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시풍속 (歲時風俗)
임병식rbs1144@hanmail>net
오늘은 정월 대보름날. 아침에 오곡밥을 먹었다. 조와 수수, 콩과 밤이 골고루 넣어 지은 찰밥이었다. 하나는 매장에서 사고, 다른 하나는 아는 분이 보내와 두 그릇을 절반씩 섞어서 먹었다. 찰밥은 별 반찬이 없어도 먹기 좋다. 밥을 지을 때 약간 간기를 해둔 탓에 감치나 깍두기 한 두 개만 있으면 족하다. 그런데 미리 장만한 고사리나물과 토란대무침이 있어서 함께 곁들여 먹었다.
오곡밥을 먹으니 옛날 생각이 많이 났다. 쌀밥은 물론, 별식을 먹기가 어렵던 시절에 대보름날은 드물게 오곡밥을 맛보는 날이었다. 찰밥을 먹었더니 하루 종일 배가 든든하다. 예전에 찰밥은 집에서만 맛보던 게 아니었다. 보름날 오후에 들불을 놓고 초저녁에는 집마다 감춰놓은 찰밥김밥을 꺼내 먹었다.
그것은 주로 덕석이나 짚더미에 넣어두었는데 용케도 그것을 찾아 먹었다. 다음에는 들판에 나가 쥐불놀이를 했다. 그런 다음에는 이웃마을과 패를 갈라 전투놀이가 시작되었다. 그때가 6.25전쟁이 종전된 지 얼마 되지 않아서인지 그런 과격한 석전놀이가 벌어졌다.
그러한 날은 어김없이 쌍방 간에 불상사가 벌어졌다. 머리가 터지고 몸이 다치는 일이 많이 일어났다.투석전은 먼저 척후병이 이웃마을 언덕으로 숨어들어가 가습을 감행한다. 그러면 그것은 큰 싸움으로 확산이 되었다. 이때 머리가 터지만 장독에서 된장을 퍼와 바른 다음 동여맸는데, 그 모습은 영락없는 상의용사를 방불케 하였다.
찰밥서리와 노둣돌에 놓아둔 돈을 수습하는 일은 반드시 염탐꾼이 필요했다. 그 장소를 정확히 알려주지 않으면 꺼내오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찰밥서리는 주로 형 또래가 나서고 냇가에 놓은 징검다리에서 감춰놓은 돈을 수습하는 일은 나이어린 아이들의 차지였다. 당시 마을 어른들은 냇가 징검다리 사이사이에 볏짚으로 엮는 보조 다리를 놓았는데, 대보름날은 거기에다 돈을 넣어 두는 풍습이 있었다. 그 돈을 꺼내서 화약을 사 딱총이나 돌로 터트리며 놀았다.
그러다가 달을 넘겨 차차로 해동기미가 보이면 마을에서는 제각기 방천작업이 시작되었다. 논둑이 부실한 곳은 무너지기가 십상이어서 보수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시급한 일이었다. 무논에 물을 잡아놓아야 하는데 둑이 무너진 논은 물을 담아놓기가 어렵기 때문이었다.
그 작업을 하느라 들녘에서는 진종일 “떡쿵 떡쿵‘하는 매질소리가 울려 퍼졌다. 다소 떨어진 곳에서는 그 소리가 동작과 엇박자를 내었다. 내려치고 난 한참 후에야 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때 “떠억”하는 소리는 말뚝이 박히는 소리고 “쿵”하고 울리 소리는 산울림이 합창하는 소리였다. 그런 일 말고도 마을에서는 겨우내 손보지 못한 마을길을 고치기 위해 공동 작업을 했다. 이때는 아이들 도 보자기에다 자갈을 담아 나르며 힘을 보탰다.
이 무렵 나는 마을 사람들이 상보를 막던 일을 잊지 못한다. 우리 마을은 산골짜기에서 흘러내린 물이 많은데도 가둬놓지를 못하여 해마다 가뭄을 겪었다. 이를 극복하고자 마을사람들이 힘을 함쳐 보를 막은 것이었다.
작업은 마을 장정들이 주축이 되었다. 한편에서는 산에서 큰 돌을 져 날리고 다른 한편에서는 축대를 쌓았다. 그때 본 광경이다. 장정들은 새참을 먹고 나면 한자리에 모여서 힘자랑을 하였다. 두패로 나누어 겨루었다. 하나는 한손으로 지게 발목을 잡고 들어올리기와 다른 하나는 무거운 돌을 지게에 얹어서 일어나는 것이었다. 이중에 한손으로 지게 올리기는 요령을 아는 사람은 더러 성공했다.
하지만 큰 돌을 지고 일어나는 것은 쉽게 하지 못하였다. 마을 청연 중에서는 오직 형님만 그것을 지고 일어났다. 그 때문일까, 형님은 나중 늙은 말년에 무릎 관절염으로 고생을 많이 했다. 세상에 미련한 일이 먹기 내기라지만 힘자랑 또한 그런 것과 진배가 없어서 사서 고생을 한 것이었다.
보가 막아지니 마을은 몽리답(蒙利沓)이 늘어나고 해마다 겪은 물싸움은 크게 줄어들게 되었다. 흔히 쓰는 말에 ‘아전인수’라는 말이 있지만 정말 물싸움이야 말로 격하기가 이를 데 없어서 폭력도 빈번하게 일어났는데 많이 없어졌다.
보가 생겨난 후 변화는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물길이 늘 닿는 논고랑에서는 미꾸라지와 붕어도 많이 잡혔다. 그리고 토화도 많이 잡혔다. 단결심은 여러 면에서 위력을 발휘했다. 마을 대항 배구시합이나 축구시합에서도 결코 지지 않았다. 60여 호 남짓한 마을은 무슨 경기를 하더라도 너끈히 한 팀을 구성할 수 있었다. 농악놀이도 그렇고 부녀자들이 모여서 하는 강강순례도 숫자가 부족하지 않았다. 이런 마을에서는 마을대항 마라톤 우승자가 나오고 씨름판에서 장사로 등극하는 사람도 나왔다.
한데 이런 마을이 오십 여년이 지난 지금은 마을의 세가 20여 호로 대폭 줄어들었다. 젊은이도 살지 않고 허리 굽은 노인들만 고향을 지키고 산다. 아기 울음소리도 멎은 지 오래고 고향 초등학교는 문 닫은 지 십 수 년이 지나버렸다. 활기찬 세시풍속도 사라졌다.
이러한 고향을 나는 근래 들어 발걸음을 하지 않는다. 고향집도 헐리고 없지만 부모님 산소도 다른 곳으로 이장을 한 터라 가지를 않는다. 이유는 단 하나다. 쇠락한 것을 풍경을 보고 싶지 않아서다.
차라리 옛 고향 풍경을 마음에나 담고 살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러나 어찌 대상이 존재하는 데 잊고 지낼 수가 있을까. 그래서 누구로부터 간간히 고향 소식을 듣게 되면 마음만 안타깝고 답답하다.
그래서인지 보름을 맞아 혼자서 오곡밥을 먹노라니 옛 추억만 파노라마처럼 스쳐간다. 장정들의 활기찬 모습, 순박한 웃음소리. 그런 온몸에서 묻어나는 인정만 그립다. 이제는 바야흐로 농경시대의 끝나가는 것일까. 회한만 가득해진다.(2020)
첫댓글 대보름 풍속과 더불어 해동기를 맞아 논방천을 하고 마을사람들이 힘을 모아 공동작업을 하며 함께 모여 어울리던 고향의 추억이 아름답기도하고 한편으로 무상하가도 합니다 저도 비슷한 추억을 간직하고 있기에 선생님의 회포에 공감하게 됩니다 저도 오곡밥을 먹긴했는데 옛 시절의 보름밥이 그리워집니다
정월 대보름을 맞아 오곡 찰밥을 먹다보니 예전에 고향에서 대보름을 보내던 추억이 떠올랐습니다. 그때는 가난하기는 했지만 모든것이 역동적이었는데, 지금은 농촌이 인구도 줄어들고 쇠락의 길을 걷다보니 쓸쓸하기만 합니다.
고향집도 뜯어내고 없고 부모님 산소도 거기에 없다보니 발길 "또한 멀어지지 않나 생각됩니다.
글을 읽으니 눈에 선합니다 저희 고향도 비슷했습니다
읽어주시고 댓글 달아주셔서 고맙습니다. 오늘은 비가 제법 오는군요.
마을 풍습이 그리도 살벌했으니 기억에 각인될 수 밖에 없겠습니다. 정월 대보름 오곡밥도 남다르게 느껴질 거 같네요.
엣날에는 놀이를 해도 시기가 6.25를 치른지 얼마되지 않아서인지 그런 살벌한 놀이를 하고 지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