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가짜를 진짜로 만드는 가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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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는 단편소설집 ‘픽션들’에서 여러 가지 독특한 소설쓰기 기법을 사용한다. 그 중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아마도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는 글을 쓰는 기법일 것이다. 이러한 기법은 ‘삐에르 메나르, 『돈키호테』의 저자’에서 두드러지게 사용되고 있다. 그 소설에서 화자는 삐에르 메나르라는 작가가 남긴 작품들을 정리하면서, 그 중에서 화자가 특히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돈키호테’라는 작품에 대해 분석하고 평가를 내린다. 그러나 사실 삐에르 메나르라는 작가는 허구적인 인물에 불과하다. 당연히 메나르가 썼다고 하는 모든 작품들 역시 보르헤스의 상상의 산물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르헤스는 정말로 삐에르 메나르가 존재하는 것처럼, 그리고 메나르가 정말로 ‘돈키호테’를 비롯해 소설 속에 언급되는 수많은 작품들을 쓴 것처럼 믿게끔 만든다.
소설은 원래 허구를 다루는 글이다. 그렇기 때문에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해 글을 쓴다는 것 자체는 소설이라면 당연히 가지게 되는 특징이고, 일견 전혀 독특할 것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현실 속에서 일어날 법한 일을 다루는 사실주의 문학이라고 해도 인물과 사건은 모두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허구에 불과하다. 뿐만 아니라, 개연성을 희생하면서 상상력을 극대화하여 환상적인 세계를 묘사하는 환타지 문학도 널리 읽히고 있다. 그러나 보르헤스의 소설을 일반적인 소설들과 차별화하는 것은, 그가 허구를 다루었다는 사실이 아니라, 허구를 다루는 방식이다. 보르헤스는 허구적인 것, 즉 존재하지 않는 것 그 자체를 묘사하지 않는다. 대신 그는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한 평가, 그것에 대한 분석을 시도한다. ‘허버트 쾌인의 작품에 대한 연구’라는 소설이 이와 같은 모습을 가장 잘 보여주고 있다. 보르헤스는 제목 그대로 허버트 쾌인이라는 사람이 쓴 작품에 대해 ‘연구’한 내용을 이야기하지만, 실제로 허버트 쾌인이라는 사람은 아예 존재하지도 않는다. 허버트 쾌인과 그가 쓴 작품이 허구임은 분명하지만, 보르헤스는 일반적인 소설이 하듯이 허버트 쾌인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직접적으로 그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대신, 그 허구적 존재에게서 한 걸음 떨어져서 간접적으로 접근하는 것이다.
주목할 것은 바로 이러한 기법, 존재하지 않는 것을 간접적으로 묘사하는 기법이 오히려 더 사실성을 획득한다는 것이다. 이는 전해 듣는 이야기에 대해 인간이 일반적으로 갖게 되는 신뢰성과 관련이 있다. 사람들은 의사소통 과정에서 많은 경우 ‘아무개에게 의하면…’이라던가, ‘무슨무슨 책에 써 있는 바에 의하면…’과 같은 방식으로 자신의 이야기에 신빙성을 부여하고 권위를 얻으려고 한다. 신뢰의 원천으로 끌어들이는 사람 혹은 책이 명성을 얻은 경우 이와 같은 신뢰성은 증폭되겠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라 하더라도 듣는 사람은 단지 전해진 이야기라는 사실 그 자체 때문에 더 높은 신뢰감을 갖는 경향이 있다. 보르헤스는 이와 같은 사람들의 경향성을 효과적으로 이용하여 그의 허구에 진실성을 불어넣는다. 그의 이야기는 수많은 인용으로 점철되어 있는데, 중요한 점은 이들 중 상당수가 허구적인 것, 즉 가짜 인용이라는 사실이다. ‘삐에르 메나르, 『돈키호테』의 저자’에서 보르헤스는 메나르의 작품을 열거하면서 그 작품이 출판된 잡지와 출판 연도를 일일이 명시하고 있지만, 실제로 그 잡지들은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이거나, 아니면 실제로 그런 이름의 잡지는 존재하지만 출판 연도는 맞지 않는다. 더 나아가 보르헤스는 본문에 대한 주석을 추가하면서도 허구적 내용으로 주석을 채워 넣기도 한다. 이러한 장치들을 통해 보르헤스가 다루고 있는 허구적인 것,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것은 도리어 생명력을 얻는다. 독자는 삐에르 메나르에 대해 찬사 혹은 비난을 보낸 수많은 사람들이 언급되는 것을 읽으면서, 또 메나르의 작품이 정확한 출판 사실까지 거론되며 열거되는 것을 읽으면서 메나르의 존재를 진실인 것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게 된다. 가짜의 현실성을 가짜로 획득하는 아이러니를 보르헤스는 보여주고 있다.
2. 주석들이 조각조각 모여서 실체를 창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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큐브는 정말 무한한 생각거리를 담고 있는 영화다 | 앞서 언급한 보르헤스의 소설들에서, 연구 혹은 평가의 대상이 되는 인물 혹은 작품은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하는 것은 그것에 대해 보르헤스가 쓴 이야기, 즉 그것에 대한 주석뿐이다. 그러나 존재하지 않던 것이 주석에 의해서 현실이 되고, 마침내는 존재하는 것이 되어 버린다. 이와 같은 모습은 보르헤스의 글쓰기 형식에서 나타날 뿐만 아니라, 그의 글 속에서도 묘사되고 있다. ‘틀뢴, 우크바르, 오르비스 떼르띠우스’는 작은 주석의 조각들이 모여서 결국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 하나의 실체로 자리잡게 되는 과정을 그려내고 있다. [영화 ‘큐브’에서도 역시 이와 같은 모티브를 발견할 수 있다. 큐브 안에 갇힌 사람들 중 하나인 워스는, 실제로 큐브의 설계에 참여했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자기가 단지 외부 프레임만을 설계했을 뿐이었다고 말한다. 그는 그가 만드는 것이 어떤 것인지 전혀 알지도 못했다. 수많은 사람들에게 작은 부분이 할당되었고, 그 사람들은 자기가 맡은 한 조각을 완성시켰다. 그러나 그들이 모르는 사이에 그러한 조각들이 모여서 마침내는 큐브가 형성되었다. 작은 조각들이 퍼즐처럼 모여서 괴물과도 같은 세계를 만들어 내는 과정이 보르헤스의 소설에서와 똑같은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틀뢴은 허구, 단지 몇몇 사람들의 머리 속에만 존재하는 관념의 산물이었다. 하나의 세계를 창조하고자 했던 일단의 사람들이 비밀 결사대를 조직했고 그들은 틀뢴을 창조해 냈다. 그들은 틀뢴에 대한 주석서, 즉 백과사전을 만들었고 그러한 주석들은 조각조각 나뉘어져서 현실 세계의 백과사전에 삽입되었다. 소설 속에서 화자가 틀뢴에 대해 처음으로 알게 된 것은 우연히 영미백과사전에 끼워 넣어져 있는 ‘우크바르’라는 항목 때문이었다. 이처럼 현실 곳곳에 틀뢴에 대한 주석의 편린이 발견되었다. 영미백과사전의 하나의 항목만 있던 것이 곧이어 ‘틀뢴의 백과사전’ 한 권이 추가되고, 틀뢴의 글자가 새겨진 나침반이 등장하는 등 틀뢴의 조각은 하나하나 발견되다가 급기야는 틀뢴에 대한 완전한 주석, 즉 ‘틀뢴의 백과사전’ 전체가 등장하자 틀뢴은 그 순간 현실이 되어 버렸다. 분명히 틀뢴은 허구의 세계이고, 존재하지 않는 환상에 불과하다. 그러나 실체가 없는 틀뢴은 사람들에게 현실 세계가 되어 버렸다. 실체의 부존재로 인한 빈 공간은 그대로일지라도, 그것에 대한 주석들이 퍼즐처럼 모여들어서 그 빈 공간을 감싸는 외피를 이루어낸 것이다. 시각적으로 비유한다면, 속이 비어 있으면서 겉껍질이 퍼즐조각으로 이루어진 공과 같은 모습으로 틀뢴은 현실 속에서 실체성을 획득했다.
거의 순식간에 현실은 항복을 선언했다. … 10년 전 그 어떤 대칭도 ― 변증법적 유물론, 반유태주의, 나치즘 ― 외형적 질서만 가지고 있으면 쉽게 인간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었다. 그 누가 질서정연한 혹성이라는 정밀하고 방대한 증거를 눈앞에 두고서도 틀뢴에게 굴복하지 않을 것인가?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픽션들, 민음사, 1994, pp.48-49.]
단편적인 것이 여러 개 모여서 모호한 모습으로 하나의 실체를 이루는 방식은, 틀뢴의 원초적 언어에 형상화되어 있다. 틀뢴의 원초적 언어에는 명사가 없다. 하나의 실체를 지칭하기 위해서는 많은 수의 동사, 혹은 형용사가 필요하다. 이와 같은 체계는, 매 순간 사물은 변화를 거듭하고 있으며, 따라서 결코 똑같은 상태로 존재하는 것은 없다는 생각[모든 것은 변화하고 있으며, 따라서 어떤 것도 동일하게 유지될 수 없다는 생각은, ‘기억의 천재 푸네스’에서 집중적으로 나타난다. 기억력이 극대화된 나머지 한 순간에 나타나는 모든 세세한 사실을 전부 지각하고 기억할 수 있는 푸네스라는 사람을 통해서, 보르헤스는 사람들이 흔히 의식하지 못하고 행하는 개념화와 일반화에 대해, 그리고 언어 기호가 갖는 본질적 추상성에 대해 문제를 제기한다. 보르헤스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우리들은 푸네스가 일반적인, 그러니까 플라톤적인 생각들을 할 수 없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는 <개>라는 종목별 기호가 다양한 크기와 형상들을 가진 수많은 하나하나의 개들을 포괄한다는 사실을 이해하기가 힘들었다. … 나는 그가 사고를 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의심이 들곤 했다. 사고를 한다는 것은 차이점을 잊는 것이며, 또한 일반화를 시키고 개념화를 시키는 것이다. 푸네스의 풍요로운 세계에는 단지 거의 즉각적으로 인지되는 세부적인 것들밖에 없었다.” Ibid., pp.187-188.]을 바탕에 깔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매 순간 순간의 상태를 묘사함으로써 하나의 사물을 지칭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달’이라고 명사를 사용해서, 변화하는 속성을 과감히 무시하고 일반화하여 실체로서 표현하는 것을, 틀뢴에서는 ‘어둡고 둥그런 위에 있는 허공의 밝은’ 과 같이 여러 형용사의 집합으로 나타내게 된다. 비유를 무릅쓰고 표현한다면, 명사를 사용하는 우리의 언어 체계가 점 하나를 찍음으로써 실체를 표현하는 데 비해, 틀뢴의 언어 체계는 수많은 점들을 한데 모아서 속이 빈 원을 그려내는 방식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결국 틀뢴의 현실화한 과정과 동일한 방식, 즉 애초에는 부재하던 것을 작은 단편들이 모여서 형성해내는 방식이다.
결국 이는 달리 말해 사람들의 관념이 실체를 만들어낸다는 이야기와 같다. 실제로 존재하는 것, 즉 실재는 사실상 무의미하다. 결국 사람들에게 있어 의미 있는 것이 되기 위해서는 관념 속에서 존재해야만 한다. 한 걸음 더 나아간다면, 관념 속에서 존재하기만 한다면 그것이 실재하는지 여부는 무관하다고까지 주장할 수 있을 것이다.
3. 텍스트의 ‘원래의 의미’는 없다
앞서 언급한 단편 ‘삐에르 메나르, 『돈키호테』의 저자’에서도 동일한 발상을 읽어낼 수 있다. 세르반테스가 쓴 텍스트와 메나르가 쓴 텍스트는 글자 하나 틀리지 않고 완전히 동일한 것이다. 그러나 보르헤스는 “삐에르 메나르의 것은 전자(세르반테스의 것)보다 거의 무한할 정도로 풍요롭다 [Ibid., p.85.]”고 주장한다. 똑같은 문장이라고 해도 그것이 세르반테스가 쓴 것일 경우는 ‘역사에 대한 단순한 수사적 찬양에 불과’한 것이 되고, 메나르가 쓰면 ‘놀라운’ 것이 된다. 얼핏 생각하면 황당무계한 이와 같은 차이는, 세르반테스와 메나르가 같은 텍스트를 썼다고 하더라도 그들이 전혀 다른 시간과 공간에 존재한 사람들이라는 점에서 비롯된다. 메나르와 세르반테스는 서로 다른 경험을 하며 살았고, 서로 다른 사상에 의해 영향을 받았다. 그렇기에 만약 현 시대의 사람인 메나르가 세르반테스와 똑같은 문장을 구사했다면, 그것은 과거의 시대의 정신에 그토록 근접할 수 있었다는 위대한 업적이며 자신의 현재 상황을 뛰어넘는 생각을 해낸 놀라운 성과인 것이다.
작가가 아닌 독자의 입장에서 생각한다면, 결국 동일한 텍스트라고 해도 읽는 사람의 시대, 그가 놓여 있는 공간, 그리고 그가 겪은 수많은 다양한 경험에 의해 텍스트의 의미는 천차만별이 된다고 추론할 수 있다. 그러나 단순히 ‘텍스트는 독자에 따라 다양하게 해석된다’라는 결론에 그치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시공간의 차이, 그리고 경험의 차이에 따라 텍스트가 결코 동일한 의미로 읽혀질 수 없는 것이라면, 애시당초 그 텍스트를 쓴 작가 역시 마찬가지다. 돈키호테를 쓸 때의 세르반테스는, 작품을 완성한 후 몇 년의 세월이 지난 세르반테스와 동일한 사람이 아니다. 시간이 지난 후 세르반테스가 자기 자신의 작품의 독자가 되어 돈키호테를 읽는다면, 그는 그가 쓸 때와는 분명히 다른 방식으로 작품의 의미를 읽어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더 극단적으로 말한다면, 글을 쓰는 순간 이미 글을 쓸 당시의 세르반테스는 사라져 버린다고 할 수 있다. 결국 텍스트는 그것이 쓰여지는 순간 그 자체로 순수하게 존재하는 것이 된다. 텍스트에게서 ‘원래의 의미’를 찾는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 된다. 만약 ‘원래의 의미’라는 것이 작가가 글을 쓸 당시 생각했던 바를 말하는 것이라면, 원래의 의미는 결코 도달될 수 없는, 영원히 상실된 목표에 불과하다. 심지어 원작자 자신조차도 원래의 의미를 완전히 복원해낼 수 없다. 텍스트의 ‘원래의 의미’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텍스트의 의미는 사후적으로, 그것을 읽는 독자들에 의해서 형성되는 것이다. 수많은 독자들은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자신만의 방식으로 텍스트를 독해하고 자신만의 의미를 읽어낼 것이다. 독자들이 찾아낸 의미들, 천차만별인 것에서부터 어느 정도 유사성을 띠고 있는 것에 이르기까지, 독자의 수만큼 다양하게 존재하는 의미들이 모여서 텍스트의 의미를 만들어낸다. 이는 틀뢴에 대한 조각들이 모여서 실체를 이루는 과정, 틀뢴의 언어체계에서 형용사들의 집합이 하나의 사물을 가리키게 되는 과정과 똑같은 것이다. 텍스트의 ‘원래의 의미’는 존재하지 않지만, 독자들이 해석해 낸 텍스트의 다양한 의미들이 모여서 의미를 구성해 낸다. 만약 텍스트에 ‘의미’라는 것이 존재한다면 이는 이처럼 여러 가지 서로 다른 조각들이 모인 모호하고 불안정한 형태, 언제라도 새로운 부분이 추가되거나 모양이 변형될 수 있는 형태, 가운데의 실체적 부분(‘원래의 의미’에 해당하는 부분)은 비어 있는 형태로밖에 존재할 수 없다. 이와 같은 관점을 취한다면 문학 작품을 분석하면서 작가의 의도를 추리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을 시도하는, 무의미한 작업이 되어 버린다.
4. 구성된 현실
결국 보르헤스 자신의 소설 기법, 그리고 소설 속에 등장하는 내용에서 일관되게 나타나는 것은 ‘만들어낸 현실’, 즉 ‘구성된 현실’의 개념이다. 구성된 현실의 차원에서는, 만들어낸 것이 실제로 존재하는지 존재하지 않는지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실제로 존재하는 사물이라고 하더라도 결국 그것의 의미, 형태, 속성 등은 그것을 지각한 인간들의 저마다 다른 관념의 집합으로써 결정될 뿐이다. 실재하지 않는 것이라고 해도 다를 바가 없다. 사람들의 관념이 조각조각 모여서 부재를 실재로 바꾸어놓을 수도 있다는 점은, 틀뢴이 현실이 되는 모습에서 확인된다. 유의미하게 존재하는 것은 관념 속에서 존재하는 것뿐이다. [칸트는 실제로 존재하는 것은 결코 완전히 알 수 없는 것(X)이라고 보았고, 사람들이 그것을 지각하여 관념 속에서 현상으로 인식한 때에만 의미 있는 것으로 존재한다는 현상존재론을 주장했다. (자세한 내용은 백종현, 서양근대철학, 철학과현실사, 2001, pp.107-130 참조.) 보르헤스의 생각은 기본적으로 관념의 힘을 중시한다는 점에서 칸트의 현상존재론과 유사한 부분이 있지만,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없어도 상관없다고까지 생각을 발전시킨다면(즉, X조차 없다고 생각한다면) 이는 칸트의 생각을 뛰어넘는다. 실재가 공허에 불과하다는 관점은 슬라보예 지젝의 이론에서 나타난다. (슬라보예 지젝,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 인간사랑, 2002, pp.337-346 참조.)] 그리고 관념 속에서 사람들은 존재를 스스로 창조해 낸다. 보르헤스는 관념의 힘을 중요시한다. ‘원형의 폐허들’에서는 순전히 관념의 힘으로 하나의 인간을 창조하는 모습이 묘사되는가 하면, ‘비밀의 기적’에서 주인공은 탄환이 발사되고 그것에 맞을 때까지의 찰나 동안 자신의 관념 속에서 1년에 달하는 시간의 삶을 누리기도 한다. 관념적인 것, 즉 상상에 의해서 존재하는 것이 현실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르헤스는 그의 문학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더 나아가 관념에 의해 창조된 현실만이 진짜라는 관점을 받아들인다면, 환상과 현실의 경계는 완전히 무너져 버린다. 보르헤스의 기법을 흔히 ‘환상적 사실주의’라고 표현하지만, 사실상 이는 동어반복에 불과한 것일지도 모른다. 보르헤스가 ‘구성해 낸’ 이야기의 세계 속에서 우리는 우리 스스로 ‘구성해 낸 현실세계’를 새롭게 찾아내게 되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