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KEDO)가 1일(한국시간) 북한 함경남도 금호지구(신포) 경수로 사업의 공식 종료를 선언함에 따라 대북 경수로 사업이 대단원의 막을 내리게 됐다.
1995년 12월 KEDO와 북한간 경수로 공급협정이 체결된 후 10년 6개월, 1997년 8월 착공식을 가진 후 8년 10개월 만이다.
이른바 제1차 북핵위기를 봉합하는 북미 기본합의(제네바합의)에 따라 탄생한 KEDO 경수로가 함남 금호지구에 흉물스런 콘크리트 덩어리만 남긴 채 그 생을 마감한 것이다.
그동안 한국은 11억3천700만달러, 일본은 4억700만달러, 유럽연합(EU)은 1천800만달러의 공사비를 투입했으며 최종 공정률은 34.54%다.
KEDO 경수로 사업은 1차 북핵위기의 해소를 위해 시작돼 2002년 10월 북한의 고농축우라늄(HEU) 핵프로그램 개발 의혹을 계기로 종말의 길을 걸어왔다.
시작과 종말은 참으로 쉽지 않은 과정이었다.
KEDO 경수로는 북한이 핵시설을 동결하는 대신 2003년까지 100만kW급 경수로 2기를 제공하고 그 완공 전에는 대체에너지로 중유를 제공한다는 데 북미가 합의하면서 선을 보였다.
그러나 이러한 제네바 합의 과정에 우리나라는 사실상 배제되면서 불공평한 조건을 안게 된다. 북핵문제 해소라는 대의와 미국의 압력으로 우리나라는 46억달러에 이르는 경수로 건설부담의 70%를 지게되면서도 대북 영향력은 전혀 갖지 못하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발생했던 것.
당시 김영삼(金泳三) 대통령은 "핵 가진 자와는 악수할 수 없다"며 북한과 대립각을 세워 화해를 모색하는 미국과는 달리 대북 강경노선을 유지했다.
사실 제네바 합의 당시의 미국내 사정도 순탄한 것만은 아니었다.야당인 공화당이 핵동결의 대가로 중유와 경수로 제공은 부당하다며 클린턴 행정부를 강하게 비난했던 것.
결국 KEDO 경수로를 출산한 제네바 합의에 종말의 씨앗도 함께 배태됐던 셈이다.
공사 착공도 난산 그 자체였다.
1994년 10월 제네바 합의후 1995년 치열한 협상을 통해 경수로 발전소의 핵심인 원자로와 관련, 한국 표준형을 쓰는 쪽으로 가닥을 잡아나갔고 그 해 12월에야 KEDO와 북한이 경수로제공협정에 서명하면서 구체화됐다.
이어 1997년 8월4일 금호지구 현장과 주계약자인 한국전력 사이에 8회선의 전용 선이 개통된 데 이어 같은 달 19일에는 북한의 허 종 외교부 순회대사와 장선섭 경 수로기획단장, 스티븐 보즈워스 KEDO사무총장 등이 참석한 가운데 착공식을 갖게 된다. 제네바 합의후 꼭 3년만이다.
착공후 2000년 10월에는 속초와 함경남도 양화항을 잇는 정기선이 다니기 시작했고 2001년 3월부터는 우즈베키스탄의 노무인력을 투입해 그 해 8월 정지공사가 마무리됐다.
이어 2002년에는 금호항 및 여객터미널 공사가 종료됐고 금호병원이 준공되는 등 기반시설이 제 모습을 갖춰가고 1호기의 콘크리트 타설작업이 시작되는 등 순항하는 듯 했다.
그러나 2호기에 콘크리트 타설을 시작한 다음 달인 2002년 10월 재앙이 닥쳤다.
제임스 켈리 당시 미국 특사의 방북과정에서 북한이 고농축우라늄(HEU)계획을 시인했다는 미국측 발표를 기화로 제2의 북핵 위기가 불거지면서 경수로 사업이 뿌리째 흔들리게 된 것이다.
이는 그 이전인 1996년 강릉앞바다 잠수함 침투사건, 1998년 8월 북한의 이른바 '대포동 1호 미사일' 발사, 1998∼1999년 금창리 지하핵시설 의혹 등의 악재와는 그 성격이 근본적으로 달라 경수로 사업 자체를 재검토하는 국면으로 이어졌다.
특히 북한의 HEU 핵 개발의혹은 그렇지 않아도 경수로 제공에 부정적이던 미 공화당 정권에 '경수로 불가론'에 힘을 실어주는 직접적인 계기가 됐다.
미국의 의혹제기에 북한은 터무니없는 주장이라고 맞서면서 양국간 대결 양상으로 이어졌고 그로 인해 한반도 긴장은 높아만 갔다.
KEDO는 2002년 11월14일 제네바합의에 따른 미국의 대북 중유공급을 중단하고 경수로사업을 재검토하기로 결정했고 북한은 이에 12월12일 핵동결 해제를 선언하고 이듬 해 1월10일에는 핵무기비확산조약(NPT) 탈퇴를 선언했다.
그 때문에 KEDO는 2003년 2월부터 공사속도를 늦췄고 북핵 문제의 진전이 없자 그 해 11월에는 12월부터 1년간 공사중단(suspension)에 들어가기로 결정했고 이에 북한도 전격적으로 반발해 금호지구의 장비, 설비, 자재와 기술문건의 반출을 불허하며 보상을 요구하고 나섰다.
KEDO는 일단 2004년 11월 공사중단 조치를 1년간 연장했다.
그러나 당시에도 미국은 사업의 완전종료를 노골적으로 밝혀 이런 연장조치는 인공호흡기에 불과한 것으로 평가됐다.
현장인력의 감축은 이 때부터 시작됐고 공사는 사실상 전면 중단됐다.
그런 후 작년 9월 북핵 6자회담 공동성명에 KEDO 경수로 대신 200만kW 전력을 북한에 직접 송전하려는 우리 정부의 계획인 '중대제안'이 포함되면서 사업종료가 구체적으로 예고됐고 지난달 31일(현지시간) 집행이사국 간에 청산방법이 최종합의돼 마침표를 찍게 됐다.
그러나 KEDO 경수로 사업 종료라는 엄청난 결과를 초래한 HEU 공방은 아직까지 주장만 있고 실체는 없다.
북한은 여전히 HEU 핵프로그램은 아예 없었고 그럴 의지도 없다는 입장인 반면 미국은 증거를 제시하기보다는 북한 스스로 밝히라고만 할 뿐이다.
달러화로 계산할 때 총 비용이 46억달러인 KEDO 경수로는 북한이 공사가 완공된뒤 3년 거치후 17년에 걸쳐 분할상환한다는 게 계약 조건이며 이를 바탕으로 한 회수 가능비용은 7억달러 가량에 불과해 '대차대조표'를 만든다는 것은 애초부터 불가능하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그러나 반세기 동안 대결로 치달아온 한반도 정세가 KEDO 경수로사업을 계기로 남과 북이 서로를 들여다볼 수 있게 됐고 특히 우리나라가 북한의 경제난과 식량난을 확인하고 적극적인 대북정책을 추진하는 계기가 됐다는 점에서 정치, 외교, 사회적인 효과가 경제적 손실을 상계하고도 남는다는 분석도 있다.
사실 경수로 공사가 본 궤도에 오르면서 2000년 6.15 남북 정상회담이 열렸고 그 결과로 남북경협이 시작돼 금강산 관광과 개성공단 사업의 단초가 마련됐고 그 런 과정을 통해 10여년간 한반도가 안정적으로 관리되는 등 새로운 남북관계가 열렸다는 평가도 나오고 있다.
KEDO 경수로 사업을 경제적인 손익만으로 따질 수 없는 까닭이 여기에 있어 보인다.
그럼에도 굳이 손익을 따지자면 경수로 제공의 기회를 상실한 북한과 15억6천200만달러의 공사비를 쏟아부은 한국, 일본, EU 등의 집행이사국이 모두 큰 손실을 입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경수로 건설비용 가운데 70%를 부담키로 하고 11억3천700만달러를 투입한 우리나라의 경우 그 재원이 세금이었다는 점에서 국민들의 상실감이 가장 클 것으로 보인다.
이와는 달리 결과물 없는 사업이었지만 비용은 꼬박꼬박 지불됐다는 점에서 주 사업자인 한국전력과 원자로 및 발전기 설비 제조에 참여했던 웨스팅 하우스, 히다치, 도시바 등 미국과 일본 등의 업체는 사업이익을 챙겼다고 할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