늪 / 반기자 (2024. 10.)
우리 집 신발장이 흥부네 집 같다. 신발장이 그리 작지 않은 편인데도 유난히 예쁜 신발에 대한 나의 집착 때문이다.
나이가 들면서 언젠가부터 발등이 올라오고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발은 좀 더 넉넉한 치수의 폭이 넓은 신발을 신겨달라고 투정했다. 그러나 나는 못 들은 척 외모에만 신경을 쓰며 옷에 맞춰서 맵시로만 신을 신었다. 드디어 발은 더는 참지 못하겠다고 비명을 질렀다. 운동은 생각조차 할 수 없었고 일상생활마저 힘들고 불편했다. 그제야 나는 발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겨울을 지내면서 발이 편안한 신발을 신어야겠다는 생각이 강해졌다.
그러다 보니 길을 가다가도, 인터넷에서도 편할 것 같은 신발이 눈에 띄면 서슴지 않고 곧바로 구매했다. 또 누군가의 신발이 편하게 보이면 덩달아 구매한 적도 있다. 발에 이상이 생기면서 내 눈에 보이는 건 오직 신발뿐이었다.
나는 예전부터 구두를 참 좋아했다. 하루는 직장 동료가 신상품이 들어왔다고 구두를 사러 가자고 했다. 퇴근 후 구두 매장에 같이 갔다. 동료는 나랑 비슷하게 제법 큰 키였는데 낮은 굽엔 눈길을 주지 않고 10센티 높이의 구두를 골랐다. 나는 그때까지 5센티를 넘지 않는 굽 낮은 신발을 신고 있었다. 동료와 판매원도 나에게 7센티 굽의 구두를 사라고 부추겼다. 외모가 훤칠한 판매원은 달변가여서 그녀의 말대로 7센티 굽을 처음 구매했다. 그것도 넉넉하면 맵시가 나지 않는다, 금방 늘어난다는 말에, 본래 사이즈 보다 작게 나온 구두를, 240밀리를 구매해야 하는데 한 치수 작은 235를 덜컹 구매하고 말았다. 다음 날 새 구두를 신고 싶어 구두에 맞는 원피스를 늦은 밤까지 골랐다.
직장 동료들의 반응은 뜨거웠다. 다리가 길어 보인다, 날씬해 보인다, 칭찬 일색이었다. 달콤한 말에 기분은 좋았지만, 고통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꽉 끼는 구두로 발가락 앞부분이 너무 아프고, 발뒤꿈치는 벗겨지고, 통증이 허리까지 올라왔다. 그렇지만 난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새 구두를 신었다. 빨리 구두를 늘려야겠다는 생각만으로 발뒤꿈치에는 밴드를 붙이고 허리에는 큰 파스를 붙이며 고통을 견뎠다. 그렇게 3주 정도 지나자 정말 구두가 늘어났다. 발가락이 아프지 않았고 발도 편해졌다. 그렇지만 난 그 후로 굽 높이를 5센티 넘지 않고, 꽉 끼는 구두도 사지 않는다.
작년까지만 해도 전혀 생각지 못한 일이다. 그동안 내 발과 너무도 잘 어울렸던 구두, 부츠, 단화, 심지어 오랫동안 즐겨 신은 운동화까지도 불편하다고 투덜댔다. 잘 신었던 신발을 잠깐이라도 신으려면 퉁명스레 거부했다. ‘어떻게 된 일이지.’ 처음에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동안 발이 아프다고, 불편하다고 보내는 신호를 무시하고 내 고집대로 신고 다닌 것이다. 통증이 찾아와도 맵시를 생각해 억지로 참은 것이다. 투정이 심해질수록 가만히 생각해 보니 이렇게 밀쳐내는 데는 분명한 이유가 있었다.
나는 가끔 단화를 신기도 하지만 출근할 때는 구두를 애용한다. 운동화는 운동을 하거나 야외 활동을 할 때만 신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런 내가 요즘은 운동화 차림으로 출근한다. 전에는 생각도 못한 일인데, 발가락이 아프고 발바닥도 아프니 어쩔 수 없다. 운동화를 신으니 밑창이 딱딱하지 않아서 좋았다. 무엇보다 신기한 것은 발바닥의 통증이 조금씩 가라앉기 시작한 일이다. 서너 달쯤 운동화를 신으니, 치료를 받거나 운동을 한 것도 아닌데 발이 많이 좋아졌다.
또한 왼쪽 발 새끼발가락과 연결되는 발바닥 끝부분이 오랜 기간 구두를 신어서인지 굳은살이 잡혀있었다. 그동안 부드럽게 만들기 위해 로션이나 연고도 자주 바르는 노력을 했지만 좋아지는 기색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내 양말은 언제나 왼쪽이 먼저 헤어져 양말을 살 때 똑같은 것을 몇 켤레씩 사는 습관이 생겼다.
그런데 운동화를 몇 개월 신은 덕분에 늘 구멍이 나던 왼쪽 양말에 구멍이 나지 않았다. 발바닥 끝부분을 만져보니 굳은살이 말랑말랑했다. 신기했다. 그동안의 끈질긴 노력에도 꿈쩍 않던 굳은살이 운동화에게 반응을 보인 것이다
요즘같이 추운 겨울에도 운동화는 따뜻한 느낌이 든다. 발의 온도를 유지시켜 주는 것은 물론, 발등을 싸고 있어 크고 작은 충격에는 보호대 역할을 한다. ‘운동화는 나의 절친’이라는 생각을 되새기고 있을 때, 그래 “바로 이거였어. 이제는 됐어.” 발이 내 귀에 다정하게 속삭였다.
내 발을 위해서 과감하게 신발들을 정리하기로 했다. 그동안 아끼던 부츠, 구두를 신발장에서 몽땅 꺼내어 조금이라도 불편하다 싶으면 옆으로 제쳐놓았다. 새 구두와 재활용 수거함에 넣을 것을 분류했다. 얼마 신지 않은 구두는 버리기가 아까워 가족이나 지인에게 주고 싶었다. 그러나 그리 쉽지 않은 일, 자칫하면 내 마음과는 달리 기분이 상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새 신발처럼 깨끗하였으나 포장지가 벗겨진 신발을 주는 것은 어려웠다. 오랜 고민 끝에 사무실 여직원을 생각했다.
“혹시 신발을 정리했는데 가져와 볼까?”
했더니 함박웃음으로 반색했다. 다행히 발 치수도 맞았다. 그녀는 내가 처음 구두를 살 때의 마음같이 다정한 주인이 되어 오래오래 아껴 줄 것이다. 새 주인을 못 찾았으면 재활용 수거함에 들어가 많은 고생을 했을 텐데, 곧바로 좋은 주인이 생겨 다행이다.
가끔, 가지런하게 정돈된 신발장을 열어 본다. 올망졸망 북적대던 흥부네 자식들이 제 짝을 찾아 떠나고 나서 반듯반듯 여유가 생겼다. 내 발도 마음도 공중에 날아오른 새처럼 환하고 가뿐하다.
첫댓글 반기자 선생님, 신인상 수상을 축하드립니다. 좋은 일 가득하시길 바랍니다.^^
신인상 수상을 축하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