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사의 삶까지 닮고자 했던 서예계 거장 한글서예운동으로 문화지킴이 자처했던 고서화 수장가
우리 선조들은 서예를 학문과 정신 수양 수단으로 삼아 예술로 승화시켰습니다. 정신을 통한 아름다움이 나타난다고 보았던 서예는 정적인 것 같지만 동적입니다. 동양적 서예관은 ‘서즉화 화즉서(書卽畵 畵卽書, 글은 곧 그림이요, 그림은 곧 글이다)’라 하여 점은 끊임없이 움직이는 동태이며, 선은 생명력과 의미가 있는 획으로 정신을 담고 있다고 보았습니다. 올곧은 선비들은 서예는 심성 깊은 곳을 드러내는 행위로 보고, 글씨를 배우기 위해 유배 길을 떠난 스승을 따라 나서기를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그 중에 누구나 알만한 명필로는 조선 선조 때의 한석봉(1543~1605)과 추사체를 남긴 김정희( 1786~1856)가 있습니다. 추사가 남긴 재미있는 시 한 편을 보겠습니다.
大烹豆腐瓜薑菜 대팽두부과강채 가장 좋은 반찬은 두부 오이 생강 나물이요 高會夫妻兒女孫 고회부처아녀손 가장 좋은 모임은 부부와 아들딸 손자와 함께 하는 것이라 食前方丈侍妾數百能享有此味者畿人爲 식전방장시첩수백능향유차미자기인위 능히 이런 맛을 누릴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此爲村夫子第一樂上樂 차위촌부자제일락상락 이것은 촌 늙은이의 제일가는 즐거움이로다
추사 대련 (각31.9×129.5㎝) 간송미술관 소장품 |
같은 형식으로 나란히 있어서 대(對)가 있는 글귀인 대련으로 추사 김정희 선생이 71세에 예서체로 쓴 시입니다. 추사는 이 시를 “비록 허리춤에 말(斗, 열 되)만한 큰 황금 도장을 차고, 밥상 앞에 시중드는 여인이 수백 명 있다 하더라도, 능히 이런 맛을 누릴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라고 마무리 짓습니다. 가족과 함께 하는 삶이 소박할지언정 가장 행복한 삶이 아니겠느냐고 말함으로 오랜 유배 가운데 가족을 그리워했던 추사의 삶을 엿보게 합니다. 가족과 함께 함이 행복하다는 아주 평범한 가치를 직접 겪었던 추사의 글을 보며 그의 가르침을 철저하게 실천한 사람이 있습니다. 추사 이후 우리나라 서예계에 뚜렷한 발자취를 남긴 소전 손재형(1902∼1981) 선생입니다.
한글서예 발전의 기틀 마련한 친숙한 글씨 주인공 소전은 추사만큼 유명하진 않지만, 해방 이후 글을 깨우친 국민이면 누구나 그의 글씨를 보며 자랐습니다. 1970년대 국정교과서 표지에 적혀 있던 ‘국어’, ‘수학’ 등의 과목 이름과 ‘샘터’ ‘현대문학(現代文學)’ 등의 잡지 표제, 우리나라 법전 표제 등이 모두 소전의 글씨입니다. 그 밖에도 1956년 진도 고군면 벽파진에 세워진 우리나라 최초의 국·한문 혼용비인 이충무공 전첩·진해 해군 충효탑·서울 사육신·의암 손병희 선생 묘·안중근 의사 숭모비 비문 등과 육군사관학교 화랑대, 불국사 관음전 현판 등이 소전의 글씨입니다. 이처럼 틔지 않으면서도 가볍지 않고, 무난하면서도 질리지 않는 친숙한 글씨로 소전은 우리 곁에 있어 왔고 지금도 함께 하고 있습니다.
소전 손재형은 1903년 전남 진도에서 유복자로 출생하였습니다. 자신이 태어나기 전에 아버지를 여의긴 했으나, 그의 집안은 3천석군을 자랑하던 부유한 가정이었습니다. 5살 때부터 할아버지 슬하에서 한학과 서법의 기본을 익혔다고 하니 어릴 적부터 기본기를 탄탄하게 다질 수 있는 환경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서예계에선 소전을 두고 흔히 앞으로 1세기 안에 나타나기 힘든 서예가라는 말을 한다고 합니다. 스물 초반이던 1924년부터 1931년까지 매회 조선미술전람회에 입선하고 제1회 조선 서도전에서 특선하는 등 일찍이 그 실력을 인정받았습니다. 해방 사흘 후인 1945년 8월 18일 서울에서 조선건설 중앙협의회(약칭 文建)가 조직되고, 그 아래 문화, 예술 각 분야별 건설 본부가 생겼을 때, 서예인들은 소전을 중심으로 조선 서화동연회를 결성합니다. 서화동연회를 만들고 대중에게 친숙한 글씨를 써 왔던 소전은 중국의 ‘서법’, 일본의 ‘서도(書道)’와는 다른 ‘서예(書藝)’라는 말을 직접 만들어내고 이를 ‘한글서예운동’으로 발전시킨 인물로 유명합니다. 해방 이후 그는 한글과 한자 서예를 접목하여 한글서예 발전의 기틀을 마련했던 것입니다. 소전이 서도 대신에 서예라 한 것은 일제잔재 청산이라는 뜻도 있지만, 서예라고 하는 것이 더 합리적이요 현대성을 띤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동양적 서예관에 현대의 예술성을 더해서 해방 조국의 문화예술운동에 적극 참여한다는 의지를 ‘서예’라는 말로 표현하고자 했습니다.
일본인이 가져간 세한도 되찾아 온 집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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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전 대련(134 x 33cm x 2) 신찬호 소장품 |
소전의 글씨는 자획과 구성에 무리가 없고 문기가 넘쳐 보는 이에게 편안함을 느끼게 한다는 평을 받습니다. 그는 당시 서예가들이 추구하던 서체를 벗어나 자신만의 독특한 서체인 소전체를 만들어 냈습니다. 고사화 수집가 신찬호 선생이 소장하고 있는 소전의 작품을 보면, 낙관에 호인 소전(小田)이 한자로 찍혀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신찬호 선생은 80년대 중반에 산에 난을 캐러 다닐 때 담양군에서 이 작품을 만났다고 합니다. 작품은 소전이 추사 김정희의 시를 옮겨 적은 대련입니다. 그 서체를 보면 마치 어깨춤을 추는 것처럼 동적이면서도 반듯합니다. 추사의 글씨를 닮은 듯하지만, 좀 더 간결하고 획이 굵으며 아래에 힘을 주어 안정감을 더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음악으로 치면 추사가 마치 랩을 하듯 속도감 있게 흥이 있는 글씨라면 소전은 가곡처럼 차분하면서도 자유로운 느낌이라고 할까요? 이처럼 서예가로서 큰 족적을 남긴 소전은 문화재 지킴이로도 유명합니다. 그가 세한도를 일본에서 가져 온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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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전 낙관 |
세한도는 조선의 쇠락과 일제 강점기 그리고 한국전쟁 등 우리나라의 질곡 많은 역사만큼이나 파란만장한 과정을 거쳐 뒤늦게 국보(제180호)로 지정되어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되고 있습니다. 이 세한도가 제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로 치닫고 있을 때 경성제대에 재직하고 있던 후지쓰카 지카시 교수의 손에 들어갑니다. 소전 손재형이 이 소식을 듣고 세한도를 양도받기 위해 접촉을 했으나 후지쓰카 교수는 단호하게 이 제안을 거절하고 1944년 일본으로 귀국해 버립니다. 당대 최고의 서예가였을 뿐 아니라 간송 전형필 다음 가는 고서화 수장가로 진도의 갑부집안 출신이었던 소전은 거금을 준비해 일본으로 후지쓰카 교수를 만나러 갑니다. 그리고 석 달이 넘도록 그를 설득하고 그 진정성을 보임으로써 후지쓰카 교수로부터 세한도를 양도받습니다. 그러나 소전은 그리도 어렵게 입수한 세한도를 끝까지 지키지 못합니다. 해방 이후 정계에 진출하며 자금이 부족하게 되자 개성 출신의 수장가 손세기에게 넘겨 버립니다. 그렇게 넘겨진 세한도는 손세기의 아들 손창근이 2011년 국립중앙박물관에 기탁 보관하게 함으로 만인의 사랑을 받게 됩니다. 소전은 제4대 민의원 의원과 제8대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어 정치계에 발을 내딛긴 했으나, 생활이 반듯하기로 유명했습니다. 그는 평소 제자들에게 예술가의 기본적인 인간성과 생활태도를 중시해 “멋과 풍류도 좋다. 그러나 가정의 평화를 깨뜨리는 축첩은 삼가자”고 가르쳤다고 합니다. 가족과 함께 하는 삶의 아름다움, 일상의 행복을 추구했던 추사를 닮은 소전은 우리에게 서예뿐만 아니라, 국보 세한도를 안겨 준 참 고마운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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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찬호 선생
-출처-평택시민신문 |
고서화 수집가 신찬호 선생(신장동 거주)은 조선시대부터 근현대까지의 문화재급 고서화와 주요 인물들의 휘호 등 500여 수집품을 소장하고 있습니다. 본지는 박물관이 있는 도시 평택을 꿈꾸며 고기복 기자의 신찬호 선생 수집 고서화 둘러보기를 연재하고 있습니다. |
첫댓글 손재형은 세한도(추사)로 인하여 만대의 선각자(名人)가 된것입니다.
국회원 서화가로서는 그 같은 명인이 될수가 없었을 것이라생각합니다?
하여 세한도 소장가로서 유명인이 된것이지요.
파리는 하루에 십리를 못가는 미물이지만 천리마의 궁둥이에 붙어면 하루에도 천리를 간다는 옛말이 생각나는
손재향 의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