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류봉을 먼발치에서 바라본다>
< 월류봉 아래 월류정을 감싸고 도는 송천>
<원이 있던 곳이라 원촌리이다>
<월류봉 관광안내도>
<달이 떠올라야 제격인데>
<추풍령을 넘으면 이 냇물을 따라 내려가기만 하면 옥천까지는 힘들이지 않고 이를 수 있음에
신라가 백제를 침공할 적에 요긴했을 지형이리라, 아무리 캄캄한 밤에도 등대처럼 분명하게 위치 정보를 제공했을 곳
지금은 그냥 아름다운 경치로 감상할 뿐이다.>
< 우암 송시열을 기리는 한천정사, 정사는 사찰에만 붙이는 줄 알았것만 서당, 서원의 뜻으로도 쓰인다.>
<월류봉에서 곧바로 석천 냇물을 따라 북으로 거슬러올라가면 "백화산반야사 "일주문에 이른다.>
<호랑이 모습으로 보이는 너덜겅 지대가 눈에 들어온다>
<반야사 경내로 들어가기전 왼쪽 냇가로 둘레길이 만들어져 있다.>
<냇물을 건느면 돌탑무리가 있고, 백화산 등산길 대신 둘레길을 택하여 냇물 따라 올라간다.>
<충북 영동쪽에서 만들어 놓은 둘레길: 석천( 경북 상주시에서는 구수천이라하고)과 석벽, 한봉도 보고...
<둘레길 따라가다가 뒤돌아본 반야사 일대>
<반야사 호랑이로 이름지어진 돌너덜겅 지대를 지난다.
산신령으로 변한 우리의 토속신앙의 대상을 여기서 만난다.>
<가까이서 보니 호랑이 상인지? 어느 사이에 기념 촬영을!>
문수전을 왼쪽 건너로 바라보면서 얼마 안가니 경상북도 도 경계 표지석을 만난다.
이곳이 옛 반야사 터이다.>
<옛 반야사 터에서 다시 바라본 반야사 문수전 모습
상주시 모동면과 모서면, 화서면 화령장 아래 일대를 휘몰아온 물이 모여 내리는 탓인지 냇물은 전번 만큼 맑지도 많지도 않다.>
<문수전에 직접 다가가기 위해 냇물을 건넌다.
돌위에 낀 물이끼에 조심하며, 다슬기 새끼들이 많기도 하다. 상주시 쪽에는 세월교가 여러개 있었지만 ...>
<바짝 다가가서 올려다본 문수전: 108계단 보다 훨 많은 계단을 밟아야 다달을 수 있다.>
<문수전 난간에서 석천과 금돌성 아래 저승골, 방성재 일대를 조망해본다.>
<문수전에서 북쪽으로 바라본 석천(구수천) 주변 풍경
: 옛 반야사터가 내려다 보인다.>
<바지 걷고 건너온 아랫쪽 냇물>
<반야사 경내에 그려진 호랑이 상>
<다시 바라보는 호랑이상, 산신각을 이곳에 모셔야 되는 것은 아닌가? 단군님이 현신하신 것인가?>
<옛 대웅전은 이제 극락전으로 바뀌고 그 앞에 두 그루의 백일홍나무가 위엄있게 서있다.>
<보물1371호로 지정된 반야사3층석탑>
<상촌을 지나 괘방령을 넘는다.해발 300미터의 낮은 고개, 백두대간의 고개 답지가 않은 높이에, 영동쪽은 고갯길도 평탄하다.>
<경상북도 쪽의 괘방령 표석과 백두대간 등산로 안내도, 그 아래에는 백두대간 고갯길 표시가 자세하다.>
<백두대간 구간의 고개 안내도 : 구간별 1 >
<백두대간 구간의 고개 안내도 : 구간별 2 >
<백두대간 구간의 고개 안내도 : 구간별 3
추풍령 고개가 220m로 가장 낮은 고개로 나타나있다.>
<고개 왼쪽에는 백두대간 등산로 안내가 보인다.>
<직지사 주차장의 식당에서 산채 한정식으로 점심을 하고 옛국도 4번 도로를 따라 추풍령 고개를 넘어 추풍령면 소재지를 지난다.>
<고개 답지 않은 고개는 밋밋하기만 하다. 해발 220.3m로 쓰여있다.
추풍령 휴게소 상향 방면에는 추풍령 높이가 230m로 안내되어 있다.
추풍령이 경부고속국도의 딱 중간지점이라는 표석도 상향선 출구 직전 우측에서 볼 수 있다.>
<다시 찾은 황간읍성 내의 가학루
: 동쪽의 추풍령과 물한리 계곡 일대에서 내려온 물줄기가 서쪽으로 줄기차게 흘러내려 심천까지 간다.
요충지임을 나타내는 긴 냇물(長溪)을 바라보는 정자의 모습 뒤에는 수 많은 전란의 역사를 담고 있다.
황간이라는 이름도 (옛 이름은 소라현), 길다는 뜻의 영동군(옛 이름은 길동군), 긴대롱 같다는 뜻의 옥천(옛 이름은 고시산, 고리산군)의 지명의 유래도, 조선 태종 때(1413년)에서야 비로소 경상도에서 충청도로 행정구역이 바뀌는 이유도, 삼년산성이 왜 보은에 있었는지도, 백화산 금돌성에서 태종 무열왕이 백제와의 최후 결전을 독려했는지도 생각나게 해주는 곳이다.>
<황악산(黃岳山:1,111m)은 황학산(黃鶴山)이기도 했나?>
<황간 읍성 안에 향교가 있고, 민가도 아직 남아 있다.
성터도 건재하고 있고, 주차장 자리는 옛 성안의 우물터였다는데, 대추가 탐스럽게 익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