다.
하루는 자복스님을 떠보러 가자 자복스님이 그가 오는 것을 보고 대뜸 일원상을 그려 보였다.
자복스님은 위산스님ㆍ앙산스님 회하의 큰스님이다. 평소 상대가 사는 고장의 경치나 물건〔境致〕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방식으로 사람을 제접하기를 좋아하였다. 진조를 보자마자 일원상을 그려보였지
만 진조 또한 작가였으니 어찌할 수 있었겠는가? 그는 속지 않고 스스로 점검하여 말하였다.
“제자가 이렇게 아직 앉지도 않았는데, 일원상을 그리시어 어찌하자는 것입니까? 이에 자복스님이
문믈 닫아버렸는데, 이러한 공안을 언어 가운데에서 표적을 분별하고 구절 속에서 기틀을
감춰두었다고 한다.
설두스님은 “진조는 한쪽 눈만을 갖추었을 뿐이다”라고 말하였다. 설두스님이야말로 정수리〔頂門〕
에 일척안을 갖춘 분이다. 말해보라, 이 뜻이 어디에 있는가? 이 일원상을 주었어야만 했다. 모두
이와 같이 한다면 납승들이 어떻게 사람을 지도할까? 나는 그대들에게 묻노니, 당시에 그대가 진조
였다면 무슨 말을 했어야 설두스님에게 “그대는 한쪽 눈밖에 갖추지 못했다” 라는 말을 듣지
않을 수 있을까? 때문에 설두스님은 이를 뒤집어 송을 하였다.
(송)
둥그런 진주 구르고 옥구슬은 돌돌돌.
-석 자의 주장자로 황하를 휘젓는구나. 모름지기 푸른 눈을 가진 달마여야 할 수 있다.
무쇠로 주조했군.
말에 싣고 나귀에 얹어 철선(鐵船)을 타고는
-이 많은 것을 무얼 하려고? 어찌 한량이 있으랴. 나 원오에게도 좀 보여주지.
온 세상의 일없는 나그네에게 나누어주네.
-필요없다는 사람이 있다. 일없는 사람이라면 필요로 하지 않는다. 반드시 일이 없어야 할 것이다.
큰자라를 낚을 때에는 (낚시를 던지지 말고) 올가미를 던져라.
-왔다갔다 하니 어떻게 던질 수가 없네. 두꺼비가 걸려들면 어떻게 할까?
새우나 조개라면 어떻게 할까? 반드시 자라를 낚아야만 할 것이다.
설두스님은 다시 말하였다.
“천하의 납승이 벗어나지 못하리라.”
-몸이 안에 들어 있다. 한 구덩이에 묻어버려라! (그런 말하는 설두)스님은 빠져나올 수 있겠는가?
(평창)
설두스님은 “둥그런 진주 구르고 옥구슬은 돌돌돌. 말에 싣고 나귀에 얹어 철선을 타고는”이라고
첫머리에 곧바로 송을 하였는데, 이는 일원상을 노래한 것일 뿐이다. 이를 이해할 수 있다면 호랑이
에게 뿔이 돋는 것과 같다. ‘이것’은 모름지기 통 밑바닥이 빠지고, 기관(機關 : 덫과 관문)을 다하고,
얻고 잃음과 옳고 그름을 일시에 놓아버려야만 한다. 결코 (이러쿵저러쿵) 도리로 이해하지 않아야
하며, 현묘한 말을 늘어놓아서도 안된다. 그렇다면 결국 어떻게 이해하여야 할까? 이는 말에 싣고
나귀에 얹어 철선에 올라, 거기에서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다른 곳에서 이를 나누어주어서는
안되니, 모름지기 온 세상의 일없는 나그네에게 나누어주어야 한다. 그대들의 뱃속에 조그마한
일삼음이라도 있다면 알려고 해도 알 수 없을 것이다. 여기에서는 반드시 유사(有事)ㆍ무사(無事)와
위정(違情)ㆍ순경(順境)과 부처와 조사마저도 어떻게 할 수 없는 사람이어야 이를 알수 있다. 참구할
만한 선(禪)이 있다거나, 범부ㆍ성인을 헤아리는 생각이 있으면 이를 알려고 해도 알 수 없다.
이를 이미 알았다면, 그가 말한 “큰 자라를 낚을 때는 올가미를 던져야 한다”는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큰 자라를 낚는 데는 올가미가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풍혈(風穴)스님은,
맑은 바다에서 고래 낚는 데는 익숙하더니만
아차, 개구리 걸음으로 진흙벌 속에 허우적거리는구나.
하였으며, 또다시 한 구절을 읊었다.
큰 자라여, 삼신산을 짊어지고 가지 마오.
내 봉래산 정상을 가려 하니……..
설두스님은 다시 말하기를 “천하의 납승들이 벗어나지 못하리라”고 하였다. 만일 큰 자라라면
납승의 견해를 짓지 않을 것이며, 납승이라면 큰 자라의 견해는 짓지 않을 것이다.
제34칙 앙산의 오로봉〔仰山五峰〕
(본칙)
앙산스님이 어떤 스님에게 물었다.
“요즈음 어디에 있다 왔느냐?”
-천하 사람이 모두 (질문이) 똑같군. 그렇기는 하지만 물어봐야지. 바람결을 따라서 불을 놓는다.
평상시대로 대답해야 한다.
“여산(廬山)에서 왔습니다.”
-알찬 사람을 얻기 어렵군.
“오로봉(五老峰)을 가봤냐?”
-가느라고 어깨가 흔들리는 것은 어쩔 수 없지. 어찌 이런 잘못을 하는가?
“아직 가보지 못했습니다.”
-한 걸음 옮겼군. 얼굴을 붉히는 것은 바른 말을 하는 것만 못하다. 앞으로도 못 가고
뒤로 물러서지도 못한다.
“화상아, 아직도 산놀이를 못 했구나.”
-일삼는 것이 몹시도 많은 놈이다. 눈썹을 아꼈으면 좋으련만… 이 늙은이가 너무도 서두르는구나.
운문스님은 말하였다.
“이 말씀은 모두 자비로움 때문에 한 차원 내려서 말씀을 하신 것이다.”
-살인도 활인검이로다. (그런 말을 한 사람이) 두세 명이다. 요컨대 산에 가는 길을 알려면
반드시 갔다와본 사람이어야 한다.
(평창)
사람을 시럼하는 핵심이 되는 곳은 입만 열면 바로 알게 된다. 고인(운문스님)은 “한량없이 도량이
큰 사람은 말의 이면에서 알아차린다”고 하였다. 정수리에 안목을 갖췄다면 듣자마자 귀결점을
알 것이다. 그들의 일문일답을 살펴보면 분명하고 또렷하다. 운문스님은 무엇 때문에 “이 말씀은
모두가 자비로움 때문에 한 차원 내려서 말씀을 하신 것이라”고 하였을까? 옛사람은 여기에 이르러
밝은 거울이 경대에 걸리고 밝은 구슬이 손아귀에 있는 듯하여, 오랑캐가 오면 오랑캐가 비치고
한족이 오면 한족이 나타나며, 파리 한 마리도 거울을 도망갈 수 없다고 하였다.
말해보라, 무엇이 자비로움 때문에 한 차원 내려서 말씀하신 것인가? 이는 험준하다 하겠다.
이러한 경지에 이르러서는 모름지기 이런 자라야만 비로소 말할 수 있다.
운문스님이 염(拈)하여 말했다.
“이 스님이 몸소 여산에서 왔는데, 무엇 때문에 ‘화상아! 아직도 산놀이를 못 했구나’고 말했을까?”
하루는 위산스님이 앙산스님에게 물었다.
“여러 총림에서 어느 스님이 찾아온다면 무얼 가지고 시험하려느냐?”
“제게 시험하는 수가 있습니다.”
“그대는 말해보아라.”
“저는 평소 스님이 찾아오면 불자(拂子)를 들고서 그에게 ‘다른 곳에도 이것이 있더냐?’라고
묻습니다.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가 다시 ‘이것은 그만두고, 저것은 어떠냐?’고 말합니다.”
“이는 향상인(向上人)의 수단이다.”
듣지도 못하였느냐? 마조스님이 백장스님에게 다음과 같이 물은 것을.
“어디에서 오느냐?”
“산 아래에서 옵니다.”
“오는 길에 ‘한 사람’을 만났느냐?”
“못 만났습니다.”
“왜 못 만났느냐?”
“만났다면 스님께 바로 말씀드렸을 것입니다.”
“어디에서 이런 소식을 얻었느냐?”
“제가 잘못했습니다.”
“내가 잘못했다.”
앙산스님이 이 스님에게 물은 것도 바로 이와 같은 것이다.
“일찍이 오로봉에 가봤느냐?”고 말하였을 때 이 스님이 영리한 스님이었다면 “큰일났습니다” 라고
말했어야 할 것을, 도리어 “아직 가보지 않았다”고 하였다. 스님은 작가가 아니었는데, 앙산스님은
무엇 때문에 법대로 시행하여 많은 언어 갈등을 없애지 못하고, 도리어 “화상아! 아직고 산놀이를
못 했구나”라고 말하였을까? 그러므로 운문스님은 “이 말씀은 모두 자비로움 때문에 한 단계
낮추어서 말씀을 하신 것이다”고 하였다. 만일 한 단계 낮추지 않고 말을 하였다면 이와 같이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송)
한 단계 낮추었는지, 아닌지를
-머리 위에도 질편하고 발 아래도 질펀하다. 반쯤은 낮추고 반쯤은 올렸다. 그도 이와 같고
나도 이와 같다.
누가 식별할 줄 알랴.
-정수리에 진리를 아는 눈〔一隻眼〕을 갖추었구나. 스님은 식별할 줄 모르는구나.
흰 구름은 겹겹이 쌓이고
-천겹 만겹이다. 머리 위에 머리를 얹은 격이다.
붉은 해는 높이 솟았다.
-부서졌다. (보았다가는) 눈이 먼다. 눈을 떴다 하면 잘못된다.
왼쪽으로 돌아볼 틈도 없고
-눈먼 놈아. 여전히 할 일이 없어야지. 그대는 허다한 재주를 부려 무엇하려는가?
오른쪽으로 돌아보니 벌써 늙어버렸다.
-한 생각이 만년이로다. 지나갔다.
그대는 보지 못하였는가? 한산자(寒山子)를.
-문둥이가 짝을 끌고가는구나.
너무 일찍 길을 떠나
-빠르지 않다.
십 년이 되도록 돌아오질 못하고,
-지금은 어디에 있을까? 분명하다.
왔던 옛길마저 잊어버렸구나.
-너나 나나 자유를 얻었다. 한 수 용서해줬다. (원오스님은) 후려쳤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해서는
안되지.
(평창)
“한 단계 낮추었는지 아닌지를 누가 식별하랴”하였는데, 설두스님은 도리어 그의 귀착점을 알았던
것이다. 그는 여기에서 한번은 추켜올렸다 한 번은 깎아 내렸다 한 것이다. “흰 구름 겹겹이 쌓이고
붉은 해는 높이 솟았다”하였는데, 이는 “풀은 더부룩하고 연기는 자욱하다”는 것과 몹시 흡사하다.
여기에 이르러서는 실낱만큼 범부에 속하지 않고, 성인에게도 속하지 않는다. 온 법계에도 감추기
못하고 모두를 덮으려 해도 덮을 수 없다. 이는 이른바 ‘무심(無心)의 경계’이다. 추워도 차가운 줄
모르고 더워도 뜨거운 줄 모른다. 모두가 하나의 큰 해탈문이어서 왼쪽을 돌아볼 짬도 없고,
오른쪽을 쳐다보면 벌써 세월은 지나간다.
나찬(懶瓚)스님은 형산(衡山)의 석실(石室)에서 은거하였는데, 당(唐) 덕종(德宗)이 그의 명성을 듣고
사신을 보내어 그를 맞이하려 하였다. 사신이 석실에 이르러 “천자의 조서가 내렸으니, 스님은
일어나 성은에 감사하는 절을 올리시오”라는 명을 하였다. 나찬은 쇠똥불을 뒤척거리며 토란을 구어
먹고 추위에 떨며 콧물을 턱까지 흘리면서 대답도 하지 않았다. 사신은 웃으면서,
“우선 스님께서는 콧물부터 닦으시지요.”
라고 하자, 나찬스님이 말하였다.
“내가 어찌 속인을 위해서 콧물을 닦는 짓을 하리요.”
그는 끝끝내 일어나지 않았다. 사신이 돌아와 이 사실을 아뢰니, 덕종은 몹시 흠모하여 찬탄하였다.
그는 이처럼 맑고 고요하면서도 밝고 또렷하여, 남의 휘둘림을 받지 않고, 확실히 잡아들여 마치
무쇠로 주조한 자와 같았다.
선도(善道)스님 같은 이는 사태(沙汰)를 겪은 뒤에 다시는 승려생활을 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그를
석실행자(石室行者)라 하였다. 그는 언제나 디딜방아를 밟으면서도 밟는 것마저 까마득히 잊었었다.
어떤 스님이 임제스님에게 물었다.
“석실행자는 밟는 것마저 잊고 있으니 그 뜻은 무엇입니까?”
“깊은 구덩이에 빠져 있느니라.”
법안(法眼)스님은 원성실성송(圓成實性頌)에서 다음과 같이 노래하고 있다.
이치가 다하고 알음알이마저 잊는데
어찌 비유조차 있겠는가.
필경 서리 내리는 밤
달은 고스란히 앞 시내에 떨어지네.
과일이 익으니 원숭이 따라 살찌고
산이 깊으니 길이 아득하구나.
고개를 들어보니 낙조가 지는데
원래부터 서방에 살았었구나.
설두스님은 말하기를, “그대 보지 못하였는가 한산자를. 너무나 일찍 길을 떠나 십 년이 되도록
돌아오질 못하고, 왔던 옛길마저 잊어버렸구나”하였다. 한산자의 시에서는 이렇게 노래했다.
몸 쉴 곳을 얻고자 하는가.
한산(寒山)을 길이 보존하오.
산들바람 그윽한 소나무를 스치니
가까이 들을수록 더욱 좋아라.
그 아래 초로(初老)의 늙은이가
술술 불경을 읽는다.
십 년이 되도록 돌아가질 못하여
왔던 옛길마저 잊었어라.
영가(永嘉)스님은 이렇게 말하였다.
마음은 뿌리요 법은 티끌이니
이 모두 한낱 거울 위의 티끌이다.
티끌이 사라질 때 광명이 나타나듯
마음과 법을 모두 잊으면 본성 그대로가 참이네.
여기에 이르러서는 바보 같고 멍한 사람 같아야 이 공안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경지에 이르지
못하면 언어 속에 치달리리니, 언제 끝마칠 날이 있겠는가.
제35칙 앞도 삼삼 뒤도 삼삼〔前三三後三三〕
(수시)
용과 뱀을 구별하고 옥과 돌을 가리며, 흰 것과 검은 것을 구별하고 의심을 결단하는 데에, 만일
이마 위에 일척안이 없거나 팔꿈치 아래 호신부(護身符)가 없으면 언제나 첫머리부터 빗나가 버린다.
그저 지금 보고 듣는 것에 어둡지 않고, 성색(聲色)에 순수하며 참다우니, 말해보라, 이는 검은 것인
지 흰 것인지, 굽은 것인지 곧은 것인지를. 여기에 이르러서는 어떻게 결판을 내야 할까?
(본칙)
문수가 무착(無著)에게 물었다.
“요즈음 어디에 있다 왔느냐?”
-묻지 않을 수 없구나. 이러한 소식도 있었구나.
“남방에서 왔습니다.”
-번뇌의 굴속에서 나왔구나. 하필이면 눈썹 위에서 짐을 올려놓느냐. 허공은 원래 방위가 없는데
어떻게 남방이 있겠느냐.
“남방에서는 불법을 어떻게 수행하느냐?”
-다른 사람에게 물었다면 큰일 날 뻔했다. 이런 말을 입에 담다니…….
“말법시대의 비구가 계율을 조금 받드는 정도입니다.”
-알찬 사람이란 얻기 어렵다.
“대중이 얼마나 되는가?”
-당시에 한 번 소리지르고 내질러 거꾸러뜨려야 했다.
“삼백 명 또는 오백 명 정도입니다.”
-모조리 여우의 정령들이다. 과연 잘못을 저질렀군.
무착이 도리어 문수에게 물었다.
“여기에서는 어떻게 수행하는지요?”
-내질렀다. 창끝을 돌려대는구나.
“범부와 성인이 함께 있고 용과 뱀이 뒤섞여 있다.”
-완전히 졌다. 정신없이 허우적거린다.
“대중이 얼마나 되는지요?”
-나에게 화두를 돌려다오. 그래도 용서해줄 수는 없지.“
“앞도 삼삼〔前三三〕, 뒤도 삼삼〔後三三〕이지.”
-이랬다 저랬다 하는군. 말해보라, 얼마나 될까? (너무 많아) 천수대비(千手大悲)로서도 셈할 수
없다.
(평창)
무착이 오대산을 유람하는 도중 황량하고 외딴 곳에 이르렀다. 문수는 하나의 절을 화현(化現)시켜
그를 맞이하여 자고 가도록 했다. 그리고서는 이렇게 물었다.
“요즈음 어디에 있다 왔느냐?”
“남방에서 왔습니다.”
“남방에서는 불법을 어떻게 수행하더냐?”
“말법시대의 비구가 계율을 조금 받드는 정도입니다.”
“대중은 얼마나 되는가?”
“삼백 명 또는 오백 명 정도입니다.”
무착이 도리어 문수에게 물었다.
“여기에서는 불법을 어떻게 수행하는지요?”
“범부와 성인이 함께 있고 용과 뱀이 뒤섞여 있다.”
“대중이 얼마나 됩니까?”
“앞도 삼삼, 뒤도 삼삼이지.”
(그 뒤) 차를 마신 후 문수는 파리(玻璃) 찻잔을 들고서 말하였다.
“남방에서도 이런 물건이 있느냐?”
“없습니다.”
“평소 무엇으로 차를 마시느냐?”
무착이 아무 말도 못했다. 그리고는 하직하고 떠나려 했다.
문수는 균제동자(均提童子)에게 문 밖까지 전송해주도록 하였다. 무착은 동자에게 물었다.
“조금 전에 ‘앞도 삼삼, 뒤도 삼삼’이라고 말하였는데, 얼마나 되는가?”
“대덕이여.”
무착이 대답을 하자, 동자는 말하였다.
“‘이것’은 얼마나 됩니까?”
무착은 또 물었다.
“여기가 무슨 절인가?”
동자가 금강력사(金剛力士)의 뒤를 가르켰다. 무착이 머리를 돌리는 찰나에 동자와 화현으로 나타난
절까지 하나도 보이지 않고 오로지 텅 빈 산골짜기만 있을 뿐이었다. 그곳을 후세에 금강굴(金剛窟)
이라고 불렀다.
그후 어떤 스님이 풍혈(風穴)스님에게 물었다.
“누가 청량산(淸凉山 : 오대산의 別稱)의 진짜 주인입니까?”
“무착의 질문에 한마디도 대답 못 하고, 지금껏 노숙(露宿)하며 떠도는 스님이다.”
투철히 참구하여 무심하게 실제의 경지를 밟고자 한다면 무착의 언구(言句)에서 알아야 한다.
그러면 자연히 확탕(鑊湯)․노탄(爐炭)의 지옥에서도 뜨겁지 않고, 차가운 얼음 위에서도 추위를
느끼지 않는다. 만일 투철히 참구해 홀로 높이 금강왕 보검(金剛王寶劍)처럼 준엄하려면 문수의
말에서 알아야 한다. 그러면 자연히 물로 떠내려 보내지도 못하고 바람으로 날려보내지도 못한다.
듣지 못하였느냐? 장주(漳州)의 지장(地藏)이 어떤 스님에게 물은 말을.
“요즈음 어디에 있다 왔느냐?”
“남방에서 왔습니다.”
“그곳의 불법은 어떠한가?”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습니다.”
“내가 여기에서 밭에 씨앗을 뿌리며 주먹밥을 먹는 것만 하겠느냐?”
말해보라, 이는 문수가 대답했던 곳과 같을까, 다를까? 어떤 사람은 “무착의 대답은 옳지 않고,
문수의 대답에는 용도 있고 뱀도 있으며, 범부도 있고 성인도 있다”고 하나, 이와 무슨 관계가
있겠는가? 또한 “앞도 삼삼, 뒤도 삼삼”을 분명하게 알 수 있겠는가? 앞에 쏜 화살은 그래도 가벼운
편인데, 뒤에 쏜 화살은 깊숙히 박혔다.
말해보라, 얼마나 많은 것인가?
여기에서 깨칠 수 있다면 천 구절, 만 구절이 다만 한 구절일 뿐이다. 이 한 구절 속에서 끊어
버리고 잡아둘 수 있다면, 잠깐 사이에 이러한 경계에 이를 것이다.
(송)
일천 봉우리 굽이굽이 쪽빛처럼 푸르른데
-문수를 보았느냐?
문수와 이야기하였다고 그 누가 말할 수 있으리요.
-설령 보현보살이라도 보지 못한다. 빗나갔군.
우습구나, 청량산에는 대중이 얼마나 되느냐고?
-말해보라. 무엇이 우스운가? 이미 말 이전에 있었는걸.
앞도 삼삼, 뒤도 삼삼이로다.
-모쪼록 발 아래를 살피도록 하라. 물렁물렁한 진흙 속에 가시가 있다. 떨어진 건 주발인데
접시가 조각조각 부서졌구나.
(평창)
“일천 봉우리 굽이굽이 쪽빛처럼 푸르른데, 문수와 이야기하였다고 그 누가 말할 수 있으리요”라고
하였는데, 이에 대해 어떤 사람은 “이는 설두스님이 거듭해서 염(拈)한 것일 뿐, 송을 한 것은
아니다”라고 하였다. 이는 어떤 스님이 법안(法眼)스님에게 물은 경우와 같다.
“무엇이 조계(曹溪) 근원의 한 방울 물입니까?”
“이것이 조계 근원의 한 방울 물이니라.”
또 어떤 스님〔子璿〕이 낭야 각(瑯琊覺)스님에게 물었다.
“본래가 깨끗하거늘 어찌하여 홀연히 산하대지가 생깁니까?”
“본래가 깨끗하거늘 어찌하여 홀연히 산하대지가 생기는가?”
이것들은 결코 그저 거듭해서 염(拈)했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애꾸눈 명초 덕겸(明招德謙)스님도 그 뜻에 대해서 노래하였는데, 하늘과 땅을 덮는 기봉이 있었다.
사바세계 두루두루 훌륭한 가람
어디를 보아도 문수가 이야기를 하고 있는 곳이네
그 말에서 부처의 눈을 열 줄 모르고
돌아서서 그저 푸른 산 바위만 바라보네.
“사바세계 두루두루 훌륭한 가람”이란 잡초더미를 절로 화현 시킨 것을 가르킨 것이다.
이는 이른바 권(權)․실(實)을 모두 행하는 기용(機用)이 있다 하겠다.
“어디를 보아도 문수가 이야기를 하고 있는 곳이네. 그 말에서 부처의 눈을 열 줄 모르고, 돌아서서
그저 푸른 산 바위만 바라보네”라고 하였는데, 바로 이럴 경우 문수․보현․관음의 경계라 말할 수
있을까? 그래도 결국 말로만 이러니 저러니 한 것은 아니다. 설두스님은 명초(明招)스님의 것을
고쳐 쓰되 면밀한 점이 있다.
“일천 봉우리 굽이굽이 쪽빛처럼 푸르른데”라고 하였는데, 결코 칼 끝에 손을 다치지 않고,
구절 속에 방편과 실상이 함께 있으며, 이(理)와 사(事)가 있었다 하겠다.
“문수와 이야기하였다고 그 누가 말할 수 있으리요.”라고 하였는데, 하루 밤새껏 이야기하고서도
문수를 몰랐었다. 그후 무착이 오대산에 전좌(典座)로 있었는데, 문수는 늘 죽 끓이는 솥 위에
나타났다가, 무착이 휘두르는 죽을 젓는 주걱에 항상 맞곤 하였다. 그러나 이것도 도적이 떠난 뒤에
활을 당긴 꼴이다. 당시 그가 “남방에서는 불법을 어떻게 수행하느냐”고 말했을 때 바로 등줄기를
한 방망이 갈겼어야 그래도 조금은 괜찮은 편이었을텐데.
“우습구나, 청량산에는 대중이 얼마나 되느냐고?”했는데, 설두스님의 비웃음 속에는 칼이 있다.
이 웃음을 안다면 그가 말한 “앞도 삼삼, 뒤도 삼삼”이라는 뜻을 바로 알게 될 것이다.
제36칙 장사의 봄기운〔長沙春意〕
(본칙)
장사(長沙)스님이 하루는 산을 유림한 후 문 앞에 이르자,
-오늘 하루는 온종일 (무명의) 풀 속에 빠졌구나. 앞에서도 풀 속에, 뒤에서도 풀 속에 떨어졌구
나.
수좌(首座)가 물었다. “스님께서는 어딜 다녀오십니까?”
- 이 늙은이를 시험해봐야 한다. 화살은 저 멀리 신라로 날아갔다.
“산을 유람하고 오는 길이다.”
-풀 속에 떨어져서는 안되지. 적잖게 잘못이 드러났군. 형편없는 놈!
“어디까지 다녀오셨습니까?”
-내질렀군. 다녀온 곳이 있으면 풀 속에 떨어진다. 서로가 불구덩이로 끌고 가는구나.
“처음엔 향기로운 풀을 따라갔다가, 그리고 나서는 지는 꽃을 따라서 돌아왔느니라.”
-허물이 적지 않군. 원래 가시덤불 속에 앉아 있었지.
“아주 봄날 같군요.”
-서로 잘도 주고받네. 잘못을 인해 더욱 잘못을 저지르는군. 사람을 추켜올렸다 깎아내렸다 하네.
“아무렴, 가을날 이슬 망울이 연꽃에 맺힌 때보다야 낫지.”
-흙 위에 진흙을 더하는구나. 앞에 쏜 화살은 오히려 가벼운 편인데 뒤의 화살이 깊게 박혔다.
언제 (생사의 윤회를) 끝마칠 기약이 있겠는가?
설두스님은 착어하였다.
“대답에 감사드립니다.”
-떼거리 모두가 진흙덩이를 회롱하는 놈이다. 세 사람 모두 한 죄상으로 다스려라.
(평창)
장사(長沙) 땅의 녹원사(鹿苑寺) 초현(招賢)스님은 남전(南泉)스님의 법을 이었으며, 조주(趙州)․자호
(紫胡) 스님 등과 동시대의 인물이다. 기봉(機鋒)이 민첩하여 상대방이 교(敎)에 대해 물으면 곧 교를
말해주고, 송(頌)을 요구하면 곧 송으로 대답해주었다. 만일 작가로서 만나고자 하면 바로 작가로서
맞아주었다.
앙산스님은 평소부터 기봉에 있어서는 제일인자였다. 하루는 장사스님과 함께 달 구경을 하다가
앙산스님이 달을 가리키며 말하였다.
“사람마다 ‘이것’이 있지만 쓰지 못할 뿐이다.”
“옳지! 그것 좀 빌려서 써봤으면 좋겠다.”
“그대가 사용해보시오.”
그러자 장사가 한 발에 걷어차서 넘어뜨렸다. 앙산스님은 일어나면서 말하였다.
“사숙(師叔)께서는 마치 호랑이〔大蟲〕와 같군요.”
그 이후로 사람들은 장사를 잠대충(岑大蟲 : 높은 산의 호랑이)이라 불렀다.
하루는 장사스님이 산을 유람하고 돌아오는데, 수좌도 그 회하의 문도인터라 대뜸 물었다.
“스님께서는 어딜 다녀오십니까?”
“산을 유람하고 오는 길이다.”
“어디까지 다녀오셨습니까?”
“처음엔 향기로운 풀을 따라갔다가, 그리고서는 지는 꽃을 따라서 되돌아왔느니라.”
이는 시방의 모든 사람을 꼼짝 못하게 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옛사람들은 들고남에 있어서, ‘이 일’을 생각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그들은 빈주(賓主)로 서로 교환
하거나, 상대방의 문제의 핵심〔當機〕을 대뜸 결판을 내려 용서해주지 않았다.
이미 산을 유람한 뒤인데 무엇 때문에 “어디를 다녀오셨습니까?”고 물었을까? 만일 요즘 참선하는
사람들이었다면 “협산정(夾山亭)까지 다녀온다”고 말했을 것이다.
옛사람을 살펴보면, 실오라기만큼도 이러쿵저러쿵 헤아림이 없고, 안주하여 집착하지도 않았다.
그래서 “처음엔 향기로운 꿀을 따라갔다가 그리고서는 지는 꽃을 따라서 돌아왔다”고 말한 것이다.
수좌는 바로 그의 뜻에 맞추어, 그에게 “아주 봄날 같군요”라고 하자, 장사스님은 “아무렴 가을날
이슬 방울이 연꽃에 맺힌 때보다야 낫지”하고 말하였다. 설두스님이 “대답에 감사드립니다”고 한
것은, 그를 대신하여 끝에 가서 한마디 한 것이다. 양쪽에 있지만 결국은 양쪽에 있지 않다.
예전에 장졸(張拙)이라는 진사(進士)가 「천불명경(千佛名經)」을 보고서 장사스님에게 물었다.
“백․천의 많은 부처님에 대해서 그 이름을 들어왔습니다만은, 도대체 어느 국토에 거처하며,
또 중생을 교화하고 있는지요?”
“최호(崔顥)가 ‘황학루(黃鶴樓)’시를 써낸 이후로, 그대는 황학루에 관한 시를 써본 적이 있었는가?”
“아직 쓰지 못했습니다.”
“한가할 때 시 한 편을 써보는 것이 좋겠다.”
잠대충은 이처럼 일평생 사람을 지도함에 구슬이 구르는 듯, 그 자리에서 이해하도록 해주었다.
송은 다음과 같다.
(송)
대지엔 티끌 한 점 없는데
-문을 활짝 열어놓고 대청에 서 있는 자는 누구인가? 누구도 ‘이것’을 없앨수 없지.
천하가 태평 하다.
어느 사람인들 보려 하지 않으랴.
-이마에서 큰 광명이 쏟아져나와야 한다. 흙과 모래를 뿌려본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
처음엔 향기로운 풀을 따라갔다가,
-아주 잘못했네. 이는 한 번 풀 속에 떨어진 정도가 아니네. 다행히도 앞에서 이미 말을 했기
망 정이지…….
다시 지는 꽃을 따라서 돌아왔네.
-곳곳이 온통 참되도다. 아뿔사, 돌아왔구나. (발밑에) 진흙이 석 자나 되네.
파리한 학은 차가운 나무 위에서 발돋움하고
-이리저리 멋대로 한마디 보태는군. 더더욱 허다한 쓸데없는 일만 있네.
미친 원숭이는 옛 누대에서 휘파람을 분다.
-몸소 쓸데없이 힘을 들였기 때문이다. 한 구절을 더하려 해도 안되고 한구절을 줄이려 해도
안 된다.
장사(長沙)의 한없는 뜻이여!
-(원오스님은) 쳤다. 최후 한 구절에서 무엇을 말했을까? 한 구덩이에 묻어버렸다.
귀신의 굴 속 에 떨어졌구나.
쯧쯧!
-형편없는 놈! 도적이 떠난 뒤에 활을 당겼다. 결코 용서해줘서는 안된다.
(평창)
말해보라, 이 공안이 앙산스님이 (제34칙의 본칙에서) 어느 스님과 주고받았던 것과 같은가
다른가를.
“요즈음 어느 곳을 떠나왔느냐?”
“여산에서 왔습니다.”
“오로봉에 가 보았는가?”
“아직 못 가 봤습니다.”
“스님은 아직 산을 유람하지 못했군.”
흑백을 분별해보아라. 이는 같은가 다른가? 여기에 이르러서는 모름지기 알음알이〔機關〕를 다하고
의식(意識)을 망각하여, 산하대지와 풀과 지푸라기와 사람과 축생마저도 조금치도 흔들림이 없어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옛사람이 말한 “아직도 승묘경계(勝妙境界)에 있다”는 데 해당된다.
듣지 못하였느냐, 운문스님의 말을. “설령 산하대지와 실오라기만큼의 잘못이 없다 해도, 오히려
대상에 얽매인 말이다. 모든 색(色)을 보지 않는다 해도 겨우 반절쯤밖에 설명하지 못한 것이다.
반드시 온전히 설명해내는 시절과 향상(向上) 관문이 있는 줄을 알아야만이 비로소 편안히 앉을 수
있게 될 것이다.” 만약 이를 뛰어넘을 수 있다면 그대로 산은 산, 물은 물이다. 각각 제자리에
안주하며, 각각 본체에 해당하여, (경계에 현혹되지 않는) 완전히 눈먼 장님과 같을 것이다.
조주스님이 말하였다.
첫 닭이 울면 축시(丑時)라.
근심스러이 돌아보노니, 그저 허물투성이.
저고리와 장삼(승려다운 몸가짐)은 하나도 없고
가사(袈娑)의 그림자만 조금 남아 있구나.
잠방이에 속곳이 없고, 바지는 발 넣을 곳 없으니
머리 위 흰머리는 너덧 말이라.
본디 수행할 때는 중생을 제도코자 하였는데
그 누가 알았으랴, 도리어 어리석은 놈이 될 줄을.
참으로 이러한 경계에 이르면 어느 사람인들 눈을 뜨지 않으랴. 마음대로 엎어지고 나자빠지는
대로 두어도, 모든 곳이 다 ‘이 경계’이며, 다 ‘이 시절’이다. 시방세계에 창문〔壁落〕도 없고 사방에도
문이 없다. 그러므로 “처음 향기로운 풀을 따라갔다가, 다시 지는 꽃을 따라서 돌아왔다”고 말한
것이다. 설두스님은 매우 솜씨가 좋아서 그 좌측에 한 구절을 붙이고 우측에도 한 구절을 붙여
마치 한 수의 시처럼 이루어놓은 것이다.
“파리한 학은 차가운 나무 위에서 발돋움하고, 미친 원숭이는 옛 누대에서 휘파람 분다.” 설두스님
은 이에 이르러 스스로의 잘못을 깨닫고 얼른 말하였다. “장사의 한없는 뜻이여, 쯧쯧!” 이는 마치
깊은 꿈을 꾸다가 깨어난 것과도 같다. 설두스님이 일할(一喝)을 했지만, 아직은 철저히 끊어버리지
못한 것이다. 만일 산승이었다면 이렇게 말하질 않고, “장사의 한없는 뜻이여! 땅을 파 더욱 깊이
묻어버리리라”고 했을 것이다.
제37칙 반산의 마음을 구함〔盤山求心〕
(수시)
번개치는 듯한 기봉을 생각으로 헤아리려 한다면 헛수고이며, 허공에 내려치는 천둥소리는 귀를
막아도 되지 않는다. 머리 위로는 (적진을 향한) 붉은 깃발을 펄럭이고 귓전 뒤로는 쌍검을 돌린다.
만일 눈빛이 예리치 못하고 손이 날쌔지 못하면 어떻게 이 경지에 이를 수 있겠는가? 어떤 사람은
고개를 떨구고 오랜동안 생각하며 의근(意根)으로 헤아리지만, 해골 앞에서 무수한 귀신을 본다는
것을 참으로 모른 것이다. 말해보라, 의근에 떨어지지도 않으며 득실에 얽매이지 않고, 문득 이렇게
깨달은 사람이 있다면 어떻게 대해야 할까? 거량해보리라.
(본칙)
반산스님이 말했다.
“삼계(三界)에 법이 없는데
-화살이 활시위를 떠났으니 되돌아올 수는 없다. 달이 밝아 통금 위반자를 비추는구나. 맞혔다.
법을 아는 자만이 두려워할 줄 안다. 말하자마자 때려야 한다.
어느 곳에서 마음을 구할까?“
-사람을 속이지 말았으면 좋겠다. 수고롭게 다시 거량하지 말고 스스로 살펴보라.
(원오스님은) 문득 치면서 “이 무엇인가?”라고 했다.
(평창)
북쪽 유주(幽州)의 반산 보적(盤山寶積)스님도 마조(馬祖)스님 회하의 큰스님으로서, 뒤에 제자 보화
(普化)스님이 있었다.
스님은 임종 때 대중에게 말하였다.
“나의 초상화를 그릴 사람이 있느냐?”
대중이 모두 초상화를 그려 바치자, 스님은 모조리 꾸짖었는데, 보화스님이 대중 속에서 나오더니
말하였다.
“제가 그릴 수 있습니다.”
“왜 노승에게 바치지 않느냐?”
보화스님은 훌쩍 재주를 넘으며 나가버리니 스님이 말하였다.
“이놈이 이후로 미친 놈처럼 사람을 제접하리라.”
하루는 대중 법문을 하였다.
“삼계(三界)에 법이 없는데 어디에서 마음을 찾겠는가? 사대(四大)가 본디 빈〔空〕것인데 부처는
무엇을 의지해 안주하였느냐?” 선기옥형(璿璣玉衡 : 천문관측기인데 여기서는 마음을 비유)을
움직이지 않고 고요하여 흔적이 없다. 곧바로 드러내줄 뿐 결코 그 밖의 일이 없다.
설두스님은 두 구절을 들어 노래하였는데, 이는 제련하지 않은 금덩이 같고, 가공하지 않은 옥덩이처럼 질박하기만 하다.
듣지 못하였느냐? “병이 치료되면 많은 약들이 필요치 않다”는 말을. 산승은 무엇 때문에 “말하자
마자 쳐라”고 말하였을까? 이는 그가 형틀을 짊어진 채로 판결문을 건네주었기 때문이다.
옛사람은 말하기를 “소리 밖의 구절을 들을지언정 의식 가운데에서 구하지 말라”하였다.
말해보라, 그의 뜻이 무엇이었는가를. 이는 급류가 흐르는 듯, 칼을 휘두르는 듯, 번갯불이 치는 듯,
별이 나는 듯하다. 만일 머뭇거리며 생각하면 일천 부처님이 출세하여도 그것을 찾지 못한다.
이처럼 심오한 경지에 깊숙이 들어가 뼛속까지 사무치고 투철히 깨치면, 반산스님도 한바탕 실수를
한 것이다. 말을 이용해서 종지를 알려고 하여 좌우 종횡으로 사량분별한다면, 반산스님이 한 말이
결국 그대를 속박하는 말뚝이 될 뿐이다. 만일 언어문자나 소리나 모양으로 궁리를 했다가는 꿈속에
서도 반산스님을 보지 못할 것이다.
은사이신 오조(五祖)스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저 쪽’으로 뚫고 지나가야 자유로운 경지가 있다”
하였다. 듣지 못하였느냐? 삼조(三祖)스님의 말씀에 “집착하면 법도를 잃게 되어 반드시 삿된 길로
들어가며, 놓아버리면 자연스러워져서 본래 가고 머뭄이 없다”는 것을. 여기에서 “부처도 없고 법도
없다”고 말한다면 또한 귀신의 굴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옛사람은 이를 “해탈이라는 깊은 구덩이”
라고 말했는데, 본디 이는 원인은 좋았는데 나쁜 결과를 초래한 것이다. 그러므로 반산스님은
“하염없고 할 일 없는 사람이여, 오히려 쇠고랑차는 변을 당한다”고 하였다. 궁극적으로는 여기에
까지 이르러야 한다. 말이 없는 곳에서 말할 수 있고 행할 수 없는 데에서 행할 수 있다면,
이를 몸을 돌리는 곳이라고 한다.
“삼계에 법이 없는데, 어디에서 마음을 찾겠느냐?”고 하였는데, 그대들이 알음알이로 이해한다면
그의 말 속에서 죽게 될 것이다. 설두스님의 견처(見處)는 종횡으로 뚫려 있기에 송을 하였다.
(송)
삼계에 법이 없는데
-아이고 귀 따가워! 또 그 소리냐.
어디에서 마음을 찾을까?
-애써 거듭거듭 들먹거리지 말라. 스스로 살펴보라. (원오스님은) 치면서 말한다. 이는 무엇이냐?
흰 구름은 일산이요,
-머리 위에 머리를 얹혔다. 천만 겹이로다.
흐르는 물소리 비파소리라.
-들었느냐? 서로 장단을 잘도 주고받네. 들을 때마다 애닯구나.
한두 곡조도 아는 이 없나니
-궁(宮)․상(商)의 소리도 아니고 각(角)․치(徵)의 소리도 아니다. 남이 닦어놓은 길을 따라가는군.
오음육률(五音六律)이 모두 분명하다. 스스로 잘못을 인정하리라! 들었다가는 귀먹는다.
비 개인 밤 못엔 가을 물이 깊다.
-내리치는 우레는 귀막을 겨를이 없다. 말이 많네. 어디에 있느냐? (원오스님은) 쳤다.
(평창)
“삼계에 법이 없는데 어디에서 마음을 찾겠느냐?”는 설두스님의 노래는 마치 화엄(華嚴)의 경계와
같다. 어느 사람은 “설두스님이 무(無) 속에서 노래를 하였다”하는데, 눈꺼풀 뜬 놈이라면 이처럼
이해하지는 않을 것이다. 설두스님은 거기에 두 구절을 더하여
“흰 구름은 일산이요, 흐르는 물소리는 비파여라”하였다.
소내한(蘇內翰 : 소동파)이 조각(照覺)선사를 뵙고 송을 하였다.
시냇물 소리 장광설(長廣舌)이요,
산색인들 어찌 청정법신 아니랴.
밤 사이 팔만사천의 게송을
다른 날 어떻게 사람에게 일러줄까?
설두스님은 흐르는 물소리를 빌어 한바탕 설법을 했다. 그러므로 “한두 곡조도 아는이 없다”고
말한 것이다. 듣지 못하였느냐? 구봉 도건(九峰道乾)스님의 말을. “목숨〔命〕을 아느냐? 흐르는 물은
목숨이요, 맑고 고요한 것음 몸이며, 일천 파도가 다투어 일어나는 것은 문수의 가풍이요,
하나같이 맑은 허공은 보현의 경계이다.”
“흐르는 물소리 비파여라. 한두 곡조도 아는 이 없다”하였는데, 이러한 곡조는 모름지기 지음(知音)
이어야 알 수 있으며, 해당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부질없이 귀만 기울이고 있을 뿐이다. 옛사람은
“귀머거리가 호가(胡家)라는 노래를 부르지만, 좋고 나쁨과 높낮이를 전혀 듣지 못한다”고 하였으며,
운문스님은 “말해주어도 돌아보지 않으니 서로가 어긋났다. 이를 생각으로 헤아린다면 어느 세월에
깨닫겠는가?”라고 했다. 거량은 본체이며, 돌아보는 것은 작용이니, 말하기 이전과 조짐이 나뉘기
전에 볼 수 있다면 핵심이 되는 길목〔要津〕마저도 꽉 막을 수 있다. 만약 조짐이 나뉜 뒤에 본다면
사량분별〔意根〕에 떨어진다.
설두스님은 자비심이 대단하여 다시 그대들에게 “비 개인 밤 못엔 가을 물이 깊다”고 말해주었다.
이 송에 대해서 일찍이 어느 사람은 “설두스님에게는 한림학사의 재예(才藝)가 있다”고 찬미하였다.
“비 개인 밤 못엔 가을 물이 깊다”하니 여기에 착안하여 살펴보도록 하라.
다시 머뭇거리거나 의심한다면 찾을 수 없으리라.
제38칙 풍혈의 모쇠소〔風穴鐵牛〕
(수시)
만일 점오(漸悟)를 논한다면 참된 이치에 등지고 세속의 도리에 부합되어, 법석대는 저자에서도
횡설수설할 것이다. 돈오(頓悟)를 논한다면 조짐과 자취를 남기지 않으므로 일천 성인도 찾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돈․점을 구별하지 않는다면 어떠할까? 민첩한 사람은 말 한마디에 깨치고 날쌘 말은
한 채찍이면 된다. 바로 이러한 시절에 어느 누가 작가일까? 거량해보리라.
(본칙)
풍혈(896~973)스님이 영주(郢州)의 관아(官衙)에서 법문을 하였다.
-국가 기관의 공식적인 초청을 받아 선(禪)을 설하는군. 무슨 말을 할까?
“조사의 마음 도장〔心印〕은 무쇠소〔鐵牛〕의 기봉처럼 생겼는데
-모든 사람이 흔들어 꼼짝하지 않는다. 까다롭고 잘못된 곳이 어디에 있을까?
삼요인(三要印)을 열면서 칼끝에 다치지 않는구나.
도장을 떼면 집착하는 것이고
-바른 법으로 행하여라. 잘못됐다.
찍으면 망가진다.
-재범하면 용서치 않는다. 법대로 행할 때를 보아라. 내질러라. (원오스님은) 쳤다.
떼지도 못하고 찍지도 못하니,
-(도장을) 찍을래야 찍을 수 없는 곳을 보아라. 상당히 잘못되었다.
찍어야 옳을까 찍지 않아야 옳을까?“
-천하 사람에게는 모두 목을 내밀거나 움츠릴 자격이 있다. 모습이 이미 드러났다. 선상을 들어 뒤엎어버리고 대중을 흩어버려라.
때에 노파장로(盧陂長老)가 대중 속에서 나와 여쭈었다.
“저에게 무쇠소의 기봉이 있습니다.
-깨달았다고 착각하는 놈을 한 명 낚았다. 참으로 기특하다.
스님께서는 인가하지 마십시오.“
-좋은 이야기로다. 잘못됐는 걸 어찌하랴.
풍혈스님이 말했다.
“고래를 낚아 바다를 맑히는 데는 익숙하지만, 개구리 걸음으로 진흙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짓이야
안 하지.”
-매가 비둘기를 나꿔채듯 하였다. 보배 그물이 허공에 널려 있구나. 신구(神駒 : 풍혈스님)가
천 리를 달린다.
노파장로가 한참 동안 생각에 잠기자
-아이고 가엾어라. 그래도 빠져나올 곳은 있었구나. 용서해준 것이 아깝다.
풍혈스님이 소리지른 다음에 말하였다.
“장로는 왜 말을 계속하지 못하느냐?”
-깃발로 꺾고 북을 빼앗았다. 시끄러워지는구나.
여전히 노파장로가 머뭇거리니
-세 번이나 죽었군. 두 겹으로 된 공안이다.
풍혈스님은 불자로 한 번 치고
-잘 쳤다. 이 법령은 이러한 사람이어야만 시행할 수 있다.
말하였다.
“말할거리를 생각하느냐? 어서 말해보아라.”
-굳이 그럴 것이 있을까? 설상가상이다.
노파장로가 말을 하려고 하자
-한 번 죽으면 다시는 살아나지 못한다. 이 어리석은 녀석이 남을 죽이려고 하는군.
독한 상대를 만났다.
풍혈스님이 또다시 한차례 치니 목사(牧使)가 말하였다.
“불법과 왕법(王法)이 한가지군요.”
-명확하구나. 곁사람이 엿보아버렸다.
“그대(목사)가 무슨 도리를 보았느냐?”
-한 번 잘 내질렀다. 대뜸 창끝을 돌려대는구나.
“끊어야 할 것을 끊지 않으면 도리어 재난을 불러들이게 됩니다.”
-비슷하기는 해도 옳지는 않다. 곁에 있는 사람이 안목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죽기는 동쪽 사람이 죽었는데, 서쪽 집안 사람이 조문을 하는구나.
풍혈스님은 바로 법좌에서 내려와버렸다.
-잘못으로 인해 또 잘못을 저지르는군. 근기에 맞추어 적절하게 지도하는군.
불사(佛事) 한 번 잘 했군.
(평창)
풍혈스님은 임제스님 회하의 큰스님이시다. 임제스님이 처음 황벽스님 회하에 있으면서 소나무를
심는 즈음에 황벽스님이 말하였다.
“깊은 산 속에 소나무는 심어서 무엇 하려고?”
“첫째는 산문의 경치를 이루고, 둘째는 후인을 위한 표식을 만들려고 합니다.”
말을 마치자마자 곧 괭이로 땅바닥을 찍으니 황벽스님은 말하였다.
“그렇긴 하지만 그대는 벌써 스무방망이를 맞았느니라.”
임제스님이 다시 한 차례 찍으며 “휴-”하고 길게 탄식하자, 황벽스님이 말하였다.
“나의 종풍이 그대에게 이르러 세상에 크게 일어나리라.”
위산 철(潙山喆)스님은 말하였다.
“임제스님이 이처럼 한 것은 괜히 한 대 쥐어박는 것과 꼭 닮았다.”
비록 그렇기는 하지만 위태로운 일에 임하여 절개를 변치 않아야 참으로 장부라 할 수 있다.
황벽스님은 “나의 종풍이 그대에게 이르러 세상에서 크게 일어나리라”고 말하였는데,
이는 제새끼 귀여운 줄만 알고 잘못을 못 보는 것과 똑같은 일이다.
그후 위산스님이 앙산스님에게 물었다.
“황벽스님은 당시 임제스님 한 사람에게만 부촉하였는가, 아니면 따로이 부촉한 사람이 있느냐?”
“있긴 합니다만 먼 훗날의 일이므로 말씀드리고 싶지 않습니다.”
“그렇긴 하지만 나도 알고 싶으니 어서 말해보게나.”
“한 사람이 있어 남쪽을 가리키며 오월(吳越) 땅에서 법을 행하다가(남원스님을 지칭하는 듯),
큰 바람〔大風〕을 만나면 그치리라.” 이는 풍혈스님을 예언했던 것이다.
풍혈스님은 처음 5년 동안 설봉스님에게 참구하였는데, ‘임제스님이 승당에 들어가자 양당(兩堂)의
수좌가 똑같이 소리를 질러댔다. 어떤 스님이 임제스님에게 “빈(賓)․주(主)가 있습니까?”라고 물으니,
임제스님은 “빈․주가 분명하다”고 대답하였던 것’을 가지고 설봉스님에게 물었다.
“도대체 그 뜻은 무엇입니까?”
“내 지난날 암두․흠산 스님과 함께 임제스님을 친견하러 가는 도중에 스님이 이미 돌아가셨다는
말을 들었네(그래서 뵙질 못했다). 그러나 그의 빈․주에 대한 말을 알고 싶거든 그의 종지를 참구한
존숙이어야 알 것이다.”
풍혈스님은 그 뒤, 서암(瑞巖)스님이 항상 스스로 “주인공아!”라고 부른 후 스스로 “네!”하고 대답
하며, 또다시 “정신차려라. 앞으로는 다른 사람에게 속임을 당하지 말라”하는 것을 보고서 말하였다.
“스스로 말하고 스스로 대답하는 것에 무슨 어려움이 있겠느냐?”
그 뒤에 양주(襄州)의 녹문(鹿門)에서 곽시자(廓侍者)와 함께 여름 안거를 지냈다.
곽시자가 남원(南院)스님을 참방하라고 가르쳐주자, 풍혈스님이 찾아가 말하였다.
“입문(入門)하려면 반드시 주인을 알아야 한다. 단적으로 스님의 사람됨을 말해주시오.”
하루는 드디어 남원스님을 뵙고 앞서 설봉스님에게 물었던 바를 설명드린 후 말을 하였다.
“제가 이 때문에 일부러 찾아뵈러 온 것입니다.”
“설봉스님은 고불(古佛)이로구나.”
하루는 경청(鏡淸) 스님을 뵙자, 경청스님이 말하였다.
“요즈음 어디에 있다가 왔는가?”
“동쪽에서 오는 길입니다.”
“작은 강을 건너왔느냐?”
“큰 배는 허공을 건너가니 작은 강은 건널 수 없습니다.”
“거울 속에 비친 경치와 그림 속의 산은 새들도 건너가지 못하는 것이니, 그대는 남들이 남긴 말을
엿듣지 말라.”
“큰 바다도 전함의 위세를 겁내며, 은하수를 나는 돛단배가 오호(五湖)를 건넙니다.”
경청스님이 불자를 곧추세우며 말하였다.
“‘이걸’ 어찌하겠는가?”
“이게 뭔데요?”
“그럼 그렇지, 모르는군.”
“출몰(出沒)과 권서(卷舒)를 스님과 함께 합니다.”
“점치는 사람의 헛소리를 듣고 깊은 잠꼬대를 하는구나.”
“늪은 넓어서 산을 숨길 만하고, 이리가 표범을 굴복시킵니다.”
“죄를 용서해줄 터이니 속히 나가도록 해라.”
“나가면 잃을 것입니다.”
곧 밖으로 나와 법당에 이르러 혼자서 중얼거렸다.
“대장부가 공안을 깨치지 못했는데 어찌 그만둘 수 있으랴.”
이에 다시 방장실로 찾아가니 경청스님은 막 앉으려는 참이었는데 대뜸 여쭈었다.
“제가 조금 전에 무지한 견해로 스님을 모독하였습니다. 엎드려 바라오니 스님께서는 자비로
용서해주소서.”
“조금 전에 동쪽에서 왔다 했으니, 아마 취암(翠巖)에서 온 것이 아니냐?”
“설두스님은 보개(寶蓋)의 동편에 계십니다.”
“잃어버린 양을 쫓고 미치광이 견해를 쉬지 않고, 여기에 와서도 시편(詩篇)만 외우고 있구나.”
“검객을 만나면 모름지기 칼을 드리고, 시인이 아니면 시를 바쳐서는 안 됩니다.”
“시는 빨리 감춰두고 칼을 조금만 보여주게.”
“목을 자른 증산(甑山) 땅 사람이 칼을 가지고 가버렸습니다.”
“가르침을 따르지 않을 뿐 아니라, 스스로 어리석음을 드러내는구나.”
“가르침에 따른다면 옛 부처의 마음을 밝힐 수 있겠습니까?”
“무엇을 옛 부처의 마음이라고 하느냐?”
“거듭 용서해주십시오. 스님께서는 지금 무엇을 가지셨는지요?”
“동쪽에서 온 납자가 콩과 보리도 분간치 못하는구나.”
“아직 (생사문제를) 해결하지 못했으면서 해결했다고 하는 말만 들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정말
해결하고 해결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큰 물결은 천 길이나 용솟음쳐도 맑은 파도는 그래도 물이니라.”
경청스님이 다시 이어 말하였다.
“한 구절로 많은 생각을 끊어버리니 일만 기틀이 고요하다.”
풍혈스님이 갑자기 절을 올리자 경청스님은 불자로 세 번 친 후 말하였다.
“훌륭하구나. 자, 앉아서 차나 마시도록 하라.”
풍혈스님이 처음 남원스님의 처소에 이르러 문에 들어서도 절을 올리지 않자, 남원스님은
말하였다.
“남의 집에 가서는 주인을 알아야지.”
“스님께서는 단적으로 일러주십시오.”
남원스님이 왼손으로 한 차례 무릎을 치자, 풍혈스님이 대뜸 일갈(一喝)을 하였다.
남원스님이 오른손으로 다시 무릎을 치자, 풍혈스님은 또다시 일갈을 하였다. 이에 남원스님은
왼손을 들고서 “내가 이것을 어떻게 하리라 생각하느냐?”하고 다시 오른손을 들고서 말하였다.
“이것은 또…….”
“눈이 멀었습니다.”
이윽고 남원스님이 주장자를 집어들자 풍혈스님이 말하였다.
“무엇을 하시렵니까? 제가 주장자를 빼앗아 스님을 칠 것이니, 말하지 않았다고 하시지는
마십시오."
남원스님은 바로 주장자를 던지면서 말하였다.
“오늘 이 누렁이 절강(浙江)놈한테 한바탕 바보가 되었구나.”
“스님께서는 바리때도 없으면서 배고프지 않다고 거짓말을 하는 것과 꼭 같군요.”
“스님은 전에 여기에 온 적이 있었던가?”
“무슨 말씀입니까?”
“참 잘 물었네.”
“그래도 그냥 용서해줘서는 안되겠군요.”
“자, 앉아서 차나 마시게.”
그대들은 보아라. 준수한 사람은 스스로의 기봉이 높아 남원스님도 그를 알아보지 못하였다.
그 이튿날 남원스님이 평상시 그러듯이 물었다.
“올 여름 안거는 어느 곳에서 났는가?”
“녹문에서 곽시자와 함께 지냈습니다.”
“참된 작가를 직접 만났군.”
이어 또다시 말하였다.
“그가 그대에게 무어라 하던가?”
“시종 저더러 한결같이 주인이 되어라〔作主〕하였습니다.”
남원스님이 대뜸 몽둥이로 친 후 방장실 밖으로 밀쳐내면서 말하였다.
“이런 패배한 놈을 어디에 쓰겠는가.”
풍혈스님은 이로부터 마음에 새기고 남원스님의 회하에서 원두(園頭)소임을 보았다.
하루는 남원스님이 밭에 와서 물었다.
“남방에서는 한 방망이를 어떻게 생각하느냐?”
“기특하다고 생각합니다. 스님, 그러면 여기에서는 어떻게 생각합니까?”
남원스님이 주장자를 일으켜 세우며 말하였다.
“방망이 아래 무생법인(無生法忍)은 문제의 핵심에 직면해서는 스승에게도 양보하지 않는다.”
풍혈스님은 이에 완전히 깨쳤다.
이때는 오대(五代)의 난리를 겪는 시대였다. 영주(郢州)의 목사가 스님을 맞이하여 여름을 지내게
하였는데 이때 임제종만이 크게 성행하였다. 그의 문답과 수시(垂示)가 날카롭고 참신하여, 마치
꽃이 한군데 모여 있고 비단이 촘촘한 것처럼 말마다 모두 다 귀착점이 있었던 것이다.
하루는 목사가 스님에게 상당법문을 청하자 대중 설법을 하였다.
“조사의 심인(心印)은 무쇠소의 기봉처럼 생겼는데 도장을 떼면 집착하는 것이고 누르면 망가져
버린다. 떼지도 못하고, 누르지도 못할 경우 도장을 찍어야 옳을까 찍지 않아야 옳을까?”
이는 돌 사람〔石人〕이나 나무 말〔木馬〕의 기봉과는 다르며, 마치 무쇠소의 기봉처럼 생겨서, 그대가
흔들거나 움직이게 할 수가 없다. 그대가 도장을 떼었다 하면 도장이라는 집착이 남아 있고, 눌렀다
하면 망가져버리어 산산조각난다. 도장을 떼지도 않고 누르지도 못할 때 찍어야 옳을까, 말아야
옳을까? 이 말을 살펴보면 낚시 끝에 미끼가 있었다고 할 만하다.
그때 법좌 아래에 노파(盧陂)장로가 있었는데, 그 또한 임제스님 회하의 큰스님이었다. 감히 앞으로
나와 기봉을 겨루면서 대뜸 그에게 화두를 던져 질문을 했으니, 참으로 기특하다 하겠다. “저에게
무쇠소의 기봉이 있습니다. 스님께서는 인가하지 마십시오”라고 하였지만 풍혈스님 또한 작가인
것을 어찌하랴. 그러므로 망설이지 않고 그에게 대답하기를 “고래를 낚아 바다를 맑게 하는 데는
익숙하지만 개구리 걸음으로 진흙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짓이야 안 하지”라고 하였다.
이는 말 가운데 심금을 울리는 메아리가 담겨 있다. 운문스님도 말하기를 “사해에 낚시를 드리움은
사나운 용을 낚으려 함이요, 격식 밖의 현묘한 기봉은 지기(知己)를 찾기 위함이라”고 하였다.
큰 바다에 열두 마리의 물소(비구)를 낚시 미끼로 삼았으나 개구리 한 마리를 낚았을 뿐이다.
이 말은 현묘한 것도 없고 이러쿵저러쿵 계교함도 없다. 옛사람은 말하기를 “사(事)의 측면을
살펴보는 것은 쉽겠지만 생각〔意根〕으로 헤아리면 전혀 관계가 없다”고 하였다.
“노파장로가 한참 생각에 잠기자”라는 것은 그것을 보고서도 얻지 못하면 천 년이 되도록 다시
만나기 어려울 것이다. 애석하다. 그러므로 “일천 권의 경론을 강할 수 있어도, 한 구절의 기봉에
임해서는 입 벌리기가 어렵다”고 하였다. 실로 노파장로는 좋은 말을 찾아 대답하기 위해 (말해보라
는 풍혈스님의) 명령을 따르지 않다가, 대뜸 깃발을 꺾고 복을 빼앗는 풍혈스님의 기봉에 당해
버렸다. 완전히 핍박당해 어찌할수 없게 돼버린 것이다. 애당초 반드시 창쓰는 법을 배워두었다가
그와 겨루었어야 하니, 그대에게 가르쳐주기를 기다렸다가는 머리는 벌써 땅위에 나뒹굴게 될
것이다.
목사 또한 오랜 동안 풍혈스님 밑에서 참구하였으므로 “불법과 왕법이 한가지군요”라고 말할 줄
알았다.
풍혈스님은 말하였다.
“그대가 무슨 도리를 보았는가?”
“끊어야 할 것을 끊지 않으면 도리어 재난을 초래하게 됩니다.”
풍혈스님은 완전히 정신이 한덩어리로 되어 있었다. 그는 마치 물 위에 떠 있는 호로병과 같았다.
잡으려 하면 빠져나가고 누르면 움직여서, 근기에 맞추어 설법할 줄을 알았던 것이다. 근기에
맞추지 않았다면 도리어 허튼 말을 했을 것이다. 풍혈스님이 대뜸 법좌에서 바로 내려와버렸다.
이는 임제스님 사빈주(四賓主)의 화두와도 같다. 참선하는 사람이라면 이를 자세히 보아야 한다.
빈․주가 서로 만나면 서로 말을 주고받는 것과 같다. 혹은 사물을 빌려서 형상을 보이기도 하며,
혹은 본체를 고스란히 활용하기도 하며, 혹은 방편을 써서 웃기도 하고 노하기도 하며, 혹은 몸을
절반만 나타내기도 하며, 사자를 타고 나타나기도 하며, 코끼리를 타고 나타나기도 한다.
만일 진정한 학인이 있어 그 학인이 큰 소리를 지르면, 먼저 집착의 단지를 드러내버리되, 선지식
이 이 경계를 분별하지 못하고 그 경계 위에서 모양을 지으면, 그 학인은 또다시 큰 소리를 지른다.
그러나 선지식이 이를 기꺼이 놓아버리려 하지 않으니, 그것이 바로 불치병으로서 치유될 수 없는
것이다. 이를 ‘손님이 주인을 봄〔賓看主〕’이라 한다.
또 선지식이 아무것도 하지 않다가 그 학인이 질문하려 했던 것을 선수로 가로채버린다. 그러면
학인은 빼앗기고 말았는데도, 필사적으로 놓으려 하지 않을 것이다. 이를 ‘주인이 손님을
봄 〔主看賓〕’이라 한다.
또는 학인이 목에 칼을 쓰고 족쇄에 묶이어 선지식 앞에 나오면, 선지식은 다시 그에게 한 꺼풀
더 결박을 지어준다. 이것은 학인이 기뻐하며 피차를 분별하지 못하는 경우인데,
이를 ‘손님이 손님을 봄〔賓看賓〕’이라 한다.
대덕(大德)이여, 산승(원오스님 자신)이 이상에서 거량한 것은 모두가 마구니와 외도를 분별하여
삿된 도와 바른 도를 알게하고저 함이다.
듣지 못하였느냐? 어떤 스님이 자명(慈明)스님에게 물었던 것을.
“일할(一喝)에서 손님과 주인을 분별하고 비춤〔照〕과 작용〔用〕이 일시에 행할 때는 어떠합니까?”
자명스님은 바로 일할을 하였다.
또한 운거(雲居)의 홍각(弘覺)선사는 다음과 같이 대중법문을 하였다.
“비유하자면 사자가 코끼리를 잡을 때도 모든 힘을 다하고, 토끼를 잡을 때도 모든 힘을 다하는
것과 같다.”
그때 어느 스님이 물었다.
“도대체 무슨 힘을 다해야 합니까?”
“속임이 없는 힘이니라.”
설두스님의 송을 보도록 하라.
(송)
노파스님을 사로잡아 무쇠소에 앉혔으니
-천만 인이 모인 가운데에서 교묘한 재주를 보이려 하는군.
패배한 장수는 거듭 목을 베지 않는 법이다.
삼현(三玄)의 창과 갑옷에 가벼이 덤비지 못하리라.
-(옆에 있는 이는 정신을 차렸는데) 당사자는 어리둥절하군.
재앙을 받는 것이 복받는 것과 같다. 항복하는 것이 대적하는 것과 같다.
초왕(楚王)의 성으로 모여든 물이여!
-모여든 물을 말해 무엇 하리요, 아득히 천지에 가득하다.
사해의 바다가 그대로 거꾸러 흘렀을 것이다.
‘할’하는 소리에 거꾸로 흐르는구나.
-이 일할이 그대의 혀끝만을 끊은 것이 아니다. 쯧쯧! 협부(陜府)으 무쇠소를 깜짝 놀라
달아나 게 하고 가주(嘉州)의 큰 코끼리를 놀라게 하였다.
(평창)
설두스님은 풍혈스님에게 이러한 종풍이 있음을 알고 “노파스님을 사로잡아 무쇠소에 앉혔으니,
삼현의 창과 갑옷에 가벼이 덤비지 못하리라”고 하였다. 임제스님이 문하에는 삼현 삼요(三玄三要)가
있다. 이는 반드시 한 구절 가운데 삼현(三玄)이 갖춰 있어야 하고, 일현(一玄) 가운데 꼭 삼요(三要)
가 갖춰 있어야 한다.
스님이 임제스님에게 물었다.
“무엇이 제일구(第一句)입니까?”
“삼요(三要)의 도장을 찍으니 빨갛게 찍혔다. 주․빈을 나누려고 머뭇거리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무엇이 제이구(第二句)입니까?”
“능란한 변재로서 어찌 무착(無着)의 물음을 용납하겠는가마는 방편으로는 많은 생각을 끊는
기봉을 저버리지 않는다.”
“무엇이 제삼구(第三句)입니까?”
“장대 끝에 나불대는 꼭두각시를 보라. 모두 뒤에 있는 사람이 조종하는 것이니라.”
풍혈스님의 한 구절 속에는 삼현(三玄)의 창과 갑옷으로 무장하여, 칠사(七事 : 창․방패․활․화살․갑옷․
투구․칼)가 몸에 있으므로 가벼이 덤비지 못한다. 그렇지 않으면 노파장로를 어떻게 당해낼 수
있었겠는가?
뒤이어 설두스님은 임제스님의 기봉을 드러내고자 하였다. 이를 노파(盧陂)라고 말하지 말라.
설령 초왕의 성 언덕에 큰 파도가 아득하고 흰 물결이 하늘까지 닿아 많은 물이 모여 들어간다해도,
일할에 거꾸로 흐른다.
제39칙 운문의 황금털〔雲門金毛〕
(수시)
깨달음의 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은 범이 산을 의지한 것과 같고, 세속적인 지식만을 유포하는
사람은 원숭이가 우리에 갇힌 것과 같다. 불성의 의미를 알고저 한다면 마땅히 시절인연을 살펴
보아야 하며, 백 번 달구어 순금으로 제련코저 한다면 모름지기 작가의 풀무가 있어야 한다.
말해보라, 대용(大用)이 눈앞에 나타나는 사람은 무엇을 가지고 시험해야 할까?
(본칙)
어떤 스님이 운문스님에게 물었다.
“무엇이 청정법신(淸淨法身)입니까?”
-거름더미 속에서 장육금신(丈六金身)을 보았도다. 얼룩덜룩한 이것은 무엇일까?”
“꽃나무로 장엄한 울타리니라.”
-물음 자체가 진실치 못하니 대답도 거칠군. 이리저리 희롱하는군.
굽은 데에는 곧은 것을 간직 하지 못한다.
“이럴 때는 어떠합니까?”
-대추를 통째로 삼키고 우물거린다. 어리석게 굴어 무엇 할거냐?
“황금빛털 사자니라.”
-칭찬하기도 하고 깎아내리기도 한다. 한판의 승부에 각자가 모두 이겼군.
한 번 잘못하고 그로 인해 또 다른 잘못을 하니 이 무슨 심보인고?
(평창)
여러분은 이 스님이 물은 뜻과 운문스님이 답한 뜻을 알겠는가? 알 수 있다면 두 사람이 한 말은
모두 언어 이전의 표현이 되겠지만, 몰랐다면 어리석음을 면치 못할 것이다.
어떤 스님이 현사(玄沙)스님에게 물었다.
“무엇이 청정법신입니까?”
“고름이 뚝뚝 떨어지느니라.”
이는 금강의 눈〔金剛眼〕을 갖추어 판별해보도록 하라.
운문스님은 이 스님과는 같지 않았다. 어느 때는 (모든 방편을) 거두어들여서 마치 만 길 벼랑에
홀로 서 있어 가까이 할 곳이 없고, 어느 때는 (방편으로) 한 가닥 길을 터놓고 생사를 함께
하기도 하였다. 운문스님의 세 치 혀끝은 매우 빈틈이 없다하겠다.
어떤 사람은 “이는 주사위의 숫자에 (모든 성패를) 맡기듯이, 무심하게 대답한 것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말해보라, 운문스님의 귀착점은 어디에 있는가를. 이는 자기 자신의 일이니 바깥에서
헤아리지 말라.
그러므로 백장스님은 “삼라만상과 모든 언어를 자기에게 귀결시켜, 수레바퀴처럼 매끄럽게
운용해야 한다”고 하였다. 활발발(活發發)한 곳에서 대뜸 이르기를, “만일 여기에서 머뭇거리며
생각한다면 바로 제이구(第二句)에 떨어진다”고 하였다. 영가(永嘉)스님은 “법신을 깨달으니
한 물건도 없다. 본원(本源)의 자성(自性)이 본래의 부처이다”라고 말하였다.
운문스님은 이 스님을 시험하였으나, 스님 또한 그(운문스님) 집안 사람인 터라 원래 오래
참구했다. 집안 사정을 알고 있기에 이어서 말하였다.
“그럴 때는 어떠합니까?”
“황금빛털 사자니라.”
말해보라, 이는 그를 인정한 것일까, 인정하지 않은 것일까? 칭찬한 것일까, 깎아내린 것일까?
암두스님은 말하였다
“전쟁으로 말한다면 어디에서라도 몸을 비킬 자리에 서 있어야 한다.”
또 말하였다.
“활구(活句)를 참구해야지, 사구(死句)를 참구해서는 안된다. 활구에서 알면 영겁토록 잊지 않겠지만 사구에서 알면 자신마저 구제하지 못한다.”
또 스님인 운문스님에게 물었다.
“불법은 물 속에 어린 달 그림자와 같다 하는데, 그렇습니까?”
“맑은 파도는 뚫을 길이 없느니라.”
다가서서 물었다.
“스님께서는 어떻게 얻으셨습니까?”
“다시 물어 뭘 하겠는가?”
“이럴 때는 어떠합니까?”
“겹겹이 쌓인 멀고먼 관산(關山) 길이다.”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은 이 일은 언구에 있지 않다는 것이다. 마치 전광석화와 같아 이렇게 하든
저렇게 하든 목숨을 잃게 된다. 설두스님은 바로 그런 경지에 있는 사람이기에 곧바로 송을 하였다.
(송)
꽃울타리여!
-너무도 많이 들어 귀에 더덕지가 졌다.
어리석은 짓하지 말라.
-삼대 같고 좁쌀처럼 많다. (영리한 놈이) 조금은 있었구나. 냉큼 꺼져라!
눈금은 저울대에 있지 받침대에 있지 않다.
-말이 많네! 각각 스스로 자신에 돌이켜보라. 이러쿵저러쿵 말하였구나.
이러함이여!
-통째로 대추를 삼켰다.
전혀 잡다함이 없나니.
-냉큼 꺼져라! 분명하구나. 운문스님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황금털빛 사자를 그대들은 살펴보라.
-(그런 사람이) 한 명은커녕 반 명이나 될까? (사자는커녕) 개이다. 운문스님 또한 보주(普州 :
도 적 집단 거주지) 사람이 도적을 전송하는 격이로다.
(평창)
설두스님은 적절하게 분위기를 보아가면서 음식을 가져오라는 명령을 하듯이, 줄을 튕겼다 하면
별곡(別曲)을 연주하듯이, 한 구절 분명하게 판결을 내린다. 이 송은 염고(拈古)의 격식과 다른 점이
없다.
“꽃울타리여!” 하더니, 바로 “어리석은 짓하지 말라”고 하였다. 사람들은 모두 “운문스님은 주사위의
어떤 숫자가 나오든 개의하지 않듯이, 무심하게 대답하였다”고들 한다. 모두가 그의 뜻을 망정으로
이해하였다. 이 때문에 설두스님은 본분소식으로 “어리석은 짓하지 말라”고 하였다.
그러나 운문스님의 뜻이 “꽃 울타리”에 있지 않았기에,
“저울 눈금은 저울대에 있지, 받침대에 있지 않다”고 한 것이다.
이 한 구절을 참으로 잘못 알고 있다. 물 속에는 원래 달이 없고 달은 하늘에 있듯이,
저울 눈금은 저울대에 있지 받침대에 있지 않다. 말해보라, 무엇이 저울대인가를.
이를 분별하여 밝힐 수 있다면 설두스님의 뜻을 저버리지 않을 것이다.
옛사람(설두스님)은 여기에 이르러서 자비로써 분명히 그대에게 말하기를 “여기에 있지 않고
저기에 있다”하였다 말해보라, 저기는 어느 곳인가를. 이는 첫 구절에서 이미 노래하였으며, 뒤이어
그 스님이 “그럴 때는 어떻게 합니까?”라고 말한 데 대해서, “전혀 잡다함이 없다”고 노래하였다.
말해보라, 이는 밝은 것일까, 어두운 것일까? 알고서 이처럼 말했을까, 모르고서 말했을까?
“황금빛털 사자를 그대들은 살펴보라”하였는데, 황금빛털 사자를 보았느냐? 태양과 같아서 정면으로
보았다가는 눈이 먼다.
제40칙 남전의 뜰에 핀 꽃〔南泉庭化〕
(수시)
쉬고 또 쉬어버리니 무쇠나무〔鐵樹〕에 꽃이 핀다. (그런 사람이) 있느냐, 있느냐?
총명한 녀석이라도 벌써 손해를 본다. 설사 종횡무진 자재하여도 그는 콧구멍(급소)이 뚫릴 것이다.
말해보라, 까다로운 곳이 어디에 있는가를. 거량해보리라.
(본칙)
육긍대부(陸亘大夫)가 남전(南泉)스님과 대화를 하는 즈음, 육긍대부가 말하였다.
“조법사(肇法師)는 ‘천지는 나와 한 뿌리며, 만물은 나와 한 몸이라’고 하였는데,
매우 이해하기 어렵군요.”
-귀신의 굴 속에서 살림살이를 하는군. 그림의 떡으로 주린 배를 채우지 못한다.
이는 (번뇌의) 풀 속에서 헤아림이로다.
남전스님이 뜨락에 핀 꽃을 가리키며
-무슨 말을 하는가? 쯧쯧, 경전에는 경전의 스승이 있고, 논(論)․서(書)에는 논을 잘하는 스승이
있으니, 산승의 일과는 상관이 없다. 쯧쯧! 대장부가 대뜸 일전어(一轉語 : 상황을 뒤집어놓는
한마디)를 했더라면 남전스님을 절단냈을 뿐 아니라, 천하의 납승들까지 기운이 빠졌을 것이다.
대부를 부르더니, “요즘 사람들은 이 한 포기의 꽃을 마치 꿈결에 보는 것과 같이 하느니라”라고
했다.
-원앙 지수는 보여주되, 금바늘은 사람에게 주지 말라. 잠꼬대하지 말라.
노란 꾀꼬리가 (꽃의 아름다움에 끌려) 버들가지에 내렸다.
(평창)
육긍대부는 남전스님을 오래 참례하였다. 평소 이치의 세계에 마음을 두고 깊이 「조론(肇論)」을
연구하였다. 하루는 앉아 있다가 이 두 구절이 의심스러워 물은 것이다.
“조법사(肇法師)의 말에 ‘천지는 나와 한 뿌리며 만물은 나와 한 몸이라’고 하였는데 매우 이해하기
어렵군요.”
조법사는 후진(後晋) 시대의 고승으로서 도생(道生)․도융(道融)․도예(道叡) 스님과 함께 구마라집
(鳩摩羅什) 문하의 사철(四哲)로 일컬어진다.
어린 시절엔 「장자」와 「노자」를 탐독하고 그 뒤 고본(古本) 「유마경(維摩經」을 베껴쓰다가 깨친
바 있어 「장자」와 「노자」에는 참된 진리가 없음을 알고, 여러 경전을 종합하여 네 편의 논문을
저술하였다.
「장자」․ 「노자」에서는 천지란 큰 형체를 갖고, 나의 형체도 또한 그와 같아, 모두 허무(虛無)의
한가운데서 태어났다고 한다. 「장자」의 대의는 만물이란 본질적으로 똑같다〔齊物〕는 것을 논했을
뿐이지만, 조공(肇公)의 대의는 만물의 자성이란 모두가 자기에게로 귀결된다는 점을 논하였다.
듣지 못하였느냐? 「반야무명론」에서는 “지극한 사람「至人」은 텅텅 비어 형상이 없어서 만물이란
나에 의해 만들어지지 않는 것이 없다. 만물을 모두 모아 자기로 삼는 자가 어찌 성인뿐이겠는가?”
라고 하였다. 신(神)․사람․현인․성인이 각기 다르지만 모두가 같은 성품과 같은 바탕을 지녔다.
옛사람(덕산 연밀스님)의 말에 “온 건곤의 대지가 나 하나에 갖추어져 있을 뿐이다. 추우면 온 천지
가 모두 춥고, 무더우면 온 천지가 모두 무더우며, 있으면 온 천지에 널리 있고 없으면 온 천지에
전혀 없으며, 옳으면 천지가 모두 옳고, 그릇되면 온 천지가 모두 그릇된다”고 하였으며, 법안(法眼)
스님은 “그는 그가 그이고, 나는 내가 나이다. 동서남북이 모두 옳다고 하건 옳지 않다고 하건,
다만 나만이 옳지 않은 것이 없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천상천하에 나 홀로 존귀할 뿐이다”라고
말한 것이다. 석두(石頭)스님은 「조론」을 보다가 “만물을 모두 모아 자기로 삼는다”는 구절에 이르러
크게 깨치고 그 뒤 「참동계(參同契)」를 저술하였는데, 그 또한 이 뜻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그의 이같은 물음을 살펴보건대, 말해보라, 무슨 뿌리가 같으며 어느 바탕과 같은가를. 이쯤 되면
기특하다고 할 만하다. 이는 여느 사람들이 하늘은 높고 땅은 두텁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과 같은가?
그렇다면 어떻게 이러한 일이 있었을까? 육긍대부의 이러한 물음은 매우 기특하기는 하지만 교학의
이치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만일 교학의 이치를 지극한 법「極則」이라 한다면, 세존께서는 무엇
때문에 영산회상(靈山會上)에서 꽃을 들어 보이셨으며, 또한 달마조사는 왜 서쪽에서 왔겠는가?
남전스님은 납승의 급소로 아픈 곳을 끄집어내어 그의 집착을 타파해주었다. 뜨락에 핀 꽃을
가리키며 대부를 부르면서, “요즈음 사람들은 이 한 포기의 꽃을 마치 꿈결처럼 본다”고 하였다.
이는 마치 만 길 벼랑 위에서 사람을 떨어뜨려 목숨을 잃어버리게 하는 것과 같다. 그대들이 아무
것도 아닌데서 거꾸러진다면 미륵 부처님이 하생(下生)한다 해도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다. 이는
꿈속에서 꿈을 깨려 해도 깨지 못하다가 곁의 사람이 부르는 소리에 깨어나는 것과 같은 일이다.
남전스님의 안목이 바르지 못했다면, 분명 그에게 휘말렸을 것이다. 남전스님의 이러한 말을 살펴
보면 매우 이해하기 어렵다. 만약 안목이 살아 움직이는 자가 듣는다면, 으뜸가는 제호(醍醐)의 맛과
같겠지만, 죽은 자가 듣는다면 도리어 독약이 될 것이다.
옛사람의 말에 “만일 사(事)의 측면에서 이해하면 상정(常情)에 떨어지고, 생각〔意根〕으로 헤아리면
끝내 찾을 수 없다”고 하였다. 암두스님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이는 향상인(向上人)의 살림살이이다. 눈 앞에 조금만 내보였는데도 번갯불이 스치는 것과 같다.”
남전스님의 본뜻 또한 이와 똑같다. 호랑이를 사로잡고 용과 뱀을 가려낼 줄 아는 솜씨가 있었다.
여기에 이르러서는 반드시 스스로가 알아야 한다. 듣지 못하였느냐? 끝없이 초월하는 길 〔向上一路〕
은 일천 성인이 전하지 못했는데, 배우는 이들이 애쓰는 꼴은 마치 물 속에 어린 달그림자를
잡으려는 원숭이와 같다는 말을.
설두스님의 송을 살펴보도록 하라.
(송)
듣고 보고 느끼고 아는 것이 따로따로가 아니고,
-삼라만상이란 한 법도 없다. 산산조각이 나버렸구나. 안․이․비․설․신․의가 모두 구멍 없는 철추로다.
산과 물의 경관이 거울 속에 있지 않다.
-나의 여기에 이러한 것은 없다. 긴 것은 긴 대로, 짧은 것은 짧은 대로, 푸른 것은 푸른 대로,
누런 것은 누런대로……. 그대들은 어디에서 볼 것인가?
서리 내린 하늘에 달은 지고 밤은 깊은데
-그대들을 끌고서 (번뇌의) 풀 속으로 들어가버렸군. 온 세계에 감출 수는 없다.
절대 귀신의 굴속에 머무르려 하지 말라.
누구와 함께 하랴, 맑은 연못에 차갑게 비치는 그림자를.
-(그럴 사람이) 있느냐, 있느냐? 한 침상에서 잠자지 않았다면 이불 밑이 뚫렸음을 어떻게 알까?
근심에 젖은 사람은 근심하는 사람에게 말하지 말라. 근심하는 사람에게 말하면 근심만 더하게
할 뿐이다.
(평창)
남전스님이 잠꼬대를 조금 했더니 설두스님은 큰 잠꼬대하네. 꿈을 꾸긴 했지만 좋은 꿈이었구나.
앞에서는 모두가 같다고 하더니만 여기에서는 같지 않다고 말하네. “듣고 보고 느끼고 아는 것이
따로따로가 아니며, 산과 물의 경관이 거울 속에 있지 않다”고 하였다. 만일 거울 속에 있는 산하를
구경한 뒤에야 깨칠 수 있다고 말한다면, 거울이라는 것을 여의치 못한 것이다. 산하대지와 초목
총림을 거울로써 비춰보지 말라. 거울로써 비춰보면 바로 두 개가 되는 것이다. 오로지 산은 산,
물은 물로서, 모든 법이 법의 제자리에 안주하고, 세간의 모습이 항상 그대로 있을 뿐이다.
“산하의 경관이 거울 속에 있지 않다”고 하였는데, 말해보라, 무엇으로 비춰봐야 할까? 알겠느냐?
이렇게 되자 “서리 내린 하늘에 달은 지고 밤은 깊은 데”로 향하였다. 여기서는 그대와 함께 하였지
만, ‘저쪽’은 그대 스스로가 헤아려야 한다. 설두스님이 본분의 일〔本分事〕로써 사람을 지도하였음을
알겠느냐?
“누구와 함께 하랴, 맑은 연못에 차갑게 비치는 그림자를”하였는데 이는 스스로 비춰봄인가, 아니면
다른 사람과 함께 비춰 봄인가? 모름지기 움직이는 마음〔機心〕과 알음알이〔知解〕를 끊은 뒤에야
이러한 경계에 이를 수 있다. 이제는 맑은 연못도 필요치 않으며, 서리 내린 하늘에 달이 지기를
기다릴 필요도 없다. 지금은 어떤 경지일까?
불과원오선사벽암록 권제4
제41칙 조주의 크나큰 죽음〔趙州大死〕
(수시)
시비가 서로 얽힌 곳은 성인도 알 수 없고, 역순(逆順)이 교차 할 때는 부처 또한 분별하지 못한다.
뛰어난 절세(絶世)의 인물이어야만, 무리 가운데 빼어난 보살의 능력을 발휘하여, 얼음 위에서
걷기도 하며 칼날 위를 달린다. 이는 마치 기린의 뿔과 같으며 불 속에 피어난 연꽃과 같다.
시방을 벗어났다는 것을 뚜렷이 봐야만 비로소 같은 길을 걷는 자임을 알 것이다.
누가 이처럼 솜씨 좋은 사람일까? 거량해보리라.
(본칙)
조주스님이 투자(投子)스님에게 물었다.
“완전히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났을 때는 어떠합니까?”
-이러한 일이 있었구나. 도적도 가난한 집은 털지 않는다. 타관살이에 익숙해야만 길손을 가련히
여길 줄 안다.
투자스님은 말하였다.
“야간통행하지 말고 날이 밝으면 가거라.”
-적의 망루(望樓)를 보고 망루를 공격한다. 도적이 도적을 아는군. 같은 침상에 눕지 않았다면
이 불 밑이 뚫렸음을 어떻게 알겠는가?
(평창)
조주스님이 투자스님에게 물었다.
“완전히 죽었던 사람이 다시 살아났을 때는 어떠합니까?”
“야간통행하지 말고 날이 밝거든 가거라.”
말해보라, 이는 어떠한 시절인가를. 구멍 없는 피리에서 나는 소리가 방음판에 부딪치는 것과 같다.
이는 ‘주인을 시험하는 물음〔驗主問〕’이라고도 하며, ‘수작을 거는 물음〔心行問〕’이라고도 한다.
투자스님과 조주스님은 총림에서는 뛰어난 변재라고 찬미하였다. 두 노장들의 법사(法嗣)는 다르지만
그들의 기봉은 한가지였다.
하루는 투자스님이 조주스님을 위하여 찻자리를 마련하여 마주하게 되었다. 손수 떡을 조주스님
에게 건네주었으나 조주스님은 조금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투자스님이 행자를 시켜 조주스님에게
떡을 주도록 하자, 조주스님은 행자를 향하여 세 차례 절을 하였다. 말해보라, 그 뜻이 무엇인가를.
그를 살펴보면 모두가 근본 자리에서 본분의 일을 들어 사람을 지도한 것이다.
어떤 스님이 투자스님에게 물었다.
“무엇이 도(道)입니까?”
“도이니라.”
“무엇이 부처입니까?”
“부처니라.”
“자물쇠가 열리지 않았을 때는 어떠합니까?”
“열려 있다.”
“천지가 아직 생기지 않았을 때 〔金鷄未鳴時〕는 어떠합니까?”
“그런 소리는 없다.”
“천지가 생긴 뒤에는 어떠합니까?”
“저마다 시간을 알겠지.”
투자스님의 평소의 문답이 다 이와 같았다.
조주스님이 “완전히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났을 때는 어떻게 합니까?”고 묻자, “야간통행하지 말고
날이 밝거든 가거라”라고 대답했다. 이는 마치 전광석화와 같으니 향상인(向上人)이어야 이처럼
할 수 있다. 완전히 죽은 사람에게는 불법이라 할 것도, 현묘이니 아니니 할 것도, 시비․장단도
전혀 없다. 여기에 이르러서는 그저 쉴 뿐이다.
옛사람(운문스님)은 이를 “아무것도 아닌 데서 죽은 사람이 수도 없이 많다. 가시덤불을 지날 수
있어야만이 좋은 솜씨이다”라고 했다. 모름지기 ‘저곳’을 뚫고 지나가야 할 것이다. 그렇지만 요즈음
사람은 이런 상태에 이르러서는 뚫고 가기 어렵다. 만일 의지하거나 알음알이로 이해한다면 이와는
전혀 관계가 없다. 이를 위산 철(潙山喆)스님은 “견해가 말쑥하지 못한 것”이라 하였고, 은사이신
오조(五祖)스님께서는 “명근(命根)이 끊어지지 않은 것”이라 하였다. 모름지기 완전히 한 번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야 한다.
절중(浙中)의 영광(永光)스님은 말했다. “언어의 기봉이 조금만 어긋나도 고향가는 길은 천리만리
멀어진다. 모름지기 깎아지른 벼랑에서 손을 놓아야만 스스로 알아차릴 수 있다. 죽었다가 다시
소생하는 도리 그대를 속일 수 없고, 뛰어난 종지 뉘라서 숨길〔廋〕수 있겠는가?”
조주스님의 물음도 이와 같았으며, 투자스님은 작가로서 그의 물음을 저버리지 않았다. 이는 정식
(情識)과 자취를 끊어버린 것이니 참으로 알기 어렵다. 그러나 이는 그저 눈앞에 조금만 내보인
것이다. 그러므로 옛사람은 “간절하게 얻으려 한다면 묻지말라. 물음은 답에 있고, 답은 물음에
있다”라고 했던 것이다.
투자스님이 아니었다면 조주스님의 질문을 받고, 응수하기 매우 난처했을 것이다. 그는 작가이기에
듣자마자 귀착점을 알았던 것이다. 송은 다음과 같다.
(송)
살아 있는 가운데 안목을 갖추었건만, 도리어 죽은 것과 같고
-둘이 서로 모른다. 엎치락뒤치락 하는구나. 만일 마음이 넓지 못하다면 어떻게 흰지 검은지를
분별하겠는가?
함께 먹어서는 안 될 약으로 어찌 작가를 감별(鑑別)하려 하느냐?
-시험해보지 않았다면 분명한 것을 어떻게 가려냈겠느냐?
시험삼아 감별해 보는 것이 나쁠 게 있느냐. 반드시 물어봐야 한다.
옛 부처도 오히려 이르지 못했다고 하는데,
-다행히도 짝이 있었기 망정이지. 모든 성인도 전하지 못했고, 산승도 모르는 일이다.
어느 누가 티끌 모래를 뿌리는가?
-지금도 적지 않다. 눈을 떠도 집착, 감아도 집착이다.
스님이 이처럼 거량하였는데 귀착점이 어 디에 있을까?
(평창)
“살아 있는 가운데 안목을 갖추었건만 죽은 것과 같다”고 하였는데, 설두스님은 (‘이것’이) 있는
줄 아는 사람이었기에 감히 이처럼 노래했던 것이다. 옛사람(덕산 연밀스님)이 말하기를 “그는 활구
(活句)를 참구했지. 사구(死句)를 참구하지 않았다”하였고 설두스님은 “살아 있는 가운데 안목을
갖추었건만 도리어 죽은 듯하다. 어찌 죽었겠는가? 죽은 가운데 안목을 갖춘 것이 마치 살아 있는
사람과 같다”고 하였다. 옛사람(운문스님)은 “죽이려면 깡그리 사람을 죽여야 산 사람을 보게 되고,
살리려면 사람을 깡그리 죽여야 죽은 사람을 본다”고 하였다.
조주스님은 살아 있는 사람이었기에, 죽은 물음으로 투자스님을 시험했던 것이다. 약을 복용할
때에 함께 먹어서는 안되는 약을 가지고, 고의로 시험한 것과 같다. 그러므로 설두스님은 “함께
먹어서는 안되는 약으로 어찌 작가를 감별하려 하느냐?”고 하였다. 이는 조주스님의 질문을 노래한
것이며, 뒤이어 “옛 부처도 오히려 이르지 못했다고 하는데”라는 것은 투자스님을 노래한 것이다.
완전히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난 경지는 옛 부처도 일찍이 이르지 못하였고, 천하의 큰스님들도
일찍이 이르지 못했다. 이는 비록 석가 노인이나 파란 눈 달마라도 거듭 참구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늙은 오랑캐가 알았다고 할 수는 있으나 깨쳤다고는 할 수 없다”고 하였다.
설두스님은 “어느 누가 티끌 모래를 뿌리는가”라고 하였는데, 듣지 못하였느냐? 어떤 스님이
장경(長慶)스님에게 “무엇이 선지식의 안목입니까?”라 하자, 장경스님은 “모래를 뿌리지 않았으면
좋겠다”라고 했고, 보복(保福)스님은 “결코 뿌려서는 안되느니라”고 하였다. 천하의 노스님들이 선상
(禪床)에 앉아 방(棒)과 할(喝)을 행하며 불자를 세우고 선상을 쳐서, 신통을 나타내고 나름대로의
견해를 세우는 것은 모두가 모래를 뿌리는 일이다. 말해보라, 어떻게 해야 이를 면할 수 있는가를.
제42칙 노방의 잘 내리는 눈〔老龐好雪〕
(수시)
혼자서 제창하고 홀로 희롱하여도 흙탕물을 끼얹는 것이요, 북치고 노래하기를 혼자서 모두 하더
라도 은산철벽(銀山鐵壁)이다. 이리저리 궁리했다가는 해골 앞에서 귀신을 볼 것이며, 찾으며 생각
하면 캄캄한 산 아래 떨어지리라. 밝고 빛나는 태양은 하늘에 솟아 있고, 소슬한 맑은 바람은 온
누리에 가득하다. 말해보라, 옛사람에게도 잘못된 곳이 있었는가를. 거량해보자.
(본칙)
방거사(龐居士)가 약산(藥山)스님을 하직하자,
-이 늙은이가 이상한 짓을 하는구나.
약산이 열 명의 선객(禪客)에게 문 앞까지 전송하도록 하였다.
-그를 소홀히 해서는 안되지. 이것은 무슨 경계일까. 모름지기 근원을 아는 납승이어야 할 수
있을 것이다.
거사는 허공에 날리는 눈〔雪〕을 가리키며 말하였다.
“멋진 눈! 송이송이 딴 곳으로 떨어지지 않는구나.”
-바람도 없는데 괜히 풍랑을 일으키는구나. 손가락 끝에 눈동자가 있다.
이 늙은이 말 속에 공감 할 만한 게 있구나.
이때에 선객 모두가 곁에 있다가 말하였다.
“어느 곳으로 떨어집니까?”
-맞혔군. 말에 끌어오는구나. 그럼 그렇지. 낚시에 걸려들었군.
거사가 따귀를 한 차례 치자
-제대로 한 수 놨다. 그럼 그렇지, 도적이 집안을 망쳤군.
선객 모두가 말하였다.
“거사는 거칠게 굴지 마시오.”
-널 속에서 눈알을 부릅뜨는군.
“그대가 그래 가지고서도 선객이라 한다면 염라대왕이 용서해 주지 않으리라.”
-두 번째 더러운 물을 끼얹어버렸다. 꼭 염라대왕뿐이겠는가?
산승이라도 여기에서는 용서해주지 않았을 것이다.
“거사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거친 마음을 고치지 않은 걸 보니 다시 몽둥이를 맞아야겠구나.
이 스님이 처음부터 끝까지 알아채질 못하는군.
거사가 또다시 따귀를 친 후에 말하였다.
-과연 설상가상(雪上加霜)이로구나. 몽둥이를 맞았으니 실토를 하시지.
“눈은 떴어도 장님 같으며 입을 벌려도 벙어리같다.”
-다시 둘 사이를 화합시켜 주는 말이 있었구나. 그에게 판결문을 읽어주는군.
설두스님은 다르게 논평하였다.
“처음 물었을 때 눈덩이를 뭉쳐서 바로 쳤어야지.”
-옳기는 옳지만 도적이 떠난 뒤에 활을 당겼구나. 적잖게 허물이 있구나. 그렇지만 화살 끝이
서로 맞부딪치는 것과 같은 기묘함을 살펴보아야 한다. 귀신 굴 속에 떨어져버린 것을 어찌하랴.
(평창)
방거사는 마조스님과 석두스님의 두 처소를 참방한 후 송을 하였다.
처음 석두스님을 뵙고 대뜸 물었다.
“만법과 짝하지 않으니, 이는 어떤 사람입니까?”
말이 끝나기도 전에 석두스님이 입을 틀어막는 바람에 약간 깨친 바 있었다. 그래서 송을 지었다.
날마다 하는 일이 다른 것이 없어
나 스스로 마주칠 뿐이네.
사물마다 취하고 버림이 없고
곳곳마다 펴고 오무릴 것이 없나니.
붉은 빛 자주빛을 뉘라서 분별하리
청산에 한 점 티끌마저도 끊겼노라.
신통과 묘용이란
물 긷고 나무하는 것이구나
그 뒤에 마조스님을 참방하고 또 물었다.
“만법과 짝하지 않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그대가 서강(西江)의 물을 한입에 다 마셨을 때 그대에게 말해주겠네.”
거사는 크게 깨치고 송을 하였다.
사방으로부터 함께 모여와서
모두 하염없는 법을 배운다.
여기가 바로 부처를 뽑는 시험장이니
마음을 비워야 급제하여 고향가리라.
그는 작가 선지식이었기에 많은 총림에서 서로 우러러 바라고, 이르는 곳마다 다투어 칭찬하였다.
약산에 이르러 머문 지 오래되어 마침내 약산스님을 하직하니, 약산스님은 그를 존경하여 선객 열
사람으로 하여금 그를 전송하도록 하였다. 이때 마침 눈이 내리자 거사는 눈을 가리키며 말하였다.
“멋진 눈! 송이송이 딴 곳으로 떨어지지 않는구나.”
이어 선객들이 일제히 말하였다.
“어느 곳으로 떨어집니까?”
거사는 대뜸 그의 따귀를 후려쳤다. 이는 선객들이 이미 법령을 시행하지 못했기 때문에, 거사가
반쯤 시행한 것이다. 비록 지금 법령을 시행하긴 했지만 모든 선객이 이처럼 응수한 것은 (설두스님
의) 의도를 몰라서 그랬던 것이 아니다. 기봉을 방거사와 다르게 사용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거사의 경지에는 이르지 못했기에 그의 기합소리에 얼어서 그의 보살핌〔#101〕을 벗어나기
어려웠던 것이다.
거사는 그의 따귀를 후려친 후 다시 말하였다.
“눈을 뜨더라도 장님처럼 하고 입을 벌리더라도 벙어리처럼 한다.”
설두스님은 이 말에 대해 다른 측면에서 논평을 했다.
“처음 물었을 때 눈덩이를 뭉쳐 바로 후려쳤어야지.”
설두스님이 이처럼 말한 것은 방거사가 한 질문의 핵심을 저버리지 않고저 함이었으나, 기봉이
늦고 말았다. 경장주(慶藏主)는 말하기를, “거사의 기봉은 번갯불 치듯 하는데 눈덩이를 뭉치려고
한다면 어느 시절에 되겠는가! 말하자마자 바로 조처를 취해야 하고, 말하자마자 바로 쳐버렸어야
끊어버릴 수 있다”고 하였다. 설두스님은 그가 때렸던 행위를 송하였다.
(송)
눈덩이로 쳐라, 눈덩이로 쳐라.
-제이의 기봉에 떨어진 것을 어쩌랴. 수고롭게 말할 것 없다. (번뇌의 풀더미가) 머리 위로
질펀하고 발 아래도 질펀하다.
방노사의 기관(機關)은 잡을 수 없어라.
-거의 사람들이 모른다. 그렇지 못할까 염려스러울 뿐이다.
천상․인간도 전혀 모르나니,
-이 무슨 소식일까? 설두스님은 알까?
눈 속, 귓속까지 끊긴 듯 맑고 시원하여라.
-화살 끝이 서로 마주치는 듯 (절묘하다). 눈이 있으나 봉사 같고 입이 있으나 벙어리 같구나.
씻은 듯 끊김이여,
-무엇일까? 어디에서 늙은 방거사와 설두스님을 볼 수 있을까?
파란 눈 달마스님이라도 알아차리기 어려우리.
-달마스님이 나오면 뭐라고 말할까? (원오스님은) 치면서 말한다.
(설두)스님 무슨 말을 하십니 까? 한 구덩이에 묻어버려라.
(평창)
“눈덩이로 쳐라, 눈덩이로 쳐라. 방노인의 기관을 잡을 수 없다”고 하였는데, 설두스님은 거사의
머리 위에서 놀려고 하는 것이다. 옛사람이 눈〔雪〕으로써 평등 무차별의 세계를 밝힌 것이다.
설두스님의 뜻은 “당시 눈을 뭉쳐 던졌더라면, 거사가 제 아무리 수완〔機關〕이 있다 하더라도
벗어나기 어려웠을 것이다”라는 것이다. 설두스님은 그가 따귀를 친 것을 칭찬했지만 손해가
있었다는 사실을 몰랐다.
“천상․인간도 전혀 모르나니, 눈 속, 귓속까지 끊긴 듯 맑고 시원하여라”하였는데, 눈〔眼〕속에도
눈〔雪〕, 귓속에도 눈〔雪〕이라는 것이니, 이는 평등한 상태에 머문 것이다. 이를 ‘보현경계(普賢境界)
의 절대평등’이라 하기도 하고 또는 ‘한 덩어리가 됐다’라고도 한다.
운문스님은 말하였다.
“곧바로 온 천하에 실오라기만큼 허물이 없다 해도 오히려 외물에 휘둘리는 것이며, 한 경계도
보지 않았다 해도 겨우 반쯤 제창한 것이다. 온전히 제창하려 한다면 반드시 끝없이 초월하는
길〔向上一路〕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여기에 이르러선 눈앞에 대용(大用)이 나타나 바늘로 찔러도 들어가지 않고 남의 명령에 놀아
나지도 않아야 한다. 그러므로 “그는 활구를 참구하지, 사구를 참구하지 않는다”고 한 것이다.
옛사람이 말하기를 “한 구절의 깨달은 말일지라도 만겁토록 속박하는 말뚝이로다.
무슨 쓸모가 있겠는가?”라 했다
설두스님이 이쯤에 노래를 마치고 다시 기틀을 돌려, “씻은 듯 끊김이여, 파란 눈 달마라도 알아
차리기 어려우리”하였으니, 달마스님이라도 분별하기 어렵다는데 산승더러 무얼 말하라고…….
제43칙 동산의 더위와 추위〔洞山寒署〕
(수시)
하늘과 땅을 구별하는 듯한 말들은 만세토록 모두 받들겠지만, 범과 외뿔소를 사로잡는 기틀은
많은 성인들도 알아차릴 수 없다. 당장에 실오라기만큼의 가리움이 없으면 완전한 기틀이 도처에
그대로 나타나게 된다. 향상(向上)의 겸추(鉗鎚)를 밝히고저 한다면 작가의 용광로이어야 한다.
말해보라, 예로부터 이러한 기풍이 있었는지를. 거량해보리라.
(본칙)
어떤 스님이 동산스님에게 물었다.
“추위와 더위가 다가오는데 어떻게 피하시렵니까?”
-(나 원오에게는) 그런 시절이 없다. 온통 다 그렇다. 어느 곳에 있을까?
“왜 추위도 더위도 없는 곳으로 가지 않느냐?”
-천하인이 찾아도 찾지 못한다. 몸은 숨겼지만 그림자가 나타났다.
소하(簫何)라는 사람이 거짓으 로 은성(銀城)을 팔아먹는 것과 같구나.
“추위와 더위가 없는 곳이 어디입니까?”
-한 배에 탄 모든 사람을 모조리 속이는군. 동산스님의 말에 놀아나는군. 낚시에 걸려들었구나.
“추울 때는 스님을 춥게 하고 더울 때는 스님을 덥게 한다.”
-진실은 거짓을 가리지 못하고 굽은 것은 곧음을 감추지 못한다. 벼랑에 임하여 범과 외뿔소를
보았으니 괜히 한바탕 근심스럽겠다. 큰 바다를 뒤엎어버리고 수미산을 걷어차버렸다.
말해보아라, 동산스님이 어디에 있는가를.
(평창)
황룡 오신(黃龍悟新)스님이 이를 염(拈)하였다.
“동산스님은 소매 끝에 옷깃을 달고 겨드랑 아래 옷섶을 튼(보통 옷을 입었지만) 이 스님이 이해하
지 못한 데야 어찌하랴. 지금 어느 사람이 황룡스님에게 묻는다면, 말해보라, 그가 어떻게 왔을까?”
한참 동안 말없이 있다가 말을 이었다.
“선(禪)을 함에는 굳이 산수(山水)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마음이 사라지면 불은 저절로 시원해진다.”
여러분은 말해보라. 동산스님의 올가미가 어디에 있는가를. 이를 분명하게 알 수 있다면 동산스님
의 오위(五位) 및 정(正)․편(偏)으로 번갈아가며 사람을 제접하는 것을 알게 되리라. 이와 같은 향상의
경계에 이르러야만 요리조리 궁리하지 않고서도 자연히 잘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바름〔正〕 가운데 치우침〔偏〕이여!
삼경의 초저녁 밝은 달 앞에서
만나서도 알아보지 못한 것을 달리 생각마오.
남 몰래 지난날의 유감을 품고 있네.
치우침 가운데 바름이여!
날이 밝자 노파는 옛 거울을 마주하여
자세히 얼굴보니 결코 참됨이 없네.
다시는 머리가 없다고 거울 속을 잘못 보지 마오.
바름〔正〕 가운데 옴〔來〕이여!
없음 〔無〕 가운데 길이 있어 티끌먼지 벗어나니
오늘날 입 조심만 하면
전조(前朝)에 혀잘린 선비보다 훌륭하리라.
치우침〔偏〕 가운데 이르름〔至〕이여!
두 칼날이 서로 부딪쳐도 피할 필요가 없다.
좋은 솜씨란 불 속에 피어난 연꽃 같으니,
뚜렷이 충천하는 기개를 지니셨구려.
겸하는〔兼〕 가운데 다다름〔到〕이여!
유무에 떨어지질 않는데 누가 감히 조화하랴.
사람마다 보통사람에서 벗어나려 한다면
서로가 숯 속으로 들어가버리리라.
부산(浮山)의 원록공(遠錄公)은 이 공안으로 오위(五位)의 격식을 삼았는데, 이 가운데에서 한 칙만
알아도 나머지는 저절로 쉽게 알 수 있다. 암두스님은 “이는 물위에 떠 있는 호로병처럼 자유자재
하니 건드리기만 하면 그대로 움직이니 결코 털끝만큼의 힘도 들지 않는다”하였다.
언젠가 어떤 스님이 동산스님에게 물었다.
“문수와 보현이 찾아올 때, 즉 이(理)와 사(事)가 동시에 나타날 때는 어떻게 하시렵니까?”
“무소떼(수행승) 속으로 달려가겠다.”
“스님께서는 쏜살처럼 지옥으로 들어가신 것입니다.”
“모두 그 무소떼(수행승)의 덕분이지.”
동산스님의 “무엇 때문에 추위와 더위가 없는 곳으로 가지 않느냐?”는 것은 치우침 가운데 바름〔偏
中正〕이며, 스님이 “어느 곳이 추위나 더위가 없는 곳이냐”고 묻자, “추울 때는 스님을 춥게 하고
더울 때는 스님을 덥게 한다”는 말은 바름 가운데 치우침〔正中偏〕이다. 이는 정위(正位)이면서도
편위(偏位)이며, 편위이면서도 원위(圓位)이다. 이는 「조동록(曹洞錄」에 자세히 실려 있다.
그러나 임제스님의 문하에서는 잡다한 것이 없다. 이런 공안이란 대뜸 알아야 한다. “추위와 더위가
없어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는데, 핵심에서 벗어난 말이다. 옛사람은 “칼날 위에서 알아차리면
빠르지만 정식(情識)으로 헤아렸다가는 늦는다”고 하였다.
듣지 못하였느냐? 어떤 스님이 취미(翠微)스님에게 묻는 말을.
“조사가 서쪽에서 오신 뜻이 무엇입니까?”
“사람이 없거든 말해주리라.”
취미스님은 말을 마치고 밭으로 들어가 버렸는데 그 스님이 말하였다.
“여기에는 아무도 없습니다. 스님께서는 말씀해주십시오.”
취미스님은 대나무를 가리키면서
“이 대나무는 이처럼 크게 자랐고 저 대나무는 저처럼 작구나”라는 말에 스님은 크게 깨쳤다.
또 한번은 조산(曹山)스님이 어떤 스님에게 물었다.
“이처럼 무더운 날씨에 어디에서 피서를 하려느냐?”
“확탕․노탄 지옥에서 하겠습니다.”
“확탕․노탄 지옥에서는 어떻게 피서를 하겠느냐?”
“전혀 괴롭지 않습니다.”
저 집안 사람들을 보아라. 자연히 저 집안 사람들의 말을 알게 될 것이다.
설두스님은 저 집안의 일로써 송을 하였다.
(송)
(남을 지도하는) 손을 드리우면 그대로 만 길 벼랑과 같으니
-작가가 아니고서야 어찌 구별할 수 있겠으며 원융할 수 있겠는가? 임금의 명령이 발포되니
제후가 길을 피한다.
굳이 정위이니 편위이니를 따질 것이 있겠는가.
-만일 이러니저러니 따졌다가는 어떻게 (깨닫는) 오늘이 있을 수 있겠는가? 어찌하여 양쪽을
다 관계하지 않는가? 바람이 부니 풀잎이 쓰러지고, 물이 흘러오니 도랑이 이뤄진다.
옛 유리궁전에 비치는 밝은 달이여!
-동그랗구먼. 절대 그림자를 오인하지 말고, 머리 위에 있는 저것이 달이라고 오인하지 말라.
우습구나, 영리한 사냥개〔韓獹〕 가 괜스레 섬돌을 오른다.
-이번 뿐만 아니다. 잘못 빗나가버렸군. 흙덩이를 좇아가 무엇하려고. (원오스님은) 치면서 말했다.
(설두스님) 그대도 그 객스님과 똑같이 잘못했구먼.
(평창)
조동스님의 문하에서는 세간에 나왔으니, 나오지 않았느니 하는 말〔出世不出世〕이 있으며, 방편으
로 지도를 해준 것이느니 아니니 하는 말〔垂手不垂手〕이 있다. 세간에 나오지 않으면 하늘을 우러르
지만, 세간에 나오면 벌써 더러운 재묻고 흙묻는 꼴이다. 하늘을 우러르는 것은 곧 만 길 봉우리에
서 있는 것이며, 머리에 재가 묻고 얼굴에 흙이 묻는 것은 이러쿵저러쿵 지도를 한 꼴이다.
어느 때는 머리에 재 묻고 얼굴에 흙묻은 채로 만 길 봉우리에 서기도 하고, 어느 때는 만 길
봉우리에 선 것이 곧 머리에 재가 묻고 얼굴에 흙이 묻는 꼴이다. 그러나 실은 저자에 들어가
방편을 부린 것이나 높은 봉우리에 홀로 서 있는 것은 매한가지이다. 본원으로 돌아가 성품을
깨친 것과 세간의 지혜〔差別智〕는 차이가 없으니, 이를 서로 다르다고 알아서는 안된다.
그러므로 “손을 드리우면 그대로 만 길 벼랑과 같다”고 하였다. 이는 곧 발 붙일 곳이 없는 것이다.
“굳이 정위이니 편위이니 따질 것이 있겠는가”라 한 것은, 작용할 때 저절로 이와 같이 되는 것이지
이리저리 따져서 그렇게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는 동산스님의 대답을 노래한 것이다.
뒤이어 말한 “옛 유리궁전에 비치는 밝은 달이여! 우습게도, 영리한 사냥개가 괜스레 섬돌을
오른다”는 것은, 바로 이 스님이 말에 휘둘리는 것을 노래한 것이다.
조동종에서는 “애 못낳는 여자〔石女〕․나무로 만든 말〔木馬〕․밑빠진 바구니〔無底籃〕․야명주(夜明珠)․죽
은 뱀〔死蛇〕 따위의 18가지의 얘기가 있다. 이는 대부분 정위(正位)를 밝힌 것이다.
옛 유리궁전에 비치는 달은 둥그런 그림자가 있는 듯하다.
동산스님은 “왜 추위나 더위가 없는 곳으로 가지 않느냐?”고 대답했는데, 이는 그 스님이 마치
사냥개가 흙덩이를 좇아가는 것처럼 연거푸 섬돌을 오르락거리며 달 그림자를 잡으려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또다시 “추위와 더위가 없는 곳은 어디냐?”고 묻자, “추울 때는 스님을 춥게 하고, 더울 때는
스님을 덥게 한다”고 말하였다. 이는 사냥개가 흙덩이를 좇아간 것처럼 섬돌 위로 달려가 보았으나
달 그림자를 보지 못한 것과 같다.
사냥개〔韓獹〕는 「전국책(戰國策」에서 나온 이야기로써, 거기에 이르기를 “한씨(韓氏)의 개는 날쌔고
중산(中山)의 토끼는 교활하였다. 한씨의 개만이 그 토끼를 잡을 수 있었다”고 하였다.
설두스님은 이를 인용하여 그 스님을 비유한 것이다.
여러분은 동산스님이 사람을 제접한 속뜻을 아는가? (원오스님은) 말없이 한참 동안 있다가
말하였다. “토끼는 찾아서 뭐하려고?”
제44칙 화산의 북을 치는 뜻〔禾山打鼓〕
(본칙)
화산(禾山)스님이 법어를 하였다.
“익히고 배우는 것을 들음〔聞〕이라 하고, 더 배울 것이 없는 것을 (도에) 가까움〔鄰〕이라 한다.”
-천하의 납승들이 벗어나지 못한다. 구멍 없는 쇠망치로다. 무쇠말뚝이군.
이 두 가지를 초월해야만이 참된 초월이라고 한다.
-정수리에 외알눈을 달고서 무엇 하려고?
스님이 다가와서 물었다.
“어떤 것이 참 된 초월입니까?
-무슨 말을 하느냐? ×표를 그어버렸다. 한 개의 무쇠말뚝이 있다.
“(나는) 북을 칠 줄 알지.”
-쇠말뚝, 쇠가시다. 튼튼하구나.
“무엇이 참다운 이치〔眞諦〕입니까?”
-무슨 말을 하느냐? 두 겹으로 된 공안이다. 또 하나의 무쇠말뚝이 있다.
“북을 칠 줄 알지.”
-쇠말뚝, 쇠가시다. 튼튼하다.
“마음이 바로 부처〔卽心卽佛〕라는 것은 묻지 않겠습니다.
마음도 아니고 부처도 아니다〔非心非佛〕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무슨 말을 하느냐? 구(坵)․급(扱)․퇴(堆)의 글자의 모양이 서로 다르군. 또 하나의 무쇠말뚝이다.
“북을 칠 줄 알지.”
-쇠말뚝. 쇠가시다. 튼튼하다.
“향상인(向上人)이 찾아오면 어떻게 하시렵니까?”
-무슨 말을 하느냐? 네 바가지씩이나 더러운 물을 뒤집어썼구나. 또 한 개의 무쇠 말뚝이 있다.
“북을 칠 줄 알지.”
-쇠말뚝, 쇠가시다. 튼튼하다. 말해보라. 요지가 무어냐? 아침에 서천에 갔다가
저녁에 동토(東土)로 되돌아왔다.
(평창)
화산스님이 설법하여 말하기를 “배우고 익히는 것을 들음〔聞〕이라 하고, 더 배울 것이 없는 것을
(도에) 가까움이라 한다. 이 두 가지를 초월해야만이 참된 초월이라 한다”하였다. 이 칙(則)의 말은
「보장론(寶藏論)」에서 나왔다.
학문이 더 배울 것이 없는 데〔無學〕에 이른 것을 학문을 끊었다〔絶學〕고 한다. 그러므로 “얕게
듣고서도 깊게 깨치는 것도, 깊게 듣고서도 깨치지 못하는 것도 ‘학문을 끊었다’고 한다”하였다.
일숙각(一宿覺) 영가스님은 “나는 어릴 때부터 학문을 쌓았으며 또한 일찍이 주소(注疏)와 경론
(經論)을 탐구하였다”고 하였다. 익히고 배우는 것을 다하였을 때 그것을 일러 배울 것이 없는
하염없이 한가한 도인〔無爲閑道人〕이라 한다. 더 배울 것이 없는 경지에 이르러야 바야흐로
도에 가까워진다. 바로 이두 배움과 배울 것이 없는 것을 초월하는 것을 참된 초월이라 한다.
그 스님도 꽤나 총명하다 하겠다. 스님이 이 말을 들어 화산스님에게 묻자 화산스님은 “북을
두드릴 줄 알지”라고 하였다. 이는 이른바 ‘아무 맛도 없는 본바탕의 맛’을 말한 것이다. 공안을
밝히려면 반드시 끝없이 초월해가는 사람〔向上人〕이어야, 이 말이 이치와도 관계없고 따져볼 수도
없는 것임을 비로소 알게 된다. 마치 통 밑바닥이 빠져버린 것처럼 되리라. 바로 이 자리가
납승이 이르러야 할 곳이며, 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에 계합하는 곳이다.
그러므로 운문스님은 말하였다.
“설봉스님의 공 굴림〔輥毬〕과 화산스님의 북 두드림〔打鼓〕과 혜충국사의 수완(水碗)과 조주스님의
차 마심〔喫茶〕은 모두가 향상을 제창한 것이다.”
또 “어떤 것이 참다운 이치〔眞諦〕입니까?라고 묻자, 화산스님은 ”북을 두드릴 줄 알지“라고 하였다.
참다운 이치에서는 결코 하나의 법도 세우지 않았지만, 세속의 이치가 서로 다르지 않음을 아는
것이 으뜸가는 뜻〔聖諦第一義〕이다. 또다시 ”마음이 곧 부처라 함은 묻지 않겠습니다. 마음도 아니고
부처도 아니라는 것은 무엇입니까?”라고 묻자, “북을 두드릴 줄 알지”하였다. 마음이 곧 부처라 함은
알기 쉬워도 마음도 아니고 부처도 아닌 경지에 이르기는 어렵다. 여기에 이른 사람은 적다.
또다시 “향상인이 찾아왔을 때는 어떻게 하시렵니까?”라고 묻자, “북을 칠 줄 알지”하였다.
향상인이란 곧 사무치게 초탈하여 말끔한 사람이다. 이 네 구절의 말을 총림에서는 종지(宗旨)로
여겼으니, 이를 화산스님의 네 차례 북 두드림〔禾山四打鼓〕이라고 한다.
어떤 스님이 경청(鏡淸)스님에게 물었다.
“새해에도 불법이 있습니까?”
“있느니라.”
“무엇이 새해의 불법입니까?”
“정월 초하룻날이 되니 만물이 모두 새로웁다.”
“대답해주셔서 고맙습니다.”
“노승이 오늘은 손해를 보았군.”
이 대답은 마치 18종의 손해를 본 것과 같다.
또 어떤 스님이 정과(淨果)스님에게 물었다.
“높은 소나무에 학이 서 있을 때는 어떠합니까?”
“수치스런 곳에 발이 빠진 꼴이지.”
“모든 산에 눈이 뒤덮였을 때는 어떠합니까?”
“해가 돋아 난 뒤에는 한바탕 수치니라.”
“회창(會昌) 연간의 불법 사태를 겪을 때 호법선신(護法善神)은 어디로 가버렸습니까?”
“삼문(三門) 밖 두 놈이 창피를 당했다.”
이를 총림에서는 “세 번의 창피「三忄麽忄羅」”라고 말한다.
또 보복(保福)스님이 어떤 스님에게 물었다.
“이 법당 안에는 어떤 부처님이 모셔져 있는가?”
“스님께서 직접 보십시오.”
“석가부처님이구먼.”
“사람을 속이지 마십시오.”
“도리어 그대가 나를 속인 것이다.”
다시 그 스님에게 물었다.
“그대의 이름은?”
“함택(咸澤)입니다.”
“혹시 (그 연못이) 바싹 메말랐을 때는 어떠한가?”
“누가 마르게 합니까?”
“내가 말리지.”
“스님은 사람을 속이지 마십시오.”
“도리어 그대가 나를 속였다.”
다시 그 스님에게 물었다.
“그대는 무슨 업을 지었기에 그처럼 덩치가 큰가?”
“스님께서도 작지 않습니다.”
보복스님이 몸을 웅크리는 시늉을 하자, 스님은 말하였다.
“스님께서는 사람을 속이지 마십시오.”
“도리어 그대가 나를 속였다.”
한번은 (보복스님이) 목욕탕 소임을 보는 스님에게 물었다.
“목욕탕 가마솥 크기가 얼마나 되는가?”
“스님께서 직접 재보십시오.”
보복스님이 재보는 시늉을 하자, 목욕탕 소임을 보는 스님이 말하였다.
“스님께서는 사람을 속이지 마십시오.”
“도리어 그대가 나를 속였다.”
총림에서는 이를 보복스님의 네 번 속임〔四瞞人〕이라 말한다.
이와 함께 설봉스님의 네 개 칠통〔四漆桶〕의 경우도 모두가 예로부터 큰 스님이 각각 심오하고
오묘한 종지를 드러내어 수행인들을 제접한 기연들이다.
설두스님은 뒤이어 이중의 하나를 인용하여, 운문스님의 설법을 빌어서 이 공안을 송하였다.
(송)
한 사람은 연자방아를 끌고
-천하 제일인 천자의 칙명이다. 문둥이가 짝을 이끌고 간다. 향상인이란 이렇구나.
또 한 사람은 흙을 나른다.
-야전사령관의 명령이다. 두 죄인을 한꺼번에 처벌하라. 동병상련(同病相憐)이구나.
대기(大機)를 드러내려면 천 균(鈞)짜리 활이어야만 한다.
-삼 만 근이라 해도 뚫지 못하리라. 경솔하게 답변해서는 안되지. 죽은 두꺼비가 돼서야 안되지.
일찍이 상골산(象骨山) 노스님(설봉스님)이 공을 굴렀다지만
-그래도 이렇게 한 사람도 있었구나. 구멍 없는 쇠망치이다. 누가 그걸 모르랴?
화산(禾山)스님이 북을 칠 줄 안다는 것만 같겠느냐.
-쇠말뚝이다. 반드시 늙은이어야 할 수 있다. 한 자식(설두스님)만이 몸소 (그 도리를) 얻었구나.
그대에게 알리노니,
-설두스님 또한 아직 꿈에도 보지 못했다. 설상가상이로구나. 그대는 아는가?
제멋대로 해석하지 말라!
-이 한마디가 있구나. 그러나 미련하고 미련하군.
단 것은 달고 쓴 것은 쓰다.
-말씀에 감사드립니다. 주각(注脚)을 잘못 달았군. 좋게 삼십 방망이는 주어야지.
방망이를 맞을 수 있느냐? (원오스님은) 치면서 말했다. 여전히 캄캄하군.
(평창)
하루는 대중의 운력으로 연자방아를 돌릴 적에 귀종(歸宗)스님이 유나(維那)에게 물었다.
“어디로 가는가?”
“연자방아를 끌려고 갑니다.”
“연자방아야 네 마음대로 돌리겠지만 중심에 꽂혀 있는 나무꼭지는 흔들리지 않도록 하게.”
목평(木平)스님은 처음 찾아온 스님이 있으면 먼저 세 삼태기의 흙을 운반하도록 하였는데,
목평이 송을 지어 대중 법문을 하였다.
동산의 길은 비좁고 서산은 낮으니
새로 온 사람은 세 삼태기의 흙 나르는 일을 사양하지 말라.
아- 그대들이 오랜동안 길에 머물러
밝고 밝으나 깨닫지 못하여 도리어 미혹하였구나.
뒷날 어떤 스님이 물었다.
“세 삼태기 안의 일은 묻지 않겠습니다만 세 삼태기 밖의 일은 어떠합니까?”
“철륜천자(鐵輪天子)가 천하에 내린 칙명이니라.”
스님이 아무런 대답이 없자, 목평스님은 후려쳤다.
그리고서는 “한 사람은 연자방아를 끌고 또 한 사람은 흙을 운반한다”고 말했다.
“대기(大機)를 드러내려면 천 균(鈞)의 활이어야만 한다”는 것은, 설두스님은 이 대화를 삼만 근
쇠뇌로 비유하여 그가 수행인을 지도했던 것을 내보여주려고 한 것이다. 30근은 일 균(一鈞)이니
천균이란 삼만 근이다. 사나운 용과 호랑이와 맹수에게나 이 큰 활을 쏠 수 있지, 뱁새처럼
자그만 짐승에게 가벼이 쏘아서는 안된다. 그러므로 삼만 근 활로 생쥐를 쏠 수 없는 것이다.
“상골산 노스님도 일찍이 공을 굴렸다”는 것은, 설봉스님이 하루는 현사(玄沙)스님이 찾아오는
것을 보고 세 개의 나무 공을 일제히 굴렸었다. 현사스님이 공을 도끼로 찍는 시늉을 하니, 설봉
스님은 그를 매우 칭찬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비록 모두가 전기대용(全機大用)이긴 하나 화산스
님의 해타고(解打鼓)만은 못한 것이다. 이는 매우 간결하고도 핵심을 찌른 것〔徑截〕이므로 이해
하기 어렵다. 그래서 설두스님은 “화산스님의 북 칠 줄 안다는 것만 같겠느냐”고 한 것이다.
또한 사람들은 말을 가지고 살림살이를 하며 그 유래를 모르고 멋대로 해석할까 염려하셨기에
“그대에게 알리노니 제멋대로 해석하지 말라!”고 하였다. 이는 반드시 이러한 경지에 실제로
이르러야만이 할 수 있는 것이다. 만약 제멋대로 이러쿵저러쿵 하지 않으면 “단 것은 달고 쓴 것은
쓴 것”이다.
설두스님이 이처럼 문제제기〔拈〕를 했지만 결국 (화산스님의 올가미를) 뛰어넘지는 못하였다.
제45칙 청주에서 지은 삼베적삼〔靑州布衫〕
(수시)
말하고자 하면 바로 말을 하나니 온 세상에 둘도 없는 사람이요, 행하려면 곧 행하나니 전기(全
機)를 휘두름에 남에게 사양하지 않는다. 이는 마치 전광석화와 같아 기염보다도 빠르고 바람보다
빨라 세찬 물에서도 칼을 가로지른다. 향상의 겸추(鉗鎚)를 들더라도 칼이 소용없고 혀가 묶이는
것을 면하지 못하겠지만, 한 가닥 (방편의) 길을 놓아주어 거량해보리라.
(본칙)
어떤 스님이 조주스님에게 물었다.
“일만 법이 하나로 돌아가는데 그 하나는 어느 곳으로 돌아갑니까?”
-이 늙은이를 내질러보았으나 산처럼 꼼짝도 않는구나. 절대로 귀신 굴 속에서 살림살이를
해서는 안된다.
“내가 청주(靑州)에 있을 때 무명 장삼 한 벌을 만들었는데, 그 무게가 일곱 근이더라.”
-예상했던 대로 종횡무진하는구나. 하늘을 뒤덮는 그물을 쳤다. 조주스님의 뜻을 보았느냐?
일찍이 납승의 급소를 움켜쥐었군. 조주스님의 귀착점을 알았느냐? 이를 볼 수 있다면 천상천하에
나만이 홀로 존귀할 것이다. 물이 흐르니 강이 만들어지고 바람이 부니 풀잎이 휩쓸린다.
만약 그렇지 못하면 노승(조주스님)이라도 그대의 발밑에 있으리라.
(평창)
만일 일격(一擊)에 대뜸 갈 곳을 알면 천하 큰스님들의 급소를 일시에 뚫어버리더라도 그대를
어찌할 수 없으리라. 자연히 물이 흐르면 강을 이루겠지만, 그렇지 못한다면 조주 노승이 발밑에
있을 것이다.
불법의 핵심은 번잡스러운 언어 속에 있지 않다. 이는 마치 그 스님이 조주스님에게 “만법은
하나로 돌아가는데 그 하나는 어느 곳으로 돌아가느냐?”고 묻자, “내가 청주에 있으면서 무명 장삼
한 벌을 만들었는데 그 무게가 일곱 근이더라”하고 말한것과 같다. 만일 어구(語句)에서 이를 분별
한다면 저울 눈금을 잘못 읽은 것이며, 그렇지만 어구에서 분별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이처럼 말을
할 수 있었을까?
이 공안은 보기〔見〕는 어려워도 알기〔會〕는 쉬우며, 알기는 쉬워도 보기는 어렵다. 어렵기로
는 은산철벽이요, 쉽기로는 곧바로 뚜렷하여 계교한다거나 시비할 수가 없다. 이 말은 보화(普化)
스님의 “내일 대비원(大悲院)에서 재(齋)가 있다”라는 말과 전혀 다를 바 없다.
하루는 어떤 스님이 조주스님에게 물었다.
“조사가 서쪽에서 오신 뜻이 무엇입니까?”
“뜰 앞의 잣나무니라.”
“스님께서는 경계를 가지고 설명하지 마십시오.”
“노승은 경계를 가지고 설명한 적이 없다.”
그가 이처럼 말한 것을 살펴보면, 궁극의 꼼짝할 수 없는 자리에서 한 번 꿈쩍하여 자연스럽게
천지를 덮었다고 하겠다. 만일 몸을 비끼지 못한다면 이르는 곳마다 막히게 될 것이다.
말해보라, 불법이 어떠니 저떠니 하는 헤아림이 조주스님에게 있었는가를. 만약 그가 불법을
헤아렸다 한다면 그는 무엇 때문에 심성(心性)을 말하고 현묘(玄妙)를 말하였을까? 그가 만약 불법
이니 종지니 하는 헤아림이 없다고 한다면, 그는 결코 그대의 물음을 저버리지 않은 것이다.
듣지 못하였는가? 어떤 스님이 목평(木平)스님에게 물었다.
“어떤 것이 불법의 대의입니까?”
“겨울 오이가 이토록 크구나.”
또 어떤 스님이 고덕(古德 : 歸宗)스님에게 물었다.
“깊은 산, 가파른 벼랑처럼 전혀 사람의 자취가 끊긴 곳에도 불법이 있습니까?”
“있지!”
“어떤 것이 깊은 산속에 있는 불법입니까?”
“돌멩이가 큰 것은 크고 작은 것은 작지.”
이러한 공안을 살펴보라. 어려운 점이 어느 곳에 있는가?
설두스님은 그(조주스님)의 의도를 알았었기에 의로(義路)를 열어 그대에게 송을 한 것이다.
(송)
치밀한 물음으로 오래된 저울〔老古錐 : 조주스님〕을 한 대 내질렀지만
-하필이면 이 늙은이를 내질렀을까? 부딪치고 어느 곳으로 가는가?
일곱 근 장삼 무게 몇이나 알았을까?
-다시 해도 반푼 어치도 안된다. 턱이 떨어져 말을 못 하는군. 또 그의 계책에 걸려들었다.
이제 서호(西湖)에 던져버렸으니
-설두스님의 솜씨여야 이렇게 할 수 있다. 산승도 (장삼이) 필요치 않다.
맑은 바람을 내려불어 누구에게 부촉할까?
-자고이래로 아직도 (맑은 바람이) 있군. 말해보라. 설두스님이 그와 주고 받은 것일까?
아니면 그의 주각(注脚)을 달았을까? 한 자식(설두)이 몸소 얻었군.
(평창)
18가지 물음〔十八問〕가운데 이는 편벽된 물음〔編辟問〕이라 한다.
설두스님이 말한 “치밀한 물음으로 조주스님을 한 번 내질렀지만”은 그 스님이 만법을 몰아붙여
일치(一致)시키려 했다는 것이다. 이 스님은 조주스님을 내지르려 하였으나 조주스님 또한 작가이다.
몸 돌릴 수 없는 곳에서도 벗어날 길이 있어 큰 입을 열어 말하였다.
“내가 청주에 있을 때 무명 장삼 한 벌을 만들었는데 그 무게가 일곱 근이더라.”
설두스님이 말한 “일곱 근 장삼 무게를 몇이나 알까? 이제 서쪽 호수에 던져버렸다”는 것은,
만법귀일(萬法歸一)이라는 일(一)자도 필요치 않으며, 일곱 근 무명 장삼 또한 필요치 않으니 일시에
서호에 던져버린다는 것이다. 설두스님은 동정(洞庭)의 취봉(翠峰)에 주석하였는데 그곳에 서호가 있
다.
“맑은 바람을 내려불어 누구에게 부촉할까?”라는 것은 조주스님이 대중 법문에서 말하기를,
“그대가 북쪽으로 온다면 (바람을) 치켜불게 해주고 남쪽으로 온다면 (바람을) 내려불어주겠지만,
설봉(雪峰)이나 운거(雲居)에서 온다면 외곬수이다”라 했다.
설두스님은 이리하여 맑은 바람을 누구에게 부촉할까라고 한 것이다. 치켜분다는 것은 그대에게
마음을 운운하고 성품을 운운하며 현묘한 갖가지 방편을 운운하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만일 내려
불면 결코 많은 의미와 현묘함이 없을 것이다.
어떤 사람이 한 짐의 선(禪)을 짊어지고 조주스님 처소에 이르렀으나, 한 수도 두어보지 못하게끔
하여 그것을 일시에 접어치우도록 하여, 맑기가 그지없고 준절하게 하여 조그만치의 일삼음도 없게
하였다. 이를 두고 “깨침이란 깨치지 못함과 같다”고 말하는데, 요즈음 사람들은 모두가 일 없는
것으로 알아버린다.
어느 사람이 말하였다.
“혼미함도 없고 깨침도 없으니 결코 구할 필요가 없다. 부처님이 세상에 출현하지 않았을 때와
달마스님이 이 땅에 오지 않았을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부처님이 세상에 출현한들 무엇하겠으며
조사 또한 서쪽에서 와서 무얼 하겠다는 것이냐?”
모두 이래 가지고서야 어찌 옳을 리가 있겠는가? 그러나 모름지기 완전히 사무치고 완전히
깨달으면 여전히 산은 산 물은 물이다. 일체의 만법이 모두 있는 그대로 드러나야 비로소 할 일
없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듣지 못하였느냐? 용아(龍牙)스님의 말을.
“도를 배우려면 무엇보다 깨달으려 해야 한다. 마치 용주(龍舟)를 빼앗듯 해야 한다. 비록 옛 전각
(殿閣) 같은 한가한 경지에 올랐다 하더라도 꼭 이를 얻어야만 비로소 쉬게 된다”고 하였다. 이는
마치 조주스님의 “무명 장삼 일곱 근”과 같다. 옛사람의 이와 같은 말을 살펴보면 금옥처럼 귀중한
것이다. 산승이 이처럼 말하고, 여러분이 이처럼 듣는 것도 모두가 치켜부는 것이다. 말해보라,
무엇이 내려부는 것인가를. 선상에 앉아 참구해보라.
제46칙 경청의 미혹되지 않음〔鏡淸不迷〕
(수시)
한 번의 망치질로 범부․성인을 초월하고, 반 마디의 말로써 속박을 풀어버렸다. 얼음 위를 걷고
칼날 위를 달리듯 하며, 현상의 세계〔聲色〕속에서 현상에 따라 행한다. 종횡무진한 오묘한 작용이란
그만두더라도 찰나에 대뜸 떠나버렸을 때는 어떠한가? 거량해보리라.
(본칙)
경청스님이 어떤 스님에게 물었다.
“문 밖에 무슨 소리가 나느냐?”
-무심하게 낚시를 드리웠다. 귀머거리도 아니면서 무얼 하려고 묻는가?
“빗방울 소리입니다.”
-참으로 진실하군. 좋은 소식이다.
“중생이 전도되어 자기를 미혹하고 외물을 좇는구나.”
-일삼는구나. 자기 편할 대로 하는 데는 익숙하군. 갈고리와 오랏줄이로다.
그에게 본분의 솜씨를 돌려줘라!
“스님께서는 뭐라고 하시렵니까?”
-과연 지고 말았군. 창끝을 돌려 덤벼드는구나. 참으로 감당키 어렵다.
도리어 창을 잡고 거꾸로 사람을 찌르는구나.
“하마터면 자신을 미혹할 뻔했느니라〔洎不迷己〕.”
-쯧쯧! 결국 밝히려 해도 하질 못하고 마는군.
“자신을 미혹할 뻔하시다니 무슨 뜻입니까?”
-이 늙은이를 내질렀군. 사람을 핍박하는구나.
앞에 쏜 화살은 그래도 가벼운 편인데 뒤에 쏜 화 살은 깊이 박혔다.
“몸을 빠져 나오기는 그래도 쉽지만 그것을 그대로 말하기란 어렵다.”
-(빼어난) 자식을 기르게 된 인연이다. 그렇긴 하지만 덕산스님과 임제스님은 어디로 갔느냐?
빗방울 소리가 아니라면 무슨 소리라고 하랴? 결국 밝히지 못하고 마는군.
(평창)
여기에서 또한 잘 알아야 한다. 옛사람이 말한 한 기틀〔一機〕, 한 경계〔一境〕는 수행자를
지도하고저 함이었다.
하루는 경청스님이 스님에게 물었다.
“문 밖에 무슨 소리인가?”
“빗방울 소리입니다.”
“중생이 전도(顚倒)되어 자신을 미혹하고 외물을 좇는구나.”
다시 물었다.
“문 밖에 무슨 소리인가?”
“비둘기 울음 소리입니다.”
“무간지옥(無間地獄)의 업을 부르지 않으려거든 여래의 바른 법륜〔正法輪〕을 비방하지 말라.”
다시 물었다.
“문 밖에 무슨 소리인가?”
“뱀이 두꺼비를 잡아먹는 소리입니다.”
“중생에게 고통이 있으리라고 짐작했더니 고통받는 중생이 참으로 있었구나.”
이 말은 앞의 공안과 결코 다른 것이 아니다. 납승이 여기에서 깨칠 수 있다면 현상의 세계
속에서도 자유롭겠지만 깨치지 못한다면 현상의 세계의 구애를 받을 것이다. 이러한 공안은
총림에서 ‘단련어(煅煉語)‘라 한다. 만일 단련이라 한다면 마음의 분별을 이룰 뿐 옛사람의 수행인을
지도한 참뜻을 알지 못할 것이다. 또한 이를 현상의 세계에서 깨우치게 함〔透聲色〕이라 하기도
하는데, 첫째는 도안(道眼)을 밝힘이요, 둘째는 현상세계를 밝힘이요, 셋째는 심종(心宗)을 밝힘이요,
넷째는 망정(忘情)을 밝힘이요, 다섯째는 교화 제도함〔展演〕을 밝힘이라고 한다. 대단히 자세하기는
하지만, 집착함이 있는 걸 어찌하겠는가.
경청스님이 “문 밖에 무슨 소리가 나는가?”하고 묻자, 스님은 “빗방울 소리입니다”라고 대답했고,
경청스님은 문득 “중생이 전도하여 자기를 미혹하고 외물을 좇는다”고 말하였다. 사람들은 모두
이를 잘못 알고 고의로 사람을 떠본 것이라고 말들 하나 틀린 소리이다. 이는 경청스님에게 수행
인을 지도하는 솜씨가 있어, 대담하게 한 기틀, 한 경계에 구애받지 않고 각별히 눈썹〔眉毛〕을
아끼지 않고 말로 설명해주었다는 점을 모른 것이다. 경청스님인들 빗방울 소리인 줄 몰라서 또다시
물었겠는가?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은 옛사람은 학인을 제접하는 수단으로써 이 스님을 시험하려고
했다는 것이며, 이 스님도 멋지게 받아서 대뜸 “스님께서는 뭐라고……”라고 했다는 것이다.
마침내는 경청스님이 방편을 써서 그에게 “자신을 미혹할 뻔했네”라고 말하였다. 그 스님이 자기를
미혹하여 외물을 좇은 것은 그렇다손 치더라도 경청스님은 무엇 때문에 자신을 미혹했을까?
그를 시험하는 구절 속에 몸을 해탈하는 곳이 있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럼 스님은 너무나
멍청하여 아예 말을 끊어버리고자 다시 묻기를 “자기를 미혹할 뻔하시다니 무슨 뜻입니까?”라고
하였다. 덕산스님과 임제스님의 문하였다면 방(棒)․할(喝)을 하였으련만 경청스님은 한 가닥
(방편의) 길을 터주어 그에게 설명을 하느라 다시 말하였다. “몸을 빠져 나오기는 그래도 쉽지만
그것을 그대로 말하기란 어렵다.”
그와 같기는 하지만 옛사람(동산스님)이 말하기를 “계속 이어가기가 매우 어렵다”하였으니,
경청스님은 다만 한 구절로 이 스님에게 본분의 큰 일을 밝혀주었던 것이다. 설두스님의 송은
다음과 같다.
(송)
빈 집의 빗방울 소리여!
-예로부터 지금까지 끊어졌던 적이 없다. 모두가 이 속에 있느니라.
작가 선지식도 대답하기 어려워라.
-예상대로 모르는군. 산승은 원래 작가가 아니다. 방편도 있고 진실도 있으며, 놓음도 거두어들임도
있으며, 죽이고 살리며, 사로잡고 놓아주기를 마음대로 한다.
만일 성인의 무리 속에 들어갔다〔入流〕고 한다면
-머리를 (들러붙는) 아교통 속으로 처박는다. 빗방울 소리가 아니라면 무슨 소리라 하겠는가?
여전히 모르리라.
-산승이 몇 번이나 물었던가? 이 먹통아! 구멍없는 쇠망치를 나에게 가져와라.
알건 모르건
-두 쪽을 모두 꼼짝 못하게 한다. 둘로 나눌 수 없다. 양쪽 어디에도 해당하지 않는다.
남산․북산에 도리어 세찬 비가 쏟아진다.
-머리 위, 머리 아래가 온통 (비투성이다). 빗방울 소리라 한다면 장님이며, 빗방울 소리라 하지
않는다면 무슨 소리라 하겠는가? 여기에 이르러서는 모름지기 참된 경지를 밟아야만 한다.
(평창)
“빈 집의 빗방울 소리여! 작가 선지식도 응수하기 어렵다”는 것은, 빗방울 소리라 한다면 이는
자기를 미혹하고 외물을 좇는 것이라는 것이다. 빗방울 소리가 아니라 한다면 또한 어떻게 외물에
자재롭게 대처하겠는가? 이에 이르러서는 작가라 하더라도 응수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므로 옛
사람(마조스님)은 “스승과 같은 견해를 지니면 스승의 덕을 반감시키는 것이니 견처가 스승을 뛰
어넘어야 비로소 스승의 뒤를 전수 할 만하다”하였으며, 또한 남원(南院)스님은 말하였다. “방망이
아래 무생법인(無生法忍)이여! 기연(機緣)에 임하여 스승에게도 양보하지 않네.”
“만일 (성인의) 무리 속에 들어갔다 한다면 여전히 모르리라”고 하였는데, 교학〔敎中 : 능엄경〕
에서는 말하기를 “처음 듣자마자 성인의 무리로 들어가, 들어가는 자신도 들어간 곳도 고요하면
움직임과 고요함의 두 모습이 절대로 나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러니 빗방울 소리라 해도 옳지 않고 빗방울 소리가 아니라해도 옳지 않다.
앞(제11칙 송)에서 나온 “두번 할하고 세 번 할함이여! 작가이므로 인연에 딱 맞출 줄 알았다”는
송은 바로 이 송과 같다하겠다. 이는 현상의 세계 속으로 들어갔다 해도 옳지 않고 현상의 세계라
고 해도 여전히 그 뜻은 모른 것이다. 이를 비유하자면 손가락으로 달을 가리킨 것이지 달이란
손가락이 아니라는 것과 같다.
“알건 모르건, 남산․북산에 도리어 더욱 세찬 비가 쏟아진다.”
제47칙 운문의 육대(六大)에도 포함되지 않는 것〔雲門六不〕
(수시)
하늘이 어찌 말을 하랴마는 사계절은 (절도있게) 운행하고, 땅이 어찌 말을 하랴마는 만물을 자라게
한다. 사계절이 운행하는 속에서 본체를 볼 수 있고 만물이 생장하는 곳에서 오묘한 용〔妙用〕을
볼 수 있다. 말해보라, 어느 곳에서 납승을 볼 수 있을까? 어언동용(語言動用) 내지는 행주좌와에
의존하지도 말고, 말로도 설명하지 말고, 분별할 수 있겠느냐?
(본칙)
어떤 스님이 운문스님에게 물었다.
“어떤 것이 법신(法身)입니까?”
-많은 사람들이 의심을 했었지. 일천 성인이라도 벗아나질 못한다. 허물이 적지 않구나.
“여섯으로는 알 수 없다.”
-못을 자르고 쇠를 끊는다. 팔각형 맷돌이 허공으로 날아가고, 신령한 거북이 꼬리를 끈다.
(조짐이 보이지 않았을 때 알아도 벌써 제2의 속제이며, 조짐이 생긴 뒤에 알아차리면 또한
제3의 자리에 떨어지며, 또한 언어로써 알려고 한다면 좋아하시네, 전혀 관계가 없다.)
(평창)
운문스님이 말하기를 “여섯으로는 거두지 못한다”하였는데, 이 말은 참으로 뭐라고 하기가 어렵다.
조짐이 나뉘어지지 않은 때에 뭐라고 할 수 있다 해도 벌써 제2의 속제이며, 조짐이 생긴 뒤에 알면
제3의 자리에 떨어지며, 언구로 분별하고 밝히려 했다가는 끝내 찾을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결국 무엇을 법신이라 할까? 작가라면 듣자마자 거량할 줄 알아서 바로 가버리지만, 생각하거나
기연에 매였다가는 엎드려 처분을 듣고야 만다.
태원(太原)의 부상좌(孚上座)는 본디 강사였는데 하루는 법좌에 올라 강의를 하던 즈음에 법신에
대해 말하게 되었다.
“시간으로는 과거․현재․미래에 두루하고 공간으로는 시방(十方)에 뻗쳤다”고 하자, 어떤 한 선객이
그곳에 있다가 피시식 웃어버렸다. 부상좌는 법좌에서 내려와 말하였다.
“제가 조금 전에 무슨 잘못이 있었습니까? 선승은 말씀해보십시오.”
“좌주(座主)께서는 법신을 헤아리는 일만을 강의했을 뿐 법신을 보지는 못하였습니다.”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잠시 강의를 그만두고 고요한 방에 앉아 참선을 해보시오. 반드시 스스로 알게 될 것입니다.”
부상좌는 그의 말을 따라서 하룻밤을 고요히 좌선하다가 오경(五更)을 알리는 종소리에 문득
크게 깨쳤다. 마침내 선객이 머무는 곳의 문을 두드리며 말하였다.
“나는 알았습니다.”
“어디 말해보시오.”
“나는 오늘 이후론 다시는 부모가 낳아주신 이 몸을 가지고 재주를 뽐내지 않겠습니다.”
또 교학〔敎中 : 금광명경〕에서는 말하기를,
“부처님의 참 법신은 마치 허공과 같아, 사물을 따라 형태를 나타내니 물 속에 어린 달과
같도다”라고 하였다.
또 어떤 스님은 협산스님에게 물었다.
“어떤 것이 법신입니까?”
“법신은 모습이 없다.”
“어떤 것이 법안입니까?”
“법안은 티가 없다.”
운문스님이 말한 “여섯으로도 알 수 없다”는 공안에 대하여, 어떤 사람은 “이는 6근․6식․6진이다.
이 여섯이 모두 법으로부터 생겨나므로 6근으로는 법신을 알 수 없다”고 한다. 이처럼 망정으로
헤아린다면, 좋아하시네, 전혀 이와는 관계가 없으며 나아가 운문스님에게 누를 끼치는 일이다.
보려면 바로 보아라. 천착해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듣지 못하였느냐, 교학(법화경)의 말을.
“이법은 사량이나 분별로써 헤아릴 바 아니다.”
그의 대답은 많은 사람들에게 알음알이로 야기시켰다. 그러므로 한 구절 속에서는 반드시 삼구
(三句)가 구비되어 반드시 그의 물음을 저버리지 않는다. 나아가 상황에 딱 들어맞아 한 말씀 한구절
과 한 점 한 획에서도 몸을 벗어나는 곳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한 구절을 깨치면 천 구절 만
구절을 일시에 깨친다”고 하였다. 말해보라, 이는 법신일까, 조사일까? 그대들에게 삼십 방망이를
먹이리라. 설두스님의 송은 다음과 같다.
(송)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또 세고 또 센다. 낙숫물 지는 족족 얼어붙는다. 궁리를 많이 하여 무엇하려고?
푸른 눈 달마가 셈하여도 다하지 못하리.
-삼생육십겁(三生六十劫) 걸려도 다 셀 수 없다. 달마인들 꿈엔들 알았겠는가?
스님은 무슨 까닭에 알면서도 일부러 범하였느냐?
소림(少林)에서 신광(神光)스님에게 부촉했다고 부질없는 말들을 하더니만
-한 사람의 헛소문에 많은 사람이 진짜인 줄로 전한다. 애시당초부터 잘못 되었다.
옷을 걷어붙이고는 또다시 천축(天竺)으로 되돌아갔다고 말하네.
-한 배를 탄 사람을 모두 속였다. 부끄러움이 적지 않군.
천축은 아득하여 찾을 곳이 없는데,
-어느 곳에 있을까? 비로소 태평하구나. 지금은 어느 곳에 있을까?
간밤에 유봉(乳峰)을 건너다보면서 잠을 잤네.
-네 눈을 멀게 하는군. 괜히 풍랑을 일으키는군. 말해보라. 이는 법신일까, 불신일까?
그대에게 삼십 방망이를 먹이리라.
(평창)
설두스님은 꿰맨 흔적도 없는 것(여섯으로는 알 수 없다는 말)에 대해, 훌륭히 안목을 드러내어
송으로써 사람들에게 보여주었다. 운문스님은 “여섯으로는 알 수 없다”고 말하였는데, 설두스님은
무엇 때문에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이라 했을까? 설사 달마스님이라 할지라도 세지 못하리라.
그러므로 “달마스님이 알았다고 할 수는 있지만 깨쳤다고는 할 수 없다”고 하였다. 이는 반드시
그 (운문스님)의 자손이어야만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다.
본칙의〔평창〕에서 말한 “한 말씀 한 구절이 상황에 딱딱 들어 맞는다”고 한 것을 철저히 깨치면
“언구에 있지 않다”는 말을 알겠지만 그렇지 못하다면 알음알이로 이해하고 말 것이다.
오조(五祖) 큰스님께서는 “석가모니 부처님은 비천한 엉뚱한 짓하는 놈이며, ‘뜰 앞의 잣나무’는
하나, 둘, 셋, 넷, 다섯이다”라고 하였다. 자세히 운문스님의 말을 잘 알아차리면 단박에 그러한
경계에 이를 것이다.
“소림에서 신광(神光)스님에게 부촉했다고 부질없는 말들을 한다”고 하였는데 이조(二祖)스님의
처음 이름이 신광이었다. 이어서 “천축으로 되돌아갔다”고 한 것은, 달마스님을 웅이산(熊耳山)
아래에 장례를 치뤘는데, 송운(宋雲)이 서역(西域)에 사신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서령(西嶺 : 파미르
고원)에서 한쪽 신만을 들고 서천으로 되돌아가는 달마스님을 보았기 때문이다. 송운이 이를 황제
에게 아뢰어 무덤을 파헤치니 한쪽 신만 남아 있었다.
설두스님은 “실로 ‘이 일’을 어떻게 전해줄 수 있으리요, 결코 전해준 적이 없다. 그런데도 사람들
은 옷을 걷어붙이고 천축으로 되돌아갔다고 말들을 하는군”이라고 말하였다. 말해보라, 무엇 때문에
이 국토에 6대의 조사들이 계속 이어서 전해왔었는가를. 이는 참으로 어려운 문제이다. 모름지기
이를 알아야 비로소 작가 선지식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천축은 아득하여 찾을 곳 없는데, 간밤에 유봉을 건너다보면서 잠을 잤다”고 하였다. 말해보라,
지금 어느 곳에 있는가를. (원오)스님은 한 차례 친 후 말하였다. 눈이 멀었구나!
제48칙 태부의 옷소매를 떨치고〔太傅拂袖〕
(본칙)
왕태부가 초경사(招慶寺)에 들어가니, (스님들이) 차를 달이고 있었다.
-작가들이 모였으니 기특한 일이 있겠지. 할 일 없이 등한하다. 모두가 진리를 보는
또 하나의 눈〔一隻眼〕을 갖추었다. 재앙을 불러일으키는구나.
이때에 낭상좌(朗上座)가 명초(明招)와 함께 차 끓이는 냄비를 붙잡고 있다가
-모두가 진흙덩이나 희롱하는 놈이로구나. 차 끓일 줄 모르면서 남에게까지 누를 끼치는구나.
낭상좌가 차 냄비를 뒤집어버리자,
-일이 생겼구나. 과연 예상했던 대로구먼.
태부가 이를 보고서 상좌에게 물었다.
“차 끓이는 화로 밑에 무엇이 있소?”
-과연 재앙이 생겼군.
낭상좌는 말하였다.
“화로를 받드신 신이 있지요.”
-과연 그의 화살에 적중했구나. 참으로 기특하다.
“화로를 받드는 신이 왜 차 냄비를 엎어버렸오?”
-무슨 까닭에 그에게 본분납자를 기르는 먹이를 주지 않는가? 큰일 났군.
“오랜 동안의 벼슬살이 하루아침에 쫓겨났지요.”
-잘못 지껄였다. 이 무슨 말인가? 엉터리 선객이 삼대 같고 좁쌀처럼 많구나.
태부는 소매를 떨치고 나가버렸다.
-분명한 작가로다. 그도 하나의 눈〔一隻眼〕을 갖췄다고 하겠다.
명초가 말하였다.
“낭상좌는 초경사(招慶寺)의 밥을 얻어먹고 도리어 강 건너편에서 떼지어 시끌벅쩍거리는군
〔打野木埋〕
-반드시 삼십 방망이를 때려라. 이 애꾸눈 용이 한쪽 눈밖에 없군.
그래도 눈밝은 사람이 점검해 야 할 것이다.
“스님께서는 어떠십니까?”
-내질렀군. 한 번 잘도 내질렀군. 결국 이처럼 어설픈 죽은 견해를 짓지 말라.
“귀신에게 당했군.”
-과연 진리를 보는 눈〔一隻眼〕을 갖추었구나. 절반쯤 말했다. 한편으로는 치켜올리고,
한편으로 는 깎아내리네.
설두스님은 말하였다.
“명초가 그 말을 하자마자, 차 달이는 화로를 뒤엎어 버렸어야지.”
-도적이 떠난 뒤에 활을 당겨 무엇하랴. 이와 같다 해도 덕산(德山)스님의 문하객으로는 걸맞지
않다. 날렵하군. 그 가운데서도 기특하다 하겠다.
(평창)
불성의 의미를 알고저 한다면 마땅히 시절 인연을 살펴야 한다.
왕태부는 천주(泉州)의 원님으로서 오랜동안 초경사(招慶寺)에서 참구하였다. 하루는 절로 들어
가자 낭상좌가 차를 끓이다 말고 차 냄비를 엎어버렸다. 태부도 또한 작가인터라 차 냄비를
뒤엎어버리는 것을 보자마자 상좌에게 물었다.
“차 끓이는 화로 밑에 무엇이 있오.”
“화로를 받드는 신이 있지요.”
이는 말 속에 심금을 울리는 바가 있긴 하나, 처음과 끝이 서로 어긋나고 종지를 잃어버려 칼날에
손을 다친 꼴이니 이를 어찌하랴. 자신을 저버렸을 뿐 아니라 남까지도 틀리게 한다. ‘이 일’은 득도
실도 없으므로 만일 거량했다가는 여전히 친하고 성김이 있고 검고 흰 것이 있을 것이다. 이 일을
의론하다면 말과는 관계가 없지만, 또한 말 속에 생동력 있는 팔팔거림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활구(活句)를 참구해야지 사구(死句)를 참구하지 말라”고 하였다. 낭상좌의 이와
같은 말은 미친 개가 흙덩이를 좇아가는 꼴이다. 태부가 소매를 떨치고 떠나 버린 것은
그를 긍정하지 않은 것이다.
명초의 “낭상좌여, 초경사의 밥을 얻어먹고서도 도리어 강 건너편에서 떼지어 시끌벅쩍거리는군
〔打野木埋〕”라는 말 가운데 ‘야매(野木埋)란 황야에 널려 있는 불타버린 나무토막이라는 뜻이다.
이는 명상좌가 올바른 곳으로 가지 않고 바깥으로 치달리는 것을 밝혀준 것이다.
낭상좌는 이에 내질러서 물었다.
“스님은 어떡하시렵니까?”
“귀신에게 당했군.”
명초에게는 분명히 몸을 벗어날 곳이 있으며 또한 그의 물음을 저버리지도 않았다.
그러므로 “영리한 개는 어금니도 드러내지 않고 사람을 문다”고 한다.
위산 철(潙山喆)스님은 “왕태부는 조나라의 인상여(藺相如)가 구슬을 되찾아올 때 수염이 충천
했던 것과 매우 닮았다”고 하였다. 이는 명초가 참으로 뛰어났기 때문에 그런 손해를 보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위산스님이 만일 낭상좌였다면 태부가 소매를 떨치고 떠나갈 때 차 냄비를 놓아버리고 껄껄거리며
큰 소리로 웃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보고서도 내 것으로 챙기지 못하면 천 년이 지나도록 다시
만나기 어렵기 때문이다.
듣지 못하였느냐, 보수(寶壽)스님이 호정교(胡釘鉸)에게 물었던 것을.
“오래전부터 호정교의 소문을 들었는데 혹 호정교가 아니십니까?”
“그렇습니다.”
“그래 허공에도 못을 박을 수 있습니까?”
“스님께서 (그 못을) 떼어보십시오.”
보수스님이 후려쳤으나 호정교가 그를 수긍하지 않자 보수스님은 말하였다.
“언젠가는 반드시 말 많은 스님이 그대를 점검해줄 날이 있을 것이오.”
호정교가 그후 조주스님을 친견하여 전에 있었던 일을 말씀드리자 조주스님은 말하였다.
“그대는 무엇 때문에 그에게 얻어맞았는가?”
“무슨 잘못이 있었는지를 모르겠습니다.”
“붙일 수도 없는데 또다시 그에게 허공을 떼어보라고 하다니.”
호정교가 문득 그만둬버리자 조주스님이 대신 말하였다.
“이 하나로 붙여놓은 것에 못을 박아보아라.”
호정교는 이 말에 깨침을 얻었다.
서울의 미칠(米七)스님이 행각을 하고 돌아오자 어떤 노스님이 물었다.
“달밤에 우물 속에 있는 새끼 토막을 사람들은 모두가 뱀이라고 하는데,
미칠스님은 부처를 뭐라고 하겠습니까?“
“만일 (이러쿵저러쿵) 견해를 짓는다면 바로 중생과 같겠지요”
“그렇지만 천 년 만에 싹이 돋는 복숭아씨 같아 생기가 없군.”
혜충국사(慧忠國師)가 자린공봉(紫璘供奉)에게 물었다.
“공봉은 「사익경(思益經)」의 주해를 냈다고 하는데 그러한가?”
“그렇습니다.”
“경전의 주해를 내려거든 반드시 부처님의 뜻을 알아야지.”
“그 뜻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감히 경전의 주해를 붙인다 하겠습니까?”
마침내 시자에게 물 한 주발을 가져오게 한 후 쌀 일곱 톨, 젓가락 한 짝을 주발 위에 얹어
공봉에게 내보이며 물었다.
“이게 무언가?”
“모르겠습니다.”
“나의 뜻도 모르면서 무슨 부처의 뜻을 말하겠는가?”
왕태부와 낭상좌의 대화는 한결같지 못하다.
설두스님이 맨 끝에서 “그 당장에 차 달이는 화로를 밟아서 엎어버렸어야지”라고 말하였는데,
명초가 그처럼 하기는 했지만 결코 설두스님만은 못하였다.
설봉스님이 동산스님의 회하에 있으면서 밥짓는 일을 하였는데 하루는 쌀을 씻고 있을 즈음에
동산스님이 물었다.
“무얼 하느냐?”
“쌀을 일고 있습니다.”
“쌀을 일어 모래를 버리느냐. 모래를 일어 쌀을 버리느냐?”
“모래와 쌀을 일시에 모두 버립니다.”
“대중들은 무얼 먹으라고?”
설봉스님이 그러자마자 쌀 일던 단지를 쏟아버리자, 동산스님은 말하였다.
“너의 인연은 이곳에 있지 않다.”
그렇긴 하지만 설두스님이 말한 “그 당장에 차 달이는 화로를 엎어버렸어야 했다”는 말과 같을 수
있겠는가? 설봉스님과 설두스님이 한 행위들은 모두 어떠한 시절 인연들일까? 그들의 용처(用處)에
이르면 반드시 고금에 뛰어나 팔팔 살아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송은 다음과 같다.
(송)
다그쳐 물어오는 것이 찬바람이 일 듯 하였지만
-헛 화살을 쏘지 않았다. 가끔씩은 모양새를 갖추지. 참으로 오묘하구나.
그 대처함은 훌륭한 솜씨가 못 되었다.
-진흙덩이 주무르는 놈들이 어찌 한둘이랴! 모난 나무로 둥근 구멍을 막은 것처럼 잘 맞지
않는군. 작가 선지식에게 제대로 채였구나.
가련하다, 애꾸눈 용(龍)이여!
-한쪽 눈만 있군. (그대를 잡아매는) 말뚝을 얻었을 뿐이다.
결코 어금니와 발톱을 드러내지 않으니,
-드러낼 만한 어금니와 발톱도 없는데 무슨 어금니와 발톱을 말하느냐?
그러나 그를 속이지 말 라.
어금니와 발톱을 벌리면
-그대들은 보았느냐? 설두스님이 그대로 조금은 나은 편이다.
이러한 솜씨가 있었더라면 차 달이 는 화로를 뒤엎어버려라.
구름과 우레가 생기나니
-온 대지 사람들이 일시에 몽둥이질 당했네. 천하의 납승들이 몸 붙일 곳이 없군.
비도 안 오는 하늘에 뇌성벽력이다.
바다를 범람시키는 파도를 몇 번이나 겪었던가?
-곤장 72대의 죄가 도리어 150대의 죄가 되었구나.
(평창)
“다그쳐 물어오는 것이 찬바람이 일 듯 하였지만, 그 대처함은 훌륭한 솜씨가 못 되었다”는 것은,
마치 왕태부가 물은 곳이 도끼를 휘둘러 찬바람을 일으키는 듯하였다는 것이다. 이 구절은「장자
(莊子)」에서 나온 말이다. 영(郢) 땅 사람이 벽에 진흙을 바르다가 작은 틈이 하나 남아 있자 진흙을
둥실둥실 뭉쳐 그 구멍에 던져 메워버렸다. 그때 조그마한 진흙이 코 끝에 튀겼는데 곁에 있던
목수가 말하였다.
“틈을 메우는 그대의 솜씨가 너무나 훌륭하다. 나는 이 도끼를 휘둘러 그대의 코 끝에 묻어 있는
진흙을 떼주겠다.”
그의 코 끝에 묻어 있는 진흙은 파리 똥만큼이나 적었으나 목수에게 깎아보라고 하자 도끼를
휘둘러 바람을 일으키면서 진흙을 모조리 제거하되, 조금도 코를 다치지 않았으며, 영 땅 사람 또한
꼼짝 않고 서 있는 채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았다한다. 이를 두고 이른바 “둘 다 정교하다”고 한다.
낭상좌가 응수하기는 했으나 훌륭한 말은 못 되었기에 설두스님은 “다그쳐 물어오는 것이 찬 바람
일 듯 하였으나, 그 대처함은 훌륭한 솜씨가 못 되었다”고 말했던 것이다.
“가련하다, 애꾸눈 용(龍)이여, 결코 어금니와 발톱을 드러내지 않더니”라고 명초가 한 말은
매우기특하긴 하지만 아직은 구름을 일으키고 안개를 피워내는 솜씨가 없는 데야 어찌 하겠는가.
설두스님은 곁에서 이를 긍정하지 않고 참지 못하여 그를 대신하여 말한 것이다. 설두스님은
은연중 그(태부)의 뜻에 맞추어 “차 달이는 화로를 뒤엎어버렸어야지”라고 노래한 것이다.
“어금니와 발톱을 벌리면 구름과 우레가 생기나니, 바다를 범람시키는 파도 몇 번이나 겪었던가?”
라고 하였는데, 운문스님은 “그대들에게 바다를 범람시키는 파도가 있기를 바라지 않으나 물에 순응
하는 뜻만 있어도 된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활구에서 깨치면 영겁토록 잊지 않는다고 한다.
낭상좌와 명초의 어구는 죽은 것과 같다. 팔팔 살아 있는 곳을 보려고 하느냐? 설두스님의
“차달이는 화로를 뒤엎어버렸어야지”라는 말을 살펴보라.
제49칙 삼성의 금빛 물고기〔三聖金鱗〕
(수시)
종횡으로 뚫고 다니며 적장의 북과 깃발을 빼앗으며, 백겹 천겹 포위망도 앞뒤를 잘 살펴 적절하게
빠져나오며, 범의 머리에 걸터앉고 범의 꼬리를 잡는 솜씨가 있어도 아직 작가 선지식은 못 된다.
우두(牛頭)귀신이 사라지자 마두(馬頭)귀신이 다시 오는 듯한 신출귀몰이라도 기특할 게 없다.
말해보라. 뛰어난 사람〔過量底人〕이 올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 거량해보리라.
(본칙)
삼성(三聖)스님이 설봉(雪峰)스님에게 물었다.
“그물을 뚫고 나온 황금빛 물고기는 무엇을 미끼로 해서 잡을까요?”
-종횡으로 자재하구나. 물음이 몹시 건방지군. 그대 스스로가 알아야지. 왜 이를 다시 묻는가?
“그대가 그물에서 빠져나오거든 말해주겠다.”
-남의 위신을 되게 깎아내리는구나. 작가 종사는 천연스레 자재하다.
“1천 5백 인이나 거느리는 선지식이 화두도 모르는구나.”
-번개같이 빠르군. 뭇사람을 놀라게 하는군. 멋대로 날뛰는구나.
“노승은 주지의 일이 바쁘다.”
-승부에 놀아나지 않는군. 한 수 봐줬다. 이 말이 가장 독살스럽다.
(평창)
설봉스님과 삼성스님이 이처럼 들락날락하며 한번 내지르고 터지고 주고받았으나 승부가 나지
않았다. 말해보라, 이 두 분의 큰스님은 어떤 안목을 갖추었는가를. 삼성스님은 임제스님의 가르침을
받고서 여러 총림을 두루 편력하였는데 어디에서나 그를 큰스님으로 대접하였다. 그의 물음을
살펴보면 수많은 사람들이 대답하려 했지만 찾지 못했다. 결코 이성(理性)이나 불법(佛法)에도 관계
하지 않는다. 대뜸 “그물을 뚫고 나온 황금빛 물고기는 무엇을 먹느냐?”고 물었다. 그의 의도가
어떠한 것이었는가를 말해보라. 그물을 뚫고 나온 황금빛 물고기를 평소에 향기로운 미끼를 먹지
않는다. 참 모를 일이다. 무엇으로 미끼를 해야 할까? 설봉스님은 작가인터라 무심하게 열 푼 중에
한두 푼 정도로 그에게 응수하였다.
“그대가 그물에서 빠져나오거든 말해주겠다.”
분양(汾陽)스님은 이를 해답을 드러낸 물음〔呈解問〕이라 하였고 조동종에서는 이를 현상을 빌린
물음〔借事問〕이라 하였다. 이는 뛰어난 사람이어야만 완전한 수용〔大受用〕을 얻고, 정수리에 안목이
있어야 “그물을 뚫고 나온 황금빛 물고기”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설봉스님이 작가인데야 어찌하랴.
참으로 상대의 체통을 깎아내리는군. 그러므로 대뜸 “그대가 그물을 뚫고 나오거든 말해주겠다”고
하였다.
이 두 사람을 살펴보면 각기 영역을 거머쥐고 만 길 벼랑에 우뚝 서 있는 듯하다. 만일 삼성스님이
아니었다면 이 한마디를 듣고서 아무 말도 더 이상 못했을 것이지만 삼성스님 또한 작가인터라
그에게 “1천 5백 인이나 거느리는 선지식이 화두도 모르시네”라고 말할 주 알았던 것이다.
그러나 설봉스님 또한 곧바로 “노승은 주지의 일로 바쁘다”고 말했으니, 이것은 좀 거칠었다 하겠다.
작가들이 서로 만나 사로잡기도 하고 놓아주기도 하고, 상대가 강하면 약해지고 상대가 미천하면
스스로는 고귀하게 상대하니, 그대들이 승부로 이를 이해한다면 꿈에도 설봉스님을 보지 못할 것
이다. 두 사람을 살펴보면 처음엔 고고하고 당당한 기상을 지녔더니만 끝에 가서는 모두가 어물어물
하였다. 말해보라, 그래도 얻고 잃음, 이기고 짐이 있는가를. 그들 작가가 주고받은 것은 결코 그럴
리가 없을 것이다.
삼성스님은 임제스님에게 있을 때 원주(院主) 소임을 맡았는데 임제스님이 입적하려는 즈음에
설법하였다.
“내가 떠난 뒤에 나의 정법안장(正法眼藏)을 잃지 말라.”
삼성스님이 나오더니 말하였다.
“어찌 감히 스님의 정법안장을 잃겠습니까?”
“이후에 어느 사람이 너에게 묻는다면 어떻게 하겠느냐?”
삼성스님이 대뜸 일갈(一喝)을 하자 임제스님은 말하였다.
“나의 정법안장이 이 눈먼 비구대에서 사라지게 될 줄이야.”
삼성스님이 곧 절을 올렸다. 그는 참다운 임제스님의 아들이기에 감히 이처럼 주고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설두스님이 맨 끝에 “그물을 뚫고 나온 황금빛 물고기”에 대해서 송을 하여 작가가 서로 뜻이
맞았던 것을 나타내보였다. 송은 다음과 같다.
(송)
그물을 뚫는 황금빛 물고기,
-일천 병사는 얻기 쉬우나 한 장수는 구하기 어렵다. 그런 물고기가 있는가?
모든 성인이라도 어찌할 수 없다.
물 속에 있다고 말하지 말라.
-저 구름 밖에 있구나. (물고기가) 파다닥 파다닥. 바보짓을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하늘을 흔들고 땅을 휘저으며
-작가로군. 그것이 기특한 것은 아니다. 봐준들 또한 뭐 어떻겠는가?
지느러미를 떨치고 꼬리를 흔드네.
-어느 누가 감히 그 핵심을 알랴. 뽐내며 나오더니만 많은 사람을 놀라게 하는구나.
고래가 뿜어내는 거대한 파도는 천 길이나 날고
-저쪽을 돌아 지나가버렸다. 대단하구먼. 온 대지 사람들을 한 입에 모두 삼켜버렸다.
진동하는 우레 소리에 맑은 회오리 바람 일어난다.
-눈과 귀가 있어도 귀먹은 듯 눈먼 듯하다. 오싹하지 않을 사람이 있겠는가?
맑은 회오리 바람 일어남이여!
-어디냐? 쯧쯧!
천상과 인간에 아는 사람 몇일는지.
-설봉스님은 앞에 굳게 진을 치고 삼성스님은 뒤편에 굳게 진을 치고 있으니,
공격해본들 무얼 하려고? (원오스님은) 치면서 말한다. 그대들은 어느 곳에 있느냐?
(평창)
“그물을 뚫는 황금빛 물고기, 물 속에 있다 말하지 말라”는데 대해, 오조스님께서는 “이 한 구절
에서 송을 완전히 다 끝냈다”고 하였다. 그물을 뚫는 황금빛 물고기라면 어떻게 물에 갇혀살랴?
반드시 거대한 파도가 아득하고 흰 물결이 하늘까지 넘실거리는 곳에 있을 것이다.
말해보라, 하루종일 무엇을 먹겠는가를.
여러분은 선상에 앉아 핵심을 거머쥐도록 하라.
설두스님은 말하기를 “‘이일’을 상황에 적절하게 거량한 것이다”하였다. 황금빛 물고기가 지느러미
를 떨치고 꼬리를 뒤흔들 때 하늘과 땅이 흔들리며, 고래가 내뿜는 거대한 파도는 천 길이나 높이
난다. 이는 삼성스님이 했던 “1천 5백 인이나 거느리는 선지식이 화두도 모른다”는 말을 노래한
것인데 이는 고래가 뿜어내는 거대한 파도의 기상과도 같다.
“진동하는 우레 소리에 맑은 회오리 바람 일어난다”는 것은 설봉스님이 “노승은 주지의 일이 번거
롭다네”라는 말을 노래한 것인데, 이 또한 우레가 진동하는 한 소리에 맑은 회오리 바람이 일어나는
것과 같다 하겠다. 이는 그들 모두가 작가였다는 점을 노래한 것이다.
“맑은 회오리 바람 일어남이여! 천상과 인간에 몇 사람이나 알는지”라고 하였다. 말해보라, 이 한
구절의 귀착점은 어디에 있을까? 회오리 표(颷)자는 바람을 말한다. 맑은 회오리 바람 일어날 때는
천상과 인간에 아는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제50칙 운문의 진진삼매〔雲門塵塵三昧〕
(수시)
단계를 건너뛰고 방편을 초월하여 기틀마다 서로 옹호하고 구절마다 서로 투합된다 하더라도, 큰
해탈의 작용을 얻지 못했다면 어떻게 불조를 저울질하고 종문의 귀감이 될 수 있겠는가? 말해보라,
문제의 핵심을 직면해서는 단도직입적이고, 역순(逆順)의 경계에 종횡하나, 그것을 초월하는 구절을
어떻게 말할 수 있을는지. 거량해보리라.
(본칙)
어떤 스님이 운문스님에게 물었다.
“무엇이 진진삼매(塵塵三昧)입니까?”
-천하의 납승 모두가 여기에서 소굴을 판다. 압안 가득히 서리를 머금어 딱 얼어붙었다.
(흙을 던지고 모래를 던져) 공격해본들 무슨 소용이 있는가?
“바리때 속의 밥, 물통 속의 물이니라.”
-포대 속에 송곳을 넣어두었구나. 황금과 모래가 뒤섞여 있다.
점점 잘못되는군. 함원전(含元殿)에서 장안이 어디냐고 묻지 말라.
(평창)
이를 알 수 있느냐? 만약 알 수 있다면 운문스님의 급소를 여러분이 거머쥘 수 있겠지만,
알 수 없다면 여러분의 급소가 운문스님의 손아귀에 있을 것이다.
운문스님에게는 못을 자르고 무쇠를 끊는 구절이 있으며 이 한 구절에는 삼구(三句)를 갖추고 있다.
어느 사람이거든 묻기만 하면 바로 “바리때 속의 밥톨은 알알이 모두 둥글고 물통 속의 물은
방울방울 모두 축축하다”고 한다. 그러나 이처럼 이해한다면 결코 운문스님이 수행인을 지도하는
핵심을 보지 못할 것이다. 송은 다음과 같다.
(송)
바리때 속의 밥, 물통 속의 물.
-들통났다. 덤벼든들 무엇 하려고? 3년을 양치질해야 할 것이다.
말많은 스님이라도 주둥이를 떼기 어려우리라.
-혀끝을 움츠렸군. 법을 아는 사람이라야 두려운 줄 안다. 무엇 때문에 이처럼 거량했을까?
북두성․남극성의 위치는 있을 자리에 있는데
-동쪽이니 서쪽이니 하여 무엇 하려고? 앉고 서는 것이 엄연하다.
키 큰 사람은 법신도 크고 작 은 사람은 법신도 작지.
하늘까지 넘실거리는 흰 물결은 평지에서 일어난다.
-벌써 발이 깊이 빠졌구나. 손님과 주인이 서로 바뀌었다. 갑자기 그대의 머리 위에 있다면
그대는 어떻게 하려는가? (원오스님은) 쳤다.
헤아릴까, 말까?
-아이고, 아이고. 쯧쯧!
그만둘까, 할까?
-무슨 말을 하느냐? 다시 쓰라린 원한만 더하는군.
(가난해서) 속옷도 없는 장자(長者)의 아들이로다.
-참으로 야멸차지 못하군. 옆에서 제삼자가 피시식 웃는다.
(평창)
설두스님은 앞(제11칙)에서 운문스님이 하신 ‘대일설(對一說)’에 대해서 “상황에 딱 맞게 하신 말씀
〔對一說〕이여, 너무나 고고〔孤絶〕하여 구멍 없는 철추로 거듭 쐐기를 박았다”하였고, 뒤이어 마조
(馬祖)스님이 하신 “4구를 떠나고 100비를 끊는다〔離四句絶百非〕”는 것에 대하여 “지장스님의
머리는 희고 회해 스님의 머리는 검구나. 눈 밝은 납승이 알려 해도 되지 않는다”고 송하였는데,
이 공안에서 깨치면 이 송도 알게 될 것이다.
설두스님은 첫머리에서 “바리때 속의 밥, 물통 속의 물”이라 하니 말 속에 심금을 울리는 메아리
가 있고 구절에 기틀이 나타나 있다.
“말많은 스님이라도 주둥이를 떼기 어려우리라”고 하여, 이어서 그대들에게 설명해준 것이다. 그대
들이 여기에서 현묘한 도리를 구하려고 헤아리면 더더욱 주둥이를 떼기가 어렵게 될 것이다. 설두
스님의 송은 여기에서 모두 해결됐다. 그러나 그는 자애로워서 이처럼 앞에서 먼저 방향을 설정해
주고, 대중 가운데 안목을 갖춘 이가 이를 엿볼까 염려하고, 이어서 한 수 봐주어 초심자를 굽어
살펴, “북두성은 변함없이 북쪽에 있고 남극성은 변함없이 남쪽에 있다”는 송을 지어 사람에게
보여준 것이다.
그러므로 “북두성․남극성은 있을 자리에 있는데, 하늘까지 넘실대는 흰 물결은 평지에서 일어난다”
고 하였다. 갑자기 평지 위에서 파란을 일으킨다면 어찌하겠는가? 이를 자기 본분사〔事上〕에서 엿
본다면 쉽겠지만 사량분별로 찾는다면 끝까지 찾을 수 없을 것이다. 이는 마치 무쇠말뚝과 같아
흔들어 뽑으려 해도 뽑히지 않으며, 주둥이를 떼려 해도 안되는 것이다. 그대들이 여기에서 머뭇
거리며 헤아린다면, 알려 해도 알지 못하며 그치려 해도 그치지 못하고 어리석음만을 어지러이
들추어낼 것이다. 바로 이것이 “(가난하여) 속옷도 없는 장자(長子)의 아들”인 것이다.
한산시(寒山詩)는 다음과 같다.
세상에 나서는 갖가지 고생
그 속에서 괜히 이러쿵저러쿵.
재주가 있어도 초야에 버려지고
세도가 없으니 사립문도 잠궜어라.
해가 솟아도 바윗굴은 어둡고
연기가 사라져도 골짜기는 황혼이라.
그 가운데 장자의 아들
모두가 (가난하여) 속옷도 없구나.
불과원오선사벽암록 권제5
제51칙 암두의 최후의 언구〔巖頭末後句〕
(수시)
시비가 생기자마자 혼란스러워 마음을 잃게 되고, 단계적으로 설명하지 않으면 또한 알 수 없다.
말해보라. (설명을) 늘어놓아야 할까 아니면 그만두어야 할까? 여기에 이르러서 실오라기만큼이라
도 알음알이가 있어, 말에 막히고 기연이나 경계에 얽매인다면, 모두 풀에 의지하고 나무에 붙은
〔依草附木〕것처럼 허망한 짓이 될 뿐이다. 설령 완전히 벗어난 상태에 이르렀다 하여도 만 리나
떨어진 곳에서 고향을 바라보는 것과 같을 뿐이다. 이를 알겠느냐? 아직 알지 못했다면 (설명이
붙여지지 않은 채로) 그대로 있는 공안을 깨치도록 하라! 거량해보리라.
(본칙)
설봉스님이 암자에 주석할 때에 두 스님이 찾아와 예배를 하자,
-무엇 하느냐? (두 놈의 죄를) 똑같은 죄목으로 판결하라.
설봉스님은 그들을 보고서 암자 문을 열고 몸을 내밀면서 말하였다.
“뭐냐?”
-귀신같이 잘도 보는군. 구멍 없는 피리이다. 꽉 들이받았다.
객스님 또한 “뭐냐?”라고 말하자,
-진흙으로 만든 탄환이로군. 방음 장치가 된 판대기〔亶毛拍板〕이다.
화살과 칼날이 서로 버티고 있는 것처럼 절묘하군.
설봉스님은 머리를 숙이고 암자로 되돌아가버렸다.
-물렁물렁한 진흙 속에도 가시가 있다. 마치 용에게 발이 없고 뱀에게 뿔이 돋는 것과 같다.
여기에서는 어떻게 손을 대기 어렵네.
그 스님이 그 뒤 암두(巖頭)스님 처소에 이르자,
-(암두스님에게) 물어봐야만 되지. 같은 길을 가는 사람이어야 알 것이다.
암두스님이 물었다.
“어디에서 오는가?”
-반드시 작가 선지식이라야만 대답할 것이다. 이놈이 번번이 실패한다.
(설봉스님과 함께) 동참한 사람이 아니었더라면, (이 객승을) 그냥 놓쳐보낼 뻔했다.
“영남(嶺南) 지방에서 왔습니다.”
-무슨 소식을 전하려고 왔느냐? 반드시 이 소식을 밝혀야 한다. 설봉스님을 보았느냐?
“설봉스님한테는 갔다 왔느냐?”
-속셈을 감파해버린 지 오래이니 가보지 않았다고 말하지는 못하겠지.
“갔다 왔습니다.”
-진실한 사람 만나기 어렵다. 양쪽(설봉스님과 암두스님)에게 모두 헤어나지 못했군.
“무슨 말을 하더냐?”
-결국은 이런 꼴이 되고 마는군.
스님이 지난날에 했던 대화를 말씀드리자,
-결국은 이런 꼴이 되고 마는군. 거듭거듭 잘못하는구나.
암두스님이 말하였다.
“그가 무슨 말을 하더냐?”
-바로 때려쳤어야 옳지. 콧구멍(급소)을 잃어버렸다.
“설봉스님은 아무런 말씀 없이 머리를 숙이고 암자로 돌아가버렸습니다.”
-또 졌구나! 그대들은 말해보라, 설봉스님이 뭐라고 했는지를.
“아-아, 내가 그를 처음 만났을 때 그에게 마지막 한마디를 일러주지 않았던 것이 후회스럽다.”
-큰 파도는 아득히 질펀하고 흰 물결은 하늘까지 넘실거린다.
“그에게 일러주었더라면 천하 사람들이 설봉스님을 어찌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문둥이가 짝을 끌고 가는구나. 꼭 그렇지 않다. 수미산이라도 부서질 것이다. 말해보라,
그의 올 가미가 어디에 있는가를.
그 스님이 여름 안거〔夏安居〕 끝에 전에 있었던 이야기를 다시 들추어내어 법문을 청하였다.
-그래도 정신을 차리지 못했군. 도적이 가버린 지 한참되었다. 도적이 떠난 뒤에 활을 당기는
격 이군.
“왜 진작 묻지 않았느냐?”
-선상(禪床)을 들어 엎어버렸어야 옳았다. 벌써 지나가버렸다.
“감히 쉽게 여쭙지 못했습니다.”
-이 방망이를 이 스님에게 먹였어야 한다. 콧구멍을 뚫어버렸다. (하안거 동안) 감옥 속에 틀어
박혀 못된 지혜만 키웠구나. 두 번 거듭된 잘못이다.
“설봉스님이 나와 한 가지(덕산스님의 제자이므로)에서 나기는 했으나, 나와 똑같지는 않다.”
-하늘과 땅을 뒤덮었군.
“말후구를 알고저 하는가? 다만 이것뿐이다.”
-같은 배 탄 사람들은 모두 속이는군. 나 원오는 믿지 않는다. 하마터면 구별하지 못할 뻔했다.
(평창)
종문의 가르침을 일으켜 세우려면, 반드시 당면한 문제의 핵심을 분별하여 진퇴와 시비를 알아야
하며 죽이고 살리며 잡고 놓아줌을 밝혀야 한다. 만일 눈동자를 갖추지 못했으면서, 이러쿵저러쿵
묻기도 하고 대답하기도 한다면, 목숨을 다른 사람의 손아귀에 맡긴 거나 다름없다는 사실을 결코
모른 것이다.
그런데 설봉스님과 암두스님은 모두 덕산(德山)스님 밑에서 동참수학했다. 그 객스님은 설봉스님
을 참방하고서도 그 느낀바가 그저 그랬고 암두를 뵙고서도 눈꼽만치도 깨치지 못하였다. 부질없
이 두 노스님을 번거롭게 하면서 묻고 답하고 사로잡고 놓아주었으니 예나 지금이나 천하인에게
까다롭고 배배 꼬이게 하여 이를 밝히려 해도 밝힐 수 없게 만든 것이다.
말해보라, 까다롭고 배배 꼬인 곳이 어디에 있는가를. 설봉스님이 두루 총림을 편력하긴 했으나
나중에 오산(鰲山)으 주막에서 암두스님의 한마디에 격발되어 의심 덩어리를 완전히 끊고 크게
사무칠 수 있었던 것이다.
암두스님은 그 뒤 사태(회창법란)를 만나 어느 강가〔鄂渚湖〕에서 뱃사공이 되었는데 강의 양쪽
언덕에 각기 판자 하나를 걸어 놓고 사람이 와서 판자를 두드리면, 암두스님은 “그대는 어느쪽으
로 가려고 하느냐?”고 묻고 갈대 숲 사이에서 노를 흔들면서 나왔었다.
설봉스님은 영남으로 돌아가 암자에 주석하게 되었는데, 객스님도 오랫동안 참구했던 사람이었다.
설봉스님은 그가 오는 것을 보고 암자 문을 열고 몸을 내밀면서 “뭐냐?” 말하였다. 요즈음 사람에게
이렇게 물으면 대뜸 뭐라고 말했을텐데, 이 스님은 또한 괴짜였다. 도리어 그에게 “이 뭐냐?”라고
하자, 설봉스님이 머리를 숙이고 암자로 되돌아가버렸다. 더러는 이를 “말없는 이해”라 하나,
이 스님이 어떻게 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어떤 사람은 “설봉스님이 이 스님에게 한 번 질문을 당하고 곧 아무런 말씀 없이 암자로 돌아가
버렸다”고 말하지만, 설봉스님에게 목숨을 노리는 날카로운 곳이 있었음을 참으로 모른 것이다.
설봉스님이 비록 적절하기는 했다. 그러나 몸은 숨겼지만 그림자가 나타난 것을 어찌하랴.
이 스님이 그 뒤 설봉스님을 하직하고 이 공안에 대해서 암두스님에게 물어보려고 그곳에 도착
하자, 암두스님이 물었다.
“어느 곳에서 왔느냐?”
“영남에서 왔습니다.”
“설봉스님을 만나봤느냐?”
이 물음의 뜻을 알아차리려거든 단박에 착안해야만 한다. 스님은 말하였다.
“만나보았습니다.”
“무슨 말씀을 하시던가?”
이 또한 괜히 해본 말이 아닌데 이 스님은 미처 깨닫지 못하고, 그저 그의 말에 휘둘리고 말았다.
이에 암두스님이 말하였다.
“그(설봉스님)가 무슨 말을 하더냐?”
“그는 머리를 숙인 채 아무런 말없이 암자로 돌아가버렸습니다.”
그 객스님은 암두스님이 짚신을 신고 자신의 마음속을 몇 바퀴나 돌았는지 전혀 알지 못했던
것이다.
암두스님은 말하였다.
“아-아, 처음 설봉스님을 만났을 때 그에게 뒷부분의 한마디를 일러주지 않았던 것이 후회스럽다.
그에게 일러주었더라면 천하 사람들이 설봉스님을 어찌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암두스님도 강한 자(설봉스님)를 부추기고 약한 자(객스님)는 도와주지 않았다. 이 스님은 여전히
깜깜하여 흑․백을 분별하지 못한 채 마음속 가득히 의심을 품고서 “설봉스님이 모르더군요”하고
천연덕스럽게 말하였다.
여름 안거 끝에 전에 말했던 대화를 말씀드리면서 암두스님에게 다시 법문을 청하자, 암두스님은
말하였다.
“왜 진작 묻지 않았더냐?”
암두스님에게 꾀가 생긴 것이다. 객스님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감히 쉽사리 말씀드리지 못했습니다.”
“설봉스님이 나와 같은 가지에서 나오긴 했으나 나와 똑같지는 않다. 말후구를 알고저 하느냐?
다만 이것이니라.“
암두스님은 너무 눈썹〔眉毛〕을 아끼지 않고 자세하게 말해주었다. 여러분은 결국 이를 어떻게
이해하려는가?
설봉스님이 덕산스님의 회상에 있으면서 밥짓는 일을 하였는데 하루는 공양이 늦자 덕산스님이
바리때를 들고 법당으로 내려오니 설봉스님이 말하였다.
“종도 울리지 않았고 북소리도 나지 않았는데 이 늙은이가 어디로 바리때를 들고 가는가?”
덕산스님은 아무런 말없이 머리를 숙인 채 방장실로 돌아가버렸다.
설봉스님이 이를 암두스님에게 말하자 암두스님은 말하였다.
“아이고 가엾게도 덕산스님이 뒷부분의 한마디를 몰랐구나.”
덕산스님이 이 소문을 듣고 시자에게 그를 방장실로 불러오게 한 후 물었다.
“네가 노승을 인정하지 않느냐?”
암두스님이 가만히 그 뜻을 아뢰자, 덕산스님이 다음날 상당(上堂) 법문을 했느데 평소와 같지
않았다.
암두스님은 승당(僧堂) 앞에서 손뼉을 치고 크게 웃으며 말하였다.
“반갑구나! 말후구를 알았구나. 이제부터는 천하의 그 누구도 덕산스님을 당해내지 못할 것이다.
그렇기는 하지만 3년뿐이다.”
이 공안 가운데 설봉스님은 덕산스님이 말이 없는 것을 보고서 아주 적절했다고 여겼겠지만
도둑을 붙잡았음을 몰랐던 것이다. 그는 일찍이 도둑을 붙잡았기에 뒤에 와서 도적을 놓아줄줄 안
것이다. 그러므로 옛사람〔樂普山 元安스님〕이 말하기를 “맨 마지막에서 한 한마디가 비로소 견고한
관문에 이르렀다”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암두스님이 설봉스님보다 훌륭하다”고 하지만 이는
잘못 안 것이다.
암두스님은 항상 이 기틀을 사용하여 대중 법문을 하였다. “눈 밝은 놈은 (집착의) 소굴에 빠지지
않아, 외물을 물리치는 것을 으뜸으로 삼고 외물을 좇는 것을 하급으로 삼는다.“ 이 말후구는 설령
(달마) 조사를 친견하여도 알 수 없을 것이다. 덕산스님이 공양이 늦어져 늙은이가 몸소 바리때를
들고 법당으로 가자, 암두스님은 “가엾게도 덕산스님이 아직 마지막 뒷부분의 한마디를 모르고
계시구나”라고 하였는데, 설두스님이 이를 염(拈)하였다.
“일찍이 애꾸눈 용〔獨眼龍 : 明招得謙스님〕이 말하는 것을 들었더니, 원래 외알눈〔一隻眼〕만
갖추었을 뿐이다. 이는 덕산스님이 이빨 빠진 호랑이임을 참으로 모른 것이다. 만일 암두스님이
이를 알고서 깨뜨려주지 않았더라면 어제와 오늘이 같지 않음을 어떻게 알았겠는가. 여러분은 말후
구를 알고저 하는가? 늙은 오랑캐(달마스님)가 알았다고는 인정해도 깨쳤다고는 인정하지 않는다.”
예로부터 지금까지 공안은 가시덤불처럼 천차만별이니, 그대들이 이를 철저히 사무치게 터득한다면
천하 사람들이 당해낼 수 없으며 삼세의 모든 부처님도 곧 그대의 가르침을 받을 것이다.
그대들이 아직 철저히 깨치지 못했으면, 암두스님이 말한 “설봉스님이 나와 같은 가지에서 나오긴
했으나 나와는 다르다”는 말을 참구하라. 이 한 구절에 몸을 벗어날 곳이 있을 것이다.
설두스님의 송은 다음과 같다.
(송)
마지막 한마디를
-언어 이전의 소식인걸! 참되다고 말하려 했더니만 쯧쯧. 보려고 했다가는 눈이 멀고 만다.
그대에게 말하노니
-혀가 땅에 떨어졌다. 말로 할 수 없다. 머리만 있고 꼬리가 없으며 꼬리만 있고 머리가 없다.
밝음과 어둠이 쌍쌍으로 어울리는 시절이구나.
-말많은 노인이군. 소에 뿔이 없고 호랑이에 뿔이 돋는 것과 같다. 이것도 쌍쌍, 저것도 쌍쌍.
같은 가지에서 나온 것은 모두 알지만
-이 무슨 종족일까? 피차가 서로 관계가 없군. 그대는 남쪽 소상(瀟湘)으로, 나는 북쪽 진(秦)나라로
간다.
죽음을 달리한다는 것은 전혀 모르는군.
-주장자가 나의 손에 있는데 어찌하여 산승(원오스님 자신)을 괴이하게 여기는가?
그대들은 어찌 하여 목숨을 남의 손에 쥐어주었는가?
까맣게 모르는군.
-한 방 얻어맞고 싶냐? 알 리가 없고말고.
석가와 달마도 잘 분별해보아야만 알 수 있네.
-온 대지 사람들이 칼을 잃고 혀가 끊어졌네. 나는 이렇지만 다른 사람은 그렇지 않다.
늙은 오랑캐가 알았다고는 인정할 수 있어도 깨쳤다고는 인정치 않겠다.
남북동서로 돌아가련다.
-수습했다. 발 아래 오색 실을 두루고 있다(설두스님이 아직 자취를 못 버리네그려).
그대의 주장자를 빌려다오.
한밤중에 일천 바위를 뒤덮은 흰 눈을 함께 보노라.
-아직 반 정도뿐이다. 저 대지에 눈이 질펀하듯 많은 사람이 있다 할지라도 아는 사람이 없구나.
눈먼 놈들이다. 말후구를 알았느냐? (원오스님은) 탁쳤다.
(평창)
“말후구를 그대에게 말하노니”라고 하여 설두스님이 이 말후구를 송(頌)해준 것은 그 수준을 아주
낮추어 상대를 위한 것이었다. 이에 송을 지어 노래하기는 했으나 털끝만큼 조금 노래했을 뿐이니,
(말후구를) 투철히 사무치기에는 아직도 미흡하다.
다시 크게 입을 벌리어 말하기를 “밝음과 어둠이 쌍쌍으로 어울리는 시절이구나”는 그대들에게
아주 가느다란 (방편의) 길을 터놓은 것이며, 그대들을 위하여 한 구절〔一句〕로 송하여 몽땅 끝내
버린 것이다. 그리고 끝에서 다시 (흰 눈이 어떻다는 둥) 주석을 붙였다. 이는 다음 경우과 같은
것이라 하겠다. 초경(招慶)스님이 어느날 나산(羅山)스님에게 물었다.
“암두스님이 이렇고 저렇다(같은 가지에서 태어나고……)고 하는데 이 무슨 뜻입니까?”
나산스님이 “대사!”하고 불러서, “네!”하고 대답하니, 나산스님은 말하였다.
“한편으론 밝기도 하고 한편으론 어두운 것이요.”
그러자 초경스님이 감사의 절을 올리고 갔다가 사흘이 지난 뒤에 또다시 물었다.
“전일에 스님께선 베푸신 자비를 입긴 했으나 간파하지 못하였습니다.”
“마음을 다하여 그대에게 일러주었다.”
“스님께서는 분명하게 설명해주십시오.”
“그렇다면 대사께서 의심하는 곳에서 물어보십시오.”
“한편으론 밝기도 하고, 한편으론 어둡기도 한 것이란 무엇입니까?”
“같이 나기도 하고, 같이 죽기도 한 것입니다.”
초경스님은 그 당시 감사의 절을 올리고 떠나갔다.
그 뒤 어떤 스님이 초경스님에게 물었다.
“같이 나기도 하고 같이 죽기도 할 때는 어떠합니까?”
“개 주둥이 닥쳐라.”
“대사께서도 입 닥치고 공양이나 드시지요.”
그 스님이 다시 나산스님에게 찾아와 물었다.
“같이 나서 같이 죽지 않을 때는 어떠합니까?”
“뿔 없는 소와 같은 격이지.”
“같이 나기도 하고, 같이 죽기도 할 때는 어떠합니까?”
“호랑이에게 뿔이 있는 것과 같다.”
말후구란 바로 이러한 도리이다.
나산스님의 회하에서 어떤 스님이 이것을 다시 초경스님에게 묻자, 초경스님이 말하였다.
“너나 나나 모두 알고 있다. 왜냐하면 동승승주(東勝昇洲)에서 한마디 하면 서구야니주(西瞿耶尼
洲) 사람도 알고, 천상에서 한마디를 말하면 인간에서도 알아, 마음과 마음끼리 서로 알며, 마주보고
서로 알기 때문이다.”
“같은 가지에서 났다”는 것은 그래도 알기 쉽지만, “죽음은 달리한다”는 것은 전혀 알 수 없으니,
석가와 달마가 알려고 해도 알지 못할 것이다.
“남북동서로 돌아가련다”는 것은 그래도 조금 나은 경계가 있다 하겠다.
“한밤중에 일천 바위를 뒤덮은 흰 눈을 함께 보노라”고 하였는데, 말해보라, 이는 밝음인지
어둠인지, 같은 가지에서 나온 것인지, 같은 가지에서 죽은 것인지를.
안목을 지닌 납승이라면 이를 분별해보도록 하라.
제52칙 조주의 돌다리〔趙州石橋〕
(본칙)
어떤 스님이 조주스님에게 물었다.
“조주스님 돌다리의 소문을 들은 지가 오래인데 막상 와보니 외나무다리〔略彴〕뿐이군요.”
-그래도 호랑이 수염을 잡아당기는 사람이 있었군. 이 또한 납승의 본분 일이다.
“그대는 외나무다리만 보았을 뿐, 돌다리는 보질 못했군.”
-노련하게도 틈을 찌르네. 이 늙은이가 (지도해주느라고) 몸을 다 바쳐버리는구나.
“어떤 것이 돌다리입니까?”
-낚시에 걸렸군. 과연 예상했던 대로군.
“나귀도 건너고 말도 건너지.”
-일망타진해버렸구나. 온 누리 사람들이 숨도 내쉬지 못하고 마는군.
한 번 죽으면 다시는 살지 못한다.
(평창)
조주(지금의 河北省) 땅에는 돌다리가 있었는데 이는 이응(李膺)이 만든 것이라 하며 지금까지도
천하에 유명하다. 약작(略彴)이란 외나무다리를 말한다.
이 스님은 조주스님의 체통을 깎아내리려는 의도에서 물었다.
“조주 땅의 돌다리의 소문을 들은 지가 오래인데, 막상 와보니 외나무다리뿐이군요.”
“그대는 외나무다리를 보았을 뿐 돌다리는 보질 못하였군.”
그 스님의 물음은 그저 평소에 하던 이야기였지만, 조주스님이 이를 가지고 그를 낚자 스님은 과연
낚시에 걸려들었다. 그의 질문에 이어서 대뜸 물었다.
“어떤 것이 돌다리입니까?”
“나귀도 건너고 말도 건너지.”
참으로 말 가운데 몸을 벗어날 곳이 있다 하겠다. 조주스님이 몽둥이질로 하거나 덕산스님이
소리를 질렀던 것과는 달리 말로써 죽이기도 살리기도 하였다. 이 공안을 살펴보면 일상생활 속에서
기봉(機鋒)을 겨루는 듯하다. 그렇지만 접근하기가 몹시 어렵다.
하루는 수좌와 함께 돌다리를 구경하다가 수좌에게 물었다.
“누가 만들었는가?”
“이응이 만들었습니다.”
“만들 때 어디부터 손을 댔는가?”
수좌가 말이 없자 조주스님은 말하였다.
“평소에는 ‘돌다리 돌다리’ 잘도 말하면서도 물으니 손을 댄곳도 모르는구나.”
또 하루는 조주스님이 땅을 쓸고 있는데 어떤 스님이 물었다.
“스님께서는 선지식이신데 어떻게 해서 티끌이 있으십니까?”
“바깥에서 온 것이다.”
그러자 다시 물었다.
“청정한 가람에 어떻게 해서 티끌이 있습니까?”
“여기 티끌 한 점(질문하는 스님이) 또 있구려.”
“어떤 것이 도(道)입니까?”
“저 담 너머에 있다.”
“이런 길을 묻지 않고 대도(大道)를 물었습니다.”
“큰 길은 장안(長安)으로 뚫려 있지.”
조주스님은 이러한 기봉(상대를 일깨우는 말)만을 쓰는 경향이 있다. 그는 우리 주변에 흔히 있는
이야기를 가지고 사람들을 지도하되, 칼날을 상하거나 손을 다치지 않았다. 반드시 고준(孤峻)하여
이상과 같이 기봉을 매우 정교하게 사용할 수 있었다. 설두스님의 송은 다음과 같다.
(송)
고고하게 위세를 부리지 않지만 도는 드높나니,
-모름지기 이런 경지에 이르러야 비로소 될 것이다. 그 말씀 아직도 귓전에 맴돈다. 본분납자를
지도하는 것일랑은 조주스님에게 맡겨라.
바다에 들어가면 반드시 큰 자라를 낚아야지.
-요새가 되는 나루터에 딱 버티고 있으니 범부도 성인도 왕래하지 못한다. 새우나 소라는 물을게
못 되지. 대장부는 (오직 조주 한 명일 뿐) 두서넛 있을 수 없지.
우습다, 같은 시대의 관계(灌溪 : ?~895)스님이여!
-또 이런 사람이 있어 이처럼 찾아와, 이같은 기관을 사용하는 솜씨가 있었구나.
쏜살같은 급류라고 말할 줄은 알았지만 부질없는 헛수고였네.
-조주스님에 비하면 아직도 반 정도에 불과하다. 비슷하기는 해도 옳지는 않다.
(평창)
“고고하게 위세를 부리지 않지만 도는 드높다.”는 것은 설두스님이 평소에 사람을 지도할 때 현묘
(玄妙)함과 고고함을 내세우지 않았던 조주스님을 노래한 것이다. 이는 총림에서 흔히 말하는
“허공을 타파하고 수미산을 쳐부수며, 바다 밑에 티끌이 일고 수미산에 파도가 쳐야 조사의 도에
걸맞다“는 것과는 다르기 때문에, 설두스님은 “고고하게 위세를 부리지 않지만 도는 드높다”고
말했던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만 길 벼랑에 서서 불법의 기특한 영험을 나타내는 것이 비록 고고하고 높다고
하겠지만, (조주스님은) 고고함을 세우지 않아도 평상시 자연스럽게 또굴또굴 매끈하게 수행자를
제접한다. 위세를 부리지 않아도 저절로 위엄스레 되고 높이지 않아도 저절로 높아지며, 상대방과
의 주고받는 말〔機〕속에서 고고함이 우러나와 현묘함이 그대로 드러난다. 그러므로 설두스님은
“바다에 들어가면 큰 자라를 낚아야 한다”고 말하였다. 안목을 갖춘 종사(조주스님)께서는 무심히
말을 한마디 하거나 한 기틀을 써서, 새우나 소라는 낚지 않고 대뜸 큰 자라를 낚아올리니 참으로
작가답다. 이 한구절로써 앞의 공안을 밝혀준 것이다.
“우습다, 같은 시대의 관계스님이여!”라고 하였는데 듣지 못하였는가? 어떤 스님이 관계스님에게
물었다.
“관계스님의 소문을 들은 지 오래인데 막상 와 보니 삼〔麻〕이나 축일 정도의 작은 웅덩이로군.”
“그대는 삼 축일 정도의 작은 웅덩이만 보았지, 관계는 보질 못했네.”
“어떤 것이 관계입니까?”
“쏜살 같은 급류이지.”
또 어떤 스님이 황룡스님에게 물었다.
“황룡스님의 소문을 들은 지 오래인데 막상 와 보니 능구렁이〔赤斑蛇〕만 보이는군요.”
“그대는 능구렁이만 보았지 황룡은 아직 보질 못했군.”
“어떤 것이 황룡입니까?”
“굽이굽이 서려 있지.”
“갑자기 금시조(金翅鳥 : 용을 잡아 먹는 새)를 만났을 때는 어떻습니까?”
“목숨을 보존하기 어렵겠지.”
“그렇다면 그 금시조를 만나면 먹히겠군요.”
“그대의 공양에 감사드리오.”
이상의 얘기는 모두가 고고한 경지를 세운 것이니 옳기는 옳다하겠지만 너무나 힘(인위적 조작)을
쓴 것이므로 조주스님이 평상시 했던 것과는 같지 못한 것이다. 그러므로 설두스님은 “쏜살같은
급류라 말할 줄은 알았지만 부질없는 헛수고였다.“고 말한 것이다. 관계스님과 황룡스님과의 경우는
그만두더라도 조주스님이 말한 “나귀도 건너고 말도 건넌다”는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가려보아라.
제53칙 마조의 들오리〔馬祖野鴨〕
(수시)
온 세상 어디에도 감추지 못하고 완벽한 기봉을 드높이 드러내며, 어디에도 막힘이 없어 한수
한수마다 몸을 벗어날 기틀이 있으며, 말마다 사심이 없어 사물마다에 살인의 뜻이 있다.
말해보라,옛사람이 필경에 어느 곳에서 쉬었는가를. 거량해보리라.
(본칙)
마조(馬祖)스님이 백장스님과 함께 길을 가다가 들오라기 날아가는 모습을 보고
-시원찮은 두 놈들이 풀 속에서 헤매는군. 갑자기 돌아봐서 뭐하려는가?
스님이 “이게 뭐지?”라고 하니
-큰스님이라면 알아야 할텐데. 이 늙은이가 질문의 요지도 모르는군.
백장스님이 말하였다.
“들오리입니다.”
-목숨이 이미 다른 사람의 손아귀에 있구나. 오로지 죄상을 말했을 뿐 (판결은 아직 내리지 않았
다.) 두 번째 물음이 더 악랄하다.
“어디로 날아가느냐?”
-앞에 쏜 화살은 그래도 가벼운데 뒤에 쏜 화살이 깊이 박혔군.
두 번째 쪼아대니 마땅히 스스로 가 알아야지.
“날아가버렸습니다.”
-단지 그의 말만 쫓아다니다 보면 정통으로 빗나가버린다.
스님이 마침내 백장스님의 코끝을 비틀자,
-부모가 낳아준 이 목숨의 존망이 다른 사람의 손아귀에 있다니…….
창끝을 되돌려 콧구멍을 찢어버리는구나.
백장스님이 고통을 참느라 신음하였다.
-이 아파하는 여기에 ‘그것’이 있군. 그래도 들오리라고 말하겠느냐!
참으로 가려운 데를 알겠느 냐!
스님은 말하였다.
“뭐 날아가버렸다고?”
-다른 사람을 속이지 않았으면 좋으련만……. 이 늙은이가 원래 귀신 굴 속에서 살릴살이를 하는군.
(평창)
바른 안목으로 살펴보면 백장스님은 정인(正因 : 佛性)을 갖추었고 마조스님은 바람이 없는 데에서
풍랑을 일으켰다고 하겠다. 여러분이 불조와 동등한 스승이 되고저 한다면 백장스님을 참구하여야
하고, 자신마저 구제하지 못하려거든 마조스님을 참구하여야 한다. 옛사람들을 살펴보면 하루종일
‘여기’에 마음을 두지 않은 적이 없었다.
백장스님은 어린 나이에 세속을 떠나 삼학(三學)을 두루 연마하였는데 때마침 대적(大寂 : 마조
스님의 시호)이 남창(南昌) 지방에서 교화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이에 마음을 다하여 그에게
귀의하여 20년간 시자를 하였다. 그런 뒤에 다시 참방하였을때의 일할(一喝)에 처음으로 크게
깨쳤다. 요즈음 어떤 사람은 “본디 깨달을 것이 없는데도 깨닫는 문을 괜히 만들어 이런 짓을 했다”
고 말들 하나 이러한 견해는 마치 사자 몸에 있는 벌레가 사자의 살을 갉아먹는 것과 같다. 듣지
못하였느냐, 옛사람〔菅子〕이 말하기를 “원천이 깊지 않으면 멀리까지 흐르지 못하고 지혜가 크지
못한 자는 멀리 보지 못한다“고 한 것을. 만일 깨침이 없는 데서 괜히 이런 일을 만든 것이라
한다면 어떻게 오늘날까지 불법이 전해올 수 있었겠는가…….
살펴보면, 마조스님과 백장스님이 길을 가다가 날아가는 들오리를 보았는데, 마조스님인들 들오리
임을 왜 몰랐겠는가?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그처럼 물었을까?
말해보라, 그의 의도가 어디에 있었을까?
백장스님은 오로지 그의 뒤를 따라 걸었을 뿐이다. 마조스님이 마침내 그의 콧구멍을 비틀자
백장스님이 고통을 참지 못하고 신음하니 마조스님은 말하였다.
“뭐 날아가버렸다고?”
이에 백장스님은 단박에 깨쳤다. 지금도 어떤 사람은 이를 잘못 이해하고 이 이야기를 물어보면
‘아야, 아야!’하고 소리를 지르는데 좋아하시네. 뛰어넘질 못하는군.
종사께서 사람을 지도함에 모름지기 철저하게 가르친다. 그가 깨치지 못했음을 알고서는 칼날을
상하고 손을 다치면서도 그만 두질 않았다. 요는 백장스님이 ‘이 일’을 깨치도록 지도하는데 있다.
깨치기만 한다면 언제 어디에서나 마음대로 사용하겠지만 깨치지 못하면 세속 이치〔世諦〕에 말려
들게 되는 것이다.
마조스님이 그 당시 코를 비틀지 않았더라면 세속 이치에 말려 들게 되었을 것이다. 모름지기
경계와 외연을 만나면 확 뒤집어서 자기에게로 귀결시켜 온종일 조금도 흐트러짐이 없도록 하는
그것을 ‘성품의 자리〔性地〕가 명백하다’고 한다. 다만 풀에 의지하고 나무에 붙거나 (마치 종놈이)
나귀 앞에 섰다가 말 뒤에 섰다가 하는 것 같은 (주체적이지 못한) 알음알이가 무슨 쓸모가 있겠
는가.
마조스님과 백장스님의 이와 같은 기용(機用)을 살펴보면 밝고 밝으며 신령하고 신령한〔昭昭靈靈〕
듯하나, 그렇다고 밝고 밝으며 신령하고 신령한 곳에 안주하지는 않는다. 백장스님이 아픔을 참느라
신음소리를 냈다. 만일 이를 알아차리면 온 세상 어디에도 감추지 못하고 사물마다 그대로 나타날
것이다. 그러므로 “한 곳에 투철하면 천곳 만곳이 단박에 뚫린다”고 한다.
마조스님이 그 이튿날 상당법문을 하였는데 대중들이 모이자마자 백장스님이 나와서 방석을 말아
버리니 마조스님은 곧 법좌에서 내려와 방장실로 돌아가면서 백장스님에게 물었다.
“내가 아까 상당 설법도 하지 않았는데 너는 무엇 때문에 방석을 말아버렸느냐?”
“어제 스님에게 코끝을 비틀린 아픔을 당했기 때문입니다.”
“너는 어제 어느 곳에 마음을 두었느냐?”
“오늘은 코끝이 아프질 않습니다.”
“너는 ‘오늘의 일’을 훤히 알았구나.”
백장스님이 이에 절을 올리고 곧장 시자실로 돌아가 통곡을 하자, 함께 일하는 시자가 물었다.
“그대는 왜 통곡을 하느냐?”
“그대가 큰스님을 찾아가 물어보아라.”
시자가 마조스님을 찾아가 묻자 마조스님은 말하였다.
“너는 백장에게 가서 물어보도록 하라.”
시자가 다시 시자실로 돌아와 백장스님에게 물으니 백장스님은 갑자기 껄껄대며 큰 소리로 웃었
다. 이에 동료인 시자가 말하였다.
“조금 전에는 통곡을 하더니만 지금은 무엇 때문에 웃는거냐?”
“조금 전에는 통곡을 했었지만 지금은 다시 웃는다.”
이를 살펴보면 그는 깨친 뒤에는 자유자재하여 얽매임에서 벗어나 자연히 영롱하게 빛났던 것이다.
설두스님의 송은 다음과 같다.
(송)
들오리여!
-무리를 이루고 떼거리를 지었군. 또 한 마리가 있다.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군.
-무슨 수작이냐! 삼대 같고 좁쌀처럼 (자세하게 알려주네).
마조스님은 만나자 말을 걸었네.
-이러쿵저러쿵 말로 해서야 언제 끝마칠 기약이 있겠는가? 말로 할 수 있겠느냐?
오로지 마조스님만이 (백장스님이) 준수한 놈임을 알았다.
산․구름․바다․달 등 온갖 것들에 대해 모두 말했으나
-동쪽 집(마조스님)의 국자 자루는 길고 서쪽 집(백장스님)의 국자 자루는 짧다.
많이 말해줬다 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여전히 모르고서 도리어 날아가려고 한다.
-할! 그가 말을 이해 못 했다고 말하지 말라. 어디로 날아갔는가?
날아가려 하는 순간
-목숨이 다른 사람의 손아귀에 있다. 이미 그에게 자세하게 일러주었다.
잡아들였네.
-노파심이 간절하군. 또다시 무엇을 말하느냐?
말해보라, 말해보라. (이 말은 설두스님의 착어임)
-무엇을 말하라고? 산승에게 말하라 해도 안되며 들오리 울음소리를 내서도 안된다.
아이고, 아이고! 그 자리에서 삼십 방망이는 때렸어야 옳다. 어느 곳으로 날아갔을까?
(평창)
설두스님이 첫머리에서 “들오리여!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군”하고 노래하였는데, 말해보라.
몇 마리나 있었을까?
“마조스님은 만나자 말을 걸었네”라는 것은 마조스님이 백장스님에게 “이게 뭐냐?”라고 묻자,
백장스님이 “들오리입니다”라고 대답했던 것을 노래한 것이다.
“산․구름․바다․달 등 온갖 것들에 대해 이야기했다”는 것은, 백장스님에게 “어디로 갔느냐?”고
거듭 물어 그를 지도하고자 하는 마조스님의 의지가 자연스럽게 고스란히 드러났는데도
백장스님이 여전히 모르고서 “날아가버렸다”고 말하여, 거듭 빗나간 것을 노래한 것이다.
“날아가려 하는 순간, 잡아들였네”는 설두스님이 죄상에 의거하여 판결을 내린 것이다. 다음에
“말해보라, 말해보라”라고 (설두스님이) 말했는데, 이는 설두스님이 몸을 한 번 피한 것이다.
말해보라, 어떻게 말해야 할까를. 아픔을 참는 신음소리를 내도 잘못이며, 아픔을 참는 신음소리를
내지 않는다면 또한 어떻게 해야 할까?
설두스님이 그처럼 매우 오묘하게 노래할 수는 있었지만 뛰어넘지는 못했는데야 어찌하랴.
제54칙 운문의 손을 펴보임〔雲門展手〕
(수시)
생사를 뚫고 나오며 (機關 : 조사들이 상대의 깨달음을 격발시켰던 사연)도 헤치고 나와 무심히
(우리를 속박하는) 무쇠를 끊고 못을 자르며 어느 곳에서나 하늘을 덮고 땅을 덮는다.
말해보라, 이는 어떠한 사람의 경지인가를. 거량해보리라.
(본칙)
운문스님이 어떤 스님에게 물었다.
“요즈음 어디에 있다가 왔느냐?”
-서선사(西禪寺)라고 말해서는 안되지. 상대를 유인하고 있네. 동서남북 어느 곳이라도 말해서는
안된다.
“서선사(西禪寺)에서 왔습니다.”
-예상했던 대로군. 너무 솔직히 말해버렸군. 당시에 본분종사를 기르는 솜씨를 보여주었어야 옳다.
“서선사에서 요즈음 무슨 얘기들을 하던가?”
-(내가 대신) 말해주고 싶어도 큰스님(설두스님)을 놀라게 할까 염려스럽다. 찾아온 상대방을 잘
파악했군. 역시 큰스님처럼 매한가지로 잠꼬대를 하는구나.
스님이 양 손을 벌리자,
-졌구나. 도적을 끌어들여 집안을 망쳤다. 참으로 사람을 어리둥절케 하는구나.
운문스님이 한 차례 뺨을 후려치니
-법령대로 다스렸군. 잘 쳤다. 이처럼 통쾌한 일은 만나기 어렵지.
스님은 말하였다.
“제게도 할 말이 남아 있습니다.”
-그대는 진술을 번복하려고 하느냐? 대장의 깃발을 찢고 북을 빼앗는 솜씨가 있는 듯하구나.
운문스님이 문득 두 손을 펴 보였다.
-위험하군. 청룡(靑龍)을 타고서도 몰 줄을 모르다니…….
스님이 말이 없자,
-애석하다.
운문스님이 대뜸 후려쳤다.
-그냥 놓아주어서는 안된다. 이 방망이는 운문스님이 먹어야 한다. 왜냐하면 처벌해야 할 일을
처벌하지 않으면 도리어 환란을 부르기 때문이다. 큰스님(설두스님)은 어느 정도 방망이를 먹어야
할까? 한 번 봐주겠다. 용서해주지 않으면 어떻게 해야 할까?
(평창)
운문스님이 이 스님에게 “요즈음 어디에서 왔느냐?”라고 묻자, 스님은 “서선사(西禪寺)에서 왔다”고
말하였다. 이는 정면으로 맞대놓고 하는 대화로서 번뜩이는 번갯불과도 같다. 운문스님의 “요즈음
무슨 말들을 하느냐?”는 말은 지극히 일상적인 것인데도 스님 또한 작가인터라 대뜸 거꾸로 운문
스님을 시험하느라 양 손을 벌리었다. 여느 사람이었다면 이 한 차례 시험을 당하여 허둥지둥
어찌할 바를 몰랐겠지만 운문스님은 전광석화와 같은 기봉이 있어 바로 한 차례 후려쳤던 것이다.
스님이 한 “때리는 것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제게도 할 말이 남아 있습니다”라는 말은 이 스님이
상대의 공격을 한 번 피한 것이다. 그러므로 운문스님이 놓아주면서 양 손을 벌렸던 것인데 스님이
말이 없자 운문스님은 후려쳤던 것이다.
이를 살펴보면 운문스님은 원래 작가였다. (이 스님이) 한 걸음을 나아가면 그만큼 깨달아,
그 의도를 알았으며, 앞을 바라볼 줄도 알고 뒤를 돌아볼 줄도 알고서 근원을 잃지 않았다.
그러나, 이 스님은 앞을 바라볼 줄만 알았지 뒤를 돌아보지 못했다. 송은 다음과 같다.
(송)
일시에 호랑이 머리와 꼬리를 잡으니
-살인도(殺人刀)․활인검(活人劒)이다. 반드시 이 (운문)스님이어야만 이렇게 할 수 있다.
일천 병사는 얻기 쉬워도 한 장수는 얻기 어렵다.
늠름한 위엄이 4백 고을〔州〕에 떨치네.
-천하 사람의 혀를 옴짝달짝 못하게 하네. 천지를 뒤덮는 기상이다.
묻노니 어쩌면 그처럼 준험한가!
-눈먼 놈이 남을 형틀에 채울 수 없고, 애꾸눈이 남을 두르릴 수는 없다.
설두스님은 원래 모르고 있었다. (설두)스님은 곧바로 착어를 했다.
설두스님은 “한 번 용서해주노라”고 했다.
-용서해주지 않는다면 또한 어찌할텐가? 천하 사람들이 일시에 손해를 보았다.
(원오스님은) 선상을 한 번 내려쳤다.
(평창)
설두스님이 이 송은 지극히 알기 쉽지만 큰 뜻은 운문스님의 기봉을 노래한 것이다. 그러므로
“일시에 호랑이의 머리와 꼬리를 잡았다”고 말한 것이다.
옛사람(羅山道閑)스님의 말에 “호랑이 머리에 타고서 호랑이 꼬리를 잡아 첫마디에 대뜸 종지를
밝힌다”고 하였다.
설두스님은 자백에 따라서 죄를 판결하므로, 운문스님이 호랑이 머리에 탈 줄도 알고 호랑이
꼬리를 잡을 수 있었던 것을 좋아했다. 스님이 양 손을 벌리자 운문스님이 대뜸 후려쳤던 것은
호랑이 머리에 탄 격이며, 운문스님이 양 손을 폈는데도 스님이 말이 없자 또다시 후려쳤던 것은
호랑이 꼬리를 잡은 격이다. 일시에 머리와 꼬리를 잡은 안목은 유성(流星)처럼 순식간에 해치운다.
자연히 전광석화처럼 늠름한 위엄이 4백 고을에 떨쳤으며 온 누리에 세찬 바람이 일어난 것이다.
“묻노니 어쩌면 그처럼 준험한가”라는 말은 참으로 준험한 곳이 있다 하겠다. 설두스님이 “한 번
용서해주니라”고 말하였는데, 말해보라. 지금 용서해주지 않는다면 어떻게 할까?
온 대지 모든 사람이 방망이를 맞아야 할 것이다.
요즈음의 선객들은 모두가 “그가 손을 벌릴 때 그에게 본분납자를 기르는 솜씨를 보여주었어야
한다”고들 말하지만 이는 비슷하기는 하나 옳지는 않다. 운문스님이 이처럼 그대들을 쉬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반드시 따로이 솜씨가 있어야 할 것이다.
제55칙 도오의 말할 수 없음〔道吾不道〕
(수시)
은밀하고도 완전한 참인 이 소식을 대뜸 깨치고, 갖가지의 반연속에서도 그것을 (주체적으로) 다룰
수 있어 단박에 당처를 알아챈다. 전광석화 속에서도 잘못을 순간에 끊고, 호랑이 머리를 타고
꼬리를 잡는 경지에 천 길 벼랑처럼 우뚝 서 있구나. 그러나 이런 경지는 그만두더라도 가느다란
(방편의) 길을 놓아 수행자를 지도하는 부분이 있느냐? 거량해보리라.
(본칙)
도오(道吾 : 769~835)스님이 (제자인) 점원(漸源)스님과 함께 어느 집에 이르러 조문을 하게
되었는데 점원스님이 관을 두드리며 말하였다.
“살았습니까? 죽었습니까?”
-무슨 말을 하느냐? 얼씨구, 정신을 차리지 못했군. 이놈이 (생사의) 양쪽에 있구나.
도오스님이 말하였다.
“살았어도 말로 할 수 없고 죽었어도 말로 할 수 없다.”
-용이 우니 안개가 피어나고 호랑이가 휘파람을 부니 바람이 이는구나. 모자를 사고 나서
머리 치수를 잰다. 노파심이 간절하구나.
“왜 말로 못합니까?”
-빗나가버렸다. 예상을 했지만, 잘못 알았군.
“말로는 안되지! 말로는 안되지!”
-더러운 물을 대뜸 끼얹는다. 앞에 쏜 화살은 그래도 가볍지만 뒤에 쏜 화살은 깊이 박혔다.
돌아오는 길에
-정신을 바짝 차려라.
점원스님이 말하였다.
“스님은 어서 말해보시오. 말하지 않는다면 치겠습니다.”
-그래도 조금은 나은 편이다. 귀뚫은 사람〔穿耳客 : 달마스님〕은 만나기 어렵고 뱃전에 칼 잃은
곳을 새긴 자〔刻舟人〕는 많구나. 이같이 어리석은 놈은 쏜살처럼 지옥에 빠진다.
“때리려면 때려라. 그러나 말은 할 수 없다.”
-두번 세번이라도 일을 정중히 해야지. 쳐라! 이 늙은이가 온몸에 흙탕물 투성이가 되었군.
처음 먹은 마음을 고칠 수야 있나!
점원스님이 후려쳤다.
-잘 쳤다. 말해보라, 그를 쳐서 무엇 하려고 했는가를. 억울한 매는 원래부터 맞을 놈이 따로
있었는데…….
그 뒤 도오스님이 돌아가시자 점원스님이 석상(石霜)스님에게 이르러 전에 있었던 얘기를 말하니,
-다 알고서도 한 번 해본거지. 옳은지 그른지 모르겠으나 옳다면 매우 기특한 일이다.
석상스님은 말하였다.
“살아도 말로 못하고 죽어도 말로는 못한다.”
-너무도 시원하군. 이 밥상을 받을 사람은 따로 있다.
“무엇 때문에 말하지 못합니까?”
-말은 마찬가지나 의도는 서로 다르다. 말해보라, 전일에 물었던 것과 같은지, 다른지를.
“말할 수 없지, 말할 수 없고 말고.”
-온 천하에 그득하네. 조계의 물결(두 스님의 말씀)이 서로 닮았다고 한다면, 수없이 많은 멀쩡한
사람을 땅속에 파묻는 꼴이 되고 만다.
점원스님은 그 말에 깨우침이 있었다.
-눈먼 놈아! 산승(원오스님)을 속이지 말았어야 좋았을 걸…….
하루는 점원스님이 삽을 들고 법당 위에서 동쪽에서 서쪽으로, 서쪽에서 동쪽으로 오가자,
-그렇지만 죽음 속에서 살아났구나. 돌아가신 (도오)스님께 그것을 보여드렸더라면 좋았을 걸.
그에게 묻지 말고 먼저 이놈이 당한 한바탕 수치를 살펴보라.
석상스님은 말하였다.
“무얼 하는가?”
-후수를 두지 말아라!
“선사(先師)의 영골(靈骨)을 찾고 있습니다.”
-상여 뒤에 약봉지를 달았구나(차는 떠났다). 애당초에 조심하지 못했던 것이 후회된다.
너는 무슨 말을 하느냐?
“거대한 파도는 까마득히 질펀하고 흰 물결은 하늘까지 넘실거리는데 무슨 선사의 영골을 찾겠다는
것이냐?“
-그래도 그에게 본분소식을 되돌려주었어야 했다. (잡놈들이) 무리를 이루고 떼를 지울 정도로
많은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설두스님은 착어하였다.
“아이고, 아이고!”
-너무 늦었다. 도적이 떠난 뒤에 활을 당긴 격이다. (세 명 모두) 한 구덩이에 묻어버렸어야 옳다.
점원스님은 말하였다.
“쓸데없이 애를 쓰네.”
-말해보라, 귀결점이 어느 곳에 있는가를. 돌아가신 스승께서 전에 그대에게 뭐라고 말했던가.
이 놈이 처음부터 끝까지 아직까지도 빠져나오지 못하는군.
태원(太原)의 부상좌(孚上座)는 말하였다.
“선사(先師)의 영골이 아직도 남아 있구나.”
-대중이여, 보았느냐? 번뜩이는 번갯불과 같다. 이 무슨 낡아빠진 짚신인가?
(태원은 그래도) 조금은 나은 편이다.
(평창)
도오스님이 점원스님과 함께 어느 집에 이르러 조문하였는데 점원은 널〔棺〕을 두드리면서
말하였다.
“살았습니까? 죽었습니까?”
도오스님은 말하였다.
“살았어도 말로 못하며, 죽었어도 말로 못한다.”
이 말 속에서 알아차리고 그 의도를 알면 이는 바로 생사를 투철하게 벗어나는 관건이 되겠지만,
그렇지 못하면 반드시 정통으로 빗나가게 될 것이다.
잘 살펴보라. 옛사람들은 행주좌와 언제나 ‘이 일’만을 참으로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을.
남의 집에 가 조문하면서도 점원스님이 널을 두드리면서 “살았습니까? 죽었습니까?”하니,
도오스님은 조금도 그 물음의 핵심에서 벗어나지 않고 그에게 “살았어도 말로 할 수 없고 죽었어도
말로 할 수 없다”고 하였다. 점원스님도 완전히 빗나가 그가 한 말에 끄달려 다시 말하였다.
“무엇 때문에 말로 할 수 없다고 하십니까?”
“말로 할 수 없지, 말로 할 수 없다.”
도오스님은 자비스러움이 굽이굽이 서려 있다. 그런데도 점원스님은 잘못으로 인해 점점 더 잘못을
더해나갔다.
점원스님은 그때까지도 스스로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돌아오는 길에 또다시 말하였다.
“스님께서는 빨리 말해주시오. 말하지 않으면 치겠습니다.”
이놈에게 좋은지 나쁜지를 가릴 줄 아는 능력이 어찌 있었겠는가? 이야말로 이른바 좋은 마음씨를
좋게 갚지 못한 것이라 하겠다.
그러나 도오스님은 변함없이 노파심이 간절하여 다시 말하였다.
“때리려면 때려라. 그러나 말로는 할 수 없다.”
그러자 점원스님은 후려쳤다. 비록 매를 맞기는 했지만, 그는 한 수 이긴 셈이다. 도오스님은
이처럼 (땀방울이 아닌) 핏방울이 뚝뚝 떨어지도록 그를 지도했으나 점원스님 깨닫지 못하였다.
도오스님은 맞은 후에야 점원스님에게 말하였다.
“그대는 떠나도록 하라. 절에 있는 책임자가 이 사실을 알게 되면 그대에게 화를 미칠까 염려스
럽다.”
이에 남모르게 점원스님을 빠져나가도록 하였다. 도오스님은 참으로 자비로웠던 것이다. 점원스님
그 뒤 작은 절에 이르러 행자(行者)가 외우는 관음경(觀音經)의 “비구의 몸으로 제도를 받을 자에겐
비구의 몸을 나타내어 설법을 한다”는 구절을 듣고 문득 크게 깨친후 말하였다.
“내가 그 당시에 스승을 잘 모르고 나쁜 짓을 했구나. 이 일이 언구에 있지 않다는 것을 몰랐구나!”
옛사람(운문스님)의 말에 “도량이 한없이 큰 대인조차도 말에 놀아나는 수가 있다”고 하였는데,
어떤 사람은 이를 망정으로 이해하고서 “도오스님의 ‘말로는 할 수 없지, 말로는 할 수 없네.’라는
그것도 말해버린 것이다”고 하며, 이는 등을 돌려 사람으로 하여금 찾지 못하도록 만드는 격이라고
한다. 이처럼 이해한다면 어떻게 평온할 수 있겠는가. 실다운 경지를 밟았다면 실오라기만큼의
간격도 없을 것이다.
듣지 못하였는가, 칠현녀(七賢女)가 시다림(屍陀林)에서 거닐다가 시체를 가리키면서 물었던 이야
기를.
“시체는 여기에 있는데 (본래의) 사람은 어디에 있느냐?”
큰언니가 말하였다.
“뭐냐, 뭐냐?”
그러자 한 무리의 사람들이 일제히 무생법인(無生法忍)을 깨쳤다 한다.
말해보라, 깨친 사람이 몇이나 있는가를. 천 명 만 명 중에서 다만 한 사람만 있을 뿐이다.
점원스님은 그 뒤 석상스님에게 이르러 전에 있었던 이야기를 말하자, 석상스님은 앞과 같이
말하였다.
“살았어도 말로 할 수 없고 죽었어도 말로 할 수 없다.”
“무엇 때문에 말로 하실 수 없다 하십니까?”
“말로는 할 수 없지, 할 수 없고말고.”
이 말에 그는 문득 깨치게 되었다. 어떤 날 가래를 가지고 법당 동쪽에서 서쪽으로, 서쪽에서 동쪽
으로 왔다갔다 한 것은 자기의 견해를 드러내려는 의도였다. 예상대로 석상스님이 그에게 물었다.
“무얼 하는가?”
“선사의 영골을 찾습니다.”
석상스님은 바로 점원스님의 핵심을 쳐부수어 말하였다.
“나의 ‘이 자리’는 큰 파도가 까마득히 질펀하고 흰 물결이 하늘까지 넘실거리는데 무슨 선사의
영골을 찾겠다는 것이냐.”
점원스님이 이미 선사의 영골을 찾았는데 석상스님은 무엇 때문에 그처럼 말했을까? ‘이 자리’에
이르러서 “살아도 말로 할 수 없고, 죽었어도 말로 할 수 없다”는 뜻을 말 끝나자마자 알아차릴 수
있다면, 처음부터 끝까지 기틀을 몽땅 마음대로 활용할 수 있겠지만 그대가 이러쿵저러쿵 헤아리며
찾고 생각한다면 알기 힘들 것이다.
점원스님이 “쓸데없이 애쓰네”라고 한 것은, 그가 깨친 뒤에 자연스럽게 기특하게 말할 수 있었던
것이다. 도오스님의 한조각 정수리 뼈〔頂骨〕가 황금빛처럼 빛났고, 두드리면 구리 소리처럼 맑았
음을 알 수 있다.
설두스님이 한 “아이고, 아이고!”라는 착어에서 의도했던 귀결점은 양쪽에 있었다. 태원 부상좌가
“선사의 영골이 아직도 있다”고 한 것은 참으로 지당한 말이다. 이 한 토막의 이야기들은 단박에
한쪽을 드러냈다. 말해보라, 어떤 것이 요체를 깨닫는 것이며, 어떤 것이 쓸데없이 애쓴 것인지를.
“한 곳을 뚫으면 천곳 만곳이 일시에 뚫린다”는 말을 듣지도 못하였는가?
“말로는 할 수 없지, 할 수 없고말고”라고 한 곳에서 그 의도를 꿰뚫을 수 있다면 바로 천하
사람의 혀끝을 꼼짝 못하게 꽉틀어막겠지만, 그렇지 못한다면 반드시 스스로 참구하여 스스로가
깨달아야 한다. 그러므로 헛되이 세월을 보내지 말고 시간을 아껴야 한다.
설두스님의 송은 다음과 같다.
(송)
토끼와 말은 뿔이 있고
-(모든 것을) 싹 잘랐구나! 참으로 기특하구나.
소와 염소는 뿔이 없도다.
-(모든 것을) 싹 잘랐구나! 어떻게 생겼을까? 다른 사람을 속일 수 있어도 (나는 못 속여!)
가는 털도 끊겨서
-천상천하에 나 홀로 존귀하다. 그대는 어디를 더듬거리냐!
산과 같구나.
-(그런 것이) 어디에 있느냐? 고연히 파도를 일으켰다. 생명의 깊숙한 곳을 아프게 찔렀구나.
황금빛 영골이 지금도 남아 있어
-(주둥이질 못하게) 혀끝을 잘라버리고 목구멍을 막아버려라. 한쪽을 잘 드러내었다. 사람들이
‘저놈’을 모를까 염려스러울 뿐이다.
흰 물결이 하늘까지 넘실거리는데 어디에서 찾으랴.
-한 번 용서해주었다. 자기 속에 갖추어져 있으면서도 모르고 지나갔군.
눈과 귀 속 어디에도 없 지.
찾을 곳이 없음이여!
-예상했던 대로이지. 그래도 약간 나은 편이군. 과연 깊은 구덩이에 빠져버렸다.
신발 한 짝을 가지고 서천으로 돌아가다가 잃어버렸어라.
-조상이 변변치 못하여 자손에게까지 누를 끼쳤다. (원오스님은 탁자를) 치면서 말한다.
무엇 때문에 여기에 있느냐?
(평창)
설두스님이 회통하여 설명을 잘하는 것으로 보아 운문스님의 자손답다. 일구 가운데 삼구(三句)의
겸추(鉗鎚)를 갖추고, 말하기 어려운 곳을 말해주고 열리지 않는 곳을 열어주면서 핵심을 송(頌)
하였는데, 그는 곧 “토끼와 말은 뿔이 있고 소와 염소는 뿔이 없다”하였다.
말해보라, 토끼와 말이 어떻게 뿔이 있으며 소와 염소가 어떻게 해서 뿔이 없는가를. 앞의 말을
깨칠 수 있다면 설두스님이 사람을 지도하는 의도를 비로소 알게 될 것이다.
어느 사람은 이를 잘못 이해하고서 “말로는 할 수 없다는 그것이 바로 말함이며, 문구로써는 나타
낼 수 없다는 그것이 바로 구절 있는 것이기 때문에, 토끼와 말은 뿔이 없는데도 뿔이 있다 말했고,
소와 염소는 뿔이 있는데도 뿔이 없다고 말했다”고 하지만, 이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일이다.
옛사람은, 온갖 변화로써 이와 같은 신통을 나타낸 것이 그대들의 이와 같은 정령(精靈) 귀신
소굴을 타파해주기 위함인 줄을 몰랐던 것이라 하겠다. 이를 깨칠 수 있다면 이 깨쳤다는 말도 필요
하지 않다. “토끼와 말은 뿔이 있고 소와 염소는 뿔이 없나니, 가는 털도 끊겨서 산과 같다”는 네
구절〔四句〕의 송은 마니보주(摩尼寶珠)와도 같은데, 설두스님은 이를 통째로 그대 앞에 토해내버린
것이다.
맨 끝에는 모두가 죄인의 자백서에 따라서 죄를 다스린 것이다.
“황금빛 영골이 지금도 남아 있어 흰 물결이 하늘까지 넘실거리는데 어느 곳에서 찾으랴”라는
것은, 석상스님과 태원 부상좌의 말을 노래한 것이다. 어째서 찾을 곳이 없을까?
“신발 한 짝을 가지고 서천으로 돌아가다가 잃어버렸다”는 것은 신령한 거북이 자취를 남긴
것이니, 이는 설두스님이 몸을 뒤재켜 사람을 지도한 곳이다.
옛사람은 “활구를 참구해야지 사구를 참구하지 말라”고 하였다. 이미 잃어버렸는데 저들 모두는
무엇 때문에 서로가 다투는 것일까?
제56칙 흠산의 화살 한 대〔欽山一鏃〕
(수시)
모든 부처님은 일찍이 세사에 출현하였으되 사람에게 한 법도 전해준 적이 없으며, 조사도 일찍
이 서쪽에서 오셨으되 마음을 전수해주지 않았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이를 알지 못하고 밖으로
치달리며, 자기 자신에게 있는 하나의 대사인연(大事因緣)도 일천 성인이 어찌하지 못한다는 것을
모르고 있다.
에, 그런데 지금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며, 말하면서도 말하지 못하고, 알면서도
알지 못하는 것을 어디에서 얻을 수 있을까? 만일 통달하지 못했다면 갈등(언어)의 소굴속에서
알아차리도록 하라. 시험삼아 거량해보리라.
(본칙)
거양선객(巨良禪客)이 흠산(欽山)스님에게 물었다.
“한 화살촉〔鏃〕으로 세 관문을 격파했을 때는 어떠합니까?”
-준험하군. 기특하다. 참으로 용맹스런 장수로군.
“관문 속에 있는 주인공을 내놔보아라.”
-정면으로 묻는군. 그대들은 반드시 알아야만 한다. 뒷산은 높고 앞산은 낮다.
“잘못이 있다면 반드시 고쳐야지요.”
-상황을 보고 작전을 폈다. 벌써 두번째에 떨어져버렸다.
“당장에 고쳐봐라!”
-사로잡기도 하고 놓아주기도 한다. 바람이 스치니 풀잎이 쓰러진다.
“화살은 잘 쏘셨는데 맞지는 않았습니다”하고 거양선객이 바로 나가버리자,
-예상했던 대로군! 진술을 번복하려고 머뭇거리는가? 두 번째 방망이는 사람을 쳐도 아프지 않다.
흠산스님이 말하였다.
“잠깐, 스님!”
-부르기는 쉬워도 보내기는 쉽지 않을걸. 불러 세워놓고 무얼 하려고.
거양선객이 머리를 돌리자,
-과연 붙잡아들이지 못하는군. 적중했다.
흠산스님이 멱살을 움켜쥐고 말하였다.
“한 화살로 세 관문을 격파하는 것은 그만두고 저 흠산에다 화살을 쏘아보아라.”
-호랑이 아가리 속에 몸을 디밀었구나. 역공격을 당했군. 외로움을 보고서도 실행하지 않는 것은
용기가 없는 것이다.
거양선객이 말을 할 듯 망설이자,
-과연 찾지를 못했군. (원오스님이) 두드리면서 애석하다고 말하였다.
흠산스님이 일곱 방망이를 치면서 말하였다.
“이놈이 앞으로도 30년은 더 헤매야 정신을 차리겠군!”
-법령을 제대로 수행하였군. 시작도 있고 끝도 있으며 처음도 바르고 끝도 바르구나.
이 방망이는 마땅히 (그 선객이) 흠산스님에게 먹였어야 했는데…….
(평창)
거양선객은 또한 어엿한 장수였다. 흠산스님의 손아귀에서 요리조리 움직이다 안장에서 떨어졌다
가도 번개처럼 말에 솟구쳐올라 싸우다가 뒤에 가서 안타깝게도 활은 부러지고 화살도 다한 것이다.
그러나 장군 이광(李廣)은 아름다운 명성이 있으면서도 제후에 봉해지지 않았으나, 이러기도
흔하지는 않다.
이 공안은 한 번 나오고 한 번 들어가며 한 번 사로잡고 한 번 놓아주면서, 상황에 직면해서는
정면에서 보여주기도 했다. 정면에서 보여주면서도 상황에 신속했으니, 이는 모두 유무 득실에
떨어지지 않은 것이다. 이를 현묘한 기틀〔玄機〕이라고 말한다. 조금이라도 역량이 부족하면 바로
엎어지고 거꾸러진다.
그러나 스님도 영특한 납자였다. 그의 물음은 사람을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으며 흠산스님도
작가종사라 바로 그의 물음의 핵심을 알아버린 것이다.
촉(鏃)이란 화살촉을 말한다. “한 화살촉으로 세 관문을 뚫을 때는 어떠합니까?”라고 묻자, 흠산
스님은 알면서도 “그대가 쏘아서 뚫을 수 있는 것은 그만두고 관문 속에 들어 있는 주인공을 내놔
보아라”고 하자, 거양선객은 “잘못이 있으면 반드시 고치겠습니다”라고 말하니 기특하다 하겠다.
흠산스님은 “지금 당장 고쳐봐라!”고 하였다. 흠산스님이 이렇게 그를 지도했던 것을 살펴보면,
흠산의 물음에는 조금도 빈틈이나 부족한 곳이 없었다.
뒤이어 거양선객이 “화살은 잘 쏘셨지만 맞추지는 못했습니다”하고 바로 소매를 떨치며 나가
버리니, 흠산스님은 그처럼 말하는 것을 보자마자 곧 그를 불러세웠다.
“잠깐만, 스님!”
거양선객은 과연 그대로 가지 않고 머리를 돌렸다. 이에 흠산스님은 멱살을 움켜쥐고서 “한 화살이
세 관문을 꿰뚫었다는 것은 그만두고, 이 흠산에게 화살을 쏴보아라”고 하였다. 양선객이 머뭇
거리자, 흠산스님은 바로 일곱 방망이를 후려친 후 다시 뒤이어 한 편의 주문을 외웠다.
“이놈이 앞으로도 30년은 더 헤매야 정신을 차리겠군.”
요즈음의 선객들은 “무엇 때문에 여덟 번 치지도 않고, 여섯 번 치지도 않고서 일곱 번만 쳤을까?
그렇지 않다면 그가 ‘이 흠산스님에게 화살을 쏴보아라’고 말할 때 바로 후려쳤어야지!”라고 다들
말하는데 이는 비슷하기는 하지만 옳지는 않다. 이 공안은 가슴속에 조그만치도 이러니 저러니 하는
도리와 계교를 품지 않고 언어 밖으로 뛰어나야만, 일구로써 세 관문을 타파할 수 있으며 화살을 쏠
수 있다. 만일 옳으니 그르니 하는 마음이 있다면 끝내 찾을 수 없을 것이다. 당시 거양선객이
그러한 사람이었다면 흠산스님 또한 매우 위험했을 것이다. 그가 이 법령을 시행하지 못하였기에
거꾸로 당했던 것이다.
말해보라, 관문 속의 주인공은 결국 어떠한 사람을까? 설두스님의 송을 살펴보아라.
(송)
그대에게 관문 속의 주인공을 내보내노니
-적중했다. 정통으로 빗나갔다. 뒤로 물러서라, 뒤로 물러서.
활을 쏜 무리들은 거칠게 굴지 말라.
-한 번 죽더니 다시는 살아나질 못하는군. 완전히 잘못됐다. 이미 지나가서 흔적도 없다.
눈을 보호하자니 반드시 귀먹을 것이오.
-좌측 눈의 무게는 반 근이지. 한 번 용서해준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다.
귀를 버리자니 두 눈이 멀게 될 터이다.
-우측 눈의 무게는 여덟 냥이다. 하나밖에 얻을 수 없다. 앞으로 나아가면 구덩이과 참호에 떨어
질 것이오, 물러가면 사나운 호랑이가 다리를 물 것이다.
아아! 한 화살이 세 관문을 타파함이여!
-모든 기틀이 이처럼 (관문을 타파해) 올 때는 어찌하겠는가? 무슨 말을 하느냐? 산산조각났다.
화살이 지난 뒷길은 또렷또렷 분명하다.
-죽은 놈아! 쯧쯧! (원오스님은) 치면서 말한다. 보았느냐?
그대는 듣지 못하였느냐?
-문둥이가 짝을 끌고 간다. (옛사람의) 말을 들먹이네.
현사(玄沙)스님이 하신
-어느 것인들 현사(玄沙)스님이 아니랴!
“대장부란 천지가 개벽되기 이전에 이미 마음으로 조종을 삼는다”라는 말을.
-한 구절〔一句〕로 많은 흐름〔衆流〕을 끊어버리니 만 가지 기틀이 깡그리 녹아 없어졌다.
(대장부의) 본래면목이 나(원오스님)의 손안에 있다. 천지 세계가 생기기 이전에 어느 곳에서
안신입명(安身立命)을 하랴!
(평창)
이 송의 몇 구절은 귀종(歸宗)스님의 송 가운데서 취한 것이다. 귀종스님이 지난날 이 송을 지은
것이 계기가 되어 “귀종(歸宗)”이라 법호를 삼았는데 종문(宗門)에서는 이를 “종지(宗旨)가 담겨 있는
말”이라 한다. 그 뒤 동안(同安)스님이 소문을 듣고서, “양공(良公)은 훌륭하게 화살을 쏘았지만
결국 과녁을 적중 시키진 못하였다”고 하자 어떤 스님이 물었다.
“어떻게 해야 과녁을 적중시킬 수 있습니까?”
“관문 안의 주인공은 어떤 사람인가?”
그후 어떤 스님이 이 일을 들어 흠산스님에게 말하니 흠산스님이 말하였다.
“양공(良公)이 만일 (동안스님이) 위와 같이 말했던 대로 이해했다면 흠산스님의 (위와 같은) 질문을
결국은 면했을 것이다. 비록 그렇기는 하지만, 동안스님 또한 좋다고는 할 수 없다.” 설두스님은
“그대에게 관문 속의 주인공을 내보내니”라고 송했는데, 이는 눈을 떠도 옳고 감아도 옳다.
유형․무형을 모조리 잘라 세 동강이〔三段〕로 만들었다.
“활을 쏜 무리들은 거칠게 굴지 말라”는 것은 훌륭하게 활을 쏠 수 있다면 거칠게 굴지 않겠지만
잘 쏘지 못한다면 거칠게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눈을 보호하자니 반드시 귀가 먹을 것이요, 귀를 버리자니 두 눈이 소경이 될 터이다”라고 하였
는데, 말해보라, 눈을 보호했는데 무엇 때문에 귀가 멀며, 귀를 버렸는데 무엇 때문에 두눈이 소경이
되는 걸까? 이 말은 취하거나 버림이 없어야만이 꿰뚫을 수 있으니, 취하거나 버림이 있으면 이를
알아차리기 어려울 것이라는 말이다.
“아아, 한 화살이 세 관문을 타파함이여! 화살이 지난 뒷길이 또렷또렷 분명하다”는 것은 거양
선객이 “한 화살촉으로 세 관문을 타파했을 경우는 어떠합니까?”라고 묻자, 흠산스님이 “관문속의
주인공을 내놔보아라”는 대답을 송한 것이다. 그리고 나중의 동안(同安)스님의 공안까지도 모두가
화살이 지난 뒷길이다. 궁극적으로 어떻다는 것이냐?
“그대는 듣지 못하였느냐? 현사(玄沙)스님의 ‘대장부는 천지가 개벽되기 이전에 벌써 마음으로
조종(祖宗)을 삼는다’라는 말을”이라고 하였는데, 늘 마음을 조종의 지극한 법〔極則〕으로 삼는데,
여기에서는 무엇 때문에 천지가 채 발생하기 이전에 도리어 이 마음이 조종(祖宗)이 된다고
하였을까? 만약 이 시절 인연을 꿰뚫을 수 있으면 관문 속에 있는 주인공을 알 수 있을 것이다.
“화살 지난 뒷길이 또렷또렷하다”는 것은, 과녁에 적중하고자 했으나, 화살이 날아간 뒤에 지나간
흔적으로 남아 있다는 것이다. 말해보라, 무엇이 화살이 날아간 흔적인가를. 반드시 제스스로가
정신을 차려야만 알 수 있다.
“대장부는 천지가 개벽되기 전에 이미 마음을 조종으로 삼는다”하였는데, 현사스님은 항상 이
말로써 대중법문을 하였다. 이는 원래 귀종스님의 송이었는데 설두스님이 현사스님의 말이라고 하며
잘못 인용한 것이다.
요즈음 참선하는 사람들이 만약 이 마음으로 조종(祖宗)을 삼는다면 미륵 부처님이 하생(下生)
하도록 참구하여도 모를 것이다. 그러나 대장부란 마음을 으뜸으로 해도 오히려 아손(兒孫)이며,
천지가 나뉘기 이전을 으뜸으로 해도 벌써 두 번째에 떨어진다. 말해보라, 그렇다면 어떤 것이
천지보다도 먼저인가를.
제57칙 조주의 분별하지 않음〔趙州不揀〕
(수시)
깨닫기 이전에도 은산철벽(銀山鐵壁) 같지만 깨달은 뒤에도 본래의 자기는 그대로 원래 은산철벽
이다. 어떤 사람이 ‘그게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그에게 말하리라.
“바로 이런 상황에서, 한 기틀을 내보일 수 있고, 한 경계를 살필 줄 알며, 핵심되는 길목을 꽉
틀어막고 범부도 성인도 어쩌지 못하는 경지라 하더라도, 특별날 것은 없다.” 그렇지 못하다면
옛 사람의 행동을 보도록 하라.
(본칙)
어느 스님이 조주스님에게 여쭈었다.
“지극한 도는 어려움이 없으니 오직 간택을 그만두면 된다고 하는데 어떤 것이 간택하지 않는 것입
니까?”
-이 쇠가시는 많은 사람들이 삼키질 못한다. 반드시 의심하는 사람이 있다.
입이 꽁꽁 얼어붙었 다.
“천상천하에 나 홀로 존귀하니라.”
-괜시리 해골 무더기를 일으켰다. 납승의 목숨을 일시에 뚫어버렸다. 금강으로 주조한 무쇠문서
〔鐵券〕이다.
“이것도 오히려 간택입니다.”
예상했던 대로 그의 말에 놀아나고 마네. 이 늙은이를 한 대 내질러라.
“이 맹추〔田厙奴〕야! 어느 곳이 간택이란 말이냐?”
-산은 높고 돌은 험준하다.
스님은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너에게 곤장 삼십 대를 치리라. 곧바로 눈이 동그래지고 입이 딱 벌어졌다.
(평창)
어느 스님이 조주스님에게 여쭈었다.
“지극한 도는 어려움이 없고 오로지 간택을 그만두면 될 뿐이다…….”라는 구절은 삼조(三祖)스님의
「신심명(信心銘)」 첫 머리에 있는 두 구절인데, 많은 사람들이 잘못 이해하고 있다. 왜냐하면,
“지극한 도란 본래 어려움이 없고 어렵지 않을 것도 없지만 오로지 간택을 그만두면 될 뿐이다”라고
이해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일 이렇게 이해한다면 1만 년이 지난다 해도 (그 의도를) 꿈에도 보지
못할 것이다. 조주스님은 항상 이 말을 가지고 사람들에게 질문을 하였는데 스님이 이 말을 가지고
거꾸로 그에게 물은 것이다.
이를 말에서 찾는다면 그 스님이 도리어 하늘을 놀라게 하고 땅을 흔들겠지만, 어구(語句) 위에
있지 않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다시 30년을 참구하도록 하라. 이 조그마한 문빗장을 뒤집어볼 줄
알아야만이 비로소 알 수 있다. 그러므로 호랑이 수염을 뽑으려면 반드시 본분의 수단이 있어야
한다. 이 스님도 위험과 죽음을 돌아보지 않고 감히 호랑이 수염을 뽑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것도 오히려 간택입니다”고 하자, 조주스님은 그의 입을 막아버렸다.
“이 맹추야! 어느 곳이 간택이란 말이냐?”
만일 이를 다른 사람에게 물었다면 허둥지둥 어찌할 바를 몰랐겠지만 이 늙은이 또한 작가 종사인
데야 어찌하랴. 움직일 수 없는 곳에서 움직이며 몸을 돌릴 수도 없는 상태에서 몸을 돌린 것이다.
그대가 이를 깨닫는다면 모든 악독한 언구와 천태만상의 세간의 희론(戱論)들이 모두 도(道)일
것이다. 만일 분명한 경지에 이르렀다면 조주스님의 자비의 마음을 알게 될 것이다.
전사노(田厙奴)는 복당(福唐 : 복주) 지방의 사람을 욕하는 말로서 지혜롭지 못하다는 뜻이다.
스님이 “이것도 오히려 간택이다”고 하자, 조주스님은 “이 맹추야! 어느 곳이 간택이란 말이냐?”고
하였다.
종사의 안목이 반드시 이래야지만 바다를 뚫고 들어가 곧바로 용을 삼켜버리는 금시조(金翅鳥)처럼
할 수 있을 것이다. 설두스님의 송은 다음과 같다.
(송)
바다처럼 깊고
-이는 누구의 도량(度量)인가? 깊이를 헤아리기 어렵다. 절반도 아직 헤아리지 못했다.
산같이 견고하구나.
-어떤 사람이 이를 흔들 수 있을까? 그래도 (그의 덕에는) 반쯤뿐이 안된다.
등에와 모기가 허공의 사나운 바람을 희롱하고
-이런 놈이 있었지. 과연 제 힘을 알지 못하였군. 자신을 헤아리지 못했다.
땅강아지와 개미가 무쇠기둥을 흔드네.
-한 구덩이에는 다른 흙이 없다(그놈이 그놈이다). 전혀 관계가 없다. (설두)스님은 그 스님과
동참하고 있군.
간택함이여!
-강가에서 물장사를 하네. 무슨 말하느냐? 조주스님이 왔다.
난간에 매단 헝겊북이로다.
-벌써 말 이전에 있다. (설두스님과 조주스님을) 한 구덩이에 묻어버려라. 헤아릴 수 없으리만큼
많다. (원오스님은) 치면서 말했다. 너의 목구멍을 막아버렸다.
(평창)
설두스님은 두 구절(천상천하와 이 맹추)에 주석을 붙여서 “바다처럼 깊고 산 같이 견고하다”라고
했다. 스님이 “이것도 오히려 간택입니다”라고 말하자, 설두스님은 그 스님을 평하기를 “모기나
등에가 허공의 사나운 바람을 희롱하고, 땅강아지와 개미가 무쇠기둥을 흔드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설두스님이 스님의 큰 담력을 칭찬한 것은 상근기의 작용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스님이 감히 이처럼 말하자 조주스님도 그를 놓아주질 않고 바로 “이 맹추야! 어느 곳이 간택
이냐?” 고 하였으니, 이것이 사나운 바람과 무쇠기둥이 아니겠는가.
“간택이여! 난간에 매단 헝겊북이로다”라는 것은 설두스님이 맨 끝에 들춰내서 살아나게 한 것이다.
만일 이를 명백하게 안다면 충분히 그 스님 스스로가 이를 밝힐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듣지 못하였느냐, ‘친히 간절하게 하고저 한다면 언어문구를 가지고 묻지 말라’고 했던
말을. 그러므로 “난간에 매단 헝겊북”이라 한 것이다.
제58칙 조주의 함정〔趙州窠窟〕
(본칙)
어느 스님이 조주스님에게 여쭈었다.
“‘지극한 도는 어려움이 없고 오로지 간택을 그만두면 될 뿐’이라 하였는데 요즘 사람들은 이를
집착하고 있지 않습니까?”
-두 겹의 공안이다. 오히려 네 말도 사람을 의심케 하는 것이다. 저울추를 밟으니 무쇠처럼 견고
하구나. 또한 이런 사람이 있기는 있었구나. 자기의 집착으로 다른 사람을 욕되게 하지 말라.
“전에도 어떤 사람이 나에게 물었으나 5년이 지났건만 잘 모르겠다.”
-낯을 붉히는 것은 바른 말을 하는 것만 못하다. 원숭이가 모충(毛蟲)을 먹고 모기가 무쇠소를
무는구나.
(평창)
조주스님은 일평생 (덕산스님처럼) 몽둥이질을 하거나 (임제스님처럼) 할(喝)을 하지 않았지만 (언구
의) 활용은 몽둥이질이나 할을 능가하였다. 스님의 질문이 매우 기특하다. 만일 조주스님이 아니었다
면 그에게 답변하기란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나 조주스님은 작가였다. 그에게 “전에도 어떤 사람이
나에게 물었지만 5년이 지났건만 아직도 모르겠다”고 하였으니, 묻는 것도 천 길 벼랑에 서 있는
듯하고, 답변 또한 그를 가벼이 여기지 않았다. 이렇게 이해한다면 바로 맞겠지만, 이러쿵저러쿵
말로써 계교해서는 안된다.
듣지 못하였느냐? 투자 법종(投子法宗)스님이 설두스님의 회하에서 서기(書記)로 있었는데,
설두스님이 그에게 “지극한 도는 어려울게 없고 그저 간택을 그만두면 될 뿐”이라 한 말을 참구하여
깨닫게 한 것을. 하루는 설두스님이 그에게 묻기를, “‘지극한 도는 어려움이 없고 오로지 간택을
그만두면 될 뿐’이라 한 뜻이 무엇이냐?”고 하자, 그 스님은 이렇게 대꾸했다. “이 짐승 같은 놈아!
이 짐승아!”
그 뒤 투자산(投子山 : 舒州에 소재함) 에 은거하면서 주지 소임을 보러갈 때는 으레 가사 속에
짚신과 경문을 지니고 다녔다.
“어떤 것이 법종스님의 가풍입니까?”
라고 묻는 스님이 있으면 법종은 말하였다.
“가사 속의 짚신짝이지.”
“그 뜻이 무엇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벌거벗은 다리 아래 동성(銅城 : 舒州의 安慶府의 마을 이름) 고을이 있다.”
그러므로 말씀하시기를
“불공을 올리는 것은 향의 많고 적음에 달려 있지 않다”고 한다. 이를 깨달을 수 있다면 붙잡거나 놓아주는 것을 내 마음대로 할 수 있을 것이다. 앞서 일문일답이 분명하게 고스란히 드러나 있는데
무엇 때문에 조주스님은 “잘 모르겠다”고 하였을까?
“요즘 사람들은 이를 집착하고 있지 않습니까?”라는 것은 조주스님이 소굴 속에 있으면서 답변한
것일까, (아니면) 밖에 있으면서 답변한 것일까? 이는 반드시 언구 위에 있지 않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혹 어느 사람이 골수에 사무치게 믿어 행한다면 용이 물을 얻은 듯, 범이 산을 의지한것과
같을 것이다. 송은 다음과 같다.
(송)
코끼리〔象王〕가 기지개를 켜고
-부귀 중에 부귀이다. 그 누가 오싹하지 않으랴. 좋은 소식이다.
사자는 포효한다.
-작가 중에 작가이다. 모든 짐승의 머리가 쪼개진다. 그 길로 들어가야지.
맛을 헤아릴 수 없는 말씀이여!
-욕하려거든 해라. 주둥이가 모자라면 하나 더 달아줄께. (사람을 붙들어매는 것이) 무쇠말뚝과
같다. 어찌 입을 들이댈 수 있을까? 밝히지 못한 지 5년이 지났다. 일엽편주(一葉片舟)에 당(唐)
나라를 실었구나. 아득하고 커다란 파랑이 일어나니 어느 누가 따로이 좋은 생각을 가지고 있으랴.
사람의 입을 꽉 막아버렸다.
-뱉으려거든 뱉어라. 침이 모자라면 물 떠다 줄까? 쯧쯧! 설두스님, 무슨 말씀하십니까?
동서남북에
-있느냐, 있느냐? 천상천하에 그득하다. 아이고,아이고!
까마귀는 날고 토끼는 달리노라.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지). 한꺼번에 산 채로 묻어버렸다.
(평창)
조주스님이 하신 “전에도 어느 사람이 나에게 물었는데 5년이 지났건만 아직도 모르겠다”는 말은
“코끼리〔象王〕가 기지개를 켜고 사자가 포효하는 것”과도 같다.
“맛을 헤아릴 수 없는 말씀이여! 사람의 입을 막아버렸다.”
“동서남북에 까마귀는 날고 토끼는 달린다”고 하였는데 설두스님이 이 끝 구절을 말하지 못했더
라면 어찌 설두스님이 명성이 지금까지 있겠는가? 이미 까마귀는 날고 토끼는 달렸다. 말해보라,
조주스님․설두스님․산승(원오스님 자신)의 의도가 결국 어디에 있는가를.
제59칙 조주의 지극한 도〔趙州至道〕
(수시)
하늘을 두루고 땅을 감싸며 성인을 뛰어넘고 범부를 뛰어넘으니 백 가지 풀 끝에서 열반의 오묘한
마음을 보이고 창칼이 오가는 와중에서 납승의 목숨을 탁 심사한다.
말해보라, 이는 어떤 사람의 은혜를 입었기에 이처럼 할 수 있었는가를. 거량해보리라.
(본칙)
어느 스님이 조주스님에게 여쭈었다.
“‘지극한 도는 어려울 게 없고 그저 간택을 그만두면 될 뿐’이라 하였는데
-앞의 것을 다시 가져왔구나. 무슨 말을 하느냐? 세 겹의 공안이다.
말을 하기만 하면 그것이 곧 간택인데
-입이 꽁꽁 얼어붙었네.
스님께서는 어떻게 사람을 지도하시겠습니까?”
-이 늙은이를 내질렀군. 크아!
“왜 이 말을 다 인용하지 않느냐?”
-도적질하는 것으로 보아서는 소인의 짓이나, 지혜는 군자를 능가하는구나. 대낮에 도적질하는군.
도적의 말을 타고 도적을 쫓는구나.
“제가 여기밖에 못 외웁니다.”
-둘 다 진흙덩이를 희롱하는 놈들이다. 도적을 만났군. 꼼짝않고 있으니 대적하기 어렵다.
“이 지극한 도는 어려울게 없고 오로지 간택을 그만두면 될 뿐이니라.”
-그래도 (조주스님) 노장님이나 되니까 이렇게 말할 수 있지. 이 스님의 눈동자를 바꿔버렸다.
졌구나.
(평창)
조주스님은 “이 지극한 도는 어려울 게 없고 그저 간택을 그만두면 될 뿐이니라”고 하였으니,
이는 전광석화와도 같아 사로잡고 놓아주며 죽이고 살리기에 이처럼 자재로울 수 있었던 것이다.
총림에서는 모두들 “조주스님은 많은 사람 가운데 뛰어난 말재주가 있었다”고 일컫는다.
조주스님의 평소 이 한 편을 가지고서 대중에게 말하였다.
“지극한 도는 어려울게 없고 그저 간택을 그만두면 될 뿐이라 하였는데, 말을 하기만 하면
곧 그것이 간택이며 명백(明白)이다. 노승은 명백 속에 있지 않은데 그대들은 도리어 이를
보호하거나 아끼겠느냐?“
그때 어떤 스님이 물었다.
“명백 속에 있지 않다면 무엇을 보호하거나 아끼겠습니까?”
“나도 모른다.”
“스님이 모르신다면 무엇 때문에 명백 속에 있지 않다고 말씀하십니까?”
“질문 끝났거든 인사하고 물러가거라.”
뒷날 이 스님은 조주스님의 논리의 틈새를 끄집어내어 조주스님에게 물었다. 질문한 것은 참으로
기특하지만, 이는 마음의 사량분별로 그렇게 한 것이니 어찌하랴. 조주스님이 아닌 다른 사람이었
다면 스님의 물음에 어찌하지 못했을 것이지만, 조주스님은 작가였으니 어찌하겠는가.
“왜 이 말을 다 인용하지 않느냐?”고 하자 이 스님 또한 몸을 비키고 숨을 쉴 줄 알았기에 대뜸
“제가 여기밖에 못 외웁니다”라고 했다. 이는 교묘하게 말을 꾸민 것이라 하겠다. 조주스님은 그가 말했던 대로 그대로 말했지만 마음으로 사량분별하지는 않았다.
옛사람(동산스님)은 “끊임없이 이어가기가 매우 어렵다”고 말하였다. 그는 용과 뱀을 분별하고
길흉을 구별하였으니 그 또한 본분의 작가이다.
조주스님은 이 스님의 눈동자를 바꿔버리면서도 칼 끝에 조금도 흠을 내지 않았으며 사량분별을
하지도 않고 저절로 딱 들어 맞았던 것이다. 여러분은 말을 했다고 해도 안되고 말을 안했다고 해도
안되며, 하지도 않았다고 안하지도 않았다고 해도 안된다. 사구(四句)를 여의고 백비(百非)를 끊은
것이다. 무엇 때문인가? ‘이 일’을 의논하려면 번뜩이는 전광석화처럼 단박에 착안해야만이 볼 수
있으며 머뭇거리거나 주저(躊躇)한다면 목숨을 잃게 될 것이다.
설두스님의 송은 다음과 같다.
(송)
물로 씻을 수도 없고
-무슨 말을 하느냐? 몹시 심오하고 원대하다. 어찌 함께 말할 것이 있으랴.
바람으로 날려버릴 수도 없다.
-허공과도 같다. 당글당글 단단하다. 허공을 보고 하소연하는구나.
범이 걸어가고 용이 지나가니
-그(조주스님)는 자재를 얻었구나. 참으로 기특하다.
귀신이 (놀라서) 소리치고 혼령이 울부짖는다.
-대중들은 귀를 막아라! 바람이 스치니 풀이 쓰러진다. (설두)스님도 그와 함께 동참하지
않았느냐?
머리가 세 척〔三尺〕인 줄 뉘 알리요?
-괴물이로군. 어디에서 온 성인인가? 보았느냐, 보았느냐?
마주하여 말없이 외발로 서 있네.
-쯧쯧! 머리를 움추려라. 한 번 용서해주노라. 산도깨비로다. 용서해줘서는 안되지.
(원오스님은) 탁 때렸다.
(평창)
“물로 씻을 수도 없고, 바람으로 날려버릴 수도 없다.” “범이 걸어가고 용이 지나가니 귀신이
(놀라서) 소리치고 혼령이 울부짖는다”고 하니, 그대들이 입을 댈 곳이 없다.
이 네 구절의 게송은, 조주스님이 대답한 말이 용이 날고 범이 치달리는 것과 같아 스님은 한바탕
수치당한 것을 노래한 것이다. 비단 이 스님 뿐만 아니라 귀신도 (놀라서) 소리치고 혼령도 울부
짖으니, 이는 마치 바람이 부니 풀이 쓰러지는 것과 같다.
끝의 두 구절은 한 자식(설두스님)만이 친히 알아차렸다고 말 할 만하다. “석 자 긴 머리는 누구
일까? 마주하여 말없이 외발로 서 있다”고 하였다. 듣지 못하였느냐? 스님이 옛 대덕스님(동산스님)
에게 묻는 말을.
“무엇이 부처입니까?”
“머리의 길이는 석 자요, 목의 길이는 두 치니라.”
설두스님은 이를 인용하였는데 여러분은 이것을 알겠는가? 산승도 모르겠다. 설두스님이 단박에
조주스님을 고스란히 그렸으니, 그이 진면목이 여기에 있다. 여러분은 반드시 자세히 눈여겨보아라.
제60칙 운문의 주장자〔雲門拄杖〕
(수시)
부처와 중생은 본디 차이가 없는데 산하와 자기가 어찌 차등이 있겠는가? 그러나 무엇 때문에
이 두 가지가 뒤섞여 있는 것일까?
만일 화두를 잘 다스리고 굴리며 요새가 되는 길목을 꽉 틀어막는다면 조금도 실수하지 않을
것이다. 만약 실수하지 않는다면 온 세상 어디에서라도 조금도 까딱할 필요가 없다. 그렇다면
어떤 것이 화두를 잘 다스리고 굴리는 것일까? 거량해보리라.
(본칙)
운문스님이 주장자를 가지고 대중에게 설하였다.
-때에 적절하게 교화하는군. 사람 죽이는 칼이기도 하고 사람 살리는 칼이기도 하다.
그대의 눈동자를 바꾸어버렸다.
“주장자가 용으로 변하여
-뭣하러 번거롭게 그러냐! 변하여 무엇할까?
천지를 삼켜버렸으니
-천하의 납승들이 목숨을 보존치 못한다. 목구멍을 막았느냐? (운문)스님은 어느 곳에서
안신입명(安身立命)을 하려는가?
산하대지는 어디에 있느냐?”
-시방에는 창도 없고 사면에도 문이 없다. 동서남북 사유(四維 : 사방) 상하가 있다고 한다면
이는 미친 소리다. 이를 어찌하랴?
(평창)
에, 그런데 운문스님이 말하기를 “주장자가 용으로 변하여 천지를 삼켜버렸으니 산하대지는 어디에
있느냐?”고 하니, (산하대지가) 있다고 하면 눈먼 봉사이며, 없다고 하면 죽은 놈이다. 운문스님이
사람을 지도했던 뜻을 알았느냐? 나에게 주장자를 돌려다오.
요즈음 사람들은 운문스님이 뚜렷하게 보여준 것을 모르고서, “색계(色界)에 의지하여 마음을
밝히고 사물에 의지하여 이치를 밝혔다”고 한다. 그렇다면 저 석가부처님께서 49년간 설법하심에
잘못된 논의가 세상에서 일기 되리라는 것을 예측 못 했던 것은 아니겠지만, 무엇 때문에 또다시
꽃을 들어 보이셨으며 가섭은 미소를 지었을까? 부처님께서 설명을 붙여 말하기를 “나에게 정법안장
열반묘심(正法眼藏涅槃妙心)이 있으니 이를 마하대가섭에게 전하노라”라고 하셨는데, 왜 다시 굳이
심인(心印)만을 전하였을까?
여러분이 이미 조사의 문하객이 되었는데 오로지 그것만을 전한 마음을 밝힐 수 있느냐? 가슴속에
한 물건이라도 있으면 산하대지가 들쑥날쑥 눈앞에 나타나겠지만, 가슴속에 한 물건도 없다면
밖으로 실오라기 하나도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치와 지혜가 그윽히 합하고, 경계와
정신이 회합한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그 이유는 하나를 알면 일체를 알고, 하나를 밝히면 일체가
밝혀지기 때문이다.
장사(長沙)스님은 말하기를, “도를 배우는 사람들이 진실을 알지 못하는 것은 눈앞의 식신(識神)에
의지해서 인식하기 때문이다. 무량겁 동안 내려오는 생사의 근본을 어리석은 사람들은 본래인
(本來人)이라 한다”고 하였다. 홀연히 5음(五陰) 18계(十八界)를 타파하면 몸과 마음이 하나가 된다.
몸 밖에 남은 것이 없다 하여도 그것은 절반밖에 얻지 못한 것인데 어떻게 색계에 의지하여
마음을 밝히고 사물에 의지하여 이치를 밝힌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옛사람(제19칙 참조)이 말하기를 “한 티끌만 일어도 온 대지가 모두 생긴다”고 하였는데 말해보라,
어느 것이 한 티끌인가를. 이 한 티끌을 알 수 있다면 이 주장자를 알 것이요, 주장자를 들 수만
있다면 종횡으로 자재하는 오묘한 작용을 알게 될 것이다. 이처럼 말하는 그것 자체가 벌써 언어
문자의 갈등인데 하물며 또다시 용으로 변한다는 둥의 말을 하겠는가? 그러므로 경장주(慶藏主)는
“일찍이 5천 48권의 모든 불경 어디에 이런 말이 있더냐?”고 말하였다. 운문스님은 주장자를 들어
보이는 곳마다 전기대용(全機大用)으로 생동감 있게 사람을 지도했었다.
파초(芭蕉)스님은 대중에게 말하기를 “납승의 본분은 모두 이 주장자에 있다”하였고, 영가(永嘉)
스님은 “이는 겉으로 괜히 관직을 버리고 〔褫〕출가한 것이 아니다. 이는 여래의 보장(寶杖)을
몸소 본받은 것이다“고 하였다.
석가여래께서 지난날, 연등(燃燈) 부처님의 세상에서 머리를 풀어 진흙을 덮고서 연등부처를
기다리자 연등부처님이 말씀하셨다.
“이곳에 범찰(梵刹)을 세울지니라.”
그때에 한 천자가 한 줄기 풀로 표시한 뒤에 말하였다.
“청정한 가람을 세웠습니다.”
여러분은 말해보라, 이 무슨 소리인가를. 조사(설두스님)께서는 말씀히시기를, “한 방 얻어맞고
깨침을 얻고 일할(一喝)에 알아차린다“고 하였으니, 말해보라, 무엇을 알아야 할까.
혹시 어떤 사람이 “어떤 것이 주장자냐?”고 묻는다면, 이는 곤두박질치는 것이 아니겠으며, 한 차례
손뼉을 치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 모두가 망상분별이다. 아뿔사! 이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일이다.
설두스님의 송은 다음과 같다.
(송)
주장자가 건곤을 삼키나니
-무슨 말을 하느냐? 개를 때리는 데나 쓰겠다.
복사꽃 지는 물결을 부질없이 말해 무엇하랴.
-향상의 한 구멍을 열어제치니 모든 성인이 일제히 아래에 서 있다. 구름을 잡고 안개를 움켜
쥐는 것과는 관계가 없다. 천 번 만 번 말하는 것이 자기의 손발로 직접 한 번 잡는 것만 못하다.
꼬리를 태운 놈이라 해도 구름을 잡고 안개를 움켜쥐지는 못하거늘
-좌지우지 하건만 노승은 보고만 있을 뿐이다. 그렇지만 이것도 하나의 마른 나무 조각일 뿐이다.
뱃속의 부레를 말리는 놈〔曝月思: 용이 못된 잉어〕이 되었다 해도 어찌 정신을 잃을소냐!
-사람마다 기상이 임금과 같은데 그대 스스로가 천 리 만 리 멀어질 뿐이다. 오싹하게 두려운걸
어찌하랴?
이로써 법문은 다했데.
-자비에 감사하노라. 노파심이 간절하다.
들었느냐, 못 들었느냐?
-어리석은 짓 했네. 들어봐야 무엇 하려구?
깨끗하여 말쑥해야 하니
-먹다 남은 국물이며 쉰 밥이다. 건곤 대지를 어느 곳에서 찾겠느냐?
다시는 어지럽게 하지 말라.
-법령을 내세운 자가 먼저 범한다. 순서가 되어 그대의 머리 위에 이르렀다. (원오스님이) 치면서
말한다. 용서해줘서는 안된다.
일흔두 방망이도 또한 가벼운 용서이니
-산승은 일찍이 이 법령을 집행하지 않았다. 법령에 따라서 집행하는구나. 산승을 만났기 망정이지.
1백 50 방망이를 쳐도 그대를 용서해주기 어렵다.
-제대로 법령을 시행해야 하는데 어찌 이같이 끝내서야 되겠는가? 설령 아침에 3천 번을 치고
저녁에 8백 번을 때린다 해도 안될거 없다.
갑자기 (설두)스님이 주장자를 들고 법좌에서 내려오니, 대중들이 모두 흩어졌다.
-설두스님은 용두사미였다. 무얼 하려는가?
(평창)
운문스님은 자세하게 사람을 지도하였고, 설두스님은 지름길로 사람을 지도하였다. 그러므로
“용으로 변화했다”는 것을 팽개쳐 그렇게 말하지 않고 다만 “주장자가 건곤을 삼켰다”고 말하였다.
설두스님의 의도는 사람들이 망정으로 이해하는 것을 없애주는 데 있다.
다시 말하기를 “복사꽃 지는 물결을 부질없이 말해 무엇하랴”하였으니, 이는 또다시 용으로
변화시킬 필요조차 없다는 것이다. 저, 우문(禹門) 폭포에 세 단계의 폭포가 있는데, 3월이 되면
복사꽃이 피고 봇물이 크게 불어난다. 이때 물을 거슬러 폭포를 뛰어넘어가는 잉어로 용으로
변한다고 한다. 그러므로 설두스님은 “설령 용이 되었다 해도 부질없는 말일 뿐”이라는 것이다.
“꼬리를 태운 놈이라도 구름을 잡고 안개를 움켜지는 못하거늘”이라는 말은, 잉어가 우문 폭포를
뛰어넘으면 자연히 번개가 쳐서 꼬리를 태워주며, 구름을 잡고 안개를 움켜쥐고서 날아간다고 한다.
그런데, 설두스님이 말한 의도는 “설령 용이 되어도 구름을 잡고 안개를 움켜쥐지는 못한다”는
것이다.
“뱃속의 부레를 말리는 신세가 되었다 해도 어찌 정신을 잃을소냐”고 하였는데, 청량(淸凉)의 「화엄
소서(華嚴疏序)」에서는 “수행을 쌓은 보살이라도 용문에서 부레를 말리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이 말의 대의는 화엄의 경계란 작은 덕〔小德〕, 작은 지혜〔小智〕로는 알 수 있는 경계가 아님을 밝힌
것이다. 이는 마치 잉어가 용문 폭포를 뚫고 지나가려다가 뜻을 이르지 못하고 이마에 점이 찍힌 채
다시 돌아와서는 썩은 물 모래 더미 속에서 괴로워하다가 뱃속의 부레를 태워서 죽는 것과 같은
꼴이다. 설두스님이 말한 의도는 “어차피 이마에 점이 찍혀 되돌아왔으면 왔지 정신까지 잃어서야
되겠느냐?”는 것이다.
“이로써 법문은 다했네. 들었느냐, 못 들었느냐?”고 하여 거듭 주석을 내리고 일시에 그대들을
위하여 말끔히 쓸어버렸다. 여러분은 곧바로 깨끗하여 말쑥하게 할지언정 다시는 어지럽게 하지
말라. 그대들이 또다시 어지럽게 한다면 주장자를 잃어버릴 것이다.
“일흔 두 방망이 또한 가벼운 용서”라는 것은 설두스님이 그대들을 위하여 무거운 벌을 그만두고
가벼운 벌을 준 것이다. 옛사람이 말하기를 “일흔두 방망이를 두 배하면 1백 50 방망이가 된다”고
하였는데, 요즈음 사람들이 이를 잘못 이해하고 숫자에 얽매여 계산하여, “일흔다섯 방망이어야
하는데 왜 일흔두 방망이냐”고 한다. 이는 옛사람의 뜻이 말 밖에 있음을 몰랐기 때문이라 하겠다. 그러므로 ‘이 일’은 언구(言句) 가운데 있지 않으니 후인의 천착을 없애주고자 이를 말한 것이다.
설두스님은 이 때문에 이를 인용하여 “설령 참으로 깨끗하여 말쑥해졌을 때 그대에게 일흔 두
방망이를 때려도 오히려 가벼이 용서한 것이며, 가령 그렇지 않고 1백50 방망이를 쳐도 그대를
용서해주기 어렵다”고 하여 일시에 송을 끝낸 것이다. 그러나 문득 다시 주장자를 들고서 거듭거듭
차츰차츰 지도를 했다. 그러나 살 속에 피가 흐르는 놈이 하나도 없구나.
불과원오선사벽암록 권제6
제61칙 풍혈(風穴)스님의 한 티끌을 세운다면
(수시)
법당(法幢)을 세우고 종지(宗旨)를 세우는 일은 본분종사에게 돌려야 할 터이지만, 용과 뱀을
판정하고 흑백을 분별함은 작가 선지식의 일이다.
칼날 위에서 살리고 죽이는 것을 논하고 몽둥이질할 때에 그 기연의 마땅함을 분별하는 경지는
그만두고, 홀로 법왕궁에 노니는 일구(一句)는 어떻게 헤아려야 할까를 말해보라. 거량해보리라.
(본칙)
풍혈(風穴)스님이 법어를 했다.
-구름을 일으키고 비를 내렸다. 그렇지만 주인도 되고 손님도 되어야 한다.
“한 티끌을 세우면
-나는 법왕이 되어 법에 자재롭다. 꽃도 수북, 비단도 수북하다.
나라가 흥성하고,
-저 집안(임제스님 문하)의 일은 아니다.
한 티끌을 세우지 않으면
-종적을 쓸어 없앤다. 눈동자를 잃어버렸는데 목숨까지도 잃었다.
나라가 멸망한다.”
-모든 곳에 광명이 있다. 나라를 거들먹거려 무엇 하겠는가? 이는 참으로 그 집안의 일이다.
설두스님은 주장자를 들고서 말하였다.
-모름지기 천 길 벼랑이어야 한다. 달마스님이 왔구나.
“생사를 함께 할 납승이 있느냐?”
-나에게 화두를 돌려다오. 그러나 불평스러운 일을 공평하게 하려면 모름지기 설두스님에게
헤아 려야 된다. 알았느냐? 아침에 3천 방망이, 저녁에 8백 방망이를 치겠다.
(평창)
에, 풍혈스님이 대중 설법을 하였다. “한 티끌을 세우면 나라가 흥성하고, 한 티끌을 세우지 않으면
나라가 멸망한다”하였는데, 말해보라, 한 티끌을 세워야 옳은지, 세우지 않아야 옳은지를. 여기에
이르러서는 대용(大用)이 눈 앞에 나타나야 한다. 그러므로 설령 언어 이전에 깨달아도 한 껍질 남아
있고 경계에 걸리며, 비록 말 떨어지자마자 통달한다 해도 경계에 부딪치고 미친 견해임을 면하지
못할 것이다.
그는 임제스님 회하의 큰스님이므로 곧 본분의 솜씨를 부린 것이다. 한 티끌을 세워 나라가 흥성
하여도 촌 늙은이는 이맛살을 찡그린다. 그 뜻은 나라를 세우고 국가를 안녕하게 하는 데에는
반드시 지모 있는 신하와 용맹한 장수의 힘을 빌려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뒤에야 기린이 나오고
봉황이 나오니 바로 태평성대의 상서이다. 그러나 세 집밖에 안되는 작은 마을의 사람이 이러한
일을 어떻게 알겠는가? 한 티끌을 세우지 않으면 나라가 멸망하여 찬바람만이 쓸쓸히 부는데
촌 늙은이가 무엇 때문에 나와서 노래를 부르겠는가? 나라가 멸망해버렸기 때문이다.
동산스님 문하에서는 이를 “몸 피하는 곳〔轉變處〕”이라 하나, 부처도 중생도 없으며 옳고 그름도
없으며 좋고 나쁨도 없으며 소리와 자취마저도 끊겼다.
그러므로 “황금가루가 아무리 귀하여도 눈에 들어가면 눈병을 일으킨다”고 하였으며, 또한
“금가루도 눈에 병이 되고 옷 속에 감춰놓은 구슬도 법엔 티끌이다. 자신의 신령함도 중히 여기지
않는데, 부처니 조사니 다 뭐하는 것인가!”라고 하였다. 종횡자재하고 신통 묘용(神通妙用)이 있다
해도기특할 게 없다. 여기 (나라가 망하는 지경)에 이르러서는 봉두남발한 채 만사를 다 쉬어야
한다. 이때는 산승도 전혀 아는 것이 없다. 만일 또다시 마음을 말하고 성품을 말하며 현미(玄微)
함을 말하고 오묘함을 말하여도 모두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그의 집안에 스스로 신선의 경계가
있었기때문이다.
남전(南泉)스님이 대중에게 설법하였다.
“황매산(黃梅山) 7백 고승은 모두가 불법을 아는 사람들이었기에 그〔五祖〕의 의발(衣鉢)을 얻지
못하였으나, 노행자(盧行者)만은 불법을 알지 못하였기에 의발을 얻었다.”
또 말하였다.
“삼세의 모든 부처님은 있음〔有〕을 알지 못하고 이리와 흰 암물소가 도리어 있음〔有〕을 안다.”
촌 늙은이가 이맛살을 찡그리기도 하고, 때로는 노래를 하기도 한다. 말해보라, 이를 어떻게 이해
하여야 할지. 그는 무슨 안목을 갖추었기에 이럴 수 있을까? 그러나 촌 늙은이의 문 앞에는 따로
이 조장(條章 : 법)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설두스님이 쌍으로 제시한 후 문득 주장자를 들고서 “함께 할 납승이 있느냐?”고 하였는데, 당시에
어떤 사람이 나와서 한마디를 말해 상대를 해주었다면 설두스님 이 늙은이가 뒤에 자만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송)
촌 늙은이가 설령 구겨진 이맛살을 펴지 않는다 해도
-삼천 리 밖에 한 사람이 있다. 맛있는 음식도 배부른 자에게는 걸맞지 않다.
국가의 웅대한 터전을 세우고자 하는데
-태평곡 한가락에 모두가 안다. 가고 싶으면 가고 머물고 싶으면 머문다. 온 건곤 대지가
해탈문인데 그대는 무엇을 다시 세우려고 하는가?
지모 있는 신하들과 용맹스런 장수들은 지금 어디에 있느냐?
-있느냐, 있느냐? 땅은 드넓고 사람이 없으니 참사람 만나기는 어렵지. 자만말라.
만 리에 맑은 바람부니 자연 알게 된다.
-곁에 사람이 없는 듯 방자하구나. 누구에게 땅을 쓸게 하랴? 운거 나한(雲居羅漢)처럼 교만한
놈이로군.
(평창)
앞(본칙)에서는 쌍으로 제시하더니만 여기(송)에서는 한쪽은 제기하고 한쪽은 생략해버리니,
이는 긴 부분을 잘라서 짧은 곳을 보완하고 무거운 것을 버리고 가벼운 쪽을 따른 것이다.
그러므로 “촌 늙은이가 설령 구겨진 이맛살을 펴지 않는다해도, 나는 국가의 웅대한 터전을
세우고자 하는데, 지모있는 신하와 용맹스런 장수들은 지금 어디에 있느냐?”고 하였다.
설두스님이 주장자를 들고서 “또한 생사를 함께 할 납승이 있느냐?”고 한 것은 “지모 있는 신하와
용맹스런 장수가 있느냐?”고 말한 것처럼 한 입으로 모든 사람을 삼켜버린 것이다. 그러므로
중읍(中邑)스님은 “땅은 드넓고 사람은 적어 참사람 만나기 힘들다”고 하였다.
(설두스님의 의중을) 아는 사람이 있느냐? 그런 사람이 나온다면 한 구덩이에 묻어버리겠다.
“만리에 맑은 바람 부니 자연히 알게 된다”는 것은 설두스님 스스로가 자만하는 것이다.
제62칙 운문의 보물 한가지〔雲門一寶〕
(수시)
스승에게 배우지 않고 얻은 지혜〔無師智〕로 작위(作爲)없는 묘용(妙用)을 발휘하며, 조건 없는
자비로써 청하지 않는 훌륭한 벗이 되며, 한 구절에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하며, 한 기연속에
놓아주고 사로잡기도 한다.
말해보라. 어떤 사람이 일찍이 이처럼 했는가를. 거량해보리라.
(본칙)
운문스님이 대중 설법을 하였다.
“하늘과 땅 사이
-땅은 넓고 사람은 드물다. 천지사방을 거두려 해도 안된다.
우주의 사이에
-귀신 굴 속에서의 살람살이 따위는 그만두어라. 빗나가버렸다.
그 가운데 하나의 보배가 있어
-어디에 있느냐? 광채가 나는구나. 절대 귀신의 굴 속에서 찾아서는 안된다.
형산(形山)에 감춰져 있다.
-꽉 부딪쳐, 까발려라!
등롱(燈籠)을 들고 불전(佛殿)으로 향하고,
-(그 정도야) 알음알이로 알 수 있지.
삼문(三門)을 가지고 등롱 위로 왔노라.”
-운문스님이 옳기는 하지만 잘못됐다. 아직 좀 모자란다. 자세히 점검해본다면 썩은 냄새에 불과
할 것이다.
(평창)
운문스님이 말하기를 “하늘과 땅 사이의 우주의 사이에, 그 가운데 하나의 보배가 있어 형산(形
山)에 감춰져 있다”하였는데, 말해보라, 운문스님의 의도는 그 말에 있는 것일까, 등롱 위에 있는
것일까? 이는 승조법사(僧肇法師)의 「보장론(寶藏論)」에 있는 몇 구절인데, 운문스님이 이를 들어
설법한 것이다.
승조법사는 후진(後秦) 시대에 소요원(逍遙園)에서 논(論)을 지었다. 그는 「유마경(維摩經)」을
베껴 쓰다가 장자와 노자가 오묘함을 다하지 못했음을 알고, 이에 구마라집(鳩摩羅什)에게 예배를
하고 스승으로 삼았다. 또한 와관사(瓦棺寺)에서 발타바라(跋陀婆羅)법사를 참방하였는데, 그는 서천
(西天) 27조(二十七祖 : 船若多羅)에게 심인(心印)을 전수받은 스님이었다. 승조법사는 27조스님의
깊은 경지에까지 이르렀는데 어느날 난을 만나 사형을 당하게 되었을 때 7일간의 여가를 얻어
「보장론」을 지었다.
운문스님은「보장론」 가운데에서 네 구절〔四句〕을 들어 그 대의를 설법하기를 “무엇 때문에
값으로 매길 수 없는 보배〔無價之寶〕가 음계(陰界)속에 숨겨져 있느냐?”고 했다.「보장론」의 내용은
종문(宗門)의 말들과 일치되고 있다.
듣지 못하였느냐, 경청(鏡淸)스님이 조산(曹山)스님에게 물었던 것을. 즉,
“맑고 비어〔淸虛〕있는 이치는 결국 몸이 없을 때는 어떻게 됩니까?”
이치〔理〕는 이과 같은데, 그럼 현상〔事〕은 어떠한가?”
“나 조산 한 사람이야 속일 수 있겠지만 많은 성인의 눈은 어떻게 하려느냐?”
“많은 성인의 안목이 없었다면 그 사실을 화상께서는 어떻게 알았겠습니까?”
“공적으로는 바늘 하나 용납할 수 없지만 사적으로도 수레도 통할 수 있다.”
그러므로 “하늘과 땅 사이 우주의 사이에, 그 가운데 하나의 보배가 있어 형산(形山)에 감춰져
있다”고 하니, 「보장론」의 대의는 사람마다 모두 갖추어져 있고 낱낱이 뚜렷하게 드러나 있다는
사실을 밝힌 것이다.
운문스님이 이를 들어 시중(示衆)하였지만 온전히 그대로 드러난 것이므로 좌주(座主 : 강사)들
처럼 괜히 그대에게 주해를 달아줄 필요는 없었다. 그러나 그는 자비로써 다시 그대들에게 주해를
붙여 말하기를 “등롱(燈籠)을 들고 불전으로 향하고, 삼문(三門)을 가지고 등롱 위로 왔노라”하였다.
말해보라, 운문스님이 이처럼 말했던 의도가 어떤 것이었는가를.
듣지 못하였느냐? 옛사람(영가스님)이 말하기를 “무명(無明)의 참 성품이 바로 불성(佛性)이요,
환화(幻化)의 빈 몸〔空身〕이 큰 법신(法身)이다”라고 하였고, 또한 (청량의 「화엄경대소」의 서문
에서는) “범부의 마음속에서 부처의 마음을 본다”고 하였다.
형산(形山)이란 사대 오온(四大五蘊)을 말한다. 그 가운데 하나의 보배가 있어 형산에 감춰져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고인들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모든 부처님이 마음에 있는데도 미혹한 사람은 바깥에서 구하느라고, 자신에게 값으로 매길 수
없는 보배가 간직되어 있는데도, 일생 쉴 줄을 모른다.”
“불성은 당당하게 뚜렷이 나타나 있으나 모양〔相〕에 머무는 중생은 보기 어렵다. 중생 그 자체가
무아(無我)라는 사실을 깨닫는다면 나의 얼굴이 어찌 부처의 얼굴과 다르리요!”
“마음은 본래의 마음이며, 얼굴은 어머니가 낳아주신 얼굴이다. 겁석(劫石)은 옮길 수 있어도
그 가운데 있는 것은 변함이 없다.”
어떤 사람은 밝고 밝으며 신령하고 신령〔昭昭靈靈〕한 것을 보배로 여기면서도 그 묘용을 얻지
못하고 있다. 그 묘용을 체득하지 못하므로 꼼짝달싹 하지 못하며 그 보물을 들추어내지 못한다.
옛사람은 “궁하면 변하고 변하면 통한다”고 말하였다.
등롱을 들고 불전으로 향하는 것은 일상의 알음알이로도 알 수 있으나, 삼문(三門)을 가지고 등롱
위에 온다는 것도 알 수 있겠느냐? 운문스님이 일시에 그대들의 정(情)․식(識)․의(意)․상(想)과
득실 시비를 쳐부숴버렸다.
설두스님은 “나는 소양(韶陽 : 운문)스님의 참신한 공안을 좋아한다. 일생 동안 사람들이 집착한
못을 빼고 쐐기를 뽑아주었다”고 하였으며, 또한 “법상에 앉은 선지식들이 얼마인지를 아는가?
날카로운 칼날로(얽매임을) 끊어주어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다”고 말하였다.
운문스님은 “등롱을 들고 불전으로 향한다”라고 말함으로써 이 한 구절로 (모두를) 절단해버리고,
또다시 “삼문을 가지고 등롱 위로 왔노라”고 하니 이는 말하자면 전광석화와 같은 것이다.
운문스님은 말하였다.
“그대가 이 경지와 같아지려거든 먼저 깨닫도록 하라. 티끌처럼 많은 부처님이 그대의 발 아래
있으며, 삼장(三藏)의 말씀이 그대의 혀 끝에 있으니 이를 깨닫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은 없다.
스님이여, 망상을 부리지 말라. 하늘은 하늘, 땅은 땅, 산은 산, 물은 물, 스님은 스님, 속인은
속인이니라.”
말없이 한참 있다가 말을 이었다.
“나의 앞에 앞산을 가져와보아라.”
문득 어떤 스님이 나오더니 물었다.
“제가 산은 산, 물은 물이라고 말한다면 이는 어떻습니까?”
“삼문(三門)이 무엇 때문에 여기를 지나가느냐?”
그가 죽을까 염려스러워 손으로 한 획을 그린 후에 말하였다.
“이를 안다면 으뜸가는 제호(醍醐)의 맛이겠지만, 알지 못한다면 도리어 독약이니라.”
설두스님은 또다시 말하였다.
“하늘과 땅 사이, 우주의 사이에, 그 가운데 하나의 보배가 있는데, 벽 위에 걸려 있다. 9년 면벽을
한 달마의 정안(正眼)으로도 이를 보지 못하였다. 오늘날의 납승들이 보려 한다면 등줄기를 바로
후려치겠다.”
살펴보건대, 본분종사들은 결코 실제의 법을 가지고 사람들을 얽어묶지는 않았었다. 현사(玄沙)
스님은 말하기를 “잡아 가두어도 머물지 않으며 불러도 되돌아보질 않는다”고 하였다.
그렇긴 하나 이도 신령한 거북이 꼬리를 끄는 것처럼 자취를 남기는 일이다.
설두스님의 송은 다음과 같다.
(송)
살펴보고 살펴보라.
-크게 눈여겨보라. 살펴서 무엇 하려고? 검은 용이 여의주를 희롱하는구나.
옛 언덕에 어느 사람이 낚싯대를 잡고 있는가?
-고고하고 몹시 고고하며 절벽처럼 험준하고 매우 험준하다. 도적이 떠난 뒤에 활을 당기는구나.
뒤통수에 뺨이 보이는 (괴상한) 놈과는 왕래를 하지 말라.
구름은 뭉게뭉게
-끊어버려야 한다. 백겹 천겹이로군. 기름 때 찌든 모자요, 노린내 나는 무명 적삼이다.
물은 넘실넘실
-갈팡질팡. 앞이 막히고 뒤도 막혔구나.
밝은 달 갈대꽃을 그대여 스스로 살펴보오.
-보았다 하면 눈이 먼다. 운문스님의 말을 알 수 있다면 설두스님의 마지막 부분의 말을 이해할
수 있다.
(평창)
운문스님의 말을 알 수 있다면 설두스님이 사람을 지도한 곳을 바로 알 것이다. 그는 운문스님의
대중 설법 마지막 부분 두 구절(등롱 운운한 부분)에 주해를 붙여 말하기를 “살펴보고, 살펴보라”고
하였는데, 그대가 눈썹을 치켜 세우고〔瞠眉〕눈을 부릅뜨라는 말로 이해한다면 이와는 전혀 관계가
없다.
옛사람이 말하였다.
신령한 빛 홀로 비치어
아득히 근(根)․진(塵)을 벗어나다.
진상(眞常)이 통째로 드러나
문자에 얽매이지 않고
심성(心性)은 물듦이 없어
본래 뚜렷하게 그대로이니
허망한 반연(攀緣) 여의기만 하면
바로 여여(如如)한 부처라네.
만일 눈썹을 치켜 세우고 눈을 부라리며 턱 버티고 있다면 어떻게 육근(六根)․육진(六塵)을 벗어날
수 있겠는가?
설두스님은 말하였다.
“살펴보고, 살펴보라. 운문스님이 언덕에 낚싯대를 잡고 있는 것과 같다. 구름 또한 뭉게뭉게 피어
오르고 물도 넘실넘실한데 밝은 달은 하얀 갈대꽃에 비치고, 갈대꽃은 밝은 달에 비친다.”
바로 이러할 때는, 말해보라, 어떤 경계일까? 곧바로 볼 수 있다면 앞의 구(구름은 뭉게뭉게)와
뒤의 구(물은 넘실넘실)가 결국은 같을 뿐이다.
제63칙 남전의 고양이를 벰〔南泉斬猫〕
(수시)
생각〔意路〕으로도 이르지 못하니 반드시 끊임이 없어야 하고, 말이나 설명으로도 미치지 못하니
대뜸 깨쳐야 한다. 번개가 치고 별똥이 튀는 듯하며, 폭포를 쏟아붓고 산악을 뒤집는 것같다.
대중 가운데 이를 아는 사람이 없느냐? 거량해보리라.
(본칙)
하루는 동서 양편 승당에서 고양이를 가지고 다투자,
-이는 오늘에 시끄러운 일이 아니다 (늘 그랬었다). 또 한바탕 잘못을 저지르는구나.
남전스님이 이를 보고서 마침내 고양이를 잡으며 말하였다.
-바른 법령을 시행하여 모든 사람들을 꼼짝 못하게 하네. 이 늙은이가 용과 뱀을 구별해내는
솜씨가 있었구나.
대중들이 대답이 없자,
-아이고 아까워라. 기회를 놓치는구나. 한 무더기 먹통들을 어디에 쓰랴? 엉터리 선객들이
삼대처럼, 좁쌀처럼 수없이 많구나.
남전스님이 고양이를 두 동강으로 베어버렸다.
-통쾌하고 통쾌하다. 이렇게 하지 않았더라면 (남전마저도) 모두 쓸데없는 짓거리하는 놈이 되고
말았을 것이다. 도적이 떠난 뒤 활을 당기는구나. 벌써 한 단계 낮은 제이제로다.
거량하기에 앞서 쳤어야 했다.
(평창)
종사구나! 저 한 번은 움직이고 한 번은 쉬고, 한 번은 나아가고 한 번은 들어갔다 한 것을 보아라.
그 대의가 무엇인지를 말해보라.
고양이를 베어버렸다는 이 화두를 천하 총림에서는 많이들 알음알이로 헤아리고 있다. 어떤 사람은
“베어버린 것에 (대의가) 있다”고 하나 모두가 전혀 관계가 없다.
그가 고양이를 들지 않았을 때에도 곳곳에서 이러쿵저러쿵 말들 하겠느냐? 이는 옛사람(남전스님)
에게 하늘과 땅을 구별하는 안목이 있었고, 하늘과 땅을 구별하는 칼이 있었음을 몰랐던 것이다.
그대들은 말해보라, 결국은 고양이를 누가 베어버렸을까? 남전스님의 경우, 고양이를 들고서 “말할
수 있다면 베지 않겠다”하였는데, 그 당시 혹 어떤 사람이 말을 했다면 남전스님이 베었을까, 베지
않았을까? 그러므로 “올바른 법령을 시행하여 모든 사람들을 꼼짝 못하게 하네”라 말했던 것이다.
하늘 밖으로 머리를 내밀어 살펴보라, 누가 그 경지에 있는 사람인가를. 실은 애초부터 원래 벨
것이 없었던 것이다.
이 화두 또한 베느냐, 베지 않느냐에 있지 않다. 이 일을 확연히 알아야 한다. 이처럼 분명하다.
생각의 티끌〔情塵〕이니 의견(意見)으로써 찾을 수 없다. 만약 생각의 티끌이나 의견으로 찾는다면
남전스님을 저버릴 것이다.
창을 마주한 칼날 위에서 살핀다면, 있다 해도 옳고 없다 해도 옳으며, 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다
해도 옳을 것이다. 그러므로 옛사람의 말에 “궁하면 변하고 변하면 통한다”고 하였다.
요즈음 사람들은 변과 통은 모르고서 오로지 말만 가지고 따진다.
남전스님이 이처럼 들어보신 것은 사람으로 하여금 당장에 무슨 대답을 하도록 하는 데 있지 않다.
오직 스스로가 깨닫고서 제각기 스스로 작용하고 스스로 알게 하려는 데 있다. 만일 이처럼 이해
하지 못한다면 끝내 (본뜻을) 찾을 수 없을 것이다.
설두스님은 대뜸 다음과 같이 송을 하였다.
(송)
양편 승당엔 모두가 엉터리 선객들.
-몸소 한 말씀 하셨군. 한마디로 말을 다해 버렸군. 죄상에 의거하여 판결했다.
자욱한 티끌만을 일으킬 뿐 어찌할 줄 모르는구나.
-그가 어떻게 종결짓는가를 살펴보라. 그대로 드러난 공안이다. 그래도 약간은 있었구나.
다행히도 남전스님이 법령을 거행하여
-(원오스님은) 불자(拂子)를 들고 말한다. 이것과 비슷하군. 남전스님은 아직 좀 모자란다.
좋은 금강왕보검을 진흙을 자르는데 쓰고 있다.
단칼에 두 동강 내어 한 쪽〔偏頗 : 두동강 내는 쪽〕을 택했네.
-산산이 부서져버렸다. 혹시 어떤 사람이 칼을 어루만지면 그가 어떻게 하는가를 보아야 한다.
그냥 용서해줘서는 안된다. (원오스님은) 쳤다.
(평창)
“양편 승당엔 모두가 엉터리 선객들”이라는 것은, 설두스님은 이 언구에 떨어지지 않았고 하인이
나귀나 말의 앞뒤에 끌려다니듯이 예속되지 않았기 때문에, 까드러내고 몸을 피하여 문득 “자욱한
티끌만 일으킬 뿐 어찌할 줄을 모른다”고 한 것이다. 설두스님은 남전스님고 함께 손을 잡고 가면서
한 구절로 송을 끝마쳤다.
양편 승당의 수좌들은 쉴 곳이 없어 가는 곳마다 오로지 자욱한 망상의 티끌을 일으키면서도 어찌
하지 못하였는데, 다행히도 남전스님이 그들에게 이 공안을 재판하여 준 덕분에 말끔히 다 수습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앞으로 가지니 마을도 없고 뒤로 가자니 주막도 없는 것처럼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데야 어찌하겠는가.
그러므로 “남전스님이 바른 법령을 거행한 덕분에, 단칼로 두동강 내어 한 쪽을 택했네”라고
하였다. 서슴없이 단칼로 두동강을 내어 어느 쪽으로 기울든 상관치 않았다는데, 말해보라,
남전스님이 어떠한 법령에 의거했는가를.
제64칙 조주의 짚신을 머리에 얹고〔趙州載鞋〕
(본칙)
남전스님이 다시 전에 있었던 이야기를 들어 조주스님에게 묻자,
-그렇지만 반드시 같은 마음, 같은 뜻이라야 이렇게 할 수 있다. 같은 길을 가는 자만이 알 것이다.
조주스님은 문득 짚신을 벗어 머리에 이고 밖으로 나가버렸다.
-결국 진흙물을 뒤접어쓰는군.
남전스님은 말하였다.
“네가 그때 있었더라면 고양이를 살릴 수 있었을텐데.”
-쿵짝이 서로 맞구나. 속뜻을 알아주는 이가 드물다. 자신의 잘못이 가지고 남까지 잘못되게 하네.
(평창)
조주스님은 남전스님의 적자(嫡子 : 맏이)이다. 처음을 말하면 끝을 알고 거량하자마자 의도를
알았던 것이다. 남전스님이 저녁 때 다시 앞에 했던 이야기를 꺼내 조주스님에게 물었다. 조주스님
은 노련한 작가였기에 대뜸 짚신을 벗어 머리에 이고 밖으로 나가 버리자, 남전스님은 말하였다.
“네가 그때 있었더라면 고양이를 살릴 수 있었을텐데.”
말해보라, 참으로 살릴 수 있었을까? 그렇지 않았을까?
남전스님이 말한 “말할 수 있다면 고양이를 베지 않겠다”는 것은 번뜩이는 전광석화와 같은
것이다.
조주스님이 대뜸 짚신을 벗어 머리에 이고 밖으로 나가버린 것은 활구를 참구하고 사구를 참구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날마다 새롭고 시각마다 새로워, (이 자리는) 일천 성인이라도 한 실오라기
만큼도 바꾸지 못한다. 모름지기 자기 자신 속에 (원래부터 갖추어져) 있는 보배에서부터 우러나
와야 조주스님의 온전한 기틀과 큰 작용〔全機大用〕을 알 수 있다.
조주스님이 “나는 법왕이 되어 모든 법에 자재하다”라고 했는데, 모두가 잘못 이해하고서 “조주
스님은 방편으로 짚신을 가지고 고양이를 대신했다”고 하며, 어떤 사람은 “그가 ‘말할 수 있다면
고양이를 베지 않겠다’는 말을 할 때 대뜸 짚신을 이고 나갔어야 했다. 이는 그(남전스님)가 고양이
를 벤 것이지 나의 일과는 상관이 없다”고 해석을 하나, 전혀 관계가 없는 것이며 오로지 망상
분별을 한 것일 뿐이다. 이 어른들의 뜻이란 널리 하늘을 덮고 두루 땅을 떠받들어주는 것과 같음을
모른 것이라 하겠다.
이들의 스승과 제자가 서로 의기투합하여, 기봉(機鋒)이 일치되므로 저쪽에서 처음을 거량하면
바로 끝을 알았는데, 요즈음의 학자들은 옛사람의 몸을 비꼈던 곳〔轉身處〕을 모르고 부질없이
생각의 길〔意路〕에서 헤아리고 있다.
이를 알고저 한다면 조주스님과 남전스님이 몸을 비꼈던 곳을 보아야 할 것이다.
송은 다음과 같다.
(송)
공안을 분명하게 하여 조주스님에게 물으니
-말소리가 아직도 귓전에 맴돈다. 다시 벨 필요가 없다. 상여 뒤에 약봉지를 매달았구나.
장안성 안에서 마음껏 한가로이 노니네.
-이처럼 쾌활하고 이처럼 자유로울 수 있어야지. 손에 잡히는 대로 풀을 꺾어 참으로 이렇게
지도를 하는구나.
짚신을 머리에 이었으나 아는 사람 없어
-한명은커녕 반 명도 없다 따로이 한 가풍이로다. 밝은 것에도 어울리고 어둔 것에도 어울린다.
고향산천에만 갔다하면 모두가 쉬게 된다.
-그 자리에서 30방망이를 때렸어야 좋았을걸. 말해보라, 어느 곳에 허물이 있었는가를. 바람이
없는 데에서 풍랑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두 스님이 모두 놓아버렸다. 이렇게 하지 못할까
염려스러울 뿐 이렇게 한다면 몹시 기특하지.
(평창)
“공안을 분명하게 하여 조주스님에게 물었다”는 것은, 경장주(慶藏主)가 말하기를 “이는 판결을
하는 것과 똑같다. 여덟 대 때려야 할 사람에게는 여덟 대를, 열세 대를 때려야 할 사람에게는
열 세 차례를 때려 결단을 내버렸다”고 하였다.
이 공안을 가지고 조주스님에게 물으니 조주스님은 그의 집안 사람이었으므로 남전스님의 뜻을
알았다. 그는 투철한 사람이었기에 이리치고 저리치며〔𡎺著磕著〕바로 몸을 뒤재켜 본분작가의
안뇌(眼惱)를 갖추었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는 것을 듣자마자 눈을 부릅뜨고 바로 떠나버린 것이다.
설두스님은 말하기를 “장안성 안에서 마음껏 한가로이 노니네”라고 하였으니, 허물이 적지 않다.
옛사람의 말에 “장안이 좋기는 해도 오래 살 곳은 못 된다”하였고, 또한 “장안은 몹시 시끄럽지만
우리 동네는 편안하다”고 하였으니, 또한 “장안은 몹시 시끄럽지만 우리 동네는 편안하다”고 하였
으니, 모름지기 어떤 상황에서 한 말인가를 알고 길흉을 분별하여야만 된다.
“짚신을 머리에 이었으나 아는 사람 없어”라는 것은 짚신을 이었던 것은 조금도 이러쿵저러쿵
할게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는 자신만이 알 수 있고 자신만이 증득할 수 있는 것이라고 한다.
이로써 남전스님․조주스님․설두스님이 똑같이 체득하고 똑같이 활동했던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말해보라, 지금은 이를 어떻게 이해하여야 할까를.
“고향산천에만 갔다하면 바로 쉬게 된다”고 하였다. 고향산천은 어디일까? 그(설두스님)가 알지
못했다면 결코 이처럼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벌써 알고 있었다. 말해보라, 고향산천이 어디에
있는가를. (원오스님은) 쳤다.
제65칙 세존의 침묵〔世尊良久〕
(수시)
모양〔相〕이 없으면서도 형상이 시방허공을 가득 메워 반듯하고 넓으며〔方廣〕, 무심(無心)하여
온 세계에 두루하면서도 방해가 되지 않는다.
하나를 들면 나머지 셋을 밝히며, 눈대중으로 탁 보고 착 알아차려 비 쏟아지듯 방망이를 때리고,
우레가 치듯 ‘할(喝)’을 한다해도 향상인(向上人)의 경지에는 미치지 못하였다. 말해보라, 무엇이
향상인의 일인가를. 거량해보리라.
(본칙)
외도(外道)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말이 있는 것도 묻지 않고, 말이 없는 것도 묻지 않겠습니다.”
-그렇긴 해도(외도라 할지라도) 모두 이 집안 사람이므로 약간의 향기가 있구나. 쌍검이 허공에
난다. 묻지 않았기 망정이지.
세존께서 말없이 한참 계시니,
-세존을 비방하지 말라. 그 소리가 우레와 같다. 앉은 사람, 선 사람 모두가 그를 움직일 수 없다.
외도가 찬탄하며 말하였다.
“세존께서 대자대비하시어 저의 미혹한 구름을 열어주시어 저로 하여금 도에 들어갈 수 있게
하시었습니다.”
-영리한 놈이 한 번 튕겨주자 대뜸 알아차리는군. 소반 위에 구르는 밝은 구슬이다.
외도가 떠난 뒤에 아난(阿難)이 부처님께 여쭈었다.
“외도는 무엇을 얻었기에 도에 들어갔다 말하였습니까?”
-참으로 사람을 의심케 하는구나. 그러나 모두가 알아야 한다.
용광로 속에 쇳덩이를 통째로 넣었구나.
부처님은 말씀하셨다.
“훌륭한 말은 채찍 그림자만 보아도 달리는 것과 같다.”
-말해보라. 무엇을 채찍의 그림자라고 하였을까? (원오스님은) 불자(拂子)를 한 번 내려쳤다.
방망이 끝에 눈이 있어 해처럼 밝구나. 진짜 금을 식별하려면 불 속에 넣어보아야지.
입으로 밥을 먹을 기회가 왔군.
(평창)
‘이 일’이 언구에 있다면 3승 12분교(三乘十二分敎)가 어찌 언구가 아니겠는가? 그러나 어떤 이가
만약 “말 없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라고 말한다면 달마 조사가 서쪽에서 올 필요가 있단 말인가?
예로부터 허다한 공안은 결국 어떻게 해야 그 핵심을 알 수 있을까? 이 한 칙의 공안을 말하는
자는 드물지 않다. 어느 사람은 “말없이 한참 있는 것”이라 하며, 어떤 이는 “기대어 앉는 것”이라
하기도 하고, 어떤 이는 “말없이 대답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하기도 하나, 아뿔사! 이는 전혀 관계가
없는 것이다. 어찌 이를 더듬어서 찾으려고 하는가? 이 일은 실로 언구 위에도 있지 않지만 언구를
떠나지도 않는다. 조금이라도 의심하고 의논하려 한다면 천리 만리나 멀어질 것이다.
이를 살펴보면, 저 외도가 깨닫고 나서 보니, (‘이것’은) 여기에도 저기에도 있지 않았으며, 옳은데도
옳지 않은 데도 있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음을 알 수 있다. 말해보라, 이는 어떤 것인가를.
천의 의회(天衣義懷)스님의 송은 다음과 같다.
유마는 말없이 한참 동안 있지 않았으니
기대어 앉아 헤아리면 잘못이다.
취모검갑(吹毛劍匣)속에 싸늘한 광채 차가우니
외도천마(外道天魔)가 모두 손을 못 대는군.
백장 도항(百丈道恒)스님이 법안(法眼)스님을 참방하자 법안스님은 이 화두를 들게 하였는데,
하루는 묻기를 “너는 어떤 인연을 보았느냐?”고 하자, 백장 도항스님은 말하였다.
“외도가 부처님께 질문한 화두입니다.”
“그대는 말해보아라”
도항스님이 머뭇머뭇 입을 열려고 하자, 법안스님은 말하였다.
“그만두어라, 그만두어라. 그대는 한참 동안 말이 없었던 것〔良久處〕을 알음알이로 헤아리려고
하느냐?”
도항스님은 그 말을 듣자마자 완전히 깨치고 그 뒤에 대중 설법을 하였다.
“백장스님에게는 세 비결이 있으니, ‘차나 마셔라’, ‘잘들 가시오’,‘쉬도록 하라’는 것이다. 이러쿵
저러쿵 따지거나 사량(思量)한다면 그대들은 결코 투철하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취암산(翠巖山)에 살던 점흉(點胸)이란 별명이 있는 가진(可眞)스님이 이를 들어 말하였다.
“천지사방과 9주(唐代에는 전국이 9州였음)에 청(靑 : 관리)․황(黃 : 도사)․적(赤 : 승려)․백(白: 속인)이
모두 얽히고 설키어 살고 있구나!”
외도는 ‘네 베다〔四維陀〕’를 이해하고 스스로 말하기를, “나는 일체의 지혜〔一切智)를 얻은 사람
이다”하며, 곳곳에서 사람을 찾아 논의를 하였다. 그는 질문의 실마리를 일으켜 석가부처님의 혀를
꼼짝 못하게 하려고 하였다. 세존께서는 실낱만큼의 힘도 쓰지 않으셨는데도, 그는 문득 깨닫고
떠나면서 찬탄하여 말하였다. “세존께서는 대자대비하시어 저의 미혹한 구름을 열어 주시고
저로 하여금 도에 들어갈 수 있게 하셨습니다.” 말해보라, 대자대비한 곳이 어디인가를. 세존의
이 한 눈은 삼세(三世)를 관통하였고, 외도의 두 눈동자〔雙眸〕는 오천축국(五天竺國)을 관통하였다.
위산 진여(潙山眞如)스님이 이를 들어 말하였다.
“외도는 지극한 보배를 간직하였고 세존께서 그것을 몸소 끄집어내시니 삼라가 밝게 나타나고
만상이 분명하였다.”
결국 외도는 무엇을 깨달았을까? 이는 마치 개를 도망갈 곳이 없는 담장으로 몰아붙이는 것처럼,
꼼짝달싹 할 수 없는 막다른 곳에 이르러 도리어 대뜸 활발발한 것과 같다. 만일 계교와 시비를
일시에 놓아버리고 망정이 다하고 견해가 없어지면 자연히 속속들이 분명하게 될 것이다. 외도가
떠난 뒤에 아난이 부처님께 여쭈었다.
“외도는 무엇을 깨쳤기에 (도에) 들어갈 수 있다고 말했습니까?”
“훌륭한 말은 채찍의 그림자만 보고서도 달려가는 것과 같다.”
뒷날 총림에서는 “또 바람이 나부껴 다른 곡조 속에 섞이고 말았다”고 하였으며, 또한 “용 머리에
뱀의 꼬리”라고도 하였다. 어느 곳이 세존의 채찍 그림자이며, 어느 곳이 채찍 그림자를 본 곳일까?
설두스님은 “사정(邪正)을 분간하지 못한 허물은 채찍 그림자 때문이다”라고 하였으며, 진여(眞如)
스님은 “아난이 황금 종을 거듭 치자 사부대중(四部大衆)이 이 소리를 함께 듣는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두 마리 용이 여의주를 다투는 것처럼 지혜로운 사람의 위엄과 영악스러움을 키워
준 것이다. 설두스님의 송은 다음과 같다.
(송)
기틀의 바퀴를 굴리지 않았으나
-여기에 있다. 과연 한 실오라기만큼도 움직이지 않는다.
굴리면 반드시 양쪽으로 달리리라.
-있음〔有〕에 떨어지지 않는다면 반드시 없음〔無〕에 떨어지고 동쪽으로 가지 않는다면 서쪽으로
간다. 왼쪽 눈은 반 근이고 오른쪽 눈은 여덟 냥이다.
밝은 거울이 경대에 걸려 있으니
-석가부처님을 보았느냐? 한 번 튕겨주니 대뜸 피하는군. 깨졌군, 깨졌어. 탄로났군, 탄로났어.
당장에 어여쁘고 추함을 분간하도다.
-온 대지가 해탈문이다. 족히 30방망이는 먹여야지. 석가부처님을 보았느냐?
어여쁘고 추함을 분간함이여! 미혹의 구름이 열리니
-(방편으로) 작은 길을 하나 터놓았군. 그대가 몸을 비낀 곳이 있는 것을 인정하겠지만
외도인 것을 어찌하랴.
자비의 문 어디엔들 티끌먼지가 일어나랴?
-온 세계 어디에도 결코 숨기지 못하지. 물러서라, 물러서라. 달마스님이 오신다.
생각해보니, 채찍 그림자를 엿보는 훌륭한 말은
-나에게 주장자가 있으니 그대가 나에게 주지 않아도 된다. 말해보라, 어디가 채찍 그림자며,
어디가 훌륭한 말〔馬〕인가?
천 리를 바람처럼 달리다가도 부르면 곧 되돌아온다.
-불전에 올라타고 절문 밖으로 나가는군. 몸을 비꼈다 해도 잘못이다. 용서해줘서는 안된다.
(원오스님은) 쳤다.
아아! 돌아왔구나! (설두스님은) 손가락을 세 번 튕겼다.
-앞으로 가자니 마을도 없고 뒤로 돌아가자니 주막도 없다. 주장자를 꺾고 어느 곳으로 가느냐?
설두스님은 우레 소리만 컸지 빗방울은 전혀 없다.
(평창)
“기틀의 바퀴를 굴리진 않았지만, 굴리면 반드시 양쪽으로 달린다.” 기틀〔機〕이란 일천 성인의
신령한 기틀이며 바퀴〔輪〕란 본래부터 있는 여러분의 목숨이다. 듣지 못했느냐? 고인(설두스님)
의 말을.
일천 성인의 신령한 기틀 쉽게 친하지 못하나니
용이 용 새끼 낳는 것 그냥 따르지 말라.
조주스님은 몇 개의 성과 맞바꾸는 큰 구슬을 빼앗았으니
진왕(秦王)과 인상여(藺相如) 모두가 목숨을 잃었구나.
외도는 (자신의 본성을) 거머쥐고 주인 노릇을 하여 꼼짝하지 않았다고 하겠다. 어떻게 그런 줄
아는가 하면, 그가 말하기를 “말이 있는 것도 묻지 않고, 말이 없는 것도 묻지 않겠습니다”라고 했기
때문이다. 이 어찌 온전한 기봉이 있는 곳이 아니겠는가?
세존께서는 풍향에 따라 돛을 걸고 병에 따라 약을 투여할 줄 아셨기에 한참 말없이 계시면서
온전한 기틀을 드러내셨다. 이에 외도는 이를 모두 이해하고 기틀 바퀴〔機輪〕를 빙글빙글 돌리면서
유(有)로 향하지도 않고, 무(無)로 향하지도 않았으며, 얻고 잃음에도 떨어지지 않았고, 범부와 성인의
경지에도 얽매이지 않아, 양쪽을 일시에 꼼짝 못하게 했던 것이다.
세존께서 한참 말없이〔良久〕계시자마자 그는 바로 절을 올렸다. 요즈음 사람들은 무(無)에 떨어지지
않으면 유(有)에 떨어져 오로지 유(有) ․무(無)에 머물고 만다.
설두스님의 “밝은 거울이 경대에 걸려 있으니, 당장에 어여쁘고 추함을 분간하도다”라는 말은 꼼짝
하지 않고 한참 말없이 있었을 뿐인데, 밝은 거울이 경대에 걸린 것처럼 삼라만상의 모습이 이
거울을 피해가지 못했다는 것이다.
외도는 말하였다.
“세존께서 대자대비로 저의 미혹한 구름을 열어주시어 저로 하여금 도에 들어갈 수 있게 하셨습
니다”라고 말했는데 말해보라, 외도는 무엇을 깨달았을까?
여기에 이르러서는 반드시 모두 스스로 참구하고 스스로 깨달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면 어디에서나
행주좌와에 높낮이를 묻지 않아도 단박에 그대로 나타나 다시는 한 실오라기 만큼도 벗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만일 계교를 부리며 한 터럭만큼이라도 이치로써 따지면 그 자리에서 사람을 얽매어
도에 들어갈 수 없게 된다.
뒤이어 “세존께서 대자대비하시어 저의 미혹한 구름을 열어주시고 저로 하여금 도에 들어가게
하셨습니다”라는 데 대하여, “당장에 어여쁘고 추함을 분간하도다. 어여쁘고 티끌먼지가 일어나랴”
하고 노래하였다. 온 대지가 세존의 대자대비하신 문이다. 그대들이 이를 꿰뚫을 수 있다면
손 한 번 까딱할 필요가 없다. 그야말로 활짝 열어놓은 문이다.
듣지 못하였느냐? 세존께서 스무하루 동안에 ‘이 일’을 사유(思惟)하시고 “내 정녕 설법을 하지
않고 어서 열반에 들어야겠다”라고 말씀하셨던 것을.
“생각해보니, 채찍 그림자를 엿보는 훌륭한 말은 천 리를 바람처럼 달리다가도 부르면 곧 되돌아
온다”는 것은, 바람처럼 달리는 말은 채찍의 그림자만 보아도 곧바로 천리를 달리지만 되돌아오라
하기만 하면 곧바로 되돌아온다는 것이다. 설두스님은 그를 칭찬하여 “똑똑한 사람은 한 번 튕겨
주면 대뜸 알아차리고, 한 번 부르면 문득 되돌아온다. 만일 불러서 되돌아온다면 손가락을 세 번
튕기리라”고 했다.
말해보라, 이는(핵심을) 드러내 밝혀주신 것일까, 모래를 뿌린 것일까?
제66칙 암두의 할〔巖頭作力〕
(수시)
기틀에 당하여서는 범을 빠뜨리는 덫을 당장에 놓고 도적을 사로잡는 작전을 이리저리 짠다. 밝음
에도 합하고 어둠에도 합하며, 한꺼번에 놓아주기도 하고 한꺼번에 잡아들이기도 한다. 죽은 뱀을
가지고 노는 것일랑 저들 작가 선지식에게 맡겨라.
(본칙)
암두스님이 한 스님에게 물었다.
“어느 곳에서 왔느냐?”
-입을 열기 이전에 벌써 저버렸다. 해골을 뚫어버렸다. 온 곳을 알려 한다면 어렵지 않지.
“서경(西京)에서 왔습니다.”
-예상했던 대로 좀도둑이었군.
“황소(黃巢)가 지난 뒤에 칼을 주었느냐?”
-평소에 좀도둑질은 하지 않았구나. 모가지 떨어질까 두려워하지도 않고 이처럼 물어다대니 담력이 퍽이나 크구나.
“주었습니다.”
-졌구나. 몸을 피할 줄을 몰랐구나. 멍청한 놈들이 삼대 같고 좁쌀처럼 많다.
암두스님이 목을 그의 앞으로 쑤욱 빼면서 “얏!”하고 소리치자,
-반드시 적절한 기연을 알아야 한다. 범을 잡는 덫이군. 이 무슨 수작인가?
스님은 말하였다.
“스님의 머리가 떨어져버렸습니다.”
-송곳 끝이 날카로운 것만 알지, 끌의 끝이 네모난 줄은 모르는군. (네 주제에) 무슨 좋고 싫은
것을 따지는가! 한 수 두었다.
암두스님이 껄껄대고 크게 웃었다.
-온 천하의 납승이라도 (암두스님) 어찌할 수 없다. 천하 사람은 속일지 몰라도, 이 늙은이의
머리가 떨어진 곳은 못 찾는다.
스님이 그 뒤 설봉(雪峰)스님에게 이르자,
-여전히 어리석구나. 이 스님이 늘 완전히 지기만 하는구나.
설봉스님이 물었다.
“어느 곳에서 왔느냐?”
-어디에서 왔는지 묻지 않을 수 없지. 반드시 시험해보아야 한다.
“암두에서 왔습니다.”
-예상했던 대로 지고 말았네.
“무슨 말씀을 하시던가?”
-이야기를 해도 방망이 맞는 것을 면치 못하리라.
스님이 전에 있었던 이야기를 하자,
-곧바로 쫓아냈어야 했다.
설봉스님이 서른 방망이를 쳐서 쫒아내버렸다.
-비록 (속발하는) 못을 끊고 쇠를 자르기는 했으나 무엇 때문에 서른 방망이만 쳤느냐? 주장자가
아직도 부러지지 않았다. 이는 아직 본분 소식이 아니다. 왜냐하면 아침에 3천 방망이, 저녁에
8백 방망이를 쳐야 하기 때문이다. 동기동창이 아니라면 어떻게 또렷한 뜻을 분별하랴.
이와 같 긴 하지만 말해보라, 설봉스님과 암두스님의 귀결점은 어디에 있는가를.
(평창)
바랑을 걸머쥐고 풀을 헤치며 바람을 맞으면서 행각할 때는 반드시 안목을 갖춰야만 된다.
이 스님은 안목이 (민첩하기가) 유성과 같았으나 암두스님에게 시험을 당하여 한 꿰미에 뚫려버렸다.
당시에 제대로 된 놈이었다면, 때로는 죽이기도 하고 때로는 살리기도 하면서 (종사가) 말해주면
바로 작용했을 것이다. 그러나 스님은 변변치 못하여 대뜸 “주었습니다”라고 말하였다.
이처럼 행각을 한다면 염라대왕이 그대에게 행각중에 얻어먹었던 밥값을 내라고 할 것이다.
그는 얼마나 많은 짚신을 떨어뜨리면서 설봉스님에게 이르렀는가? 당시 조금이라도 안목이 있어
대뜸 일어나 갔었더라면 이 어찌 통쾌하지 않았겠느냐? 이런 인연(암두스님이 웃는 것)은 깐깐하여
어렵다. ‘이 일’은 득실이 없다고는 하나 여기에 이르러서는 또한 안목을 갖춰 간택할 필요가 있다.
용아(龍牙)스님이 행각할 때 의심을 일으켜 덕산(德山)스님에게 물었다.
“학인이 막야(鏌鎁) 보검을 들고서 스님의 머리를 베려고 할 때는 어떻게 하시렵니까?”
덕산스님이 목을 쑥 빼며 앞으로 다가서며 “얏!”하고 소리지르자, 용아스님은 말하였다.
“스님의 머리는 떨어졌습니다.”
덕산스님의 방장실로 돌아가버렸다. 용아스님이 그 뒤 이일을 동산(洞山)스님에게 얘기하자 동산
스님은 말하였다.
“덕산이 당시에 무어라고 말하던가?”
“아무 말도 없었습니다.”
“그가 말이 없었던 것은 그만두고 떨어진 덕산스님의 머리를 나에게 가져와보게.”
용아스님은 이 말에 완전히 깨닫고 마침내 향을 사르면서 멀리 덕산스님을 바라보고 절을 올리며
참회하였다.
어느 스님이 덕산스님의 처소에 이르러 이 일을 전하자 덕산스님은 말하였다.
“동산 늙은이가 좋고 나쁜 것도 구별할 줄 모르는군. 이놈이 죽은 지 한참 지났는데 구해준들 무슨
쓸모가 있겠는가?”
이 공안을 살펴보면 용아스님의 경우와 매한가지이다. 덕산스님이 방장실로 되돌아가 버렸던 것은
곧 어둠 가운데서 가장 현묘한 것이었다. 암두스님이 크게 웃었는데, 그의 웃음 속에는 독기가 서려
있었다. 누구나 이를 알 수 있다면 천하를 누빌 것이다. 스님이 그 당시 알 수만 있었다면 천고
이후에도 계속되는 꾸지람을 면할 수 있었을 것이다. 암두스님의 문하에서 이미 한바탕 틀려버렸다.
이를 살펴보면 설봉스님은 암두스님과 동참(모두 덕산스님의 제자)이기에 곧 귀결점을 알고 있었
으나 그에게 말해주지 않고 서른 방망이를 두들겨서 절 밖으로 내쫓아버렸다. 이는 전무후무의
경지라 할 만하다. 이는 작가 납승의 면목을 나타내어 사람을 지도하는 솜씨이다. 그에게 이렇게
해주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 스스로가 깨닫겠는가? 본분종사는 사람을 지도하되, 어느 때는 꼼짝도
못하게 가두어놓기도 하고 어느 때는 놓아주어 어쩔 줄 모르게 만들어 깨닫도록 해주었다.
저토록 대단하신 암두․설봉 스님은 거꾸로 밥통 같은 선객에게 감파를 당하였다. 암두스님이
“황소가 지난 뒤에 칼을 주었느냐?”고 하였는데, 여러분은 말해보라, 여기에서 무슨 말을 해야 그의
웃음을 면할 수 있으며, 또한 설봉스님의 방망이에 쫓겨남을 면할 수 있을까? 이 깐깐한 화두를
몸소 깨닫지 못한다면 설령 입으로 통쾌하고 날카롭게 말하여 구경(究竟)의 경지에 이른다 하여도
투철하게 생사를 벗어나지는 못할 것이다.
산승은 평소에 사람들에게 이 기관(機關)이 전변하는 곳을 살펴보게 하였다. 만약 머뭇머뭇 헤아린
다면 멀고도 먼 이야기이다. 듣지 못하였느냐? 투자(投子)스님이 연평(延平)스님에게 물었던 것을,
투자스님이 “황소가 지난 뒤에 칼을 주었느냐?”고 묻자, 스님이 손으로 땅을 가리켰다. 투자스님은
“30년 동안 마부 노릇을 하였지만 오늘 도리어 나귀한테 들이받혔구나”라고 말했다.
살펴보면 이 스님은 참으로 작가였다. “주었다”고 말하지도 않고 “줍지 못했다”고도 말하지 않았
으니, 서울〔西京〕의 스님네와는 저 바다 건너만큼이나 멀리 떨어져 있다.
진여(眞如)스님은 이를 염(拈)하여 말하였다.
“옛사람은 하나(투자스님)는 우두머리가 되고 하나(이 스님)는 꼴찌가 되었다.”
설두스님의 송은 다음과 같다.
(송)
황소가 지난 뒤에 칼을 주었다는데
-어리석은 녀석 같으니라고, 무슨 쓸모가 있겠는가? 이는 다만 주석으로 만들어진 (물렁한) 칼
한 자루일 뿐이다.
크게 웃는 웃음은 작가이어야 알 수 있다.
-한 자식만이 몸소 얻었군. 과연 몇 사람이 있을는지? 그가 아니었다면 어떻게 자유를 얻을 수
있겠는가?
서른 방망이도 또한 가볍게 용서해줌이니
-같은 가지에서 나고 같은 가지에서 죽는다. 아침엔 3천, 저녁엔 8백 방망이다. 동쪽집 사람이
죽자 서쪽집 사람이 조문을 한다. 구제하여 살려주었다.
이익을 본 것 같으니 결국 손해를 본 것이로다.
-죄상에 의거하여 판결하였다. 당초에 조심하지 않았던 게 후회스럽다. 그래도 조금은 나은 편이다.
(평창)
“황소가 지난 뒤에 칼을 주었다는데, 크게 웃는 웃음은 작가이어야 알 수 있다”는 것은 설두스님은
그 스님과 암두스님이 큰 소리로 웃었던 곳을 노래한 것이나, 이는 천하 사람이 더듬고 찾아도
찾을 수 없다. 말해보라, 그는 무엇 때문에 웃었는가를. 모름지기 이는 작가이어야 알 것이다.
이 웃음 속에는 권(權)과 실(實)이 있으며, 조(照)와 용(用)이 있고, 죽임〔殺〕과 살림〔活〕이 있다.
“서른 방망이도 또한 가볍게 용서해줌이니”라는 것은, 스님이 그 뒤 설봉스님에게 이르러 여전히
거칠었으므로 설봉스님이 법령에 따라 서른방망이를 친 후 쫓아내버린 것을 노래한 것이다.
말해보라, 무엇 때문에 이처럼 했는가를. 온갖 망정을 다하여 이 말을 이해하려고 하는냐?
이익을 본것 같으나 실은 손해를 봄이로다.
제67칙 경상(經床)을 두들린 부대사〔傅大師揮案〕
(본칙)
양무제(梁武帝)가 부대사를 초청하여 「금강경(金剛經)」을 강의하게 하였다.
-달마 형제가 왔군. 어물전이나 술집에 관한 일이라면 몰라도 납승의 문하에서는 안된다.
이 늙 은이(부대사)는 나이 먹고도 이런 행동을 하는구나.
부대사가 법좌 위에서 경상을 한 번 후려치고 바로 자리에서 내려와 버리자,
-불똥이 튀는구나. 비슷하긴 해도 옳지는 않다. 번거롭게 이러쿵저러쿵 말하지 말라.
무제는 깜짝 놀랐다.
-두 번 세 번 사람에게 속임을 당하였다. 그러나 그가 알아들을 수가 있나?
이에 지공(誌公)스님이 물었다.
“폐하께서는 이를 아시겠는지요?”
-이치에 따를 뿐 인정에 끄달리지는 않았다. 팔은 밖으로 굽지는 않는다.
역시 서른 방망이는 때 려야 좋겠다.
“모르겠군요.”
-아깝다.
“부대사는 「금강경」 강의를 마쳤습니다.”
-이 또한 나라 밖으로 쫓아내야겠다. 당시에 지공스님까지 일시에 나라에서 쫓아냈어야
작가였다. 두 놈 모두 한 구덩이에서 나왔으니 다를 리가 있겠는가.
(평창)
양(梁)나라의 고조(高祖)인 무제(武帝)는 소씨(蕭氏)이며 이름은 연(衍), 자(字)는 숙달(叔澾)이다.
대업을 일으켜 제(齊)나라를 뒤이어 왕위에 올랐다. 즉위한 뒤에 따로이 오경(五經)의 주(註)를 내어
강의하였고, 황로(黃老)의 도교(道敎)를 두터이 신봉하였으며 타고난 성품은 지극히 효성스러웠다.
하루는 출세간의 법을 얻어 부모의 은혜에 보답하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도교를 버리고 부처님을
받들면서 누약법사(婁約法師)에 귀의하여 보살계(菩薩戒)를 받았으며, 몸소 부처님의 가사(袈裟)를
입고 「방광반야경(放光般若經)」을 강의하며 부모의 은혜에 보답하고자 하였다.
당시 지공대사(誌公大士)는 괴이한 신통력으로 대중을 현혹시킨다 하여 감옥에 갇히게 되었는데,
지공스님은 자기의 분신을 나투어 성읍에 다니면서 교화하였다. 무제가 하루는 이를 알고 느낀 바
있어 지극히 그를 추앙하고 존중하였다. 악은 막고 선은 보호하면서 은둔하고 나타나는 그의 행적을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때에 무주(婺州)에 어떤 대사(大士)가 운황산(雲黃山)에 거처하면서 손수 두 그루의 나무를 심고
이를 쌍림(雙林)이라 이름 붙이고, 자칭 미래의 선혜대사(善慧大士)라 하였다. 그가 하루는 글을
지어 제자에게 시켜서 무제에게 표(表)를 올려 황제께 여쭈었다. 때에 조정에서는 군신(君臣)의
예의가 없다 하여 받아들이지 않았다.
부대사는 금릉성(金陵城) 속에 들어가 물고기를 팔았는데 당시 무제가 간혹 지공스님을 청하여
「금강경」을 강의하게 하자, 지공스님은 말하였다.
“빈도(貧道)는 강의를 하지 못합니다. 시중에 부대사라는 사림이 있사온데 그가 이 경을 강의할
수 있습니다.”
무제는 조서를 내려 그를 대궐로 불러들였다.
부대사는 입궐하여 법좌 위에서 경상을 한 번 후려치고 바로 내려와버렸다. 당시에 대뜸 떠밀쳐
넘어뜨려버렸더라면 한바탕 뒤죽박죽되는 꼴을 면하였을텐데, 도리어 지공스님이 “폐하께서는
아셨는지요”하자, 무제가 “모르겠군요”라고 말하여, “부대사는 「금강경」강의를 마쳤습니다”라는
지경을 당하고야 말았다. 이는 한 사람은 우두머리가 되고 한 사람은 꼴찌가 된 것이라 하겠다.
지공스님이 이처럼 말하긴 했어도 꿈엔들 부대사를 보았겠는가! 그네들 모두가 망상분별을 한
것이다. 부대사가 그중에서 가장 기특하다 하겠다. 죽은 뱀(경전)이긴 하나 잘 부리면 살아난다.
어차피 경전 강의인데 무엇 때문에 내용을 크게 둘로 나누어 설명하는 이의석(二義釋)을 쓰지
않았을까? 평소 좌주는 한결같이 말하기를 “금강의 바탕은 견고하여 어느 물건도 이를 부수지 못하
며, 날카롭기 때문에 만물을 꺾을 수 있다”고 하였으니, 이처럼 강의하여야만이 경전 강의를 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하기는 그렇지만 여러분은 부대사가 오로지 향상의 핵심을 드러내고 칼날을
약간 노출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귀착점을 알게 하여 곧바로 깎아지른 만 길 벼랑에 우뚝 서도록
하였다는 사실을 모른 것이다.
지공스님이 좋고 나쁨도 분간하지 못하고 “부대사는 「금강경」강의를 마쳤습니다”라는 말을 하였
으니, 이는 (부대사의) 좋은 마음씨를 좋게 보답하지 못한 꼴이다. 이는 마치 한 잔의 못좋은 술에다
지공스님이 물을 쏟아붓는 격이며 한 솥의 국물에 지공이 한 알의 쥐똥을 넣어 더럽힌 것과
같다 하겠다.
말해보라, 경전 강의가 아니라면 결국 무엇이라 해야 할까? 송은 다음과 같다.
(송)
쌍림(雙林)에 이 몸 의탁하지 않고
-그를 붙잡을 수 없기 때문이다. 주머니 속에 뾰족한 송곳을 넣었으니 어찌 밖으로 삐져나오지
않으리요?
양나라 땅에서 티끌 먼지 일으켰네.
-세속에 들어가지 않으면 어떻게 분명한 것을 나타내리요? 풍류가 없는 곳이 참 풍류로다.
당시에 지공 늙은이를 만나지 않았던들
-도적질하는 데는 밑천이 필요치 않다. 제짝을 끌고 가는군.
황급히 나라를 떠나는 사람이었으리요.
-(저놈들의 죄를) 한 건에 처벌하라. (원오스님은) 쳤다.
(평창)
“쌍림에 이 몸 의탁하지 않고 양나라 땅에서 티끌 먼지 일으켰다”는 것은, 부대사가 앞니 빠진
달마스님과 똑같이 (양무제를) 만났다는 것이다. 달마스님이 처음 금릉(金陵)에 도착하여 무제를
뵙자, 무제가 물었다.
“어떤 것이 성스런 이치〔聖諦〕, 으뜸가는 뜻〔第一義〕입니까?”
“텅텅 비어 성스런 이치〔聖諦〕라 할 것도 없습니다.”
“나와 마주하고 있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모르겠습니다.”
무제가 이에 계합하지 못하자, 달마스님은 드디어 양자강을 건너 북위(北魏)에 이르렀다. 무제가
다시 이를 들어 지공스님에게 물으니 지공스님은 말하였다.
“폐하께서는 이 사람을 아시는지요?”
“모릅니다.”
“이는 관음대사(觀音大士)로서 보처님의 심인(心印)을 전수하는 사람입니다.”
무제는 후회하고 마침내 사신을 보내어 모셔오도록 하였으나, 지공스님은 말하였다.
“폐하께서는 사신을 보내어 모셔오라는 말씀을 마십시요. 온 나라 사람이 간다 해도 그는 되돌아
오질 않을 것입니다.”
이 때문에 설두스님은 “당시에 지공 늙은이를 만나지 않았던들 황급히 나라를 떠나는 사람이었으
리요”라고 말했던 것이다. 당시에 지공스님이 부대사를 위하여 (그의 존재를 임금에게) 말해주지
않았더라면 그도 나라를 떠났을 것이다.
지공스님이 주둥이를 나불대어 무제가 그에게 한 번 되게 속임을 당한 것이다. 설두스님의 생각은
“그가 양나라 땅에 찾아와서 경전을 강의하며 경상을 후려칠 필요조차도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왜 쌍림에 몸을 의탁하여, 죽이나 밥이나 먹으면서 분수 따라 시절을 보내질 않고
양나라 땅에 찾아와 이처럼 주석을 내어 한 번 경상을 후려치더니 바로 법좌에서 내려왔느냐?”고
한 것이다. 바로 이것이 티끌 먼지를 일으킨 것이다.
제대로 되려면 하늘을 바라보면서 위로는 부처가 있는 것도 보지 않고, 아래로는 중생이 있는 것도
보지 않았어야 했다. 그러나 만일 세간을 벗어난 일을 의논한다면 머리에는 재 쓰고 얼굴에는
흙 바르고, 무(無)를 가지고 유(有)라고 하며, 유를 가지고 무라고 하며, 옳은 것을 그르다고 하며,
거친 것을 곱다고 하는 꼴이다. 그러기보다는 차라리 어물전이나 술집을 이러저리 누비면서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이 일’을 밝히도록 했어야 했다. 이처럼 놓아버리지 않는다면 설령 미륵 부처님
이 하생(下生)한다 하여도 한 사람은커녕 반 사람도 (‘이것’을) 아는 이가 없을 것이다.
부대사는 흐리멍텅했지만 다행히 지기(知己)인 지공스님이 있었다. 지공스님이 아니었더라면
나라를 떠났을 것이다. 말해보라, 지금은 어디에 있는가를.
제68칙 혜적과 혜연〔惠寂惠然〕
(수시)
하늘로 통하는 관문을 뒤흔들고 지축(地軸)을 뒤엎으며, 범과 무소를 사로잡고 용과 뱀을 가려내는
팔팔한 놈이어야 구절마다 투합되고 기틀마다 상응할 수 있다. 예로부터 어떤 사람이 이렇게
하였을까, 거량해보리라.
(본칙)
앙산(仰山)스님이 삼성(三聖)스님에게 물었다.
“그대의 이름은 무엇인가?”
-명분과 실상을 모두 빼앗는다. 도적을 끌어들여 집안이 망하였구나.
“혜적(慧寂)입니다.”
-혀를 옴짝달짝 못하게 했네. (적군의) 깃대도 빼앗고 북도 빼앗아버렸다.
“혜적은 바로 나다.”
-각자 자기의 영역을 지키는군.
“저의 이름은 혜연(慧然)입니다.”
-시끄러운 저자 속에서 빼앗겼다. 피차가 각각 본분을 지켰다.
앙산스님은 껄껄대며 크게 웃었다.
-상황에 딱 들어맞는 기연이라 말할 만하군. 금상첨화이다. 천하 사람들이 귀착점을 알지 못했다.
왜냐하면 국토는 넓고 사람은 적으며 서로 만나는 사람이 적기 때문이다. 암두스님의 웃음과
닮았지만 암두스님의 웃음도 아니다. 똑같은 웃음인데 무엇 때문에 서로 다를까? 안목을 갖춘
사람이라야 비로소 알아볼 수 있다.
(평창)
삼성(三聖)스님은 임제(臨濟)스님 문하의 큰스님이시다. 어려서부터 많은 사람 가운데 뛰어난
지략이 있었으며 큰 기틀〔大機〕, 큰 작용〔大用〕이 있어, 대중 가운데 우뚝 솟아 짱짱했으며
사방에 명성이 자자하였다. 그 뒤 임제스님을 하직하고 회해(淮海) 지방을 두루 행각하였는데,
이르는 총림마다 모두 큰스님으로 그를 대접하였다. 그 후 북쪽 지방을 떠나 남방에 이르러 맨 먼저
설봉(雪峰)스님을 찾아가 물었다.
“그물을 뚫고 나온 황금빛 잉어는 무엇을 먹이로 해서 낚을까요?”
“그대가 그물을 뚫고 나올 때 말해주겠다.”
“1천 5백 명을 거느리는 선지식이 화두도 모르다니.”
“노승은 주지 일이 바빠서…….”
뒷날 설봉스님이 사찰의 장원(莊園)으로 가는 길에 원숭이를 만났다. 이에 삼성스님에게 말하였다.
“이 원숭이가 각기 하나의 옛 거울〔古鏡〕을 차고 있다네.”
“오랜 세월을 지내오도록 이름조차도 붙일 수 없었거늘 어찌 옛 거울이라 하십니까?”
“(거울에) 흠집이 생겼구나.”
“1천 5백 명을 거느리는 선지식이 화두도 모르는군.”
“잘못했다. 노승은 주지 일이 바빠서…….”
그 뒤 앙산스님에게 이르자 앙산스님은 준수하고 영리한 그를 몹시 사랑하여 밝은 창문 아래(수좌
소임)에 앉도록 하였다. 하루는 어떤 관리가 찾아와 앙산스님을 참방하자, 앙산스님이 물었다.
“무슨 관직에 계시오?”
“추관(推官 : 감찰관리)에 있습니다.”
앙상스님이 불자를 곧추세우며 말하였다.
“이것을 감찰할 수 있겠오?”
관리가 대답이 없자, 여러 대중들에게 물어보았으나 모두 앙산스님의 뜻에 맞지 않았다.
때에 삼성스님은 몸이 불편하여 연수당(延壽堂)에 머물러 있었다. 앙산스님이 시자(侍者)를 보내어
이 말을 그에게 묻어보도록 하였더니, 삼성스님은 말하였다.
“(본래 無事이거늘) 화상께서 일삼고 계시는군.”
다시 시자를 보내어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고 다시 묻자, “다시 범하면 용서하지 않겠습니다”고
하였다.
이에 앙산스님은 그를 깊이 수긍하였다.
당시 백장(百丈)스님은 선판(禪板)과 포단(蒲團)은 황벽(黃檗)스님에게, 주장자와 불자는 위산(潙山)
스님에게 부촉하였는데, 그 뒤 위산스님은 앙상스님에게 이를 부촉하였다.
앙산스님이 이미 삼성스님을 크게 수긍하였는데, 하루는 삼성스님이 하직하고 떠나려 하자,
앙산스님이 주장자와 불자를 전해주니, 삼성스님은 말하였다.
“저에게 스승이 있습니다.”
앙산스님이 그 이유를 물어보니, 곧 임제스님의 적자(嫡子)였다.
앙산스님이 삼성스님에게 “그대의 이름이 무엇인가”라고 물었는데, 그가 이름을 알았을텐데
무엇 때문에 다시 이처럼 물었을까? 그러므로 작가가 사람을 시험하려면 자세히 그를 알아야 한다.
그러기에 무심하게 “너의 이름은 무엇이냐”고 물어 완전히 계교상량을 없앴던 것이다.
그러나 무엇 때문에 삼성스님은 혜연이라 하지 않고 혜적이라고 말했을까? 살펴보면, 안목을 갖춘
사람은 자연 (보통 사람들과) 같지 않다. 삼성스님이 이처럼 말한 것은 전도된 것이 아니라 대뜸
적군의 깃발을 빼앗고 북을 빼앗은 것이다. 본뜻은 앙산스님의 어구(語句) 밖에 있었기 때문이다.
이 말은 상정(常情)에 떨어지지 않았으므로 찾기가 어렵다. 이러한 놈의 솜씨가 있어야 사람을
살릴 수 있다. 그러므로 “활구를 참구해야지, 사구를 참구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만일 상정
(常情)을 따른다면 사람을 쉬게 하려 해도 쉬질 못한다.
살펴보면 옛사람들은 이처럼 도를 생각하며 정신을 다한 후에야 비로소 크게 깨달을 수 있었다.
이미 깨친 뒤 이를 활용할 때에도 결국은 깨닫기 이전의 시절과 흡사하여, 상황에 딱딱 들어맞아
일언반구(一言半句)도 상정에 떨어지지 않았다.
삼성스님은 앙산스님의 귀착점을 알고서 대뜸 그에게 말하였다. “나의 이름은 혜적입니다”라고.
앙산스님은 삼성스님을 (덫을 놓아) 잡아들이려고 하였는데, 삼성스님이 거꾸로 앙산스님을 잡아
들인 것이다. 앙산스님은 완전히 당하여 벌거숭이가 되어 말하기를 “혜적은 바로 나라네”하였다.
이는 (상대를) 놓아준 것이며, 삼성스님이 “나의 이름은 혜연입니다”한 것 또한 놓아준 것이다.
그러므로 설두스님은 뒤의 송에서 “잡아들이기도 하고 놓아주기도 하니 무슨 종지인가?”라고
하였으니, 이 한 구절로 일시에 송을 끝마친 셈이다.
앙산스님은 껄껄거리며 크게 웃었는데, 이 또한 권(權)․실(實)․이 있고, 조(照)․용(用)이 있었던 것이다.
그는 팔방이 영롱하게 빛났기 때문에 활용함에 있어 완전히 자유로울 수 있었던 것이다. 이 웃음은
암두스님의 웃음과는 다르다. 암두스님의 웃음에는 독약이 있었으나, 이 웃음에는 천고만고의 맑은
바람이 늠름하다. 설두스님의 송은 다음과 같다.
(송)
잡아들이기도 하고 놓아주기도 하니, 이 무슨 종지인가?
-몇 사람이나 그를 알까? 팔방이 영롱하다. 하마터면 이런 일이 있다고 여길 뻔했다.
호랑이를 타는 목적은 공(功 : 인위적인 조작)을 끊는 데 있다.
-정수리에 외알눈이 있고 팔꿈치 위에 호신부(護身符)가 있지 않다면 어떻게 이런 경지에
이를 수 있었겠는가. 호랑이를 타는 것은 나쁘지 않으나 내려오지 못할까 염려스러울 뿐이다.
이러한 사람이 아니라면 어떻게 ‘이 일’을 밝힐 수 있겠는가?
실컷 웃어제치고 어디로 갔을까?
-9주 400군(九州四百軍 : 趙․宋의 행정구역)을 다 뒤져도 이러한 사람을 찾기 어렵다.
말소리가 아직도 귓전에 맴돈다. 천고만고에 맑은 바람이다.
천 년이 지나도록 자비의 바람 진동하리.
-지금은 어디에 있을까? 쯧쯧! 벌써 큰 웃음을 웃었는데 무엇 때문에 자비의 바람을 일으키랴!
대지가 캄캄하구나.
(평창)
“잡아들이기도 하고 놓아주기도 하니, 이 무슨 종지인가?”라는 것은, 잡아들이고 놓아주고 하여
서로서로가 빈(賓)․주(主)가 된다는 것이다. 앙산스님이 “너의 이름은 무엇이냐”고 하자, 삼성스님이
“나의 이름은 혜적입니다”한 것은 놓아준 것이며, 앙산스님이 “혜적은 바로 나다”고 하자,
삼성스님이 “저의 이름은 혜연입니다”한 것은 잡아들인 것이다. 실로 이는 서로서로가 교환한 기봉
이다. 잡아들이면 모두 잡아들이고 놓아주면 모두가 놓아주니, 이로써 설두의 송은 일시에 끝나버
렸다. 그가 의도한 바는 “놓아주거나 잡아들이지 않아 서로가 교환하지 않는다면 너는 너대로
나는 나대로가 되어버린다”는 것이다. 이 모두가 (혜적․혜연이라는) 네 글자일 뿐인데 무엇 때문에
그 안에서 놔주었느니 잡아들였느니 하며, 또 쥐었느니 풀어헤쳤느니 하는가? 그러므로 옛사람은
“그대가 서면 나는 앉고 그대가 앉으면 나는 서버린다. 함께 앉고 함께 서게 되면 둘 다 눈뜬 장님
이다”고 말하였다. 이것이 “잡아들이기도 하고 놓아주기도 하니, 이 무슨 종지인가?”이다.
“호랑이를 타는 목적은 공(功 : 인위적인 조작)을 끊는 데 있다”는 것은, 이처럼 고고한 풍채야말로
으뜸의 솜씨〔機要〕이므로 타려거든 단박에 타고 내리고 싶으면 문득 내리면서 호랑이 머리에 올라
타기도 하고 호랑이 꼬리를 잡기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삼성스님과 앙산스님 두 사람 모두 이러한
기풍이 있었다.
“실컷 웃어제치고 어디로 갔을까”라고 하였는데, 말해보라, 그가 웃었던 것은 무엇 때문에 끝에서
갑자기 “천 년이 지나도록 자비의 바람이 진동한다”고 말하였을까? 이는 사람이 죽었는데도 조문도
안하는 것과 같은 것으로서, 일시에 주해를 붙여주어버린 것이다. 천하 사람들이 한마디 하려 해도
지껄이지 못하고 귀결처를 모르는 것을 어찌하겠는가, 이 산승도 귀결처를 모르겠는데 여러분은
아시겠는가?
제69칙 남전의 일원상〔南泉圓相〕
(수시)
말 한마디도 붙일 수 없는 조사의 심인장(心印狀)은 무쇠소〔鐵牛〕처럼 생긴 기봉이다. 가시덤불을
뚫고 나온 납승은 이글거리는 화로 위에 한 점의 눈〔雪〕처럼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 평지에서
종횡으로 관통하는 것은 그만두고, 어떠한 수단이나 방편에도 의지하지 않는다면 어떠한가?
거량해보리라.
(본칙)
남전(南泉)․귀종(歸宗)․마곡(麻谷)스님이 함께 혜충국사(慧忠國師)를 예방하러 가는 도중에
-세 사람이 함께 길을 가면 반드시 나의 스승이 있다 하였는데, 무슨 기특한 일이 있었는고?
그래도 분명하게 가려내야지.
남전스님이 땅에 일원상(一圓相)을 그려놓고 말하였다.
“말하면 가겠다.”
-바람도 없는데 괜히 물건을 일으켰다. 그래도 사람들에게 알도록 해야 한다. 육지에 침몰한 배를
건져내었군. 시험해보지 않으면 어떻게 분명하게 가려낼 수 있으랴!
귀종스님이 일원상 가운데 앉자,
-한 사람이 (장단을 맞추어) 바라를 쳤다. 길 같은 길을 가는 사람만이 알 것이다.
마곡스님은 여인처럼 다소곳이 절하는 시늉을 하니,
-한 사람이 북을 치니 모두 세(남전․귀종․마곡) 스님이 됐다.
남전스님이 말하였다.
“그렇다면 떠나지 않겠네.”
-반쯤 길을 가다가 빠져나와야 제대로 된 사람이다. 한 마당 좋은 곡조로다. 작가로군. 작가이다.
귀종스님은 말하였다.
“이 무슨 수작이냐!”
-다행히도 알았구나. 당시에 한 차례 따귀를 쳤어야 했다. 멍청한 놈이구나.
(평창)
당시 마조(馬祖)스님은 강서(江西)지방에서, 석두(石頭)스님은 호상(湖湘)에서, 혜충국사(慧忠國師)
는 장안(長安)에서 크게 가르침을 폈는데, 그들은 모두 육조(六祖)스님을 친견하였다. 그때 남방의
뛰어난 사람들은 모두가 입실(入室)을 원하였으며 그렇지 못하면 이를 수치로 여겼던 것이다. 이
세 노스님이 혜충국사를 예방하러 가는 도중에 한바탕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남전스님이 말하
였다.
“그렇다면 떠나지 않겠네.”
이미 낱낱이 말해버렸는데 무엇 때문에 “떠나지 않겠다”고 말하였을까? 말해보라, 옛사람의 뜻은
무엇이었는가를. 당시 “그렇다면 떠나지 않겠다”라고 말했을 때 따귀를 후려쳐서 그가 무슨 재주
를 부리나를 살펴보았어야 했다. 만고에 떨치는 강종(綱宗)은 불과 솜씨〔機要〕일 뿐이다. 그러므
로 자명(慈明)스님은 “잡아들이고자 하는가? 주변에 있으니 헤쳐보라”고 하였다. 이는 한 번 건드
리면 딱 튕겨나와 마치 물 위에 떠 있는 호로병을 누르는 것처럼 자유자재하다. 이에 대해 많은
사람들은 그를 긍정하는 말은 되지 못한다고 한다. 그러나 이 일은 꼼짝달싹 못 하는 자리에 이르
면 이러쿵저러쿵하지 말고 쐐기와 못을 뽑아버리듯 해야 한다는 점을 모른 것이다. 그대들이 이를
분별의 마음으로 이해한다면 전혀 관계가 없다.
옛사람은 몸을 잘 비꼈기 때문에 여기에 이르러 정말 마지 못해 이처럼 하였던 것이니, 모름지기
죽임〔殺〕도 있고 살림〔活〕도 있는 것이다. 살펴보면 그들 한 사람은 원상(圓相) 속에 앉아 있
고, 한 사람은 여인처럼 절하는 시늉을 하였는데 매우 잘한 일들이다.
남전스님이 “그렇다면 떠나지 않겠다”고 하자, 귀종스님은 “이 무슨 수작이냐”고 하였다. 이 멍청
한 놈이 또 이처럼 하였던 것이다.
그가 이처럼 말한 본래의 뜻은 남전스님을 시험하려고 하였던 것이다. 남전스님은 평소에 “이를
여여(如如)라고 부른다 하여도 벌써 빗나가버렸다”고 말하였다.
남전․귀종․마곡스님은 한 집안 사람이다. 한 번 사로잡고 한 번 놓아주며〔一擒一縱〕한 번 죽
이고, 한 번 살리는〔一殺一活〕데 참으로 기특하였다. 설두스님의 송은 다음과 같다.
(송)
유기(由基)가 화살로 원숭이를 쏘니
-눈앞에 있는 이 한 길에 직면하여 어느 누가 감히 앞으로 나아가랴. 곳곳마다 오묘함을 얻었다.
화살을 쏘기 이전에 벌써 적중해버렸다.
나무를 끼고 도는 화살 왜 그리도 곧은지,
-알지 못한다면 어떻게 감히 이처럼 할 수 있으랴. 동서남북 온 천하가 한가풍이로다. 이미 빙 돌아간 지 오래이다.
천사람 만사람 가운데
-삼대처럼, 좁쌀처럼 많다. 여우 같은 정령 떼거리이나 남전스님을 어찌하겠는가?
어느 누가 일찍이 적중시켰을까?
-한 사람은커녕 반 사람도 없다. 이들(위의 세 명) 말고는 아무도 없다. 한 사람도 쓸 만한 놈이
없다.
서로를 부르며 말하였다. “돌아가련다, 돌아가련다.”
-진흙덩이를 주무르는 놈들아! 되돌아오는 것만 못하리라. 아직 조금 멀었다.
조계로(曹溪路)에는 안가겠다.”
-큰 고생하는구나. 아마 이는 조계의 문하객은 아니렷다. 낮은 곳이야 평탄하게 할 여유가 있겠
지만 높고 높은 곳은 쳐다볼 수도 없다.
설두스님은 다시 말한다.
“조계로는 평탄한데 무엇 때문에 안가느냐?”
-남전스님만이 반쯤 길을 가다가 빠져나온 것이 아니라 설두스님도 중간에서 빠져나왔구나. 좋은
일도 아예 일삼음이 없는 것만은 못하다. 설두스님도 이런 병통을 근심하였다.
(평창)
“유기(由基)가 화살로 원숭이를 쏘니, 나무를 끼고 도는 화살 왜 그리도 곧은지”라고 하였다.
유기는 초(楚)나라 때 사람이다. 성은 양(養), 이름은 숙(叔), 자(字)는 유기(由基)이다. 마침 장왕
〔楚莊王〕이 사냥을 나갔다가 한 마리 흰 원숭이를 발견하고 사람에게 쏘게 하였으나 원숭이가 날아
가는 화살을 잡아 희롱하니, 여러 신하들에게 명령하여 쏘게 하였으나 맞히는 사람이 없었다.
마침내 왕이 여러 신하들에게 (활 잘 쏘는 사람을) 묻자 많은 신하들이 “유기가 활을 잘 쏜다”고
아뢰어 드디어 그에게 활을 쏘게 하였다. 유기가 활을 당기려 하자 원숭이는 나무를 껴안고 슬피
울부짖었으며, 화살을 쏠 즈음에 이르자 나무를 끼고 돌면서 피하였으나, 화살도 나무를 끼고
돌면서 원숭이를 적중시켰다. 이는 귀신 같은 활잡이〔神箭〕였다.
그런데 설두스님은 무엇 때문에 “왜 그리도 곧은지”라고 말하였을까? 완전히 곧았더라면 적중하지
못했을 것이다. 화살은 빙글빙글 나무를 끼고 돌았는데, 무엇 때문에 “왜 그리도 곧은지”라고
말하였을까? 설두스님은 비유를 참으로 잘 하였다. 이일은 「춘추전(春秋傳)」에 나온다. 어느 사람은
“나무를 끼고 돈 것이 일원상(一圓相)이다”고 말하니, 참으로 이와 같다면 말의 종지를 알지 못하
였고, 완전히 곧은 곳도 모른 것이다. 세 늙은이는 길은 달랐으나 귀결점은 같았으며, 한 가지
법도로 일제히 크게 곧았었다.
그들이 갔던 곳을 알면 종횡무진하면서도 마음을 떠나지 않고 마치 모든 시냇물이 바다로 흘러
가는 듯하리라. 그러므로 남전스님이 “그렇다면 떠나가지 않겠다”고 말한 것이다.
납승이 바른 눈〔正眼〕으로 엿본다면 이는 망상분별일 뿐이다. 따라서 만약 그것을 망상분별이라
말한다면 이야말로 망상분별이 아니다. 나의 스승 오조(五祖)스님께서는 “그들 세 사람은 혜거삼매
(慧炬三昧)였으며, 장엄왕삼매(莊嚴王三昧)였다”고 하셨다.
그러나 여인처럼 절을 하는 시늉을 했으나, 끝내 여인의 절로 알지 않았으며, 원사을 그렸으나
원상으로 알지 않았다. 이미 이처럼 알지 않았다면 또 어떻게 알아야 할까? 설두스님은 말하기를
“천사람 만사람 가운데 어느 누가 일찍이 적중시켰을까”라고 하였는데, 몇 사람이나 백발백중을
할 수 있었을까?
“서로를 부르며 ‘돌아가련다, 돌아가련다’”라고 한 것은 남전스님이 말한 “그렇다면 떠나가지
않겠다”는 말을 노래한 것이다. 남전스님은 그리하여 떠나가지 않았으므로 “조계로에 가지 않겠다”고
하였는데, 이는 가시덤불을 없애버린 것이다.
설두스님은 그만두지 못하고 다시 “조계로는 평탄하게 무엇 때문에 안가느냐?”고 말하였다. 조계로
가는 길은 티끌과 자취가 끊겨서 적나라하며 말끔하여, 평탄하고 유연한데 무엇 때문에 오르는 것을
그만두었을까? 각자 스스로가 발밑을 보라.
제70칙 위산의 목도 입도 막은 뒤〔潙山倂却〕
(수시)
사람을 통쾌하게 하는 한마디 말이요, 말〔馬〕을 날쌔게 달리게 하는 하나의 채찍이며, 만 년이
한 생각〔一念〕이요 한 생각이 만 년이다. 단박에 깨치는 길을 알려고 하는가? 말하기 이전에 있다.
말해보라, 말하기 이전에는 어떻게 찾아야 하는가를. 거량해보리라.
(본칙)
위산(潙山)․오봉(五峰)․운암(雲巖)스님이 함께 백장(百丈)스님을 모시고 서 있자
-껄껄껄. 처음부터 끝까지 까다롭군. 그대는 서쪽 진나라로, 나는 동쪽 노나라로 (모두 자신의 길을)
간다.
백장스님이 위산스님에게 물었다.
“목구멍과 입을 닫아버리고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훌륭한 장수 하나를 구하기 어렵다.
“스님께서 말씀해보십시오.”
-상대방이 할 말을 가로챘군.
“나는 사양치 않고 그대에게 말해주고 싶지만 훗날 나의 자손을 잃을까 염려스럽다.”
-노파심이 간절하기도 하다. 낯가죽이 두껍기가 세 치나 되겠다. 이러쿵저러쿵했구나. 다 털려서
벌거숭이가 됐다.
(평창)
위산․오봉․운암스님이 함께 백장스님을 모시고 서 있자, 백장스님이 위산스님에게 물었다.
“목구멍과 입을 닫아버리고,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스님께서 말씀해보시지요.”
“나는 사양치 않고 그대에게 말해주고 싶지만 훗날 나의 자손을 잃을까 염려스럽다.”
백장스님이 이처럼 말하기는 하였지만 (매일 사용하던) 밥그릇을 남에게 빼앗겨버린 격이다.
백장스님이 다시 오봉스님에게 묻자, 오봉스님은 말하였다.
“화상께서도 (목구멍과 입을) 닫아버려야 합니다.”
“사람이 없는 곳에서 이마에 손을 얹고 멀리 있는 그대를 바라보겠노라.”
또다시 운암스님에게 묻자, 운암스님은 말하였다.
“스님은 할 수 있는지요?”
“나의 자손을 잃었구나.”
세 사람은 각기 일가(一家)를 이룬 자들이었다. 옛 어른(운문스님)의 말에 “평지에 죽은 사람이
무수하다. 가시덤불을 지나가는 자라야 좋은 솜씨이다”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종사(宗師)들은 가시
덤불로 사람을 시험하였던 것이다. 왜냐하면 상정(常情)의 언구(言句)로써 사람을 시험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납승이라면 반드시 구절 속에 기연을 드러내고 말 가운데에서 핵심을 알아야 한다.
판때기를 짊어진 자〔擔板漢 : 외통수〕들은 흔히 언구 속에서 살아남지 못하고, “목구멍과 입을
벌리지 않으니 다시는 입을 뗄 곳이 없다”고 말한다. 이에 변통할 줄 아는 자라면 역공격할 줄 아는
기상이 있다. 그러므로 물음 속에 한 가닥 길이 있어서 칼끝도 상하지 않고 손도 다치지 않는다.
위산스님이 “스님께서는 말씀해보시지요”라고 말하였는데, 말해보라, 그의 뜻은 무엇인가를. 여기에
번뜩이는 전광석화처럼 그(백장스님)를 내지렀다. 묻자마자 바로 답하여 빠져나갈 길이 있어,
한 오라기의 힘도 쓰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는 활구를 참구하고 사구를 참구하지 않았다”고 말한
것이다. 백장스님은 문득 그를 그냥두지 않고 “사양치 않고 그대에게 말해주고 싶지만 훗날 나의
자손을 잃을까 염려스럽다”고 말하였을 뿐이다.
대체로 종사가 사람을 지도하는 것은 못과 쐐기를 뽑아주는 것인데, 요즈음 사람들은 “이 답변은
그(위산스님)가 말뜻을 깨닫지 못해서 인정하지 않은 것이다”고들 말한다. 그러나 이는 (백장스님)
말 속에 하나의 쌩쌩한 기연이 있어 천 길 벼랑처럼 우뚝하고, 빈(賓)․주(主)가 서로 교환하여 팔팔한
것을 전혀 모른 것이다.
설두스님은 그의 말이 풍류도 있고 상대를 들었다 놨다 하는 솜씨가 완연히 자재하며, 또한 (적이
지나는) 통로를 꽉 거머쥐고 있음을 좋아한 까닭에 다음과 같이 송을 한 것이다.
(송)
스님이 말해보시오.
-하늘과 땅을 덮어버렸다. 벌써 칼끝을 상하고 손을 다쳤다.
뿔 돋힌 호랑이가 울창한 풀 속에서 나왔네.
-참으로 여러 사람 놀라게 하는구나. 대단히 기특하다.
십주(十洲)에 봄이 저무니 꽃잎이 시들한데
-곳곳마다 시원하다. 아무리 찬탄해도 다 찬탄할 수 없다.
산호 가지마다 햇살이 빛나는구나.
-(햇살이) 천겹 만겹이라. 어느 곳에서도 찾을 수 없는 것을 어찌하랴.
대답이 하늘과 땅을 덮었구나.
(평창)
이 세사람의 답변은 각각 다르지만 (위산스님은) 천 길 벼랑에서 있는 듯도 하였고, (오봉스님은)
조(照)․용(用)이 함께 하기도 하였으며, (운암스님은) 결국 자신마저도 구제하지 못하였다.
“스님께서는 말씀해보시오”라고 하였는데, 설두스님은 이 한 구절 속에 기봉을 드러내어, 다시 그
가운데 사뿐사뿐 내지르면서 사람들이 쉽게 알 수 있도록 하였다. “뿔 돋힌 호랑이가 울창한 풀속
에서 나왔다”는 것은 위산스님의 대답이 흡사 사나운 호랑이의 머리 위에 뿔이 돋힌 것과 같으니
어떻게 그 곁에 가까이 갈 수 있겠는가라는 것이다. 듣지 못하였느냐. 어떤 스님이 나산(羅山)
스님에게 물었던 것을.
“함께 살다가 함께 죽지 않을 때는 어떠합니까?”
“소에게 뿔이 없는 것과 같다.”
“함께 살고 또한 함께 죽을 때는 어떠합니까?”
“호랑이가 뿔이 돋힌 격이다.”
설두스님은 이 한 구절에서 송을 끝마친 것이다. 그러나 그에겐 몸을 비낄 수 있는 재주가 아직
남아 있어, 다시 “십주에 봄이 저무니 꽃잎이 시들한데”라고 하였다. 바다에는 삼신산(三神山)과
십주(十洲)가 있는데, (이 세상의) 일백 년이 거기에서는 한 번의 봄에 해당된다고 한다. 설두스님의
말에는 풍류까지 있고 완연히 드넓은 기상이 서려 있다. 봄이 다 갈 무렵 온갖 꽃나무들은 일시에
시들지만, 산호나무 숲은 시들 줄 모르고서 태양처럼 빛나고 그 빛이 서로 어려 있으니, 이러할
때야말로 참으로 기특하다 하겠다.
설두스님은 이를 이용하여 “스님께서 말씀해보시오”라는 것을 밝혔다. 십주는 모두 바다 밖에 붙어
있는데, 첫째는 조주(祖洲)이니 반혼향(返魂香)이 나오며, 둘째는 영주(瀛洲)이니 지초(芝草)와 옥석
(玉石)이 나고 샘물은 술맛과 같으며, 셋째는 현주(玄洲)이니 선약(仙藥)이 나오는데 이를 먹으면
불로장생하며, 넷째는 장주(長洲)이니 모과(木瓜)와 옥영(玉英)이 나오고, 다섯째는 염주(炎洲)이니
불에 넣어도 타지 않는 화완포(火浣布)가 나오며, 여섯째는 원주(元洲)이니 꿀 맛 같은 영천(靈泉)이
있으며, 일곱째는 생주(生洲)이니 산천에 추위와 더위가 없으며, 여덟째는 봉린주(鳳麟洲)이니
봉의 부리와 기린의 뿔을 달여 만든 속현교(續弦膠)가 나오며, 아홉째는 취굴주(聚窟洲)이니 청동
머리에 무쇠 이마를 지닌 사자가 나오며, 열째는 단주(檀洲 또는 流洲)이니 곤오석(琨吾石)이
나오는데, 이를 칼로 만들면 옥돌이 진흙처럼 잘린다고 한다.
산호는 「외국잡전(外國雜傳)」에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진(秦)나라 서남쪽 장해(漲海) 속으로, 700~800리쯤 가노라면 산호주(珊瑚洲)가 있다. 산호주의
밑바닥은 반석으로 되어 있으며, 반석 위에서 산호가 돋아나는데 사람들이 이를 철망(鐵網)으로
채취한다.”
또한 「십주기(十洲記)」에는 “산호는 남쪽 바다 밑에서 나온다. 나무의 높이는 2~3자이고, 가지는
있으나 껍질이 없고, 옥처럼 생겼으며 빨갛고 윤기가 난다. 이는 달에 감응(感應)하여 나며, 모든
가지에는 모두 달무리가 망울져 있다”고 되어 있다. 이 제70칙의 이야기는 권제8 처음의 첫째
공안(제71칙)과 함께 보라.
불과원오선사벽암록 권제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