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요한복음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우리는 서간문인 요한계문헌을 이해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는 신학자나 성서지도 신부님이 계십니다
그런의미에서 요한 1서를 간추린글을 올려봅니다
이글만 읽지 마시고 요한1서의 본문도 여러번 읽어보시기를 바랍니다
머리말(1,1-4): 생명의 말씀
본문(1,5─5,12):
가. 하느님과 나누는 친교의 기준-첫째 설명(1,5─2,28):
친교는 여기에서 하느님의 빛에 동참하는 것으로 간주되며 친교의 기준은 이러하다.
1) 죄에서 벗어나 빛 속에서 살아감(1,5─2,2).
2) 사랑의 계명 준수(2,3-11).
3) 세상과 “그리스도의 적” 앞에 선 그리스도인의 믿음(2,12-28).
나. 하느님과 나누는 친교의 기준-둘째 설명(2,29─4,6):
신앙 곧 하느님과 나누는 친교는 여기에서 부자 관계로 서술되는데,
하느님의 자녀들을 알아보는 기준은 이러하다.
1) 의로움을 실천하고 죄를 짓지 않음(2,29─3,10).
2) 하느님 아드님의 모범에 따라 사랑을 실천함(3,11-24).
3)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에 따라 영을 식별함(4,1-6).
다. 하느님과 나누는 친교의 기준-셋째 설명(4,7─5,12): 부정적 기준,
곧 죄를 끊어 버리는 것은 더 이상 언급되지 않는다. 두 가지 긍정적 기준,
곧 사랑과 믿음과 관련하여 그것들의 궁극적 근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지금까지는 교훈적인 면과(2,3-11) 그리스도론적인 면에서(3,11-24) 고찰되었는데,
이번에는 그 본연의 신적인 면에서 고찰된다(4,7-9.16).
믿음은 앞의 두 단계에서 교회적 행위, 곧 신앙 고백으로 서술되었는데(2,22-25; 3,23; 4,2-6 참조),
이번에는 신학적 현실 곧 하느님의 아드님(의 이름)에 대한 믿음으로 제시된다(5,5.10.
그리고 5,13 참조).
1) (이 마지막 단계에서는 죄를 끊어 버리는 것이 생략된다.)
2) 사랑은 하느님에게서 내려와 믿음 안에 뿌리내린다(4,7-21).
3) 하느님의 아드님에 대한 믿음-사랑의 뿌리(5,1-12).
맺음말(5,13-21): 영원한 생명
일부 학자들은 이 서간 본문을 분석해 보면 여러 개의 문학적 층이 드러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아무도 영지주의를 주장하는 자들이나 쿰란에서 유래하는 원래의 본문,
그리고 그것을 바탕으로 필자가 덧붙인 교훈을 가려내려고 시도하지는 않는다.
문체의 다양성이 곧바로 출전이 여럿이라는 증거가 되는 것은 아니다.
몇몇 단락에서 더 강하게 드러나는 교리적 성격은 세례 교리의 영향을 생각할 때에
잘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구조의 규칙성도 이 서간의 문학적 단일성을 나타내는 하나의 표지이다.
예로부터 유명한 논쟁을 일으켜 온 한 구절만큼은 본디의 본문에 속하지 않음이 분명하다.
곧 5,7-8의 삽입구로, ‘comma johanneum’ 곧 ‘요한 소절(小節)’로 불리는 다음의 괄호 속 글귀이다.
“7그래서 (하늘에서) 증언하는 것이 셋입니다. (아버지와 말씀과 성령이신데 이 셋은 한 분이십니다.
8땅에서 증언하는 것도 셋입니다.) 성령과 물과 피인데, 이 셋은 하나로 모아집니다.”
16세기 말 두 교황의 이름을 따서 Sixto-Clementina라는 이름으로
출판된 대중 라틴 말 성경(불가타)에 들어가게 된 이 글귀가 15세기 이전의
모든 그리스 말 수사본, 고대 번역본들, 그리고 대중 라틴 말 성경의 질 좋은
수사본들에는 들어 있지 않다. 그래서 이 ‘요한 소절’은 난외 주석이 서방의
전승 과정에서 본문 속으로 들어간 것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