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 물든 곤륜산 옥청관
고검남은 이빨을 깨물고 마음속의 두려움을 억누르며 혈도인마가 깨
어나기를 기다렸다.
하얀 안개는 사방에서 넘실거리는데 무척 오랜 시간이 흐른 것만 같
았다. 기나긴 밤보다도 더 긴 것 같았다.
별안간 그는 혈도인마의 음성을 들을 수 있었다.
[아! 이렇게 심한 안개가 끼었다니? 얘야, 너는 아직도 그곳에 있느
냐?]
고검남은 놀람과 기쁨에 얽혀 큰소리로 외쳤다.
[아저씨, 저는 여기 있어요!]
[얘야, 두려워 말아라. 나는 네가 있는 곳을 알고 있다.]
고검남이 대답하기전에 소리를 듣고 가까이 다가온 혈도인마에게
잡혔다.
혈도인마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얘야, 어찌 되었건 네가 말을 잘 듣고 이곳을 떠나지 않았구나. 그렇
지 않았다면 이 짙은 안개 속에서 어떻게 찾아낼 수 있었겠느냐?]
고검남은 풀이 죽어서 대답했다.
[큰일났네요. 이토록 안개가 짙으니 숫제 길을 볼 수가 없어요.]
혈도인마는 말했다.
[내가 힘을 비축한 후에 네 아버지를 도와주려고 했던 것이 잘못이다.
운기행공하는 시각이 너무 길었어. 하지만 내가 얼마나 마음을 쓰고
있는지 알고 있겠지?]
그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멀리서 호통 소리가 들려오고 곧이어 처
절한 비명 소리가 들려 왔다.
고검남은 몸을 흠칫했다.
[아버지, 저것은 아버지의 목소리에요!]
혈도인마 역시 깜짝 놀라 급히 물었다.
[어느 소리가 네 아버지의 목소리냐?]
고검남은 대답했다.
[먼저 번의 그 호통소리 말이에요!]
혈도인마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뒤의 그 소리인 줄 알았구나.]
고검남은 큰 소리로 불렀다.
[아버지, 검남이 왔어요.]
그의 소리는 무척 크게 울려 퍼졌으나 대답은 들리지 않았다.
혈도인마는 그를바라보았다.
[너의 소리는 너무 작다. 내가 그를 불러 보마.]
그는 길게 숨을 들이마시고 호통을 질렀다.
[노고, 들리는가? 나는 기백(祈白)이다. 나는 네 아들을 데리고 왔다.
한마디만 대답해라.]
그의 소리는 천둥처럼 울려 퍼졌고 산골짜기에서 메아리치며 좀처럼
끊어지지 않았다.
그들은 한참 동안 기다렸으나 고명원의 대답소리를 들을 수 없었다.
고검남은 속으로 초조해서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아저씨, 혹시 아버지가...]
혈도인마는 그 말을 가로챘다.
[쓸데없는 소리. 조금 전에는 그가 사람을후려쳐 산골짜기로 떨어뜨
린 모양이다. 지금은 격전을 벌리고 있느라고 입을 열지도 못하는 모
양이구나.]
그는 이렇게 말했지만 속으로는 걱정이 되었다. 혈수천마 고명원이
강적의 맹렬한 공격을 받지 않는다면 결코 대답하지 못할 이유가 없
었다. 혈도인마는 눈살을 찌푸렸다. 다행히 사방은 짙은 안개가 끼어
있어 그의 얼굴이 고검남에게 보이지 않았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
다면 고검남은 더욱 걱정했을 것이다.
잠시 생각해 보다가 그는 다시 입을 열었다.
[내가 다시 한번 불러 보마. 어쩌면 그는저쪽 산모퉁이로 돌아갔는지
도 모른다.]
고검남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다시 한번 불러 보세요. 만약 대답이 없다면 저는...]
[바보 같으니!]
혈도인마는 꾸짖었다.
[쓸데없는 소리는 하지 말아라.]
그는 곤륜산 주봉을 향해 소리쳤다.
[고명원! 노부의 말이 들리는가? 노부는 혈도인마 기백이다!]
썰렁한 산속에 혈도인마의 목소리는 멀리까지 울려 퍼졌고 산골짜기
에 메아리쳐 돌아오고 있었지만 여전히 고명원의 목소리는 들을 수
없었다.
고검남은 흐느끼듯 입을 열었다.
[아버지는...]
혈도인마는 꾸짖었다.
[쓸데없는 생각 말아라. 방법을 강구해 보자. 어떻게 하면 이 짙은 안
개를 뚫고 나갈 수 있는지 말이다.]
고검남은 흐느끼며 말했다.
[이렇게 짙은 안개에 어떻게 길을 찾을 수 있겠어요?]
혈도인마는 발을 굴렀다.
[아! 갑자기 짙은 안개가 피어오르다니, 이럴 줄 알았다면 지남철을
준비했을 것을...]
그는 고검남의 떨리고 있는 몸을 어루만지며 중얼거렸다.
[이것이 정말 하늘의 뜻인가?]
고검남은 눈물을 훔치고 갑자기 벌떡 일어섰다.
그는 애써 혈도인마의 부축을 물리쳤다.
[나 혼자라도아버지를 찾아가겠어요.]
혈도인마는 대경실색했다.
[아니, 얘야, 너는 다리가 나아졌느냐? 네가 어떻게... 네가 어떻게 걸
을 수 있느냐?]
그러면서 재빨리 고검남을 잡아 주었다.
고검남은 말했다.
[저는... 저는...]
혈도인마는 놀랐다.
[기적이다. 정말 기적이다. 만약에 노부가 목격하지 않았다면... 아니,
몸소 만져보지 않았다면이라고 해야 옳겠지. 노부는 결코 믿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한 줄기의 힘이 고검남의 몸에서 전해 오는 것을 느끼며 마음
을 모질게 가다듬었다.
[노부는 이 목숨을 버리는한이 있더라도 조금 전의 기억을 더듬어서
옥청관으로 달려가겠다!]
고검남은 말했다.
[아니에요. 아저씨. 모험할 필요 없어요. 저 혼자 가면 되는 거예요.]
혈도인마는 쓸쓸히 웃었다.
[얘야, 너 혼자 가서 무슨 소용이 있느냐? 노부와 함께 가자. 적어도
노부는 너를 안전하게 보호할 수 있을 것이다.]
고검남은 말했다.
[아니에요! 나는 아저씨를 그렇게 만들 수 없어요...]
혈도인마는 대답했다.
[노부는 금년 예순하고도 여섯이다. 내가 죽음을 두려워하겠느냐? 이
제 날이 밝아 오고 있다. 해가 떠오르기만 하면 이 안개는 즉시 사라
질 것이다. 그러니 조심해서 가기만 하면 된다!]
고검남은 이빨을 깨물었다.
[아저씨의 큰 은혜를 이 조카는 한평생 잊지 못할 것입니다. 이제 가
죠!]
혈도인마는 고검남을 끌고 장님이 걸음을 옮겨 놓듯이 곤륜산 위로
향했다.
두어 걸음 옮겼을 때 고검남은 갑자기 생각했다.
(이렇게 걷는 것은 장님과 마찬가지다. 장님은 대나무 지팡이로 길을
더듬는데 우리들도 돌멩이를 던져 앞이 어떻게 됐는지 알아볼 수 있
지 않겠는가.)
그는 혈도인마에게 그 방법을 말했다.
혈도인마는 자기의 이마를 탁 쳤다.
[아! 어째서 그 점을 생각 못했을까?]
그는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역시 너는 어려서 머리가 잘 돌아가는구나. 나는 정말 늙었다.]
그는 몸을 구부리고 두 움큼의 작은 돌들을 움켜잡고 말을 이었다.
[그렇다면 너는 빨리 내 등뒤에 업혀라. 내가 너를 업고 가는 것이 훨
씬 빠를 것이다.]
그는 영민한 청각으로 잔돌이 땅바닥에 떨어지는 소리를 듣고 앞쪽
이 단단한 길인지 계곡인지 알 수가 있었다. 그래서 달려가는 속도도
훨씬 빨라졌다.
아침 햇살이 짙은 구름을 뚫고 내리 비쳤다. 그러자 그 허옇게 깔려
있던 하얀 안개들이 끓는 물처럼 사방으로 흩어졌다.
하얀 안개들이 구불텅거리면서 사방으로 흩어져 나가고, 한 가닥의
햇살이 쏘아지니 그 광경은 정말 환상적이었다. 그러나 지금 혈도인마
와 고검남은 대자연의 기이한 경관을 구경할 여유가 없었다.
고검남은 흥분되어 입을 열었다.
[안개가 흩어지고 있어요.]
혈도인마는 한숨을 내쉬며 속으로 탄식했다.
[늦지 않았기를 바란다!]
안개는 빨리도 들이닥쳤지만 빨리 흩어지고 있었다.
잠시 후에 안개는 모조리 사라지고 그들은다시 그 울창한 숲과 험
준한 산봉우리들을 볼 수 있었다.
혈도인마는 앞쪽의 한 절벽을 가리켰다.
[저 산모퉁이를 돌아가면 곤륜산의 허리에 있는 산을 오르는 돌계단
이 나온다. 얘야, 너는 꼭 나를 잡아라. 나는 죽어라 달리겠다.]
마치 한 자루의 화살처럼 그는 나는 듯이 달려갔다. 가장 빠른 속도
로 그 벼랑을 돌고 숲속을 가로질렀다.
숲속은 조용해서 새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바람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다만 혈도인마의 발이 낙엽을 밟자 바스락거리는 소리만 들려올 뿐이
었다.
이 참나무 숲은 매우 넓었고 숲속에는 아름드리 거목들이 뻗어 있었
고, 나뭇가지와 잎사귀들이 무성해서 햇살을 볼 수 없었다.
혈도인마는 중얼거리듯 말했다.
[이곳은 어째서 이토록 조용하냐?]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파공성을 내며 두 자루의 장검이 신속하게
찔러 들어왔다.
고검남은 놀라 소리를 내질렀고 곧이어 혈도인마의 노갈이 터졌다.
[건방진 것들 같으니. 감히 노부를 암산해!]
그는 두 다리를 들어 걷어찼다. 두 자루의 장검은 수장이나 솟아올라
퍽! 퍽! 하는 소리와 함께 일장 밖의 나무에 못 박히듯 꽂히고 말았다.
그의몸이 나는 듯이 앞으로 내닫자 고검남은 풀더미 속에 몸을 숨
기고 암습했던 도사들을 볼 수 있었는데 그들은 이미 끽 소리도 내지
못하고 쓰러져 있었다.
그들은 모두 목덜미를 발길에 채여 비명 소리 한마디 지르지 못하고
목숨을 잃어버린 것이었다.
검남은 혀를 내둘렀다.
혈도인마는 무거운 어조로 입을 열었다.
[음, 피비린내가 무척 짙구나!]
갑자기 눈앞이 밝아지면서 그들은 그 밀림에서 벗어나 산 위로 오르
는 돌계단에 이르게 되었다.
혈도인마는 찬 기운을 들이마셨다.
[이것은 정말 대단한 살육이군!]
그의 눈앞에 뻗쳐 있는 돌계단 위는 선혈로 물들어 있었다. 널려 있
는 시체들... 화상, 도사의 시체도 있었으며, 경장 대한들과 푸른 수건
을 머리에 두른 여자들의 시체도 있었는데 그 죽어 있는 모습은 너무
참혹해서 목불인견이었다.
고검남은 두 눈이 휘둥그레져서 말을 더듬거렸다.
[이... 이 사람들은...]
혈도인마는 무거운 어조로 입을 열었다.
[이 사람들을 모두 영존(令尊)이 죽인 것은 아니다. 그들 가운데는 그
보도를 위해 온 무림의 도적들도 있고 어떤 자들은 녹림의 강도들이
다. 그러나저 화상들은 소림과 아미의 제자들 같구나.]
고검남은 나직이 말했다.
[그들은 어째서...]
혈도인마는 무거운 어조로 대답을 했다.
[한편에서는 억지로 산으로 오르겠다고 하고 한쪽에서는 죽어라 하고
막다가 격전이 벌어져서 이와 같은 결과를 초래하게 된 것이겠지!]
그는 고개를 가로 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중원 구대문파의 장문인들이 현청 그 우비자(牛鼻子)의 꼬
임에 넘어가 이곳에 온 것 같구나! 위의 격전은 이쪽보다 더 격렬하겠
다.]
고검남은 걱정스러워 말했다.
[그렇다면 우리 빨리 산으로올라가도록 해요.]
혈도인마는 정색하고 입을 열었다.
[얘야, 나중에 어떤 일이 벌어져도 소리를 내어서는 안 된다. 그렇지
않을 때 영존께서는 마음이 헷갈리게 되어 위험하게 될 것이다. 지금
옥청관 앞에는 각파의 장문인들과 무림의 일류의 고수들이 모여 있을
게다. 고수들이 싸우는데 정신이 헷갈려서는 아니 된다는 사실을 명심
해라.]
고검남은 고개를 끄덕였다.
[조카는 알고 있어요!]
혈도인마는 더 말하지 않고 진기를 돋구고 몸을 날려 그 시체들의
빈틈을 뚫고 치달았다.
수백 층계나 되는 돌계단을 오르자 앞쪽에서 무기가 서로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쳐들고 바라보니 위에서 수십 명이 격전을 벌
이고 있었다.
옥청관 쪽으로 등을 돌리고 있는 사람들은 무당과 소림을 비롯한 각
파의 제자들이었다. 그들은 우세한 위치에서 잇달아 세 겹으로 위를
향해 공격하는 녹림 호걸들을 막아내고 있었다.
모두 녹림에서 으뜸가는 인물들이거나 팔황사해(八荒四海)에 명성을
떨친 호걸들이었다. 그래서 각파의 제자들이 죽어라 막고 있었지만 여
전히 연신 밀리고 있었다.
혈도인마는 일성을 대갈하며 달려 올라갔다.
녹림 호걸들은 그 소리를 듣고 흠칫했다. 그들 가운데 녹색 장삼을
걸치고 머리에 문사건(文士巾)을 쓰고 손에 양쪽으로 붉고 파란 빛이
나는 철골선(鐵骨扇)을 든 중년의 사내는 오랫동안 공격해도 올라가지
못해 성이 난 듯 호통을 내질렀다.
[누가 귀신 멱따는 소리를 하고 있느냐. 빨리 꺼져라!]
그는 돌아보지도 않고 손에 들고 있는 섭선을 휘둘렀다. 부채살은 마
치 칼처럼 바로 위로 달려 올라가는 혈도인마를 베어 갔다.
혈도인마는 노해 소리쳤다.
[음양선(陰陽扇), 당돌하다!]
그는 손목을 휘둘러 커다란 소맷자락으로 그 철골선을 받았다.
그 중년의 사내는 바로 섬북(陝北)의 대도 음양선 경시(耿詩)라는 자
였다. 그는 재수 없어 혈도인마를 만난 것이었다.
그는 그제서야 이 비쩍 마르고 수염이 긴 노인이 바로 천하의 명성
을 떨치고 있는 우내이마 가운데 혈도인마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는 깜짝 놀라 혼비백산해서 부르짖었다.
[기 선배님!]
그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칠보산을 쥐고 있는 오른쪽 손목을 혈
도인마에게 움켜잡히고 말았다.
혈도인마는 껄껄 괴소를 흘리며 오른손을 번쩍 쳐들었다. 음양선 경
시의 몸은 뒤로 날아가고 머리를 아래로 하고 발을 위로 해서 청석으
로 된 돌계단으로 부딪쳐 갔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처참한 비명 소리가 울려 퍼지면서 경시의 커다란
머리통은 박살이 나서 선혈과 골수가 곳곳에 뿌려졌다.
이 느닷없는 변화에 공격과 수비를 하던 쌍방은 모두 놀라 손을 멈
추었다.
혈도인마는 두 눈에서 매서운 눈빛을 쏘아내며 좌우를 한번 쓸어 보
고 무거운 어조로 입을 열었다.
[모두 물러나라!]
십여 명의 각처에서 온 녹림의 고수들은 음양선경시가 일초에 목숨
을 잃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 일제히 손을 멈추었다.
그들 가운데 늙은이 몇 명은 포권을 해 보였다.
[기 선배님, 우리들은...]
혈도인마 기백은 냉소를 날렸다.
[노부와 고명원이 손을 맞잡으면 천하에 그 누가 대적할 수 있겠는
가? 자네들 김치국 마시지 말고 빨리 떠나지 못할까?]
그 십여 명의 호걸들은 서로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 가운데 태반은
실망의 빛을 띄웠고 몇 사람은 아무런 소리도 없이 고개를 돌려 떠나
갔다.
그러나 갑자기 한 명의 중년 사내가 부르짖었다.
[여러분, 잠깐만!]
그는 큰소리로 입을 열었다.
[우내이마의 이름이 천하를 진동시키고 있는 것은 사실이고, 불초 또
한 이마가 손을 마주잡는다면 당해낼 사람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소.
그러나 아직 그들 두 사람은 손을 잡지 않았으니 우리들이 협력해서
그를 제거한다면 천영보도를 취득하여 고수가 될 수 있을 것이오. 그
렇게 되면 주화입마 되는 화근을 영원히 걱정하지 않게 될 것이고 온
종일 수심에 휩싸여 죽기를 기다리지도 않을 것인데, 어째서 한평생의
안락을 추구할 생각을 하지 않소? 여러분들은 깊이 생각해 보시오.]
그의 말이 막 끝나자마자 혈도인마는 광소를 터뜨렸다.
[오냐, 너 말 한 번 잘했다.]
그의 눈길이 싸늘해졌고 살기가 번뜩이며 싸늘한 음성이 다시 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노부가 한평생 강호를 떠돌아 다녔지만 귀하와 같이 주둥이를 잘 놀
리는 사람은 처음 보았군. 아마도 귀하는 커다란 염통을 가지고 있을
것 같은데 노부는 당신이 누군지 알고 싶어지는군!]
중년의 사내는 대답했다.
[감당할 수 없소. 불초는 새소진(賽蘇秦) 서박문(徐博聞)이라 하오. 만
약 선배님께서...]
혈도인마 기백은 웃었다.
[만약 노부가 당신을 한 패거리로 끌어들여 함께 곤륜산 위로 오르고,
그 때 당신에게 한 몫의 천영비급을 베끼도록 한다면 어떻겠소?]
새소진은 웃었다.
[선배님, 농담은 아니겠죠?]
혈도인마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나는 농담을 하지 않네. 노부가 보기에 당신은 무척 영리해. 그래서
당신을 끌어들이려고 하는데 당신의 뜻은 어떠한가?]
새소진은 갑작스런 총애에 황송하다는 듯 입을 열었다.
[노 선배님께서 불초를 어여삐 보시니 불초가 어찌 공손하게 그 명을
받들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틀림없이 심혈을 다해 선배님을...]
그의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혈도인마는 껄껄 소리내어 웃었다.
[소진이라는 자는 절세지재(絶世之才)로 여섯 나라를 움직인 공로를
세우고 이름을 떨친 바 있네. 그가 어떻게 자네처럼 이토록 우둔할 수
있겠는가?]
새소진은 안색이 변했다. 뭐라고 말을 하기도 전에 혈도인마는 어느
덧 걸음을 옮겨 나는 듯이 그의 앞으로 다가왔다. 숫제 그가 피할 기
회도 주지 않고 혈도인마는 다섯 손가락을 갈고리처럼 해서 그의 왼
쪽 어깨 견갑골을 움켜잡았다. 대뜸 시큰하고 얼얼한 고통이 온몸으로
퍼지게 되었고 새소진은 목청껏 부르짖었다.
[사람 살려! 여러분...]
혈도인마는 흉측하게 웃으며 왼손을 칼날처럼 세워 재빨리 내리쳤다.
그 소맷자락 속에 있던 다섯 손가락은 마치 예리한 비수처럼 새소진
의 가슴팍을 뚫고 들어갔다.
푹!
[으악!]
선혈이 콸콸 흘러 나오는 가운데 새소진은 처참한 비명을 질렀다. 그
새빨간 염통을 어느덧 혈도인마가 뽑아낸 것이었다.
십여 명의 녹림 대도들은 경악을 금치 못햇다. 혈도인마는 그 새빨간
염통을 입안으로 집어 넣고, 으적으적 씹으면서 크게 소리쳤다.
[자네들도 염통을 남겨 놓도록 하게!]
호통을 치며 그는 번개같이 몸을 날려 덮쳐 들었고 두 팔을 일제히
뻗쳐내 손과 손가락을 놀렸다. 그러자 쿵! 쿵! 하는 소리가 잇달아 울
려퍼지면서 두 명의 대한이 수장 밖으로 날려 가더니 돌계단 아래로
굴러 떨어졌다. 눈 깜짝할 사이에 기백은 두 다리를 일제히 날리니 두
명의 대한이 나가떨어지면서 골통이 박살나 골수를 사방에 쫙 뿌렸다.
나머지 십여 명의 녹림 대도들은 혈도인마의 그와 같은 위세에 깜짝
놀라 다투어 몸을 날려 줄달음질치고 말았다.
눈 깜짝할 사이에 사람의 그림자가 사방으로 흩어지게 되었고 혈도
인마가 호통을 치는 가운데 십여 명의 한 지방을 주름 잡았던 녹림의
대도들은 종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우하하하! 피래미같은 놈들!]
웃음소리 속에 혈도인마는 몸을 돌려 돌계단 위에 서 있는 각파의 제
자들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모두 다 목석을 깎아 놓은 것처럼 멍청해
져 있었고 겁에 질린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기백은 두 눈에 짙은 살기를 뿜어내며 무거운 어조로 입을 열었다.
[자네들은 어째서 아직도 비켜나지 않지? 노부는 오늘 무척 살생을
하고 싶어지는군. 누구든지 나를 막는다면 노부는 자네들 모두 이곳에
서 피를 뿌리도록 만들겠네!]
각파의 제자들은 잔ㅉ 긴장해서 혈도인마를 바라보았다. 한복판에 서
있던 중년 도사가 갑자기 손을 번쩍 쳐들고 허공에 붉은 공같은 것을
던졌다.
펑! 소리가 울리고 그 공같은 것은 허공에서 터져 화염을 쏟아 내었
다. 마치 새해에 터뜨리는 불꽃같았다.
고검남은 소리쳤다.
[아저씨, 그들은 구원을 청하고 있는 거예요...]
혈도인마는 그 한 마디에 번쩍 정신을 차렸다. 그는 지금 정세가 긴
박하여 반드시 쾌도참난마(快刀斬亂 )의 형세로 자기를 막고 있는 각
파의 제자들을 한꺼번에 처치하거나 아니면 처치할 필요 없이 가장
빠른 속도로 곤륜산 옥청관을 향해 치달아야 했다.
이와 같은 생각에 혈도인마는 길게 휘파람을 불며 몸을 날려 급격한
공세를 펼쳤다. 소맷자락을 휘둘러 광풍노도처럼 삽시간에 묘강(苗疆)
천고문(天孤門)의 절기 월륜참(月輪斬)을 펼쳐냈다.
햇살 아래 그의 비쩍 마른 몸이 질풍과 같이 맴을 돌았고 두 손은
교차해서 휘둘러졌다. 세찬 기운이 소용돌이치고 장풍은 칼날처럼 사
람들의 몸을 뚫고 들어갔다.
[으악!]
[켁!]
처참한 비명 소리가 이곳 저곳에서 울려 퍼지고 한 무더기의 잿빛 그
림자가 이르는 곳에 무기가 부러지고 붉은 피가 솟구쳤다. 혈도인마의
휘파람 소리가 미처 끊어지기도 전에 그는 이미 십장 밖으로 나가 있
었다.
그의 등뒤로 선혈이 고랑을 이루어 돌계단을 따라 흘러내리고 있었
으니...
고검남은 어릴 적부터 혈수천마 고명원에게 매달려 다니면서 아슬아
슬한 장면을 수없이 겪어 왔지만 한번도 이와 같이 참혹한 살육과 이
토록 피비린내 나는 장면을 목격한 적이 없었다.
그는 등뒤에 뿌려진 선혈을 바라보았다. 햇살을 받아 시뻘건 핏빛은
마치 곳곳에 붉은 꽃이 활짝 핀 것처럼 보여, 자기도 모르게 한차례
부르르 몸을 떨었다.
(무림에는 살육이 영원히 끊이지 않고 있으며 피비린내는 곳곳에서 풍
기고 있다. 강약이 마주치는 상황 아래서 약한 사람의 피는 강자의 명
성을 높여줄 뿐이다. 이는 마치 한 명의 장수가 공을 세우는 데는 많
은 졸개들의 생명이 필요한 것과 마찬가지다...)
그는 속으로 무학을 배우지 않으면 몰라도 일단 배운다면 반드시강
자가 되리리 결심했다.
(나는 결코 다른 사람의 명성을 높여주는 도구가 되지는 않겠다.)
그러나 그는 자기가 불구의 몸이라는 것을 상기했다. 참된 강자가 되
기 위해서 가야 할 길은 틀림없이 험난할 것이다...
삽시간에 그는 많은 것을 생각했다. 그와 같은 생각은 혈도인마 기백
이 돌계단을 따라 곤륜의 꼭대기로 나는 듯이 달려가고 있는 속도처
럼 빨리 나타났다가 사라지곤 했다.
그의 생각은 처참한 비명 소리에 중단되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산
길 위에 이십여 명이나 되는 사내들이 달려 내려왔는데그들 가운데
는 도사들도 있었고 화상들도 있었고 경장 차림의 무림인들도 있었
다...
가장 앞에 선 중년의 화상은 혈도인마의 일장에 목뼈가 부러져 죽었
다. 곧이어 이십여 명이나 되는 각파의 제자들이 혈도인마 앞을 막아
서게 되었다.
혈도인마는 충혈이 된 눈으로 호통을 내질렀다.
[나를 피하는 자는 살고 나를 막는 자는 죽을 것이다.]
말소리와 더불어 그는 조금도 거침없이 사람들 틈으로 뛰어 들었다.
마치 호랑이가 양떼들 한복판으로 뛰어든 것 같았다. 핏물이 뿌려지는
가운데 시체들과 부러진 칼날이 널리게되었다.
가장 뒷 쪽에서 내려오고 있던 젊은 도사들은 살성(殺星)이 인간 세
상에 하강한 듯 혈도인마가 순식간에 십여 명이나 죽여버리자 그만
깜짝 놀라 산 위로 도망쳤다.
혈도인마는 수염과 머리카락이 곤두서 있었고, 잿빛의 장포는 선혈로
새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푸르죽죽한 얼굴은 살기로 가득했다.
그는 깊이 숨을 들이마시더니 삼장 높이로 솟아 올라, 허공에서 잇달
아 일곱 걸음을 내딛는데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그 도사들의 머리를
밟았다
한번씩 디딜 때마다 머리를 바수어 버렸으니 일곱 걸음씩 옮겨 놓게
되었을 적에 일곱 명의 등을 돌리고 도망치던 도사들은 땅바닥에 쓰
러져 죽고 말았다.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젊은 목숨들은 시든 꽃잎처
럼 떨어져 나갔다. 무림에 투신한 사람들의 목숨은 원래 초개와 같지
않은가?
고검남은 이와 같이 놀라운 광경에 놀라 멍청해졌다. 그는 고개를 돌
려 길바닥에 널려 있는 시체들을 바라보다가 기백을 붙잡고 있는 손
이 느슨해졌다.
별안간 그는 혈도인마의 몸이 흠칫하면서 발걸음이 휘청거리는 것을
느꼈다.
[아저씨!]
그는 놀라 부르짖었다.
혈도인마는 대답했다.
[별것 아니다. 가벼운 상처를 입었을 뿐이다.]
고검남은 흠칫해서 부르짖었다.
[아저씨...]
[상관없다. 이까짓 상처가 무슨 상관이겠느냐?]
말하는 동안에도 그의 몸은 조금도 멈추지 않고 금벽휘황(金碧輝煌)
한 넓은 문을 지나 어느 덧 넓은 마당에 이르게 되었다.
산을 등진 채 절벽에 붙어서 집들이 즐비하게 세워져 있었다.
혈도인마는 말했다.
[드디어 옥청관에 도달했다.!]
그 파르스름한 유리 기와와 새빨갛게 주사를 칠해 놓은 붉은 담장은
햇살 아래 장엄하고 엄숙했다.
혈도인마는 한숨을 내쉬고 입을 열었다.
[천하에 이름이 알려진 도가(道家)의 성지(聖地)가 인간 도살장으로 변
하게 되었구나...]
고검남은 혈도인마가 어째서 갑자기 이와 같은 말을 하는지 헤아려
볼 여유가 없었다.
그는 사방을 둘러 보았다. 그 널따란 마당에는 한 사람도 살아 있는
사람이 없었다. 곳곳에 널려 있는 시체와 엉켜 붙은 선혈밖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그는 의아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어째 한 사람도 없을까요? 아버지와 다른 사람들은...]
혈도인마는 얼른 그 말을 받았다.
[그들은 옥청관의 옆에 있는 천지(天池)가에 가 있을 것이다. 그곳에는
연무장(練武場)이 한 곳 있다...]
그는 고검남의 말을 기다리지 않고 천지가 있는 쪽으로 나는 듯이
달려갔다.
곳곳에 시체들이 널려 있었다. 그들의 죽어 있는 모습은 너무나 참담
해서 심보가 악랄하고 손속이 매운 혈도인마도 그만 마음이 흔들릴
지경이었다.
(혈수천마의 이름이 결코 헛된 것이 아니었구나. 나는 그의 이름이 나
보다 위에 있는 것에 승복하지 못했는데, 지금 일백여 구나 되는 시체
들이 하나같이 혈수인 신공에 적중되어 오장이 박살나고얼굴 모습이
짓이겨진 것을 보면 혈수라는 이름은 나의 혈도라는 별호보다 더욱
무섭구나!)
이와 같은 생각을 하며 그는 마당을 가로질러 천지 옆에 이르게 되
었다.
이 천지는 백두산의 천지보다 훨씬 적었다. 그러나 그 호수는 파랗게
빛나고 있었으며 호수 한복판에는 기화이초들이 잔뜩 자라 있어 백두
산의 천지보다 훨씬 아름다웠다.
혈도인마는 찰랑거리는 파란 물을 바라보다가 즉시 호숫가의 잔디밭
위에 있는 사람들에게 정신을 빼앗기고 말았다.
고검남은 그의 등뒤에서 불렀다.
[아! 아버지에요!]
그는 마음이 격동되어 시력을 가다듬고 바라보았다. 혈수천마는 가슴
을 편 채 우뚝 버티고 서 있었는데 두 손은 수평으로 뻗쳐낸 상태였
다. 그의 앞에는 청수하게 생긴 늙은 도사가 두 손을 뻗쳐내서 혈수천
마의 두 손과 맞대고 있었다. 그의 앞에는 네 모금의 선혈이 뿜어져
있었으나 그는 태산처럼 우뚝 버티고 서 있었고 의연한 모습은 조금
도 누그러지지 않았다.
늙은 도사의 등뒤에는 두 명의 늙은 도사와 한 명의 화상이 서 있었
다. 그들은 손바닥을 앞 사람의 등뒤에 갖다댄 채 묵묵히 서 있었는데
그들의 표정은 엄숙하기 이를 데 없었다.
다른 한쪽에는 앞자락이 찢어진 늙은 도사와 뚱뚱한 중년의 화상이
서 있었다.
그들 역시 긴장한 표정으로 겨루고 있는 다섯 사람을 바라보며 숨을
죽이고 있었다. 따라서 다른 사람이 찾아온 것도 모르고 있었다.
그 청수한 늙은 도사의 신형이 앞으로 약간 기울어지면서 고명원이
즉시 몸을 뒤로 약간 젖혔고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제기랄, 뻔뻔스러운 놈들!]
혈도인마는 더 참을 수 없어 일성을 대갈하며 나는 듯이 달려갔다.
그의 호통 소리는 네 명의 내공을쏟아내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아무
런 반응도 불러 일으키지 못했지만, 한 쪽에 서 있던 화상과 도사는
깜짝 놀라 안색이 변해 소리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감사드립니다
감사합니다
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