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예의 활로를 위한 단상 -미술사이야기-
오늘날의 한국서예의 가장 큰 문제점은 이야기의 부재다.
그런 견지에서 볼 때 미술사는 이 시대 서예인들에게 풍성한 이야기하는 방법을 가르쳐준다.
한국미술사 연구는 19세기 초부터 시작되었으니 최근 대학서예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한국서예사 연구보다
훨씬 앞서있다. 또한 미술사연구에 참여한 초기학자들은 미술 한 분야만 연구한 사람들이 아니었다.
독일의 에카르트, 일본의 야나기무네요시, 한국의 고유섭은 초창기 한국미술사를 개척한 학자로서
인문학적 소양면에서 볼 때 당대를 대표할만한 엘리트 학자였다.
에카르트는 가톨릭 교단의 성직자로서 한국의 언어, 미술, 역사, 민속, 음악 등
다방면에 저술을 남긴 인문학자로서 1929년 한국최초로 한국미술사를 저술하였다.
야나기무네요시는 도쿄대학 철학과에서 심리학을 전공하고 당시 일본을 대표하는 문예지 "시라카바"의 동인으로서
신문화운동을 전개했으며, 민화와 민예라는 용어를 만든 사람이다.
고유섭은 한국인으로는 가장 최초로 한국미술사를 연구한 학자로서 문학, 역사, 철학, 심리학, 미학 등 인문학적
소양과 작품을 해석하는 직관적 안목이 탁월한 사람으로 오늘날까지 고유섭의 정신을 본받아야 한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미술사학의 독보적 존재다.
나는 오늘날의 한국서예를 업그레이드 시킬 수 있는 해결책을 에카르트, 야나기, 고유섭으로부터
찾아질 수 있다고 생각해왔다. 그 이유는 이들은 미술이라는 전공분야를 교양학과 연결하는
탁월한 지혜를 가졌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 세 사람은 국적이 다르고 서로 만난적도 없지만 미술사연구방법론면에서 공통점이 있다.
이들은 스스로 보고 느낀 것을 중심으로 주관이 뚜렷한 체험의 미술사를 전개해나갔다.
화가 이상으로 그림을 잘 그렸으며, 건축, 문양, 도자기를 하나 하나 그리면서 얻은 감흥을 적어나갔다.
그들의 글속에는 문사철(文史哲)이 녹아있고 삶의 방향을 제시하는 철학이 있으며,
보통사람들이 보고도 잘 느끼지 못하는 것을 예리하게 간취하여 재미있는 이야기로 풀어내고 있다.
이들은 비교연구를 통해 한국미술이 갖는 특징을 이야기하려했고, 중국미술로부터 받은 영향보다는
한국미술 고유의 토속성 혹은 변용된 측면에 대한 해석과 의미부여를 해나갔다.
비교적 측면에서는 80%의 공통점보다는 20%의 차이점을 찾으려했고
그에 대해 다양한 시각으로 조명하면서 차이에 대한 값을 제시하려 했다.
최근들어 서예에서 학계에서 사회에서 유행처럼 사용되는 "정체성"에 대한 문제는
이미 1세기전에 이들 선학들에 의해 활발하게 논의되고 있었다.
이들의 한중미술비교에 관한 이야기는 매우 흥미롭다.
에카르트는 "중국미술과 문명을 조선의 교본(敎本)으로 간주하여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은 잘못이다.
가능한 한 조선과 중국미술의 차이를 명확하게 제시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했다.
야나기무네요시는 "어떻게 중국의 감정이 그대로 조선의 감정이 될 수 있겠는가. 특히 뚜렷한 내면적인 경험과 아름다움에
대한 직관을 가진 조선이 어째서 중국의 작품을 그대로 모방했을 리 있을 것인가. 비록 외면이나 역사에 있어서는 관계가
있었다 할지라도 그 마음과 표현에 있어서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고 했다.
고유섭은 "일본과 중국의 건물은 그 절반만 실측하면 나머지 절반은 실측하지 아니하고도 해답이 나오지만, 조선의
건물은 그렇지 않다"고 했다.
이들은 한중미술사 연구를 통해 우리가 미처 느껴보지 못했던 한국과 중국을 느끼게 해주고,
우리문화에 대한 문화적 자긍심을 일깨워주었다
인류와 함께 공유하는 문화가 되기 위해서는 서예문화 또한 다양한 이야기를 경작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풍성한 이야기가 있는 건축, 조각, 회화, 조각, 도자기, 분묘, 정원 등의 인접학문에 귀 기울일 필요가 있다.
미술사는 이 방면에 큰 성공을 거두었다.
에카르트, 야나기, 고유섭 그리고 윤희순, 김용준, 최순우, 김원룡, 이동주, 조요한으로 이어지는
미술사연구 1,2세대들의 이야기는 이미 반세기가 넘은 글이 많은데도 지금도 여전히 책이 절판이 되지않고
두터운 독자층을 형성하고 있다. 이런 대중화와 교양화의 성공사례는 다른 분야에거 찾아보기 어렵다.
사실상 서예는 미술분야에 속해있다. 그러나 가까우면서도 멀게 느껴지는 것이 서예와 미술의 관계다.
미술사는 1세기의 축적된 역사가 있고, 한 시대를 풍미했던 석학들의 예술철학과 새 시대를 여는 가치관이 담겨져있다.
그들의 연구성과는 한국서예, 중국서예, 한글서예를 막론하고 고양된 판단과 사고를 위해 꼭 필요하다.
그것이 서예에 잘 접목된다면 21세기 한국서예는 분명 새로운 활로가 열리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첫댓글 서예학연구의 활로에 동감합니다. 그 물꼬를 터 주시기 바랍니다. 잘 읽었습니다^^
새로운 서예의 역사가 전개되기 위해서는 획기적인 해결책이 있어야 하는데, 그중에서 떠오르는 방안이 미술사연구입니다. 한국의 서예는 중국의 서예와 경계가 너무 없는 것이 문제입니다. 우리가 중국여행을 하다보면 알 수 있듯이 분명히 다름니다. 초창기 미술사가들은 이런 문화적 차별성에 대한 문제를 가지고 이야기를 끊임없이 생산해냈습니다. 문화의 서예가 되기위해서는 주변의 다양한 문화현상에 눈을 돌려야 합니다. 담론의 범위를 서예이야기에 제한하지 말고, 서예와 관련하여 삶의 근원의 문제, 이 시대가 절실하게 필요로 하는 이야기로 펼쳐나가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초창기 미술이론가들이 이루어놓은 업적입니다.
감사합니다 궁금한 점이 많은 독자로서 생각을 한번 더 하고 갑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