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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감록 10승지
鑑訣
李沁
1.풍기 예천
2.안동 화곡
3.개령 용궁
4.가야
5.단춘
6.공주 정산 마곡
7.진천 목천
8.봉화
9운봉 두류산
10.태백
鄭鑑
1.풍기 차암 금계촌--- (보충설명: 경북 영풍군의 풍기읍에 금계리가 있다. 「금빛 찬란한 닭이 알을 품었다」는 이른바 금계포란(金鷄抱卵)의 형국에서 비롯된 이름이다. 풍기는 풍수리상으로 열 개의 명당으로 통요하는 10승지 중의 하나이며 예로부터 병화불입(兵火不入)의 장소로 알려졌다)
2.화산 소령 고기
3.보은 속리산 四甑項 근처
4.운봉 행촌
5.예천 金唐室 단 임금수레 닥치면 안됨
6.공주 계룡산 유구 마곡
7.영월 정동쪽 상류 단 수염없는 자가 먼저 들어가면 안됨
8.무주 무봉산 북쪽 銅傍 相洞
9.부안 호암 아래
10.하천 가야산 만수봉
기타 정선현 상원산 계룡봉
오백론사비기
寄語人間超道士하노니須從白兎走靑林이라.
도선비결
三隣이 助安하여 鷄龍山에 三子奠安이라.
남격암산수십승보길지지
1.기천 차암 금계촌
2.화산 召嶺古基
3.보은 속리산 蒸項근처
4.예천 金堂洞 북쪽 임금수레가 임하면 달라짐
5.운봉 두류산 銅店村 백리안
6.공주 유구 마곡 둘레 백리
7.영월 정동쪽 상류 수염없는자 먼저 들어가면 달라짐
8.무주 무풍 북쪽 동굴옆 덕유산
9.부안 호암아래 변산 동쪽
10.가야산 남쪽 만수동 둘레2백리
기타 풍기 영천 단양 영춘 봉화 안동
平平 蔚蔚이 가장 吉
내포의 비인 남포
금오산,덕유산,두류산,조계산(순천),가야산,조령,변산,월출산,계룡산,수산(안동),보미산(진보),오대산,상원산(정선),팔령산(흥양바다섬중),유량산(연풍),온산(신령)
토정가장결
1.요동 간방 파산 압록강 중간
2.삼척부 대소궁기 오십천 우이사이 柳씨박씨가까이吉 김씨고씨 멀리 하라.
3.2번10년후 풍기 소백산아래 금계위
4.을미년 공주 용흥
5.십승지에 갈때는 중간쯤에 들어가라 이때 가장 이로운 것 궁궁
弓弓은 落盤孤四乳이다.
6.예천
7.안동
8.운봉 두류산
9.계룡산 한차례진동 흑석이 백석되고 草浦에 배 다닐때 알것이다.
서계이선생가장결
1.세상재난은 자연재해와 역병이다 소의 성질은 들에 있으니 이로움이 밭에 있다.
2.나를 죽이는자 누구뇨? 小頭無足(주削)이라. 나를 살리는것은 가난이니 穴下弓身(주 窮)이다.성신이 비추는 곳이 도탄을 면한다.동산과 삼남에 복성이 두루비친다.
3.속리산 증항 나중에 들어가라.
4.작은산과 작은 시내로 들어가거든 俠字村을 찾으라.
5.황간 영동 간에는 만호가 살아 남는다.
6.청주남쪽 문의북쪽 숨을만하다.
7.옥천 진잠 간혹 별이비친다.
8.밭田을 알아라.
9.부자를 쫓아가지 말아라.
정북창비결
십승지지 쓸데가 있기도하고 없기도 하다.
1.흰것을 의지하는자 살고, 풍년든 곳에 가까이 하면 살리라.
2.발로 관동땅을 밟지말고 거처는 공주 양주 사이에 정하지 말라.
3.물고기가 한강에 자취가 없을때 한양이 말년이다.
4.양쪽으로 끊어진 산맥 물깊은 섬에 숨으라.
5.한강상류나 금강 심원천에 가지말라.
6.나라는 남쪽에서 망하게 하고 기강은 서쪽에서 지탱하며 물과물이있는 서남쪽의
독이 궁궐까지 미치리라.
7.箕星이 희어질 즈음에 피가흘러 절굿공이가 떠내려가고, 천리가 한책상이 되니
갑옷에 두뿔이 나는 도다.
8.여덟줄의 백성이 다섯달 동안 시체로 쌓이는데 그것은 소나무와 잣나무를 심을 때 요, 제비와 기러기가 가고 오는 시절이라.
9.돈과 곡식이 쌓인 시골에서 마을 사람을 구조 한다.
10.명승지가 먼저 혹독한 화를 당하고 드러나 있는 땅에 먼저 재물을 찿는다.
두사총비결
1.화산 가야산 지리산 두류산 삼풍
2.오서산 성주산
3.마니산 약수산
4.영가의 백운산 화악산 대아산 도성산
5.영천의 백운산 동주.용해
6.명주
7.소양의 기린산
8.낭읍의 대미산
9.태령의 수양산 곡산
10,신안의 몇몇고을
피장처
1.양주산내촌 80리 어영창 동쪽 수구30리 산 밑
2.양근 소설촌 북쪽40리 미원 깊은곳
3.인천 영종도
4.춘천 기린곡
5.소양강 바위 벽사이 물 한줄기 나오는곳 생선 소금이 귀해 외부인 살기 어려움
6.낭천읍 다리촌지나 동북쪽 대미촌 소미촌 오시동 칠천동 흑어연 청하산
7.가평 대아 도성
8.곡산 명미촌 서쪽10리 조음동 서쪽 희녕 경계 너머 명미촌
9.충주 월악산
10,경상도 내성 북면 춘양면
11.강원도 강릉 삼척 울진 평해
12.충청도 비인 남포
13.담양 추월산
14.전라도 무주 덕유산 남쪽 원학동
15,풍기 차령의 금계촌
16.안동 북면 소라 고기부 동쪽 태양 서면
17.단양 가차촌
18.단성 북면 동양면
19.여주 사전촌 천기 안 정혈 용암 밑
20.광주 율평 석인 동쪽가 구멍
21.이천 북면 광복동 110리 천기 땅
북두류노정기
평강읍 우량장 20리 우량 구동내 50리 마삽 30리 구곡천 청화산 태산 40리 또 태산 두어칸 불당 천장 폭포 안으로 2보 석굴 10리 동구에 오장비 3臺 여기에 민가170여호가 있다. 어찌 이곳을 찾을 수 있으랴.
경주이선생가장결
십승지에 들어갈때 이로운 것은 궁궁이다. 궁궁은 꽃소반에 줄이 사방에서 일어나네.
弓弓者는 花盤苽四起也라.
소백산맥의 중심 무풍
풍수가들은 산에는 기를 모으고 돋우는 산과 기를 발산해서 소진하는ㅡ 산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백두대간의 여러 산 중에서도 특별히 태백산, 소백산, 덕유산을 중시하는데 태백ㆍ소백산은 우리나라의 척추라고도 할 수 있는 백두대간의 중간 쯤에 위치해서 이리 저리 뻗어나가 소진된 기를 다시 크게 모으고 돋우어서 위로는 오대산, 설악산, 금강산을 지원하고, 서쪽으로는 속리산을 이루게 하고, 남으로는 주왕산을 일으켜 운문산을 거쳐 동래 금정산에 이르는 맥을 형성케 한다. 덕유산은 소백산맥(태백산에서 지리산까지)의 중앙에 위치하여 크게 기를 모아서 위로는 속리산, 아래로는 지리산, 동으로는 가야산, 서로는 계룡산 등의 명산들을 일어서게 한다. 우리나라 산중에서 기를 크게 모으는 데는 태백ㆍ소백보다 큰 산은 없으나 기를 거두어 간직하는 데는 덕유산이 낫다. 그래서 양기(養氣), 수단(修丹)하는 사람들은 덕유산을 더 좋아했던 것이다. 이 덕유산의 기를 몽땅 받은 땅이 있는데, 그 곳이 바로 무풍(茂豊)이다. 속리산에서 남하하는 소백산맥은 추풍령을 넘어서 황악산, 민주지산을 일으키고 무주땅에 와서는 삼도봉, 대덕산(1,290m), 삼봉산(1,254m), 덕유산(1,614m)으로 이어지는 험준하고도 거대한 산 덩어리를 형성한다.
이 삼도봉에서 덕유산으로 이어지는 산맥은 반원을 그리면서 휘어졌는데 무풍은 그 반원의 중심점에 위치한다. 무풍은 동남이 소백산맥의 주맥으로 막혔고, 서쪽과 북쪽도 소백산맥의 지맥으로 둘러싸여 완전히 산 속에 갇힌 땅이다. 길이라고는 설천에 바위산을 뚫은 나제통문 밖에 없다. 이 바위 터널 안쪽은 신라땅(무풍)이고 바깥쪽은 백제땅(주계)이었다. 이런 천연의 요새였기에 삼국시대의 무풍은 소백산맥의 서쪽에 있으면서도 백제의 예봉을 막고 신라땅으로 남아 전초기지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중환의 「택리지」에는 ‘남사고(南師古)는 무풍을 복지(福地)라 했다. 동네 바깥 산은 기름진 밭이라 부촌이 많으며 속리산 이북의 산 마을들과는 비교할 바가 아니다’라고 했다. 『정감록』의 《감결》에는 10승지【 병화(兵火)가 들어오지 않고 흉년이 들지 않아 목숨을 부지할 수 있는곳】중 여덟 번째로 무주(茂朱) 무봉산(舞鳳山) 북쪽 동방(銅傍) 상동(相洞)을 꼽고 있다. 그 런데 정감록을 비롯한 여러 비결에 실려있는 무풍의 10승지 위치 표현이 실로 아리송하다. 『유산록』에는 무풍 북쪽에 있는 방동(方洞), 『남사고 비결』에는 무풍(茂豊)의 북쪽 골짜기 일대 덕유산 내맥,『징비록』에는 무주 무풍(舞豊) 북쪽 방은동(方隱洞) 덕유산 내맥 등으로 표시돼 있다. 무풍에 대한 한자의 표기가 무성할 무(茂) 풍성할 풍(豊) 대신에 춤출무(舞)자와 바람풍(風) 혹은 춤출무(舞)와 풍성할 풍(豊)으로 되어 있는 경우가 있는데, 이렇게 음은 같으나 글자를 달리 쓰게 되었던 원인은 당시 민간에서 그렇게 써왔기 때문일 것이다.
여러 비결을 종합해 볼 때 무풍의 십승지의 위치는 무풍의 북쪽에 있다고 되어있다. 여기에서 무풍은 무풍현청이 있는 무풍읍내를 가리킨다. 옛 무풍읍은 지금의 면사무소와 시장이 있는 현내리이다. 그런데 현내리 북쪽은 십승지가 될 만한 깊은 골짜기도 의슥한 계곡도 없다. 그렇다면 비결에서 말하는 무풍은 과연 어디일까?
「택리지」에 무풍령(舞風嶺)이 나오는데 ‘속리산으로 화령ㆍ추풍령ㆍ무풍령이 작은 영이고, 덕유산 남쪽의 육십령ㆍ팔랑치가 큰 영이다........’. 이 무풍령의 위치를 자세히 살펴보면 지금의 대덕치임을 곧 알 수 있는데 당시에는 대덕산이 무풍산으로 불렸을 가능성이 크다고 하겠다. 그렇다면 『정감록』의 《감결》에 무봉산(舞鳳山) 의 새봉(鳳)자는 무풍산(舞風山)의 바람 풍(風)자의 오기임을 짐작하게 한다. 또한 무풍 북쪽은 무풍읍의 북쪽이 아니라 무풍산의 북쪽이 된다. 실제로 가보면 대덕산은 중후하고 우람하며 그 북쪽 골짜기는 『징비록』의 무풍산 북쪽 방은동(方隱洞) 덕유산 내맥인데 어느 골짜기 할 것 없이 피난처 아닌 곳이 없다는 말을 실감하게 된다. 대덕산을 무풍산으로 봤을 때 비로소 무풍고을 전체가 십승지에 해당됨을 설명할 수 있게 된다.
신기마을
▲ 천반산 한림대에서 내려다 본 신기마을 일대, 왼쪽 아래가 명륜학당 입구
(멀리 가운데 연화부수(蓮花浮水)의 명당이 보인다.)
▶ 다리를 경계로 왼쪽은 장수 오른 쪽은 진안이다.
장수에서 금강을 따라 내려오면 연화부수형 지형에서 구비돌아 봉황대로 흐른다.
신기 마을 앞 금강 상류지역은 도처에 기암절벽이다. 저쪽 모퉁이만 돌면 명륜학당이 가깝다.
선생께서는 지리산 청학동에서 일찌기 이 곳으로 가족과 함께 이주하였다.
청학동의 퇴색과 변질을 우려하였으나 이미 기울어 가는 현실이라...
새로운 터전을 찾아 이 곳에 정착하기까지 무척이나 고심과 고생이 많으셨다고 한다.
심신을 정화시켜줄 산수가 절승을 이룬 곳을 찾아 수년동안 정감록에서 예언하고 있는 10승지를 중심으로 전국을 답사하였으나 이상적인 곳이 쉽게 나타나지 않았다.
신기 마을은 정감록이 예언한 10승지의 한 곳이면서 조선조 유학자이자 서애 유성룡 선생의 형인 겸암 유운용(柳雲龍, 임진왜란 때 이순신을 천거한 서애 유성룡의 형)이 이 곳의 지리는 호남 제일의 땅이라 칭송한 곳이다.
장수명륜학당으로 드는 길 - 금강의 맞은편, 멀리 보이는 바위문을 들어서서 계곡을 향한다.
왼쪽의 봉우리는 천반산 정상 시루봉이다.
장독바위 뒤로 중앙 부분의 당산 숲에 가리워진 학당, 오른편에서 뻗어내린 산줄기는
마치 꿩이 엎드려(伏雉) 머리를 뻗은 형세다.
영월 정동
김삿갓계곡
1914년 행정 구역 폐합에 따라 '와인리' 와 '거석리'를 병합하여 그 첫자를 따서 '와석리'라 하였다.
이 곳은 양백지간으로 강원,경상도의 경계인 선달산에서 내리는 개천이 경북 영풍군 부석면 남대리와 충북 단양군 영춘면 의풍리를 지나 와석리로 흘러든 후, 다시 남한강 지류인 옥동천을 지나 단양,충주,여주로 흘러산다. 비기서인 ''정감록'' 과 조선 명종 때 남사고가 지은 ''남격암산수십승보길지지''에 영월 정동인 이것을 어지러운 세상에서 난리를 피할 수 있고 삼재가 들어오지 않는 10승지라고 지적했듯이 정감록 신봉자들이 살았던 삶의 터전이었다.
기묘사화 때 조광조의 후손들이 난을 피해 흘러 들어와 명생동에 정착하여 조촌이라는 마을을 형성했으며, 김삿갓도 홍경래의 난을 피해 와석리 어둔으로 찾아 들었다.
거석리 싸리골 밑에는 옛날 호적과 부역도 없이 떠돌아다니며 사냥과 고리를 만들어 팔면서 생계를 우지하는 야수척들이 살던 야수사터가 있었다고 한다.
와 석리는 와인리를 제외한 모든 촌락이 심산계곡의 화전촌으로 81가구 330여 명의 인구가 와인리, 거석리, 둥릉골, 싸리골, 곡골, 노루목, 어둔, 미사리 등지에서 송이버섯, 산나물, 약초 등을 채취하면서 생활하고 있다. 충북에서는 의풍의 노루목재를 지나는 도로의 포장공사를 하고 있고, 영월군에서는 연차 계획으로 공사를 하는데 지금은 싸리골까지 포장을 마쳤으며 김삿갓묘까지 도로가 확장되면 와석리의 교통이 좋아질 것이다.
십승지로 평가되는 노루목의 지세
마대산 줄기가 버드나무 가지처럼 흘러내리는 유지앵소형(柳枝鶯巢形 : 버드나무 가지에 지은 꾀꼬리집 형상)의 명당으로 태백산과 소백산이 이어지는 양백지간(兩白之間)에 자리잡고 있다.
마대산 자락인 어둔과 선락동에서 흐르는 냇물을 경계로 충북 단양군 영춘면 의풍리와 경계를 이루고 있다. 남·동쪽으로는 넓은 노루목의 풍요로운 풍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비기서인 『정감록』 과 조선 명종 때 남사고가 지은 『남격암산수십승보길지지』에 영월 정동인 이곳을 어지러운 세상에서 난리를 피할 수 있고 삼재가 들어오지 않는 10승지라고 지적했듯이 정감록 신봉자들이 살았던 삶의 터전이었다.
기묘사화 때 조광조의 후손들이 난을 피해 흘러 들어와 명생동에 정착하여 조촌이라는 마을을 형성했으며, 김삿갓도 홍경래의 난을 피해 와석리 어둔으로 찾아 들었다.
와 석리는 와인리를 제외한 모든 촌락이 심산계곡의 화전촌으로 81가구 330여 명의 인구가 와인리, 거석리, 둥릉골, 싸리골, 곡골, 노루목, 어둔, 미사리 등지에서 송이버섯, 산나물, 약초 등을 채취하면서 생활하고 있다. 현재 김삿갓 묘역까지 포장공사가 완료되어 있다.
와석재를 넘어 약 1km정도 가면 도로 옆으로 옥동초등학교 주석 분교가 있다. 그 옆으로 김삿갓 묘소로 가는 길이 있다. 이 곳에서 약 5km의 포장도로를 따라가면 김삿갓 유적지에 닿을 수 있는데 김삿갓에 관한 일화는 전국 어느 마을이든 한 두 가지는 남아 있고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나 김삿갓(본명 김병연)이 영월에 살았으며 그 묘소가 영월에 있다는 사실은 몇 년 전에야 영월 향토사 연구가 박영국에 씨에 의해 알려졌다.
김 삿갓은 유년기를 황해도 곡산에서 보내고 오래지 않아 영월읍 삼옥리로 이전하여 잠시 살다가 세상 사람들의 이목을 피하여 깊은 산중을 찾아 집을 짓고 가족들과 함께 살았는데, 지금의 영월군 하동면 와석1리, 속칭 어둔이라고 전해지며 김삿갓은 이곳 어둔을 근거로 전국 방방곡곡을 방랑하다가 전남 화순군 동북 땅에서 객사하여 차남인 익균이 노루목에 모셨다 한다.
운봉
-철쭉 활짝, 봄은 숨가쁜 절정 바래봉-
봄의 절정은 철쭉이다. 이른 봄 매화와
산수유가 피었다 지고, 목련 진달래가 시들고
나면 다시 온 산을 물들이는 꽃. 날마다 붉은
빛을 더하는 산철쭉이 마지막으로 봄꽃
잔치를 열고 있다.
지리산 서북능선의 남원 바래봉. 지리산
철쭉의 봉화대. 바래봉에서 피워올린 철쭉
불꽃은 구례의 노고단과 산청의
세석평전까지 동서로 타오르며 한달 동안
100리 지리산 능선을 붉게 물들인다. 이어
백두대간을 따라 덕유산과 소백능선을 넘어
정선의 두위봉까지 「꽃봉화」를 올리게
된다.
바래봉은 산 전체가 하나의 「산정화원」이다.
스님들의 밥그릇인 바리때를 엎어놓은 것 같다는 바래봉. 초지로 이루어진 부드러운
구릉지대에는 무더기 무더기 철쭉 군락이 퍼져 있다. 마치 누군가 심고 가꾼 것 같다.
바래봉에는 국립종축장 운봉목장이 있다. 목장의 소떼들은 봄철 돋아나는 풀과
나무의 새순을 먹어치운다. 그러나 독성이 강한 철쭉은 입에 대지 않기 때문에
해마다 철쭉밭이 더 무성해진다. 철쭉밭은 모두 30여만평. 현재 600~700m 고지의
목장지대에는 꽃이 활짝 피었다. 정상(1,165m) 일대에는 3주 정도 뒤에 만개한다.
철쭉은 남서쪽 세걸산으로 이어진다.
남도 최대의 철쭉 군락지 바래봉은 외세의 발길이 닿지 못했던 길지. 바래봉이 있는
운봉은 정감록에서도 10승지의 하나로 꼽았다. 정감록은 「어진 정승과 훌륭한
장수가 나서 가히 오래 몸을 보존할 수 있는 곳」이라고 적고 있다. 평균고도 450m.
동쪽 경상도로는 팔랑치, 서쪽 전라도로는 여원치의 두 고개가 길을 막고 있다.
운봉에 오르려면 반드시 넘어야 하는 고개. 지리산 자락 하늘을 맞대고 있는 천혜의
요새인 바래봉은 숱한 전화에도 화를 입지 않았다.
고려말 남해안을 노략질하던 왜구들도
이곳에서 무릎을 꿇었다. 이성계가 왜장
아지발도를 쏘아죽인 황산대첩이 펼쳐진
바래봉 기슭. 최영의 홍산대첩과 함께 여말
왜구를 섬멸한 2대첩으로 유명한 황산전투를
기리는 비문이 운봉면 화수리에 남아 있다.
근세의 동학농민전쟁, 해방후 빨치산과의
치열한 전투에서도 전화를 입지 않았다.
산길을 온통 뒤덮은 선홍빛 철쭉. 산비탈에는
사람 키를 훌쩍 넘긴 고목들도 많다.
발걸음을 뗄 때마다 다른 모습으로 다가오는
꽃밭에 서면 어지럼증마저 일어난다. 바래봉
정상에 서면 지리능선이 한눈에 들어온다.
구례의 노고단과 산청의 천왕봉 등 지리준령이
운무 속에 마치 파도처럼 이어진다.
붉은 철쭉이 지리산의 신록을 감싸고 있는 바래봉. 구름 속에 타오르는 꽃불. 산중
화원을 찾은 사람들의 마음에도 꽃불이 옮아붙는다.
정선
오지마을과 된장마을
정 선 오지마을의 하나인 내도전마을은 도대체 어디에 숨어 있는가. 정선군 임계면 도전리의 내도전마을을 찾아가자면 당연히 품게 되는 의문이다. 42번 국도에서 직원리와 외도전마을을 지나 도전천 물길을 옆에 끼고 십리를 넘게 들어가서 말뚝 하나를 만난다. '현위치 내도전, 괘병산 정상 180분, 등산로 입구 60분'. 도전천은 중봉산, 고적대, 괘병산 등의 백두대간 봉우리에서 발원한 물이다. 돌단풍이 아슬아슬하게 걸쳐 있는 집채만한 바위와 한 사람 올라앉기에 딱 좋을 크기의 바위들도 도전천의 아름다움에 한몫 거든다. 이 도전천이 내도전마을로 가는 확실한 이정표이다.
마침내 42번 국도에서 방향을 바꾼 지 9.3km 지점에서 길은 끝난다. 유천리의 물과 장아리의 물이 합수하는 내도전마을의 해발은 700m. 한 주민의 말에 따르면 장아리라는 곳은 정감록을 본 사람들이 몸과 마음의 병을 치유하기 위해 찾아든 비결지이다. 조선시대 때 함경남북도와 평안남북도 사람들이 정감록을 보고 피안 10승지 가운데 하나를 찾아 강원도 땅을 떠돌다가 장아리를 발견, 정착하기에 이르렀고 자치제도까지 실시했다고 한다.
한국전쟁 이전 유천리에는 20가구, 장아리에는 15가구가 화전을 일구며 살았다. 냇가에 버드나무가 많아서 유천리요 '간직할 장', '나 아' 자를 써서 장아리였다. 나를 감출 수 있는 곳, 조용히 살고 싶은 곳이 바로 장아리인 것이다. 내도전마을 계곡에서 여행객들이 쉬어가기에 좋은 곳은 돌탑이 쌓여진 냇가에서부터 하류 부분의 포장도로가 시작되는 지점까지이다. 바닥이 훤히 들여다보일 정도로 맑은 개울물에서는 괴리 등의 물고기가 잡힌다.
도전리 동쪽에 붙은 마을은 가목리이다. 임계면 소재지에서 동해시 방향으로 가다가 직원리 입구를 지나고 좀더 가면 오른쪽으로 가목리 가는 길이 열린다. 낙엽송이 시원스레 하늘로 솟은 시골길을 십리 가량 달리면 그 유명한 된장마을이 보인다. 돈연스님과 첼리스트 도완녀 씨가 결혼해서 삼남매를 키우며 된장을 만드는 곳, 1,500개 가량의 장독이 햇살을 받아 반짝거린다. 된장마을에서는 된장이며 고추장, 장아찌 등을 구입할 수 있다. 단체로 식사 시 이곳에서 만든 장아찌와 된장찌개가 나오는데 항아리 뚜껑이 식기로 이용된다. 그러나 보다 인상적인 것은 투박하면서도 고향의 정취를 되새기게 해주는 항아리들이다. 033-562-2710.
가야산
국립공원 가야산은 1966.6. 24 사적 및 명승 제5호로 지정되었으며, 1972.10.13 국립공원 제9호로 지정되었다. 가야산은 경상남도와 경상북도가 서로 잇대어 있는 곳에 위치하여 남으로는 합천군과,거창군, 북으로는 성주군의 3개군 사이에 위치한다.
우뚝솟은 상왕봉은 일명 우두산으로도 불리며, 해발 1,430M의 위용을 자랑하고, 경남·북으로 가르고 있으며 상왕봉을 중심으로 칠불봉, 두리봉, 깃대봉, 단지봉, 의상봉, 남산제일봉 등 해발 1000M를 넘는 거봉들이 가야산의 경관을 더해주고 있으며, 충청, 경상, 전라 3도의 경계를 이루는 대덕산을 서쪽에 두고 있다.이곳은 옛부터 해동의 10승지 또는 조선팔경의 하나로 이름나 있는 곳이기도 하며, 우리나라 화엄종의 근본 도량으로 팔만대장경을 봉안한 법보종찰 해인사가 있는 곳이기도 하다.
특히, 해인사 앞자락을 굽이쳐도는 홍류동 계곡은 우리나라 팔경 가운데 으뜸이라 했고 경맥원, 축화천, 무릉교, 칠성대, 낙화담, 회선암, 첩석대, 음풍뢰, 분옥폭, 제월담 및 신라말 난세를 비관하여 그 한을 달래기 위하여 산문에 들어가 선화(仙化)한 대학자 고운 최치원 선생의 자취가 남아있는 농산정, 학사대 등의 유적과, 1995년 12월 유네스코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호국불교의 상징인 팔만대장경과 경판전을 보유한 법보종찰 해인사가 있다.
고기(古記)에 의하면 “산형은 천하에 절승 중 제일이다.”라고 극찬하였으며, 오대산(1,563M),소백산(1,439M)과 더불어, 왜적의 전화를 입지 않아,삼재(화재,수재,풍재)가 들지 않은 곳으로 알려지고 있으며, 사명대사께서도 이곳에서 말년을 보내신 곳으로 지금도 옛 선현들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곳이다.
[출처] 정감록 10승지를 찾아서...|작성자 엄택곡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