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선조 39년 1606년 8월 30일
정사호(鄭賜湖) 등은 추고하라. 이광(李洸)·홍산군(洪山君)·청림 부령·이탁 등은 모두 윤허한다." 하였다.
◈ 선조 40년 1607년 2월 22일
정사호(鄭賜湖)를 경상 감사(慶尙監司)로, 최관(崔瓘)을 전라 감사(全羅監司)로 삼았다.
◈ 선조 40년 1607년 6월 20일 신해 2번째기사 /
정사호(鄭賜湖)가 치계하기를, "신이 순시(巡視)하여 부산에 이르렀습니다.” ...
◈ 부록 / 1607년
편수관 명단 정사호(鄭賜湖) 가선 대부(嘉善大夫)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신 구의강(具義剛) 수성 결의 분충 정운 공신(輸誠決義奮忠定運功臣) 가선 대부(嘉善大夫) 이조 참판(吏曹參判) 완계군(完溪君) 신 이성(李惺)...
◈ 광해 즉위년 1608년 2월 29일 병술
정사호(鄭賜湖)를 우윤으로, 이호신(李好信)을 수찬으로 삼았다.
◈ 광해 즉위년 1608년 5월 22일 정미
대신을 인견하다. 정사호(鄭賜湖), 대사간 최유원(崔有源), 전한 남이공(南以恭)이 입시하였다.
◈ 광해 즉위년 1608년 6월 3일
정사호(鄭賜湖)를 병조 참판으로, 조정(趙挺)을 이조 참판으로 삼았다.
◈ 광해 즉위년 1608년 6월 13일
정사호(鄭賜湖)의 장계를 보니 ‘일로(一路)에서 정문할 때에 감사와 수령이 모두 복장을 바꾸어 백의(白衣)에 모자와 띠로 차리고 예를 행하였다.’고 하였습니다.
◈ 광해 즉위년 1608년 6월 15일
접반사 정사호(鄭賜湖)와 최관이 서울에 들어오다 차관(差官) 요동 도사(遼東都司) 엄일괴(嚴一魁)와 자재주지부(自在州知府) 만애민(萬愛民)이 서울에 들어왔다.
◈ 광해 즉위년 1608년 7월 7일
정사호(鄭賜湖)를 대사헌으로, 김신원(金信元)을 호조 판서 겸 지경연사 세자 좌빈객으로 삼았다.
◈ 광해 즉위년 1608년 7월 22일
대사헌 정사호(鄭賜湖)가 파직을 청했으나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다.
◈ 광해 즉위년 1608년 8월 11일
대사헌 정사호(鄭賜湖) 등이 유영경 등의 죄를 들고 법률에 의해 처단할 것 등을 청하다.
◈ 광해 즉위년 1608년 8월 16일
정사호(鄭賜湖) 등이 유영경 등의 죄를 바로잡을 것을 계청했으나 윤허하지 않다.
◈ 광해 즉위년 1608년 8월 17일
대사헌 정사호(鄭賜湖) 등이 합사하여 유영경 등의 죄를 바로잡을 것을 청하다.
◈ 광해 즉위년 1608년 8월 18일
대사헌 정사호(鄭賜湖) 등이 합사하여 유영경 등의 죄를 바로잡을 것을 청하다.
◈ 광해 즉위년 1608년 8월 21일
대사헌 정사호(鄭賜湖) 등이 합사하여 유영경 등의 죄를 바로잡을 것을 청하다.
◈ 광해 즉위년 1608년 8월 23일
대사헌 정사호(鄭賜湖) 등이 합사하여 유영경 등의 죄를 바로잡을 것을 청하다.
◈ 광해 즉위년 1608년 8월 24일
대사헌 정사호(鄭賜湖) 등이 합사하여 유영경 등의 죄를 바로잡을 것을 청하다.
◈ 광해 즉위년 1608년 8월 29일
대사헌 정사호(鄭賜湖)가 송순의 인피 계사를 들면서 자신을 파척할 것을 청하다.
◈ 광해 즉위년 1608년 8월 30일
대사헌 정사호(鄭賜湖) 등이 유영경 등의 죄를 바로잡을 것을 계청하다.
◈ 광해 즉위년 1608년 9월 1일
대사헌 정사호(鄭賜湖), 대사간 송순, 집의 이이첨이 합사(合司)하여 유영경·기자헌·이홍로 등의 죄를 바르게 집행하라고 청하다.
◈ 광해 즉위년 1608년 9월 2일
대사헌 정사호(鄭賜湖) 등이 이홍로의 일을 들어 자신들을 체차할 것을 빌다.
◈ 광해 즉위년 1608년 9월 3일
대사헌 정사호(鄭賜湖) 등이 기자헌을 먼 곳으로 귀양보낼 것 등을 청하다.
◈ 광해 즉위년 1608년 9월 4일
대사헌 정사호(鄭賜湖) 등이 유영경의 처형을 신속하게 명령할 것을 아뢰다.
◈ 광해 즉위년 9월 4일
대사헌 정사호(鄭賜湖) 등이 합사하여 기자헌을 귀양보낼 것 등을 청하다.
◈ 광해 즉위년 1608년 9월 25일
대사헌 정사호(鄭賜湖) 등이 반교의 일을 들어 자신들을 체차할 것을 청하다.
◈ 광해 즉위년 1608년 9월 26일
사헌부가 대사헌 정사호(鄭賜湖) 등의 출사를 청하니 따르다.
◈ 광해 즉위년 1608년 9월 30일
대사헌 정사호(鄭賜湖) 등이 최유원의 상소 내용을 들어 자신들의 파척을 청하다정.
◈ 광해 즉위년 1608년 10월 2일
대사헌 정사호(鄭賜湖) 등이 파척을 청했으나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다.
◈ 광해 즉위년 1608년 10월 3일
정사호(鄭賜湖)를 형조 참판으로, 송순(宋諄)을 부제학으로 삼았다.
◈ 광해 즉위년 1608년 10월 20일
정사호(鄭賜湖)·윤국형·최유원 등에게 관작을 제수하다
◈ 광해 즉위년 1608년 10월 22일
대사헌 정사호(鄭賜湖)가 살인 사건을 잘못 처치한 일로 자신을 체차할 것을 청하다.
◈ 광해 즉위년 1608년 10월 22일
대사헌 정사호(鄭賜湖)가 살인 사건을 잘못 처치한 일로 자신을 체차할 것을 재차 아뢰다.
◈ 광해 즉위년 1608년 10월 23일
장령 김지남이 정사호(鄭賜湖) 등을 잘못 처치했다 하여 체직할 것을 청하다.
◈ 광해 즉위년 1608년 10월 23일
사간 이지완이 정사호(鄭賜湖)는 체차하고 김지남은 출사하게 할 것을 아뢰다.
◈ 광해 즉위년 1608년 10월 23일
장령 김지남이 정사호(鄭賜湖) 등을 잘못 처치했다 하여 자신을 체차할 것을 청하다.
◈ 광해 즉위년 1608년 10월 24일
사간 이지완이 아뢰기를, "정사호(鄭賜湖)의 피혐은 원래 작은 일이었는데 정사호(鄭賜湖)를 처치한 김지남은 더욱이 인피할 만한 일이 없기 때문에 청했던 것입니다.
◈ 광해 즉위년 1608년 10월 29일
정사호(鄭賜湖)를 예조 참판 제수하다.
◈ 광해 즉위년 1608년 11월 9일
정사호(鄭賜湖)의 파견을 허락해서 달려가 살펴보게 한 다음 목장의 담장을 개축하여 예전처럼 방목하였습니다.
◈ 광해 1년 1609년 2월 11일
정사호(鄭賜湖)를 대사헌으로, 홍이상(洪履祥)을 예조 참판으로 삼았다.
◈ 광해 1년 1609년 6월 21일
정사호(鄭賜湖) 를 대사헌으로, 민덕남(閔德男)을 집의로 삼았다.
◈ 광해 1년 1609년 10월 16일
이비(吏批)에게 전교하였다. "호군 정사호(鄭賜湖)를 대사헌에 제수하라."
◈ 광해 1년 1609년 10월 16일
정사호(鄭賜湖)를 사헌부 대사헌으로, 오억령(吳億齡)을 겸 동지춘추관사로 삼았다.
◈ 광해 1년 1609년 10월 19일
대사헌 정사호(鄭賜湖)가 사직을 청하다.
◈ 광해 1년 1609년 11월 19일
정사호(鄭賜湖), 집의 이정험(李廷馦), 장령 이충양(李忠養), 김지남(金止男) 등이 상차하다.
◈ 광해 1609년 1년 11월 30일
정사호(鄭賜湖)가 정미년에 본도의 감사로 임명되어 추안(推案)을 자세히 조사하였다.
◈ 광해 1년 1609년 12월 14일
정사호(鄭賜湖)를 겸 동지춘추관사로, 박진원(朴震元)을 예조 참판으로 삼았다.
◈ 광해 2년 1610년 1월 4일
정사호(鄭賜湖)를 대사헌으로, 정협(鄭協)을 세자 부빈객으로, 이경함(李慶涵)을 경기 관찰사로, 이지완(李志完)을 호조 참의로, 윤효선(尹孝先)을 홍문관 부응교로 삼았다.
◈ 광해 2년 1610년 윤3월 6일
정사호(鄭賜湖)를 병조 참판으로 삼고, 이시언(李時言)을 공조 판서에, 오억령(吳億齡)을 한성 판윤에 특별히 제수하였다.
◈ 광해 2년 1610년 윤3월 21일
정사호(鄭賜湖)가 아뢴다.
106. 광해 2년 1610년 6월 7일
정사호(鄭賜湖)를 이조 참판으로, 유희분을 도승지로 삼았다.
107. 광해 2년 1610년 12월 26일
정사호(鄭賜湖), 참의 박이서(朴彝敍), 병조 판서 정창연(鄭昌衍), 참판 이시발(李時發), 참의 윤경립(尹敬立), 참지 유인길(柳寅吉)이 나아갔다.
108. 광해 3년 1611년 2월 13일
정사호(鄭賜湖)를 대사헌으로, 정립(鄭岦)을 집의로 삼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