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23년 11월12일
주일설교
본문 : (막 14장 3-9절)
제목 : 예수사랑의 향기
,,구습과 율법의 낡은 문법을 넘어,,
당시 바리새인의 집에 예수님이 방문하였습니다.
그런데 한 여인이 예수의 등 뒤에 있다가 나타나 눈물로 예수의 발을 적시고 자신의 머리털로 닦고 입을 맞추며 향유를 발랐습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이 여자는 죄인인데, 어찌 이런 여자가 접촉하는데도 가만히 있을까!” 중얼 중얼 거렸습니다.
예수님은 옛 율법과 문법을 새롭게 해석하시면서 형식화되고 교조화된 신앙체계에 새로운 생명력을 불러일으켜 주셨습니다.
오늘 하나님께드리는 예배 시간을 통하여 우리의 잘못된 옛 구습의 자아와 삶의 구조가 새롭게 그리스도 사랑으로 변화되는 시간이 되어지길 소망합니다.
,,경계를 허무시는 예수님!,,
예수님은 베다니 시몬의 집에서 머무셨습니다.
그는 나병 환자였습니다.
그곳에서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식사하고 있을 때 한 여자가 매우 값진 나드 향유 한 옥합을 깨뜨려 예수님의 머리에 부었습니다.
이런 장면은 예수 그리스도가 지닌 삶의 특성과 정체성을 아주 분명하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나병환자의 집에 머무르면서 함께 먹고 마십니다.
당시 나병은 각종 악성 피부병을 가리킵니다.
이 나병은 유대인들에게 부정하며 불결한 병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저주로 인한 병으로 취급받았습니다.
나병환자와의 접촉도, 그 집에 머무는 것도 금기이며 부정해지는 일이었습니다.
나병환자의 집에 머물며 그와 접촉하는 것은 사회적 종교적 금기를 넘어서는 행보입니다.
,,이세상에 죄악을 멸하려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삶의 행하신 모습은 예전 율법과 전혀다른 방식입니다.,,
인간들이 또는 종교가 금을 친 율법과 교리가 차별을 부추기고, 생명의 법칙에 위배되는 행위를 예수님은 철폐하고자 했습니다.
,,하여 차별의 경계의 담을 예수님은 허무셨습니다.,,
예수님은 연약하고 병들고, 소외되고, 손가락질당한 그들의 곁으로 다가가셨습니다. 주님은 경계선 밖에 있는 자들을 초대하시고, 생명의 길을 열어놓으시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을 펼쳐 보이셨습니다.
얼마전 폐이스북에 올려진 교정선교회에서 일하시는 목사님의 말씀이 생각납니다. 재소자들을 위한 예배를 위해 그분이 그들 앞에 섰을 때 첫 마디가 있었습니다.
“철장 밖의 죄인이 여러분을 찾아왔습니다.”
죄수로 복역하고 있는 그들과 자신이 다르지 않고, 하나님 앞에서 부족하고 죄 많은 인간임을 고백한 것입니다.
교정선교회 목사님의 말은 이미 철장이란 경계를 허물어 인간 존재를 ,,있는 그대로 수용한다는 의미였습니다.,,
많은 교회안에서 텃새부리는 것은, 경계를 가르려는 시도는 상하도식이나 좌우도식으로 인간 스스로 정당성과 우위를 점하려하기 때문에 생기는 현상입니다.
텃새 부리는 그들이 무언가를 해야만 한다는 의무와 원칙, 일방성에 경도되면, 여리고성같은 담이 점점 높이 세워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로인해 교회는 분열되며 연합되지 못하고 성도들이 정착하지 못하고 떠나게 되는것을 수없이 보게됩니다.
그래서 나의 불안과 두려움은 경계의 벽을 무의식적으로 더 단단히 세울 밖에 없습니다.
이시대에 그들이 무의식적으로 쳐 놓은 권의의 경계를 허물 수 있는 삶의 변화가 있었으면 참 좋겠습니다.
그리하여 우리 교회안에서 보다 넓고 건강한 신앙의 인격이 부활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시대적 집단적 사고와 개인의 감정,,
당시 시몬의 집에서 식사가 한창일 때 한 여인이 나타났습니다.
그녀는 삼백 데나리온(한 데나리온은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나 되는 향유를 예수님의 머리에 부었습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몇몇 사람들은 단단히 화가 났습니다. 이해못한 그들은 그 여인을 꾸중까지 하였습니다.
“어찌하여 향유를 이렇게 허비하는가? 이것을 팔면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지 않은가(4-5)!” 말합니다.
분개한 사람들을 마태복음 26장에서는 ‘제자들’이라고 명시합니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이들은 그 여인의 행위를 쓸모없는 ‘낭비’라고 규정하였습니다.
당시 이 상식 밖의 여인의 행동은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행동이었습니다.
합리적이고, 집단적이고, 통념적 사고로 고려해보면, 값비싼 기름을 부은 여인의 행위는 쓸모없는 허비요, 무가치하고 무지한 행동 그 자체일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이 여인의 그 행위를 ,,아름다운 일이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오히려~“가만두어라. 왜 그를 괴롭히느냐?
그는 내게 아름다운 일을 했다. ... 이 여자는,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하였다. 곧 내 몸에 향유를 부어서, 내 장례를 위하여 할 일을 미리 한 셈이다(6-8).” 주님은 여인의 행동을 아름답다 규정하십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하였고, 예수님 자신의 죽음을 위한 예비의식을 치르고 있다고 인식하였습니다.
여러분은 이 여인의 행동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여인이 잘못된 행동을 한 것인가요? 옳고 그름, 선과 악의 기준은 집단의 신념이나 개인과 집단의 유불리로 결정합니다.
여인에게는 잘못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것을 지켜보던 당시 제자들은 이 일을 두고 자신들의 기대에 어긋나기에 화를 내면서 책망하였습니다.
여인은 자신의 개인적인 감정과 본성에 입각하여 존경하고 사랑하는 이에게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으로 환대를 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개인적 감정과 본성에 따른 그 여인의 행동을 아름다운 일로 규정합니다.,,
,,예수사랑과 소비의 향기,,
예수 그리스도는 이 여인의 행위에 대해 더 강조해 말씀합니다.
“... 온 세상 어디든지, 복음(기쁜 소식)이 전파되는 곳마다, 이 여자가 한 일도 전해져서, 사람들이 이 여자를 기억하게 될 것이다(9절).”
이 여인의 행위는 영원한 향기가 되어 기쁜 소식이 전파되는 곳마다 여인이 한 일이 전해집니다...
교회안에서 텃새로 개인의 질못된 욕망을 소비하고 쟁취하기 위한다면 교회에서는 점점 냄새가 나고 악취가 납니다. 내 욕망을 채우기 위한 소비는 인간을 더욱 목마르고, 배고프게 하고, 탈진하게 합니다.
이런 것이야말로 허소비입니다. 쓸데없이 시간과 재능, 물질을 헤프게 쓰는 것은 허낭비요 죄입니다.
,,한 여인이 향유를 깨뜨린 방안에 향기가 퍼진 것처럼, 그 향기는 기쁜 소식이 전해지는 곳마다 기억되어 전해질 것입니다.,,
이시대 한국교회에서 예수사랑의 향기가 더욱 많이 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아멘.
글 lim선교사 편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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