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의 반항
김광림
꽃은 꺾인 대로 화병에 담아 채우면
금시 향기로워 오는
목숨인데
사람은 한번 꺾어지면
그만 아닌가
지금은
한 아람씩 피어 물은 입술로
神의 이름을 핥으며 있는 시간-
꽃은 열반으로도
관음보살의 발바닥에서
피는데
전쟁만 남고
억울한 것은 상기도 젊은 건가
아름다움과 동경을
잃어버린
다음은
꽃은 검은 눈시울
꽃은 스스로의 눈짓을 돌리는 아픔/
꽃은 십자가에 걸리는 죽음/
―인가
결국은
한없이 꺼져드는 울음을
속으로만 물어뜯다가
죽은 자를 모반하여 피는
꽃은 수없이 무너뜨린 가슴에게
미안한 열매를 마련하지 못하는 구실의
화병인데
사람도 그만 향기로울 데만 있으면
담아질, 꺾이어도 좋을
꽃이 아닌가
-사상계(1959. 2.)
상심하는 접목
일없이 부러진 가지를 보면
그 다음의 가장귀가 안 됐다.
요행히도
전쟁에서 살아 남았을 땐
우리는 어쩌다 애꾸눈이 아니면 절름발이었고
다음엔
찢기운 가슴의
어느 모퉁이가 허물어졌을 것이다.
몇번째나
등골이 싸느랗게 휘어졌다가는
도루
접목 같은 세월을 만났다.
새털의 악보를 타고
하야라니 내리는 것은
눈보란가
꽃보란가
꽃도
무너지면 두려운 것
요즈막엔
사랑도 목을 골라 대는
미안한 기별의
나날이다.
꽃의 꺽임!
처음 인간에게 들킨 아름다움처럼
경악하는
눈 눈은 그만
꽃눈이었다.
애초엔 빛깔
보다도 내음보다도
안 속으로부터 참아 나오는 울음
소릴 지른 것이
분명했다.
지구를 꽃으로 변용시킬
신의 의도가
좌절되기에
앞서
수액을 보듬어 잉태하는 생성의
아픔 아픈
개념이 꽃이었다.
갈등
빚 탄로가 난 아내를 데불고
고속버스
온천으로 간다.
십팔 년 만에 새삼 돌아보는 아내
수척한 강산이여
그동안
내 자식들을
등꽃처럼 매달아 놓고
배배 꼬인 줄기
까칠한 아내여
헤어지자고
나선 마음 위에
덩굴처럼 얽혀드는
아내의 손발
싸늘한 인연이여
허탕을 치면
바라보라고
하늘이
저기 걸려 있다.
그대 이 세상에 왜 왔지
― 빚 갚으러
-『김광림시전집』(바움커뮤니케이션, 2010)
김광림(1929-2024)
-1948년 이후 신문과 문학지 등에 시를 발표 하면서 등단하였다.
-1957년에는전봉건, 김종삼 등과 3인 시집 《전쟁과 음악과 희망과》를 발표한 바 있다. 〈풍경〉, 〈갈등〉, 〈0〉, 〈壬子〉, 〈乞人〉 등의 작품으로 1973년 제5회 한국시인협회상을 받았다. 1992년부터 1994년까지 한국시인협회 회장을 지냈다.
-2009년 제10회 청마문학상, 1999년 대한민국 보관문화훈장을 받았다.
-시집
《상심하는 접목》(백자사, 1959)
《심상의 밝은 그림자》(중앙문화사, 1962)
《오전의 투망》(모음사, 1965)
《학의 추락》(문원사, 1971)
《갈등》(문원각, 1973)
《한겨울 산책》(천문출판사, 1976)
《언어로 만든 새》(문학예술사, 1979)
《바로 설 때 팽이는 운다》(서문당, 1982)
《천상의 꽃》(영언문화사, 1985)
《말의 사막에서》(문학아카데미, 1989)
《곧이곧대로》(문학세계사, 1993)
《대낮의 등불》(고려원, 1996)
《앓는 사내》(한누리미디어, 1998)
《놓친 굴렁쇠》(풀잎문학, 2001)
《이 한마디》(푸른사상사, 2004)
《시로 쓴 시인론》(푸른사상, 2005)
《허탈하고 플 때》(풀잎문학, 2007)
《버리면 보이느니》(시문학사, 2009)
《불효막심으로 건져낸 포에지》(바움커뮤니케이션 , 2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