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9에 왜 우리는 이렇게 우울한가
2010년은 새해가 밝기가 무섭게 경술국치 100주년, 6.25한국전쟁 60주년, 4.19혁명 50주년,
광주민주항쟁 30주년이 되는 해라고 떠들썩했다.
그 여러 기념일 중 가장 먼저 4.19가 다가왔는데도 정작 4.19혁명을 되새겨 보려는 움직임은
거의 눈에 띄지 않는다. 반면에 6.25한국전쟁을 각기 자신들의 시각에서 돌이켜 보려는
시도는 일찍부터 경쟁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4.19는 우리 모두의 관심과 기억에서 사실상
실종된 상태다. 그것이 반드시 천안함 사태 때문일까.
적어도 1980년대까지만 해도 많은 사람들에게
4.19는 그 말만 들어도 가슴이 벅차오르게 하는 날이었다.
그 날을 못 잊어 해마다 4월이면 대학가에서는 4.19 제 몇 선언문이 나왔고
30여년에 이르는 군부독재의 전 기간에 걸쳐 한번도 4월은 조용히 넘어가지 않았다.
그래서 해마다 4월은 '잔인한 달'이 되었다.
5공 초에는 군산의 한 고등학교 교사들이 4.19와 같은 역사적인 날이 소리 없이 넘어가는
것을 안타까이 여겨 소나무 아래서 4.19영령들에게 술 한 잔 올리고 그 앞에서 자신들의
무력함을 반성했다. 그것이 국가보안법상의 반국가단체를 구성한 것으로 조작되어
온갖 고초를 다 겪었다. 4.19란 말은 반민주의 다른 한편에게는 금기였던 것이다.
한국 민주주의의 대장전
수유리 4.19혁명탑에 쓰여 진 비문은 다분히 애상적이다.
1970년대 아직은 열혈청년이었던 백기완은 4.19영령들을 향해 당신들에게 혼백이 있으면
돌아와 탑을 부수라고 울부짖었다.
4.19 영령들이야말로 수유리 산골짜기에 유폐되어 산새나 진달래와 벗하고 있어서는 안 된다,
그 탑을 부수고 나와 4.19때 그랬던 것처럼
광화문 네거리에서 유신독재와 맞서 싸워야 한다는 것이었다.
1982년 부산미문화원 방화사건 때 한 여학생은 그의 최후진술은
"해마다 사월이 오면/ 접동새 울음 속에 / 그들의 피맺힌 하소연이 들릴 것이요/
해마다 사월이 오면 / 봄을 선구하는 진달래처럼 /
민족의 꽃들은 사람들의 가슴마다에 피어나리라"
로 시작하여 온 방청석의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다. 나도 그 자리에 있었다.
4.19는 비록 글로 되어있지는 않지만 이 나라 민주주의의 대장전이요, 대헌장이다.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국민이 인간답게, 인간으로서의 권리와 존엄을 가지고
자기를 실현할 수 있는 삶의 정치사회적 조건을 말한다.
민주주의는 궁극적으로 국민이 원하지 아니하는 정치권력을 폐지할 수 있는 국민의
혁명권을 담보로 하여 존립한다. 4.19는 우리 역사에서 처음으로 국민이
혁명권을 발동하여 국민이 원치 아니하는 정치권력을 폐지시킨 장엄한 국민혁명이었다.
피로 쓴 역사만큼 장엄한 헌장은 없다. 4.19가 바로 그 헌장이요, 기념비인 것이다.
인도의 네루는 프랑스 혁명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이렇게 표현했다.
"프랑스 국민은 기적을 이루었다. 그러나 혁명의 힘이 탕진되자 반혁명이 나타났다.
그리고 다시 독재자 나폴레옹이 나타났다. 그러나 반혁명도 나폴레옹도 시민의 역사를
옛날로 되돌려 보낼 수는 없었다."
혁명이란 당장의 성과보다도 그것이 제시하는 역사의 방향성과 상징성에서 찾아야 한다.
이념의 이정표와 기념비적인 상징을 혁명이라고 한다면,
4.19는 명백한 민주주의 혁명, 바로 그것이었다.
4.19혁명이 있었기에 6.3사태도, 삼선개헌반대투쟁도, 1970년대의 그 치열했던 반유신투쟁도,
1980년대의 광주민주화운동도, 그리고 마침내 민주주의를 쟁취한 6월 항쟁도 있을 수 있었다.
4.19혁명이 있어서 비로소 이 땅의 '민주화'가 가능했다고 말할 수 있다.
그것이 있었기에 대한민국이 민주주의 길로 자기정체성을 확립할 수 있었다.
북한이 적색독재에 머물러 있음에 반하여 대한민국이 민주주의를 향유할 수 있게 된 것도
원류를 거슬러 올라간다면 백색독재를 무너뜨린 4.19혁명에 가 닿는 것이다.
긍지와 자부와 훈계이거늘
4.19혁명 그 자체로 우리는 자랑스러웠다.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최초의 긍지와 자부심을 갖게 한 것이 바로 4.19혁명이었다.
"한국에서 민주주의를 바라는 것은 쓰레기통에서 장미꽃을 구하는 것과 같다"고 했던
외국 언론은 4.19혁명이 성공한 뒤
"한국인들은 자유로운 정부를 향유할 수 있다는 사실을 스스로 증명했다"고 썼다.
그때 우리는 이렇게 노래했다.
"미국인이 물으면/ 서구인이 물으면/ 쿠바인이 물으면/ 우리는 이렇게 대답하리라/
1960년 4월/ 맨몸으로 독재정권을 무너뜨린 대한민국의 청년학생이라고…"
4.19는 나이어린 초등학생에서 백발이 성성한 노교수에 이르기까지
이 나라 온 국민이 참여해서 성공시킨 국민혁명의 원전이었다.
4.19혁명은 온 국민의 애국심이 결집해서 만들어낸 위대한 역사였다.
초등학생도
"나는 알아요/ 엄마 아빠가 아무 말 안 해도/ 오빠와 언니들이 왜 피를 흘렸는지" 했고,
한 여대생 아버지는 데모에 참여하지 않은 딸에게 이런 편지를 썼다.
"내가 네게 바라는 것은 '비굴한 행복'보다 '당당한 불행'을 사랑할 줄 아는 여성이
되어지이다, 하는 간절한 마음이었다. …서글픈 일이다. 분한 일이다….
총탄에 넘어진 아들딸을 가진 부모들의 비통함보다 털끝하나 옷자락하나 찢기지 않은
너를 딸로 가진 애비의 괴로움이 더 크고 깊구나"
4.19혁명은 오늘도 우리에게
"자유와 민주의 나무는 시민의 손으로 심어지고, 시민의 피로 양육되며,
시민의 칼로 수호되지 않으면 존립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국민의 혁명권은 항상 깨어있어야 한다는 것을 일깨워주고 있다.
나는 4.19영령들이 돌아와 탑을 부수기까지는 바라지 않지만, 나라의 상징거리요
4.19혁명의 현장이었던 광화문 네거리에 4.19민주혁명탑이 서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4월의 하늘은 이렇듯 청명한데
4.19혁명 50주년을 맞이하는 우리네 심사는 왜 이리 우울하고 스산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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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은 김정남 선생이 419를 맞아 다산포럼에 기고한 글이다.
범초의 절절한 마음을 그대로 대변하고 있다.
경북고등 재학 시 228데모를 감행한 당시의 그 정의감,
불의에 대한 분노는 다 어디로 갔는지. . .
연이나 당시의 주역들은 대부분 잘 나간다는 TK의 삶을 살아왔다.
이제 그들은 이 세상의 비참한 민중들의 삶에는 아예 관심도 없어 보이고,
나아가 그런 못 살고 가난하고 추위에 떨다 못해, 말 한 마디 하며 데모라도 할라치면
바로 적대시하는 그들이 되어 있질 않은가.
그들에겐 용산참사사태는 강 건너 불이요, 참교육을 부르짖는 전교조를 비롯해 노동조합은
백해무익한 이 나라 발전의 암적 존재요, 나아가 빨갱이 집단이 아닌가 하는 게
그네들의 솔직한 심정일 게다. 한 세상 다 산 노인네들이 되어서일까.
어디 그 뿐인가,
유신시절 데모 좀 했다고 장가도 못 간 채 사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동기동창 옛 친구도
평생 외면해 온 그네들이 아닌가. 참으로 놀라운 인간성, 인격의 완성자(?)들이다.
이들 대부분이 소위 TK라는 출세영달의 달인이 되어있는 나의 중고등 동문들이 아닌가.
또한 그네들은 이 사회를 아직 쥐락펴락 하고 있질 않은가.
그들은 매년 이맘때가 되면 말로는 419정신을 마지못해 입에 올리기는 하지만,
실제 419기념행사가 귀찮고 419혁명의 <혁명>이란 말도 못 마땅할 것이다.
잘 먹고 잘 사는데 아직도 무슨 혁명이니 민주항쟁이니 하는 말 자체가 거북스러운
이 사회의 원로 지도층이 되어 있는 것이다. 보수 아성의 성주들이라 할 것이다.
학창시절 그 총명하고 공부 잘하고 분별력 있고 정의감에 불타 228이란
소위 <데모>를 한민족 5천년 역사상 최초로 감행하여 419혁명의 도화선이 된 주역들,
516“쿠데타”군사독재에 반대하여 대학에 진학해서도 63사태를 주도하여 그 후의
80년대 민주화 대장정에 심대한 영향을 주었던 그네들이 아니었던가.
그 고귀한 인간성과 실천력은 다 어딜 가고 자신의 가족과 보신을 위해서는
모든 정의로움에 외면하는 지독한 이기심만이 이 나이까지 팔팔하니,
이게 어찌된 일인가.
그 원인은 딱 하나,
516“쿠데타”주역들의 무자비한 419혁명정신과 민주세력의 말살에 있다.
자유당독재에 항거하며 419혁명까지 추동했던 영민한 TK들 조차 고문과 투옥과
사형장으로 끌려가는 게 겁나게 만들었다. 수 많은 정보요원과 폭력을 동원하여
사소한 사건도 침소봉대, 조작하여 사람을 못 쓰게 만든 세월이 하 길었다.
나부터 겁먹어 늘 숨어살다 시피 하질 않았던가.
516“쿠데타”주역들이 구슬리며 씌워주는 감투가 좋았고 폭탄주에 취해
작부들 데리고 노는 재미가 좋았다. 취생몽사하는 게 좋았다.
뇌물 받는 게 좋았고 정경유착이 최고의 능률이 되는 게 좋았다.
민주니 정의니 민족이니 통일이니 박애니 하는 구호를 공허한 메아리라 치부하고
공사판 십장이 되어 공장장이 되어 공돌이 공순이를 닦달질 하고
새마을 운동의 기수가 되어 <우리도 한 번 잘 살아보세!>라는 구호에 모든 덕성(德性)이
함몰되어 갔다. 소위 산업화의 역군이라는 말에 모든 정의감은 죽었고
민주주의는 한국식으로 해야 한다는 말에 모두가 숨까지 죽였다.
살인과 고문의“리더십”에 철저히 복종하며 아부했다.
하라면 해야 하는 군대식 문화와 총칼의“룰”에 억눌려 모든 모순과 부조리를
합리적 인간적으로 해결하려는 처방전은 바로 권위에 대한 반항으로 간주되었다.
이렇게 세상은 한 목소리 일방통행이었고 한 통속에 몰아 넣는 획일화된 사회였다.
이런 분위기에 영민한 TK들은
그 누구보다 재빨리 영합하며 출세와 돈벌이의 가도를 신나게 질주해 오질 않았던가.
그런 장구한 세월에 타성이 붙어 양심이니 인간성이니 사회정의니 역사니 하는
생각 자체가 귀찮아지고 으레 세상은 그렇게 즐기며 사는 거라며 뻔뻔해 지질 않았던가.
허나 이제 늦은 나이지만 그래도 반성할 때가 되질 않았는가,
꼭 군대식으로 해서 산업화가 빨랐단 말인가,
꼭 데모도 없고 노동조합도 없어서 경제발전이 빨랐던 것일까,
516“쿠데타”세력만이 산업화를 이룩할 수 있었단 말인가,
419의거와 같은 민주함성을 잠재우는 것만이 잘 살게 되는 지름길이었단 말인가,
산업화 경제발전이라는 게 근로자의 피땀 없이 과연 가능했을까,
사치와 방종을 일삼으며
악어의 눈물을 보이는 게 탁월한 통치법, 경영기법이란 말인가,
419혁명직후의 민주당 정권은 과연 산업화나 경제발전에 대한“비전”이 없었단 말인가,
소위 산업화세력이란 말이 성립이나 될 수 있는 걸까,
우리 사회에 민주화세력 따로 산업화세력이 따로 존재한단 말인가,
인간성 감성이 이렇게나 메말라 가면서“구찌”핸드백 들고 다니면 과연 잘 사는 것일까,
이런 회고와 반성이 못 마땅하다면 민주주의를 하지 말자는 말인가,
유신독재의 추종자들이여,
이승만 독재를 무너뜨린 419혁명이 잘못된 일이란 말인가,
이제 유신과 군부독재시절 수혜받은 향수에서 깨어날 때가 되질 않았는가,
자신들만의 세계에서 즐기며 놀기만 하다가 느닷없이 튀어나와 호통쳐 봐야
저만치 앞서가는 젊은 세대들에게 수구꼴통이란 소리 듣기 십상일 것이다.
나이가 들어갈 수록 시시각각 변해가는 시대적인 상황에 따라
올바르게 생각할 줄 알아야 할 게 아닌가, 그런 노력을 해야 할 게 아닌가.
그래서 후세들에게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에서 나오는 올바른 식견과 삶의 방향을
일러주어야 할 게 아닌가. 반성할 게, 앞날에 대한 걱정, 자식들의 장래 . . .
이런 의문이 수도 없이 많으니 419혁명 50주년을 맞는 감회가 나와 같은
또 다른 TK들, 또 다른 많은 419혁명 세대들은 김정남 선생 말대로
<우리네 심사가 우울하고 스산할 수밖에!> 없는 일이다.
범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