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5. 15. 주일예배설교
야고보서 5장 7~20절
믿음의 가정에 필요한 두 가지: 박쥐와 기도
■ 오늘 설교 제목에 이의를 제기하실 것 같습니다. ‘아니, 믿음의 가정에 필요한 것은 최소 네 가지일 텐데, 왜 두 가지지?’ 지적하시는 네 가지란, ‘기도, 말씀, 찬송, 믿음’이겠지요? 네, 맞습니다. 믿음의 가정에는 최소 ‘기도, 말씀, 찬송, 믿음’, 이 네 가지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제가 두 가지만 제시한 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말씀과 찬송과 믿음은 가로막힐 수 있지만, 기도는 누구도 막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말씀과 찬송과 믿음이 가로막히는 이유가 있습니다. 가족 안에 믿음의 편차가 있을 수 있고, 믿음의 상태가 안 좋을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경우에는 말씀과 찬송과 믿음이 거절당합니다.
그러나 기도는 거절당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말씀과 찬송과 믿음이 가로막힐 때, 또는 거절당할 때, 이를 이겨낼 수 있는 힘이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기도는 누구도 막을 수 없는 능력의 통로입니다. 이러한 사실 때문에 믿음의 가정에 그 어느 것보다 필요한 것이 기도입니다.
여기까지 이해되시죠? 좋습니다. 그런데 ‘박쥐’는 무엇일까요? 산 깊은 곳 동굴에 가서 박쥐를 잡아다 집에 두라는 뜻일까요? 은유입니다. 은우가 아니라 미안합니다.☺ 그러면 무엇을 비유한 것일까요? 오늘 본문으로 들어가서 ‘박쥐’에 대해 설명하겠습니다. 그리고 ‘박쥐와 믿음’, 이 두 개념이 믿음의 가정에 꼭 필요한 이유를 설명하겠습니다.
■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두 개의 중요한 단어를 만납니다. ‘인내’와 ‘기도’입니다. 7~12절을 통해서는 ‘인내’가, 13~20절을 통해서는 ‘기도’가 강조되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강조되고 있는 이 두 개의 개념이 야고보서 마지막 장, 마지막 부분에 있다는 것이 이 두 개념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입니다.
야고보서는 편지입니다. 일반적으로, 편지의 마지막에는 보다 강조하고 싶은 것이나 다시 부탁하고 싶은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야고보의 편지도 예외가 아닙니다. 가장 강조하고 싶은 것을 마지막 부분에 놓은 것입니다. 그렇기에 이러한 의도를 충분히 이해하고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인내’와 ‘기도’입니다.
1. 먼저 순서에 따라, ‘인내’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물론 이렇게 하는 것은 중요도에 따른 것이 아닙니다. 단순한 순서입니다. 그럼에도 ‘인내’ 다음에 ‘기도’를 설명한 데에는 작지만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인내의 끝은 기도이고, 인내를 완성시키는 것은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좀 뒤에서 설명하겠습니다.
야고보는 ‘인내’의 필요성과 중요성을 동시에 설명합니다. 이를 주님의 강림, 즉 재림과 연결하여 설명합니다. 7절과 8절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주께서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 너희도 길이 참고 마음을 굳건하게 하라. 주의 강림이 가까우니라.”
사실 인내라는 것이 말처럼 쉽지 않습니다. 견뎌내야 하는 것이기에 한계를 가진 우리로서는 한계 안에서만 인내가 가능하지 한계 밖에서는 불가능합니다. 그러므로 인내가 보통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너무도 필요하고 중요하기까지 합니다. 참을 ‘인’(忍)자 셋이면 살인도 면한다는 말이 있듯이 인내란 필요하고 중요합니다.
그렇기에 야고보는 인내를 주님의 재림을 소환해 설명합니다. 8절 끝자락에 “주의 강림이 가까우니라.”는 말씀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이겠습니까? ‘한계를 느끼겠지만, 조금만 참고 견디거라. 곧 주님이 오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의 의미는 여기서 국한하지만은 않습니다. 곳곳에서 화해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모든 영적 싸움에서 지게 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조금만 참고 견디면 됩니다. 그런데 못 견디고 그만 서로 원망하고 삶을 원망해버립니다. 참으로 안타깝지만 이런 원망이 쏟아지는 것은 우리가 한계를 가진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역설적으로 오히려 강력한 제재(制裁)가 필요합니다. 인내라는 긴장의 끈을 놓지 않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9절입니다. “형제들아, 서로 원망하지 말라. 그리하여야 심판을 면하리라. 보라, 심판주가 문 밖에 서 계시니라.” 이처럼 심판이라는 강력한 제재는 거룩한 긴장을 불러일으킵니다. 우리는 이러한 태도를 믿음의 선배들에게서 볼 수 있습니다. 10절입니다. “형제들아, 주의 이름으로 말한 선지자들을 고난과 오래 참음의 본으로 삼으라.”
그렇습니다. 신앙생활에 절대 필요한 것이 ‘인내’입니다. 오래 참고 견디는 인내가 필요한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믿음의 가정에서도 마찬가지로 필요합니다. 믿음의 가정에서 믿음이 파괴되는 시점이 바로 인내가 무너지는 그때입니다. 서로 원망하기 시작하면서부터 가정의 믿음이 무너지기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가족 서로에 대한 원망을 자제하는 것이 믿음을 지키는 길입니다. 그리고 원망이 아닌 이해를 키우는 것이 믿음을 키우는 길입니다. 그리고 모든 것을 좋게 하려는 태도는 믿음의 복을 풍성히 받는 길입니다. 우리는 이를 11절에서 확신할 수 있습니다. “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이시니라.”
그렇습니다. 모든 것을 좋게 하려는 태도가 믿음의 복을 풍성히 받게 되는 길이라는 것을 욥을 통해 확신할 수 있습니다. 욥이 원망에서 이해로, 이해에서 좋게 하는 태도로 바꾸었을 때 얼마나 풍성한 복을 받았습니까? 우리는 이 사실을 믿고 살아야 합니다.
이 모든 것이 믿음의 ‘인내’인 것입니다. 저는 이것을 ‘박쥐’에 비유하고자 합니다. 박쥐는 아시다시피 공군인지 육군인지 헷갈립니다. 날개가 있고 날아다니니 공군입니다만, 쥐와 같으니 육군입니다. 그 정체성에 헷갈립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요리 붙었다 저리 붙었다 하는 이런 사람을 일컬어 박쥐라며 놀립니다.
사실 제가 집에서 ‘박쥐’라고 불립니다. 요리 붙었다 저리 붙었다 한다고 말입니다. ‘그 말도 맞아, 이 말도 맞아’ 한다고 구박을 받습니다. 물론 기운 센 식구들 가운데서 나름의 생존전략이기는 합니다만, 꼭 이것이 전부인 것은 아닙니다. 그 말도 맞고 이 말도 맞기 때문입니다. 누구의 편이 아니라 모두의 편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박쥐’는 ‘인내’입니다.☺
결국 가정의 믿음을 지키고 거룩을 충만케 할 수 있는 길은 ‘박쥐’가 되는 것인데, 인내를 도모하고 키우는 일입니다. 인내만이 사랑입니다.
그런데 혹시 모를 사태를 위해 야고보는 12절을 중간에 쐐기박듯 두었습니다. “내 형제들아, 무엇보다도 맹세하지 말지니, 하늘로나 땅으로나 아무 다른 것으로도 맹세하지 말고, 오직 너희가 그렇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렇다’ 하고,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라’ 하여 정죄 받음을 면하라.”
이것이 말씀하시는 바가 무엇일까요? 가족 간에 도가 지나친 대화가 오가다 보면 맹세를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내가 당신 아들이다!’는 등의 맹세가 오갑니다. 더욱이 매우 극단적인 맹세들도 오갑니다. ‘그렇다면 내 손에 장을 지질께!’ 결국 이것이 올무가 되고, 이로써 시비의 판이 커집니다. 파국으로 가지 않으면 다행입니다.
12절은 바로 이러한 경우를 두고 주시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맹세하지 말라!” 그리고 이렇게 맹세하는 대신에 Yes와 No만 분명히 하며 살라는 말씀입니다. 물론 Yes와 No는 하나님의 정의와 연관된 삶에 국한해 보이는 태도여야 합니다. 분명한 것은, 맹세는 가족의 화목에 화를 불러오는 불씨가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가족은 맹세가 아닌 믿음으로 사는 사랑입니다. 그래서 믿음의 가정은 모든 식구들이 박쥐가 됐으면 좋겠습니다.☺
2. 이제 ‘기도’를 살펴보겠습니다. 무엇보다도 본문은 기도가 절실히 필요한 상황과 사람에 대해 친절하게 안내합니다. 고난/고난 당하는 자와 기도입니다.(13절) 병듦/병든 자와 기도입니다.(14, 15절) 죄 고백과 기도입니다.(15, 16절)
13~16절을 보겠습니다. “너희 중에 고난 당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찬송할지니라.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그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그를 위하여 기도할지니라.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그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받으리라. 그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백하며 병이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큼이니라.”
분명 이 말씀은 신앙공동체인 교회를 염두에 두고 주신 말씀입니다. 그런데 교회는 믿음의 가정들의 집합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믿음의 가정에게 주시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가정에 필요한 또 하나는 ‘기도’입니다.
사실 ‘기도’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은 신앙행위입니다. 만약 기도가 없다면 우리는 어디서 그리고 어떻게 천국의 힘을 얻을 수 있을까요? 참으로 기도가 있어서 감사할 따름입니다.
사실 믿음의 가정은 총성 없는 영적 전쟁터입니다. 가장 안심이 되는 ‘쉼터’이자 ‘숨터’(숨을 쉴 수 있는 공간)이지만, 사탄의 공략이 매우 극심한 곳이기도 합니다. 19절과 20절에서 이를 엿볼 수 있습니다. “내 형제들아 너희 중에 미혹되어 진리를 떠난 자를 누가 돌아서게 하면, 너희가 알 것은 죄인을 미혹된 길에서 돌아서게 하는 자가 그의 영혼을 사망에서 구원할 것이며, 허다한 죄를 덮을 것임이라.”
이 말씀은 “죄인을 미혹된 길에서 돌아서게 하는 자가 될 것”을 권면하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오늘의 주제에 비추면 “너희 중에 미혹되어 진리를 떠난 자”가 가족 중에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경우는 여러 이유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중 가장 큰 이유가 사탄의 공략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탄의 행위가 매우 은밀하고도 극심하게 역사하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사탄은 가정을 무너뜨리면, 교회도 쉽게 무너질 수 있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렇게 믿음의 가정은 총성 없는 영적 전쟁터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돕는 힘인 ‘기도’가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그렇기에 ‘기도’는 너무도 중요한 영적 무기입니다. 그래서 믿음의 가정은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 없는 가정은 무너집니다.
아마도 가족을 위해 기도할 일은 매일 매일 많을 것입니다. 혹시 기도할 것이 없다면, 이는 바르게 신앙생활 하지 않는 증거입니다. 기도는 할수록 시간이 부족합니다. 기도할 일이 너무 많습니다. 그렇기에 기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기도 없는 삶은 허파에 바람이 든 삶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삶의 우선순위는 기도여야 합니다.
혹시 기도의 힘을 과소평가해서 기도를 안 하는 것은 아닌지요? 17절과 18절을 보겠습니다.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 그가 비가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즉 삼 년 육 개월 동안 땅에 비가 오지 아니하고, 다시 기도하니 하늘이 비를 주고 땅이 열매를 맺었느니라.”
그렇습니다. 기도를 결코 과소평가하지 마십시오. 엘리야처럼 간절히 기도하십시오. 우리도 엘리야처럼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도 우리도 같은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엘리야처럼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기도의 응답을 받을 수 있습니다. 대신 엘리야처럼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그가 비가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즉 삼 년 육 개월 동안 땅에 비가 오지 아니하고, 다시 기도하니 하늘이 비를 주고 땅이 열매를 맺었느니라.”
바라기는 여러분의 가정에 엘리야와 같은 간절한 기도가 있기를 소망합니다. 바라기는 여러분의 가정에 사랑의 인내가 있기를 소망합니다. 자, 오늘부터 박쥐가 되기로 할까요?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