宿安國寺 안국사에 묵으며
雲住千尋聳 운주산 천 길로 솟았고,
森森眼界淸 숲은 우거져 안계가 맑네.
新堂經劫火 새로 지은 당우들은 불을 겪었고,
舊釋落晨星 옛 절에는 새벽 별들이 떨어진다.
猿鶴堪同宿 원숭이와 학이 함께 잠자리에 들 만하고,
溪山却有情 계곡과 산이 몰록 정다워라.
雜花方爛熳 온갖 꽃들은 바야흐로 난만한데,
款款谷禽聲 새 소리 골짜기서 꾸욱꾸욱 들려오네.
-징월대사 시집
영남의 명승, 징월(澄月) 스님을 7, 8년 전 포항 운주산 안국사터 조사하며 알게 되었다.
스님의 행장을 읽으니 진영이 운부암에 있다고 하여
은해사 운부암을 찾아 갔지만 볼 수 없었다.
교사불자회 법우들과 같이 절터에 올라 옛 스님들을 그리워하며 산상법회를 올리고 와서
수필 <운주산 안국사터에서>를 썼고,
나중에 <<보리수필>>에 발표하였다.
그리고, 케이와이씨 문화유산길라잡이분들과 함께
안국사터 안내문을 세운 지 삼 년이 지났다.
경주 북방의 운주산에 신라시대 창건된 안국사는
1775, 1786년 대화재 뒤에 정조의 총애를 받은 규장각 학사
흥해군수 청성 성대중이 그 중수기를 지었다.
징사(懲士), 임금의 부름을 받은 경주의 산림처사,
두항거사 이수인 선생도 안국사에 묵고 시를 남겼다.
산남의진 항일의병 항전의 근거지가 되고
의병장 정환직, 정용기 부자가 비밀리에 안국사에서 만나
13도 창의연합군의 서울진공작전에 의병이 합류하기 위한 일을 논의하기도 하였다.
1908년에 의병의 활동 근거지가 된 안국사를
일본군이 올라가 불을 지르고 부수어 초토화 시켰다.
지금은 기와 조각 밭고랑에 나딩굴고 무당의 굿터가 되었다.
문화재와 역사의 현장이 당국의 무지와 시민의 무관심으로 방치되어 있어 안타깝다.
올여름 ㅈ시인이 포항이 낳은 불세출의 천재시인
흥해향리 농수 최천익 선생의 제자인 이계선생의 문집을 구해 주었다.
반갑게도 이계(耳溪) 장사경이 시승이었던 징월스님에게 준 시가 실려 있다.
팔공산 징월 스님에게 드림
贈公山澄月上人
씩씩하고 걸출한 젊은 스님 魁傑少年僧
무슨 즐거움으로 산속에 사는가 居山何所樂
짐짓 달마가 동쪽으로 온 까닭을 묻자니 試問達摩來
뜰 앞의 한 그루 잣나무라 하네 庭前一樹栢
지난 성탄절에 도반들과 인연되어 비구니 스님들의 수행처인 팔공산 은해사 백흥암에 갔다.
기록영화< <길 위에서>에 출연하신 주지스님도 뵙고,
프랑스에서 오신 푸른 눈의 스님도 만났다.
보화루에 올라서 현판들을 살폈다.
인종대왕 태실 수호암자로 조선시대 양반과 지방관청의 침탈을 금하는 경상감사의 공문서,
극락전단청공덕기에 징월 스님 이름이 나와서 반가웠다.
그리고 돌아오는 길에 징월 스님이 머물며 수행하셨던 운부암과 은해사를 참배했다.
놀랍게도,
내가 한 번 뵙고자 했던
그리운 징월 스님이 은해사 성보박물관 깊숙한 그곳에서
나를 근심스러운 눈으로 지긋이 보시고 있지 않는가.
스님은 의성 금성산 아래서 태어나 산사에서 과거 시험 공부를 하다가 불경을 열람하고
속세의 일이 허망함을 깨닫고 발심 출가했다.
영남 일대의 퇴락한 사찰 중건에 공로가 많으시다.
풍양 조씨 세도가 관료들과 한강의 나룻배 위에서 만나 시를 창수하고
시축을 남겼다.
헌걸찬 풍모에 그윽하고 자애로운 눈매를 한 스님의 화상에
희곡산인(李文煥)은 이런 제시를 붙였다.
맑은 강, 밝은 달 澄江皓月
이를 법신이라 이르지만, 是謂法신
나는 본래부터 둥굴고 고요하여, 我本圓寂
겉 모습이 곧 참 모습이라. 卽假而眞
希谷散人 題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징월대사시집
[ 澄月大師詩集 ]
유형 |
문헌 |
시대 |
조선 |
성격 |
시문집 |
편저자 |
정훈 |
제작시기 |
1832년(순조 32)(개간) |
권수·책수 |
3권 1책 |
간행·발행·발급자(처) |
수도암 |
소장처 |
계명대학교 도서관 |
정의
조선 후기의 승려 정훈(正訓)의 시문집.
개설
저자는 1751년(영조 27)경상북도 의성에서 출생하였으며, 속성은 김씨(金氏), 자는 경호(敬昊), 호는 징월(澄月)이다. 가선총공(嘉善聰公)에게 득도하였고 관월(冠月)에게 구족계를 받았다.
31세 때 개당(開堂)하였으며, 1823년(순조 23) 운부사(雲浮寺)에서 세수 72세로 입적하였다. 특히 시로 이름이 알려져 당시 높은 벼슬아치나 명사들이 추종하지 않는 이가 없어 영남지방의 명승(名僧)으로 추앙되었다.
편찬/발간 경위
1832년 팔공산(八公山) 수도암(修道菴)에서 개간(開刊)하였다. 첫머리에 1829년 5월 희곡산인(希谷散人)이 쓴 서문이 있고, 끝에 1832년 이태승(李台升)과 김이덕(金履德)이 각각 쓴 발문이 있다.
서지적 사항
3권 1책. 목판본. 계명대학교 도서관에 있다.
내용
권1에 오언절구 9편, 오언사율(五言四律) 33편, 오언장편(五言長篇) 4편, 칠언절구 67편, 권2에 칠언율시 59편, 권3에 미타암중수기(彌陀菴重修記)·지장사중수기(地藏寺重修記)·진불암중수기(眞佛菴重修記)·수도암이건기(修道菴移建記) 등 기문 4편, 최상룡(崔象龍)·희곡산인 이문환(李文煥)이 지은 영찬(影贊) 3편, 문인 유혜(有惠)가 기록한 징월화상행장(澄月和尙行狀)이 수록되어 있다.
권2에 수록된 서강시축(西江詩軸)에는 그의 나이 70세 때 서울 서강에서 연천(淵泉) 김이양(金履陽)·박옹(朴翁)·이명오(李明五)·석애(石崖) 조만영(趙萬永)·운석(雲石) 조인영(趙寅永)·황정(黃庭) 이태승 등과 수창(酬唱)한 시가 실려 있어, 사대부와의 시적 교류가 얼마나 깊었는지 알 수 있다. 시는 소박하고 담담하면서도 승려만이 가질 수 있는 안목으로 선정(禪定)의 고요함과 선리(禪理)의 깨우침이 함축되어 있다.
참고문헌
- 「시(詩)로 만족했던 징월(澄月)」(이종찬, 『한국불가시문학사론』, 불광출판부, 1993)
백흥암
백흥암 보화루
보화루-백흥대난야-극락전이 함께 보인다.
보화루 편액은 추사의 글씨이다.
보화루, 대웅전, 불광, 일로향각, 산해숭심은 모두 추사의 글씨이다.
불광은 은해사 박물관에서 볼 수 있다.
백흥암 마당
백흥암 보화루-산해숭심은 추사의 글씨를 새로 모각해 걸어놓았다.
백흥암 보화루. 경상감영의 완문을 징월스님이 정서하고(1798년) 판에 새겨 걸어두었다. 내용은 백흥암이 인종 태실 수호 사찰이므로 백흥암에 대한 공납 부역 등의 침탈을 금지한다고 하였다.
징월 스님이 지은 <백흥암극락전단청공덕기>
추사 김정희 글씨-시홀방장-유마경에 나온다.
시홀방장과 소동파의 석각화유마송 주련은 서로 짝을 이룬다.
해동의 '유마거사' 추사가 중국의 '유마거사' 소동파의 시를 인용한 것이나,
10장을 뜻하는 10홀이라는 표현을 추사가 다른 데서 사용하였다.
당의 사신 왕현책이 인도로 가서 유마거사의 고향 바이샬리에서
거사의 집으로 전해오는 곳에 가서 거사가 머물던 방의 크기를
가지고 있던 1장 길이의 홀로 재어보니 사방 10홀이었다고 한다.
여기에서 유마거사가 머물던 방을 사방10홀의 방이란 의미로
'방장'이라고 한 말이 탄생한 것이다.(法苑珠林)
내가 백흥암에 갔을 때 주지 스님도 추사가 아니고 낙관이 있듯이
어느 스님이라고 하였다.
시홀방장의 현판 낙관 "卍파석란?'이 어느 스님을 말한다고 한다.
추사는 상황에 따라 수백 개의 호를 사용하였다.
추사 印譜에서는 확인하지 못했지만,
추사의 아호 낙관 중의 하나일 것으로
생각한다.
주련과 편액이 한 세트를 이루고,
무엇보다도 편액과 주련의 글씨 자체가 추사의 글씨임을 웅변한다.
추사가 아니고는 이 정도의 글씨를 쓸
당대의 서예가나 승려가 없었다.
출가 전에 과거 시험 공부를 한 징월 스님이 시승으로
당대에 유명하였지만
당대의 승려나 서예가 중에 이 정도의 글씨와 표현을 할 사람은
추사 이외에 없다.
무슨 근거로 유홍준 교수가 유배 뒤에 쓴 추사의 명작이라고 하였는 지를
본인에게 문의를 해 보지 않아서 모르겠으나
시홀방장과 주련은
아마추어인 나의 생각에도 추사의 명작임이 확실하여 보인다.
'십홀'이 아니라 '시홀'이라고 읽는 것은
육월이 아니라 유월,
영취가 아니라 영축
반약이 아니라 반야
파라밀이 아니라 바라밀
석가가 아니라 서가
의 경우처럼
독경이나 염불 때 복모음, 경음, 격음, 받침있는 소리들은
발음하기도 힘들고 듣기에도 거치므로
발음을 쉽게 하고 듣기에 부드럽게 하려는
한국 불교의 관행에서 비롯된 것이다.
스님들은 비음을 넣어서 염불이나 독경, 의식을 집전하여
청자가 마음이 편안하도록 한다.
아래 글은 네이버에서 '시홀방장'이라는 검색어로 검색하면 뜨는 글이다.
김일환 글
세번째인 팔공산 백흥암을 보았다.
역시 못가본 절이다.
십홀방장은 시홀방장으로 써야 맞다.
내 기억에 주련의 글씨도, 시홀방장도 모두
추사의 글씨다. 만파 석란의 글씨라는
것은 검증되지 아니한 것일게다. 마침
유홍준의 완당평전 권2가 사무실에 있어
찾아본다. 그곳에서도 내 기억이 맞는 것으로
되어 있다. 물론 누가 옳은지는 더 조사해 봐야
할 것이지만, 단정적으로 추사가 아니라고 하기에는
벽이 너무 두텁다. 물론 심인보군이 그 정도도 조사치
아니했을리는 없겠지만, 유홍준에 대놓고 반박하려면
보다 정밀한 근거자료를 제시해야 한다.
물론 그러고 보니, 강상시절의 추사의 글씨 치고는 맥이 빠진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편액이니 글씨의 맛을 완벽하게
재현치 못했을 수도 있다. 주련은 모두 소동파의 시라 한다.
제목은 석각화유마송 (石恪畵維摩頌) 이라 하니 참고 바란다.
워낙에 추사가 소동파를 좋아했으니 그럴만하다 생각되는데,
주련의 글씨체와 시홀방장의 글씨체를 비교해 보아야 하겠다는
것에는 적극 동의한다. 분명 추사는 주련과 편액의 조화를
생각했었을 것이다. 프로니까. 그러나, 워낙에 경지가 높은
분이니 그 분의 조화와 우리의 조화는 당연히 틀릴 것이라 생각
되니, 이것도 조심스럽기만 하다....
더구나 완당평전은 학고재에서 출판했으니...
답글
시홀방장인가 십홀방장인가?
이부분에 대해 고민을 아니한 것은 아닌데
거의 대부분 십홀방장이라 표현하고 있어,
특히 종교적 언어로 표기되는 부분은 십홀방장이라
표기하고 있어 그것을 따랐다.
그리고 십홀방장이 추사의 글이라고 대개 말하고 있다.
특히 유홍준의 완당평전에서 그리 써놓아 거의 모든
책에서 그의 주장을 따르고 있으나
한국미술연구소, 과천시 추사기념관 소속 학예관,
이대 홍선표교수,작가 도병훈씨등은 만파석란이라
주장한다.
그러나 학문적으로 진위를 가리지는 못했다
그래서 사실은 다시 가서 주련의 글과 편액의 글을
비교해 보았다. 획 하나 하나는 상당히 유사하기는 하나
글씨 전체가 주는 이미지는 많이 달라 후자의 견해를 따르기로 했다.
소동파의 글임도 이미 알고있었으나
내게는 유마경의 의미를 이야기 하는 것이 더 걸맞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아마 교정볼 것은 많을 것이다. 고맙다
후에 이영복 선생과의 전화 통화에서 만파석란글씨의 낙관을 확인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선생은 완당평전 개정판에서는 유홍준 선생도 정정한다 했다.
십홀방장은 출판사 교정중 시홀방장으로 하자 해서 그 의견을 따랐다.
.......
김일환 글
혹시나 해서 찾아 보았다.
十笏方丈이라 했는데, 아무리 보아도 十忽方丈이 맞는듯 하다.
笏은 임금님 앞에 갈 때 신하가 드는 것이고
忽은 매우 작은 숫자를 뜻하는 것이니
아무래도 忽이 맞는 듯하다.
혹시 알고 있었다면 말고. 이제라도 찾게 되어 다행이다 싶은데,
추사가 어찌 그리 틀린 글씨를 썼겠나 싶다.
혹시 내 해석이 틀리다면 지적해 주기 바란다.
답글
늘 궁금해하는 것에 경의를 표한다.
시홀방장은 한자의 의미만 가지고는
네 말대로 쓰는 것이 옳은데
十笏方丈이 맞다.
열자 자리 방이란 의미이니
열개의 홀이란 뜻이란다.
대충 홀이 한자정도크기이니 ....
그리고 추사의 다른 글에서도 그리 쓰고 있다.
一庭十笏散懷能
주련의 글씨는 추사 김정희 글씨.
시는 소동파의 것으로 유마경의 내용을 표현하고 있다.
백흥대난야는 누구의 글씨인지? 추사의 글씨 같기도 하다.
백흥암
백흥암
백흥암 수미단은 아름답기 이를 데 없다.
백흥암 수미단 공작
백흥암 수미단 인어
영화에도 출연한 주지 스님의 환대를 받았다.
누룽지 맛 잊을 수가 없다.
절집 안에서 쓰는 말에 ‘청정수월도량’(淸淨水月道場)이라는 게 있다. 기도나 불공을 드릴 때 부처님께 고하는 축원에서 빠지지 않고 읊조려지는 구절로, 그 절이 맑고 깨끗하기가 물에 비친 달과 같다는 뜻의 말이다. 어느 절에서나 이 말을 수시로 되뇌고 있지만 청정수월도량이 말처럼 흔한 것은 아니다. 백흥암은 그런 드문 절집 가운데 하나다. 은해사의 북서쪽 골짜기 깊숙이 들어앉은 이 조용하고 조촐하고 정갈한 암자는 언제나 수십 명 이상이 모여 노동과 수행에 여념이 없는 비구니스님들의 수행처이다.
백흥암심검당과 진영각의 처마가 극락전의 귀기둥 안까지 들어올 만큼 실제 공간은 좁은데도 전혀 답답하지가 않다.
비단 바탕에 수를 놓은 격으로 백흥암은 많은 보물들을 갈무리하고 있다. 보물 제790호로 1643년 중건된 극락전은 단청이 곱게 날아 은은한 고풍이 살아나는 조선 중기의 목조건축이다. 물빛 하늘을 나는 청자 속의 학처럼 그 자태나 처마선이 고상하고 격조 높다. 극락전 안의 수미단은 현재 남아 있는 우리나라의 불단 가운데 그 구성과 조각솜씨가 가장 빼어나고 아름다운 것으로 평가된다. 그것만을 따로 떼어 극락전보다 16년이나 앞선 1968년 보물 제486호로 지정하였으니 그 가치나 아름다움은 긴 설명을 요하지 않는다. 높이 125㎝ 폭 413㎝로 상하대 각 1단, 중대 3단의 5단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중대와 하대에 갖가지 짐승과 꽃과 새들이 부조되어 있다. 그밖에 후불탱화, 1673년 개수한 것으로 추측되는 단청과 벽화, 아미타삼존 등이 모두 나름대로 품격을 갖춘 보배들이다. 매우 안타깝게도 1762년 제작되어 채색과 구성과 화풍이 독특하여 수작으로 꼽히던 감로탱(甘露幀)은 몇 년 전 도난당해 모사본을 걸어두었다. 그리고 도난의 되풀이를 막기 위해 법당 안쪽으로 천장 가까이에 이르는 철창을 둘렀다. 이 점을 제쳐둔다면 극락전 안은 보물로 그득한 셈이다.
극락전 내부법당 안에 있는 수미단은 현재 남아 있는 우리나라 불단 가운데 그 구성과 조각솜씨가 가장 빼어나고 아름다운 것으로 평가된다.
수미단 조각의 일부거북등을 하고 있는 상상 속의 사람이 보주를 받들고 꽃밭을 걸어가고 있다.
진영각의 편액과 주련은 추사의 솜씨이다. ‘十笏方丈’(십홀방장)이란 편액은 ‘홀(笏) 열 개를 이어놓은 길이, 곧 사방 1장(丈=10척) 되는 작은 방’을 의미하니 큰 산중의 어른인 방장(方丈)이나 그가 쓰는 방을 가리킨다. 주련을 통해 이 말의 유래를 거슬러 오를 수 있다.
我觀維摩方丈室
사방 열 자 유마(維摩)의 방
能受九百萬菩薩
구백만 보살,
三萬二千獅子座
삼만 이천 사자좌를
皆悉容受不迫迮
들이고도 비좁지 않고
又能分布一鉢飯
한 바루 밥 나누어서도
饜飽十方無量衆
가없는 시방 대중 배불리리라
중국 송대의 문장가 소식(蘇軾)의 글을 옮긴 것으로 그 출전은 줄여서 ‘유마경’으로 부르는 『유마힐소설경』(維摩詰所說經)이다. 경전의 주인공 유마힐 거사는 부처님 당시의 유명한 재가신자. 그가 병을 핑계로 문수보살·가섭존자 등 기라성 같은 많은 불제자들의 문병을 유도하여 자신의 방에서 진리에 대해 일대 토론을 벌인다. 유마거사의 입을 통해 “중생이 앓기 때문에 보살이 앓는다”는 유명한 명제를 낳은 모임이 이것이다. 이 자리에 무수한 보살과 천신과 불제자들이 동참하여 유마거사의 사방 1장 되는 좁은 방에 900만 보살이 들어서고 3만 2천 앉을 자리를 마련하고도 오히려 자리가 넉넉했다는 얘기가 『유마경』에 실려 있다.
편액과 주련의 내용이 똑떨어지게 서로 호응하는 맛도 그만이지만, 특히 ‘십홀방장’의 글씨는 태산이 실려도 끄떡없을 만큼 굳건하고 힘이 가득하다. 역시 추사가 해배(解配)된 뒤 어느 때 쓴 것으로 본다.
극락전·심검당·보화루·진영각이 이루는 네모진 공간은 어쩌면 백흥암이 베푸는 공간미학의 백미인지도 모른다. 극락전은 단청을 입히고 나머지 셋은 백골로 두었지만 네 건물 모두 차분한 고색이 서려 분위기는 그윽하고, 심검당과 진영각의 처마가 극락전 귀기둥 안쪽으로 들어올 만큼 현실의 공간은 비좁은데 느낌은 전혀 답답하지 않다. 여기 안뜰에 서면 저절로 고요하고 단정한 무욕의 세계로 이끌릴 뿐이다. 유마의 방처럼 스무 평 남짓한 공간이지만 그 이상의 깊이와 넓이를 지녔다. 언제나 수십 명이 모여 정진에 여념이 없지만 이곳은 늘 적요하고 정밀(靜謐)하기만 하다. 반야의 칼을 벼리는 ‘지혜의 품’이다.
백흥암은 신라 경문왕 9년(869) 주위에 잣나무가 많아 백지사(栢旨寺)라는 이름으로 창건되었다고 전한다. 조선 명종 1년(1546) 천교화상(天敎和尙)이 백흥암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은해사에서 팔공산에 이르는 산세가 용이 등천하는 기세이므로 등 너머 운부암(雲浮庵)에서 상서로운 구름이 더욱 많이 일어나서 용의 승천을 돕도록 한다는 뜻에서 그렇게 이름지었다고 한다. 중종 15년(1520), 암자 부근의 태실봉에는 뒷날 인종이 되는 왕세자의 태가 봉안된다. 이로써 백흥암은 ‘막중한 것을 수호하는 곳’(莫重守護之所)으로 지정되어 국가의 보호를 받게 되고, 정조 22년에는 완문을 하사받아 관의 침탈로부터 벗어나게 된다. 태실의 수호와 완문의 수장을 계기로 백흥암은 그 모습을 일신하고 사세를 탈없이 유지하게 되었던 듯하다.
아쉽게도 백흥암은 평소 일반에 공개되지 않는다. 1년 중 다만 하루 사월 초파일에만 출입이 허용된다. 달리 생각하면 이 점은 아쉬워할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귀한 물건은 귀하게 다루고 곱게 지키고 가꾸어야 더 귀해지는 법이다. 흔전만전 쓸 수 있다면 누가 그 귀함을 알며 어떻게 그 귀함을 오래 지킬 수 있으랴. 게다가 그곳에는 열심히 일하고 힘써 지혜를 닦는 수행자들이 늘 수십 명 이상 모여 살지 않는가. 그러니 한 해에 한 번 백흥암의 대문이 열리는 일은 조금 불편하기는 할망정 불만스러워할 일은 아닌 것 같다. 깨어지기 쉬운 옛 그릇을 다루듯 조심스런 접근은 오히려 우리의 배려와 예의인지도 모른다.
조선 초 시문으로 문명이 높았던 유방선(柳方善, 1388~1443)은 「백지사」(栢旨寺)라는 시의 말미를 이렇게 맺고 있다. “방 따뜻하여 새벽잠 안온하고(房暖朝眠穩)/등불 밝아 밤 이야기 길어라(燈明夜話遲)/스님네 마음씨 속되지 않아(居僧心不俗)/ 반 달이 넘도록 돌아갈 줄 모르네(半月爲忘歸).” 백흥암은 그때의 분위기가 남은 고풍한 절이다. 어딘가에 우물이 감추어져 있어 사막이 아름답다고 했던가. 절다운 절이 사막의 오아시스처럼 드문 이 시대에 백흥암은 달고 시원한 감로수가 샘솟는 옛 샘 같은 절이다.
운부암
백흥암에서 산등성이 하나 너머에 운부암(雲浮庵)이 있다. 신라 진덕여왕 5년(651) 의상(義湘)스님이 창건하였다고 전하기도 하고, 구산선문의 하나인 실상산문을 연 홍척국사(洪陟國師)가 초창했다는 말도 있어 그 시작을 종잡기 어렵다. 애초의 이름은 운부사(雲浮寺). 절을 처음 지을 때 상서로운 구름이 하늘에 떴다 하여 그렇게 이름지었다 한다. 유방선의 「운부사」라는 시에 “홀로 찾은 운부사(獨訪雲浮寺)/선방 고요하여 마음 붙일 만하네(禪房靜可依)”라는 구절이 있고, 『신증동국여지승람』에도 ‘운부사’로 소개되어 있으니 16세기 초까지는 운부사로 불렸음을 알 수 있다. 아마도 은해사가 태실의 수호사찰로 규모가 커지면서 그 산내암자로 사격이 낮춰진 듯하다.
본전인 원통전, 현재는 요사채로 쓰이는 좌우의 심검당과 우의당(禹儀堂) 그리고 정면의 누각인 보화루로 이루어진 크지도 작지도 않은 암자이다. ‘고사무거승’(古寺無居僧)이라더니 절을 지키는 스님네가 없는 듯 집채들에 퇴락의 기미가 짙다. 누각의 이름이 ‘보화루’이니 큰 절인 은해사, 백흥암 그리고 운부암의 경우가 모두 같다. 짐작으로는 그 뜻을 ‘화엄경(華)을 보배로 여긴다(寶)’로 풀 수 있으니 세 곳 모두 『화엄경』을 사상의 중심에 두었기 때문이 아닌가 싶고, 실제로 영·정조대에 걸쳐 화엄교학으로 이름을 떨치던 영파 성규(影坡 聖奎, 1728~1812)스님이 이 산중에 머물기도 했으니 그럴 만도 하지만 꼭 그런지는 모를 일이다.
원통전에 모셔진 관세음보살좌상은 보물 제514호이다. 높이 102㎝에 이르는, 15세기 중엽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청동불상으로 커다란 보관과 온몸을 덮는 복잡한 영락장식이 특징적이다. 화려할지는 몰라도 정교하거나 섬세하지는 않은 보관은 얼굴이나 몸체에 비해 지나치게 커 무거워 보이며 불상의 느낌을 둔하게 만든다. 가슴은 물론 두 어깨와 팔, 배, 양쪽 무릎과 다리에까지 골고루 늘어진 영락들도 어지러울 정도로 복잡하기는 하나 생동감도 없고 입체적이지도 않아 그야말로 장식을 위한 장식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이렇듯 커다란 보관이나 어지러운 영락장식은 원나라 양식의 영향을 받은 고려 후기 불상에서 자주 볼 수 있다. 그 잔재가 원통전 불상에까지 남은 것으로 생각된다.
청동관세음보살좌상커다란 보관과 온몸을 덮고 있는 복잡한 영락장식이 특징적이다.
환재 박규수(瓛齋 朴珪壽, 1807~1877)는 연암 박지원의 손자이자 김옥균·유길준·박영효·김윤식 등 개화파의 선봉에 섰던 인물들을 길러낸 개화사상가이다. 운부암과 어떤 인연이 있었는지는 자세하지 않으나 그의 글씨 두 점이 이 암자에 전해진다. 원통전 편액과 심검당에 걸린 ‘雲浮蘭若’(운부난야). 원통전 편액은 단아정중하고, 심검당의 그것은 부드럽고 넉넉하되 묵직한 무게가 담겨 있다. 두 편액에 ‘계해년 한겨울’(癸亥仲冬)이라 방서(傍書)했으니 이 해가 1863년, 아마도 박규수가 철종 13년(1862)의 임술농민항쟁 때 안핵사(按覈使)로 임명되어 사건 실상의 조사와 수습을 맡아 경상도를 오르내리던 무렵에 쓴 듯하다.
박규수의 글도 한 점 운부암에 남아 있다. 보화루 안의 현판에 새겨진 ‘팔봉대사진찬’(八峰大師眞讚)이 그것이다. 글의 말미에 ‘瓛齋居士 朴珪壽’(환재거사 박규수)라는 관지(款識)가 있지만 글씨에 밝은 분의 얘기로는 틀림없이 그의 글씨는 아니라고 한다. 아마도 그의 글을 받아다 글씨에 능한 누군가에게 부탁하여 쓴 듯하다. 비록 환재의 솜씨는 아니지만 미늘 달린 창처럼 날카롭고 꺼끌꺼끌한 글씨가 여간 아니다.
진영(眞影)에 있어야 할 진찬이 어떻게 해서 현판으로 걸렸는지, 또 팔봉대사가 누구인지는 모르겠으나, ‘팔봉대사진찬’은 그 내용이 재미있으면서도 의미심장하다.
길게 선 것은 코 가로 누운 것은 눈썹이요,
모난 입 튀어나온 광대뼈가 닮지 않은 것이 없다.
문도들이 와서 보고 ‘진짜 우리 스님’이라 한다.
그림 그린 이가 크게 웃으며 여러 스님들에게 말했다.
그림으로야 아무래도 이 정도일 뿐이니
그대들 스승을 진정 보고자 한다면 어찌 그림 밖에서 구하지 않는고.
물결 없는 맑은 못에 둥두렷한 가을달이요,
구름 걷힌 푸른 하늘에 한 떼의 두루미로다.
竪者爲鼻 橫者爲眉, 方口高顴 無不肖之.
其徒來觀 謂眞吾師. 畵者大笑 告衆梨.
丹靑之뒬 能事止此, 欲見爾師 盍求諸彼.
澄潭不波 秋月一輪, 碧落無雲 野鶴一羣.
보화루의 편액은 해관 유한익(海觀 劉漢翼, 1844~1923)의 글씨이다. 워낙 추사·환재의 글씨에 눌려서 이야기 대상에서 빠지기 일쑤지만 요즘 서예가들의 글씨에 비하면 격이 다르게 선이 굵은 글씨이다. 은해사·백흥암·운부암은 글씨 구경만으로도 자못 눈과 마음이 바빠진다.
운부암
운부암 보화루
운부암 보화루(화엄경을 보배로이 여긴다.) 해관 유한익의 글씨
운부암 원통전
백흥암과 암자의 건축이 흡사하다. 조선시대 암자의 전형을 보여준다.
운부암 원통전 관세음보살은 정말 아름다운 불상이다.
원통전 편액은 박규수의 글씨.
운부난야(연암 박지원의 손자 박규수 글씨)
우의당(박규수 글씨)
운부암 달마도 벽화
[이야기가 있는 옛懸板을 찾아서 .8] 영천 은해사 ‘불광’
- 김봉규기자
- 2013-02-20 07:40:09
유달리 긴 세로획 밑을 잘라 걸자, 秋史는 대로해 편액을 불태우다
주지스님의 삼고초려 끝에 大명필의 작품 걸게돼…추사가 ‘佛光’ 두 글자를 쓰기위해 버린 파지가 벽장에 가득했다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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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천 은해사 ‘불광’ 편액. 이 편액은 추사 김정희가 처음 편액을 불태워버린 뒤 다시 글씨 원본대로 만들어 건 것이다. 처음 편액은 ‘불(佛)’자의 세로 긴 획을 잘라 만들었는데, 추사가 보고는 떼어오게 해 불태워버렸다 한다. |
팔공산 은해사(영천시 청통면 치일리)는 추사체로 너무나 유명한 서화가 추사(秋史) 김정희(1786~1856) 글씨의 야외전시장으로 불릴 정도로 추사 글씨 현판이 많다. 추사는 곳곳의 사찰에 그의 글씨를 남겼지만, 은해사만큼 많이 남긴 곳도 없다.
은해사에만 ‘불광(佛光)’ ‘대웅전(大雄殿)’ ‘보화루(寶華樓)’ ‘은해사(銀海寺)’ ‘일로향각(一爐香閣)’ ‘산해숭심(山海崇深)’ 등의 편액이 있고, 은해사 부속암자인 백흥암에는 ‘시홀방장(十笏方丈)’ 편액과 주련 작품이 있다.
은해사에 남긴 글씨는 대부분 추사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작품이다. 이 중에서도 눈길을 끄는 것이 ‘불광’이라는 편액이다.
‘불광’은 불광각에 걸려 있었다는 기록이 있지만, 현재는 그 전각이 없다. 대웅전 안쪽 등에 걸려 있다가 지금은 은해사 성보박물관에 전시돼 있다.
박물관을 들어서면 가장 먼저 마주치는 것이 ‘불광’이다. 글씨를 모르는 이들도 대형 글씨인데다 ‘불’자의 한 획이 유달리 길어서 눈길이 가게 된다.
◆수많은 실패작 후에 건진 ‘불광’ 작품
은해사는 1847년 대화재 후 1849년에 중건 불사를 마무리하게 되는데, ‘대웅전’ ‘보화루’ ‘불광’ 등의 편액 글씨는 추사가 이때를 전후해 남긴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니 추사가 1848년 제주 유배에서 풀려난 이후 1851년 북청으로 다시 유배의 길에 오르기 전까지의 기간에 남겼을 것이다.
이 중 ‘불광’ 글씨는 추사 글씨 중에서도 대표적 수작으로 꼽힌다. 60세 넘은 나이에 쓴, 필획에 힘이 있으면서도 한결 부드러운 완숙미가 묻어나는 작품이라는 평을 듣는 이 글씨에는 작품을 더욱 돋보이게 하는 이야기가 전한다.
당시 은해사 주지 스님은 추사의 작품으로 편액을 만들기 위해 불광각에 달 편액 글씨 ‘불광’을 추사에게 특별히 부탁했다.
그런데 사람을 몇 차례 보내며 독촉해도 써 보내 주지 않았다. 주지는 안되겠다 싶어 마지막에는 선물로 절의 불상을 하나 들고 가서 간청했다. 그러자 추사는 크게 웃으면서 불상을 사양하고는 아랫사람을 시켜 벽장 속에 가득하게 써 놓은 ‘불광’이라는 글씨 중 잘 된 것을 골라 오라고 했다. 추사는 그 아랫사람이 골라 온 것을 보더니 잘못 골랐다고 책망하면서, 자신이 생각하고 있던 작품을 직접 골라 내주었다.
그동안 편액 글씨를 안 쓰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득의작을 하나 건지기 위해 수많은 작업을 반복했던 것이다 . 당대 최고의 서예대가지만, 그리고 60세가 넘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마음에 드는 작품을 건지기 위해 수없는 실패를 마다하지 않았던 것이다.
‘불광’은 그렇게 탄생한 작품인 것이다. 천양희 시인은 이 이야기를 소재로 ‘파지’라는 시를 남겼다.
‘그 옛날 추사(秋史)는/ 불광(佛光)이라는 두 글자를 쓰기 위해/ 버린 파지가 벽장에 가득했다는데/ 시(詩) 한 자 쓰기 위해/ 파지 몇 장 겨우 버리면서/ 힘들어 못 쓰겠다고 중얼거린다// 파지를 버릴 때마다/ 찢어지는 건 가슴이다/ 찢긴 오기가/ 버려진 파지를 버티게 한다// 파지의 폐허를 나는 난민처럼 지나왔다/ 고지에 오르듯 원고지에 매달리다/ 어느 땐 파지를 팔지로 잘못 읽는다/ 파지는 나날이 내게서 멀어져간다// 내 손은 시마(詩魔)를 잡기보다/ 시류와 쉽게 손잡는 것은 아닐까/ 파지의 늪을 헤매다가/ 기진맥진하며 걸어나온다// 누구도 저 길 돌아가지 못하리라.’
◆추사가 처음 편액을 불태워버린 까닭은
은해사 주지가 ‘불광’ 글씨를 가져와 편액을 만들려고 하니 갈등이 생겼다. ‘불’자의 세로획 하나가 유별나게 길어 그대로 편액을 만들면 편액이 통상적인 모양이 안될 것이고, 거는데도 어려움이 있을 것 같은 생각을 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주지는 고민 끝에 ‘불’자의 세로로 긴 획을 ‘광’자의 세로 길이에 맞춰 잘라버린 채 편액을 만들어 걸었다. 나중에 은해사를 방문한 추사가 그 편액을 보게 되었다. 추사의 기분이 어떠했겠는가. 추사는 아무 말 없이 편액을 떼어오라고 했다. 편액을 가져오자 절 마당에서 불을 질러 태워버렸다.
서예대가인 추사가 고심 끝에 내놓은 ‘불광’ 작품의 핵심은 바로 불자의 긴 세로 획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전체 작품 구성이 빈 공간과 조화를 이뤄 멋진 작품이 된 것이다. 그런 작품의 핵심 획을 잘라 버리고 평범한 글씨의 편액으로 만들어버렸으니 추사가 그냥 둘 리가 없었던 것이다.
주지는 추사가 크게 화를 내는 이유를 알아채고는 “정말 잘못했다”며 용서를 빌고, 다시 글씨 원본 대로 판각을 해 걸었다. 두 번째 만들어 건 편액이 지금 은해사 성보박물관에 전시돼 있는 ‘불광’ 편액이다.
‘불광’은 불광각이라는 전각에 걸려 있었던 모양이다. 1862년 혼허 지조 스님이 지은 ‘은해사 중건기’에 ‘대웅전, 보화루, 불광각에 걸린 세 개의 편액은 모두 추사 김상공(金相公)의 묵묘(墨妙)’라고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불광각은 없어지고 불광 편액은 대웅전, 우화각 등에 걸려 있다가 성보박물관이 완공되면서 그곳으로 옮겨져 보관되고 있다.
‘불광’ 편액은 송판 4장을 가로로 이어붙여 만든 대작으로 세로가 135㎝, 가로가 155㎝ 정도 된다. ‘불’자의 가장 긴 세로 획의 길이는 130㎝가량이다. 검은색 바탕에 흰 글씨로 된 이 편액은 세로 획 덕분에 가로 글씨 편액임에도 불구하고 세로 길이가 가로 길이와 비슷한 편액이 되었다. 현존하는 추사의 친필 글씨 작품 중 가장 큰 대작으로 파악되고 있다.
글·사진=김봉규기자 bgkim@yeongna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