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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서예세상 원문보기 글쓴이: 三道軒정태수
북위(北魏) '장맹룡비(張猛龍碑)', 522년. |
동진의 귀족문화를 계승한 남조는 이왕(二王)의 필법을 전승하는 한편 문화의 이양과정에서 독특한 미감을 지닌 예해(隸楷)가 등장하는데 그것이 이른바 이찬비(찬보자비와 찬용안비)이다. 남조 마애의 대표작으로 예학명(514)이 있었음은 이미 언급한 바 있으며, 이들은 대부분 평탄한 남조문화의 역량을 드러내 보이는 것들로서 서예사적 가치를 지닌다.
이에 반하여 화북지방의 이민족들이 난립한 오호십육국은 국가의 존망을 두고 치열한 각축을 벌였으며, 이를 평정한 위(魏)나라가 비로소 강남의 송왕조와 대응함으로써 남북조시대가 병립하게 된다. 북조는 세력다툼의 틈바구니에서 웅강(雄强)한 필치를 펼치며 남조와는 다른 지역적 특성을 나타냈다. 북위는 그 가운데 가장 강력한 국가로 군림하며 북조문화의 중심에 있었다. 국력을 바탕으로 북조의 패권을 잡은 북위(효문제)는 북방민족의 문화적 한계를 극복하고, 진정한 중원문화의 지배를 위하여 낙양(洛陽) 천도를 단행한다. 이처럼 한화(漢化) 정책의 일환으로 단행된 낙양 천도로 인하여 남조문화의 영향을 받게 되지만, 한편 북조의 문화가 중원에 뿌리를 내리는 또 다른 계기가 되었다.
북조의 서예자료는 대부분 석각에 편중되어 있다. 비와 묘지명, 조상기, 마애 등 뛰어난 석각들이 매우 풍부하다. 북위 말의 '장흑녀묘지(張黑女墓誌)'처럼 지영(智永)의 '천자문'을 연상케 하는 완전히 남조화된 것도 있으며, 남조의 마애비 '예학명'에 비길 만한 것으로 섬서성의 '석문명(石門銘)'과 산동성의 '정희하비(鄭羲下碑)'처럼 독자성을 보이는 것도 있다. 이러한 남조와 북조의 서예적 특징을 구별하여 서예사 연구에 적용한 사람은 청나라의 완원(阮元)이다. 그는 '남북서파론(南北書派論)'과 '북비남첩론(北碑南帖論)'이라는 논문을 통하여 북비의 정통성을 들어 비학(碑學)을 주장하였고, 이는 포세신(包世臣), 강유위(康有爲) 등을 통하여 계승되었다. 이왕을 중심으로 한 간찰 위주의 첩학(帖學)보다 서법의 정통성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엄정한 비문서체를 통하여 글씨를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 추사 김정희가 연경(燕京)에서 완원과 사제의 연을 맺은 이후 '남북서파론'과 비학이 추사 서예학의 근간이 되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북조의 수많은 석각들 중에서도 서예가들의 이목을 집중한 것이 '장맹룡비'다. 북위 정광(正光) 3년(522)에 산동성 곡부의 공묘(孔廟)에 세워진 것으로, 비액에 '魏魯郡太守張府君淸頌之碑' 3행 12자의 해서가 새겨져 있어 장맹룡의 덕을 칭송한 송덕비임을 알 수 있다.
청말의 강유위는 '광예주쌍즙'에서 "장맹룡비는 마치 주공(周公)이 예법을 만든 것처럼 일삼은 것들이 모두 아름다우며, 정자체의 모습으로 탈바꿈한 것들 중에서 종주가 된다. 결구가 매우 뛰어나며 변화가 끝이 없다."고 높이 평가하였다. 필의를 살펴보면, 일반적으로 북조의 전통을 계승한 당해(唐楷)가 횡획과 결체에서 좌양우음의 법칙을 보이는 데 반하여, 장맹룡비는 좌음우양을 경향을 보이고 해서이면서 팔분서(八分書)의 특징을 강하게 드러내고 있다. 남조의 영향이 섞이지 않고 순일하게 북조의 웅강한 멋을 표현하여 풍격이 높다. 다만 추사(秋史)가 경계한 것처럼 북조의 비들은 변화가 심하여 자법(字法)에 대한 면밀한 공부가 요구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