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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시에/시에문학회 원문보기 글쓴이: 김창식
드러난 악과 숨겨진 악의 길항(拮抗) 대립
- 영화 <이끼> 작품론
1. 왜 새삼 <이끼>인가?
왜 작년에 상영된 이끼를 거론하는가? 윤태영의 웹툰 원작을 강우석 감독이 연출한 <이끼>는 사실 '절반의 성공'을 거둔 작품이었다. '절반의 성공'은 '절반의 성과'를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노력한 흔적이 엿보이나 기대에 미치지 못함을 에둘러 표현하는 레토릭이다. 그럼에도 새삼스레 <이끼>를 거론하는 이유는 작년 7월 이후 올해 10월 말 현재 상영된 영화를 통틀어 그나마 <이끼>만큼 '잘 만든(well-made)' 영화가 없었음에 연유한다.
같은 기간 동안 화제가 됐거나 일정 부분 흥행에 성공한 영화의 면면을 떠 올려보면 그러한 느낌이 더욱 짙어진다. <악마를 보았다>, <아저씨>, <시>(별도로 거론해야 하지만), <하녀>, <만추>, <써니>, <고지전>, <퀵>, <7광구>, <최종병기 활> 등. 감독의 야심찬 기획 의도, 주제에 대한 진지한 천착, 주‧조연 배우들의 치열한 연기, 정교한 미장센과 디테일, 관객에게 준 임팩트 면에서 이끼를 넘어서는 영화가 없었다는 것이 필자의 관점이다.
<이끼>가 그다지 성공한 영화가 아니었음은 모두에 밝힌 바다. 승부사 강우석 감독이 '두 마리 토끼(작품성과 흥행 성공)'를 잡으려 작심하고 만들었지만, 영화는 감독의 변신 가능성(음산한 분위기의 외진 마을과 지하 땅굴의 세팅 재현 같은, 조형성이 돋보이는 미장센)을 보여주는 한편 한계(인과관계의 모호함과 치밀함을 결한 차연의 서사구조)를 노출한 씁쓸한 노작(勞作)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영화 상영을 전 후해 입소문을 탄 초반 분위기는 좋았다. 그러다 관객과의 초반 밀월기간이 끝나는 시점에 영화는 웬일인지 동력을 잃고 추락했다. 최고의 흥행감독 중 한 사람인 강 우석에게 337만이라는 성적은 만족할만한 수치가 아니었다. 영화의 완성도와 감독의 능력을 두고도 의견이 첨예하게 엇갈렸다. 초기의 호의적 시선이 거두어지고 영화는 서서히 일반 대중의 관심권에서 멀어졌다. 그렇다면 영화에 미덕과 특장(特長)이 없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영화는 나름 인간의 내면에 드리운 악의 뿌리를 들추고 관객에게 인간의 구원에 대한 둔중하고도 묵시론적인 질문을 던져주었다.
2. 내러티브 구조
서술트릭과 사건트릭
범죄 스릴러인 이끼가 예상 밖으로 고전한 원인을 찾기 위해서는 전체적인서사구조와 함께 트릭의 설정과 활용기법을 살펴 볼 필요가 있다. 미스터리 물에 사용되는 트릭은 관객의 호기심과 몰입을 견인하는 핵심적 장치다. 트릭은 상이한 카테고리에 의한 분류가 가능하며, '사건트릭(occasional trick)'과 '서술트릭(narrative trick)'이 대표적이다.
'사건트릭'의 대종은 정통 추리물에 사용되는 기법이다. 범죄현장에 남겨진 단서를 토대로 사건의 경과에 따라 진실에 접근하는(이를테면 알리바이를 깨뜨린다거나) 익숙한 방식이다. 등장인물과 관객의 정보가 일치한다. 범인은 의표를 찌르는 뜻밖의 인물로 판명 날 때가 많다. 다른 흐름은 TV 시리즈물 <형사 콜롬보>에서 보듯 범죄 동기나 행위를 먼저 보여주고 범인의 정체가 드러난 상태에서 범죄 사실을 밝혀내는 포맷이다. 관객이 주인공보다 풍부한 정보를 갖춘 상황에서 주인공과 범인의 대결구도를 감상한다. '누가?' 보다는 '어떻게?'를 중심으로 지적인 심리게임이 펼쳐지는 것이다.
또 다른 경향은 서사의 배후에 자리하거나 최후의 순간에 속임수가 드러나는 '서술트릭'이다. 독자의 예상은 빈번히 빗나가며 때로 짐작할 수조차 없다. 탐정(주인공, 독자)대 범인뿐 아니라 독자 대 작가의 대결이라는 중층적 층위에서 서사가 진행된다. 대표적인 예를 아가타 크리스티의 소설을 원전으로 한 영화1)에서 발견할 수 있다. 범인은 복수(다자), 서술자(나‧분신), 서사의 중간에 탈락해 애초에 혐의를 벗어난 사람이다. 또는 이 모든 것이 꿈이었다거나. 이런 유의 이야기 구조에서 사용한 기법이 '서술트릭'이며 허무한 결말로 이어지기 십상이다. 놀람은 강렬하지만 일회성에 그치고 진지하지 못한 인상을 줄 우려가 있다. 상상을 뛰어넘는 결말은 <식스 센스(The Sixth Sense)>, <디 아더스(The Others)> 등의 영화에서 그 예를 찾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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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아가타 크리스티가 사용한 기법이 대표적. 오리엔트특급 살인사건(복수의 범인), 아크로이 드 살인사건(화자가 범인),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이야기 흐름에서 제외된 자가 범인) 등.
'패'를 내보인 '패착'
<이끼>는 미스터리 스릴러의 외양을 답습하되 스토리 전개에서 '사건트릭' 중 두 번째 방식인 인과관계(마을의 비밀)를 먼저 보여주는 '선결후론'의 구조를 취했다. 속도감 있게 전개되는 영화의 도입부는 블록버스터 감독의 위용을 보여주듯 매우 인상적이다. 수십 년 전에 일어난 핵심적인 사건(기도원에서의 전도사 유목형의 행적과 당시 경찰인 천이장과의 재산을 둘러싼 반목과 기이한 결합)의 자초지종을 보여준 후 유목형의 아들 유해국이 아버지의 돌연한 죽음 소식을 듣고 일견 평화로워 보이는 마을을 찾아오는 시점에서 본격적으로 이야기가 시작된다.
장례를 마친 유해국에게 천 이장을 비롯한 마을사람들은 대놓고 적의를 드러내며 마을을 떠나라고 강요한다. 의혹을 품은 해국은 아버지의 죽음과 관련한 마을의 비밀을 추적한다. 그 과정에서 아버지가 마을 사람들로부터 전답을 헌납 받았고, 그 재산이 한 순간에 천 이장에게 양도된 것을 알게 된다. 나아가 기도원 수용자들의 떼죽음과 아버지, 천이장의 관계가 얽혀있는 것을 눈치 챈 해국에게 죽음의 위협이 조여 온다. 문제는 결론에 해당하는 부분을 도입부에 설정함으로써 저간의 사정을 이미 알고 있는 관객은 성원하는 주인공보다 더 많은 예비지식을 갖고 출발 선상에 서게 됐다는 점이다. 관객은 오히려 주인공과 대척점에 서는 인물들과 정보를 공유한다.
스릴러에서 관객과 주인공의 정보가 일치하지 않는 것은 위험하다. <이끼>는 범인과 두뇌싸움을 벌이며 정교한 추리로 트릭이나 범죄 방법을 밝혀내는 지적 프로세스에 방점을 찍는 추리물이 아닌, 액션이 가미된 스릴러다. 감추어진 비밀의 단서를 제공하는 인과관계를 굳이 프롤로그에 배치할 필요가 있었을까? 결론 부분을 먼저 보여주고 사건의 진실을 추적하는 형태를 취하려면 사건의 개연성은 물론 후속 사건과 선행 사건의 이음새가 촘촘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맥 빠진 분위기로 내용이 진행될 수밖에 없다.
할리우드의 위대한 고전인 오손 웰스의 <시민 케인(Citizen Kane‧1941)>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영화사적으로 갖는 각별한 의미는 제쳐두더라도 미스터리 기법을 차용한 내러티브 구조는 탁월함이 있다. 영화는 찰스 케인이 '로즈버드(rosebud‧장미꽃 봉오리)'라고 중얼거리며 죽는 오프닝으로 시작해 관객의 호기심을 자극한다. 일종의 퍼즐이자 삶의 모호성에 대한 기호로 간주되는 '로즈버드'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분명치 않다. 영화의 스토리가 진행되는 동안 줄곧 관객의 관심과 흥미를 견인하며 마지막에서야 '로즈버드'가 주인공이 어렸을 적 애지중지하던 '썰매 이름'이라는 것이 밝혀져 진한 여운이 남고 관객의 연민어린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강우석 감독은 웹툰의 각색 과정에서 결론 부분을 의도적으로 초기에 배치하여 '패'를 먼저 내보이는 무리수를 두었다. 긴장의 밀도는 현저히 떨어지고 이미 내용을 짐작하는 관객은 "아, 그랬었구나!" 식의 감탄이 아닌, "근데 왜 저러는 거지?" 하는 답답함을 느낀다. 애써 모른 체하며 '관목 숲 주위를 두드리는' 격이다. 느릿느릿 흘러가는 2시간 40분에 달하는 러닝타임도 비상업적 요소다. 긴 상영시간이 불러올 수 있는 '산만(distraction)'의 위험 요소를 떨쳐내지 못했다. 뒤 부분에 위치하는 핵십적인 에피소드의 전진 배치와 지연되는 서사의 흐름이 영화 흥행에 부정적 요인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반전과 열린 결말
느린 흐름의 영화가 웹툰과 차별화에 성공한 대목은 '점방 여자' 영지(유선)에 대한 가중치 부여다. 만화에서 영지의 역할은 미미하다. 그러나 영화에서 영지는 사건 내막을 알고 있을 것으로 추측되는 의문의 여자로 묘사된다. 영화의 마지막 시퀀스는 관객의 시선을 다잡는 뒷심을 발휘한다. 마지막 시퀀스의 대사가 제거된 몇 개의 연결 쇼트는 한층 먹먹한 울림을 전해준다.
해국은 사건이 해결되고 평온을 회복한 마을을 다시 찾는다. 마을은 새 단장되고 건물이 들어서며 활기에 차있다. 새 시대의 질서를 주관하고 응시하는 뜻밖의 시선이 있다. 천 이장이 기거하던 마을의 제일 높은 집(봉건 영주의 성채를 연상시키는 일본식 건물이다) 발코니에서 미묘한 표정으로 내려다보는 영지. 어릴 적 윤간을 당한 그녀는 천이장의 성노리개로 하수인들에게 접근해 몸을 팔면서 유목형에게 애증의 감정을 갖고 있었다. 영지와 해국의 얼굴이 캡처되며 눈길이 엇갈린다. 순간 해국에게 전화로 아버지의 죽음을 알려주던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영지가 한 겹 드리운 베일을 벗는 막판 반전은 잔잔한 수면에 돌을 던지는 파격으로 놀라움을 안겨준다. 파문은 동심원을 그리며 일파만파로 퍼져나가 객석을 술렁이게 한다. 영지의 등장은 감독이 유행하는 '열린 결말'의 형태를 취함으로써 관객에게 프레임 밖으로 말을 건네려한 것이며, 감독의 의도는 일단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영화 전편을 리플레이 해봐도 영지의 개입선이 어느 정도인지 추측하기 힘들다. 유목형의 장례식 때 영지가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것은 사소한 실수일까. 막판의 폭발적인 대반전을 위한 복선의 결여가 아쉽게 다가오는 소이(所以)이다. 천 이장에게 복속돼 있으면서도 해국을 돕는 과감한 행보를 보이는 모호한 캐릭터인 영지는 순수한 영혼의 소유자인가 교활함을 연약함과 청순함으로 포장한 파괴적 팜 파탈인가?
3. 영화의 특징, 장르의 혼합
빈번한 서부극의 관습 차용
영화의 특징적 기법으로 서부극의 관습(convention)을 차용한 점이 매우 흥미롭다. 감독(원작자도!)은 서부영화에 많은 향수를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끼>에 나오는 외따로 떨어진 일종의 한계 상황적 마을, 실세와 결탁한 무력한 공권력, 우호적이지 않은 자연환경, 마을 주민들의 암묵적인 연대는 기시감(旣視感) 있는 배치들이다. 감독의 웨스턴에 대한 애정은 감성과 향수를 자극하지만 지나치게 빈번히 사용된 참조성(referentiality)과 인유(allusionism)로 인해 한편 마음이 착잡하다.
구체적으로 느와르의 옷을 입은 웨스턴 <블랙록에서의 흉험한 날(Bad Day at Blackrock‧1955>2)과 공간배경, 등장인물, 진상을 뒤로 미루는 차연(次延)의 서사구조, 침입자(마을 사람들 입장에서 본)로 인한 질서의 교란, 이방인과 주민의 대치, 인간의 추악한 본성에 끈 닿은 범죄의 은닉 기도, 주인공 남자를 돕는 여자와 소도구(자동차)의 등장에서 놀라우리만치 닮았다. 또한 영화의 에필로그-새로운 건물의 건축, 역동적인 마을, 여자의 시선(gaze)-는 서부극에 곧잘 사용되는 시간의 경과와 새로운 질서의 도래를 상징하는 고전적인 장치들로서 <옛날 옛적 서부에서(Once Upon A Time In The West‧1968)>와 <황야의 결투(My Darling Clementine‧1946>를 떠올리게 한다.
선과 악의 구분이 모호한 인물들의 행보는 세르지오 레오네 유(類) '마카로니 웨스턴'을 생각나게 한다. 천 이장과 유목형 등의 성격은 선악으로 명쾌하게 가를 수 없다. 관객의 심정적 지지를 받는 주인공 유해국은 어리버리하고, 그를 돕는 박민욱 검사(유준상)도 선의를 숨긴 위악적 인물이며, 영지 역시 석연치 않은 인물로 묘사된다. 예컨대 <황야의 무법자(A Fistful Of Dollars‧1964)>에서 두 무리 갱 사이를 오가며 이득을 취하는 총잡이나, 스파게티 웨스턴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베라크루스(Veracruz‧1956)>의 두 주인공, 또는 <석양의 무법자 (The Good, The Bad And the Ugly‧1966)>에서의 3인방처럼 선악의 경계가 뚜렷하지 않은 불분명한 인물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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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서부극의 거장 존 스터지스 감독이 웨스턴과 느와르적 요소를 결합하여 만든 스릴러의 고 전. 장르 영화에 많은 영향을 끼침. 스펜서 트레이시, 로버트 라이언 주연.
코미디적 요소의 삽입
영지와 함께 만화에 비해 성격과 비중이 강화된 또 다른 인물은 박민욱 검사다. 그는 원래 모종 사건의 피의자인 유해국을 가해자로 만들려다 지방으로 좌천된 인물이면서도 해국과는 애증으로 얽힌 사이다. 박 검사는 해국을 체포하겠다고 윽박지르지만 마음 속 깊은 곳에서는 해국에 대한 어쩔 수 없는 우정을 감추고 있다. 해국과 검사 간에 오가는 티격태격은 '버드 무비'인 감독의 전작 '투캅스'를 연상시켜 관객에게 웃음을 유발한다. 박 검사는 결국 해국의 뜻에 따라 클라이맥스 부분에 등장하여 사건을 종결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강직하면서도 나사가 풀린 듯 산만한 박 검사는 유해국의 후원자이자 클리너인 셈이다. 천 이장 패거리 중 개인비서 격인 덕천(유해진)도 비열하면서도 연민이 느껴지는 특유의 코믹 연기를 펼친다.
스릴러에 코미디적 요소를 삽입하는 방식은 많은 영화에서 관행적으로 사용해온 기법이다. 장르의 부분적인 결합은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다. 유해국과 박 검사의 엎치락뒤치락은 영화의 또 다른 축을 이루며 덕천의 코믹 연기와 함께 이완을 통한 긴장감의 응축, 보다 큰 긴장의 도래에 대비케 한다. 그러나 보조적으로 진행되는 슬랩스틱(slapstick)이 의미를 가지려면 캐릭터를 이끄는 동인과 함께 탄탄한 스토리 전개가 우선돼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본말이 전도되어 시선이 흐트러질 우려가 있다.
주축서사가 헐거운데 비해 박 검사와 천 이장 패거리의 행태는 과장된 측면이 있고(덕천 역 유해진의 빙의 들린 고백연기), 하수인들(김상호‧전석만 역, 김준배‧하성규 역)의 과거를 설명하는 에피소드는 섬뜩할 정도로 잔인하다. 본 게임에 흥미를 잃은 관중에게 다른 형태의 자극은 오히려 혼란스럽게 다가온다. 가지와 줄기보다는 몸체에 좀 더 포커스가 맞추어져야 했다. 마을 건설 초기에 유목형의 구도정신에 감화됐던 하수인들이 미끼를 던진 천용덕 편에 서게 되는 심리적 전이 과정도 치밀하게 묘사되지 않아 몰입을 저해한다. 결론 부분을 오프닝에 배치해 관객의 궁금증을 초기에 해소해 영화의 완성도를 훼손한 판단착오와 무관하지 않은 대목이기도 하다.
4. 백경(白鯨)과 이끼의 상호 의존성
악(惡)의 군집(群集)
영화의 실질적인 주인공이며 서사의 추동 역할을 수행하는 천 이장은 절대악의 화신으로 묘사된다. 시골 경찰이었던 천 이장은 유목형을 죽음에 이르게 하고 윤간 당한 영지(유선)를 성적으로 소유하며 경찰 신분을 이용해 패거리를 포섭, 마을 사람들을 협박해 토지를 갈취한다. 유목형과 함께 공동체 마을의 창업 주주이며 기도원의 집단 학살과 관계가 있어 보인다. 그는 비밀이 탄로날까봐 수족처럼 부리던 부하도 살해한다. "그걸 알면……, 니 감당할 수 있겠나?" 사건의 진실을 캐내려는 해국에게 천 이장이 하는 협박조의 말은 의미심장하다. 그는 스스로 광오하게 선언한 것처럼 "마을의 시작이자 끝"이다. <양들의 침묵>에 나오는 식인 의사 '한니발 렉터'처럼 마음을 꿰뚫어 보는 듯한 천 이장의 눈빛이 날카롭다.
그러나 천 이장은 겉으로 '드러난 악'일 뿐이다. 꿰뚫는 눈을 넘어서는 눈은 잠자는 회색빛 텅 빈 눈, 모든 것을 흡수하는 유목형의 눈이다. 유목형은 영혼의 구원을 설파하면서 주민의 땅을 교묘히 헌납 받고 조폭 죄수도 감탄하는 결기와 깡다구를 과시해 천용덕마저 복속시키는 불가사의한 인물이다. 그는 나아가 '버려진 사람들'을 교화하고 구원하기로 천이장과 야합한다. 그는 마을의 헤게모니 쟁탈을 위한 암투에서 천 이장을 살해하려 했다가 실패하기도 한다. 그러나 천 이장과 유목형이 의기투합하는 명분과 갈등으로 치닫는 과정이 개연성 있게 묘사되지 않아 공감을 자아내지 않는다.
영혼의 구도자로 자처하는 유목형의 정체성은 영화의 미스터리이자 논란의 소지가 있다. 주민의 땅을 실질적으로 빼앗은 것은 무슨 이유에서일까? 원시공동체 같은 군집마을을 자신의 왕국으로 만들고 교주가 되려 한 것일까. 집단 학살 시의 그의 역할은 무엇인가. 유목형의 알리바이는 영지의 진술로만 확인된다. 영지가 증언한 것처럼 그가 신도들의 떼죽음을 발견하고 도망친 단순한 목격자라 할지라도 영혼의 구원을 설파한 유목형의 양심과 도덕성은 무엇인가? 기도원 신도 살해와 관련해 유목형의 연루 여부가 밝혀지지 않는다면 그는 '마을을 있게 한 본연적 존재이며 모든 음모의 뒷면에 자리한 '숨겨진 악'일 수도 있다는 혐의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영화에 질서를 부여하고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 진실의 핵심은 말할 것도 없이 요양원 학살사건의 전말이겠지만 영화는 이에 대해 자초지종을 설명해주지 않고 관객에게 떠넘긴다. 고전서사의 특징인 '플롯과 서사의 명료성'을 포기한 것이다. 영화는 인간에 대한 신뢰를 거두고 종말적 형태를 취하며 클라이맥스로 무거운 걸음을 내딛는다. 문제는 천 이장과 유목형 외 드러나지 않은 또 다른 실체가 있지 않을까 하는 점인데…….
모비 딕, 에이허브 그리고 바다
허만 멜빌의 소설을 영화화 한 <백경(白鯨‧1956)>3)과 이끼는 상호 의존성이 있는 텍스트다. 천이장과 유목형의 관계는 흰 고래 모비딕(Moby Dick)과 에이허브 선장을 떠올리게 한다. 고래에 다리를 잃은 포경선 피쿼드 호의 에이허브 선장은 복수의 일념으로 자신과 선원을 독려하며 3대양을 항해한다. 집요한 추적 끝에 고래를 발견하고 사흘간에 걸쳐 처절한 사투를 벌이지만 함께 바다 속으로 사라지고, 내래이터인 이즈멀만이 유일한 생존자로 살아남아 이야기를 전한다.
알려져 있다시피 <백경>은 구성의 다면성, 장대한 스케일과 서사의 상징성으로 각기 다른 해석이 가능한 수수께끼의 작품이다. 일반적으로 거대한 향유고래인 배경은 악의 표징이자 질서의 파괴자를 상징한다. 한편 고래에 맞서 싸우는 에이허브 또한 악의 권화(權化)에 맞선 숭고한 인간정신이나 퓨리턴적인 절제와 규율의 상징으로 여겨지지 않는다. 그는 편집광적인 집념에 함몰된 그로테스크한 인물이다. 모비 딕과 에이허브의 대결은 선과 악, 문명과 야만, 영혼과 파괴 본능 등 상식적인 이원론으로 환원할 수 없으며, 오히려 성질이 비슷한 요소 간 길항(拮抗‧antagonism) 대립으로 보는 편이 설득력이 있다. 레비스트로스4)를 역설적으로 인용하면, 대치 관계인 백경과 에이허브는 연민과 공존을 서로의 파멸을 통해 찾은 것일 수 있으며, <이끼>에서의 천용덕과 유목형의 상호 포착적인 관계도 같은 맥락으로 파악된다.
전통적인 영웅서사와는 괴리가 있는 고래와 선장의 대립은 주체와 대상 간의 작용인 내포와 외연관계다. 선악의 경계가 흐트러져 있어 누가 본질적이고 거대한 악이며 누가 의존적이며 기생하는 악인지 구분이 가지 않는다. 숨겨진 서사는 유목형에게 더 혐의를 두는 듯하지만 이 또한 확실치 않다. 영화<백경>에서 고래와 선장은 함께 파멸하며 천이장과 유목형의 운명도 같은 궤(軌)에 놓인다. 악의 형질(形質)은 대체적으로 하나의 악이 또 다른 악의 존재를 정당화하지 않으나 은밀하게 손을 맞잡고 거대한 고리를 이룬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악과 또 다른 악이 제휴하는 접점은 어디인가. 인간의 마음속에 자리한 경계지역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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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해양모험소설이자 상징주의 문학의 최고봉으로 평가되는 허만 멜빌의 원작을 존 휴스턴 감독이 만든 그레고리 펙 주연의 흑백 영화.
4)레비스트로스: 프랑스의 구조주의 인류학자. <야생의 세계>에서 뉴기니 원주민 부족 간의 '비기기 위한 축구시합'을 예로 들어 대항자 간의 공존을 설명.
그런데 백경에서 간과한 것이 있었다. 모든 것이 멸(滅)하고 난 뒤에도 한결같은 초월적 존재인 '바다'가 그것이다. '바다'는 모든 상황의 진행을 지켜보았고, 상황의 전개와 종료를 예비했거나 방기하였으면서도(방기한 것도 개입한 것이다!) 그 자체로 여여(如如)하다. 환언하면 '바다'는 인간 정신의 심층에 자리한 초 합리성의 파괴적 현현(顯現)이다. 이끼에서도 '바다'에 해당하는 제 3의 존재가 있다. 인간의 본성을 은유하는 작고 은페된 마을은 거대한 악의 온상이었다. 영화 <백경>과 <이끼>의 연결 끈, 서사가 진행됨에 따라 형체를 드러내거나 감추는 천용덕, 유목형, 제3의 존재 간 길항 대립 또는 상호 보완관계를 실펴보자.
5. 내부의 악, 인간의 구원은 유효한가?
이끼는 결코 재산에 얽힌 싸움 이야기가 아니다. 작고 외진 산골마을의 전답을 둘러싼 음모와 분규(택지 개발에 대한 정보도 없는 마을 전체 부동산의 가격이 얼마나 되겠는가?)는 마을 주민들이 기를 쓰고 숨기려 하거나 관객이 일부러 영화관에 들러 흔상(欣償)해야 할 아이템이 아니다. 갈등의 제1 동인이자 은폐된 진실의 시원(始原)은 '기도원 집단 살해사건의 내막'임을 밝혔다. 외국의 예인 옴진리교 등 종말론적 교리에 함몰된 과격한 신흥종교단체의 행태, 가깝게는 지난 1987년 세상의 물의를 자아낸 '오대양 사건'5)을 모티브로 했음직한 이 대목은 유목형과 천 이장 간의 도덕성과 책임소재를 가름할 최대 고비이기도 하다. 이에 대한 감독의 스탠스는 애매하다. 감독도 이 를 의식하고 고심한 흔적이 보이지만 뚜렷한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함으로 관객은 달갑지 않은 상황에서 '불편한 진실'을 추리할 책임을 떠맡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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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오대양 사건: 1987년 경기도 용인의 한 시멘트 공장에서 32명이 집단 시신으로 발견된 사건. 경찰 조사로 공장이 종말론적 교리의 신흥종교집단임이 밝혀짐.
영화는 되풀이해 플래시백 기법으로 기도원 신도들의 때죽음 장면을 보여주지만 양파를 벗길 때처럼 속살(핵심적 단서)은 드러나지 않는다. 기도원 신도들의 집단살해 전말의 진실게임은 무엇인가? 등장인물들의 연루 여부나 알리바이는 어떻게 증명 도는 파괴되는가. 특정종교집단의 단순한 광기나 욕망, 잘못된 믿음에서 비롯한 것인가. 아니면 여기에는 보다 더 본질적인 그 무엇-알려져서는 안 될 불편한 진실-이 개입돼 있는 것일까. 설득력 있는 해명이 없는 한 영화는 영원한 미제 사건으로 남을 수밖에 없다. 양파의 껍질을 벗기다 보면 같은 껍질이 나와 자꾸만 벗기고 싶어진다. 그리고 마지막 껍질에 이르면 그 중심에는 아무 것도 없다.
영화 <이끼>는 플롯의 통일성보다는 사건의 가닥을 명료하게 해결하지 않는 <라쇼몽>6)유의 국제예술영화 전통에 따르려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진실에 대한 본질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질문을 던지는 라쇼몽과 미스터리 반전스릴러물인 이끼는 주제와 장르가 다르다. 영화 <이끼>는 친절하지 않다. 해명되어야 할 것은 숨기고 감추어야 할 것은 오히려 드러냈다. 영화는 언덕을 오르는 기차처럼 힘겨운 몸짓으로 '미완성의 종착역'을 향한다. 기차가 고속기어로 주행하며 박진감 넘치는 변별력을 보여주었던 때는 사실 과거의 인과관계를 보여주는 도입부 밖에 없었다.
영화의 마지막 시퀀스는 극적인 함의를 담고 있다. 최후의 반전이야말로 감독이 준비한 깜짝 카드이자 회심의 노림수라고 표현하고 싶다. 고개를 저으며 일어날 채비를 하던 관객은 돌연한 사태의 변화에 숨이 멎을 듯하다. 상황이 해결되고 해국이 마을로 찾아온다. 마을은 새롭게 단장되고 새집이 들어서며 아이들은 밝은 미래를 보여주듯 놀이터에서 뛰논다. 한 시대(유목형과 천이장이 주관하던)가 거하고 새로운 시대가 열리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을 주관하고 응시하는 사람이 있다. 마을의 지배자로 등극한 영지다.
천 이장이 살던 마을의 가장 높은 망루(望樓‧panoticon)에서 새로운 영주가 돼 내려다보는 영지의 미묘한 눈길(gaze)과 유해국의 눈길이 마주친다. 흐릿한 미소를 띤 여자는 웃는 듯 우는 듯 말이 없다. 비밀을 감춘 자는 원래 말을 아끼는 법이다. 죽음을 말해주던 여자 목소리가 들려온다. 영지가 '제 3의 인물'이었다니! 영지야 말로 전지적인 시점에서 이 모든 것을 기획하고 파멸을 합리화 한 '순수악(innocent evil)의 화신', '악의 축(軸)(axis of evil)', '거대한 설계자(The Grand Designer)'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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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라쇼몽(羅生門‧1950): 감독 구로사와 아키라. 1951년 베니스영화제 금사자상 수상. 등장인 물 간 엇갈리는 진술을 통해 엇갈리는 인식론적 영화.
마을의 평화로운 정경 위로 기도원의 집단 학살 장면이 악령처럼 오버랩된다. 물고기의 사체(死體)처럼 떠오르는 어두운 진실위로 종말론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천 이장과, 유목형, 영지는 우리 마음 깊은 곳에 자리한 각기 다르거나 겹친 악의 상징모습이 아닐까. 영화는 무거운 마음으로 고개를 흔들며 일어서는 관객에게 프레임 밖으로 둔중한 의문을 던진다. 인간 본성의 사악함과 어둠은 어디까지인가? 인간은 과연 구원되어야 할 존재인가.
* <<시와 문화 겨울호>> 수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