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에 와서 선교했던 스크랜튼 선교사는 윌리엄 벤턴 스크랜튼(William Benton Scranton, 1856-1922) 선교사와 그의 어머니인 메리 플레처 스크랜튼(Mary Fletcher Scranton, 1832-1909) 선교사, 이렇게 모자(母子) 선교사가 모두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1. 윌리엄 벤턴 스크랜튼 선교사 (아들)
* 배경 및 조선 입국:
* 미국 코네티컷주 뉴헤이븐에서 태어나 예일대학교를 졸업하고 뉴욕 의과대학에서 의사 자격을 취득했습니다.
* 1884년 10월, 미국 북감리교회에서 헨리 아펜젤러 선교사와 함께 조선 파견 선교사로 임명받았습니다.
* 1885년 조선에 입국하여 의료 선교를 시작했습니다.
* 주요 활동:
* 의료 선교:
조선 정부가 허락한 병원 설립에 참여하여 시병원(施病院)을 설립하고 원장을 지냈습니다. 시병원은 훗날 정동으로 이전했고, 1895년부터는 상동에서 본격적인 진료를 시작했습니다. 그는 의약품과 함께 성경, 전도책자를 비치하고 전도인들을 상주시켜 복음을 전했습니다.
* 교회 개척:
시병원을 중심으로 선교활동을 펼치며 상동교회, 아현교회, 동대문교회 등을 설립했습니다. 특히 상동교회는 이후 한국 사회 민족운동의 요람이 되었습니다.
* 인재 양성:
독립운동가이자 목사인 전덕기를 비롯하여 많은 교회 지도자들을 길러내는 데 기여했습니다.
* 사회적 약자 섬김:
가난하고 병든 민중, 특히 노비들을 섬기는 데 헌신했습니다.
* 말년:
* 1907년 선교 정책을 둘러싸고 친일 성향의 선교회 감독인 해리스와 의견 충돌을 겪고 선교사직과 감리교 목사직을 사임했습니다.
* 이후 성공회로 교파를 옮겨 평신도로서 서울, 평북 운산, 충남 직산, 중국 다롄 등지에서 의사로 활동했습니다.
* 1917년 일본 고베로 건너가 1922년 별세하여 고베의 롯코산 외국인 묘지에 안장되었습니다.
2. 메리 플레처 스크랜튼 선교사 (어머니)
* 배경 및 조선 입국:
* 감리교 목사의 딸로 태어나 신앙심이 깊었으며 해외 선교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 남편과 사별 후 외아들 윌리엄 스크랜튼이 의사가 되는 것을 도왔고, 아들이 조선 선교사로 파송되자 본인도 함께 조선 선교사로 지원하여 1885년 53세의 나이로 조선에 입국했습니다.
* 미국 감리교 여성해외선교회(Woman's Foreign Missionary Society)에서 파송된 한국 최초의 외국인 여성 선교사입니다.
* 주요 활동:
* 여성 교육 개척:
한국 근대 여성 교육의 선구자로 평가받습니다.
* 한국 최초의 여성 교육기관인 이화학당을 설립했습니다. 이는 오늘날 이화여자대학교, 이화여자고등학교, 이화여자외국어고등학교의 전신입니다.
* 이 외에도 진명여학교, 수원 삼일소학당(매향중학교, 매향여자정보고등학교), 달성매일학교, 여성 간호사학교 등 다양한 여성 교육 및 의료 교육 시설 설립에 기여했습니다.
* "한국인을 더 나은 한국인으로(Koreans better Korean's only)"라는 교육 이념을 가지고 서양 문물을 무조건적으로 따르기보다는 한국인으로서의 긍지와 존엄성을 갖게 하는 교육을 강조했습니다.
* 여성 의료 및 복음 전도:
* 여성들을 위한 의료 기관인 보구녀관 설립에도 참여했습니다.
* 달성궁을 매입하여 전도 부인 양성소를 설립하는 등 여성들을 대상으로 복음을 전하는 데 힘썼습니다.
* '스크랜튼 대부인':
많은 사람들의 어머니 역할을 잘 해냈기에 조선 사람들에게 '스크랜튼 대부인' 또는 '시란돈(施蘭敦)'으로 불렸습니다.
* 말년:
* 1909년 10월 8일 한국에서 소천하여 양화진 외국인묘지에 안장되었습니다.
* 그녀의 공로를 인정받아 2009년 국민훈장 무궁화장이 추서되었습니다.
스크랜튼 모자는 의료와 교육을 통해 조선 사회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특히 소외된 계층과 여성들을 위한 헌신적인 사역으로 한국 기독교의 토대를 마련하는 데 지대한 공헌을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