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하나를 골라 올라도 1년이 걸릴 만큼 제주도 전역에 무수히 분포한 오름은 모양도, 높이도 제각기 다르다. 뒷동산 산책하듯 가볍게 오를 수 있는 오름이 있는가 하면 등산하는 수준으로 힘든 곳도 있다. 하지만 이 오름만큼 뇌리에 쉽게 박히는 독특한 모양새를 가지면서, 가파르지만 높지 않아 금방 정상에 도달할 수 있으며 꼭대기에서 바라보는 풍경은 모든 오름 중 으뜸이라고 평해도 무방할 만큼 깊은 인상을 주는 곳은 없을 것이다. 서귀포시 대정읍 인성리에 솟은 단산(바굼지오름)이다.
단산 가는 법
-202, 251번 버스 이용, 사계리서동 하차. 단산 입구(단산사)까지 도보로 약 1.4km 이동
-202, 252, 253, 255번 버스 이용, 인성리 하차. 단산 입구(단산사)까지 도보로 약 1.1km 이동
-자차를 이용할 경우 단산과방사탑 인근 교차로에 갓길이 넓게 나 있어 그곳에 주차를 하고 등산하면 된다.
아름다운 사계 해변을 뒤로하고 너른 밭이 펼쳐진 시골길을 걷다 보면 단산이 점차 시야 가까이에 들어온다. 단산의 또 다른 이름은 바굼지오름인데, 거대한 박쥐(바구미)가 날개를 편 모습 같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는 설이 있는가 하면 이 일대가 바닷물에 잠겼을 때 단산이 바구니(바굼지)처럼 보였다고 해 오름의 이름으로 굳어졌다는 설도 전해진다. 어떤 설이 정설이든 먼발치에서 단산을 보면 좌우로 넓게 펼쳐진 자태가 한 눈에 들어와 범상치 않다는 것이 느껴진다.
사계리서동 정류장 근처에서 본 산방산과 단산
해안에서 단산 방향으로 가게 되면 필히 대정향교를 지나치게 된다. 그 길에는 추사유배길이라고 이름이 붙여져 있는데, 이 일대가 추사 김정희 선생이 지냈던 지역이다.(대정읍에서 만나는 추사의 흔적은 따로 다룰 예정이다). 차량 통행과 인적이 드물어 조금 호젓한 분위기도 느껴지는 길을 따라 약간의 오르막을 오르면 단산 입구가 나온다. 등산로에 들어가자마자 거대한 만(卍)자가 존재감을 드러내는 단산사라는 작은 절집이 나온다. 제주도에는 4.3사건으로 인해 피해를 입은 절들이 많은데, 이곳도 그중 한 곳이다. 안을 들여다보고 싶었으나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높은 곳으로 오르니 절 내부가 그제야 조금 보였는데, 지붕이 기와인 것을 빼면 제주도의 시골 마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집과 같은 모습이었다.
다른 등산로도 있었지만 폐쇄되었다. 단산사를 통해 가는 길이 안전하다.
단산사
사진 가운데에 보이는 건물이 대정향교이다.
이 단산사를 지나가면 본격적인 산행이 시작된다. 초입부터 여타 오름과는 다른 지형은 조금 당황스럽기도 하다. 층층이 쌓인 암반이 비스듬하게 단면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발에 힘을 주고 걷는다. 단산에서는 적절히 긴장을 하며 걷는 게 필요하다. 미끄러지지 말라고 밧줄도 있다. 얼마간 걸으니 수직으로 솟은 바위가 보였다. 그 위에 한 등산객이 서서 주변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래에서는 바위의 측면만 보여, 그 모습이 아찔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어떻게 생긴 바위일까, 어떤 풍경이 보일까, 호기심이 생겼다.
바위에 올라가 보니 약간 경사져 있지만, 면적이 넓고 주변으로 다른 바위들이 펜스처럼 막고 있어 결코 위험하지 않은 곳이었다. 인생샷을 찍기 좋은 포인트이기도 하다. 초록빛 들판이 싱그럽고 형제섬이 잘 보이는 제주 남서부의 풍경은 불과 5분을 걸어 올라왔을 뿐인데 벌써 정상에 도달한 기분이 들 정도로 진한 여운을 선사해 주었다. 중간에서 이렇게 멋진 풍경을 보고 정상에 올라가면 그곳에서 보는 경치가 기대에 못 미치지 않을까 싶은 걱정 아닌 걱정도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더욱 궁금해졌다.
바위 위에서 풍경을 보며 한숨 쉬었다 가면, 등산 난도는 더욱 높아진다. 단산이 지닌 거친 면모와 야생미를 그대로 느낄 수 있는 구간이다. 중후반부에는 짧지만 가파른 암릉 구간이 나타난다. 초반에 탔던 바위는 귀여운 애교처럼 느껴질 정도이다. 나무에 묶인 밧줄을 잡고 올라가지 않으면 통과할 수 없는 구간이다. 말미에는 대나무가 울창한 구간도 있다. 내가 올랐을 땐 양 옆으로 우거진 대나무 숲 사이로 길이 제법 멀끔히 나 있었는데, 그전엔 대나무를 헤치며 나아가야 할 정도로 길을 뒤덮었다고 한다. 사람의 때가 덜 탄 어려운 등산로를 차근차근 밟고 올라가면 정상이다.
사방이 탁 트인 정상에서 보는 풍경은 초반에 봤던 풍경의 확장판 같은 느낌이다. 남쪽으로는 산방산, 용머리해안부터 송악산, 모슬포까지 이어지는 서귀포의 풍경과 한없이 펼쳐진 망망대해가 고생길을 잊게 만들 만큼 시원하다. 초입에서는 보이지 않았던 산등성이 너머 중산간 풍경도 보인다. 날씨가 좋을 땐 한라산까지 조망할 수 있다. 이날은 날씨가 흐려 한라산을 보기엔 힘들었다. 가끔 구름이 살짝 걷힐 때에야 눈 쌓인 한라산을 간신히 볼 수 있는 정도였다.
송악산과 가파도, 마라도까지 보이는 풍경이 시원하다.
한라산은 구름에 가려 온전한 모습을 보기 힘들었다.
형제섬
모슬포 일대와 모슬봉
단산 너머로 용머리해안까지 보인다.
보이는 풍경 중 으뜸은 역시 산방산이다. 단산은 산방산을 가장 가까이에서 조망할 수 있는 오름이다. 정상에서 산방산을 바라보고 있으면 거대한 산세에 자연히 압도된다. 산세가 독특한 두 오름이 나란히 있으니 그 풍경은 더욱 극적이다. 한번 올라오면 결코 잊을 수 없는 풍경을 선사해 주는 곳이 단산이다. 제주에서 가장 멋진 풍경을 보여주는 오름을 꼽으라면 주저하지 않고 이곳을 고를 것이다.
가는 길은 까다로울지 몰라도, 단산사에서 출발해 느긋하게 쉬엄쉬엄 올라도 30분이면 정상에 닿는다. 시간은 단산을 등산하는 데 고생스러운 경험을 주는 요소가 아니다. 그야말로 짧고 굵게 치고 오를 수 있는 오름이다. 커다란 생동감을 느낄 수 있는 단산은 제주도에서 한 번 쯤은 꼭 올라볼 만한 멋진 오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