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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탑이란 무덤을 가르키는 말이다. 부처님 또는 덕이 높은 스님들의 유골(遺骨)이나 사리(舍利)를 모신 무덤을 탑이라고 한다. 부처님이 돌아가시자, 부처님의 유골과 사리를 여덟 나라가 공평하게 나누어 가져 탑을 세웠다. 즉 이탑은 부처님의 무덤인 동시에 신성한 예배의 대상(불상)이라는 두가지 성격을 갖춘 구조물로서 추앙을 받게 되었다.
탑은 재료에 따라 벽돌로 만든 전탑(塼塔), 나무로 만든 목탑(木塔), 돌로 만든 석탑(石塔), 기타 금속으로 만든 금탑. 은탑. 철탑(金塔.銀塔.鐵塔)등 기타 옥(玉)으로 만든 옥탑, 흙로 만든 흙탑 등이 있다. 예로부터 중국은 전탑, 일본은 목탑이라면, 우리나라는 석탑이 성행하였다. [전탑] 전탑은 탑을 건립하기에 앞서 인공을 가하여 벽돌을 생산하여야 했기 때문에 일부에서만 건조되었다. 우리나라는 안동 신세동 7층전탑(8세기), 안동 조탑동 5층전탑(통일신라), 안동 동부동 5층전탑(통일신라), 경북 칠곡의 송림사 5층전탑(9세기), 경기도 여주의 신륵사 다층전탑(고려, 보물 226호) 등 5기의 전탑이 있는데, 안동지방 집중되어 있는 것이 매우 특이하며 석탑, 목탑에 비해 탑층수를 구분하는 옥개석이 미약한 것이 특징이다.
[석탑] 우리나라에는 질이 좋은 화강암이 많은 관계로 현재 약 1,000개를 석탑이 있으며, 지금도 석탑을 많이 세운다. 그래서 우리나라를 "석탑의 나라"라고 일컬을 수 있다. 분황사 모전석탑(국보 제30호)은 얼핏보기에는 전탑처럼 보이지만 안산암을 벽돌모양으로 깍아 쌓아올린 석탑으로 신라 석탑 중 가장 오래된 것이다. [목탑] 처음 우리나라에 불교가 전래되었을 때는 목탑이 많았으나 여러차례 병화(兵火)로 모두 타버리고 고대에 만들어졌던 목탑의 실물은 없다. 다만 목탑이 있었던 흔적으로는 경주 황룡사 9층 목탑지 등이 남아있다. 그러나 조선시대 후기인 17세기 초반의 건축물인 충북 보은군 속리산 법주사 팔상전(국보 제55호)은 옛 목탑의 양식을 전해주는 유일한 것이다. 우리시대의 최고 목수인 신영훈 선생님께서는 1984년에 소실된 전남 화순군 쌍봉사의 높이 약10 미터의 3층 목탑 대웅전(보물 제163호)을 최근에 재현하였으며, 충북 진천의 보탑사에 약 42미터의 3층 목탑을 1996년에 만들었다. [석탑의 부분 명칭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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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 마당에는 돌로 만든 등(石燈)이 많다. 불교 경전에 의하면 아주 옛날에도 이미 동제(銅製), 철제(鐵製), 와제(瓦製), 목제(木製)의 다양한 등이 있었으나 그 가운데 우리나라의 석등은 이미 신라 진성여왕 5년(891년)에 만들어 졌다는 기록이 있으므로 실로 천년이 넘는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불을 밝히는 등은 각별한 의미를 지닌다. 부처님 돌아가실 때가 되었을 때이다. 부처님의 사촌동생이며 제자이며 시자(侍子)인 아난다는 부처님이 곧 돌아가실 것만 같아 걱정은 태산이며 마음은 항시 초조하였다. 그래서 스승이신 석가모니 부처님께 여쭈었다.
불교 행사에는 불을 많이 쓴다. 향불을 피우고, 촛불을 켜고 연등을 달아서 어두움을 밝힌다. 이와 같이 불을 밝히는 것은 모두 밝은 빛으로 어리석은 무명(無明)을 몰아내고 깨달음의 광명을 내 마음속에 불어넣기 위한 소망에서 불을 밝히는 것이다. 세상이 아무리 어둡다 해도 내 마음의 등불이 환히 밝으면 그 어둠은 물러가고 밝은 깨달음의 광명이 꼭 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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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幢)이란 부처님의 설법이나 위신력을 그린 커다란 그림을 말하는데, 보통 절에 법회나 큰 행사가 있음을 알리는 당을 거는 장치를 당간(幢竿)이라 한다. 당간지주(幢竿支柱)는 당(幢)을 거는 긴장대인 쇠통 당간을 지탱하기 위해 세운 돌기둥을 말한다. 당간지주는 돌로 만드는 것이 보통이며 60~100cm 간격으로 두 개의 돌기둥을 세우고 거기에 구멍을 뚫어서 당간을 잡아매기 좋게 한다.
고려 후기에 와서 풍수설이 성해지자, 사찰의 위치에 따라 행주형(行舟型)이므로 돛대를 세워야 한다느니, 노인형(老人型)이므로 지팡이를 꽂아야 한다느니 하는 주장들 때문에 당간이 풍수지리설에 영합하는 형태변화를 보이다가, 차차 당간을 세우는 격식 자체가 없어졌다.
지금은 당(幢)을 거는 일도 거의 없고 당간도 보고 어렵지만, 키 같은 돌장승처럼 나란히 서있는 당간지주는 산사를 찾는 이들을 위로하며 마중나와 있다. 태백산 부석사의 당간지주(보물255호)는 일주문 안을 들어 은행나무 산길을 오르는 왼편에 서 있었으며, 해인사의 당간지주는 마치 일주문을 지키는 수호신인양 일주문밖에 서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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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만을 뵈러 절에 가진 않는다. 절에 가면 전각의 좌우후면을 돌아 벽화를 보는 것도 큰 재미다. 벽화 속에서 부처를 만나고 화상을 만나고 고승들을 만난다. 그리고 그림 속에는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고 교훈이 있다. 법당 내부에 그리는 불화를 보통 탱화(幀畵)라 하며 외부 벽에는 그리는 여러 그림은 벽화(壁畵)라 한다. 서까래나 기둥에 곱게 칠한 단청은 물론이고, 금당의 벽 안팎도 빈틈없이 그림이 그려져 있다. 고찰의 그림은 그 색이 지나온 만큼이나 바래서 신비로움마저 안겨 준다. 탱화는 신앙의 내용을 담고 있다. 신앙대상이 되는 여러 존상(尊像)만을 그리는 존상화와 경전내용을 그림으로 그린 변상도(變相圖)의 성격을 지닌 것이 있다. 탱화는 기능에 따라 본존의 후불탱화(後佛幀畵)와 신중탱화(神衆幀畵)로 나누어진다. 후불탱화가 본존불의 신앙적 성격을 보다 구체적으로 묘사한 것이라고 한다면 신중탱화는 수호신적인 기능을 띤 것이다. 법당 안의 왼쪽 벽에는 신중단이 마련되었으며 신중탱화가 그려져 있다. 예불 드릴 때의 반야심경 독경은 꼭 신중단을 향하여 한다. 벽화는 너무나 다양해서 전부를 알 수는 없지만 대체로 바깥쪽의 벽에 그려진 벽화는 법당 안팎에서 부처님을 지키는 호법성중(護法聖衆)벽화, 석가모니불의 일대기를 그린 팔상도(八相圖)([부처님전에-영산전]), 부모님의 은혜에 보답하는 바른 길을 설한 [부모은중경]벽화, 본래 마음이 곧 부처임을 찾아 깨닫게 된다는 심우도(尋牛圖:十牛圖), 기타 불교의 역사와 연관된 설화의 내용 및 장식을 목적으로 한 그림 등이 있다. 송광사에서 본 벽화는 실로 많았다. 대웅보전 내외벽에는 사성제도([들어가면서-석존사상]참조)와 육바라밀도([마음의징표-보살상]참조)가 그려져 있고 지장전에는 부모은중경도(위) 등과 승보전에는 심우도(아래)가 그려져 있다.
불교 벽화는 매우 다양하지만 그 중 많은 사찰이 심우도의 벽화를 그리고 있다. "심우도(尋牛圖)" 는 선(禪)의 수행 단계를 소와 동자에 비유하여 도해한 그림으로서, 자기의 참마음을 찾고 깨달음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10단계로 나누어 그렸다하여 "십우도(十牛圖)"라고도 한다. 중국 송나라 때 만들어진 보명(普明)의 심우도와 확암(廓庵)의 심우도가 우리나라에 전해지는데, 대부분 확암의 심우도가 많다. 단계의 과정은 다음과 같다 <이하는, 김영환 <<우리 사찰의 벽화이야기>>에서 頌과 해설을 참조하였으며 그림은 송광사 승보전 벽화의 심우도이다.> ① 소를 찾아 나선다.(尋牛) 10단계의 수행단계를 선시(禪詩)를 통하여 이해해본다. 一. 尋牛(심우) - 소를 찾아 나서다.
송(頌) 망망발초거추심 (茫茫撥草去追尋) 망망한 수풀을 헤치고 소의 자취를 찾노니 심우(尋牛)는 소를 찾는 동자가 망과 고삐를 들고 산 속을 헤매는 모습으로 묘사된다. 이것은 처음 수행을 하려고 발심(發心)한 수행자가 아직은 선(禪)이 무엇인지 참마음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지만 그것을 찾겠다는 열의로 공부에 임하는 모습을 상징하고 있다. 바로 자기를 찾는 결심의 단계를 말한다.
二. 見跡(견적) - 소 발자국을 보다.
송(頌) 수변임하적편다 (水邊林下跡偏多) 물과 나무 아래 수많은 발자국 견적(見跡)은 "소의 발자국을 발견한 것"을 묘사한 것으로서, 참마음과 자기를 찾으려는 일념으로 열심히 공부를 하다가 보면 본성의 자취를 어렴풋이 느끼게 된다는 것을 소의 발자국을 발견하는 것으로 상징해서 표현한 그림이다.
三. 見牛(견우) - 소를 발견하다.
송(頌) 황앵지상일성성 (黃鶯枝上一聲聲) 나뭇가지 위에 지저귀는 금빛 꾀꼬리 견우(見牛)는 동자가 멀리 있는 소를 발견한 것을 묘사한 그림이다. 이는 오랜 노력과 공부 끝에 자기를 찾고 본성을 깨달음이 바로 눈앞에 다가왔음을 상징하고 있다.
四. 得牛(득우) - 찾고자하던 소를 마침내 붙잡다.
송(頌) 갈진정신획득거 (渴盡精神獲得渠) 정신을 가다듬어 소를 얻었지만 득우(得牛)는 동자가 소를 붙잡아서 막 고삐를 낀 모습으로 표현된다. 이 경지를 선종(禪宗)에서는 견성(見性)이라고 하는데, 마치 땅 속에서 아직 제련(製鍊)되지 않는 금광석을 막 찾아낸 것과 상태라고 한다. 이때의 소의 모습은 검은색으로 표현하는데, 아직 탐진치 삼독(三毒)에 물들어 있는 거친 본성을 지니고 있다는 뜻에서 검게 표현한다. 아직 삼독에 물들어서 거칠고 일순간의 탐욕을 다스릴 길이 없다. 더욱 정진하고 공부에 힘써야 하는 상태이다.
五. 牧牛(목우) - 소를 길들이다.
송(頌) 편색시시불리신 (鞭索時時不離身) 채찍과 고삐를 쉼 없이 사용하여 곁에서 여의지 말라 목우(牧牛)는 거친 소를 길들이는 모습을 묘사한다. 이 때의 소의 모습은 검은 색에서 흰색으로 변해가고 있다. 삼독의 때를 지우는 단계로서, 자신을 다스리고 자기 마음을 유순하게 길들이는 단계다. 선(禪)에서는 이 목우의 단계를 가장 중요시하고 있다. 그래서 보조국사 지눌스님은 자신의 호를 목우자(牧牛子)라 하였다. 깨달음이란 외부의 경(境)에 의해서 오직 자신의 마음에서 생겨나는 것이므로 소의 고삐를 더욱 단단히 잡아서 늦추지 말고 머뭇거리는 생각이 싹트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뜻이다. 마음이 곧 부처이나 아직 이 마음은 제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六. 騎牛歸家(기우귀가) - 소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다.
송(頌) 기우이려욕환가 (騎牛이麗欲還家) (이 - 비스듬할 이 / 책받침+베풀시) 소를 타고 집에 돌아가네 기우귀가(騎牛歸家)는 동자가 구멍 없는 피리를 불며 본래의 고향으로 돌아오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이때의 소는 완전히 흰색으로서 동자와 일체가 되어서 피안의 세계로 나아가게 된다. 이때 구멍 없는 피리에서 흘러나오는 소리는 가히 육안으로 살필 수 없는 본성의 자리에서 흘러나오는 소리를 상징하고 있다. 이제 내가 내 마음을 타고 본래의 세계로 되돌아간다.
七. 忘牛存人(망우존인) - 소는 잊고 자기만 있다.
송(頌) 기우이득도가산 (騎牛已得到家山) 소를 타고 본향으로 돌아오니 망우존인(忘牛存人)은 집에 돌아와서는 그동안 애쓰며 찾던 소는 잊어버리고 자기만 남아 있다는 내용이다. 본래의 자기마음을 찾아 이제 나와 하나가 되었으니 굳이 본성에 집착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八. 人牛具忘(인우구망) - 소도 사람도 모두 잊다.
송(頌) 편삭인우진속공 (鞭索人牛盡屬空) 채찍과 소와 사람이 모두 공하니 인우구망(人牛具忘)은 소를 잊은 다음 자기 자신도 잊어버리는 상태를 묘사한 것으로서 텅 빈 원상(圓象)만을 그리게 된다. 객관적인 소를 잊었으면 이번에는 주관적인 자신 또한 성립되지 않는다는 원리를 깨달아야 하는 것이다. 이제 본성에도 집착하지 않고 나를 모두 비웠으니 자타가 다르지 않고 내외가 다르지 않다. 전부가 오직 공(空)이다.
九. 返本還源(반본환원) - 근본으로 돌아오다.
송(頌) 만본환원이비공 (返本還源已費功) 본향으로 돌아옴도 이미 헛된 공이니 반본환원(返本還源)은 이제 주객이 텅 빈 원상 속에 자신의 모습이 있는 그대로 비침을 묘사한다. "산은 산이오. 물은 물이라." 만물을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는 참된 지혜를 상징한 것이다.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모두 하나같이 사랑한다.
十. 入廛垂手(입전수수) - 저자거리에 나가 덕을 베풀다.
송(頌) 노흉선족입전래 (露胸跣足入廛來) 가슴을 헤치고 맨발로 거리에 서니 입전수수(入廛垂手)는 지팡이에 큰 포대를 메고 사람들이 많은 곳으로 가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이때 큰 포대는 중생들에게 베풀어 줄 복과 덕을 담은 포대로서, 불교의 궁극적인 뜻이 중생의 제도에 있음을 상징한 것이다. 표주박 차고 거리에 나가 지팡이를 짚고 집집마다 다니며 스스로 부처가 되게 하고 모든 중생을 제도하여 불국(佛國)을 건설한다는 내용이다. 심우도는 볼 때의 마음에 따라 달리 보이는 그림이다. 때론 소가 본성으로 나타나고 때론 소가 실존으로 나타난다. 아직도 "소와 동자의 관계가 나와 무슨 소용 있는가" 묻기도 하지만 나는 아직도 나의 소를 잡지 못했다. 내 마음을 나는 아직도 모른다. |
풍경(風磬)은 절[寺], 기타 누각 등의 처마 끝에 다는 경쇠이다. 풍령(風鈴), 풍탁(風鐸), 첨마(墅馬)라고도 말하여진다. 말 그대로" 바람이 소리내는 경쇠"로서 옛날 중국에서 전래된 것이라 한다. 작은 종처럼 만들어 가운데 추를 달고 밑에 쇳조각으로 붕어 모양을 만들어 매달아 바람이 부는 대로 흔들리며 맑은 소리를 낸다. 사람이 만들었으나 굳이 사람이 꾸미어 소리내지 않아도 그저 바람부는 대로 자연이 소리를 만들고 있다. 비록 작은 소리이지만 가만히 귀기울이면 이만큼 정겨운 소리도 없을 듯하다. 조계산 송광사의 불일암자에서 들은 풍경소리에 반하여 돌아오는 길에 작은 풍경을 구입하여 아파트 현관 문에 달아두고 가끔씩 문을 열어 산사의 소리를 애써 빌려오고 있다. 때론 풍경을 "바람 거울(風鏡)"이라 뜻하고 싶다. 바람이 불어 만드는 소리에 내 마음 자리를 돌아보게 되어서 그렇다. 보이지 않는 거울, 소리가 만들어 내는 거울, 마음의 거울이다. |
[단청의 개념과 유래] 근대에 와서는 단청이라는 개념이 건축물에 채색하는 일 또는 그 상태를 일컬어 한정하여 쓰여지는 경향이 있으나 고대로 올라갈수록 그 개념은 넓어지며 그 명칭도 각기 다르게 불려졌다. 즉 단확, 단벽, 단록, 단주, 단칠 등으로 불리어졌다. 또한 이러한 단청 일에 종사하는 사람을 일컬어 화원, 화공, 도채장 등이라 하였으모 승려로서 단청 일을 하거나 단청에 능한 사람을 금어, 화사, 화승이라고 부른다. 일반적으로 단청이라 하면 건축물에 여러 가지 색채로 그림과 무늬를 그리는 일을 말하며, 본래는 고대에 지배세력이나 나라의 길흉에 관한 의식이나 종교, 신앙적인 의례를 행하는 건물과 의기 등을 엄숙하게 구며서 일반 기물과 구분하기 위하여 의장하는데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그러므로 탑, 신상, 비석 또는 고분이나 무덤의 벽화, 출토된 부장품에 베풀어진 갖은 문양 등이 단청의 시원적인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장엄 행위는 건축물과 조형 활동의 발전과 더불어 더욱 다양하게 변천되어 왔으며 동양사상에서 말하는 음양오행설에 근거한 청, 적, 황, 백, 흑 오채(五彩)의 조화를 추구하며 시대와 사회의 미의식에 순응하여 오늘날의 단청으로 발전되어 온 것이다. [단청의 목적]
단청을 하는 목적은 크게 다섯 가지로 볼 수 있다.
[단청의 종류] 단청의 종류에는 여러 가지가 있으나 일반적으로 다섯가지 또는 여섯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이러한 단청의 종류는 각각 그 품격이 다르므로 단청을 할 때에는 대상 건물의 성격과 구조, 주위의 환경등을 잘 파악하여 그 격에 많는 단청을 해야 할 것이다. 일례로 부속전각이나 요사채에 금단청을 하는 것은 크게 잘못된 것이라 할 것이다. [단청의 기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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