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태두남(太斗南)
[본관] 영순(永順)
[문과] 중종(中宗) 8년(1513) 계유(癸酉) 식년시(式年試) 을과(乙科) 3위(06/33)
[진사] 중종(中宗) 8년(1513) 계유(癸酉) 식년시(式年試) (進士) 3등(三等) 63위(93/100)
[생원] 중종(中宗) 8년(1513) 계유(癸酉) 식년시(式年試) (生員) 3등(三等) 20위(50/100)
[생졸년] 1486년(성종 17)~1536년(중종 31) / 향년 50세
[거주지] 예천(醴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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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응조 학사집(鶴沙集)
통훈대부 행 사헌부 집의 태공 묘갈명병서(通訓大夫行司憲府執義太公墓碣銘幷序)
태씨가 영순(永順)에 씨족을 형성한 것은 고려(高麗) 후군(後軍) 장군(將軍) 휘(諱) 집성(集成)이 왜적을 바로잡은 공으로 봉해졌기 때문이다. 그 선대는 옛 발해국왕(渤海國王) 태조영(太祚榮)의 후손이다. 고려 말에 휘(諱) 윤취(允就)가 있었는데 문과에 급제하여 예빈경(禮賓卿)이 되었다.
5대를 지나 진원 현감(珍原縣監) 휘(諱) 영길(英吉)에 이르러 비로소 예천(醴泉) 다인현(多仁縣)에 거주하게 되었는데, 공에게 고조(高祖)가 된다. 증조는 휘가 유광(有光)이고, 조부는 휘가 치생(致生)이며, 부친은 휘가 효정(孝貞)인데, 모두 벼슬하지 않았다.
공은 성화(成化) 병오년(丙午年, 1486, 성종 17)에 군 동쪽 광덕원리(廣德院里)에서 태어났는데, 휘가 두남(斗南) , 자가 망이(望而)이다. 어려서부터영탈(穎脫)하게 기이한 재주를 지녀 무리들에서 특출하였다. 허백당(虛白堂) 김양진(金楊震) 공이 기특하게 여기고 애지중지 하였다. 데려다가 집에서 양육하며 가르쳐서 학업이 이루어졌다.
정덕(正德) 계유년(癸酉年, 1513, 중종 8)에 생원과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이해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전후(前後)로 형조 좌랑ㆍ정랑, 개령 현감, 경상도 도사, 사도시 첨정, 성균관 사예, 전라도 암행 어사에 제수되었다. 조정에 들어와서 사헌부 장령이 되었다가 체직되어 남원ㆍ선산 부사에 제수되었다.
다시 조정으로 들어와 성균관 직강, 사섬시 정(司贍寺正)이 되었고, 사헌부 집의에 천직(遷職)되었다. 가정(嘉靖) 16년(1537, 중종 32)에는 종부시 정(宗簿寺正)에 되어 춘추관 편수관을 겸하였다. 얼마 뒤에 외직으로 나가 성주 목사에 보임되었다가 관아에서 운명하니 향년 51세였다. 군 북쪽 3리쯤 복성동(福成洞) 남쪽 향하는 언덕에 장사 지냈다.
공의 아름다운 용모는 빛나고 빼어났다. 담론을 잘하고 시문에 능하여 명성(名聲)이 자자하여 소세양(蘇世讓) 공과 황여헌(黃汝獻)ㆍ황윤헌(黃允獻) 공이 문예로써 서로 허교하였다. 성품이 강직하여 이끗에 병들지 않았다. 김안로(金安老)가 정국을 담당하고 있을 때에 시종일관 그 집을 찾아가지 않았다.
김안로는 평소 허백당(虛白堂)을 미워하여 장차 화가 전가되려고 할 적에 허백당이 졸하였다. 사람들이 쩝쩝거리기만 하고 감히 그 상을 돌보려 하지 않았으나, 공은 의연하게 위협을 두려워하지 않고 진심으로 찾아갔다. 김안로가 이를 염탐하여 알고서 공을 폄하하여 성주 목사가 되게 하였으나 노여움이 풀리지 않아 일을 예측하기 어려웠는데, 마침 공이 졸하자 그만두었다.
아! 선비는 궁해진 뒤에야 절의가 드러난다. 공 같은 이를 사생에 임해 한 치도 어긋남이 없다고 이를 만한데, 도대체 하늘은 재주 있는 태어나게 해놓고 끝까지 다 쓰지 않으니 무엇 때문인가. 음양(陰陽)이 소장(消長)함은 이치의 떳떳함이다. 이때에는 음란하고 사특한 기운이 뜻을 얻었으니 무엇을 괴이하게 여기겠는가. 군자의 도가 사라졌으니 공에게서 또 무엇을 부족하게 여기겠는가?
공의 전취(前娶)는 밀양 손씨(密陽孫氏) 현감(縣監) 맹종(孟宗)의 따님으로, 아들 석룡(錫龍)을 낳았는데 진사(進士)이다. 후취(後娶)는 예안 김씨(禮安金氏) 판결사(判決事) 흠조(欽祖)의 따님인데, 생원 언룡(偃龍)을 낳았고, 그다음은 명룡(命龍)ㆍ한룡(翰龍)이다. 딸은 첨지(僉知) 안거(安渠)에게 출가하였다.
내외 손자ㆍ증손ㆍ현손의 남녀가 총 약간 명이다. 지은 바의《쇄언록(瑣言錄)》2권이 집에 보관되어 있다. 나(응조)는 허백당의 후손이다. 공의 후손의 충후하고 순박한 말을 이으려니 감회가 일어 명(銘)을 짓는다. 명은 다음과 같다.
사람들은 권귀의 집에서 배불리 먹고 따뜻하게 지내면서 / 世皆飮食煦濡於權貴之門
이익에 병들지 않았던 자가 참으로 드물었다 / 其不爲利疚者固稀
도도히 눈 깜짝할 사이에눈길 돌리고/ 滔滔反眼於瞬息俄頃之間
위협을 두려워하지 않았던 사람이 누구인가 / 其不爲威惕者伊誰
홀로 거센 물결에 우뚝 서서 꺾이지 않았으니 / 獨能特立於頹波而不撓
진실로 내 마음 꽃 다우네/ 苟余情其信芳
아, 예부터 죽지 않은 자가 없지만 / 嗚呼自古莫不歸於死
공은 지금까지 빛나고 빛났도다 / 公至今有耿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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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脚註]
[주01] 영탈(穎脫):
송곳의 자루가 튀어나온다는 말로, 재주가 뛰어남을 의미한다. 전국 시대 평원군(平原君)의 식객(食客)이었던 모수(毛遂)가 “진즉
에 나를 주머니 속에 들어가게 하였다면, 송곳 날 전체가 삐져나왔을 것이니 고작 끝이 삐져나오는 정도가 아니었을 것이다.[使遂早
得處囊中, 乃穎脫而出, 非特其末見而已.]”라고 하였다.《史記 卷76 平原君列傳》
[주02] 눈길 돌리고:
한유(韓愈)의〈유자후묘지명(柳子厚墓誌銘)〉에 “어느 날 갑자기 털끝만큼이라도 작은 이해에 관련이 되면, 언제 보았느냐는 듯
눈길을 돌리고, 함정에 빠졌어도 손 한 번 내밀어 구해주지 않고 오히려 뒤로 밀치면서 돌멩이를 던지기까지 한다.[一旦臨小利害,
僅如毛髮比, 反眼若不相識, 落陷穽, 不一引手救, 反擠之, 又下石焉.]”라고 하였다.
[주03] 진실로 …… 다우네:
굴원(屈原)의〈이소(離騷)〉에 “마름과 연잎을 마름질해 저고리 짓고, 연꽃을 모아 치마를 만들리라. 나를 알아주지 않아도 그만이
니, 진실로 내 마음 꽃 다우네.[製芰荷以爲衣兮, 集芙蓉以爲裳. 吾知其亦已兮, 苟余情其信芳.]”라고 한데서 나온 말이다.
ⓒ 안동대학교 퇴계학연구소 | 황만기 (역) |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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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通訓大夫行司憲府執義太公墓碣銘 幷序。
太之氏於永順。以高麗後軍將軍諱集成。捕賊有功封焉。其先。古渤海國王太祚英之後。麗末。有諱允就。文科禮賓卿。五世而至珍原縣監諱英吉。始居醴泉之多仁縣。於公爲高祖。曾祖諱有光。祖諱致生。考諱孝貞。皆不仕。公以成化丙午。生于郡東廣德院里。諱斗南。字望而。幼穎脫有奇才。絶出等夷。虛白堂金公楊震。奇愛之。取養于家而訓誨之。業成。中正德癸酉生員進士。是年。登文科。前後除刑曹佐郞正郞,開寧縣監慶尙道都事司導寺僉正,成均館司藝,全羅道暗行御史。入爲司憲府掌令。遞授南原,善山府使。復入爲成均館直講司贍寺正。遷司憲府執義。嘉靖十六年。爲宗簿寺正。兼春秋館編修官。俄出補星州牧使。卒 于官。享年五十一。葬郡北三里許福成洞南向原。公美容姿符彩酋酋。善談論工詩文。聲名藉甚。蘇公世讓,黃公汝獻,允獻。以文藝相許焉。性剛不爲利疚。當金安老用事。始終不染跡於其門。安老素疾虛白堂。將嫁禍。而虛白堂卒。人皆惴惴不敢護其喪。公毅然不爲威惕。盡心匍匐。安老詗知之。貶公爲星州而怒未已。事叵測。會公卒而止。嗚呼。士窮乃見節義。若公可謂臨死生不差一步者矣。抑天生才而未究其用。何歟。陰陽消長。理之常爾。時陰邪得志。何怪。君子道消。於公又何歉焉。公前娶密陽孫氏縣監孟宗之女。生男。錫龍進士。後娶禮安金氏判決事欽祖之女。生偃龍生員。次命龍,翰龍。女適僉知安渠。內外孫曾玄男女摠若干。所著瑣言錄二卷藏于家。應祖虛。白堂裔孫也。承公之裔孫厚淳之言。感而爲之銘曰。
世皆飮食煦濡於權貴之門。其不爲利疚者固稀。滔滔反眼於瞬息俄頃之間。其不爲威惕者伊誰。獨能特立於頹波而不撓。苟余情其信芳。嗚呼。自古莫不歸於死。公至今有耿光。<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