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시> 123호(2024.4)는 "연꽃 세레나데의 공간"이다.
연꽃 세레나데의 공간
- 부여 궁남지
차용국
부여 궁남지는 연꽃의 정원이다. 길은 드넓은 연못을 가로 세로로 가로지르며 크고 작은 직선과 곡선으로 만나고, 흩어지면서 연못 외곽의 두툼한 방죽을 향해 뻗어나간다. 견고한 방죽이 성벽처럼 둘러싼 궁남지는 전체가 하나의 연못으로 아늑하고, 그 전체의 연못 안에서 길과 길이 만나 만들어내는 개별 연못은 길과 길 안에서 평온하다.
햇빛은 길가의 버드나무 위에서 멈추고, 방죽을 넘어온 바람도 버드나무 가지에 앉아 연못의 풍경을 바라본다. 100만 송이 연꽃의 아우라가 뿜어내는 넓고 깊은 풍광風光의 향수享受를 다 헤아릴 수 없고, 제대로 그려낼 수 없는 내 허약한 언어는, 버드나무 아래에 펜을 내려놓고 다만 연못을 바라본다. 연꽃봉오리는 아기 속살처럼 보드랍고, 막 피기 시작한 꽃송이는 걸음마를 뗀 아이처럼 천진天眞하고, 반쯤 핀 꽃송이는 준수하게 자란 소년·소녀처럼 단정하고, 활짝 핀 꽃의 아우라는 화사하다.
불가佛家에서는 흙탕물 속에서 맑은 꽃을 피워내는 연꽃을 귀하게 여겨서 깨달음을 얻은 부처를 상징하고, 극락정토를 상징하고, 생명의 근원인 빛을 상징한다. 연꽃은 극락세계를 오갈 수 있는 상상의 꽃배다. 그래서 탑이나 부도浮圖의 밑받침이나 가옥의 처마 등에 연화문蓮花紋을 새긴다. 용왕이 인당수에 몸을 던진 효녀 심청이를 세상으로 돌려보낼 때도 연꽃에 태워 보냈으니 연꽃은 현세現世와 내세來世를 오가는 꽃배가 아니고 무엇이랴!
수련과의 여러해살이 식물인 연꽃은 진흙 속에서 자라면서도 고귀한 품격이 돋보이기도 하지만 현실의 삶에 긴요한 식물이기도 하다. 진흙 속에서 옆으로 굵게 뻗으며 마디가 많은 뿌리줄기(연근)와 열매(연밥)는 요리와 한약재로 쓰인다. 뿌리줄기에서 뻗어 나온 1~2m 정도 자란 잎자루 끝에서 둥근 원 모양으로 달리는 연잎과 연꽃 또한 차를 비롯한 여러 식재료로 사용된다. 연꽃은 보기에도 아름답고 연꽃 재배 농가의 주요 수입원이 되어 주는 실속 알찬 작물이기도 하다. 더하여 10센티미터 정도의 평평한 씨방에 많은 씨앗을 담고 있어서 풍요와 다산을 상징한다. 연꽃의 꽃말은 '순결', '청순한 마음'이다.
궁남지에는 홍련과 백련이 주종이지만, 왜개연·물양귀비연·가시연·빅토리아연·호주연 등과 같은 다양한 수종의 연꽃이 핀다. 홍련과 백련은 대개 7~8월에 꽃이 피고, 수련은 5~9월에 꽃이 피는데, ‘대백제전’ 축제 기간인 10월에 가서 보니 홍련과 백련은 지고, 수련은 남아 꽃을 피우고 있었다.
수련의 뿌리줄기는 물 밑으로 많은 수염뿌리를 내리고, 뿌리에서 나온 잎자루와 둥근 잎이 물 위에 떠서 꽃을 피운다. 수련은 주로 붉은빛과 흰빛의 꽃을 피우는데, 요즘 개량종은 노란꽃, 푸른꽃 등 여러 가지 색깔로 핀다. 수련은 연근을 생산하지는 않지만, 피를 멎게 하는 효능이 있어 한약재로 사용하기도 한다.
수련은 ‘연못신’의 화신이다. 전설에 따르면, 옛날 바닷가 마을에 아름다운 딸 셋을 둔 여신이 있었다. 딸들이 자라자 여신은 딸들의 희망을 물어보고 그들의 뜻에 따라 큰딸은 ‘바다신’으로, 둘째 딸은 ‘해협신’으로, 셋째 딸은 ‘연못신’으로 살게 했다. 수련은 ‘연못신’이 된 셋째 딸이 곱게 단장한 꽃으로 꽃말은 ‘결백’과 ‘신비’다.
아침에 연못에 나가 보니, 수련은 잔뜩 오므린 봉오리를 물 위로 삐쭉 내밀고 있다. 저 봉우리는 아직 개화되지 않은 어린 수련이 아니다. 잠자는 꽃이다. 날이 밝았는데 수련은 여전히 혼곤한 잠에 빠져 쉬이 깨어나지 않는다. 수련이란 이름은 ‘물에 떠 있는 연꽃水蓮’이 아니라 ‘잠자는 연꽃睡蓮’이다. 수련의 잠은 천진天眞한 꿈을 꾸고 있는 듯하다. 고요한 잠결에 스며든 건강하고 행복한 꿈일 듯싶다. 아, 어찌 저 혼곤한 잠에 빠진 여신을 함부로 깨울 수 있으랴! 누가 저 맑은 꿈의 세계를 훼방 놓을 수 있으랴!
궁남지는 1965~1967년과 1971년에 걸쳐 조성한 인공의 연못이다. 연못 한가운데에 백제 양식의 한옥 ‘포룡전’을 짓고 주변에 버드나무를 심었다. 이곳에 연못을 조성하고 ‘궁남지宮南池’라 이름 붙인 것은, 원래 백제가 궁궐 남쪽에 조성한 연못 자리라는 뜻이다. 11차례(1990~2006)의 궁남지 발굴조사를 통해 백제시대의 도로와 건물지·논·수로·우물 등이 확인되었고, 더하여 기록을 살펴보면 백제 왕궁의 연못 자리임을 확신할 수 있다.
『삼국사기』에는 백제 무왕武王 35년 3월에 대궐 남쪽에 못을 파고 20여 리 밖에서 물을 끌어들이고, 사방의 언덕에 버들을 심고, 못 가운데 섬을 쌓아서 방장선산方丈仙山에 비겼다고 한다. 그러니까 궁남지는 무왕이 20여 리나 되는 긴 수로를 만들어 만든 우리나라 현존 최고最古의 대형 왕실 인공연못 정원인 셈이다. 방장선산은 중국 전설에 나오는 신선이 사는 삼신산의 하나인 방장산을 말한다. 고대 중국인은 동해 한가운데 신선이 사는 3개의 섬(삼신산)이 있다고 믿어 저택의 정원에 연못을 만들고 연못 안에 삼신산을 꾸며 불로장생을 희망했다. 궁남지는 이를 본떠 만든 신선의 정원이다.
그러면 무왕은 어떤 인물이며, 무슨 사연으로 이곳에 대형 연못 정원을 만들었을까? 『삼국사기』에 무왕의 휘는 장璋이니 법왕法王의 아들이며, 풍체와 의표가 영특하고 점잖으며, 뜻과 기개가 호걸스러웠는데, 법왕이 즉위하여 이듬해에 죽으니 왕위를 계승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삼국유사』에는 제30대 무왕의 이름은 장이며, 어머니가 과부가 되어 서울 남쪽 못가에 집을 짓고 살았는데 못 속의 용과 관계하여 장을 낳았다고 한다. 무왕의 어릴 때 이름은 서동薯童으로 재주와 도량이 커서 헤아리기가 어려웠고, 항상 마麻를 캐다가 파는 것으로 생업을 삼았으므로 사람들이 서동이라 이름 지었다고 전한다.
그러니까 무왕은 서동으로 불린 인물로 후대에 널리 알려진 「서동요薯童謠」의 주인공이다. 무왕은 경주의 아이들에게 마를 주며 꾀어서 “선화공주님은 남몰래 정을 통하고 善花公主主隱 他密只嫁良置古/서동방을 밤에 몰래 안고 간다. 薯童房乙 夜矣卵乙抱遣去如”라는 노래를 부르게 하여 신라 진평왕의 셋째 공주 선화를 부인으로 맞았다.
이후 무왕이 부인과 함께 사자사에 가려고 용화산 밑 큰 못가에 이르니 미륵삼존彌勒三尊이 못 가운데서 나타나므로 수레를 멈추고, 부인이 “여기에 큰 절을 지어 주십시오. 그것이 제 소원입니다”라고 부탁하여 왕이 허락했다고 『삼국유사』는 덧붙여 전한다.
『삼국유사』가 전하는 무왕의 기록은 어쩐지 익산 왕궁리 유적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듯하다. 익산 지역에 나오는 용화산, 사자사, 미륵사 등의 지명도 그러하고, 재위 중에 익산에 미륵사와 별궁을 짓고 금마로 도읍을 옮길 계획이었는데, 어떤 사연인지 알 수 없으나 천도 계획이 무산되었던 점도 그러하다.
어떤 이는 궁남지와 인접한 화지산 지역 유적을 백제 별궁이 있던 자리로 추정하며, 궁남지는 별궁 남쪽에 딸린 연못으로, 당시 원래 연못은 지금보다 훨씬 큰 규모였을 것이라는 주장을 펴기도 한다. 익산 금마 천도에 실패한 무왕이 부여 사비성 남쪽 화지산 지역에 별궁과 궁남지를 지었다는 얘기다. 그 사연이야 알 수 없지만, 당시의 정치적 역학 관계를 고려할 때 전혀 불가능한 견해라고 치부할 수 없기에, 실증의 뒷받침이 미흡한 공백을 합리적 추론으로 보완하려는 노력의 측면에서 의미 있는 견해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무왕은 재위 33년 1월에 맏아들 의자義慈를 태자로 봉하고, 재위 35년 2월에 왕흥사王興寺를 낙성한 후 항상 배를 타고 그 절에 들러 향을 올리고, 3월에 궁남지를 조성했다. 재위 37년 3월에 신하들과 사비하(泗沘河, 금강) 북포北浦에서 잔치를 벌였고, 8월에 망해루望海樓에서 잔치를 벌였고, 재위 39년 3월에 빈어(嬪御, 후궁)들과 큰 못에서 뱃놀이를 했고, 재위 42년 3월에 죽었다. 선화공주는 언제 죽었는지 알 수 없다. 무왕은 의자를 태자로 봉한 후, 말년을 통치보다 풍류를 즐기며 살다가 죽은 왕처럼 비치기도 한다. 이 시기에 무왕의 신변에 무언가 큰 변화가 있었던 듯하다. 물론 실증의 공백에 채울 추론과 상상의 여백이지만.
어찌 되었든 궁남지는 무왕이 말년에 조성한 연못 정원이다. 부여 사람들은 연꽃이 만발하는 7월에 궁남지에서 ‘서동연꽃축제’를 열고, 가을(9. 말~10. 초)이면 백제의 왕도였던 공주와 합동으로 ‘대백제전’ 역사문화축제를 연다.
궁남지에서 사람들은 백제 패망의 정치적 역사를 말하지 않는다. 역사의 사실과 진실이 무엇이라고 목청 높여 주장하지도 않는다. 궁남지에 모인 사람들은 서동과 선화공주의 사랑을 이야기한다. 역사의 사실이니 진실이니 하는 소리가 제아무리 커도 사랑의 소리만큼 넓고 깊은 울림이 없다.
궁남지는 여전히 서동과 선화공주의 사랑 이야기가 아름답게 흐르는 연꽃 세레나데serenade의 공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