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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도 춘계답사 보고서
- 조선시대 양반과 선비들의 숨결을 따라서... -
중앙대학교 역사학과
20090626 박희석
◈ 4년만의 답사
지난 3월 26일부터 3월 29일까지 역사학과 춘계 정기답사를 다녀왔다. 이번이 나에게는 두 번째 답사임과 동시에 군 제대 후 가는 4년만의 답사라 감회가 새로웠다. 지난 2009년 춘계답사 때는 1학년이었는데, 어느덧 고학번이 되어서 후배들과 답사를 가려니 조금 어색하기도 하고 설레기도 하였다. 특히 답사 코스가 강원도 지방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부터 기대가 많이 되었다. 평소부터 가보고 싶었던 곳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을 뿐 아니라, 경치가 좋은 곳이 많아 사진 찍는 것을 좋아하는 나에게는 멋진 풍경을 담을 수 있는 곳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 이번 답사 코스는?
이번 2013년도 춘계답사코스는 강원도 지방과(원주, 평창을 중심으로한 영서지방과 강릉, 동해, 삼척을 중심으로 한 영동지방) 경상북도 일대(울진)로, 한양과 관동지방을 이어주던 관동대로와 ‘관동팔경’을 큰 주제로 하고 있다.1) 따라서 관아와 향교, 경치가 좋은 정자 등 조선시대 양반과 선비들의 문화를 엿볼 수 있는 유적들이 많다는 점이 가장 큰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답사를 다닐 때도 바로 여기에 주안점을 두어 보니 더욱 더 재미있고 유익하게 답사를 다녀올 수 있었다. 이에 따라 보고서도 ‘조선시대 양반과 선비들의 숨결을 따라서... ’라는 주제를 가지고 작성하였다.
(1) 원주감영(原州監營)
지금은 강원도의 도청이 춘천에 있지만 조선시대에는 지금과 달랐다. 지금의 강원도청이라고 할 수 있는 강원감영(江原監營)은 바로 원주에 있었다. 강원도의 ‘원’을 원주에서 따왔다는 것만 보더라도 원주가 과거엔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했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바로 이러한 원주의 옛 영화를 잘 보여주는 문화재가 바로 ‘원주감영(原州監營)’이다.
강원감영은 조선시대 강원도의 26개 부, 목, 군, 현을 관할하던 강원도 지방행정의 중심지로 조선 태조 4년(1395)에 설치되어 고종 32년(1895) 8도제가 폐지되고 23부제가 실시됨에 따라 감영이 폐지될 때까지 500년 동안 강원도의 정청(政廳) 업무를 수행했던 곳이다. 2)
(2) 원주향교(原州鄕校)
다음으로 소개할 곳은 원주항교이다. 원주향교는 전형적인 전학후묘의 형식을 갖추고 있으며 특이하게도 송조 2현을 모시고 있다. 원주향교의 역사를 살펴보면 여러차례 소실(燒失)되었다가 중건(重建) 및 중수(重修)되었다는 점이 눈에 띄는데, 지금의 모습은 2010년에 강원도와 원주시가 대대적으로 해체, 복원한 모습이라고 한다.3) 그래서 그런지 강원감영이 있었던 원주의 향교라면 그 규모가 더 클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크기가 작았다. 또한 향교전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향교 주변 부지에 주택과 아파트들이 빼곡히 들어서 있어 조금은 쓸쓸해 보이는 모습과 함께 근대화 과정에서 본래의 성격과 역할을 잃어버린 채 덩그러니 홀로 남겨진 듯한 느낌이 들어 안타까웠다.
하지만 최근까지도 향교의 정신을 잇기 위한 노력은 계속되고 있다. 지난 2010년에는 원주시와 강원도가 예산을 지원해 대대적으로 복원하는 작업을 마쳤으며, 중요한 행사가 있거나 주요 공직자들이 임용될 때면 원주향교에서 예를 올린다고 한다.
특히 이날은 정기현 강원도원주교육지원청교육장 고유가 있었던 날로, 원주향교 측에서 정기현 교육장의 고유 후 우리 중앙대학교 역사학과 교수님들 및 학생들을 위해 현수막까지 제작하여 특별히 봉행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주셨다. 덕분에 진성규 교수님과 우리 학생들이 직접 두건과 도포를 갖추어 입고 정중히 고유를 할 수 있었다. 좀처럼 보기도 힘든 이런 전통행사를 직접 참여할 수 있었던 정말 소중하고 감사한 시간이었다.
◈ 둘째 날 – 강릉
(1) 경포대(鏡浦臺)
택리지에는 경포대를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포의 둘레가 20리이고, 물이 깨끗하여 거울 같다. 사장 밖은 창해만리인데, 해돋이를 바로 바라볼 수 있어 가장 기이한 경치이다. 또한 경호라 하기도 하며, 정자가 있다.4) 이렇듯 관동팔경의 하나로 예부터 경포대는 그 경치가 빼어나기로 이름이 났으며 그 명성답게 여럿 문인들의 시판이 걸려있다.
경포대는 항상 올 때마다 느끼지만 천해의 절경을 자랑하는 명소이다. 드넓게 펼쳐진 고운 백사장과 아름다운 석호가 만들어내는 하모니는 감정이 있는 사람이라면 빠져들 수 밖에 없는 아름다움을 자랑한다. 요즘엔 사람들이 경포대보다 경포대 해수욕장에 더 관심이 쏠리는 듯 하긴 하지만 역시 경포호와 그 너머로 보이는 해변의 경치를 감상하기에는 경포대 만한 장소가 없다. 특히 우리가 경포대에 갔을 땐 하늘이 맑고 날씨가 좋아 그 아름다움이 더욱 배가 되었다.
(2) 오죽헌(烏竹軒)
강릉의 대표적 명소인 오죽헌은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학자인 율곡 이이가 태어난 곳이다. 오죽헌에는 율곡선생이 태어난 산실인 몽룡실(夢龍室)이 있다. 몽룡실의 유래는 율곡 이이가 태어나던 날 밤에 어머니 신사임당이 검은 용이 바다에서 집으로 들어오는 태몽을 꾸었다 해서 율곡의 어렸을 적 이름을 현룡(玄龍)이라 하였으며, 산실은 몽룡실(夢龍室)이라고 했다고 한다.5) 나의 이름도 태몽에서 유래한 것인데, 그래서 그런지 태몽에서 유래한 이 방의 유래가 참 재미있었다.
또한 해설사 선생님께서 신사임당이 서울로 시집와 강릉에 계신 친정어머니를 그리워하는 <어머님 그리워>라는 애절한 시와 당대 최고의 여성상인 태임을 본받는다는 뜻으로 당호를 지어 현명한 어머니가 되고자 했던 신사임당에 대해 설명을 아주 잘 해주셨다. 이를 듣고 꼭 신사임당이 아니더라도 세상의 모든 어머니들은 참 대단하신 분이며 모두가 신사임당 못지 않은 현모들이라는 생각에 존경심이 들었다.
오죽헌의 뒤편에는 600년 된 홍매화가 있는데, 우리가 갔을 때는 아직 만개하지 않아 그 고운자태를 제대로 감상할 수는 없었다. 처음에는 꽃도 피지 않아서 무심코 지나쳤는데 신사임당이 매화그림을 유독 많이 그린 것과 첫째 딸의 이름도 매창(梅窓)이라고 지은 까닭이 모두 이 홍매화와 관련이 있다는 박경하 교수님의 설명을 들으니 이 나무가 새삼 다르게 보였다. 하지만 지금 우리 학생들과 같은 때 보셨던 오죽헌의 모습과 지금 오죽헌의 모습이 완전히 다르다는 신광섭 교수님의 말씀은 아직도 우리나라의 역사의식과 문화재에 대한 인식이 많이 부족하다는 아쉬움을 남겨 참 씁쓸했다.
오죽헌에서 나오는 길에는 ‘견득사의(見得思義)’라는 율 곡선생의 말씀을 적어놓은 문구를 볼 수 있었다. 요즘처럼 자신에게 이득이 되는 것이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세태에 ‘얻음을 보거든 옳은가를 먼저 생각하라’는 율곡 선생의 말씀은 현대인들에게 경종을 울림과 동시에 실로 귀감이 될 만한 훌륭한 말씀이다.
(3) 강릉향교(江陵鄕校)
그 다음으로 방문한 곳은 강릉향교이다. 처음 들어서자 마자 가장 처음 눈에 띄인 점은 바로 그 규모였다. 전날 살펴 본 원주향교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명륜당의 크기가 매우 컸다. 또한 배치구조가 원주향교와 동일한 모습을 보였다.
두 향교 모두 전학후묘의 배치양식에 따라 지어졌다. 강릉향교의 경우 특히 경사가 매우 심한 곳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보통의 경우에는 전묘후학이 가장 일반적인 경우이지만 향교가 경사지에 위치한 경우에 바로 이러한 전학후묘의 방식을 취한다고 박경하 교수님께서 설명해 주셨다. 반면에 원주향교의 경우 대성전에 5성과 송조 2현, 해동 18현을 모시고 있는데 비해 강릉향교는 대성전에 5성과 10철을 모시고 동․서무에 중국 97현과 우리나라 18현을 모시고 있다는 차이점이 있었다.
신주나무는 밤나무로 만들었는데, 이는 밤이 알알이 열리듯이 자손을 번창하라는 뜻이고, 신주의 위쪽 모서리가 둥근 것은 하늘을 상징하고 아랫부분이 평평한 것은 땅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교수님께서 설명해주셨다. 작은 것 하나도 그냥 만들지 않고 의미를 부여하던 우리 선조들의 섬세하고 뜻 깊은 면모를 엿볼 수 있었다. 현재 강릉향교의 경내에는 명륜 중, 고등학교가 있었는데 옛날의 지역교육을 담당하던 향교와 현재 이 주변의 교육을 담당하고 있는 중, 고등학교가 함께 있다는 점에서, 불리는 이름과 모습은 서로 다르지만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고 있는 이색적인 풍경이 눈길을
(4) 강릉관아(江陵官衙)
강릉관아는 고려시대에 처음 세워져 조선시대 말까지도 약 천년동안 강릉의 지방행정을 맡아보던 곳이다. 하지만 일제 강점기에 헐려 2001년 까지도 강릉시청사가 위치하고 있었다고 한다.6)
강릉관아에 들어가 보니 큰 임영관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임영관은 일종의 ‘관용호텔’로, 사신들이 주로 머물던 곳이다. 다음으로는 객사문이 눈을 사로잡았다. 처음엔 단청이 칠해져있지 않아 잘 모르고 치나칠 뻔 했는데 고려시대 대표적인 건축물이자 현존하는 목조건축물 가운데 배흘림 기둥이 제일 큰 것으로 유명하다는 설명을 듣고나자 배흘림 기둥이 눈에 들어왔다. 참으로 멋졌다. 또한 칠사당이 눈에 띄었다. 박경하 교수님께서 수령이 하는 일이 호적, 농사, 교육, 병무, 세금, 재판, 풍속 총 7개라는 데에서 칠사당이라는 명칭이 유래한 것이라고 설명해 주셨다. 하지만 강릉만 유독 칠사당이라 불린다고 하셨다. 칠사당은 특히 단청을 칠하지 않았으며 높게 솟은 누마루와 공포사이에 위치한 아래에는 물고기, 위에는 꽃을 조각한 듯 한 장식도 눈에 띄었다. 과거에는 누마루에 오르면 강릉시내가 한눈에 들어왔다고 한다.
◈ 셋째 날 – 동해 그리고 삼척
(1) 북평해암정(北坪海巖亭)
실제로 보니 정자라고 하기는 하나 정자보다는 집의 형태에 가까운 모습이었다. 해암정은 이름처럼 뒤에 바닷가의 바위산을 끼고 자리하고 있었는데 비록 관동팔경 안에는 들지 않지만 그 경치는 실로 장관이었다. 특히 추암해변의 모래사장과 대비되는 바위들은 새파랗고 맑은 동해의 바닷물과 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었으며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촛대바위 또한 명불허전이었다. 해암정에서 파도소리를 들으며 하룻밤을 묵은 뒤 다음날 아침에 동해에서 떠오르는 일출을 보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다만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이 일대가 군사경계구역이라 해암정 바로 뒤에 철조망과 각종 경계 장비가 설치되어 있어 아름다운 자연의 풍광을 해치고 있다는 점이었다. 마치 우리나라가 지구상의 유일한 분단국가임을 잊지 말라는 듯이 철조망은 말 없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2) 죽서루(竹西樓)
강원도 삼척시에 위치한 죽서루는 관동팔경의 하나로, 절벽 위에서 오십천을 굽어보고 있어 빼어난 경치를 자랑하는 곳이다. 죽서루는 관동팔경 중에 제일 큰 누각이며, 관동팔경 중 유일하게 바닷가에 위치하지 않은 곳이기도 하다.
죽서루의 절경은 예부터 극찬을 받았다. 동국여지승람, 여지승람, 정 추의 시 등에서도 죽서루의 아름다운 풍광을 묘사하고 있으며8) 죽서루에는 미수 허목, 이성조, 이규헌은 물론 숙종의 어제시, 정조, 율곡 이이등 여러 명사들이 쓴 죽서루의 아름다운 경치를 예찬하는 시9)들이 걸려있는 것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하지만 우리가 죽서루를 방문했을 때엔 날씨가 춥고 바람이 많이 불었으며 하늘에는 구름이 끼어있었다. 또한 자연석 위에 지어진 죽서루의 특성 상 죽서루에 오르는 주춧돌이 매우 위험했고 답사에 참여한 인원들이 모두 서있기에는 상당히 좁았다. 이 때문에 전체적인 경치를 감상하기 보다는 교수님의 설명을 듣고 죽서루를 둘러본 다음에 버스로 돌아가기 바빴던 기억이 난다.
또한 죽서루에서 바라 보이는 오십천 변이 지금은 모두 개발되어 있었다. 이 때문에 현대적인 건물들이 많이 들어서 있어 죽서루와 그 일대의 전체적인 산수와는 맞지 않은 느낌이 들었으며 오십천의 수량도 생각보다는 적어서 죽서루의 절경이 십분 빛나지 못하는 것 같아 아쉬움을 남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서루를 보면서 가장 인상 깊었던 점은 바로 부지에 죽서루를 세우는 과정에서 어떠한 인위적인 정비도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죽서루는 오십천 가 절벽위에 세워져 있는 누각이다. 그러다 보니 울퉁불퉁하여 굴곡이 심한 바위 위에 누각을 세우기 위해서는 인위적으로 정비를 하여 평평하게 만든 후 누각을 세우는 것이 보통일 것이다.
하지만 죽서루는 이러한 과정 없이 오롯이 굴곡이 있는 그대로의 자연석 위에 누각을 지었다. 이 때문에 죽서루 양 옆의 출입구는 지면보다 위에 있을 수 밖에 없다. 그런데 출입구를 만드는 과정에서도 따로 나무로 계단을 만드는 등의 과정을 거치지 않고 자연석 그대로를 계단으로 삼아 누각 양 옆에 입구를 만들었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이해가 되지 않을 수도 있지만 어떠한 인위적인 가공 없이 있는 그대로의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고자 했던 선조들의 사상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이와 더불어 신광섭 교수님께서 “죽서루는 본래 맞배지붕이었을 것으로 보이며 이후 양쪽으로 한 칸씩을 늘린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하시면서 덧붙이신 말씀이 기억에 남는다. 교수님 말씀에 따르면, 일본은 문화재를 복원하거나 개․보수 할 때도 우리보다 앞선 의식을 가지고 철저하게 진행한다고 한다. 목재를 예로 들면, 본래 쓰인 목재와 같은 지역에서 나온 동일 수종의 나무를 사용함은 물론 동일한 수령과 심지어는 나무의 결까지도 최대한 동일한 것을 쓴다고 한다. 이와 더불어 공직에 계실 때 안타까웠던 일들을 말씀해 주셨는데, 어제 갔었던 오죽헌이 다시 떠올라 참 씁쓸하면서도 우리가 가야할 길이 아직 멀다는 것을 다시금 깨달았다.
◈ 넷째 날 – 울진
(1) 망양정(望洋亭)
언젠가 울진과 영덕지역을 소개하는 여행프로를 통해 망양정을 보고는 경치가 너무나도 좋아 늘 내 마음 속에 그 모습이 남아있어서, 관동팔경하면 항상 경포대와 함께 망양정이 가장 먼저 떠오르곤 했다. 이번 답사의 마지막 순서이기도 했던 망양정은 그 명성 그대로 정말 아름다운 경치를 품고 있었다. 망양정에 올라서 바라보니 왼쪽으로는 눈부신 모래사장과 유한 곡선을 그리고 있는 해안선이 눈에 들어왔고 정면으로는 동해의 푸른 바닷물이 파란 하늘 과, 새하얀 파도와 더불어 멋진 대비를 이루고 있었다.
망양정에 오르니 아계 이산해(鵝溪 李山海)가 망양정에 올라 지은 시 ‘망양정’에서 표현한 것 처럼 긴 바람이(長風)이10) 연신 나의 몸과 정신을 흔들어 댔는데, 나에게는 바람이 우리에게 마치 무언가를 말하려는 듯이 보였다. ‘보아라 이것이 아름다운 우리의 강산이다. 인간답게 행복하게 사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다. 자연과 더불어 공존하는 것이다. 너희는 자연의 일부임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너희가 선조들에게서 그대로 물려받았듯이 너희도 후손들에게 그대로 물려주어야 한다.’라고 우리에게 쉴 새 없이 외치는 것만 같았다. 망양정을 내려오면서 나는 마치 대자연과 대화를 한 듯 한 느낌이 들었다.
◈ 답사를 마무리하며...
군 복무 시절 제대 후 복학해서 처음으로 가는 이 답사를 얼마나 고대했는지 모른다. 그만큼 나에게 군 제대 후 복학하여 4년만에 떠나는 이번 답사는 실로 감격스러운 것이였다. 지난 3박 4일은 강원도와 경상북도 지방의 아름다운 풍광과 함께 우리 선조들의 자취에 흠뻑 취할 수 있었던 시간들이었다. 특히나 관동팔경과 함께 강릉과 원주의 향교와 관아는 이제껏 불교문화재에만 관심이 있었던 나에게 조선시대 양반과 선비문화라는 새로운 세계를 열어주었다.
개인적으로 답사는 참으로 뜻 깊은 활동이라고 생각한다. 역사학을 공부한다고는 하지만 단순히 과거에 기록된 자료만을 가지고 공부한다면 그것은 역사를 참으로 공부한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기록된 자료들을 통해 습득하고 연구함과 동시에 직접 역사의 현장이나 당대의 얼과 사상이 담겨있는 문화재를 답사함으로써 역사가가 직접 확인하고 보면서 느끼는 과정은 필수이다.
이번 답사에서도 바로 이 점을 절실히 깨달았다. 답사를 다니며 교수님들의 설명을 듣고 그동안 내가 배운 것들을 현장에서 직접 보고 느끼니, 나는 2013년 현재 이 곳에 서있지만 내 앞에는 마치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그 때 당시의 모습들이 펼쳐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한 편의 역사극을 보는 것처럼 말이다. 이러한 경험을 하며 ‘아 이래서 답사를 많이 다녀야 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점에서 답사는 역사학을 하는 사람들만이 누릴 수 있는 즐거움이자 특권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다만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것은 미수 허목(眉叟 許穆)의 삼척척주동해비(三陟陟州東海碑)를 보지 못한 점이다. 삼척척주동해비는 당시 우암 송시열과 정치적으로 라이벌 관계에 있었던 미수 허목이 삼척부사로 재임하던 시절 바닷물이 넘쳐 삼척에 난리가 나자 이를 잠재우기 위해 세운 비석이다. 보통 우암 송시열은 잘 알지만 미수 허목은 모르는 경우가 많은데 이 미수 허목과 관련된 유적이다.
자칫 그냥 지나칠 뻔 했던 것을 박경하 교수님께서 잘 설명해주신 덕분에, 비록 가보지는 못했지만 삼척척주동해비에 대해 잘 이해할 수 있었다. 답사를 다니는 내내 박경하 교수님과 같은 3호차에 타게 되어 이런 꼼꼼한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는 것은 정말이지, 행운이었던 것 같다. 끝으로 정말로 소중하고 뜻 깊었던 이번 답사를 준비하느라 고생한 역사학과 모든 학우들과 사소한 부분까지 세심하게 설명해주시고 챙겨주신 박경하 교수님, 진성규 교수님, 신광섭 교수님께 감사드리며 이번 2013년도 춘계답사 보고서를 마친다.
◈ 참고 문헌
중앙대학교 역사학과, 『조커든 맑디 마나 맑거든 조티 마나』, 중앙대학교 역사학과, 2013
신정일, 『다시쓰는 택리지3』, humanist, 2004
◈ 참고 사이트
문화재청, http://www.cha.go.kr/korea/heritage/search/Culresult_Db_View.jsp?mc=NS_
04_03_01&VdkVgwKey=13,04390000,32
원주원씨 운곡대종회, http://blog.naver.com/sungku14? Redirect=Log&logNo=40120069312디지털 강릉문화 대전, http ://gan gneun g.gra ndcult ure.net/C ontents/ Index?con ten ts_id=GC00300672
각주 ---------------------------------------------------------------------------------------------------------------
1) 중앙대학교 역사학과, 『조커든 맑디 마나 맑거든 조티 마나』, 중앙대학교 역사학과, 2013, p2
2) 문화재청, http://www.cha.go.kr/korea/heritage/search/Culresult_ Db_ View.jsp?m c= NS_ 04_03_01&
VdkVgwKey=13,04390000,32
3) 원주원씨 운곡대종회, http://blog.naver.com/sungku14?Redirect=Log&logNo=40120069312
4) 신정일, 『다시쓰는 택리지3』, humanist, 2004, p34
5) 신정일, 『다시쓰는 택리지3』, humanist, 2004, p30
6) 디지털 강릉문화 대전, http ://gan gneun g.gra ndcult ure.net/C ontents/ Index?con ten ts_id=GC00300672
7) 중앙대학교 역사학과, 『조커든 맑디 마나 맑거든 조티 마나』, 중앙대학교 역사학과, 2013, p67
8) 신정일, 『다시쓰는 택리지3』, humanist, 2004, p66~p67
9) 중앙대학교 역사학과, 『조커든 맑디 마나 맑거든 조티 마나』, 중앙대학교 역사학과, 2013, p71
10) 枕海危亭望眼通
登臨猶足溫心胸
長風吹上黃昏月
金閣玲瓏玉鏡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