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공스님 이야기
1930년대 말경, 만공스님이 충남 예산의 덕숭산 수덕사에
주석하고 계실 때의 일이었다.
당시 만공스님을 시봉하고 있던 어린 나이의
진성 사미(오늘의 수덕사 원담 노스님)는
어느 날 사하촌(寺下村)의 짓궂은 나뭇 꾼들을 따라
산에 나무하러 갔다가
“재미있는 노래를 가르쳐줄 것이니 따라 부르라”는
나뭇 꾼들의 말에 속아 시키는 대로 ‘딱따구리 노래’를 배우게 되었다.
“저 산의 딱따구리는
생나무 구멍도 잘 뚫는데
우리 집 멍텅구리는
뚫린 구멍도 못 뚫는구나.“
이 노래는 그야말로 음란한 내용이었다.
그러나 아직 세상물정을 몰랐던 철없는 나이의 진성 사미는
이 노랫말에 담긴 음란한 뜻을 알 리가 없었다.
그래서 진성 사미는 이 노래를 배운 이후,
절 안을 왔다 갔다 하면서도 제법 구성지게 목청을 올려
이 해괴한 노래를 부르곤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진성 사미가 한창 신이 나서
이 노래를 부르고 있는데 마침 만공 스님께서 지나가시다가
이 노래를 듣게 되었다. 스님은 어린사미를 불러 세웠다.
“네가 부른 그 노래, 참 좋은 노래로구나,
잊어버리지 말거라.”
“예, 큰스님.”
궁녀들 모아 놓고 ‘딱따구리 노래’ 법문
진성 사미는 큰스님의 칭찬에 신이 났다.
그러던 어느 봄날, 서울에 있는 이왕가(李王家)의 상궁과 나인들이
노스님을 찾아뵙고 법문을 청하였다.
만공 스님은 쾌히 청을 승낙하시더니
마침 좋은 법문이 있느니 들어보라 하시면서
진성 사미를 불러 들였다.
“네가 부르던 그 딱따구리 노래, 여기서 한번 불러 보아라.”
많은 여자 손님들 앞에서 느닷없이 딱따구리 노래를 부르라는
노스님의 분부에 어린 진성 사미는 얼굴이 붉어졌지만,
그전에 노스님께서 그 노래를 칭찬해주신 일도 있고 해서
목청껏 소리 높여 멋들어지게 딱따구리 노래를 불러 제꼈다.
“저 산의 딱따구리는 생나무 구멍도 자알 뚫는데….”
철없는 어린사미가 이 노래를 불러대는 동안 왕궁에서 내려온
청신녀(淸信女)들은 얼굴을 붉힌 채 어찌할 줄을 모르고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이때 만공스님께서 한 말씀하셨다.
“바로 이 노래 속에 인간을 가르치는
만고불력의 직설 핵심 법문이 있소.
마음이 깨끗하고 밝은 사람은 딱따구리 법문에서
많은 것을 얻을 것이나, 마음이 더러운 사람은
이 노래에서 한낱 추악한 잡념을 일으킬 것이오.
원래 참법문은 맑고 아름답고 더럽고 추한 경지를 넘어선 것이오.
범부중생은 부처와 똑같은 불성을 갖추어 가지고 이 땅에 태어난,
누구나 뚫린 부처 씨앗이라는 것을 모르는 멍텅구리요.
뚫린 이치를 찾는 것이 바로 불법(佛法)이오.
삼독과 환상의 노예가 된 어리석은 중생들이라
참으로 불쌍한 멍텅구리인 것이오.
진리는 지극히 가까운데 있소. 큰길은 막힘과 걸림이 없어
원래 훤히 뚫린 것이기 때문에 지극히 가깝고,
결국 이 노래는 뚫린 이치도 제대로 못 찾는, 딱따구리만도 못한
세상 사람들을 풍자한 훌륭한 법문이 것이오.”
만공스님의 법문이 끝나자 그제 서야 청신녀들은 합장배례하며 감사히 여겼다.
서울 왕궁으로 돌아간 궁녀들이 이 딱따구리 법문을 윤비(尹妃)에게
소상히 전해 올리자 윤비도 크게 감동, 딱따구리 노래를 부른
어린 사미를 왕궁으로 초청, ‘딱따구리’노래가
또 한 번 왕궁에서 불려진 일도 있었다.
만공스님은 조선총독 앞에서도 할 소리를 하신 무서운 스님이셨지만,
또 한편으로는 천진무구한 소년 같은 분이셨다.
특히 제자들이 다 보는 앞에서 어린이처럼 손짓 발짓으로 춤을 추며
‘누름갱이 노래’를 부르실 때는 모두들 너무 웃어 배가 아플 지경이었다.
“오랑께루 강께루/ 정지문뒤 성께루/
누름개를 중께루/ 먹음께루 종께루.”
우리나라 불교계에서 첫 째 가는 선객이신 만공선사는
또한 타고난 풍류객의 끼를 지닌 멋쟁이 스님이셨다.
1930년대 중반, 운현궁에 있던 의친왕(義親王) 이강(李剛)이
민공 스님께 귀의하면서 그 신돌(信)로 스님께서 원하시면
무엇이든 한 가지 드리겠다고 말했다.
그러자 만공스님은 주저 없이 운현궁에 내려오는 거문고를 달라고 하였다.
이 거문고는 고려 때 것으로 역대 왕조의 임금들 가운데서
가장 풍류를 즐겼던 공민왕이 신령한 오동나무를 얻어 만든 신품명기(神品名器),
조선왕조 대대로 전해 내려오며
대원군을 거쳐 의친왕에게 전해진 가보중의 가보.
통근 의친왕은 약속을 지키기 위해
이 거문고를 밤중에 수채구멍을 통해 내보내
선학원에 머물고 계신 만공스님께 전하게 했다.
만공스님은 이 보물같은 거문고를 소림초당에 걸어두고
명월이 만공산하면 초당앞 계곡에 놓인 갱진교에서
현현법곡(泫泫法曲)을 타면서 노래를 불렀다.
“흐르는 물소리는 조사의 서래곡이요
너울거리는 나뭇잎은 가섭의 춤이로세.”
“주인공아 정신 차려 살필 지어다”
만공스님은 당신 스스로에게는 물론 제자들에게 늘 당부하셨다.
“주인공아, 정신 차려 살필지어다.
나를 낳아 기르신 부모의 은혜를 아느냐?
모든 것을 보호하여주는 나라의 은혜를 아느냐?
모든 씀씀이를 위해 가져다주는 시주의 은혜를 아느냐?
정법을 가르쳐주는 스님의 은혜를 아느냐?
서로 탁마하는 대중의 은혜를 아느냐?
이 더러운 몸이 생각 생각에 썩어가고 있음을 알고 있느냐?
사람의 목숨이 호흡사이에 있음을 알고 있느냐?
중생이 가이 없는지라 서원코 건져야할 것이며,
번뇌가 다함이 없는지라 서원코 끊어야할 것이며,
법문이 한량이 없는지라 서원코 배워야할 것이며,
불도가 위 없는지라 서원코 이루어야 할 것이니라.”
해방된 이듬해인 1946년 10월 20일 아침,
만공스님은 목욕 단좌한 후 거울에 비친 당신의 모습을 보고
거울속의 만공에게 마지막 이별을 고하였다.
“여보게, 자네와 내가 이제 이별할 때가 되었네 그려….”
윤청광/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