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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한국예술종합학교 제 1회 국제 바흐 주간 행사
- J. S. 바흐의 초기 건반음악 -
오자경(한국예술종합학교 음악원 교수)
행사 개요
한국예술종합학교 음악원에서는 J. S. 바흐(1685-1750)의 오르간 작품 중에서도 1708년경까지의 초기 곡들을 중심으로 바흐의 음악을 깊이 있게 연구하고 연주하는 행사를 개최한다. 특히 이 행사는 국내에서 유일하게 바흐 당대의 오르간 소리를 재현할 수 있는 한국예술종합학교 KNUA홀의 역사적인 오르간에서 개최되어 더 의미가 크다. 행사의 내용은 강의와 마스터클라스, 연주회 등으로 구성되는데,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바흐 전문 연주자면서 동시에 음악학자이며 신학자인 Christoph Bossert교수(독일 뷔르쯔부르크 음대 교수)를 초청합니다. 한국예술종합학교의 교수로 재직하고 있는 오자경교수의 오르간 독주회 및 한예종 재학생들의 연주회도 함께 계획되어 있습니다.
행사 제목 : 2009년 한국예술종합학교 제 1회 국제 바흐 주간
주제 : J. S. Bach의 초기 건반음악
일시 : 2009년 3월 16일(월) - 20일(금)
장소 : 한국예술종합학교 KNUA홀(서초동 소재)
일정 :
강의Ⅰ : 3월 17일(화) 15:00-18:00 (3시간)
C. Bossert : “바흐의 Neumeister코랄의 신학적, 음악적 의미”
마스터클라스Ⅰ : 3월 17일(화) 19:00-22:00(3시간)
C. Bossert : "바흐의 Neumeister chorales 36곡 중 No. 1-5“
마스터클라스Ⅱ : 3월 18일(수) 15:00-18:00(3) 19:00-22:00(3)
C. Bossert : "바흐의 Neumeister 코랄 36곡 중 No. 6-15“
마스터클라스Ⅲ : 3월 19일(목) 9:00-12:00(3) 13:00-15:00(2)
C. Bossert : "바흐의 Neumeister 코랄 36곡 중 No. 16-23“
마스터클라스Ⅳ : 3월 20일(금) 9:00-12:00(3) 13:00-17:00(4)
C. Bossert : "바흐의 Neumeister chorales 36곡 중 No. 24-36“
연주회 Ⅰ : 3월 16일(월) 19:30 오자경 오르간 독주회
“J. S. 바흐의 초기 건반음악과 북독일 오르간 음악의 유산”
연주회 Ⅱ : 3월 19일(목) 19:30 C. Bossert 오르간 독주회
연주회 Ⅲ : 3월 20일(금) 19:00 한국예술종합학교 오르간전공 학생들
“Neumeister Chorales and Other Early Works of J. S. Bach"
요한 세바스티안 바흐의 초기 건반음악과
북독일 오르간 음악의 영향
옷깃을 여미던 바람과 호된 겨울의 입김이 어느덧 희미해지고 봄의 기운이 온 세상을 덮어 온다. 죽은 듯 뻣뻣하던 가지에 물이 오르고 연두 빛 새싹이 움터 나오는 이 대자연의 섭리와 함께 가장 위대한 작곡가의 봄은 어떤 모습이었을지 궁금하였다. 씨 뿌리는 봄이 있었기에 추수하는 가을이 존재하듯이 동서양을 막론하고 최고의 존경을 받는 음악가 요한 세바스티안 바흐 역시 초기에는 다소 어색하고 미숙한 티를 완전히 벗지 못한 작품들도 있었다. 하지만 그의 초기 작품들은 후기 작품들과는 다른 신선하고 열정이 넘치는 그의 성격이 잘 반영되어 있어 흥미롭다. 이번 국제 바흐 주간 행사에서 이런 그의 청년시절과 주변의 영향을 연구하고 바흐의 초기 곡들을 연주하는 이유는 위대한 음악가를 더 잘 알기 위함도 있지만 위대한 음악가가 거친 초기의 음악교육과 작곡가로서의 발전 과정을 이해하기 위해서이다.
음악의 아버지라고 불릴 만큼 위대한 음악가 요한 세바스티안 바흐도 그의 초기 작품에 있어서만은 최근까지도 매우 인색한 평가를 면치 못했다. 1802년 최초로 J. S. 바흐의 전기를 썼던 포르켈(N. Forkel)은 "뛰어난 천재로서의 부정할 수 없는 증거들을 가진 바흐도 그의 초기 작품들은 쓸모없고, 한쪽으로 편향되며, 과장되고, 품위가 없으므로 별반 보존의 가치가 없다."라고 했다. 그로부터 200년이 지난 21세기 초에도 보이드(M. Boyd)는 "바흐가 23살에 뮐하우젠을 떠나기 전에 작곡된 곡들 중 몇 곡은 만약 그것들이 다른 사람의 작품이었다면 오늘날 기억되었을지도 모른다."고 하였다. 모차르트처럼 신동은 아니더라도 바흐의 초기 작품들이 정말 그렇게 하찮고 미약했단 말인가? 10살에 양부모를 잃고 15세까지 큰 형의 보호아래 학교를 다녔던 요한 세바스티안이 어떻게 18세의 어린 나이에 아른슈타트의 노이에교회의 오르가니스트가 되었으며, 또한 22세에 뮐하우젠의 블라지우스교회의 오르가니스트로 발탁되었는지 쉽게 납득이 가지 않았다. 파헬벨(J. Pachelbel)의 제자였던 형 요한 크리스토프의 가르침과 타고난 재능 덕분에 오르간에서는 경이로운 연주력을 과시했지만 작곡은 제대로 배우지 못해서일까? 하지만 최근 들어 윌리암스(P. Williams)는 "세상에서 가장 재능 있는 음악가의 발걸음이 한 지방예술의 벽을 넘는 단계는 항상 흥미롭고 중요해야 한다."라고 하면서 초기의 시도나 노력이 조금 실망스럽더라도 결국 그가 이룬 업적으로 인해서 흥미로울 수밖에 없다는 관대한 시각을 내놓았다. 그동안 고루한 바흐학자들은 궁정음악가며 칸토르였던 바흐의 음악에는 열광했지만 그의 초기 작품들은 자필본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가짜로 의심하면서 출판을 꺼려 많은 초기 작품들을 보통 사람들이 접할 수 있는 기회조차 차단하였다. 이는 명백하게 지나친 영웅주의에 빠진 바흐 학자들의 잘못이지 작곡가 자신의 의도는 아닐지도 모른다. 당대에 헨델이나 그의 아들 C. P. E. 바흐도 많은 초기 작품들을 스스로 폐기하였던 데 반해 요한 세바스티안은 자신의 초기 작품들을 모두 폐기하지 않았고 이런 저런 경로를 통하여 그 흔적을 후세에 남겼기 때문이다.
바흐의 초기 작품들을 연구하는데 물론 가장 큰 장애는 충분한 자료와 근거가 없다는 점이다. 바흐의 초기 작품 중에서 남아 있는 자필본은 몇 개 되지 않으며, 주로 친지나 제자, 친구 등에 의해 사보된 악보들이 존재할 뿐이다. 20세기 중반까지도 많은 초기 작품들이 후기작과의 양식적인 간격 때문에 가짜로 취급되었으나 학자들이 점차로 극단적인 양식상의 차이를 인정하면서 초기 작품들에 관대해졌다. 그 중에서도 가장 획기적인 발견은 1980년대에 이루어졌는데 첫 번째로 묄러 필사본(Möller Manuscript)와 안드레아스 바흐 모음집(Andreas Bach Book)을 편집하고 사보한 사람이 바로 요한 세바스티안의 큰 형 요한 크리스토프 바흐(1671-1721)라는 사실이다. 묄러 필사본은 1702년부터 1707년 사이에 사보되었고, 안드레아스 바흐모음집은 그 직후인 1707년경부터 1713년까지 지속적으로 곡들을 모아 사보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 두 모음집에는 당연히 북독일의 여러 대가들을 직접 만나고 돌아온 동생 세바스티안의 기여를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이로 인하여서 많은 궁금증이 해결되었을 뿐 아니라 청년 세바스티안 바흐가 여기에 수록된 다양한 건반음악, 즉 북독일 뿐 아니라 남부 및 중부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의 음악에 익숙했음을 시사한다. 또한 이 두 필사본에 수록된 27곡이 요한 세바스티안의 초기 작품임이 확실하게 증명되었다.
한때 요한 고트프리트 묄러(Johann Gottfried Möller)에게 속해 있다가 현재는 베를린 시립도서관에 소장된 묄러 필사본은 보통 1703년 말부터 사보되었다고 하나 윌리암스는 그 시기를 일 년 이상 앞당겨 1702년 부활절 주변으로 추정한다. 뤼네부르크에서 1700년 3월부터 2년간 성 미하엘학교를 다녔던 세바스티안은 1702년 부활절쯤 고향인 투링기아로 돌아왔을 것이다. 기록은 없지만 아마도 오르드루프에 있는 큰 형네 집으로 돌아갔을 가능성이 크다. 이 묄러 필사본은 1700년 경 독일의 건반음악에 매우 중요한 자료로서 뵘(G. Böhm), 브룬스(N. Bruhns), 북스테후데(D. Buxtehude), 라인켄(J. A. Reincken)의 곡들 외에도 룰리(J-B Lully)와 스테파니(A. Stefani)의 오케스트라 곡을 건반으로 편곡해 놓은 것 등약 20명에 이르는 작곡가들의 작품들이 들어 있다. 총 54곡 중에서 요한 세바스티안 바흐의 곡이 12곡, 뵘의 곡이 10곡인 것을 주목할 만하다. 안드레아스 바흐 모음집은 현재 라이프치히 도서관에 있는데 요한 크리스토프 바흐가 자신의 아들인 요한 안드레아스 바흐(1713-79)를 위해 사보하고 그에게 물려준 것으로 보인다. 시기는 묄러 필사본을 완성한 직후인 1707년부터 1713년까지 완성되었다. 여기에는 뵘, 북스테후데, 라인켄 등의 북독일 작곡가들 외에도 파헬벨, 쿠나우(Kuhnau), 휘셔(Fischer)의 건반음악과 프랑스의 마랭마래(Marin Marais)와 텔레만(Telemann)의 오케스트라 편곡 등이 수록되어 있다. 이 모음집에서 주목할 점은 북스테후데의 작품이 7곡이나 들어 있다는 것이다. 이들 작품들은 아마도 세바스티안이 1706년 뤼벡을 방문하고 돌아올 때 챙겨온 곡들일 가능성이 크다. 이 중 4곡이 샤콘느로 매우 중요한 건반 형식인데 이 모음집이 유일하게 현존하는 필사본으로 그 가치가 남다르다. 또한 북스테후데 외에도 파헬벨, 휘셔, 뵘의 오스티나토 작품과 요한 세바스티안 바흐의 파사칼리아 역시 여기에 포함되어 있다. 총 50여곡 가운데 세바스티안의 작품이 15곡이나 되며, 파사칼리아나 g단조 푸가 같은 오르간 곡 외에 하프시코드를 위한 토카타 3곡 등 다수의 하프시코드 음악이 수록되었다.
또 다른 발견은 탄생 삼백주년을 기념하던 1985년에 미국 예일대학교 도서관에서 크리스토프 볼프에 의해서 발견된 노이마이스터 코랄곡집(Neumeister Collection)이다. 오로지 코랄전주곡들만을 모아놓은 이 필사본을 사보한 사람은 요한 고트프리트 노이마이스터(Johann Gottfried Neumeister)였으며 약 1790년에 이루어졌다. 총 82곡 가운데 요한 세바스티안의 곡이 38곡, 다른 바흐일가의 곡이 28곡 있으며, 그 외에 파헬벨, 에리히(Erich) 등의 작품들이 수록되었다. 이 코랄 모음집은 오르간소곡집(orgelbüchlein) 이전의 초기 코랄들을 모아놓은 것으로 1710년 이전의 바흐의 초기 코랄 양식의 더 분명한 모습을 제공하고, 그의 모델에 관한 더 소중하고 새로운 안목을 드러냈다. 여기서 파헬벨이나 북스테후데 같은 작곡가의 영향이 뚜렷하게 나타나기도 하지만 이와 함께 그들의 그늘을 서서히 벗어나면서 자신의 음악적인 개성을 찾아가는 젊은 작곡가의 모습을 확연히 볼 수 있다. 세바스티안은 코랄 가사의 의미를 효과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다양한 형식을 효과적으로 잘 이용하였다.
이번 행사에서 크리스토프 보써트 교수의 마스터클라스와 학생들의 연주는 노이마이스터 코랄곡집을 중심으로 꾸몄으며, 본인의 3월 16일 연주회는 묄러 필사본과 안드레아스 바흐 모음집에 수록된 곡들 위주로 바흐의 초기 작품들과 북독일 음악의 영향에 관해 정리해 보고 싶었다. 아마도 음악가 집안에서 자란 바흐는 일찍부터 상당한 세련된 음악적인 안목을 가졌던 것으로 추측되며 어려운 환경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먼 지방으로 과감히 갈 수 있는 강한 의지도 갖추었다. 위의 두 필사본에 수록된 많은 작곡가들 중에 바흐 집안사람들을 제외하고 세바스티안이 자의적으로 직접 찾아가 만났던 음악가는 세 사람으로 축소된다. 북독일 오르간음악의 삼두마차인 뵘과 라인켄, 북스테후데와 젊은 세바스티안 바흐가 맺은 개인적인 관계를 살펴보고자 한다.
요한 세바스티안 바흐는 투링기아 지방에서 태어나 중부독일의 음악 문화에 뿌리를 내리고 있었지만 일찍부터 북독일 음악의 양식적인 요소들을 영양분으로 흡수해 왔다. 특별히 그의 초기 오르간 음악은 코랄 뿐 아니라 전주곡이나 토카타 등 자유로운 형식에서도 북부 독일의 전통에 큰 영향을 받았다. 그가 15세의 나이에 멀리 떨어진 북독일의 도시인 뤼네부르크까지 간 것만 보아도 북독일의 음악을 좀 더 직접적으로 배우고 경험하고자 하는 열망이 컸음을 짐작할 수 있다. 뤼네부르크에서 바흐는 뵘(G. Böhm)을 만났고 공식적인 가르침을 받았는지는 확인할 수 없으나 그의 뛰어난 연주를 들으며 그의 음악을 경험했을 것이다. 묄러 필사본 54곡 중에 바흐의 곡이 12곡, 뵘의 작품이 10곡이나 포함된 것으로 그들이 매우 가까운 사이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뵘이 바흐에게 라인켄을 소개해주었다는 사실도 2005년 발견된 바이마르 필사본(Weimar tablature)에 의해서 입증되었다. 바흐는 라인켄(J. A. Reincken)의 코랄환상곡 ‘바빌론 강가에서’를 사보하고 끝에 ‘1700년 뤼네부르크의 스승 뵘 선생님 집에서’라고 기록하였다. 악보만 사보 한 것이 아니라 지적 호기심으로 가득 찬 바흐는 그리 멀지 않은 함부르크까지 직접 가서 라인켄의 연주를 들었다고 그의 아들 C. P. E. 바흐는 추도문에서 회고하였다. 또한 1720년에 쾨텐의 궁정악장 시절 아내 마리아 바르바라가 갑자기 죽자 세바스티안은 멀리 함부르크까지 가서 성 야콥교회 오르가니스트 오디션에 참여했다. 거기서 다시 라인켄을 재회한 것도 유명한 일화로 남아 있다.
라인켄의 절친한 친구였던 북스테후데 또한 북독일 오르간 음악의 거장으로 바흐에게 가장 강렬한 영향을 끼친 음악가로 기억된다. 아른슈타트의 오르가니스트로 있으면서 1705년 11월 4주의 휴가를 받고 뤼벡으로 간 20세의 바흐는 노장 북스테후데의 예술에 빠져 4달 이상 교회의 의무를 져버린 채 그 곳에 머물렀다. 바흐가 만난 노음악가는 단순한 오르가니스트가 아닌 기악과 성악을 아우르는 무르익은 작곡가였다. 북스테후데는 이론과 실제의 균형을 유지하면서 과거와 현재는 물론 프랑스, 영국, 이탈리아, 네덜란드 등 여러 나라의 음악 양식을 종합하여 자기만의 새로운 양식으로 소화해낸 독창적이면서 야심 찬 음악가였다. 안드레아스 바흐 모음집에는 바흐의 곡이 15곡, 북스테후데의 작품이 7곡이나 포함된 것도 젊은 바흐의 관심과 존경심으로 이해할 수 있다. 바흐는 사실상 1705년 뤼벡을 직접 방문하기 훨씬 이전부터 북스테후데의 음악을 알고 있었다. 이는 앞에서 언급한 바이마르 필사본에 의하면 바흐는 형 요한 크리스토프 집에 머물면서(1698-9년 사이) 이미 북스테후데의 코랄환상곡 ‘Nun freut euch’ 악보를 사보하였다. 그 외에도 피츠버그의 카네기 도서관에 있는 다른 필사본에도 그의 형이 사보한 북스테후데의 전주곡 g단조(BuxWV 148)이 남아 있는 것으로 봐서 바흐는 십대 초반부터 북스테후데의 음악을 알았고 연주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북독일 작곡가들의 음악과 요한 세바스티안 바흐의 초기 작품들은 그의 형의 필사본 모음집들을 통해서 우리에게 전해졌다. 이 두 모음집에 수록되어 있는 여러 작곡가들은 한결같이 대위법에 강하고 푸가를 잘 쓰는 음악가들이었다. 또한 북스테후데나 라인켄, 뵘은 바흐보다 먼저 여러 나라의 음악 양식을 받아들여 종합했고 새로운 형식들을 창조했다. 바흐는 형에게 건반악기 연주법은 배웠을지 모르지만 작곡은 사보 등을 통하여 독학한 것으로 추측된다. 바흐 역시 젊은 시절부터 순수하고 열정적인 푸가의 옹호자였다. 이번 기회를 통하여 우리는 그의 초기 건반음악에 나타나는 즉흥적이고 비르투오소적인 화려함과 함께 좀 더 숙고하는 면모, 즉 규칙에 대한 열정이 일찍부터 그를 푸가와 대위법으로 끌어들였음을 알 수 있다. 화려한 대가적인 면 뒤에는 소리의 규칙을 이해하고, 음악적인 구조를 찾으려는 노력이 젊은 천재 음악가의 음악적 개성으로 자리 잡아감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