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황하
황하 黃河는 티벳의 동쪽 고지 高地로부터 발원 發源하여, 동서남북으로 좌충우돌하며 흐르고, 흘려 5,464Km를 여행한 후, 산동반도에 이르러 황해의 발해 래주만萊州灣으로 유입된다.
황하는 중국인들에게는 아주 중요한 강이다.
황하의 북쪽은 기마유목민들이 목축으로 생활하고, 남쪽은 농경민들이 농사를 짓고 거주하는 경계선이자 완충지대다.
유목민족과 농경민족이 자주 충돌하는 전화 戰禍의 도화선 導火線 같은 역할을 담당하는 곳이다.
아득한 선사시대 先史時代부터 지금까지 중국과 주변국 간의 줄다리기가 지속하여
왔고, 왕조들의 흥망성쇠 興亡盛衰와 다툼이 일어나고, 백성들의 애환 哀歡이 녹아있는 역사의 현장이다.
태항산맥을 지나 동쪽으로 흐르는, 황하의 북쪽은 하북성 河北省이고, 남쪽은 하남성 河南省이다
북쪽은 춥고 강수량도 적어, 자연적인 제1차 산업인 농업 관련 생산력이 하남 河南에 비해 월등히 뒤처진다.
그러니 북쪽의 유목민들은 가을걷이가 끝나길 기다려 황하를 넘어 남하한다.
천고마비 天高馬肥.
천고마비를 중국에서는 한국식 한자표기 韓國式 漢字表記라 한다.
중국에서는 추고마비 秋高馬肥라 한다.
가을.
천고든, 추고든 간에,
결실의 계절이 하남 河南쪽 농경민들에겐 오히려 불안감을 안겨준다.
결실의 계절에 수확의 보람을 느끼기보다는, 하북 河北의 유목민들에게 약탈당하는 두려움이 앞선다.
그러나, 그러한 위험을 알고서도 쉽사리 황하 주변을 떠나지 못한다.
황하는 6~7년 주기로 강이 범람 氾濫한다.
티베트 고원에서 발원한 물줄기가 관중 지역의 낙양까지는 그런대로 제자리를 지킨다.
요소마다 큰 산맥들이 물줄기를 통제하기 때문에 주변만 조금 침수당하지, 원 물줄기가 크게 변할 요인이 적다.
그런데, 여량산맥과 태항산맥이 끝나는 지점인, 낙양을 지나는 평원 平原지역부터는 강수량 降水量에 따라, 물줄기가 어디로 어떻게 변할지 예측이 불가 不可하다.
강우량이 심하면 북쪽의 영정하와 합류하기도 하고, 때로는 태산을 우회하여 회수를 지나, 천 리 이상 멀리 떨어져 있는 남쪽의 장강과 합류한 사례도 있는 만큼, 거대한 물줄기가 어느 방향으로 뒤틀릴지는 아무도 모른다.
흙빛 황하의 물줄기가 온누리를 뒤덮어 육지를 바다로 만들기 일수다.
그러니,
치산치수 治山治水란 이야기가 나오고, 요. 순 임금의 치수법이 인구 人口에 회자 膾炙되는 것이다.
그럼 왜?
이토록 주기적으로 천재지변이 일어나는 황하 주변을 사람들은 떠나지 않는가?
그 이유는
황하 주변만큼 농사가 잘되는 지역도 드물기 때문이다.
강물이 범람 氾濫하면 그해 농사는 끝장이다.
그러나,
그 범람지역은 다음 해부터 수년간은 대풍 大豐이 약속된다.
또, 회수 淮水 이남의 장강 부근보다 기후가 건조하고 시원하여, 병충해 病蟲害의 피해가 훨씬 적다.
이는 곡식의 수확량이 월등하다는 것이다.
범람한 강물은 황토 黃土를 비롯하여, 다양한 유기질 有機質과 퇴비 堆肥를 함께 공급하는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같은 넓이의 농경지 기준으로 본다면, 험준한 산간 지역의 몇 년 치 수확량을 1년 만에 거둘 수 있는 엄청난 작물 수확량이다.
그러니, 이런저런 위험을 감수하더라도 어쩔 수 없이 머무르게 되는, 농경민들의 숙명일 수밖에없다.
그런데,
황하 黃河의 물 색깔이 발원지부터 황색 黃色은 아니다.
발원지는 일반 시냇물과 같다.
맑은 시냇물이 티벳고원에서 발원하여 청해 靑海까지는, 흐르는 물이 맑다.
지명 地名 자체가 청해 靑海니까, 고을 이름 그대로 물이 맑고 깨끗하다.
그 맑은 강물이 하서 회랑의 시발 始發점인 란주 蘭州를 거치면서, 황토가 유입 流入되기 시작하면서 점차 탁해지기 시작한다.
란주를 지나면서 비로서 황하 본연의 누런 색깔이 드러난다.
강줄기가 내몽골을 향해 북상 北上을 한 후, 음산 산맥을 만나 동쪽으로 꺽어 흐르다가 여량 산맥을 만나 다시 남하 南下할 때, 황토 고원의 황토들이 대거 大擧 강에 유입되면서 물 색깔은 진황색으로 짙어진다.
* 지도 - 황하
장영의 설명은 계속 이어진다.
“산동성의 남쪽 즉, 회수 淮水 이남의 강들은 모두 강 江이나 수 水라고 부른다.
그런데,
산동반도 이북의 황하를 비롯한 모든 강은 강 江이라 하지 않고, 하나같이 하 河라고 칭한다.
황하, 호타하, 부여하(예하), 영정하, 조선하, 난하, 양하, 소릉하, 대릉하, 요하, 태자하, 등...
산동성 남쪽의 회수 淮水도 고대에는 회하 淮河라고 칭하였다.
회하 淮河부터 시작하여, 산동반도 이북의 황하와 발해만을 거쳐 요동만까지 유입되는 모든 강은 하 河로 불리어진다.
이는 유사이래 有史以來 동이족이 이 강들을 계속 지배해왔기 때문이다.
이는
모두 하백 河伯의 관할이었다는 것이다.
* 하백
하백 河伯이 누구냐?
고구려의 시조 추모성왕, 고주몽의 외할아버지(外祖父)다.
고주몽의 어머니, 유화부인의 친정아버지라는 것이다.
세상의 모든 강물을 관할한다는 수신 水神이다.
고구려의 시조 주몽이 동부여로부터 탈출하여 대소 태자의 추격을 당할 시, 강에 다다라 더는 도망갈 수 없는 위급한 처지가 되자, 다급하게 외할아버지 하백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하백의 지원을 받아 무사히 강을 건넌다.
동부여의 대소 태자도 하백의 관할 영역에는 함부로 들어가지 못할뿐더러, 감히 항의 조차도 못 해보고, 추격을 포기하고 빈손으로 되돌아간다.
발해만의 모든 하천을 관할하는 하백 가문의 위세 威勢를 엿볼 수 있는 한 장면이다.
수신 水神이란 품격있게 표현한 것이다.
노골적으로 말하면 대규모의 수적 水賊이나 해적 海賊이었는지도 알 수 없다.
당시의 세상이란 발해만과 요동지역이 전부였던 모양이다.
그러므로,
하백은 당시 발해만 전체와 황해의 일부까지를 관할하던 해상왕 海上王으로 보면 될 것 같다.
청동기시대에 이미, 조선 造船 기술이 상당히 뛰어났고, 운항 運航 능력과 해전 海戰전투력이 탁월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 해상왕 하백 가문이 대대로 지배했던 발해만으로 유입되는 모든 강은 하 河로 불리는 것이 당연했으리라.
이 물줄기들은 우리 하백 가문이 관리하는 수역 水域이라는 일종의 영역 領域 표기다.
그 하백 가문의 혈통을 이어받은 주몽, 역시 탁월한 수계 水界 지배 능력의 전승자 傳承子로 미루어 보면 될 것이다.”
고구려는 육전 陸戰 뿐만 아니라, 해상전투 海上戰鬪에도 아주 뛰어난 국가였다.
고구려가 멸망하기 전까지의 해전 海戰은 거의 전승 全勝이었다.
수와 당이 수 차례 감행한 고구려 침공, 수군 水軍들은 막강한 고구려의 수군에 의해 모두 발해나 황해의 물귀신이 되고 말았다.
“하! 그런 뜻으로 강 江이라 하지 않고 하 河로 불리는군요”
“그렇지,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강 江보다 더 크니까, 하 河라고 부른다고 말하지만, 이는 틀린 것이다.
장강(長江 : 양쯔강, 揚子江)은 황하보다 그 길이가 더 길고, 수량이나 규모가 더 크다.
유수량 流水量은 황하와 비교하면 11배나 더 많다.
위에 언급한 하 河 중에는 조선하, 양하, 소릉하, 태자하 등은 사실 큰 개울보다 조금 더 큰 수준으로 일반 강보다 길이나 유수량 流水量이 짧고 적다.
그런데도 하 河라 칭하고 있다.
그러므로 강의 크기로 명칭이 정해진 것이 아니라, 누가 관리하고 지배했는가 하는 영역표시임을 알 수 있다.”
“네,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망양지탄 望洋之嘆’이란 고사 古事도 황하와 연계된다.
황하의 넓이가 아득하고 물길이 깊어 황하에 사는 수신 水神이 있었다.
그 수신 이름은 하백 河伯이다.
하백은 누런 물결이 굽이치는 황하강을 사랑하고, 이 이상 큰물은 세상에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때, 지나가던 늙은 거북이가 말을 던진다. “물을 따라” 끝까지 가면 더 큰 물이 있다고. 하백은 그 말을 흘려듣지 않았고 강물을 따라가 보았다. 강물 끝에는 말 그대로 대양 大洋, 북해 北海 즉, 발해를 만난 것이다. 그때 하백이 탄식하며 하는 말 “망양지탄! 望洋之嘆”(넓은 대양을 보고 탄식한다.)
자신의 좁은 식견 識見을 깨닫고 탄식하는 말이다.
ㅡ장자. 추수편.
황하는 역대 중원 中原, 여러 국가의 해자 垓字 역할을 충실히 하였다.
하 夏나라와 주 周나라, 한 漢의 수도 長安을 비롯하여, 낙양 洛陽. 개봉 開封. 허창 許昌 등
하화족들의 수도는 모두 황하 이남 以南에 자리하였다.
그들은 감히,
황하 이북 以北을 건너올 용기가 없었다.
동이족이 중원을 점령한 즉, 여진족(女眞族이 아니라, 餘眞族이다.)이 세운 금 金나라 이후부터 황하 이북 以北의 북경 北京에 수도를 정하였다.
여진족(餘眞族)의 금나라는 자신들의 부족과 가까운 북경 北京을 개발하였다.
이후 원 元. 명 明. 청 淸 등 모두 동이족의 수도로 활용했다.
이는,
그 이전의 하화족들은 황하를 해자 垓子로 삼아 이민족의 침략을 방어하고자 한 것이었다.
- 주석 註釋 -
* 장강(長江)
양쯔강, 揚子江: 우리나라나 서양 西洋에서 주로 사용한다.
역사가 짧은 '양 揚나라의 강'이라는 뜻을 갖고 있다.
따라서, 중국인들은 양쯔강이라 불리어지는 것을 싫어한다.
그래서 양자강이라고 꼭 불러야 할 경우에는 그구간을 장강의 하류 구간 區間에 한정시켜 지칭하고 있다.
* 여진족(餘眞族)
한자표기로는 여진족(女眞族)보다는 여진족(餘眞族)이 더울린다고 생각한다.
진정한 부여의 후예라는 뜻이다.
동북아에서는 예전부터 '여진족 일만 명만 모이면, 천하무적'이라는 속담이 전해 내려오고있다.
그토록 용맹무쌍한 종족에게 계집 여 (女)자는 어울리지 않는다.
하화족의 장난이다. 이를 그대로 따르고 있는 모화사상.
(백제는 스스로 남부여 南扶餘라 칭하였다, 왕족의 성씨 姓氏도 부여씨 扶餘氏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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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餘眞族이 진정한 부여의 종족 ?
헐!
어이가 없네.
소설에 이처럼 무뢰한 처럼 댓글 사람은 첨 보네.
정신이상자 인가?
저도 정신 이상자로 보입니다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