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쟁이들의 혹세무민 실태를 고발한다 매스컴이 만들어내는 용한 점쟁이 탈역사적이고 반사회적인 역기능 점, 그 미혹의 얼굴 점의 변화과정 점의 본질 점의 허구성
점쟁이들의 혹세무민 실태를 고발한다
점이라면 동서를 막론하고, 옛날부터 오늘까지는 말할 것도 없고 아주 먼 미래까지 인간이 존재하는 이상 반드시 존재하는 될 것이다. 즉 인간이 궁금해하고 모르는 일이 반드시 있기 때문에 점이 존재할 수 있다는 뜻이다.
서양은 점성술을 위주로 발달했으나 오묘한 이치와 철학으로 발달한 동양의 각종 점술에 비하면 적중률이 훨씬 떨어지기 때문에 비교가 되지 않는다. 아무튼 점술은 동서를 막론하고 발달해왔다.
옛날에는 신전에서 제사장이 국가의 중대사를 결정할 때 또는 어려운 문제에 부짖혔을 때 제사장이나 신관이 신의 계시나 신탁을 구하여 결정했던 것이다. 원시시대에는 신의 뜻을 묻거나 위하는 제를 집행하는 이가 바로 무당(박수)이었다가, 점차 문명이 발달하면서 제사와 정치가 일치했던 제정일치시대를 거쳐 제사와 정치가 분리되는 제정분리시대로 옮아갔다. 이때로부터 신의 대변자로서 왕이나 임금과 같았던 무당, 박수, 제사장, 신관의 지위가 점차 낮아져서 오늘날엔 심지어 무식한 엉터리, 사악한 무당, 박수, 점쟁이로 전락한 것이다.
옛날의 무당과 박수는 오늘날과 달리 앞일을 잘 헤아리고 국가와 사회를 위하여 유익하고 좋은 일을 많이 했다. 흔히들 왕은 지배한다고 하는데 '지배'(支配)는 즉 '간지(干支)를 잘 배당(配當)한다'는 뜻으로서 음양오행과 주역의 원리로 육십갑자를 잘 헤아려서 천문지리와 농사를 비롯한 모든 일에 통달하여 백성들을 잘 살게 한다는 것이 본래의 뜻이었다.
이렇게 좋은 의미였던 '지배'가 세월이 흐르면서 많은 백성들을 들들 볶고 괴롭히는 독재의 의미로 바뀌어버린 것이다. 참고로 신라시대의 왕이나 임금의 칭호가 이사금, 거서간, 차차웅, 마립간, 각간, 대각간, 태대각간 등이었는데 그 어원은 모두 무당과 박수라는 뜻이다.
어쨌든 일어나지 않은 앞일에 대해서 말하는 것을 예언 또는 점이라고 하는데, 사람이 숨을 쉬는 이상 자기의 운명이나 숙명 특히 현재와 앞일에 대한 궁금하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또한 이러한 점을 치는 기술을 점술 또는 역술이라고 하며, 흔히들 멸시해서 말하기를 점쟁이, 무당, 박수라고들 한다. 소도 개도 점을 친다고 하는 식이라서 사회적으로 멸시받는 존재가 되었을뿐만 아니라 어떤 학문적인 수련이나 근거와 이론, 원리도 없이 '꿩 잡는 게 매', 즉 사기를 치든 말든 세치 혀를 마구 엉터리로 나불대어서라도 돈만 벌면 된다는 식이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특히 요즘은 여자들이 참을성이 많지 않아서 그런지는 몰라도 이혼이 부쩍 늘어만가는 추세이다. 따라서 이혼한 여자들이 힘들여 일하기는 싫고 자본도 밑천도 별로 드는 것이 없다고 생각해서인지 아무렇게나 얼렁뚱땅 무당이나 점쟁이가 되려는 경향이 매우 많다.
뿐만 아니라 요즘 우리 나라에선 힘든 일을 기피하는 3D현상까지 있어서 사기꾼, 전과 11범, 범법자를 비롯하여 온갖 어중이 떠중이들이 점쟁이를 하겠답시고 간판을 내거는 판국이니 남한은 그야말로 점쟁이들, 무당들, 박수들로 온통 나라 안이 뒤덮을 판국이다. 더욱이 엉터리 점쟁이들이 양성소들을 차려놓고 역시 많은 엉터리 점쟁이들을 마구 배출해내는 것 또한 큰 문제이다
점쟁이 양성소를 차리는 이들의 대부분은 자신도 알지 못하는 내용들을 버젓이 책으로 출판하고 있는데 그 목적은 자기선전과 그에 현혹되어 찾아오는 사람들을 노리는 데 있다. 아울러 이런 현상을 흉내내어 너도나도 자기선전을 하기 위한 엉터리 내용의 책들을 내는 것이 요즘 점쟁이들의 추세이다. 그것도 순수한 창작이거나 공들인 흔적이라도 있으면 다행이겠건만 거의 100%가 남의 것을 베끼거나 도용하여 마치 자기의 참신한 아이디어와 지혜에서 생긴 비법인양 행세하는 꼴이 더욱 가증스러운 마당이다
또한 그나마 책을 꾸며낼 능력조차 없는 점쟁이들, 무당들, 박수들은 여럿이 돈을 모아서 싸구려 엉터리 글쟁이들을 앞세워 단체로 선전을 하기 위한 책들을 내기도 한다. 심지어 자신의 이름만이라도 알리고 싶은 욕심에 엉망으로 내용을 베껴서 인지가 없는 것은 고사하고 자기 돈을 쏟아부어 가면서까지 책 한 권 내려고 혈안인 경우도 부지기수이다.
한편 잡지, 신문, 방송으로 선전을 하는 이들도 꽤 많은데 이 역시 거의 전부가 가짜요 엉터리이다. 광고를 순진하게 믿고 찾아갔다가는 크게 사기를 당하거나 실망하게 되는 길 뿐이다.
어떤 애숭이는 자기가 점술에 관해서 참신한 내용의 글을 썼다는 것을 내세우며 모일류대학 출신임을 자랑하지만, 사실을 알고 보면 그 대학에서 제일 시시하고 별볼일 없는 학과임은 말할 것도 없고 내용인즉 이석연이라는 점술가의 책들을 그대로 베낀 것에 불과할 뿐이다.
아울러 모방송국에서는 무당, 박수, 점쟁이들의 적중도에 관하여 취재한 것이 있었는데 그 중에서 용한 듯이 부각된 점쟁이에게는 몇 년간 예약손님이 밀렸다는 얘기이다. 그러나 사실은 그 점쟁이에게 정보를 흘려준 프로듀서와 사전 모의가 있었다는 소문이다. 이와 같이 책, 잡지, 신문, 방송에 현혹되어 점쟁이들의 생태와 물정을 모르고 찾아갔다간 손해만 볼 뿐이다.
특히 지난 해 김일성이 죽고 나자 전국의 수많은 점쟁이들, 무당들, 박수들은 한결같이 자기가 김일성의 죽는 날짜와 시간까지도 알아맞췄다고들 떠들어대며 난리였다. 게다가 국민학교 어린이들의 호적상 이름 수정 기간으로 허용되었던 지난 93년에는 전국에 때아닌 점쟁이들의 붐이 일었다. 물론 전세계적인 천재지변과 말세론이 함께 어우러진 것도 사실이었다.
매스컴이 만들어내는 용한 점쟁이
사실 점쟁이들은 대부분이 자기의 본명을 절대로 쓰지 않는다. 이유인즉 자기의 본명이 알려지면 창피한 것도 있고 더욱이 엉터리 점으로 사기를 치다가 탈이 나기 쉽기 때문에 언제든지 흔해빠진 가명을 이용한다.
예컨대 한때 서울장안에서 작명으로 소문이 났던 O봉수라는 점쟁이를 본떠서 O봉수라고 쓰는 점쟁이들도 많다. 또 신라시대에 백운학이란 점쟁이가 있었다고 해서 이것을 본떠서 백운학이란 가명을 쓰는 점쟁이들도 전국적으로 아마 수만 명은 될것이다. 따라서 백운O이라는 가명을 쓰는 점쟁이들은 부지기수요 최소한 백OO라고 쓰는데 '백' 하나라도 코에 걸치지 않는 점쟁이가 거의 없을 정도이다. 이쨌든 제일 사악하고 간악한 것은 거개의 무당들과 박수들이 특히 여장들이 찾아가기만 하면 귀신타령을 늘어 놓으며 내림긋을 받아 무당이 되어야 한다고 꼬드기는 것이다. 찾아가는 사람마다 모두 무당이나 박수가 된다면 과연 어떻게 되겠는가? 그런식의 강요에는 내림굿을 함으로써 많은 돈을 챙기려는 단순한 흑심이 숨어 있다. 내림굿을 한번 하는데 드는 비용이 적게는 수백만 원이요 수천만 원까지 소요되는 경우가 흔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아무나 보고 내림굿을 하라는 식이고 자기는 쉽게 거금을 삼키겠다는 속셈이다.
또한 내림굿을 했다손치더라도 귀신이 쉽게 들려서 좔좔 운세를 읊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예전과 다름없이 정신만 말똥말똥할 뿐이다. 그래서 또다시 큰 내림굿을 벌려야만 한다는 식이고 그때마다 거금이 박살나는 것이다. 결국 거금만 거덜나고 속은 것을 알았을 때는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결국 본전 생각이 나서 무당이나 박수노릇을 하지만 늘 양심에 가책만 될 뿐. 그렇지만 돈을 되찾기 위해서는 자기가 속은 것처럼남들도 속이는 것이다.
또 심각한 일은 자연을 오염시키는 일이다. 내림굿이니 재수굿이니 온갖 굿을 한답시고 산천을 온통 굿을 한 음식들로 더럽히는 것이다. 게다가 방생이다 뭐다 하면서 물고기나 동물들이 살지도 못할 곳에다가 마구 버리는 짓은 바로 살생 그 자체이다.
간혹 많은 돈을 들여 내림굿을 했지만 엉터리 점을 치는 일이 양심에 거리끼고 괴로워서 과감하게 때려치우고 건전하고 양심적으로 살기 위해 새로운 직업을 구하는 사람들이 전혀 없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 수요가 있으면 공급이 있는 법, 더구나 한자나 역학에 대한 지식이 전무한 수요자를 속이기란 마치 눈뜬 장님을 속이기 만큼 쉬운 일이다. 한문실력은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라 오랜 세월동안 꾸준하게 공부해야 한다.
아울러 역학을 제대로 알아서 적중률이 높은 예언을 하려면 적어도 기본적인 학력과 교양을 갖추어야 함은 말할 것도 없고 한문, 주역, 문자학, 풍부한 지식과 상식, 언어 특히 외국어에 대한 능력, 측자파자(한자의 분해와 조립 및 추측과 유추로 길흉을 판단하는 비법)에 대한 뛰어난 능력과 실력이 없으면 거의 불가능하다. 그런데도 육십갑자만 알았다 하면 마구잡이로 간판을 걸고 입에서 나오는 대로 지껄이는 형편이다.
일부만 인용 : http://myhome.hananet.net/~gabichung/jum1-3.html
탈역사적이고 반사회적인 역기능
점은 한마디로 직간접으로 초자연적인 힘과의 교제를 통하여 복을 누리고자 하는 기복성(祈福性)의 발로이다. 재물, 출세, 성공, 건강 등의 모든 복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점은 주로 이용되는 것이다. 그러나 점은 무엇보다 의타성을 조장한다. 즉 자신의 운명을 점의 결과에 맡김으로 스스로 운명을 개척해나가고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려고 하는 의지를 약화시킨다.
모든 생활현상의 근거와 책임이 초월적인 힘에 있다고 믿기 때문에, 인간 삶의 길흉화복을 운명적인 것으로 받아들이게 한다. 여기에는 주체적 결단이 없으며 운명을 신령에 맡기고 그 중재마저도 무당 혹은 점쟁이에게 위임하고 마는 의타성과 무책임성이 뒤따르게 되는 것이다.
점은 또한 사람들로 하여금 개인주의적이고 이기적인 생각을 갖게 만든다. 점복 혹은 주술은 종교와는 달리 그것들 자체가 목적이 아니고 하나의 수단이 되고 있다. 종교의 경우에는 그 자체가 목적이기 때문에 이것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신앙이라든가 사랑의 실천 혹은 희생이나 헌신과 같은 수단이 필요하게 되며, 이러한 수단의 추구는 자연히 이웃을 생각하고 선행을 실천하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그러나 점의 경우는 그것 자체가 수단이 되며 목적은 개인의 여러 가지 복이기 때문에 여기에는 이타적인 관심이나 실천의 여지가 전혀없게 된다. 이렇게 하여 나만 잘되면 그만이고 나만 잘살면 그만이라는 이기주의적 사고를 하게 만든다
점은 현실주의적인 인생관을 조장하기도 한다. 미래의 운명을 미리 알 수 없다면 어떤 목표를 세워놓고 미래의 성취를 위하여 오늘을 준비하고 노력하는 수고를 하게 된다. 그러나 미래의 운명을 알려주는 점은 오늘의 수고와 노력을 간과하게 만들고, 따라서 오늘을 쉽고 편하게 살려고 하는 마음을 갖게 만들기 쉽다.
점을 통해 사람들이 추구하는 복 자체도 거의가 현실에서의 안심입명(安心立命)일 뿐이다. 이러한 현실주의는 낙천적인 인생관을 만들어내면서 할 수 있는 대로 즐기며 살게 만든다. 인간의 실존적인 고뇌라든가 삶의 의미에 대한 추구와 같은 목적적 가치가 과소평가된다.
점은 역사의식이나 사회의식과는 거리가 멀다. 점은 개인적인 소망이나 가족적인 관심을 넘어서는 넓은 의미의 공동선을 추구하지 않는다. 따라서 점은 사회정의나 복지, 자유나 평등과 같은 가치의 인식과 실천의 장애물이 될 수 있다. 그것은 사회질서, 민족통일, 인류평화와 같은 역사적이고 사회적인 의식의 실천에도 무감각하다. 따라서 사람들의 시야나 삶의 영역, 그리고 활동의 범위를 축소시켜 성숙한 사회인이 되는 데 걸림돌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나아가서 점복을 있어서는 윤리적인 선악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 즉 권선징악의 관념이 여기에는 없는 것이다. 점은 하나의 수단일 뿐이기 때문에 착하게 살고 의롭게 살고 양심적으로 사는 따위의 문제는 관심 밖의 일이다. 악하고 불의한 사람을 변화시켜 새로운 사람으로 만드는 따위의 일은 점복에서 찾아보기 힘든 것이다.
점은 어떻게 사는 것이 옳은 것인가를 일깨워주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잘살 수 있는가를 가르쳐줄 뿐이다. 따라서 점은 개인적인, 그리고 사회적인 도덕성의 문제에 대하여는 공헌하는 바가 없다. 오히려 부도덕한 사람들의 그 부도덕성을 은폐하거나 혹은 지속하게 만드는 수단으로 점이 이용될 수도 있는 것이다.
이와같이 점은 사람들에게 불확실성의 상황 가운데서 생겨나는 불안이나 긴장, 상호간의 갈등과 같은 심리적인 문제들을 해소시키는 데는 도움이 될지 모르지만, 그것은 사람들을 현실주의자로 만들고 탈역사적이고 반사회적인 존재로 만드는 작용을 한다. 점은 사람들을 현실주의자로 만들고 탈역사적이고 반사회적인 존재로 만들며 탈윤리적인 사고와 수행을 하게 만드는 역기능을 할 가능성이 많기 때문에 문제라고 할 것이다.
이원규 교수(종교사회학)
일부만 인용 : http://myhome.hananet.net/~gabichung/jum1-2.html
점, 그 미혹의 얼굴
점의 본질과 유래에 대하여 이야기한다는 사실은 그리 쉽지 않다. 오늘날 한국 문화와 사회 현상을 바로 보고자 할때 점의 문화는 팽배한 사회 혼돈과 역기능 현상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 글에서 나는 점의 본질을 알아보기 위해서 주역에 대한 해석사와 그것을 중심으로 한 점복의 문화적인 현실을 관찰하고자 한다.
우리는 어린 시절부터 점의 산실에서 자라난다. 필자의 경우는 본래 예수를 믿는 집안이 아니었기에 점 문화 속에서 성장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할머님은 집안의 대소사를 건너 마을에 살던 통진만신에게 상의했으며 그 만신 할머니는 한학자였던 우리 할아버지와 늘 많은 것을 상의하는 것을 보았다.
백중 날이면 할머니와 어머니 손을 잡고 뒷산 너머의 백련사라는 절에 따라갔다. 울긋불긋한 절의 탱화와 사천왕상 앞에서 때로는 무서움도 느꼈지만 자주 그곳에 가게 되면서 익숙해졌고 주지스님은 필자의 관상에 대하여 말하면서 "그 놈은 대사가 될 관상인데, 그래 관훈상도 있으니 이 다음에 한자리 할 꺼구먼"이라고 하셨다. 그 소리를 듣던 어머니는 그렇게 듣기싫은 소리가 아니라는 미소를 보내셨다.
점에 익숙했던 시골문화
시골의 문화는 점의 문화로 익숙해 있었다. 명절 때가 되면 우리는 여러가지 놀이를 하면서 자라났다. 할아버지가 계신 사랑방에는 정초가 되면 토정비결을 본다고 마을 아주머니들이 왁자지껄했고, 한달 한달씩 구수하게 비방을 풀어 읽던 할아버지의 목소리는 독경하는 소리와 같이 귀에 익숙했다. "아주머니는 삼월 달에 구설수가 있소. 금전수와 엉키어 있으니 돈거래를 그 달에는 삼가는게 좋겠고," "아주머니네는 경사가 많아. 동남방에서 은인이 나타난다고 하니 과년한 금숙이의 혼처가 나타날 것 같구먼." 아이고 좋네요."
때때로 심각하기도 했지만 그런 저녁이면 늘 사랑채에서 넘쳐나던 웃음소리를 기억하게 되고 전혀 심각하게 인생을 점친다 할 수 없고 오히려 재미로 한번 마실와서 본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점 보러 간다'는 것은 시골동리에서 '마실 간다'는 것과 그리 차이가 나지 않는다. 가까운 이웃에 나들이 간다는 생각으로 무녀에게 가거나 마을 어른을 찾아가서 여러가지 정보를 교환하고 친교의 기회가 된 지경이면 예삿일이 아닌 장래 일을 묻고 점을 치게 된다는 말이다. 때로는 하고 싶고 풀고 싶은 한많은 문제들을 안고 원만한 인간관계를 갖기 위해서 점을 치는 경우가 수다했다. 시골의 촌락에서 점치는 문화는 공동체에 속하여 살던 그들의 관례이기도 했다는 것이다.
민속학적인 차원에서의 이런 점문화는 향수처럼 느껴지고 옛사람들의 지혜와도 같은 것이었다.
미국에서 백인교회를 목회하면서 필자는 흔히 포커카드를 사용하여 점치는 것을 보았다. 포커를 사용하여 점치는 고등학생에게 설명을 들었는데 거기에는 수학적 지식들이 좀 들어 있다. 고급 수학은 아니지만 요즈음 미국사회에서 유행하는 포커 카드점도 역수와 비슷한 원리를 사용하고 있었다.
나중에 성서 속에서도 신점의 내력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교회 속에서도 점 문화는 전혀 생소한 것은 아니었다. 이 시점은 중요한 인간사나 왕을 선택하는 등의 중대사에 있어서 전적으로 하나님의 권능에 의지하는 신앙적인 표현이라고 보여지기도 한다.
고대 희랍신화를 보면, 고대 희랍인의 점은 주로 신의 지시에 의거하는 것 같으며 고대 중국에서의 구갑이나 시초를 도구로 사용하는 것과는 달랐다. 이 신의 지시 중에는 어떤 것은 신묘에 가서 전문적인 신탁자가 말해야 하며, 어떤 것은 신이 각종 방식으로 직접 당사자에게 말해준다. 고대 중국에서는 신의 지시를 '참언'(懺言)이라고 했다. 한대 초에 이 참언들은 대략 모아져서 책이 되었는데, 이는 예언서로 여겨지게 된다. 서한 말년에는 이 예언서들이 대규모로 만들어져 나왔는데, 이 참위서는 오늘날의 황색소설처럼 범람하여 사회를 피폐하게 했고 재앙이 되었던 것을 역사에서 읽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 사회 대중 속에서 그처럼 유행한 점의 문화의 원류는 무엇이며 그 본질은 무엇인가. 그 본질은 어떤 경위로 변형되게 되었는가. 점은 얼마나 믿을 수 있는 것이고 허구는 무엇인가.
점의 본질
역(易)은 일차적인 관심이 자연의 현상을 관찰하고 해명하는 데 있다고 할 수 있다. 자연의 법칙을 미루어 인간의 도리를 밝히므로 사람들이 덕을 실천하며 살도록 교훈하는 데 관심이 있는 것이다. 공간적으로 하늘과 땅 안에 존재하고 시간적으로 부단히 생성 소멸하는 모든 것을 관찰한다.
여기에는 달과 해와 별이며, 새와 짐승과 풀과 나무가 포함되고 인간도 포함된다. 서리가 오면 이를 잘 분별하여 장차 얼음이 얼게 되리라는 것을 일찌감치 판단해야 한다는 것이며 극도의 패륜적인 왕이 생기게 될 조짐도 미리 분별하여 막으므로 평화로운 세상을 이루어야한다는데 관심을 기울인다.
"성인이 천하의 만사 만물의 번잡함을 보고, 그 사물의 형태를 헤아려 팔괘로 요약함으로써 만사 만물이 마땅히 지녀야 할 모습을 상징하였다. 그래서 상징이라고 부른다."(주역전의대의전,8)
"같은 소리는 서로 화옹하고, 같은 기운은 서로를 찾는다. 물은 습한 곳으로 흐르고, 불은 건조한 곳으로 번진다. 구름은 용을 쫓고 바람은 호랑이를 따른다. 성인이 일어나면 만물이 그를 우러러본다. 하늘에 근거를 둔 것은 위와 친화하고 땅에 근거를 둔 것은 아래와 친화한다. 각기 그 종류를 따르는 것이다."(주역전의대전, 문언)
이렇듯이 주역은 세계의 모든 사물과 현상을 괘로 분류하고 만물의 이치와 도리를 탐구한 철학서라고 해야 마땅하다. 세계란 인간을 포함한 자연을 말하며 그것은 보편적인 생명의 흐름이 자신을 드러내고 그 본래적 가치가 만물에 가득하여 편만한 세계를 말한다. 역이란 이 만물을 날로 새롭게 만드는 실체의 변화와 생성을 일컬으며 덕스러움을 번창시키고 대업을 이루며 어진 삶을 살도록 부단히 변혁해 감을 말한다.
조선시대의 성리학자 서화담은 만물의 변화인 역을 관찰하면서 「유물음(有物吟)」이란 글을 통하여 만물의 무궁한 생성을 이렇게 표현한다.
"물(物)은 오고 또 와서 다함이 없다. 오는 것이 다 끝났다 싶으면 또 쫓아 온다. 오고 오는 것이 본래 시작이 없는 데서 말미암으니 그대에게 묻노라 애초에 어디서 오는지를."
역의 기본 8괘는 하늘, 땅, 우뢰, 바람, 물, 불, 산, 연못 등 8개의 자연적 요소를 상징한다. 이런 형태의 역은 역리학으로 우주론과 이기론 등의 철학적인 논의로 발전된다. 여기서 길흉화복의 주관자라는 종교적인 성향에 대한 귀신론이 나오고 이 통속적인 관념이 불교의 사생설과 결합되어 역리학으로 발전하기에 이른 것이다.
점의 변화과정
사람들이 점을 칠 때 가장 기본적이고 단순하면서도 최초의 요구일 수밖에 없는 것은 길한가 흉한가, 가능한가 불가능한가를 가리는 것이다. 이 일은 두 가지 부호만 있어도 충분하다. 지금까지도 동전 한 닢을 땅에 던져 그 앞뒤에 따라 자신의 운명을 점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그러나 실제 생활에서 많은 사정들은 결과적으로 이도 저도 아닌 경우가 많다. 즉 그다지 좋지 않다든가, 혹 나쁘지는 않다 해도 무슨 좋은 일이랄 것도 없는 것이다. 이 점에도 길흉이외의 개념이 출현했는데, 예컨데 「주역」중의 '회'(悔)와 '린'(吝)이 이런 개념이다. 물론 점복의 부호도 이에 따라 증가했을 것임에 틀림없다.
사회생활이 날로 복잡해짐에 따라 사람들의 활동도 날로 번잡해졌다. 같은 상황도 갑류에 이익인 것이 을류에는 해가 될 수 있다. 오늘날 점쟁이도 항상 무슨 일을 점칠 것인가, 즉 혼인인가, 재물인가, 관운인가, 수명에 관한 것인가를 물어보아야 한다. 따라서 부호도 반드시 늘어나야 한다.
어느 시기에 이르자 마침내 8괘, 64괘가 생긴 것이다. 64괘도 64개의 부호만 있었을 뿐이며, 겨우 64종류의 상황에만 적용될 수 있었다. 이에 사람들은 또 각 괘 중의 각 효(爻)도 하나의 상황과 상응할 수 있게 하여 64괘는 모두 64⁓6=384 효가 되었으며 이렇게 해서 점점 적용되는 상황이 더욱 많아졌다. 그러나 아무리 이렇게 해도 요구에 다 응하지 못한다. 「주역」이 형성된 뒤로 이들 부호를 연구하여 더욱 많은 상황에 대응하는 과정이 후대의 상수학파(象數學波)에서 여전히 계속되었다.
사실상 「주역」은 어떤 사실에 대하여 이것은 길하고 저것은 흉하다고만 말하지 않는다는 데 특징이 있다. 점복의 결과가 들어 맞는지 여부는 점복 자체에 달렸을 뿐 아니라 개개인의 이해에 달린 문제이다. 그렇게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아도 애매하게 그럴 듯하기만 하면 점복은 확고한 자리를 확보할 수 있다. 그렇다고해도 점복은 언제나 어느 정도 확정성을 띠게 되므로, 들어맞지 않는 상황도 반드시 출현하게 될 것이다. 어쨌든 이런 상황을 신이 영명하지 못한 것으로 돌릴 수 없다면 사람들 자신의 행위가 점술의 결과를 바꾸었다고 해석할 수밖에 없다.
「주역」또는 「역경」에 이미 이러한 맹아가 나타난다. 가령 '비'(比)괘 괘사에서는 "길하다. 장차 오게 될 것에 불안해 하니, 늦게 오면 흥하다"고 한다. '비'괘는 원래 길한 괘이지만 오게 될 것에 불안해 하면 길한 상이 곧 흉으로 바뀐다. 또 '건'(乾)의 괘의 경우, "구삼(九三)은 군자는 종일 부지런히 힘쓰고 밤에도 항상 삼가니, 위험에 처해도 해가 없을 것이다"라고 하니, 이는 군자가 신중하고 조심한다면 아무리 나쁜 상황에 처해도 해를 받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는 실제로 길흉의 결정권을 인간 스스로에게 부여했다. 옛부터 점복의 기초는 신의 뜻이며 신의 뜻은 어떤 사물을 통해서 드러날 수 있기에 하늘의 별을 보고 인간의 화복을 예측하고, 심지어 거북등, 소뼈, 시초, 대나무 등을 빌려서 모든 것을 예측한다. 그러나 이 예측은 인간의 개연성에 속하며 일종의 허구적인 예측이다.
사람들은 대부분 점을 통해서 간혹 해야 하는가, 하지 말아야 하는가라는 대답만을 구하려 한다. 아무리 많아도 이 결론들에 대해 생활 경험에 근거한 약간의 해석을 요구할 뿐이다. 두가지 선택에 당면했을 때는 점복을 사용하지 않고, 개인의 결정에 의탁해도 반은 정확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점복이 영험한 현실적 기초이다. 요즈음 유행하는 회임날짜에 의거하여 영아의 성별을 추측하는 방법은 그 정확도가 50%인데 그것은 영아의 성별이 일반적으로 두 가지뿐이기 때문이다. 예측에 들어맞는다면 도처에 알린다. 들어맞지 않으면 꼭 입을 다무니, 그래서 정확도가 높아진다고 보겠다.
점복가도 자신의 경험에 의거해서 사람의 심리를 점치고 애매 모호한 해석을 내려 사람들을 좀 위로하는 역할을 한다. 그러나 어찌 되었건 점복가는 21세기의 과학이 어떤 것인지 추측하지 못하며, 그가 정보를 훔치지 않는 한 은행의 이율에 어떤 변동이 있을지도 추측해내지 못한다. 어떤 사람이든지 삶의 노상에서 언제나 동으로 가야 할지 서로 가야 할지 갈림길에 부닥칠 것이다. 이럴 때 어떤 사람들은 일정한 방식을 이용해서 점을 치거나 점쟁이를 찾아가서 물어볼 것이다. 그러나 또 어떤 사람들은 긴장을 풀고 될 대로 되라는 심정일 수도 있다. 사실 효과는 모두 마찬가지일 수 있다. 가령 그의 가슴에 미리 생각해 둔 방법이 있거나 오직 한 가지 길뿐이면, 그는 둘 중에 반드시 하나를 선택할 수 있는 외적인 역량을 찾으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요즘 수상과 관상이 유행한다고 한다. 어떤 이는 혈액형과 먹는 모습 등을 통해 사람의 성격과 앞길에 예측하기도 한다. 그 중에는 아마 합리적인 요소도 좀 있을 것이다. 험한 생활을 하지 않은 사람의 손은 희고 고우며, 거칠게 산 사람의 손가죽은 거칠다. 봄바람이 불듯이 만족스럽게 사는 사람은 항상 웃고 밝은 얼굴이며, 생활이 힘들고 고생하는 사람은 걱정으로 미간이 펴지지 않는다. 오래 되면 자연히 그 얼굴에 영향이 미친다고 볼 수 있다. 이는 지난 생활경력의 기록으로서 자연히 나중의 운명의 출발점이 된다고 보겠다. 그러나 이 점을 불려 손과 얼굴의 결을 연구해서 사람의 앞날을 예언한다면 황당하기 짝이 없는 것이다.
점의 허구성
「주역」은 인간의 미래를 점치거나 예측하는 도구로서 사용되어 왔으나 실제로는 인간이 도덕적으로 최선을 다하여 덕망있는 삶을 살고자 할 때 좋은 인생을 꾸려 갈 수 있다는 권면이 그 핵심이 됨을 주목해야 한다.
한국 사회에서 점은 점쟁이에 의하여 행해지는 것이 원칙이나 때로는 굿 도중에도 무당이 필요에 따라 직접 수행하기도 한다. 환자의 성(姓), 생년월일, 가족 상황, 병력 등을 간단히 묻고나서 이를 자료로 점을 친다. 점에는 영점(靈占), 쌀점, 첨통점, 기점(旗占), 거북점, 방울점, 새점 등이 있는데 점쟁이나 무녀들은 이것을 혼합하여 사용하거나 한 가지를 쓰거나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도구를 사용하여 점을 칠 때 방울이 누우면 앓는 사람이 있다는 뜻으로 해석한다거나 엽전 열두개를 모두 던져 모두 갈라져 있으면 부부싸움이 있다는 의미로, 또는 엽전이 손에 달라 붙으면 조상이 심술을 부린다는 뜻으로 점괘를 풀곤 한다.
점의 원리는 내담자와의 상담을 통하여 하나의 진단을 내리는 '탓하기' 해석학에 도달하게 된다. 이는 대개 조상신이나 잡신들이 내담자나 환자의 몸 속에 들어와 어떤 조화를 부린 탓이라고 보는 빙의(憑依:Spirit intusion) 현상과 어떤 금기나 타부를 파기한 이유로 인하여 삶의 조화를 깨거나 신들이 노하였다고 보는 것과 실제로 정신이 나갔다고 보는 영혼상실(靈魂喪失:Soul loss)을 지적하기도 한다. 때로는 이물질이 침입했다는 현상을 지적하여 그 다음 '살풀이'나 '한풀이' 해석학의 입장을 취하게 되는 것이다. 때로는 무녀들은 점 이외에 현실 생활에 관련된 문제들을 가지고 단순한 상담에 응해주는 경우가 많다. 자연스런 상담의 내용은 대부분 현실적인 일들이다. 예를 들면 남편이 바람을 피는 것이 괴롭다는 이야기가 상담의 많은 내용인데 무녀는 단순한 대답으로 상담에 임한다. "잘 참고 더 잘 대해주시오. 바람피는 것은 일시적이니 안심하라"는 위로와 구체적인 방법도 조언해주는 것을 볼 수 있는 것이다. 강신 무녀들은 대개 영점을 베풀고 치료자의 역할을 하기도 한다.
우리 문화 속에서 점에서 굿에 이르는 많은 절차가 개인 치료나 집단 치료의 역할을 해온 것을 무시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런 점의 절차나 굿의 과정에서 문제점은 사람들을 환상적인 소원성취로 몰고 간다는 것과 현실 도피적인 성격이 강하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이것이 개인의 고통을 승화시켜 주는 영향이 있기는 하지만, 주술적인 절차를 통하여 또는 점의 결과들을 숙명론적으로 받아들이기나 인간 결정론의 부정적인 경향으로 흐를 때는 문제가 심각한 것이라고 여겨진다. 설득과 전이의 과정은 점쟁이들이 하는 기술적인 면으로 여기서 영구적이거나 긴 안목의 소망이 주어진다는 볼 수 없기에 점의 허구성이 지적 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점의 절차는 억압된 성욕의 승화나 열등의식의 상징적인 보상으로도 작용되지만 심리상태의 퇴행현상을 낳기도 하는 편집경향을 조장하기도 한다는 점에서 비판적으로 보아야 한다.
우리는 점의 본질을 바로 알고 기독교인의 존재와 고백 속에서 삶을 다져가므로 이런 점의 역기능성과 허구성을 지적하는 지혜와 능력으로 살아가야 한다. 과학문명이 발달한 후기 현대 사회에서도 점치기와 무속이 그대로 존재하고 있는 이유를 단순히 사람들이 미신적인 사고방식을 아직 벗어나지 못한 탓이라고만 할 것이 아니고 교회와 목회 속에서 돌보지 못하는 이 사회의 현실적 욕구가 무엇인지를 다시 재고하는 태도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정희수 / 강남대학 종교철학 교수.
일부만 인용 : http://myhome.hananet.net/~gabichung/jum1-1.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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