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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하언(鄭夏彦)은 조선 영조 때 속대전을 편찬 서필한 분으로 연일정씨 判決事공파 지파 연일정씨 공주공파 국동종회의 족보 등 하언(夏彦)파로 등재되어 있다. 이 명박 대통령 정부 국무총리를 역임 한 정 운찬 총리 직계 7대조이다. 묘는 충남 공주 탄천면 국동리 선산에 저자의 고향이기도 한 국동마을에 있다.
두타산 등산길 무릉계 삼화사 직전 냇가 가운데 큰 글자로 초서체 비필난초로 암각되어 있다. 저자가 연구 조사한 결과 암각한 시기는 1752년 조선 영조 28년 우리 영일정씨 임신대보가 출간 한 전해, 1751년 봄 이라 하겠다.
암각한 주인공이 여러 인터넷 사이트에 옥호거사가 양사언으로 오기 되어 이를 바로하고자 하였다. 옥호거사는 바로 정하언이라 소명 제시 한 문서가 존재 하여 이를 공개 하기로 하였다.
다음은 관련 사진이이다.
무릉선원중대천석두타동천[武陵仙源中臺泉石頭陀洞天]과
하방서(下方書)옥호거사춘신미[玉壺居士春辛未]
무릉선원 중대천석 두타동천은 옥호거사 정하언이 암각 한 것으로, 하방서 옥호거사춘신미(玉壺居士春辛未)는 1751년 신미년 봄 정하언(鄭夏彦)이 쓴 표시로, 무릉계곡 반석 암각문의 정하언은 하방서(下方書)에 옥호에 거사를 붙여 옥호거사(玉壺居士)라 한 것이다. 파일 제목으로 옥호를 우리말로 구슬 항아리라 풀이 하여 정하였다. 위와 같이 무릉계곡 반석의 암각문 옥호거사춘신미(玉壺居士春辛未)의 하방서는 정하언이 옥호거사로 표시 한 것임을 기술하여, 옥호거사는 정하언이며 1751년 삼척부사이던 신미년 봄에 방문 12 글자로 반석에 [무릉선원중대천석두타동천(武陵仙源中臺泉石頭陀洞天)을]암각 한 것이라 하겠다.
강원도 동해시 두타산 삼화사 가는길 삼화동 무릉계곡의 암반석상 암각자에 관하여, 현재 관광 안내문 및 기타 문서 홍보 책자 여러 곳에, 인터넷 으로 잘 못 기록되고 알려 지고 있는 사실 관계를 알아 보았다. 그리고 과거 조선 후기 삼척 도호부 관할이던 현재 동해시 및 삼척 지역의 금란계와 동해시 문화원 등의 홍보 활동이 바르게 되어 있지 아니하고 있었다. 논자가 알아 보던 중에 아무도 바로 하고자 하는 노력이 없음을 알고, 누가 이 글씨를 반석에 언제 어떻게 하였는지를 직접 찾아가 탐문하고 현장을 조사하여 글씨의 암각자는 조선 중기 명종 선조 때 문신 봉래(蓬萊) [양사언(楊士彦)]이 아니고, 조선 후기 영조 때 문신 옥호거사(玉壺居士) [정하언(鄭夏彦)]의 암각문(岩刻文) 이라 규명 하고자 당시의 문헌을 거증 제시하고 기술하였다. 암각문 본문 [무릉선원중대천석두타동천 (武陵仙源中臺泉石頭陀洞天)]과 하방서(下方書) [옥호거사춘신미(玉壺居士春辛未)]에 관하여, 양사언(楊士彦)은 조선 전기 후반의 명종 선조 때 문신이며, 1571년 신미년은 조선 중기 전반 영조 때 1751년 신미년의 삼척부사(三陟府使) 정하언(鄭夏彦) 때와는 연대가 180년 차이가 있다. 박한설(朴漢卨) 교수의 논문에 의하여 마모도의 측정방식으로 양사언이 암각 한 것이라 전하여지고 있다. 이리 하여 인터넷 등 기타 홍보에 양사언으로 기재 되고 있어, 본 저자는 객관적으로 비과학적이지만 박교수가 마모도를 최후 측정 시기로부터 현시점에 이르러 마모상태가 글자를 잘 알아 볼 수 없이 된 상태로 되어 있음을 현지 답사 하여 알아 보게 되었다. 이 것을 헤아려 보면, 그 상태의 근래 반세기의 마모량을 살펴 볼 때, 양사언 이후 400년이 된 지금은 흔적도 없게 되었 다 볼 수가 있다. 이 마모도의 측정은 현 시점에서 박교수의 오류 임이 드러 난 것으로 할 수 있는 것이다.
하방서를 살펴 보면 새긴자의 표시가 옥호거사로 되어 있는데 이를 잘 알아보지 않은 박교수의 오점이 있다. 옥호거사는 양사언이 어떠 한 명호로도 사용 한 문서나 암각에 기록물이 없다. 본 저자는 조사 결과 확신 시점에 이르러 문중의 선조 이기도 한 정하언의 후손 정육(鄭堉)의 유집 정씨가승(鄭氏家乘)과 외손 임천상(任天常)이 지은 지당(止堂)집 및 인보(印譜) 인각을 거증제시 하여 옥호거사는 정하언의 명호 중에 별호로 사용되어 암각자가 시기적으로나 글씨로 보나 시문 등에 나타나고 있는 것을 기술 하였다. 정조 때 영의정을 한 채제공(蔡濟恭)과 삼척에서 부사를 한 정하언(鄭夏彦)의 주고 받은 시문에도 옥호(玉壺)가 잘 나타나 있다.
정하언(鄭夏彦) 옥호(玉毫)와 채제공(蔡濟恭) 번암(樊巖)은 영조. 정조 시기 문신으로, 명종. 선조 시기 양사언과는 시기적으로 신미년 1571년과 1751년은 다르다. 옥호에 대하여 양사언이 이런 호를 사용한 흔적이 전혀 없는 것에 비추어, 정 하언이 이런 호를 사용 한 흔적이 많아 관련성이 있으므로, 옥호 관련 정하언과 번암 채제공의 주고 받은 시문을 소명하여, 무릉선원 중대천석 두타동천은 하방서 옥호거사의 각자표시 옥호거사춘신미에 의하여 1751년 신미년 춘(봄)이 맞으므로. 암각 한자는 정 하언이 삼척부사로 있던 1751년 신미년 봄에 이 곳을 방문하고 이 글자를 새겼다 밝히고자 한다. 박한설 교수가 마모도로 양사언이라 한 것도 오류라 주장 한다.
이글에서 핵심인 논지로 옥호(玉壺)를 규명 하고자 한다. 옥호는 지명으로 정하언(鄭夏彦)이 자호(自號)로 사용한 사실이다. 옥호는 옥구슬같이 아름다운 호리병, 목이 길고 밑이 등근 항아리다. 어원은 여자 생식기의 자궁을 뜻 하는 숨은 의학용어 이나 연상이 나빠서 잘 사용 아니하는 어원으로 닮은 병, 호리병을 지칭한다. [백과사전 인용]
금 세기 정보통신이 눈 부시게 발달 많은 이가 좋은 정보를 받아 볼 수 있다. 그러나 그 중에 오보도 또 한 많은 것이 사실이다. 강원도 동해시 무릉계곡 삼화사를 여행중 우연히, 무릉계곡 크고 넓은 반석에 비필난초 큰 글자로 12글자 무릉선원중대천석두타동천[武陵仙源中臺泉石頭陀洞天]과 아래 작은 글씨 하방서(下方書) 7글자 옥호거사춘신미[玉壺居士春辛未]라는 글이 암각되어 있는 것을 보고 주위 안내문을 읽어 보았다. 이 암각문을 조선 명종 선조 때 강릉부사 양 사언(楊 士彦) 또는 영조 때 삼척부사 정 하언(鄭 夏彦)이 새겼다는 두 가지 설이 있어 알아보니 옥호(玉壺) 정하언(鄭夏彦)이 쓴 것을 알게 되어 이분의 행적을 여러 방법으로 알아보던 중에 문중에 선조임을 알게 되었다. 양사언과 정하언은 다른 시대의 인물이고 양사언이 관할지역도 다른 이 곳에 와 글을 이 시기에는 도저히 새길 수가 없으며 옥호라는 하방서의 글자는 정하언외에 아무도 아명, 자, 자호, 은호를 사용 한 사실이 없고, 하방서의 마모도[磨耗度]를 박한설(朴漢卨) 교수가 주장 한 논문은 사실관계를 재조명 아니 할 수 없다. 양사언의 글씨체와 정하언의 글씨체가 다른 점도 다음 본문에 기술하고 근거를 제시 하기로 하였다.
본명과 칭호에 관하여 살펴보면 정하언은 문서나 암각문에 옥호[玉壺], 미중[美仲], 이은[吏隱], 지당[止堂], 국산[菊山]등 시대와 장소에 따라 처세를 달리하여 사용 한 흔적이 있고, 정씨가승(鄭氏家乘)과 지당집(止堂集), 족보, 등에 있으며 사용인장도 있다. 조선 영조 정조 때 인물 영의정을 한 채제공(蔡濟恭)이 삼척에 귀양 와 같이 시를 주고 받고 노니던 장소 시문에도 옥호(玉壺)에 관한 기록이 있다. 이와 같이 암각자를 옥호거사라고 명시 하였음에도 이를 간과하고 마모도만의 측정에 의한 조사 내용으로 세운 학설을 바탕으로 한 양사언 설에 대하여, 여러 정황과 역사적 사실을 소명 거증 하고, 안내문과 여러 관계기관의 홍보책자와 인터냇 등 공문서에 게재 한 내용을 바로 하며, 바른 홍보를 하도록 이에 암각자 주인공이 옥호 정하언 이라 규명 하고자 하였다. 시문 및 박한설 교수 논문 김수문 선생 암각자 논문 인용.
1) 시문의 내용을 살피면 마모도를 근거로 옥호거사가 양사언이라 주장하는 것은 허구다
옥호거사라는 암각 한자의 표시를 간과하고 신빙성 없는 박한설 교수의 마모도만 가지고 다른 증거도 없이 양사언 이라 단정 한 것은 오류라 하겠다.
조선 후기 삼척부사 옥호(玉壺) 정하언(鄭夏彦)과 번암(樊巖) 채제공(蔡濟恭) 두사람 사이 남긴 시문을 살피어 옥호의 글자가 담긴 시문에 관계를 파악 하고 동해시 [무릉선원중대천석두타동천(武陵仙源中臺泉石頭陀洞天)]의 암각자 주인공을 밝힌다.
-정하언(鄭夏彦) 옥호(玉壺)는 1750년 영조 26년 경오 제수되고, 1751년 영조 27년 신미 삼척(三陟)부사로 2년 째부임 하고 있을 때, 채제공(蔡濟恭) 번암(樊巖)은 귀양을 이 곳 삼척에 왔었다, 채제공은 영조. 정조 시기 문신으로 정조 때는 영의정을 하였다, 명종. 선조 시기 양사언과는 시기적으로 신미년 1571년과 1751년의 신미년은 180년 차이가 나고 다르다.
* 옥호의 호가 양사언은 어디에도 찾아 볼 수 없어 관련이 없고, 오직 정 하언에 관련성이 있다. 다음 옥호 관련의 시문은 시기적으로 번암과 같은 것이니, 양사언이 무릉계곡의 무릉선원 중대천석 두타동천의 암각자가 아니고 다음 시문과 같이 하방서 옥호거사의 각자표시는 1751년 신미년 춘(봄)이 맞다. 그 암각자는 정 하언의 암각자이다.
채제공(1720~1799)이 1751년 7월에 귀양살이(1년간) 왔을 때 정하언(鄭夏彦), 1702~1769)은 18세 차이 불구 채제공(蔡濟恭, 1720~1799)에 대하여 친구같이 접대하며 부족함이 없이 서로 아끼며 지냈다. 채제공이 23세 어린나이로 과거에 급제하였으나, 중인의 무덤이 있는 산을 탈취하여 31세(1751년)에 삼척에 유배되어 왔다. 나이로 보면 채제공은 18세 어리지만 하언공은 채제공에게 매우 가까이(1751~1752) 지냈으며, 유배생활 중 수십편의 시문을 정하언과 같이 상호 조화를 잘 이루어 명시로 전해지고 있다. 1751년 신미년 번암(樊巖) 채제공(蔡濟恭, 1720-1799)이 1751년 7월 삼척에 1년 간 귀양살이를 할 때 절친하게 지내던 정하언 부사를 ‘옥호(玉壺)’ 또는 ‘옥호공(玉壺公)’으로 호칭하는 한시가 전한다. 예컨대 ‘重訪武陵吟奉玉壺’, ‘余之自武陵溪轉訪指祖菴也書玉壺公曰’, ‘自菴下纔脫雲梯有僧急來言玉壺公’, ‘玉壺公以公赴旌善歸路約會於虎溪故云’, ‘玉壺公至共坐武陵石上雲上人亦與焉’이라는 한시에 덧붙인 시구를 보아도 알 수 있다. * 두 사람은 신미년 영조 시대 삼척(三陟)에서 만났다 * 오십천을 지나 만리도[萬里島]를 방문한 정하언 삼척부사와 오십천을 지나 만리도[萬里島]를 방문한 채재공과의 시문,
-옥호 공과 바다에서 배를 타고 만리도를 방문하다.
[同玉壺公浮海 訪萬里島]
-답청일에 오십천에 띄운 배 위에서 읊었다. 이때 옥호 공이 식구를 다 이끌고 죽서루에서 와서 화전(花煎)을 부쳐 먹으며 놀았다.
[踏靑日 五十川舟中有吟 時玉壺公盡室爲竹樓煮花之遊]
-옥호 공과 봄 강물에 배를 띄우다.
[同玉壺公泛舟春江]
-다 함께 말 타고 성을 돌다.
[偕立之巡城]
-오십천 다리 옆에 작은 섬이 있는데, 삘기가 부드럽게 자라 사랑스러웠다.……
내가 웃으며 그렇다고 말하고,
그 섬을 ‘완재구’라 이름 짓고는 운자를 불러 각자 시를 지었다.
[五十川橋傍有小島 草莎柔可愛……余笑曰然 仍號其島爲宛在丘 呼韻各賦]
-동무하며 남산을 유람하다.
[同立之遊南山]
[정하언 일대기 정하언(鄭夏彦)]
정하언(鄭夏彦, 1702-1769)의 자는 미중(美仲), 호는 지당(止堂)‧옥호자(玉壺子). 국산(菊山) 등 여러 자호를 즐겨 썼다.
공주목사 정무(鄭 堥) 와 대사헌 노숙동(盧叔仝)의 의 딸 풍천노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조실부모 하고, 두 형마저 일찍 세상을 떠, 인근 부여군 빙고치(氷庫峙)에 살던 형 정하성(鄭夏盛)의 집에서 자랐다. 그는 어려서부터 영특하고 학업에 출중하였으며 1735년(영조 11) 문과에 급제하였다. 이후 의주 부윤, 삼척부사 ,병조참의 ,여주목사등 여러 관직을 역임 하고, 특히 영조와 함께『속대전(續大典)』의 편찬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고, 내직으로 좌부승지와 대사간을 역임하고, 특히 문장과 서예가 뛰어나 각종 어제(御製)의 편제는 물론 광범문의 편액을 쓰고, 홍화문(弘化門)의 편액(현재 창경궁 존재)을 쓰기도 하였다.
동해시 무릉계곡에 ‘무릉선원 중대천석 두타동천(武陵仙源 中臺泉石 頭陀洞天)’과 죽서루 절벽 암각문, 유실된 서울 번동 드림랜드, 명덕동 ‘수옥대(漱玉臺)’기가 있고 충남 부여 ‘청풍정(淸風亭)’기가 그의 작품이다.
이괄의 난을 피해 공주에서 은신한 인조 임금에 대한 시(詩)가 공주 공산성 만하루(挽河樓)에 있다. 유고로『지당집(止堂集)』6권이 있으며, 충남 공주시 탄천면 국동리 선산에, 부인 조석명(趙錫命, 1674-1753)의 딸 풍양조씨(1707-1756)와 합폄한 묘소가 있다.
[ 정하언(鄭夏彦) 일대기 년표]
1702 숙종 28년 임오 11월 18일 출생.
1705 ~ 31 을유 부(목사공, 諱 堥) 졸.
1707 ~ 33 정해 모 졸.
1715 ~ 41 을미 정부인(夏彦) 풍천 노씨 생
1720 ~ 46 경자 19세 장가.
1721 경종 01년 신축 20세 진사 합격.
1729 영조 05년 기유 29세 백마강 옥호(玉壺)동 상경.
1735 영조 11년 을묘 34세 증광문과 합격.~
~동년 ~ ~ 7월 기린(인제) 찰방.전적, 예조, 병조 좌랑.
1740 영조 16년 경신 정언 중앙 입조.
1741 영조 17년 신유 경상도사 겸, 독운어사.
1742 영조 18년 임술 고산찰방 병환으로 부임 불가.
1744 영조 20년 갑자 호서의 도사.
~동년 ~ 가을 입조 중앙 속대전 찬집랑, 문학사서.
1745 영조 21년 을축 문사랑청(국문장 기록서기) 장령, 연좌 아비처벌 성세운운, 귀양가던 중 면죄부. 책임 자퇴 귀가.
~순연 봉상시정, 울진현감 부임 중, 환조 속대전 완성, 청도군수.
1747 영조 23년 정묘 초산부사 발령 중, 의주부윤으로 나감. (찰미고)察眉庫
1749 영조 25년 기사 중앙 입조 승지, 형조, 병조참의 거쳐, 명년에
1750 영조 26년 경오 외직 삼척부사. 종숙질 간 노비 분쟁의 소.
★ 1752년 영조 28년, 임신대보 간행.
1754 영조 30년 갑술 여주목사, 사대부 상사 쌀 2가마 대여, 파직 해관.
⓵명덕동 지당. 이상향 건설 은둔.
1759 영조 35년 기묘 중앙 입조 대사간. 원주목사.
1761 영조 37년 신사 원주 판목 고을강등, 승지, 형조, 호조참의, 해직.
⓶명덕동 귀향 별업, 대신 유선양 밀고자질 거짓 판명.
1764 영조 40년 갑신 장예원 판결사. 이어 능주목사.
1765 영조 41년 을유 자퇴, 부친 3년상 법식 종복.
1767 영조 43년 정해 입조 중앙 공조참의, 친임 임금제술 칭송.
1768 영조 44년 무자 2차 여주목사,
1769 영조 45년 기축 병환, 5월 17일 졸, 68세(만67),
묘 공주 국사동 임좌 언덕 유언 장례.
2) 김수문 선생 “삼척도호부 암각자 연구논문” 인용 한 글 [옥호거사춘신미(玉壺居士春辛未)]로 바르게 하여야 ~ 다수의 연구자가 춘(春)을 서(書)로 보는 무식한 연구를 배척한다
‘書’자 보다는 ‘春’자로 본다. 왜냐면 ‘書’자는 없거나 있어도 달라질 게 없는 글자이기 때문이다. 굳이 서자를 돌에 새길 필요성이 없는 것이다.
위 암각자 옥호거사(玉壺居士)는 정 하언의 암각자이다. 옥호자의 암반각서 하방서가 멸실된 글자 없이 일곱 글자가 새겨져 있는데도 도대체 무슨 생각인지 ‘玉壺居士書 辛未仲春’으로 아홉 글자라 한다.
『문헌·금석문 자료로 본 두타산 무릉계』 등에는 ‘玉壺居士書 辛未’로 기록했다.
관련 문헌 내용 동해시, 『동해의 뿌리』, (1982), 138쪽. 玉壺居士書 辛未仲春, 교육청, 『해 뜨는 고장 동해』, (동해교육청, 1995), 30쪽.玉壺居士書 辛未仲春 김형섭, 「동해시의 자연환경과 천연기념물」, 『동해시 역사와 문화유적』, (관동대박물관·강원도·동해시, 1996), 531쪽. 玉壺居士書 辛未仲春 박한설, 「동해시 무릉계의 문화유적」, 『동해문화논총』, (동해문화연구회, 1996), 54쪽. 玉壺居士書辛未 장정룡, 『동해시 삼화동의 기층문화』, (동해문화원, 1998), 97쪽. 玉壺居士書辛未. 배재홍, 『문헌·금석문 자료로 본 두타산 무릉계』, (동해문화원, 2005), 131쪽. 玉壺居士書辛未 손재영, 『두타산과 무릉계곡의 문화적 가치와 관광화 방안』, (동해문화원, 2005), 30쪽. 玉壺居士書辛未. 동해문화원, 『두타산의 역사』, (2009), 235쪽. 玉壺居士書辛未. 동해시, 『동해시 30년사』, (동해시, 2010), 349쪽. 玉壺居士 辛未. 다음은 동해시청 홈페이지의 관광안내 자료 무릉계곡 관련 부분에, ‘仲春’이 하방서 되었다고 안내를 하고 있다.
이 일관성이 없는 동해시 제작 안내 표지판을 ‘玉壺居士書 辛未’와 ‘玉壺居士 辛未春’ 표기 및 옥호거사(玉壺居士) 정하언(鄭夏彦)이라는 것에 대한 표기를 금란정 부근 금란계 회원의 안내도 함께 바로 하여야 하겠다.
‘무릉선원 중대천석 두타동천(武陵仙源 中臺泉石 頭陀洞天)’ 12자의 글쓴이가 하방서에 자신이 ‘옥호거사(玉壺居士)’임을 밝혔는데도 누구인지 제대로 규명을 못하였다. 박한설(朴漢卨) 교수는 호(號)에 매달리면 이조원‘李肇源說’이나 정하언‘鄭夏彦說’과 같이 전혀 가망이 없는 설이 나온다고 쉽게 단언하면서 봉래 양사언이 썼다고 발표하였고, 후학들은 그대로 답습 인용을 하는 형편이다.
이는 옥호거사에 대한 접근을 원천 봉쇄하고서 암반각서의 마모도(磨耗度)를 근거로 분석하여 결론을 도출한 것이다. 박교수의 지적처럼 ‘이조원’의 생존 시기는 1758-1832년으로 옥호거사의 주인공이 될 수 없다는 것에는 이의가 없다.
그러나 강릉부사였던 양사언이 1571년 10월에 전임 정두형 부사 조문을 위해 비천마을에 왔다가 무릉반석에서 옥호거사라는 호로 글자를 새겼다고 하면서 암반각서(巖盤刻書)의 마모(磨耗) 정도를 기준으로 보면 정하언 부사의 글씨가 될 가능성은 전혀 없다고 하였다. 이 것은 가을이고 하방서는 춘(春)봄으로 굳이 서(書)자도 모르는 연구는 엉터리 인 것이다.
[박교수의 주장을 도표로 재구성하면 다음과 같다]
[비문을 살피다.]
1. 이 묘갈은 현재에 이르기까지 4차례에 걸쳐 세워졌다.
2. 양사언이 찬한 묘갈명을 보면, 효성이 지극한 정두형 부사가 부친의 간병을 위해
강릉부사직을 사임한 후 귀향하여 부친 병간호를 하면서 지내다 이듬해인 신미년에 부친상을 당했다.(歸鄕翌年辛未) 그런데 시묘하던 정두형 부사도 부친이 돌아가신 해 10월 15일에 별세하였다는 내용(哀毁致疾是年十月十五日)이 확인된다. 그러나 양사언 이 비천마을에 왔다가 무릉반석을 다녀갔다는 근거가 없을 뿐 아니라 회양군수일 때 자신의 관할 구역인 금강산 만폭동 들머리에 새긴 ‘蓬萊楓嶽元化洞天’이라는 글자의 洞天과 무릉반석의 洞天은 붓의 흐름이 서로 다르다. 문제의 암각서를 동해시에서는 양사언설과 정하언설 두 가지를 다 안내하고 있는데 참으로 무성의한 일이다. 왜냐면 양사언 학회에 문의를 하거나 붓의 흐름을 비교 분석하면 쉽게 해결될 일이기 때문이다. 다음은 강남대학교 홍순석 교수가 집필한 『봉래양사언유적대관』에서 ‘상주동천암 암각문’과 ‘금강산 만폭동 암각문’ 그리고 ‘동해 무릉계곡 암각문’을 비교 분석하면서 내린 결론이다.
3. “만폭동 암각문과 상주 동천암의 서체는교거의 일치한다. 그런데 무릉계곡의 암각문은 차이가 드러난다. 특히 「洞」자의 「氵」부수를 초서로 쓴 서법과 「天」자의 끝부분이 위로 향해 있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정도의 사실만으로도 동천암은 만폭동의 탁본을 새긴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동해시 무릉계곡의 암각문은 양사언의 필적으로 보기에는 무리이다”
10월은 가을로 봄이아니다.
그림 [비문을 보아도 엉터리 주장임을 알 수가 있다]
4. 그리고 하방서 ‘玉壺居士春辛未’와 ‘玉壺居士書辛未’ 중에서 제대로 규명되어야 할 것이다. 이 또한 오래된 탁본 소장가를 찾아 전문가의 판정을 받아 해결하면 쉽게 풀릴 문제이다. 내 소견을 보탠다면 ‘書’자 보다는 ‘春’자로 본다. 왜냐면 ‘書’자는 없거나 있어도 달라질 게 없는 글자이기 때문이다.
5. 반면에‘春’자라면 암각서 각석시기를 정확히 밝히면, 1751년 신미(辛未)년 춘(春)봄에 정하언 부사가 각석(刻石) 했음을 알 수 있다.
[동천의 정하언과 양사언의 글씨체가 다르다.]
동천(洞天)의 글씨체가 다르다.
그림 동천(洞天) 글씨체 비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