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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주막집 원문보기 글쓴이: 江村
淸泠浦는 통곡한다.
2008년 6월 6일 현출일에 나는 조선 제6대왕 단종대왕의 유배지와 능침을 참배코자 길을 나섰다.
도도히 흐르는 서강의 물줄기는 예나지금이나 변함없건만 억울하게 돌아가신 님의 발자취를 찿자하니 가슴이 아려오고 눈시울이 적셔짐을 참을수 없었다.차라리 역사를 모르는 맹문이였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계유정난(癸酉靖難:1453년,단종1년)
김종서(金宗瑞),황보인(皇甫仁) 등이 반역을 모의한 것을 평정했다는 명목으로 정난이라는 말을 붙였으나 실상은 수양대군이 왕이 되려는 야심에서 이들을 제거한 반역(反逆)을 정난(靖難)이라니 소가 웃을 일이며 이 땅에 양심이 살아있는한 이는 불변의 이치라고 나는 믿는다.
일찌기 문종은 영의정 황보인을 비롯하여 남지,김종서등 대신들을 불러 단종을 잘 보필하여 줄것을 유언 했는데 이들은 모두 눈물을 흘리며 고명(顧命)을 받들기로 충성을 맹세했다.
그러나 단종즉위후 얼마 안있어 남지가 죽고 김종서가 좌의정,정분이 우의정에 제수 되었다.
이때 단종의 숙부인 수양대군(首陽大君)은 권람(權擥),한명회(韓明澮)를 모사로 삼고 홍달손(洪達孫)·홍윤성(洪允成)·양정(楊汀) 등 30여 명에 이르는 정예 무사들을 양성하여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다가 삼정승 가운데 가장 지혜와 용맹이 뛰어난 좌상 김종서를 밤에 손님으로 방문하는척 찿아가 불시에 기습하여 죽이고 는 돌아와 단종에게는 " 김종서가 모반 하려 하므로 사세가 급해 우선 처단 하였나이다 " 하고는 또 왕명을 빌어 살생부에 계획한대로 조극관(趙克寬), 의정부찬성 이양(李穰) 등 반대세력에 속하는 중신들을 대궐 문에서 죽였다. 이어서 정분과 조극관의 동생 조수량(趙遂良) 등은 귀양을 보낸 뒤 목을 매어 죽이고, 김종서의 목을 저자에 내걸고 그의 자손을 죽였으며, 안평대군은 강화에 귀양보낸 뒤 왕명으로 스스로 죽도록 했다.
이로써 권람·홍달손·한명회 등 정변을 이끄는 주요인물과 정인지(鄭麟趾)·한확(韓確)·최항(崔恒) 등 자기 세력이 될 만한 주요관료 등 43명(수양대군 포함)을 정난공신(靖難功臣)에 책봉하고 이들을 요직에 앉힘으로써 수양대군이 왕위찬탈에 성공할수 있었다.
영월에서 서쪽으로 3km 쯤 달리면 남한강 상류의 지류인 서강(西江)이 그림같이 굽어도는 형국에 마치 육지속의 섬처럼 아름다운 별천지가 하나 있다. 동,북,서가 모두 깊은 물로 막히고 육지와 이어지는 남쪽은 험준한 육로봉의 층암절벽으로 막혀 있어 가히 절애고도(絶崖孤島)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오죽 했으면 이곳에 원통히 유배되었던 단종대왕(端宗大王)께서 육지고도(陸地孤島)라 하였겠는가?
그저 무정한 세월은 쉴새없이 흐르고 강변의 초목들은 피고지기를 거듭 하건만 한번 떠나신 님의 원혼이야 그 누가 있어 위로해 드릴것인가? 사육신인가? 생육신인가? ...그들도 고혼이 된지 수수백년에...
淸泠浦
바로 저 건너 저렇게 아름다운 송림(松林) 속에 단종이 유배되어 있어다 하니 아름다운 자연속에 통한의 역사를 심은 현장이었다..... 오늘의 무지한 우리도 눈시울이 젖는 순간이었다.
端宗御家(단종어가)
이곳이 단종임금께서 유배기간동안 머물러 계시던 집이다.
단종은 서기 1441년(세종23년)에 문종과 현덕왕후 권씨(顯德王后權氏) 사이에서 원자(元子)로 태어 났는데 이름은 홍위(弘暐)라 했다하는데 안타깝게도 태어난지 2일만에 모후 현덕왕후가 극심한 산후증에 24세의 나이로 돌아가시니 이 보다 더 슬픈 일이 또 있을까? 단종께서 8세 되던1448년(세종30년)에 왕세손에 책봉(冊封) 되었고 예문관제학 윤상(尹祥)으로 부터 학문을 배웠다.
1450년 2월 (세종32년)에 세종이 승하하고 부왕 문종이 즉위하게 되자 그해 7월 20일 왕세손이었던 홍위는 10세의 나이로 왕세자(王世子)로 책봉 되었으며 1452년 5월18일 문종이 승하후 단종은 경복궁 근정전에서 12세의 어린 나이로 조선 제6대왕에 등극 하였다.
병약한 문종... 즉 병에 약한 부왕이 고작 재위2년만에 나이어린 12살 세자를 홀로 두고 승하한 자체가 비극을 잉태한 역사적 사건이 아닐수 없었다.
1454년 1월22일(단종2년) 14세때 여량군(礪良君) 송현수(宋玹壽)의 따님을 왕후로 맞으니 이가 곧 정순황후(定順王后)로서 수를 82세까지 누리긴 하였으나 그 삶이 어떠했겠는가?
계유정난(癸酉靖亂)이후 1455년 6월 11일 단종은 세조(숙부: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15세에 상왕(上王)이 되었으며(재위3년) 박팽년,성삼문등이 단종의 복위(復位)를 꾀하다가 발각되어 모두 죽임을 당하는 사육신(死六臣)사건이 일어나 1457년(세조3년)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된 뒤 1457년 윤6월22일 창덕궁을 출발하여 7일후인 윤6월28일 유배지인 이곳 청령포로 유배되었다.
단종어가 대청에 걸린 어제시가 있어 적어 보았다.
御製詩 (어제시)
千秋無限寃 (천추무한원) 천추의 한 가슴깊이 품은 채
寂寧荒山裡 (적영황산리) 적막한 영월땅 황량한 산속에서
萬古一孤魂 (만고일고혼) 만고의 외로운 혼이 홀로 헤매이는데
蒼松繞舊圓 (창송요구원) 푸른솔은 옛동산에 우거졌구나
嶺樹三天老 (영수삼천노) 고개위의 소나무는 삼계에 늙었고
溪流得石喧 (계류득석훤) 냇물은 돌에 부딪쳐 소란도 하고나
山深多虎豹 (산심다호표) 산이 깊어 맹수도 득실거리니
不夕掩紫門 (불석엄자문) 저물기 전에 사립문 닫노라
단종어가의 부속건물
이곳이 궁녀들이 머물면서 단종대왕을 보필하던 집이다, 지금이야 갈끔하게 정돈되어 이렇겠지만 그 옛날의 형편이야 오죽 했을까?
관음송(觀音松)
관음송이라 함은 곧 단종 이곳 청령포로 유배되어 있을때 자주 이 나무로 오셔서 시름을 달래셨다 한다. 그때 통한의 눈물과 한탄 하는모습을 이 나무가 보았고 (觀:볼관) 그 비통한 울음과 탄식을 들었다(音:소리음)는데서 붙여진 이름이다.수령 600년으로 추정되는 이 소나무는 천연기념물 제349호이다.
망향탑(望鄕塔)에서
청령포 뒷산 육육봉(六六峰)과 노산대(魯山臺) 사이 층암절멱 위에서 내려다본 풍경이다.단종임금이 유배생활중 자신의 앞날을 예측할수 없는 근심 속에서 한양에 두고온 왕비 송씨를 생각하며 이곳에 자주 올라와 돌탑을 쌓고 눈물지었다 한다.
端廟在本府詩遺址(단묘재본부시유지)
이 비석은 단종어가 앞마당에 세워진 비각 안에 안치되어 있는데 즉 단종임금께서 이곳에 계실때의 터 라는 이야기이다.비석의 뒷면에는 황명숭정무진기원후삼계미계추 체경서영원영견석 지명 청령포(皇命崇禎戊辰紀元後三癸未季秋 涕敬書令原營堅石 地名 淸泠浦)라 새겨져 있는데 그 뜻은 어명으로 명나라 말기 의종황제 등극원년 무진년으로 부터 세번째 돌아오는 계미년 늦가을에 울면서 이 비를 받들어 쓰고 원주감영에서 세우다,지명은 청령포이다,라는 뜻이니 대략 영조대왕 연간에 세워졌슴을 알수 있다.
그시절엔 사색당쟁이 특히 극심하던 시절인데 자신의 정책과 반대의 입장에만 서면 수백명씩 역적으로 몰아 죽여대던 망나니 같은 벼슬아치들이 우굴대던 시절이다.사도세자도 그 악독한 마수들에 의해 죽어 갔는데 임금인 영조도 속수무책으로 당해야만 했으니 가히 나라가 망해가는 시초가 사색당쟁이었고 그 장본인들은 죽어서도 저지른 죄의 댓가를 다 갚지 못할것이라 나는 여긴다.그건 그렇고 참으로 아니꼽기 그지없는 표현이다.왜 그런고 하니 이 비석은 청나라가 조선을 지배하던 시절에 세웠다는 뜻인데 이미 명나라는 망해 없어졌건만 백수십년전에 없어진 그 명나라 연호를 쓰고 있으니 도대체 조선이 망할수 밖에 없는 이유가 바로 이런점이다.임금이 개혁을 하려 하면 교묘하게 그 임금을 독살한 사건이 조선왕조에서만 십수번이다. 조선의 사대부들은 모두가 그렇게 썪은 집단이었다.
청나라는 오랑캐라며 그들의 좋은점도 배척 하려 했고 오로지 성리학만 중얼대며 부와권세를 위해서라면 백성은 안중에도 없던 부패무능한 양반들이 들끓던 나라가 바로 조선이었다.하기야 조카를 때려 죽이고 왕위를 찬탈하는 임금에 신하된자가 감히 충신과 왕실을 도륙낸 사람들이 판치던 나라이니 말해 무엇하랴.
淸泠浦禁標碑(청령포금표) -위,앞면-
東西三百尺南北四百九十尺 此後 泥生亦在當禁 崇禎九十九年 (동서삼백척 남북사백구십척 차후 루생역재당금 숭정구십구년 -아래사진, 뒷면-
이 청령포의 동서로 삼백척,남북으로 사백구십척 출입을 금하노라! 또한 진흙이 쌓여 생겨난 땅 또한 같다 할것이다.숭정구십구년
이 내용으로 보아 단종을 이곳에 유배 시키고 그 당시에 단종의 출입을 금지하는 뜻인듯 한데 (역사적 사실 보존차원)숭정구십구년이면 명나라 의종황제의 재위 첫해로부터 99년인데 숭정원년이 1628년이니까 이 비는 1727년에 세워진것임을 알수 있다.그러므로 영조대왕(재위1724∼1776) 시대에 세웠다는 이야기가 되고 영조대왕이 역사적 유물을 복원해 놓은것이다.
단종어가낙성고유축문이라 함은 단종이 계시던 집을 다시 복원하고 경진년에(서2000년)영월군수가 이 축문을 지었다는 이야기다.
한번 써 볼거나
端宗御家落成告由祝文 단종어가낙성고유축문
維歲次 庚辰二月 癸亥 甲辰 유세차 경진이월 계해갑진
寧越郡守 金泰洙 敢昭告于 영월군수 김태수 감소고우
端宗大王 단종대왕
國運回泰 寧越가福 (클가) 국운회태 영월가복
奉安神位 至誠行禮 봉안신위 지성행례
大王薨後 不顧御家 대왕훙후 불고어가
郡民總意 今此落成 군민총의 금차낙성
不勝悲感 懺悔不忠 불승비감 회회불충
四千萬民 哀哀孤魂 사천만민 애애고혼
懷悔往事 不息落淚 회회왕사 불식낙루
雖立昊天 衆星供仰 수립호천 중성공앙
復元御家 晩時之嘆 복원어가 만시지탄
淸泠古宅 作亂不復 청령고택 작란불복
平安降臨 受百姓享 평안강림 수백성향
伏惟 복유
尊靈 歆饗素饌 존령 흠향소찬
尤加庇護 維保寧越 우가비호 유보영월
玆敢告由 虔告謹告 자감고유 건고근고
돌아오는 길에 다시 저 건너 송림과 무정한 강물을 바라본다.
아무리 보아도 강물은 잔잔 하건만 소리없는 통곡이 저 강 가득 차 있는것만 같았다.
조선시대 문신 왕방연(王邦衍)이 금부도사(禁府都事)로 있었는데 사육신(死六臣) 사건이 있은 뒤 1457년(세조 3년)에 왕명에 따라 상왕(上王) 단종이 노산군(魯山君)으로 격하되어 영월(寧越)로 유배 될때 호송 하고 서울로 돌아가는 길 내내 마음이 무겁고 착잡했다 한다.유배지를 향해 떠나는 단종이 갈증으로 인해 물을 마시고 싶어했으나 물 한 그릇도 국법에 어긋난다 하여 올리지 못했던 그는 찢어지는듯한 마음을 가눌길 없었다 하는데 ...
이런 왕방연을 시켜 또 다시 단종대왕에게 사약을 전하게 했으니 참으로 가혹하고 몰염치한 세조대왕이었다.서울로 돌아온 왕방연은 관직을 그만두고 선산이 있는 봉화산 아래 먹골(지금의 중랑구 묵동)에 자리를 잡아 필묵과 벗하며 키우기 시작한 것이 배나무였다 한다.유배지를 떠나는 단종이 갈증으로 인해 물을 마시고 싶어했으나 물 한 그릇도 국법에 어긋난다 하여 올리지 못했던 그는 단종이 승하한 날이 되면 자신이 가꾼 배나무에서 수확한 배를 바구니에 가득 담아 진설하고 영월을 향해 4배(四拜)를 올렸다 한다.그때 왕방연이 읊은 피눈물의 시 한수를 읊으니 이러하다.
천만 리 머나먼 길에 고운 님 여의옵고
내마음 둘 데 없어 냇가에 앉았더니
저 물도 내 안 같아서 울어 밤길 예놋다.
영월 청령포의 이 슬픈 역사를 둘러보고 나오는 길에 이 비를 만났다.
어찌 미물인 두견새가 이유없이 구슬피 울었겠는가? 나는 그리 믿고싶은 마음뿐이다.
두견새 우는 청령포
왕관을 벗어놓고 영월땅이 왠말이냐
두견새 벗을 삼고 슬픈 노래 부르며
한양천리 바라보고 원한으로 삼년세월
아, 애달픈 어린 임금 장릉에 잠들었네
두견새 구슬프게 지저귀는 청령포야
치솟은 기암절벽 구비치는 물결은
말해다오 그 옛날에 단종대왕 귀향살이
아, 오백년 그 역사에 비각만 남고 있네
동강물 맑은물에 비춰주는 달을 보며
님가신 길을 따라 꽃과 같이 사라진
아름다운 궁녀들의 그 절개가 장하구나
아, 낙화암 그 절벽엔 진달래 피고지네
(작사:이만진, 작곡:한복남, 노래:심수경)
이제 이 청령포를 뒤로 하고 단종대왕의 능 장릉(莊陵)을 찿아 출발을 해야 했다.
시간은 벌써 오후 5시가 넘었는데 청령포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거리지만 촉박한 시간때문에 장릉의 이모저모를 모두 관람하지 못한것이 못내 아쉽다.
단종대왕(端宗大王)의 장릉(莊陵)을 찿아서
세조는 단종을 죽여 동강 물에 던져 버리게 하고 시신을 묻는 자는 삼족을 멸해 버리겠다고 했다. 천지간에 아무도 나설 사람이 없었다. 이때 하늘이 내린 의인 하나가 있었으니 바로 영월 호장(戶長·지방 관아의 우두머리 벼슬) 엄흥도다. 그는 ‘옳은 일을 하다가 화를 입는 것은 달게 받겠다’고 분연히 나서 강물에 둥둥 떠다니는 상왕 시신을 몰래 수습해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 영흥리 동을지산에 암장해 놓았다. 눈 덮인 겨울날 노루가 앉아 있다 떠난 자리만 녹아 있어 그 자리를 파고 묻었다.
文景公駱村密陽朴忠元先生紀蹟碑(문경공낙촌밀양박충원선생기적비)
장릉의 주차장에 내려 장릉으로 오르는 산길 오른쪽 입구에 이 비각이 세워져 있는데 어찌 왕릉의 경내에 이처럼 사사로이 일개 신하의 비각이 세워져 있을까....그 이유인즉 이러하다.
중종 11년(1516). 영월군수로 부임한 박충원의 꿈에 단종이 나타나 자신이 묻힌 곳을 말해 주고 홀연히 사라졌다. 식은땀을 흘리며 깬 박충원이 엄흥도 후손과 함께 암장 묘를 찾고 봉분을 수축하여 봉제를 올리니 오늘의 장릉(莊陵)이다. 서울과 경기권을 벗어난 유일한 조선 왕릉으로 장릉에는 배식단사(配食壇祠)와 엄흥도 정려각(旌閭閣)이 있어 참배객들을 숙연하게 한다. 안평대군과 금성대군을 위시해 조사(朝士) 환관 군노 등 단종을 복위시키려다 극형을 당한 264인 위패를 모셔놓고 매년 한식 때 제사를 지낸다. 그러므로 문경공 박충원 선생의 기적비가 여기에 세워지는건 당연한 이치이다.
莊陵(장릉)
숙부 수양대군에 의해 왕위를 찬탈 당하고 영월의 청령포에 유배 되었다가 2달후 왕방연에게 어명을 내려 이미 노산군(魯山君)으로 폐위된 단종대왕에게 사약을 전해 죽여서는 그 시신을 강물에 던져 버리게 하였다 하니 그러고서도 세조가 조선의 임금이라 할것인가?
그 시신을 엄홍도가 거두어 몰래 암장해 모시었고 그로부터 60여년이 흐른 훗날 단종임금께서 영월군수 박충원의 꿈에 현몽 하시어 자신의 시신이 묻힌곳을 말하시고는 홀연히 사라짐에 박군수가 이곳으로 찿아와 확인 하고는 다시 예를 갖추어 모신것이라 한다.
지금도 서울 동작구 노량진 1동 155-1번지 언덕에는 사육신의 묘가 현존 하고 있으니 뜻 있는 지사들의 참배가 끊이지 않고 있다 하는데 여기 사육신의 약력과 시를 함께 올려 그 충절을 되새기고져 한다.
成三問 (1418년 - 1456년) 昌寧人, 字는 謹甫 호는 梅竹軒 시호는 忠文
둥둥치는 저 북소리 사람의 목숨을 재촉 하네
고개돌려 바라보니 해는 이미 기울었네
황천길엔 주막 하나 없다하니
오늘 밤에는 누구의 집에서 잘꼬
가마귀 눈비 맞아 희는듯 검노매라
夜光明月이 밤인들 어두우랴
님 향한 一片丹心이야 고칠 줄이 있으랴
李 塏 (1417-1456) 韓山人 字는 淸甫 호는 白玉軒
창안에 켰는촛불 누구와 이별 컨데
겉으로 눈물지고 속 타는 줄 모르는가.
저 촛불 나와 같아 속 타는 줄 모르구나
아 ~ 하늘도 통곡할 슬픈 일이었다 !성삼문은 불에 시뻘겋게 달군 쇠로 고문을 당해도 세조를 '전하'라 하지 않고 '나리'라 불렀다.성삼문, 박팽년, 유응부, 이개 는 작형灼刑(불에 달군 시뻘건 쇠로 고문)으로 처형당했으며,하위지는 참살당하였고,유성원은 스스로 집에서 아내와 함께 자진하였다.
莊陵,端宗大王陵
석양에 참배를 한 장릉에는 고요와 정적만이 가득했다.아쉬운건 문인석(文人石)만 있고 무인석(武人石)과 수석(獸石)이 없는점이다.
장릉에는 이런 전설이 배어있어 소개 한다. " 장릉에서 참배를 하면 좋은 일이 생긴다 "는 말이 전해오는데 참배를 할때 유의 할것은 경건한 마음으로 왕에 대한 예로써 四拜(사배:네번의 절)를 올리면서 소원을 빌어야 한다는것이다.본래 전해오는 예법에 살아있는 사람에게는 단배(單拜), 돌아가신 분에게는 재배(再拜), 스님에게는 삼배(三拜), 왕에게는 사배(四拜)하고, 황제에게는 구배(九拜)를 해야 한다.
장릉에서 내려단 본 재실과 단종비각,배식단사등
이미 해가 기울어 6시가 넘었으니 더 이상 다녀 볼수가 없었는데 문을 닫기때문이다.
장릉(莊陵) 안내장에 이런 내용이 있다.
태백산에 가보면 만경대란 곳이 있고 그 뒤에 탑이 있는데 그 내려오는 길에 단종비각이 있다한다.
단종이 사약을 받은후 충신 추익한(秋益漢)이 단종을 뵈려고 산머루를 가지고 관풍헌(觀風軒)을 향해 가던중 곤룡포(袞龍布)에 익선관(翼善冠)을 쓰고 백마를 탄 단종의 모습을 보고 " 어디로 가시옵니까 " 하고 물으니 " 나는 태백산으로 간다 " 고 하면서 홀연히 사라지셨다 한다, 후세 사람들은 단종대왕이 태백산 산신령이 되었다고 믿고 해마다 태백산신제를 지낸다 한다.
단종역사관 앞에서
아쉽게도 시간에 쫒겨 모두를 돌아보지 못하고 중단하고 와야만 했다.오후 6시가 넘으면 모든 관광객을 내 보내게 되어 있기때문이며 또 부랴부랴 먼길을 가야 하기때문이다.
단종대왕께서는 청령포에 2달정도를 유배 되어 계시다가 물이 범람할 위기에 처하게 되자 영월의 객사(客舍) 관풍헌(觀風軒)으로 옮기게 되었으며 금성대군의 단종복위 거사가 실패로 돌아가자 관풍헌 마당에서 사약을 받으시니 꽃다운 17세의 생을 접으셨다.
아..! 참으로 눈물이 앞을 가리는 슬픈 역사였다 !
첫댓글 억울하고 슬픈역사가 아닌 역사를 만들수있다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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