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어콘 설치 소동
코로나19 때문에 파크골프구장에도 나가지 못하고, 바보상자 앞에서 바보처럼 무료하게 누웠다 앉았다를 거듭하고 있었다. 밖은 서서히 대지에 열기가 닳아 오르고 있다. 오늘도 무척 더울 모양이다.
그때 마침 전화벨이 울렸다. 누구시냐고 물었더니 에어컨 설치를 위하여 나왔다면서 문을 열어달라는 것이다.
서둘러 밖으로 나갔더니 에어컨을 설치하기 위하여 방문한 두 분의 기사님이 서 있었다.
“여기 이정숙님 댁 맞지요?. 에어컨을 설치하려 왔습니다”
나는 깜짝 놀랐다. 뜬금없는 에어컨 설치라니? 우리 집 거실에는 이미 대형 에어컨이 자리 잡은지가 꽤 오래 되었다. 우리가 이사 온 담 해에 큰 아이가 에어컨을 설치해 주었기 때문이다. 아내가 사용하는 내실에도 소형 벽걸이 에어컨이 걸려 있다.
몇 주 전에 에어컨을 점검하러 집에 왔던 기사가 필터를 교환하고 여기저기를 살피고 난 후‘많이 사용하지 않아서 아직 새 것 같습니다’라는 말을 들은 터다. 우리는 해년 마다 에어컨을 많이 사용하는 편이 아니다. 선풍기만으로도 넉넉히 지낼 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에어컨을 설치하러 왔다는 것이다.
아내는 나도 모르게 내가 사용하는 방에 에어컨을 설치할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자기로서는 어떻게 할 도리가 없었기 때문에, 안양에 사는 동생을 통하여 설치를 의뢰한 것이다. 설치하기로 한 날이 바로 오늘이다. 여느 날 같았으면 나는 아침 일찍 서둘러 파크골프장으로 나가고 집에 있지 않을 시간이다. 그래서 였을까? 거실에 있는 나에게 아내가 물었다.
“오늘은 왜 안 나가세요?”
에어컨은 설치하기로 했는데, 내가 집에 있으면 반대할 것이 뻔해서 걱정스러워 물었던 같다. 그런데 코로나 때문에 오늘부터 또 파크골프 구장을 폐쇄한다는 공지문을 받고, 어쩔 수 없이 나도 집에 머물러 있어야했던 참이다.
마침 그런 때에 에어컨을 설치기사가 온 것이다. 내가 집에 없는 때라야 아내마음대로 에어컨을 설치할 수 있었는데 차질이 빚어진 것이다.
조금은 당황해하는 아내의 모습을 보면서도 나는 에어컨 설치를 끝까지 반대했다.
8월 하순이면 여름의 끝자락이다. 이제 와서 무슨 에어컨인가!
나는 선풍기만으로도 여름 한 철 잘 지내왔다. 비록 선풍기가 없다 해도 그렇게 불편해 하지는 않을 것이다. 내 방에는 에어컨이 필요 없다.
남편 몰래 에어컨울 설치하려했던 소동은 조금은 싱겁게 이렇게 조용히 끝이 났다. 남편을 위한 아내의 배려(?는 한없이 고마운 일이지만, 나는 그것을 받아드릴 수가 업었다.
이렇게 아름답고 편안하고 행복한 세상에 더 바랄 것은 아무 것도 없기 때문이다. 입을 옷이 없어 추위에 떨었던 세상도 살았고, 초근목피로도 허기진 배를 채우지 못해 허리띠를 졸라매야했던 서러운 시절도 겪었다. 그래서인지 나는 밥 한 톨의 버려짐도 죄처럼 느껴진다. 버려지는 음식물이 십 수조원이 넘는다는 말을 들어서가 아니다. 근검절약을 미덕으로 믿어서도 아니다. 이런 나를 사람들은 궁상스럽다고 말 할 른지 모른다. 그래도 괜찮다. 나의 방에 에어컨은 사치 이상의 죄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정말로 아내는 나를 위하여 에어컨을 설치해 주고 싶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일을 해내고 싶었을 테니까.
나도 모르게 며칠 전에 읽은 글이 자꾸만 머리에 떠올랐다.
겔트족의 영웅 아더왕에 관한 이야기다. 불행하게도 아더왕은 이웃나라의 포로가 되었다. 비록 포로로 잡아오기는 하였지만, 차마 그를 죽일 수가 없어서 1년 안으로, 출제한 문제에 대한 답을 구해오면 살려 주겠다고 했다 한다. 그 어려운 문제는 이것이다.“여자들이 정말로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아더는 고국에 돌아와 무수한 사람들을 불러드려 답을 구했다. 그러나 아무에게서도 그 답을 얻지 못했다. 신하들은 괴물인간 마녀(魔女)에게 부탁하면 답을 얻을 수 있을 거라고 제의했다. 마녀는 엄청 큰 대가를 요구했다. 그것은 왕이 가장 아끼고 사랑하는‘거웨인’과 결혼하게 해 달라는 것이다. 아더는 진퇴양난의 위기에 빠졌다. 더럽고 추한 괴물 마녀에게 사랑하는 신하를 내줄 수는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충성스런 신하‘거웨인’은 스스로 마녀와 결혼하겠다면서 그녀로부터 답을 얻어왔다.
“여자들이 정말로 원하는 것은 바로 자신의 삶을 자신이 주도하는 것”이라 했다.
이 말은 자신의 일에 대한 결정을 남의 간섭 없이 자신이 내리는 것이라는 의미이다. 이 현명한 답으로‘아더’는 목숨을 구했지만, 충성스런 신하‘고웨인’에게는 정말 못할 일을 하게 한 것이다. 결혼 첫날밤 거웨인이 침실로 들어갔을 때 마녀는 미녀로 변해 있었다. 그러면서 거웨인에게 물었다.
“낮에 추한 마녀로 있고 밤에 아름다운 미녀로 있기를 원하는가? 아니면 낮에 아름다운 미녀로 있고 밤에 추한 마녀로 있기를 원하는가?”
거웨인은 정말로 난처한 질문을 받았다. 이럴 수도 없고 저럴 수도 없는 질문이다. 이 대답여하에 따라 자신의 운명이 결정되기 때문이다. 거웨인은 마녀에게 이렇게 되받았다.“당신이 직접 선택하세요!”이 말을 듣자마자 마녀는, 자신은 평생을 미녀(美女)로 살겠다고 대답했다는 것이다. 마녀가 그렇게 듣고 싶어 했던 그 말을 거웨인은 알고 있었던 같다.
‘당신 마음대로 하라’
에어컨을 설치하러 온 기사들이 돌아간 뒤 아내는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에어컨을 설치해 준다는 데, 그게 그렇게 싫어요?”
그리고는 한동안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혼자 구시렁거렸다.
(2020. 8. 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