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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설명: 2011년 1월 11일 저녁, 함박눈이 내리던 날, 서울 신사동 유심아카데미 세미나실에서 장석남 시인을 만나 그의 삶과 문학에 대한 여정의 길을 활짝 펼쳐 보았다. (사진 : 황예린)
【웹진 시인광장 Webzine Poetsplaza SINCE 2006】2011년 2월호(2011, February)
□ 장석남 시인
1965년 8월 3일 경기도 인천 덕적도 출생. 서울예술전문대학 문예창작과를 졸업하였으며, 인하대학교 국어국문학과에서 박사 과정을 수료한 후 현재 한양여자대학 문예창작과 교수로 재직 중. 1987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맨발로 걷기」가 당선되어 등단. 시집으로 1991년『새떼들에게로의 망명』(문학과지성사), 1995년『지금은 간신히 아무도 그립지 않을 무렵』(문학과지성사), 1999년『젖은 눈』(문학동네), 2001년『왼쪽 가슴 아래께에 온 통증』(창작과비평사), 2005년『미소는 어디로 가시려는가』(문학과지성사), 2010년『뺨에 서쪽을 빛내다』(창작과비평사), 산문집으로 2000년『물의 정거장』(이레), 2008년『물 긷는 소리』(해토) 등을 출간. 제11회 김수영문학상, 제44회 현대문학상, 제10회 미당문학상을 수상.
■ 김명원 시인
1959년 충남 천안에서 출생. 이화여대 약학과 및 성균관대 대학원 국문학과를 졸업. 문학박사. 1996년 《詩文學》으로 등단. 시집으로 『슬픔이 익어, 투명한 핏줄이 보일 때까지』와 『달빛 손가락』이 있음. 2002년 '노천명문학상'과 2007년 '성균문학상' , 2008년 제13회 '시와시학상 젊은시인상'을 수상. 현재 대전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겸임교수이며 웹진『시인광장』편집위원.
김명원의 시인탐방 13 젖은 언어로 ‘질문하는 풍경’을 그리는 가인, 장석남
대학교 새내기 시절, 처음으로 기웃거린 동아리가 연극부였다. 제한된 시간 속에서 나에게 주어진 배역인 한 사람의 생애를 연습하고, 그의 절박한 대사를 외우고, 그의 사랑을 모방하며, 그 사람이 되어보는 것에 얼마나 매료되었던가. 소름이 돋았던가. 장석남 시인을 만나러 가는 고속버스 안에서 불현듯 그 시절의 연극 감정이 일었던 것은 아마도 내가 시인의 삶을 염탐하며 벅차했던 세월 때문이었을 것이다. 소슬한 계절이 지나가는 정자에 앉아 바람의 무늬를 집어냈을 시인, 언어가 잠드는 적요한 밤에 돌을 다듬었을 시인, 홀로 연못을 파 하늘을 담고 그 곳에 별들을 띄웠을 시인, 깊은 어둠의 회랑에서 음악을 켰을 시인, 한번도 자신의 문학적 신화를 이루려하진 않았으나 이미 독자들에게는 맑은 신화가 된 시인, 나는 그러한 시인을 어쩌면 연습하고, 그의 문학과 생애를 어루만지고, 그의 시구詩句를 호흡하며, 그를 살아왔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연극의 기억과 겹쳤기 때문일 것이다. 장석남 시인, 그에게는 부드러움과 싸늘함이 공존한다. 그에게는 세상에 대한 측은과 고소苦笑가 함께 관류한다. 말하자면 모든 스펙트럼의 자장을 그가 내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만큼 그는 남들보다 더욱 넓은 생의 지도를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인천의 덕적도가 그의 생래적인 외로움을 길러내었고, 수많은 공간으로의 이사와 방황이 그의 그리움을 키웠으며, 전각篆刻과 음악, 서예 등에의 경도가 그의 예술 동기를 부추겼을 것이다. 그의 순한 눈길이 자연과 동화하였으며, 그의 매서운 서정이 사물을 새롭게 살려내었고, 그리하여 자기 자신과 더불어 모든 존재들의 정수精髓를 도모해서 그만의 신선한 감각을 궁리하고 개발한 시들을 그는 거침없이 선보였다. 그리하여 그의 시에는 ‘장석남’이라는 상호가 분명히 붙어 있다. 장석남이라는 장인에 가까운 손길이 되기까지 그는 가난했던 생계를 통해 문학적 재산의 목록들을 늘려 나갔고, 결핍을 통해 실존의 기쁨과 환희를 깨우쳐갔다. 그를 만나러 가는 고속도로변에 눈보라가 쏟아졌다. 신년서설, 새해 들어서 여러 번 큰 눈이 있었다. 은성스러운 장면들이 많았다. 그처럼 시계視界가 아득하도록 퍼붓는 저 눈발이 우리 만남에 닥칠 휘황한 아름다움이기를 바라고 있을 때, 나를 태운 버스는 기우뚱거리며 서울 매표소로 진입한다. 오랜만에 도착한 서울이다. 왼쪽 가슴께가 조금 아프다.
참 훤한 풍모의 시인 첫 인상의 시인은 키가 훤칠하게 컸다는 것, 요즘 아이들이 말하는 ‘훈남’이라는 것, 그리고 당당한 수줍음이 있었다는 것이다. 왜 그를 두고 ‘미남 시인’이라고 말하는지를 알게 되었지만, 흔히 거론하는 ‘선線이 우아한 꽃미남’이 아니라 그는 ‘선이 시원한 잎미남(필자의 조어)’이었다. 시인은 눈이 흠뻑 내린 탓에 오는 길이 막혔다는 이야기부터 꺼냈다. 그리고 내가 최근에 가장 뉴스가 될 만한 일이 있었느냐고 묻자 조카의 아내가 바로 이틀 전에 교통사고로 사망했다는 소식을 전했다. 공사장 근처를 걷다가 후진하는 트럭에 치었다는 것이다. 나는 묻지 말아야 할 것을 물었다는 자책으로 마음이 무거워졌고, 너무도 어린 신혼부부의 불행에 대해 그는 답변을 하면서 내내 어두워졌다. 우리는 그렇게 삶에의 비애와 운명에의 귀속에 대해 그림자를 더듬으며 대담을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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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명원: 조카분께 일어난 사고 소식에 몸 둘 바 모르겠습니다. 왜 이렇게 아픈 일들이 우리 곁에서 일어나는지요. 명을 달리하신 분께 깊은 조의를 표하고요. 선생님 시 중에 이런 구절이 있지요. “이 세상에 온 모든 생들 / 측은히 내려보는 그 노래”라고요. “쏟아지는 푸른 눈발 속을 떠갈 날이/ 곧 오리라”고요. 어쩌면 시인이란 그렇게 홀연히 떠나가는 “이 세상의 모든 뒷모습들”을 채록하는 자가 아닐까요? □ 장석남: 상실의 큰 고통을 맞닥뜨린 조카로 인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말씀하신 시는 「마당에 배를 매다」라는 작품이지요. 그 시를 쓸 무렵, 무언가 제 생에서 한 번쯤 마디를 지어야 할 듯싶었습니다. 왜 사람에게는 삶을 좀 바꿔보고 싶다는 생각이 날 때가 있지 않은가요. ‘이게 아닌데, 이게 아닌데’ 라는, 스스로에 대한 의구심 말입니다. 좀 거창한 이야기가 되고 말았습니다만 그건 제가 삶을 수용하는 방식의 문제이기도 했거든요. 그러던 차에 어느 집 마당가에 앉아 있을 때였습니다. 저물녘이었지요. 마당가 우거진 숲에 제일 먼저 어둠이 깃들고 있었어요. 그것은 저를 태우러 온 배(船)와도 같았습니다. 문득 저는 제가 지금 배를 매고 있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고요. 사람의 일생은 흔히 ‘사계四季’로 비유되기도 하지요. 나는 지금 내 생의 어디쯤 와 있는가. 녹음 가득한 배가 내 앞에 있었습니다. 시간이라는 심연의 배 말이에요.
마당에 / 녹음 가득한/ 배를 매다 // 마당 밖으로 가는 징검다리 / 끝에 / 몇 포기 저녁별 / 연필 깎는 소리처럼/ 떠서 // 이 세상에 온 모든 생들 / 측은히 내려보는 그 노래를 / 마당가의 풀들과 나와는 지금 / 가슴 속에 쌓고 있는가 // 밧줄 당겼다 놓았다 하는 / 영혼 /혹은, /갈증 // 배를 풀어 쏟아지는 푸른 눈발 속을 떠갈 날이 / 곧 오리라 // 오, 사랑해야 하리 / 이 세상의 모든 뒷모습들 /뒷모습들
배를 타고 저 마당 끝쯤에 떠 있는 별에게까지 가는 것이 우리들의 생인지도 모릅니다. 그 도정의 풍경을 우리는 어떻게 그려볼 수 있을까요. 그것은 일종의 갈증이겠지요. 그 갈증 때문에 시를 쓰거나 혹은 선禪에 들거나 하는 게 아닌가요. 배는 울렁이며 아직 마당가에 매여 있습니다. ■ 김명원: 이 시에서처럼 세상의 뒷모습을 사랑해야 한다고 노래한 시인의 ‘첫 기억’을 묻고 싶군요. 세상의 빛을 따라 나서고 나서 처음 기억되는 순간 말이지요. □ 장석남: 첫 기억요? 기억의 맨 밑자리인 서너 살 때의 어느 하루가 떠오르네요. 저는 낮잠에서 깨어나고, 주위에는 아무도 없습니다. 무서움 때문에 울음이 나왔지만 저는 울어도 소용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이제는 울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집 밖으로 나오고요. 마당에 가득 찬란하던 햇빛에 멀미가 났던 것도 같은데, 오후의 햇빛들은 고기비늘처럼 산자락에 부딪쳐 반짝이고 있었고요. 그 다음부터는 혼자 집을 지킬 수 있는 아이가 되었습니다. 왜 ‘이제부터 울어도 소용없다’고 생각한 그 생각 자체가 제 기억의 맨 밑자리에 자리하게 되었는지 불가사의하네요. 저는 늘 빈 집에서 저녁이 늦어도 오지 않는 할머니와 어머니를 기다리는 일이 많았거든요. 어둑어둑해질 무렵 찬 방에 웅크리고 있다가 보면 ‘털썩’하고 나뭇동을 헛간에 메어붙이는 소리가 났어요. 반가움에 문을 열면 어머니는 저만큼 마당 한켠에서 아무 말 없이 머리에 썼던 수건을 벗어 옷에 묻은 검부러기들을 탁탁 털고 계셨고요. 어머니의 머리 위로는 흩어진 튀밥처럼 흰 별들이 돋아나 빛나고 있었지요. 늦은 저녁을 짓는 부엌 아궁이 앞에 어머니는 환한 불빛을 안고 앉아 계셨고, 저는 그 옆에 나란히 앉아 별다를 것 없는 이야기를 지껄이곤 했지요. 말이 많지 않으신 어머니는 부지깽이로 아궁이의 불을 다스리다가 밥이 다 되면 발등에 기대 졸던 강아지의 다리를 탁 쳐서 깨우고는 일어나 솥 가에 흐른 밥물을 닦으며 뜸을 들였던 기억들이 나네요.
밥을 먹으며 나는 자주 밥 냄새 끝까지 달아나 있다 밥의 기억 모두 낙엽져 앙상한 마을, 내려와 넓은 숨을 쉬는 하늘가에서 이름 버리고 빈 그릇을 달그락거리기도 한다 어느 미래에 나는 배고프지 않은 기억 밑으로 수저를 던질 것인가 내 영혼의 싱싱한 지느러미 속에 차고 단단한 잔별들이 뜰 때 나는 조용히 수저를 놓고 그들과 함께 몸 비틀며 반짝일 것이다 밥을 먹을 때 나는 자주 기억도 끝나는 곳을 病처럼 다녀오곤 한다 -「밥을 먹으며」전문
■ 김명원: 저녁이 늦어도 오지 않으시는 할머니와 어머니를 기다리는 소년의 모습이 아슴아슴합니다. 어둑한 배경으로 흩어진 튀밥처럼 흰 별들이 돋아나 빛나고 있었다는 대목에선 차라리 서늘한데요. 밥 짓는 연기를 맡으면 우린 금세 고향을 떠올리지요. 선생님께 배어있는 밥 냄새와도 같은 그리움의 시원은 고향인 덕적도 바닷가인가요? □ 장석남: 맞아요. 제가 자란 바닷가 마을의 찬란한 해변에 대한 그리움들이 가장 많을 듯싶어요. 황해 먼 바다에 있는 섬 덕적도 서포리. 저의 잔뼈가 굵어진 고향의 이름이지요. 거기에는 널따란 백사장이 있었어요. 그쪽에서는 그래도 이름난 피서지여서 여름이면 해변가에 많은 알록달록한 천막이 들어서는 곳이었고요. 그 여러가지 빛깔들이 좋아서 저는 초여름만 되면 마음이 설레곤 했어요. 그러나 그 해변, 해당화가 즐비하게 피어나던 그 해변이 내게 준 것이 있다면 그것은 다른 무엇보다 영혼에 관한 어떤 암시일 거예요. 그곳이 단순히 해수욕을 하고, 더위를 식히고, 유흥에 들뜨는 그러한 곳 이상의 어떤 신비스러운 한 장소로 내 마음에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을 깨닫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지난 후였지요. 그곳을 떠나고 조금씩 그곳이 그리워지기 시작하면서 저는 제 마음속에 그 서포리 해변을 수없이 그려내고 있었죠. 그리고는 그 위에 물결 소리들을 풀어놓곤 했고요. 천천히 들고 나는 밀물이며 썰물. 썰물이 남긴 흔적들. 단 한순간도 쉬지 않는 파도의 리드미컬한 움직임과 바닷가에 둥지를 트는 새까만 바닷새의 처량한 울음소리들. 그러한 내 마음의 풍경 속에서 저는 아무런 동행도 없이 혼자 유유히 걸음을 옮겨 다니고 있었던 거죠. 태풍이 불어 닥치면 해안선의 바위들을 들이받는 파도들의 성난 포말은 실로 엄청난 공포로 다가오기도 했었는데, 그렇듯 제 유년을 빙 두르고 있는 해안선의 모습을 하염없이 떠올리면서 저는 무언가 새로운 어떤 세계를 발견해 내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암시에 시달렸던 것이니까요.
허기, 그리고 솎아냈던 슬픔들
■ 김명원: 그 후 선생님은 초등학교 6학년 때 인천으로 전학을 하며 덕적도를 떠났고요. 십대 중반에서부터 이십대 중반까지 근 십여 년을 살았던 인천 도화동 집에서의 기억도 선생님 문학의 도화선을 이루지요? □ 장석남: 도화동 집의 기억들은 잔잔하게 음악 속에 섞이곤 해요. 아직도 그대로라면 아마 그 집 마당엔 오동나무가 가득할 것이고요. 전체 대지가 삼십여 평이 될까 말까한 작은 터였는데, 그중 마당에 두어 평의 화단을 갖추었던 그 집엔 지붕 위까지 웃자란 오동나무가 한 주 서 있었어요. 그 집에 대한 기억은 그 오동나무에서부터 시작하지요. 그 집으로 이사를 간 것은 늦은 가을이었고, 당연히 오동나무는 앙상하게 서서 초라한 우리집 세간을 맞았어요. 그날 밤 저는 그 오동나무 바로 앞에 전신주가 하나 서 있고 거기에 보안등이 켜진다는 사실을 알았고요. 보안등 불빛에 비치는 그 오동나무의 앙상한 골격은 이제 막 이사를 와 정이 들었을 리 없는 집에서 맞는 첫 저녁답게 참 을씨년스러웠죠. 그래도 셋방을 전전하던 우리 식구들로서는 처음으로 장만한 집, 말하자면 초인종을 마음대로 누를 수 있는 집이어서 오래지 않아 정이 붙었어요. 중학교에 입학하고 2학년인가 3학년이 되어 저는 여름 방학 때 캠핑을 가면 써먹으리라 생각하며 손도끼를 하나 사서는 방과 후 숫돌에 매일 그 무딘 날을 갈았지요. 텐트 같은 것을 치거나 할 때 유용하게 쓰리라고 생각하면서 그렇게 한 것인지 잘 갈아지지 않는 도끼날을 매일 벼리곤 하였던 것이에요. 문제는 그 다음이었는데, 숫돌에서 시꺼먼 물이 씻겨져 내릴 때까지 갈고는 보안등에 그 날을 비춰본 후 저는 시험 삼아 매번 오동나무 허리를 내리쳤어요. 그 무른 나무에는 손도끼가 대번에 쿡쿡 박혔는데 그 야릇한 쾌감은 참 알 수 없는 것이었죠. 그런 짓을 한겨울 내내 되풀이했던 것 같아요. 아니나 다를까 다음해 봄에 그 나무는 새순이 나지 않았어요. 아버지는 저를 그저 몇 마디 말로 꾸짖었는데 그 정제된 몇 마디가 제 가슴에 아프게 자리 잡았지요. 이후 저는 스무 살이 되었어요. ■ 김명원: 스무 살, 참 위험하도록 눈부신 나이네요. 그 시절의 이야기를 좀 더 듣고 싶고요. □ 장석남: 베어낸 오동나무 그루터기에서 놀랍게도 새순이 나와 자라기 시작하더니 스무 살이 될 때까지 이전에 제가 죽인 그 오동나무만큼 자랐어요. 오동나무가 빨리 자란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실로 살의殺意를 가진 무엇처럼 그렇게 빨리 자란다는 사실은 놀랄 만했지요. 그리고 그때 저는 딱히 유래도 없이 문학청년이 되어 있었어요. 그 집에는 방이 셋이었는데 하나는 세를 놓았고 골방 하나가 제 차지였어요. 그 방은 아궁이가 세를 놓은 집 부엌에 딸려 있는 바람에 좀처럼 연탄불을 넣기가 귀찮아 냉골로 지내기 일쑤였고요. 문학만 가르친다는 대학에 찾아가 입학을 하고, 그해 겨울 방학을 맞이한 때였어요. 두꺼운 솜이불을 푹 뒤집어쓰고 문을 꼭 닫은 채 담배를 물고는 밤새 시를 끄적이거나 책을 읽었지요. 그 골방의 찌든 담배냄새 속에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백열등 열을 이마 위에 느끼면서 읽어낸 책 중의 하나가 카프카의『성城』이었네요. 책 읽는 것을 딱히 즐기지 않았던 제가 그토록 지루하게 읽은 그 책이, 제게 그토록 길고도 힘 있는 전류를 흘려보낼 줄 누가 알았을까요. 삼성 출판사판 보급형 세계 문학선집 2단 세로짜기의 그 좁쌀만한 활자들을 더듬으며 갈 수는 있으나, 그리고 꼭 가야 하나 자기도 모를 이유 때문에 끝까지 도달하지 못하는 그 성을, 저는 제 안에서도 너무나 선명하게 발견하고 있었던 것이죠. ■ 김명원: 저도 스무 살 무렵에 그 소설을 읽었지요. 사업가인 마초 기질을 가졌던 카프카의 아버지는 내성적인 아들을 마음에서 내몰고 있었을까요. 체코어로 ‘까마귀’라는 뜻을 가진 ‘카프카’라는 이름으로 가족들에게 불리면서 카프카는 자신만의 음울한 문학의 성으로 다가갔으니까요. “K가 도착한 것은 밤이 이슥한 뒤였다. 마을은 깊은 눈 속에 묻혀 있었다. 성城이 있는 산은 전혀 보이지 않고 안개와 어둠이 산을 둘러싸고 있어 큰 성의 소재를 알리는 희미한 불빛조차도 비치지 않았다. K는 오랫동안 큰길에서 마을로 통하는 나무다리 위에 서서 허허로이 보이는 저편을 쳐다보고 있었다.”라는 서두의 아득함에 닿으며 저 역시 얼마나 허황되도록 슬펐던 지요. □ 장석남: 그렇게 시작하는 소설『성城』은 하이데거가 말한 이 세계에 ‘내던져진 존재’의 현장을 극명하게 보여주면서 시종 저를 우울한 열광에 휩싸이게 만들었습니다. 저는 책을 몇 줄 읽다가 K의 심정을 헤아리며 답답증이 일어나면 밖으로 나와 보안등에 역광으로 드러난 오동나무의 앙상한 가지를 하염없이 쳐다보곤 했죠. ‘나’라는 존재는 어느 우주에서 어느 우주로 가다가 잠시 이 지상에 내려진 것이란 말인가. 내려진 이곳에서 나는 또 어디를 향해 가야만 하는가. 그곳은, 내가 가야만 하는 성은 어디인가. 그곳에 가고자 할 때 내 발목을 보이지 않는 거미줄로 엮고 있는 것은 또한 무엇인가. 끊임없이, 대상을 알 수 없는 살의 같은 것이 제 텅 빈 머릿속을 어지럽혔어요. 어느 날은 술에 취해 집 앞에서 택시를 내렸는데, 내린 것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집으로 가는 길이 보이지 않아 새벽녘까지 헤매다가 겨우겨우 집으로 찾아 들어오기도 했고요. 참으로 처음 살아보는 삶이 실감나던 시간들이었어요. ■ 김명원: 그 차가운 불같던 청춘을 정의해 본다면요? □ 장석남: 저희 집에는 세 칸짜리 철제 캐비닛 장롱이 하나 있었는데, 어떤 경로로 우리 집 살림에 섞이게 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여하튼 그 차가운 물건은 우리 살림에 깊이 관계하고 있었어요. 그 캐비닛에는 다이얼을 돌리는 금고도 아래쪽 한 칸에 딸려 있었고요. 그 안에는 별 쓸모 있을 것 같지 않던 문서 몇 가지와 전기세 영수증 같은 것들, 왠지 버릴 수는 없고 그렇다고 사용하지도 못할, 이가 빠진, 겉모습만 귀중한 물건 같은 제도 용품 세트 같은 것들이 들어 있었지요. 내용물은 다 알면서도 무엇인가 제게 꼭 필요한 귀중한 무엇이 따로 있을 것만 같은데 비밀번호를 잘못 간수해 열어볼 수 없는 상황, 저는 그게 제 청춘의 어떤 상징처럼 느껴졌어요. 아무렇게나 생긴 철제 캐비닛 속의 허술한 금고. 그러나 덜컹거리면서 금방이라도 열릴 것 같지만 비밀번호 없이는 좀처럼 열리지 않는, 그 안에는 정작 별 쓸모도 없는 문서나 이 빠진 제도용구밖에 다른 것은 없는, 그러나 무엇인가 꼭 있을 것만 같은 그곳이 제 청춘이 찾아가려고 한 어떤 상징이 아닌가 싶어요.
다채로운 작업 - 전각, 음악, 서예 등에 심취하다
■ 김명원: 아픈 스무 살이 지나서는 어디에서 삶의 이정표를 찾았나요? □ 장석남: 스무 살이 넘을 무렵이 되어 어떤 사물을 좀 자세히 볼 수 있는 나이가 되자 저는 돌멩이가 좋아졌어요. 별 까닭이 있는 좋음은 없죠. 예쁜 여자가 무슨 까닭이 있어서 예쁘겠어요? 돌멩이를 들여다보는 것이 좋았고 또 그 돌멩이를 들여다보는 저도 맘에 들었거든요. 쓸데없는 짓에 열중할 수 있는 것도 큰 능력이잖아요. 저는 제게 그런 능력이 있다는 점이 좋았던 것이에요. 돌은 강하고 또 나이가 많아요.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나이가 아니거든요. 과학에서는 추측할 수 있다고 하지만 저는 그런 추측은 믿지 않는 편이고요. 추측이라는 것도 그저 추측일 뿐이니까 실감으로야 올 수가 없지 않나요. 그러므로 돌의 나이는 그저 신비의 나이일 뿐이지요. 그 안을 들여다볼 수 없으므로 그 안에는 구름이 흐른다고 생각할 수 있었고요. 어떤 세상이 펼쳐진다고 해서 별로 이상할 것도 없는 신비스러운 어떤 것이 있었으니까요. 옛날 사람들은 마당을 꾸밀 때 돌을 뒀거든요. 돌을 놓고 그 앞에 꽃을 심었지요. 돌을 프레임 삼아서 꽃을 보는 거예요. 돌은 늘 가만히 있고 천년만년 가는 영원한 것이라면, 꽃은 봄에 피었다가 여름과 가을을 통해 겨울이면 시들고 지는 것이니, 돌과 꽃의 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의 대비라고 할까요. 아무튼 어느 날, 저는 인사동을 지나다 도장집에 들렀어요. 어릴 때부터 서류에 찍기 위해 도장을 새기면 맘에 들지 않았던 터였는데, 그래서 도장에 새길 글씨를 써서 ‘이렇게 새겨주시오’ 해도 그렇게 새겨주는 데는 없었거든요. 할 수 없이 대충 파놓은 것을 받아서는 책상머리에 앉아 제가 다시 연필 칼로 다듬곤 했고요. 이번엔 제가 한번 그 재료를 사서 만들어보기로 했어요. 인주를 묻혀서 종이에 찍어보니 도장장이의 그것보다 못하지 않았죠. 그 뒤로 저는 돌에 도장을 새겨보기로 했습니다. ■ 김명원: 그 돌들에는 무엇을 새기고 담았나요? □ 장석남: 전 그곳에 꽃도 파봤고 산도 제 나이에 맞게 봉우리로 만들어 파보았어요. 새는 돌 속으로 날아갔고 물은 돌 밖으로 흘렀지요. 달은 돌 뒤로 졌으며 눈보라는 세찼고요. 돌의 까칠한 표면에 드러난 그러한 형상들이 가장 원시적이면서도 가장 모던한 기쁨을 주었어요. 숟가락도 파보았는데 숟가락은 외롭게 보였다는 기억이 납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돌의 마술사였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어요. 게다가 화강암의 그 암질 위에 은근히 올려놓은 형상과 선들이 저는 좋았지요. 보일 듯 말 듯, 새겨 넣은 듯 감추어둔 듯한 그 형상과 선과 면들은 바람이 숭숭 통하는 마음들의 발로였으니까요. 무덤가의 석물들을 보아도 거기엔 어김없이 꽃이며 거북이며 귀여운 용들이 있지요. 그것들을 새긴 이들의 몰두를 저는 거룩한 삼매三昧로 여깁니다.
삭혀야 할 것들이 있어서 속이 아플 때나 지나가는 여자를 보고 갑자기 길눈이 어두워질 때 나는 홍예문으로 돌의 얼굴을 보러 갑니다 그 동안 내가 사귄 돌들은 벌써 많아서 봄바다로 들어간 사람을 본 돌 벚꽃 떨어져 허리를 다친 돌 뱃고동에만 귀를 여는 돌 속에 음악이 가득한 돌 열에 떠서 금강석을 쥔 돌 돌의 얼굴에 새겨진 별의 자국 바람의 애무 그런 것들도 봅니다 그날 하루 버리고 싶은 발길들 그런 것들도 흔들리는 어떤 돌 밑에 괴이고 옵니다 ―「돌의 얼굴―둘」전문
■ 김명원: 성북동 자택 뜰에 정자를 지었다고 들었습니다. 사색의 장소인 ‘한아정寒鴉亭’, 노스님이 지어준 ‘춥고 배고픈 까마귀’라는 뜻의 그 단출한 공간에서 돌을 파고 있는 시인의 모습이 느껴지고요. 그 마당에다 연못도 직접 파서 구름과 별들을 모은다고요. 생각만 해도 고요한 전율이 이는 광경인데요. 도대체 못 하시는 일이 무언지 묻는 편이 나을 듯 싶기도 하네요. 음, 그리고 선생님 글에서 보면 음악에 대한 이야기가 제법 많이 소개 되고 있던데요. 음악에 대해서도 애틋한 추억이 많이 있지요? □ 장석남: 음악에 완전히 빠져 지낸 적이 있었습니다. 한동안은 들을 만한 여건이 안 되서 듣지 못하다가 요즈음은 좀 멀어진 듯도 하고요. 하지만 음악에 있는 심미의 세계는 잊을 수 없죠. 저의 음악에 대한 추억이라면 트랜지스터 라디오로부터 이야기가 시작되는데요. 노랑 고무줄이 둘둘 감긴 트랜지스터 라디오를 이쪽저쪽으로 쥐어박으면 밤하늘에 반딧불이가 날아가듯 희미하게 전파가 잡혔습니다. 그래도 그 오죽잖은 것에서 음악이라는 것이 섞여 나오면 귀를 세우고 듣곤 했지요. 흐릿하게 흘러나오는 통기타 가요며 팝송 등을 익혔는데 잉글버트 험퍼딩크며 헬렌 레디, 바비 빈튼, 비틀즈, 해리 펠라폰테 같은 옛날 가수들의 것이 기억에 많이 남아요. 70년대 중반인데도 그랬어요. 그만큼 제가 살던 곳은 벽지였고, 우리 집은 유난히 가난했으니까요. 직장을 다니고 나서도 한참이 지나 벼르고 별러 오디오를 친구와 함께 세운상가에서 장만해 자취방으로 싣고 오던 때의 기분은 뭐랄까요. 처음으로 소를 한 마리 들여놓는 농부의 심정이었을까요. 친구는 음반회사에 다니던 차여서 오디오와 음악에는 전문가였지요. 그 친구의 조언을 들어가며 음악이라는 초원에 여행을 드디어 시작하게 되었고요. 맨 처음 들었던 곡이 친구가 가져 온 쳇 베어커였습니다. 저는 평생 그를 잊지 못할 거예요. 제가 번 돈으로 100에 10만원짜리 자취방에서 최초로 오디오를 장만해 들은 첫 음악을 어찌 잊을 수 있을까요. 얼마가 지나고 미샤 마이스키의 <메디테이션>이라는 앨범을 사서는 생상의 <동물의 사육제>에 나오는 ‘백조’를 찾았지요. 음악에도 감동이 있다는 것을 느끼게 한 곡이었거든요. 중학교 2학년 때, 아침에 일어나면 라디오를 켜는 것이 습관이었는데 마침 9월 1일이어서 닐 다이아몬드의 ‘September Morning’이라는 곡을 내보낼 것 같더라고요. 아니나 다를까 그 곡이 반쯤 지나가고 있었고, 그 즈음에 들었던 황홀한 음악이 바로 ‘백조’였지요. 하교를 하면서 근처 악기점에 들러 첼로의 가격까지 물었을 정도니까요. 첼로를 배울 수 있을 줄 알고 희망 고교 진학란에 예고를 썼고요. 참으로 순진하고도 무지하던 때의 이야기입니다. 어머니가 호출되었고 인문계로 바뀌었지만요. 결국은 제물포고에 배정되어서 문예반도 들어가고 예비 시인 박형준, 김우섭, 이기인 등을 후배로 맞게 되었지요. ■ 김명원: 음악과 문학은 남매지간이 아니던가요? 지금처럼 겨울이 깊어지면 듣는 음악이 있으세요? 사실 음악은 청각이 가장 섬세하게 벼려지는 겨울에 듣는 것이 제 격일 테니까요. 겨울을 위한 음악을 소개 좀 해 주시겠어요? □ 장석남: 겨울은 뭐니 뭐니 해도 차이코프스키를 들어야 하는 계절이지요. 그런데 저는 겨울이 깊어지면서부터는 격렬한 것보다는 소품들을 듣게 되요. 마치 깊은 산, 눈 덮인 소나무에 쌓인 눈들이 떨어질세라 조심하는 듯이요. 이즈음 듣는 것이 브람스의「무언가」죠.「종달새의 노래」,「삽포의 송가」,「노랫가락처럼 흘러 간다」,「다시 너에게 가지 않으리」,「사람의 아들들에게 임하는 바는」,「나는 모든 학대를 보았다」,「죽음이여, 고통스런 죽음이여」,「황무지를 건너서」,「사랑의 진실」,「내 잠은 점점 잦아드네」,「여운」등등의 제목이 붙어 있지만 가사는 없는 곡이에요. 미샤 마이스키의 첼로는 감미롭고 그래서 대중적이지만 그래도 이런 겨울날 저녁에는 좋아요. 더 좋은 것은 반주인데, 파벨 길릴로프의 피아노는 느리고 명상적이지요. 길릴로프의 피아노가 언덕이라면 마이스키의 첼로는 거기 언덕을 배경으로 떨어지는 눈발과도 같거든요. 때로는 짙고 때로는 가늘게 이어져요. 특히「종달새의 노래」를 시작하는 그 힘겨우며 꽉 찬 감정의 출발은 눈물겹지요. 겨울의 쓸쓸함 없이 이 노래만 들을 수는 없을 것 같고요. 창밖에 눈이 오는 날 저는 이, 제목에 어울리지 않게 쓸쓸한 곡을 틀어놓으려고 잔뜩 벼르곤 했습니다. ■ 김명원: 선생님께서 소개해준 곡들을 이번 겨울이 가기 전에 반드시 감상해 봐야겠어요. 예전에 우리가 학교 다닐 때는 음악감상실이 있어 전문 디제이가 음악을 신청 받아서 틀어주곤 하였지요. 비가 오는 날이나 오늘처럼 눈이 퍼붓는 날에 듣고 싶은 곡들을 주문하던 특별함이 간절하네요. 참, 선생님의 책에 대한 애정이 남다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요즈음에는 고서 수집도 하고 있다고요. □ 장석남: 대학에서 강의를 해야 하니 더욱 더 책에 관심이 많습니다. 책에 대해 말씀을 드리자면, 제가 맨 먼저 구입한 책이 아마도 박재삼 시집이거나 아니면 천상병 시집이었을 가능성이 높아요. 무슨 맘을 먹고 그런 시집을 돈을 주고 살 생각을 했을까요. 당시의 책이 남아 있나 찾아보니 시집 몇 권이 고교 시절에 구입한 것들이더라고요. 어김없이 책 맨 뒤에는 이런저런 책을 구입한 사연들이 적혀 있는데, 그런 것은 이전에 구입한 많은 책들에도 적혀 있는 것이어서 그걸 흉내 내었겠지요. 어떤 책에는 여학생을 짝사랑할 때의 사연이 들어 있기도 하고, 어떤 책에는 “누이가 돈을 주었고 나는 이 폭력적인 시집을 사다”라고 적혀 있어요. 그때는 용돈이 지극히 궁할 때였으니까 책을 사는 일이 제 기억에는 무슨 행사라도 되었던 것 같아요. 돈 얘기가 다 있는 걸 보면요. 그런데 왜 폭력적이라고 썼을까요. 그것도 서정시의 대가이신 박재삼 시인의 시집『千年의 바람』뒤에다가 말이죠. 지금 돌이켜 보면 그것은 그 아름다운 표현들이 제 맘을 폭력적일 만큼 세게 두드렸다는 뜻이 아닐까요. 유치한 당시의 글귀들이나 사연들이 지금 발견되면 재미있고 유쾌해 지지요. 저는 어쩌다가 책 시장에 들러 책을 대여섯 권 사면 빨리 집으로 오고 싶어 안달이 나요. 다른 일이 있어도 미루게 되요. 머리 맡에 그것들을 쌓아두고 그것들과 연애를 하고 싶기 때문이에요. 그 연애란 우선 책 하나하나를 매만져보는 것이고요. 모서리도 손으로 더듬어보고 책의 표지를 이리저리 쓰다듬어보기도 해요. 한 장 한 장 그 내지를 펼쳐서 책의 냄새를 맡고 책을 집은 손을 멀리 보내 그윽하게 이리저리 돌려 살펴보기도 하고요. 그 다음에야 서문을 읽어나가기 시작하고 대개는 서문을 읽고는 책을 덮어요. 그러고는 마침내 제가 가지고 있어야 되겠다고 생각되면 도장을 찍습니다. 책의 맨 앞 장에다가 제가 아무렇게나 깎아 만든 ‘石南書齋’라는 도장을 찍고는 제 나이의 페이지에 가서 작은 도장 하나를 다시 찍지요. 전에 다니던 직장인 인천 새얼문화재단의 지용택 이사장님은 지극히 책을 사랑하는 분이셨는데, 그분께서 그렇게 하시는 모습을 보고 좋아서 저도 하는 습성이랍니다.
스승이라는 소중한 인연
■ 김명원: 선생님은 서예나 사진 뿐 아니라 거문고, 전자 기타, 피아노 등 악기 연주에도 상당한 시간을 할애하였는데요. 선생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 장석남: 제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요? 아무래도 사람들과의 만남이지요. 유년 시절에 장애에 가까운 수줍음을 탔던 저로서는 지금도 내성적이라 사람을 잘 사귀지 못하는 편이지만 그래도 만남을 통해서 저는 이 세계에 적응해 왔고 나름의 생각하는 방법이나 체계를 갖출 수 있었어요. 그 사람들이 다 좋은 사람은 아니었을망정 모두 제 삶에서는 중요한 역할들을 해주었다고 생각해요. 그중 뭐니 뭐니 해도 스승을 만나는 것만큼 중요한 인연은 없을 듯 하고요. ■ 김명원: 선생님이 한 지면의 연보에서 밝혔듯이 각별한 인연의 스승분들이 계시지요? □ 장석남: 저는 일찍부터 시의 길을 가고자 정하고 시를 가르쳐줄 선생님을 찾아다니며 반생을 보냈어요. 직접적인 가르침을 받고 삶의 전환점을 만들어준 분을 들라면 오규원 선생님과 최하림 선생님이 계시고요. 그 분들을 만나지 못했다면 아직도 어느 후미진 길을 헤매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죠. 오규원 선생님께는 치밀하고 냉정한 시 자체의 논리와 예술성을 호되게 배웠어요. 최하림 선생님은 시인의 삶의 자세, 역사와 개인의 균형이 어떤 것인지 보여주신 분이고요. 그 후로는 다시 최원식 선생님을 만나서 제 삶이 크게 확장되었지요. 폭넓은 지식의 스펙트럼을 편안하고 아름답게 펼쳐 보여주시고 또 대학원으로 이끌어 뒤늦게 공부하게 해주셨어요. 이 세 분의 선생님께 받은 배움이 없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곤고한 인생이, 전혀 균형 잡히지 못한 인생이 되었을 것이 확실하지요. ■ 김명원: 선생님은 작년에 미당문학상을 받았는데요. 본인의 시적 성취에 미당 선생님께로 부터의 영향이 있다고 생각하나요? □ 장석남: 제가 마당의 시를 만나고는 천생 그 슬하로 들어가서 시작할 수밖에는 없겠다고 생각한 것이, 그러니까 제 잔뼈가 굳기 이전이니 벌써 이십여 년입니다. 그분과 저는 딱 오십 년을 격隔한 사이인데 왜 그래야 하는지 혼자 억울한 심사가 되어서 길거리를 쏘다닌 기억이 있던 듯도 하고요. 손자뻘이 되는 제게까지도 미당은 여전히 젊었고 외려 저보다도 더 젊었습니다. 전 인류보다도 몇 갑절이나 더 이전부터 시작된 일이 여전히 시퍼렇게 젊은 저, 바다의 파도처럼이나 앞으로도 오래 젊은 것만 같은 저 ‘未堂’은 그 언어가 절절한 모국어이기 때문만은 아니었던 것 같아요. 모국어만은 아닌 그 무엇, 그것이 어린 시의 생도였던 제게 절망과 꿈의 동파이프를 동시에 들이민 것이지요. 제가 보기에 미당은 오래 살아보려고 무던히도 힘쓴 분입니다. 그것은 세속적으로도 그랬다고 감히 말하는 편이 속 시원할 것 같아요. 그러나 당연히도, 그편보다는 그는 한 ‘영원’의 얼굴을 만나보려고, 그리고 그 얼굴이 되려고 무던히도 힘써온 분이었던 것 같고요. 그것을 민족에게서도, 개인에게서도 아울러 읽어보려고 한 것이니 그의 시적 여정은 우리 정신의 가장 밑자리 격인『삼국유사』를 괴나리봇짐 해 짊어지고, 긴 이름들을 가진 세계의 여러 높은 산들을 두루 헤매고 다니는 이미지로 우리 앞에 그려지는 것이겠지요. ■ 김명원: 미당 선생님을 생전에 뵌 적이 있나요? □ 장석남: 아쉽게도 못 뵈었습니다. 벌써 십 수 년이 지난 것 같은데, 미당 선생의 제자와 술잔을 나눌 기회가 있어서 저는 어렵게 언제 댁에 갈 기회가 있으시면 은근슬쩍 묻어갈 수 있겠냐고 했고, 그분은 그러마고 했는데 그 후 영 소식이 없었어요. 생전에 꼭 한 번은 그 옆자리에 앉아 있어보고 싶었는데요. 제 스승 한 분은 “네가 프로의 시인이 되려거든 미당의 시뿐만이 아니라 삶까지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고 말씀해 주시기도 했었거든요. 미당 삶 뒤의 그 얼룩들이야 제가 짚어내서 이러고저러고 할 자격도 되지 않으니 그건 제 세대의 행운으로 돌려도 될 성싶고요. 또래의 몇몇 시우들과 이야기를 나누어보아도 역시 우리들은 앞으로도 오래 그의 슬하일 수밖에는 없겠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어요. 어쩌면 그것은 기꺼이 즐거운 일일지도 모르겠고요. 한번 뵙기 전에 미당 선생은 가셨지만 미당 선생은 그저 우리가 늘 지나다닐 수 있는 산길 같은 데서 만날 수 있는 바윗돌이나 큰 나무 뒤에 옷고름 한 끝을 내민 채 숨으신 것일 뿐이라고 저는 믿고 있지요. ■ 김명원: 선생님은 미당문학상뿐 아니라 김수영문학상, 현대문학상 등 시단의 굵직한 상들을 수상했는데요. 문학상이란 어떤 면에서는 구속일 수도 있겠지만 적조했던 일상에 환기 역할을 하는 것은 분명하지요? □ 장석남: 1991년도 겨울에 제 첫 시집『새떼들에게로의 망명』이 나왔는데요. 술 마시고 가방째 잃어버렸던 원고를 천신만고 끝에 되찾아 햇빛을 보게 되었지요. 바라던 대로 ‘문학과지성 시인선’에서 나왔으니 기뻤지만 아무런 리뷰도 반응도 없어 절망이었어요. 그 이듬해 가을 이제 시를 놓게 되지 않을까 하고 예감하던 차에 김수영문학상 수상 소식을 접했고요. 돌아서 나가려던 순간에 뒷덜미를 잡힌 기분이었는데 의기소침과 절망이 치유되었습니다. 선배 수상자들의 이름자 뒤에 붙은 제 이름도 영광스럽고 좋았지요. 1999년, 중반기 혹은 후반기 삶에 대해 방황하던 때 받은 현대문학상은 제게 큰 위로가 되었고요. 작년에 미당문학상을 받고서는 저도 평생 시로 매진한 미당 선생의 정신과 꿈을 흉내 내야 할 운명을 받아들였던 것 같아요. 외롭다고 느낄 때가 있었는데, 이제는 정말 끝끝내 시인이어야 한다는 다짐을 요구 받았다고 할까요.
내면內面으로 사라져가다
■ 김명원: 산골에 따로 거처를 마련했다고 알고 있습니다. 오두막 쉼터라고 부르는 그 곳이 용문 용슬재容膝齋인가요? □ 장석남: 한강을 거슬러 오르고 양수리를 지나 다산의 생가를 지나가야 하는 산속 땅을 한 자리 마련했습니다. 이백 평 남짓한 땅이니 제가 차지하기엔 과분하고 좀 큰 성싶은 땅이지만 붙어 있는 것이니 할 수 없었지요. 그곳은 또 너무 깊어서 보통 사람들이 선택하기엔 망설여지는 장소일 것 일 텐데, 제게는 아주 좋았답니다. 저는 늘 은일자의 심정으로 살아가고 있으니 깊이 숨는 것은 당연한 일이겠고요. 그곳을 즐겁게 드나들며 저는 별의 운행을 공부하고, 식물들을 공부하고, 그럴 수 있다면 나무를 다루는 공부를 하고, 실컷 자고, 자고 일어나 꽃들을 키우고 싶어요. 가난하고 게으른 자가 누릴 수 있는 호사를 보란 듯이 누리고 싶은 것이지요. 요즘 닭을 몇 마리 치고 있는데 거기에도 아주 즐거운 공부가 숨어 있습니다. 나중에 닭을 치면서 시골에서 사는 것이 꿈이기도 하죠. ■ 김명원: 우리처럼 시 쓰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부러울 만한 형국이네요. 그 비의泌意 어린 공간에서 선생님 시가 찬연하게 경작되겠군요. 미당문학상 수상작인「가을 저녁의 말」도 그 곳에서 탄생된 것이지요? 느린 시간, 느린 공간에서, 기다린 느린 시의 사무침이 바로 그 시의 매력일 텐데요. 속도전의 이 시대에서 시가 어떤 맛을 내고, 어떤 역할을 하면 좋을까요? □ 장석남: 저는 모든 일상이 실은 보는 눈에 따라서는 보석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박수근은 그 느릿느릿한, 가난하고 쓸쓸한 우리네 50년대 일상의 세계가 어떻게 보석이 되는지를 보여준 화가이지요. 가장 평범하고 가장 지루하고 가장 심심한 세계 속에 그러나 가장 긴장되고 가장 아프고 가장 깊은 세계가 한 겹 혹은 여러 겹 같이한다는 사실을 발견하는 일은 일종의 마음의 혁명이 아닐까요. 시라는 것은 그러한 세계를 되짚어주는 일일지도 모릅니다.
나뭇잎은 물든다 나뭇잎은 왜 떨어질까? 군불 때며 돌아보니 제 집으로 들어가기 전 마지막으로 꾸물대는 닭들
윽박질린 달이여
달이 떠서 어느 집을 쳐부수는 것을 보았다 주소를 적어 접시에 담아 선반에 올려놓고
불을 때고 등을 지지고 배를 지지고 걸게 혼잣말하며 어둠을 지졌다
장마 때 쌓은 국방색 모래자루들 우두커니 삭고 모래는 두리번대며 흘러나온다 모래여 모래여 게으른 평화여
말벌들 잉잉대던 유리창에 낮은 자고 대신 뭇 별자리들 잉잉대는데
횃대에서 푸드덕이다 떨어지는 닭, 다시 올라갈 수 있을까? 나뭇잎은 물든다 -「가을 저녁의 말」전문
모든 개인들의 생애에는 각각의 특수성들이 있게 마련이고, 그 특수성은 각각이 모두 빛나는 것이요 아름다운 것이죠. 하늘의 별들이 모두 똑같은 것들이었다면 빛날 리가 없을 테니까요. 당연히 제 시를 포함하여 모든 시는 각각의 빛들이 각각의 빛들을 비쳐주고 되비쳐주는 그런 오래된 거울(반성)의 풍속은 아닌가 생각해 보게 되고요. 시는 그렇습니다. 몸(체험)이 움직이고 그 움직임, 울림, 파동이 의식에까지 미칠 때 시이지요. 그때 그 시는 그 시와 관계된 생각을 뒤집어놓을 수도 있고요. 아니 엄밀하게는 그래야만 비로소 시라고 할 수 있겠죠. 그러나 시에 관한 일체의 말은 다 필요 없는 이야기일 지도 모릅니다. 시는 정답이 없다는 것이 매력이니까요. 그저 시가 ‘시’였다면 ‘이미’ 그러했을 것이기 때문예요. 어제 라디오에서 들은 이야기인데요. 미얀마에서는 인사말이 궁해서, 우리처럼 “안녕하세요?”라는 말이 없어서, 아침저녁으로 만나면 서로 웃는답니다. 그런데 그것이 최고의 인사가 아닐까요. 어쩌면 다양한 인사말 보다 훨씬 더 진보적인 언어로 느껴지니까요. 인사임에는 분명하지만 말을 거두어낸 상태로서의 웃음 말이에요. 시라는 것도 그런 것일 거 같아요. 말로 되어 있지만, 그리고 말을 벗어날 수는 없지만, 말은 아닌 것! ■ 김명원: 선생님께서 생각하는 좋은 시란 어떤 시일까요? □ 장석남: 쉬운 시입니다. 느낌이 오는 시이죠. 설명이 되지 않는 시 말이에요. ■ 김명원: 시 이야기를 많이 들었으니 이제는 시인의 존재에 대해 선생님의 생각을 듣고 싶은 걸요. □ 장석남: 칼데콧아너 상을 네 번이나 수상한 레오 리오니의 그림동화책『프레드릭』은 16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요. 이솝 우화와 유사한 책이에요. 내용은 이렇습니다. 들판에 쥐들이 살고 있는데 모두가 겨울을 나기 위해 나무열매와 밀짚을 모으며 먹이를 저장하느라 분주하지만 프레드릭만은 딴 짓을 합니다. 수다쟁이 동료 쥐들이 묻지요. “너는 뭐하니?” 그러면 “난 지금 색깔을 모으고 있는 중이야” 또 “뭐하니?”라고 물으면 “난 지금 햇빛을 모으고 있는 중이야”라고 프레드릭은 대답하고요. 추운 겨울이 오고, 곡식을 모은 쥐들도 먹이가 떨어지자 비참해지지요. 그 때 프레드릭은 “눈을 감아 봐, 내가 너희들에게 내가 모아 둔 햇살을 보내 줄게. 찬란한 금빛 햇살이 느껴지지 않니”라고 햇살 이야기를 하자, 들쥐들은 몸이 점점 따뜻해지는 것을 느끼죠. 또 “다시 눈을 감아 봐”라고 하고는 프레드릭은 파란 덩굴꽃과 노란 밀짚 속의 붉은 양귀비꽃, 또 초록빛 딸기 덤불 얘기를 들려줍니다. 들쥐들은 마음속에 그려져 있는 색깔들을 또렷이 보면서 굶주림과 비참한 생활을 잊고 프레드릭 덕분에 행복해 한다는 이야기예요. 맨 마지막에 동료 쥐들이 그러지요. “프리드릭, 넌 시인 같아” 그러자 우리의 주인공은 말합니다. “나도 알아”라고요. 짤막한 동화이지만 위트가 있고 상징이 있어요. 먹고 사는 것을 넘어서 마음속에 간직해야 될 구원의 문제가 중요하다는 내용이거든요. 바로 시인에게는 이런 일들이 더 중요하니까요. 창조의 입장이든 진화의 입장이든 어떤 단계에서 마음이라는 것이 깃들었을 것이에요. 처음 마음이 깃들 때 어떤 형식으로 깃들었을까요. 짐작하는 방법으론, 시밖에 없을 터! 과학도 진리를 향한 인간의 부단한 노력이겠지만, 질문하는 방식으로서의 시는 바다의 모래 한 점이겠지만, 마음이 깃들었을 때 시였을 것인데, 그것이 나오는 방식에서 우리 당대 언어공동체가 쓰는 태초 언어가 샘물에서 솟아 나오는 것처럼 그 물의 형태로 시인에게서 시가 뽀글뽀글 나왔을 것이죠. 시인들이 그 신비로운 일을 한다면, 매일 시를 쓴다면, 그 먼 마음을 불러온다면, 얼마나 경이롭겠어요. 시라는 것은 각각의 삶이 가지고 있는 가장 간절한 상태의 결정체니까요. 시가 히말라야라면 그 시가 조금씩 흘러내려오는 것을 받아 느끼는 것이 독자겠지요. 어느 순간 시가 시인으로부터 독자에게 풀려서 작은 냇물이 되어 마을을 지나갈 텐데요. 물론 다 풀리지도 않겠고 독자가 아무리 퍼가도 끝까지 저항하는 것이 남겠지만 그래도 그 마을을 지나가는 그 물소리와 그 반짝임이 시일 것이에요. 그러니 그런 역할을 하는 자가 바로 시인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 김명원: 선생님이 비유한 시인의 소명감에 목숨의 단추를 여미게 되는데요. 그나저나 작년에 받으신 수상금이 적지 않았을 텐데 어디에 쓰셨어요? □ 장석남: 집을 한 채 마련했습니다. (웃음) ■ 김명원: 제가 예견하는 바로는 앞으로도 여러 번 수상을 하실 듯싶은데, 그때마다 집을 구입하면 조만간 준재벌이 되겠어요. (웃음)
책을 내기로 하고 300만 원을 받았다 마누라 몰래 주머니에 넣고 다닌다 어머니의 임대 아파트 보증금으로 넣어 월세를 줄여드릴 것인가, 말하자면 어머니 밤 기도의 목록 하나를 덜어드릴 것인가 그렇게 할 것인가 이 목돈을, 깨서 애인과 거나히 술을 우선 먹을 것인가 잠자리를 가질 것인가 돈은 주머니 속에서 바싹바싹 말라간다 이틀이 가고 일주일이 가고 돈봉투 끝이 나달거리고 호기롭게 취한 날도 집으로 돌아오며 뒷주머니의 단추를 확인하고 다음 날 아침에도 잘 있나, 그럴 성싶지 않은 성기처럼 더듬어 만져보고 잊어버릴까 어디 책갈피 같은 데에 넣어두지도 않고, 대통령 경선이며 씨가 말라가는 팔레스타인 민족을 텔레비전 화면으로 바라보면서도 주머니에 손을 넣어 꼭 쥐고 있는 내 정신의 어여쁜 빤쓰 같은 이 300만 원을, 나의 좁은 문장으로는 근사히 비유하기도 힘든 이 목돈을 나는 어떻게 할 것인가
평소의 내 경제관으론 목돈이라면 당연히 땅에 투기해야 하지만 거기엔 턱도 없는 일, 허물어 술을 먹기에도 이미 혈기가 모자라 황홀히 황홀히 그저 방황하는, 주머니 속에서, 가슴속에서 방문객 앞에 엉겹결에 말아쥔 애인의 반쓰 같은 이 목돈은 날마다 땀에 절어간다 -「목돈」전문
■ 김명원: 오늘은 1월 11일, 새해의 서주 부분입니다. 올해의 중요한 계획이 있다면요. □ 장석남: 다 잘해 보고 싶어요. 직장에서도, 저의 작업에서도 모두 다요. 예전에 무슨 일인가로 을지로 입구 인쇄골목 밥집에서 생선구이를 시켜놓고 혼자 밥을 먹고 있었던 적이 있었어요. 생선뼈를 바르고 있는데 문득 목이 메어왔지요. ‘나는 지금 뭘 하고 있는가’ 라고 묻고는 밥숟가락을 내려놓고 식당을 빠져나온 적이 있었거든요. 생선구이에서 뼈를 바르는 사소한 행위가 과연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인지, 사소하다면 사소할 수도 있고 크다면 클 수도 있는 근원적인 질문이 와서 떠나질 않더라고요. 나는 지금 뭘 하고 있지? 나는 지금 어디 있지? 이게 말하자면 제가 생각하는 시의 첫 걸음인 셈이었어요. 그게 시가 되어 제 첫 시집에 들어가 있기도 하네요. 그 때 이후 누군가 저에게 시가 뭐냐고 물으면, 이 세상에 대한 질문이 아니라 ‘질문하는 풍경’이라고 말하지요. 그리고 다시 많은 세월이 흘렀지만 그러한 울음 섞인 질문이 밀려올 때는 저는 되뇌곤 합니다. ‘초발심으로 돌아가라’고요. 늘 초심에서 정진하려고 합니다.
어둠이 저벅저벅 내린다. 밖으로 나오니 그 사이 얼마나 눈이 푸짐하게 쌓였는지 신사동 불빛들이 눈 시리게 번진다. 우리는 호기롭게 포장마차에 들어서고, 추위를 비닐 틈 사이에 세워두고서 소주잔을 기울인다. 시인은 안주로 석화를 시키면서, 저는 섬 태생이어서, 겨울만 되면 이런 안주에 나자빠지죠, 한다. 우직한 그의 술 내력을 훤히 알겠다. 그가 술잔을 기울이며 고향을 그리워하고, 예술을 그리워하고, 사람을 그리워하고, 그 사람들의 사랑을 그리워한 시간들을 이제 알겠다. 평자들은 그를 두고 ‘미당의 적자’이니 ‘꼬마 미당’이라고 명명한다. 맞는 말일 것이다. 미당이야말로 우리 시인들에게 무한한 감흥의 저수지와도 같은 시승이 아니겠는가. 게다가 장석남은 미당의 계보로 치자면 미당의 장점을 가장 많이 닮은 시인이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이러한 평가는 장석남 시인에 대한 칭찬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가 그만의 빛과 색으로 이미 미당의 그늘에서 나아가 있다고 생각 된다. 그만의 애태우는 언어 운용과 질박한 발화 공간은 서정주처럼 화려하지 않기에 오히려 고혹스럽고, 그만의 자연스러운 창작 기법은 작위적이지 않아서 검박한 아름다움이 있는 연유이다. 장석남 시인은 2010년을 지나면서 그만의 서정을 열어 두었다. 복잡다단한 시단의 어떤 시류에도 상관하지 않고, 스스로 개척해낸 사유로 언어가 닿지 않는 부분에까지 이르도록 배려한 함축의 미는 압권이라 하겠다. 그가 가는 시의 길을 가만히 그려본다. 세상의 온 모든 사물들의 존재에 자신을 투영하고 있는 그의 길. 그의 시에서처럼 그들 존재 자체를 편들고, 그들 존재 자체를 꿈꾸며, 그들 존재를 젖은 언어로 노래하는 그가 또 어떤 출중한 시를 들고 불쑥 나타날는지 기다려진다. 포장마차 밖은 여전히 칼바람이 울고, 주홍 가로등불 아래로 주춤했던 눈발이 다시 거세진다.
【웹진 시인광장 Webzine Poetsplaza SINCE 2006】 2011년 2월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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