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윷놀이의 기원 |
지금에야 어디서든 가로 세로 3cm의 공간만 확보할 수 있으면 고스톱판이 벌어지지만, 얼마 전만 해도 화투는 명절에 가족 친지를 더불어 치는 게 고작이었다. 더구나 그것도 수천 년을 이어 온 우리 고유의 민속 놀이의 인기를 당하지 못했으니 그것은 바로 윷놀이다.
윷놀이의 놀이 방식을 모르는 사람은 없어도 그것의 기원은 모르는 사람이 많다. 한자로는 척사희(擲柶戱), 또는 그냥 사희라고도 쓰는데 윷놀이는 우리 민족만의 놀이이므로 한자어 표현따위는 아무 상관없다. 윷판을 보면 퍼뜩 떠오르는 숫자가 있다. 그것은 5다. 사방과 한 가운데를 합쳐 다섯이 되기도 하고, 도, 개, 걸, 윷, 모를 합쳐도 다섯이 된다. 이것은 원래 고조선의 행정 편제였다고 전한다. 고조선은 전국을 동, 서, 남, 북, 중의 5부로 나누고 각 부를 중앙의 5가(加, 김가, 박가, 할 때의 哥와 같다)가 각각 맡아서 다스리는 부족 연합 체제였다. 전시에는 행정 편제가 그대로 5군이 되어 동, 서, 남, 북, 중군이 되는 식이었다.
그 5가의 성이 곧 도, 개, 걸, 윷, 모다. 당시만 해도 완전한 농경 사히라기보다는 수렵 사회의 흔적이 남아 있었으므로 동물 이름을 따서 사람의 성에 붙이는 경우가 많았다. 도(刀)는 돼지, 개(介)는 개, 윷(兪)은 소, 모(毛)는 말이었다. 물론 도, 개, 걸, 윷, 모의 한자 표기는 이두자다. 도는 지금도 종돈을 씨돝이라 하듯이 돝에서 나온 말이며, 개는 발음 그대로 개, 유는 소의 옛 이름이었으며, 모는 말의 음역이었다.
다만 윷놀이에 어울리지 않게 걸인을 뜻하는 '걸'을 명확히 해명되지 않고 있다. <삼국지>(진(晋)나라 진수가 편찬한 역사서로서 많이 알려진 소설 삼국지와는 전혀 다른 책이다.) 위지 동이전에 따르면, 부여에서는 여섯 가지 가축으 이름으로 관직명을 정했다고 되어 있으며, 그 관직명으로는 마가, 우가, 저가, 구가, 대사, 대사자, 사자를 들고 있다. 대사의 '대(大)'자를 뜻으로 읽어 '큰,클'이 걸로 표기되었다는 추측도 가능하다. 나중에 발해를 건국하는 대조영의 아버지 이름도 한자 표기로는 걸걸중상이라 한걸 보면 '대' 와 '걸'은 밀접하 관계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부여의 여섯 가지 가축에는 양과 낙타도 들어가므로, 이점에 착안하여 걸을 양으로 보기도 한다. 숫양을 가리키는 한자어로 결이라는 말이 있으며, 거세한 양을 가리켜 갈이라 하기도 한다. 이 결이나 갈이 변해 걸이 되었다는 주장이다. 걸을 양으로 보면, 도, 개, 걸, 윷, 모의 순서는 해당 가축의 뛰는 속도에 따른 순서가 되므로 일리가 있는 듯하다.
윷판에는 모두 스물아홉 개의 동그라미가 있다. 조선 선조 때의 문인 김문표는 "가운데 동그라미는 추성(북극성)이고 나머지 스물여덟 개의 동그라미는 28수(별자리)를 나타낸다"고 풀었는데, 조선조의 실학자인 이익도 윷놀이를 고려의 풍속으로 잘못 보았으니 조선 시대라고 해서 지금보다 정확히 알았다고만 볼 수는 없다. 다만 예부터 윷놀이는 정초부터 대보름까지만 노는 놀이였으므로 새해 농사와 관련이 있었을 것이고, 따라서 천문과 관계가 있다고 볼 수는 있겠다. 윷놀이 외에도 조상들은 정초에 윷을 던져서 윷점을 쳐 새해의 운수를 알아보기도 했다. 오늘날 화투가 하는 모든 역할을 윷이 한 셈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