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성과 비겁의 상생상극은 다른 육신들의 관계처럼 분명하게 연결되지는 않는다. 다른 육신들처럼 직접적으로 연결시키는 것은 문제가 있어 보인다. 인성과 비겁의 연결은 직접 연결되어 지는 것 같으면서도, 연결성 없이 단절되어 있는 모습을 동시에 보이기 때문이다.
마치 지장간에 오중기토(午中己土)는 있으나 자중기토(子中己土)는 없는 이유와 같다고나 할까. 자중기토가 있다면 좀비가 되살아나는 형상이 되기 때문이다. 오행에서의 수생목의 관계도 마찬가지이다. 수가 목으로 새로이 살아나지만, 수가 직접 살아나는 것은 아니고 씨앗으로 전달되어진 새 생명이 살아나는 것과 같은 의미이다.
육신에서 편인이 식신을 극한다는 해석에서도 맥락 연결의 단절성을 찾아 볼 수 있다. 편인과 식신을 동일한 대상 내의 육신으로 보지 않는다. 편인을 식신에게 혜택을 주는 육신으로, 식신은 편인으로부터 혜택을 받는 육신으로 각각 나누어 보는 것이다. 편인월의 도식은 내가 도식된 타인을 돕는다는 의미로, 식신월의 도식은 타인이 도식된 나를 돕는다고 의미로 해석하니 나와 타인으로 구분하여 보는 것이다.
주체가 되는 편인이 도식된 다른 사람의 밥그릇을 채워 준다는 의미로 접근하니, 편인과 식신은 같은 대상이 아닌 것이다. 인성을 A라는 개체로, 비겁-식상-재관을 B라는 개체로 이원화해서 볼 수 있는 이유가 되는 것이다.
정인이 일간을 생한다는 것은 육신고유의 특징이다. 예를 들어 정인이라는 부모가 일간이라는 나를 생한다는 의미를 보면, 정인이 생하는 일간은 정인의 일간이 아닌 나의 일간이므로 내 입장에서는 동일한 일간이 아닌 것이다. 부모가 자식을 생한다고 할 때, 자식은 부모의 분신이지 부모의 일간이 아닌 것과 같은 의미이다. 편인이 일간을 생하기도 한다는 상생의 논리로 볼 때도 편인이 생하는 일간은 편인과 동일한 개체는 아닌 것이다.
그렇다고 인성을 완전히 다른 개체로 확정 시켜 버릴 수도 없다.
육신을 [개인적 성향]과 [사회적 성향]으로 구분해서 해석할 때, 인성-비겁-식상을 [개인적 성향]으로 묶고 재성-관성을 [사회적 성향]으로 묶어서 구별한다.
인성은 일간의 정신적인 면을, 식상은 일간의 행동적인 면을 의미한다고 해석한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해석상 인성과 식상은 일간과 동일한 개체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인성과 비겁은 명확한 연결로 확정지어 볼 수는 없다. 한 마디로 오묘하고 절묘하게 연결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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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운도사는 2024/01/21 단상에서 "편인이 일간을 생하지 않는다는 것은 생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나의 것이 아니라는 의미이다"라고 설명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