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가 사전을 쓰고 있는데 하이든 선생님을 한 문장으로 어떻게 묘사했으면 좋겠냐는 질문이었다.
하이든은 이렇게 대답했다 "그는 최고의 오페라 작곡가 였다 라고 써주십시요."
프란츠 요제프 하이든 (Franz Joseph Haydn, 1732년 3월 31일 - 1809년 5월 31일) - Austria
오스트리아 동쪽 로라우(Rohrau) 태생. 100개 이상의 교향곡을 작곡하여 교향곡의 아버지로 불리우며 70개에 가까운 현악 4중주곡, 4개의 오라토리오, 34개의 가극, 《천지창조(天地創造) Schöpfung》(1798), 《사계(四季) Die Jahreszeiten》(1801) 등의 오라토리오 기타 등등 다수의 작품을 남기며 모차르트, 베토벤과 더불어 고전파(간결성, 규칙성, 객관성이 고전시대 음악의 가장 큰 특징이라 할 것이다)의 3대 거장이다. 남을 배려할 줄 아는 따뜻한 성품, 유머 감각 등으로 인해 '파파 하이든' 이라고도 불리운다. 약 30년간 에스테르하지 후작의 후원으로 관현악단을 통해 여러 가지 음악적 실험을 할 수 있었다.
Nikolaus I, Prince Esterházy - 니콜라우스 요제프 에스테르하지
(1714년 12월 18일 ~ 1790년 9월 28일)
헝가리의 명문 에스테르하지 가문 출신의 귀족으로 오스트리아의 원수를 지냈다. 1762년 형 안톤이 후사 없이 세상을 떠나면서 그의 작위와 영지를 물려받은 니콜라우스는 일가의 여름 별궁으로 에스테르하자를 건축했다. 그는 안톤과 마찬가지로 음악 애호가였으며 안톤이 죽기 1년 전에 에스테르하지 가의 관현악단 부악장으로 취임한 요제프 하이든은 이후로 약 30년간 니콜라우스의 궁정악장으로 근무했다. 에스테르하지 가문은 1809년 당시 나폴레옹이 오스트리아를 제압한 이후 합스부르크의 세력 악화를 목적으로 헝가리를 독립시켜 니콜라우스 에스테르하지 2세에게 왕으로 삼겠다는 제안을 했다는 이야기까지 있을 정도이다.
1806년 아내의 죽음으로 조용한 여생을 보내던 중 오스트리아와 전쟁을 하고 있던 나폴레옹 군대가 1809년 5월 10일 성문까지 들이닥쳐 그가 머물고 있던 집 가까이까지 포탄을 떨어져 버리는 판이었다.
그 때마다 사색이 된 그의 시중꾼들을 보고 하이든은
"무서워하지 말라. 결코 하이든이 있는 곳에는 화가 미치지 않을테니" 라고 태연히 타일렀다.
아닌게 아니라 얼마후에 그를 존경하였던 나폴레옹은 그의 집 앞에 위병을 배치해 주었으며,
그를 찾아온 프랑스 경기병 한 사람은 그의 [천지창조] 중 한 구절을 노래 부르면서 경의까지 표하고 갔다.
포탄이 떨어지는 중에서도 이렇게 태평일 수 있는 사람이 하이든 말고 또 있을 수가 있을까?
하이든이 사망한 1809년,시신을 실은 영구차 뒤를 오스트리아 사람들과 함께 프랑스 군인들이 한 마음으로 따르면서 그를 애도 하고 경의를 표했다.
하이든은 평생에 걸쳐 경이로운 음악적 업적을 남겼으나, 그의 부부 생활은 대단히 불행했던 모양이다.
1760년 그는 마리아 안나 켈러(Maria Anna Keller)와 결혼했다. (당시 마리아 안나가 하이든보다 3살 연상이었다) 전혀 맞지 않는 두 남녀의 결합이었다.
마리아 안나가 죽을 때까지인 40여년의 세월 동안 그들은 형식적 부부의 맥을 유지하고 있었을 뿐, 두 사람은 떨어져 지낸 기간이 더 많았던 것이다.
(악처를 좀 더 파고 들어가보자면 세계 3대 악처는 소크라테스의 아내 '크산티페', 공자의 아내, 웨슬레의 아내라고.)
마리아 안나
그녀는 일생을 하이든을 괴롭히는데에 바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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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사랑의 추억, 테레제
재정적인 불안정 속에서 힘겹게 삶을 이어가던 20대의 하이든에게 첫사랑의 여인이 나타난다. 하이든은 가발 제조업자 요한 페테르 켈러의 두 딸을 가르치고 있었는데 하이든은 요한의 둘째딸인 테레제를 깊이 사랑하게 되었다. 켈러 부부 또한 하이든에게 호의를 갖고 있었으나 1755년 테레제는 부모님의 뜻에 따라 수녀원에 들어간다.
이듬해 5월 12일에 공식적인 서원식이 있었는데 이 행사를 위해 하이든은 <오르간 협주곡 C장조>(Hob.ⅩⅧ:1)와 <살베 레지나>(Hob.ⅩⅩⅢ b:1)를 만들고 테레제에게 헌정한다. 테레제도 하이든을 사랑했는지 두 사람이 얼마만큼 마음을 주고받았는지 구체적인 기록은 없지만 하이든에게 테레제는 이루지 못한 첫사랑의 추억으로 오랫동안 기억되었을 것이다. 그는 1756년이라고 날짜를 기록한 두 작품의 초고를 평생 소중하게 간직했고 유언장을 작성할 때에도 테레제의 이름을 언급했으니 말이다.
빗나간 사랑의 화살, 결혼
테레제가 수녀원에 들어간 후 직업이 없던 하이든은 모르친 백작가의 음악 감독직을 제안받는다.
숙식 제공과 함께 연봉 200굴덴을 받는 조건이었다. 하이든은 어느 정도 경제적인 걱정을 내려놓은 채 맘껏 작곡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제 안정적인 가정의 필요성을 느꼈던 것일까? 하이든은 1760년 결혼한다.
그 상대는 첫사랑 테레제의 언니 마리아 안나 켈러였다. 모차르트가 사랑하던 여인의 동생 콘스탄체와 결혼했던 것처럼 하이든도 테레제와 닮은 여성상을 그의 언니 마리아 안나에게서 찾았던 것일까? 그러나 이 결혼은 평생 하이든의 마음 한구석을 외롭고 힘들게 만드는 결과를 낳고 만다. 하이든은 후에 그 원인을 부인이 낭비벽이 심한 것과 아이를 낳지 못한 점을 들었으나 무엇보다 마리아 안나는 하이든을 음악가로서 조금도 이해해주지 못했다.
발췌: 프리미엄 조선
당대 음악인들은 마리아 안나가 하이든을 내조하기에 음악적 소양이 대단히 부족한 여자였다고 말한다.
원만한 성격과 평온한 작곡 스타일로 정평이 나 있는 하이든조차 어느 편지에서는 아내에 대해 불평을 했다고 한다.
마리아 안나는 하이든의 자필 악보를 냄비 받침으로 쓰거나 과자 포장지로 쓰고, 심지어 머리를 마는 컬 페이퍼로 사용했다고 전해진다. 그만큼 몰지각하고 무지막지했다. 질투가 심하고 아이를 낳지 못하는 석녀였다.
하이든은 "내 처는 아이를 낳지 못하기 때문에 나는 다른 여성들의 매력에 무관심할 수 없었다."라는 말을 남겼다. (그의 새로운 사랑은 나이 마흔을 훌쩍 넘겨서야 찾아왔고, 그녀는 루이지아 폴첼리었다. 두 사람의 결합까지 이어지진 않았지만, 하이든의 아이를 낳았다는 소문이 돌 정도였다고도 한다.)
심지어는 악보를 불살라 버렸다는 이야기까지 있는 모양이다. (클래식 음악에 관심이 깊은 필자로서는 분서갱유 급의 야만족 오랑캐들의 만행으로 보인다.)
경제적인 관념 또한 전혀 없는 여자였다. 더욱 곤란했던 일은 그녀는 종교광이었다.
함부로 목사와 교회 관계 인사들을 집안에 불러들여 떠들어대며 그의 작곡을 방해했다.
하이든은 그런 그녀를 두고 '지옥의 짐승'이라고 불렀다.
하이든은 자식도 없고 집에서 위안마저 받지 못하자 작곡에만 몰두했다. 유럽 사람들이 즐겨 쓰는 말 중 "서둘러 결혼하면 서서히 후회한다." 가 있다.
소크라테스의 아내는 남편과 제자들이 한참 토론을 하고 강론을 벌이는 장소에 들어와서 자신을 바라보는 남편의 얼굴에 쓰레기를 들이붇고는 소리쳤다.
"돈도 못버는 거지주제에 무슨 철학이야!"
물론 역사에 기록된 악처들이 어떤 사정에 처했는지까지 생각해본다면 이리 비판만 가할 일도 아닐 것이다. 안나 또한 불행하게도, 외로운 나날을 보냈을 것이다. 직업적으로도 잘 모르는 음악을 하는 데다가 외도까지 한 남편이었으므로.
마리아 안나는 나이 들어서 류머티즘이 심해진 탓에 요양원에 들어갔다. 그리고 3년 뒤 요양원에서 사망했다.
Gott erhalte Franz der Kaiser. 저는 이 곡이 가장 인상적이고 기억이 남는 게 음악 선생님으로부터 당시 나폴레옹의 포격이 이어지고 있는 중에도 오스트리아인들은 이 곡을 꿋꿋하게 연주하였다고 하더군요. 참 많은 생각이 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