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다고 무시당했던 우산의 보람
유형오
‘삐리링, 삐리링…’
모르는 번호로 전화벨이 울렸다
“여보세요?”
‘예, 혹시 사전의료의향서 업무 담당 선생님 아닌가요?’
“그렇습니다.”
‘시 부모님 때문에 의논드리려고 전화했습니다. 연세가 두 분 모두 팔십 중반인데요, 현재는 집에서 재가요양보호를 받고 있는데 의향서 작성이 가능한지요?’
주말을 맞아 모처럼 가족과 외식 도중에 걸려온 한 통의 전화였다. 며칠 전, 평소와 같이 온천공원 족욕장 입구 벤치에서 쉬고 있던 어르신을 상대로 사전 연명의료의향서 상담을 하고 있었는데 옆에 서있던 50초반 여성이 가던 길을 멈추고 어르신과 나의 상담 내용을 주의 깊게 듣고 있다가 나에게 홍보물을 받아들고 여러 차례 질문을 하다가“꼭 필요한 친구가 있다”라며 나의 연락처를 알려달라고 했는데 오늘 전화가 온 것이다.
비가 내리는 월요일 오후에 시부모님이 산다는 빌라에 가보니 엘리베이터가 없는 4층이었다. 부부가 외출도 못 하고, 집에서 방문 요양보호사의 재가요양보호를 받고 있었다. 요양보호사는“할아버지께서는 항상 정신이 없는 상태로 말도 못 하고 하루 종일 누워만 있으나, 할머니께서는 귀가 잘 들리지 않으나 말도 하고 치매 약도 먹질 않는데 다만 거동이 불편한 상태다”라고 하였다.
『 참조 - 2024년 등록기관 종사자 대상 심화교육(취약계층) 이혜원 교수님 강의 -
가. 동일 연령대에 비해 인지 기능, 특히 기억력이 떨어지나 일상생활을 수행하는 능력은 남아 있어 아직은 치매라고 할 정도로 심하지 않은 상태를 경도 인지 장애(경미한 인지 장애)라고 함
‐ 경미한 인지 장애는 정상 노화와 치매의 중간 단계라고 할 수 있음
나. 치매나 중증 정신질환은 본인 결정권을 행사가 어렵지만 경도 인지 장애의 경우 소통이 가능해서 의향서 작성이 가능함 』
“어르신 제 얘기 잘 들리세요.”
“어 잘 들려, 어제 어미가 왔었는데 내가 종이에 이름을 써야 한다고 해서 이름을 하루 종일 썼어. 내가 글을 잘 모르는데 지금은 쓸 수 있어 내 위로 언니들만 여섯이 있는데 바로 넷째 언니가 병원에서 코에 호스를 꼽고 고생만 했어 내가 옆에 있었는데 난 그 짓 못하겠어 나 좀 도와줘,”
날짜 및 생일을 물어보니 대답을 하는데 발음은 어눌하고 약간의 경도인지장애가 있으나, 자기의 확고한 의사결정 능력은 있었다.
“어르신은 할 수가 있어요.”
그림카드를 이용하여 사전 연명의료의향서를 작성하였다.
“상담사 선생, 여기 들어오기 전에 작은 꽃밭 봤어?”
나는 미처 보지 못하고 왔으나
“보았다”
라고 거짓말을 했다.
“나무 옆에 장미꽃 있지 백장민데 친구에게 얻어다가 재작년 가을에 내가 심어 놓은 건데 작년에는 안 폈어, 올해 꽃이 피었는지 모르겠어.”
“이쁘게 잘 크고 있었어요. 어르신도 얼른 일어나서 이쁜 꽃을 보셔야죠”
하고 웃으면서 말하고
“제가 가면서 다 시 한번 살펴볼 게요”
하고 말하니 안도하는 눈빛으로 피곤하다며 자리에 눕는다.
화단엔 작은 백장미 한 송이가 내리는 비와 바람과 싸우며 외롭게 있었다. 꽃망울을 터트리기 직전의 꽃봉오리가 빗방울을 맞으며 바람에 온몸을 사시나무 떨듯이 오돌 오돌 떨고 있었다. 몸을 가린 작은 우산으로 꽃봉오리를 덮어주고 바람을 막아주니 떨고 있던 꽃봉오리가 금세 빗방울을 털어내고 방긋이 웃으면서 꽃을 피우려고 한다.
인적이 드문 골목길 옆 화단 위에서 꽃과 나의 몸을 가린 작은 우산은 든든한 울타리가 되어서 비와 바람으로부터 지켜 주었다. 그동안 작다고 무시당하던 작은 우산은 처음으로 보람을 찾은 날이 되었고, 나의 자그마한 수고가 어르신과 꽃봉오리에게 희망을 준 하루가 되었으니 걸어가는 발걸음이 가볍다.
골목 입구의 작은 카페 앞에서는 진한 커피향이 나의 코를 유혹한다. 귀에 익은 노랫소리가 흘러나와 잠시 걸음을 멈추고 작은 목소리로 따라 부른다.
우산 쓰면 내리는 비는 몸 하나야 가리겠지만
사랑의 빗물은 가릴 수 없네.
조그만 길가 꽃잎이 우산 없이 비를 맞더니
, 지난밤 깊은 꿈속에 활짝 피었네.
「윤형주 - 어제 내린 비」
인간은 부모님에게 큰 희망을 주면서 이 세상에 태어나서 살아가다 마지막엔 다시 부모님의 품 안으로 돌아간다. 모든 일엔 처음과 끝이 있듯이, 희망으로 시작된 처음을 보람으로 끝을 맺어야겠다. 지나간 인생을 뒤돌아보며 약간의 아쉬움이 남는 것은 자손들에겐 연민의 정으로 남게 될 것이니 너무 후회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다만 나의 마지막 생을 남의 손에 맡기지 말고 내 스스로 결정하는 것도 괜찮을 듯싶다.
(국가생명윤리정책원 의향서 삼담사 수기 응모작 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