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많고 탈 많던 교학사 한국사 교과서 선정 철회가 이어졌다. 그리고 여권을 중심으로 ‘국정 교과서로 돌아가자’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그런 가운데 12일 한국일보가 진보와 보수를 두루 아우른 역사교육학회ㆍ한국고대사학회ㆍ한국근현대사학회ㆍ한국역사연구회ㆍ한국현대사학회 학자들에게 설문조사를 벌여, 답을 한 서른세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을 뺀 97퍼센트가 국정교과서로 돌아가는데 반대했다고 보도했다. 우리 역사 교육 어디로 가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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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두대가 기다리는 곳으로 가라
“월급이 적고, 내가 바라는 곳이 아닌 필요로 하는 곳, 승진 기회가 거의 없고, 처음부터 시작해야 하는 황무지, 아무도 가지 않고, 장래성이 전혀 없다고 생각되며, 사회 존경 따위는 바라볼 수 없으며, 한가운데가 아니라 가장자리로, 부모나 아내가 반대를 하는 곳이라면 의심하지 말고 가라. 왕관이 아니라 단두대가 기다리는 곳을 골라가라.” 거창고등학교 직업선택 십계를 추려 적었다. 참 엉뚱한 말이라 여길 분이 많을 텐데, 거창고등학교 설립자 전영창全永昌(1917-1976) 실제 삶이 저랬다.
1947년 4월 한국 최초 유학생 여권으로 미국으로 건너가 펜실베이니아 웨스터민스터 신학교 학생으로 한국전쟁을 맞은 전영창은 1951년 1월 웨스턴 신학교 졸업을 앞두고 있었다. 그런데 1951년 1월 3일 맥아더 장군이 한국에서 철수 소식이 들리자 학장을 찾아가 바로 조국으로 돌아가겠다고 했다. 전영창은 자서전에서 “만약 공산주의가 한반도를 점령하면 나는 조국에 돌아갈 기회를 놓치고 만다. 만약 한국으로 가지 않으면 나는 동포를 배반한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그이들 목자가 되려고 오랫동안 준비를 했는데, 막상 물에 빠진 양을 모른 체한다면 목자는커녕 사악한 사기꾼이 아닌가? 공산주의가 한국에 들어오기 전에 내가 할 일을 찾아야겠고 또 그들이 한반도를 점령하면 지하운동이라도 할 각오가 되어있다.” 학장은 졸업을 두 주 남기고 포탄이 쏟아지는 한국으로 돌아가겠다는 게 말이 되지 않는다며 막아섰다. “학위를 받으려면 졸업을 해야 하니, 두 주일을 기다리며 사태를 지켜보자” 전영창은 나라가 위기에 빠졌는데 학위가 무슨 소용이냐며 완강했다. 친구들 도움으로 가까스로 전쟁이 일어난 조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에 몸을 싣는다. 1951년 1월 9일에 미국 미시간주를 떠난 전영창은 1월 14일 한국에 도착해 부산에서 미국에 사는 친구들 도움을 받아 1951년 5월 천막을 치고 전쟁 피난민을 위한 조그마한 임시병원을 차렸다. 피난민 처지에 값비싼 병원 치료를 받지 못해 병마에 시달렸던 사람들이 날마다 수백 명씩 병원을 찾았다. 역시 피난민인 몸을 아끼지 않는 장기려 박사 의료봉사에 힘입은 전영창은 많은 미국 후원자들을 모아 열악한 병원 재정을 메워 전쟁터에서 다친 사람들 목숨을 구했다. 그리고 전쟁이 끝난 1953년 신학을 연구하려고 다시 미국으로 건너간다. 미국 미조리주 센트루이스에 있는 콘코디아 신학대학원에 진학한 전영창은 이 나라 운명을 두 어깨에 메고 통일과 평화를 이루어 복지사회를 꾸려 살아가는데 밑바닥이 되겠다는 꿈을 키웠다.
지붕이 뚫려 하늘이 보이는 교실
1956년 2월 15일 배편으로 귀국하는 전영창을 부산 부두에서 기다리다 만난 거창 고등학교 설립자 주경중은 거창고등학교가 빚에 넘어가 학교 문을 닫게 되었으니 학교를 인수, 운영해 달라고 부탁을 한다. 전영창은 선걸음으로 식구들조차 만나지 않고 곧바로 거창고등학교로 달려간다. 학교는 호주 선교사 사택을 교실로 쓰는 초라한 오두막집 같았는데 잡초가 무성하고 교실로 지은 가건물은 지붕이 뚫려 하늘이 보였다. 교장실은 화장실을 개조했는데, 학교 모든 재산 이 체신청에 저당이 잡혀 언제 차압이 들어올지 모르고, 선생과 학생들은 학교가 망할지도 모른다며 떠나버린 뒤였다. 전영창은 1956년 4월 12일 남은 학생 여덟 명을 앞에 두고 가르치기 시작했다. 미국교회와 친구 도움으로 학교 빚을 줄이고, 아버지가 물려준 재산을 모두 팔아 학교 빚을 갚았다. 사람됨 으뜸이 정의로운 사람이라고 꼽는 전영창은 학생들에게 봉사가 인격완성 기본이라고 했다. “여러분, 무엇을 위해 밤을 세워가면서 공부를 합니까? 일신 영달? 그렇다면 헛수고입니다. 소금만 반찬으로 밥을 먹으면서 공부하는 제군, 무엇 때문에 고생을 해가면서 성공을 하려고 합니까? 일신 부귀화? 그렇다면 헛수고입니다. 친애하는 거창고교 학생제군! 성공은 남에게 봉사하는 것입니다. 38선이 가로막힌 조국은 여러분 성공을 기다리고 있습니다.”라고 외쳤다. 이토록 농촌학생을 보듬으려는 전영창 희생이 널리 알려지자 빼어난 선생들이 거창으로 몰려왔다.
1970년 박정희 군사정권이 3선 개헌을 하려고 하자, 거창 고등학교 학생들이 삼선개헌 반대 데모를 했다. 그러자 교육부는 데모를 한 학생 모두를 퇴학시키라고 했다. 데모한 학생들을 모아놓고 전영창이 물었다. “너희들 왜 데모를 했느냐?” 학생들은 입을 모아 “교장 선생님은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 잘못된 것은 바로잡아야 한다고 가르치셨습니다. 그런데 유신정권은 민주 정권이 아닌 총칼로 잡은 잘못된 정권이 분명합니다. 따라서 이를 밝히고 잘못을 잘못이라고 한 것이 무슨 죄입니까?”라고 했다. 전영창이 퇴학을 시킬 수 없다고 버티자 교육부는 교장 취소처분을 내렸다. 그리고 부당하다고 소송을 내 이듬해 4월 대법원에서 이겨 다시 교장으로 돌아오는 어려움을 겪었다. 그리고 1972년 11월, 정부는 거창국민학교 강당에 군내 초. 중. 고등학교 교사들을 모두 모아놓고 전영창에게 삼선개헌 정당성을 연설해 달라고 했다. 강단에 오른 전영창은 “칼을 쓰는 자는 칼로 망한다.”는 성경구절을 인용, 유신정권은 망하고 만다는 말로 끝을 맺었다. 그 뒤로 거창고등학교는 국가 지원금을 한 푼도 받지 못했다. 으뜸 가치를 정의로움으로 삼은 전영창다움이었다.
정의보다 강한 힘은 없다
18회 졸업식에서 “여러분! 세상에 정의보다 강한 힘은 없습니다. 물론 언뜻 보기에는 악惡이 언제나 강하고 의義는 늘 약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길게 보면 악은 언제나 지고, 의는 승리했습니다. 히틀러와 뭇솔린, 도죠가 한꺼번에 전 세계를 지배한 것 같았지만 잠깐이었습니다. 마치 여름날 지붕에 난 풀과 같았습니다.”고 하던 전영창은 “인류 진보 운동을 할 때에도 세상과 타협하지 않는 사람을 믿어야 한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군사정권 서슬이 시퍼럴 때도 “나는 믿습니다. 이 나라 운명은 대학생 제군에게 있다고. 정치가도 아니요, 경제가도 아니요, 법학도가 아닌 저로서는 어떤 방법으로 이 나라에 혁명을 일으키라는 말은 못하겠으나, 좌우간 40대 이상 사람들보다 정의감이 강한 여러분이 혁명을 일으켜야 하겠습니다. 나는 암살과 중상모략 허위선전, 정치·경제 야망을 가지고 혁명을 일으키는 것은 절대 반대입니다. 그러나 정의와 진정한 애국심에 따른 혁명을 절대찬성입니다.”라며 젊은이들 멱살을 거머쥐던 전영창은 1917년 12월 26일 전라북도 무주군 적상면에서 3.1 독립만세 주동자로 체포되어 옥고를 치른 전일봉 외아들로 태어났다. 1936년 전주 신흥학교 졸업반 때 신사참배를 강요받고, 몰래 빠져나와 교장실로 들어가 린턴 교장에게 왜 학생들이 일본 신도 신당으로 가도록 놔두느냐고 항의했다. 공부하러 일본으로 건너간 전영창은 일본 고오베 신학교 시절 1941년 12월 1일 일본 전폭기가 진주만 미국 해군기지를 공격한 진주만 사건이 일어난 다음날 학교 기숙사에서 일본경찰에 체포된다. 사상이 불온하고 신사참배를 거부했다는 죄목으로 2년 옥살이를 할 만큼 옳지 않은데 맞섰다.
“불의 앞에서는 맹수보다 더하고 일신 고난 앞에선 위대한 노예로 순진했던 이! 님은 살아생전에 우리에게 빛과 소금이었고, 죽어선 한 알의 밀알로 이 땅에 묻히셨도다.” 전영창 선생을 기리는 글이다. 교육 얘기가 넘쳐날 때마다 전영창이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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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저런분들이 이시대에~~꼭 필요합니다~~
저런분들이 이시대에~~꼭 필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