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적 결벽증, 참소중한 당신 1809 p35-41
가라지를 뽑고 싶은 유혹
김병수(대건 안드레에) 한국 외방 선교회 제주도 주문모 피정의 집 책임 신부
살면서 가끔 휴대폰을 정리한 경험이 있을 것이다. 사진파일,전화번호 목록, 받은 메시지함을 정리할 때 어떤 기준에 의해서 삭제를 하는가? 잘 지내던 시절에 함께 공유했던 시 공간들이 관계의 서운함과 껄끄러움으로 인해 이제는 제쳐놓고 싶은 마음이 든다면 그것은 가라지를 뽑고 싶은 유혹에 속하는 것이리라.
인간이 극복하기 어려운 심성 중 하나는 이기적이고 독선적인 마음이다. 사람들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의 생각과 판단이 가장 올바르다고 생각하려는 경향이 있다. 때로는 다른 사람을 임의로 판단하고 단죄하기까지 한다. 가정이나 사회생활을 하면서도 다른 이의 단점을 자기 마음대로 고치려 한다. 가라지를 뽑아 깨끗한 밭을 만들려는 유혹이다. 우리는 공동체 속에서 나와 의견이 다르거나 관계가 원만하지 않은 사람을 제거하고 싶어 한다. 이유는 대를 위해서 소를 희생시켜야 한다는 논리이다. 특히나 공동체를 책임지고 있는 입장에 선 사람이 쉽게 겪는 유혹이다. 한 나라 안에서, 한 본당 안에서, 그리고, 심지어 한 가족 안에서 제거하고 싶은, 뽑아 버리고 싶은 가라지는 언제든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한두 사람을 제쳐놓기 시작하면 어느새 나는 주위에 담을 쌓고 자신만의 영역을 지키려는 ‘키다리 아저씨’ 처럼 배타적인 사람이 될 수 있다.
지금 한국 사회의 아품은 지역, 계층 등의 갈등에서 오는 경우가 많다. 촛불 부대들은, 태극기 부대들은 어쩌면 서로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상대의 존재를 뽑아 버리고 싶어서 서로 삿대질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배달민족, 백의민족, 단일민족이라는 정체불명의 이데올로기적 정서에 사로잡혀 이 땅에 이민으로 뿌리를 내리고 살고 있는 동남아의 처자들, 노동자들을 곱지 않은 눈으로 바라보는 우리의 마음은 네오나치즘 같은 얄팍한 국수주의적 표현은 아닐까? 제주도의 아름다운 자연을 지키고 보존하기 위해서 난민들을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는 논리, 그것 역시 님비의 이기적인 마음은 아닐까?
아! 그런데 그 누구를 뽑아 버리면 공동체는 정말 편안해지는 것일까? 이웃 안에서 가라지를 뽑고 싶은 심정, 우리만이 그런 것이 아닌가 보다. 제자들 역시 “저희가 가서 뽑아 버리겠습니다”라고 외쳤고, 야곱의 12 형제 중에 막내인 요셉을 왕따 시킨 형제들은 결국 그 꿈쟁이 요셉을 가족 공동체에서 추방시켜버렸다. 간음하다 붙잡힌 여인을 신앙 공동체에서 뽑아 버리고 싶은 유혹! 그것은 어쩌면 자기 자신의 죄를 덮어버리고 자신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한 결벽증은 아니었을까? 교회가 한때 자신의 정당성 확보를 위해, 교회의 순수성을 지켜야 한다는 대의명분으로 마녀사냥을 했던 적이 있다. 지금 우리 사회에는 여전히 사형 제도라는 것이 존재한다. 그러나 잘못된 판단으로 무죄인 사람을 단죄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을 것이다. 혹시나 가라지를 뽑아 버릴 수 있었던 실수가 역사 속에서 실제로 존재하지 않았던가 말이다. 그러나 진정한 공존은 배타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열매 맺지 못 하는 무화과나무를 대하는 예수님의 배려 속에는 진정한 상생의 원리가 들어 있다. 둘레를 파고 거름을 주고 가지를 치고 그래서 내년에는 열매를 맺도록 하겠다는 의지! 그 넓은 마음은 신의 포용이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성부, 성자, 성령께서 공존, 공생하시는 원리를 배우라고 삼위일체 신비를 알려 주신 것이리라. 문제는 인간의 마음이 신의 마음보다 좁고 불공정하며 사욕적일 수 있다는 점이다. 복음은 하늘나라를 가라지, 겨자씨, 누룩 등 세 가지의 비유로 설명하고 있다. 특별히 가라지의 비유는 하느님의 인자하심과 너그러우심, 연약하심을 잘 표현하고 있다. 예수님은 밀밭에 가라지가 많이 생겨도 당장 뽑지 말고 추수 때까지 인내하고 기다리라고 말씀하신다.
영적인 불감증 못지않게 위험한 것이 영적인 결벽증이다. 소위 열심하다는, 믿음이 좋다는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증세이다. 성경에도 자주 언급되는 바리사이들, 그들은 신앙적인 측면에서 극단적인 성스러움에 도취한 이들이었는데 그들은 신의 성성에 자신들이 연결되었다고 믿었던 사람들이다. 그 당시 로마의 탄압에 시달리며 메시아를 기다리던 유다인들 사이에서는 순수한 공동체를 건설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그들은 죄인들을 제거해야만 흠 없는 공동체를 이룰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예수님은 오히려 죄인들과 어울리고 그들을 위해 봉사함으로써 많은 유다인들의 비난과 공격을 당하게 되었다.
에세네파들 역시 같은 맥락에서 파생된 신앙공동체이다 그들은 신과의 합일을 추구하기 위해 세속을 벗어나 사막으로 나아가 생활했다. 근대에 들어와 복고운동의 일환으로 퓨리턴이라 불리는 사람들이 그 뒤를 이었다. 청교도들의 신앙적 특성은 17,8세기 영국 국교회와 또는 18,9세기 미국이라는 특별한 사회를 배경으로 일어난 현상이다. 그들의 신앙이 근본적으로 금욕주의적 인간 이해에 바탕을 두었기 때문에 퓨리턴, 절대적으로 ‘순수한자들’ 이라고 불렸다. 본래는 긍정적인의미에서 신과의 일치를 지향하는 그들의 신앙은 속을 죄악시하면서 ‘영혼순수주의’,또는 ‘영적결벽증’이라는 배타성을 노출하게 된 것이다. 자기 이외의 모든 세계를 불결하게 생각함으로써 접촉하기를 꺼려한다면 결국 그것은 대상을 왜곡하는 행위의 다름이 아닐 것이다.
이러한 제쳐놓고 싶어 하는 유혹에 대해 예수님은 비유를 통해 재버려 두라’ 고 말씀하신다. 그것은 비틀스가 노래했듯이 꿈속에서 어머니 메리가 나타나 말씀해 주신 지혜의 말씀, ‘렛잇비’ 이다. 문제를 내가 다 풀려고 들어서는 안 된다. 풀려다가 더 얽히게 되다 그것은 사심에서 나오는 유위(有爲)이니 수완, 책략, 투쟁을 수반한다. 무위는 게으름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치유, 정리되도록 놓아둠이다. 그래서 순기자연이라 말하는 것이다. 자신을 죽이는 한 수,곧 자충수는 안 둔만 못한 외통수이다。우리는 살면서, 가족이나 친척, 친구들과의 관계 속에서 그러한 씁쓸함을 한두 번 경험해 보지 않았겠는가? 말하는 바는 더 잘 헤 보려고 한 것이라고 말할 것이지만 자가당착인 경우가 많다. 지금 내 삶에서 내버려 두어야 하는 것들은 무엇일까? 하느님의 다스림은 이미 시작되었고, 마지막 심판 때에는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말씀하신다. 인간의 판단은 완전치 못 하니 오로지 하느님만이 판단하실 수 있는 분이시라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은 모든 것을 하느님께 신뢰하고 인내하며 기다려야 한다. 겨자씨와 누룩의 비유도 인간의 눈으로 보기에는 하잘것없고 작게 보여도 하느님의 계획 안에서는 엄청난 성공과 열매가 결국 이루어질 것이라는 약속의 말씀이다. 하느님이 선하시다는데 이 세상에 악인이 왜 그리도 많고 불의가 더 잘 되는 경우를 보고 밸이 틀려서 종교를 혐오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깨끗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종교의 밭에 무슨 가라지가 그리도 많은지 당혹감과 의혹이 들 수 있다. 그러나 세상의 어느 곳에도 선과 악은 공존하고 있다. 사회에도 가정에도 내 마음속에도 항상 공존하고 있다. 거부할 수 없는 진리이다. 바꾸어 생각하면 다른 사람의 판단에는 나 자신도 쓸모없는 가라지일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이기적이고 편협한 눈으로 볼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 안에서 모든 것을 보는 지혜가 필요하다. 또한 온전히 밀과 가라지를 구분 하시는 분은 바로 주님뿐이라는 경손한 마음을 지녀야 한다. 또 나 역시 가라지였다는 생각이 문득들 때 나를 뽑아내지 않고 기다려 주시는 신에게 감사드리고 싶은 마음이 든다면 세상 사는 것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다.
우리의 판단과 결정이 얼마나 잘못되고 실수를 했는지는 우리 자신이 살아오면서 경험하고 있다. 가족이나 형제가 못마땅하고 받아들이기 힘든 점이 있더라도 단죄하지 않고 기다리면서 이해하고 용서하려는 마음을 지녀야 할 것이다. 이웃 안에 가라지를 뽑고 싶은 유혹이 들 때 우리 자신을 먼저 되돌아보아야 한다는 것이 복음의 정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