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추린 6.25한국전쟁☆
■전쟁의 배경 및 원인
제2차 세계대전 후 미.소의 냉전은 심화되었다. 따라서 한반도도 1945년 광복과 동시에 북위 38도선을 경계로
남북이 분단되어 서로 대립하게 되었다. 1948년 정부 수립 후에도 좌우의 첨예한 대립으로 남한의 사회는 몹시
불안정하였다. 6..25전쟁은 이러한 남한의 정세와 스탈린의 세계공산화 전략, 모택동의 전쟁지원 약속 등에
고무된 김일성의 무력적화 통일 야욕에서 비롯된 기습남침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전쟁의 경과
1.북한군 기습남침과 낙동강선으로의 후퇴(1950. 6.25- 9.14) 국군은 3일 만에 서울을 빼앗겼다(6.28). 한국을
돕기 위해 유엔군이 참전(7.1)하였지만 개전 한 달여 만에 낙동강선까지 후퇴하였다(6.25-7.31).
이후 40여 일(8.1-9.14) 동안 낙동강방어선을 필사적으로 사수하여 인천상륙작전과 반격의 발판을 마련하였다.
2.인천상륙작전과 압록강으로의 진격(1950.9.15-10.24)
인천상륙작전(9.15) 성공과 낙동강전선에서의 반격으로 전세를 역전한 국군과 유엔군은 서울을 탈환(9.28) 후
반격개시 보름만에 38도선을 회복하였다(9.16-9.30). 10월 1일 38도선을 돌파한 아군은 채 한 달도 되지 않아
압록강 인근의 초산까지 진격하여(10. 1-10.26) 통일을 눈앞에 두는 듯 하였다.
3.중공군의 개입. 새로운 전쟁(1950.10.25-1951.7.9)
국군이 압록강 초산까지 진격하고 있을 무렵(10.26) 이미 25만여명의 중공군은 압록강을 건너와 국군과 유엔군의
등뒤에서 기습의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10월 25일에 시작된 중공군의 대규모 공세는 이듬해 5월까지 5차에
걸쳐 실시되었다. 국군과 유엔군은 12월 초 중공군의 2차 공세로 인해 평양철수(12. 4)를 개시한 지 한 달 만에
다시 서울을 적에게 내주었다(1. 4후퇴). 급기야 평택과 삼척을 연하는 37도선까지 후퇴하였다가
서울 재탈환(3.15) 이후부터는 38도선을 중심으로 일진일퇴의 공방전을 계속하였다.
4.휴전협상과 휴전선 일대의 고지쟁탈전(1951. 7.10-1953. 7.27)
유엔군과 공산군은 1951년 7월 10일 휴전협상을 시작하였다. 2년간이나 계속된 휴전협상 기간 동안 남북한은
한 치의 땅이라도 더 차지하기 위해 현재의 휴전선 일대에서 치열한 고지쟁탈전을 계속하였다. 전쟁개시 3년여
만인 1953년 7월 27일에 정전협정이 조인되면서 남북한은 휴전선으로 분단된 채 오늘에 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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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은 한국 역사상 가장 비참한 전쟁이었다. 이로 말미암아 입은 피해란 말할 수 없이 가혹한 것이었다.
우리 국군이 전투로 인하여 입은 피해만 해도 사망 약 14만, 부상 약 45만, 행방불명 약 20만에 달하였다.
그리고 전재민수는 약 3백만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되었다. 공산군이 받은 피해는 실로 그 몇 배가 넘었다.
또한 물질적 피해는 18억불 내지 30억이 되었다.
그 가운데서도 공업시설 45%, 발전시설 41%, 탄광시설 50% 가량이 피해를 입었다.
주택은 33% 이상이 파괴되었고, 공공건물, 도로, 교량, 항만 등의 상당 부분이 파괴되었다. 이와 같이 세계 1,2차
대전과 한국전쟁은 재산 피해와 사상자 규모에서 그 유래를 찾을 수 없는 인류의 참혹한 전쟁기록이다.
만일 이 상태로 전쟁을 끝낸다면 한국은 이 전쟁에 지불한 희생을 어느 곳에서도 보상 받을 수 없다.
전쟁 발발 72년이 지났지만, 우리는 이 전쟁을 잊지 말고 영원히 기억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현재 우리나라 대학생 10명 중 4명은 한국전쟁이 언제 일어났는지에 대한 그 시기조차 모른다고 한다.
좌파 정권이 집권함에 따라 6.25전쟁을 단순한 내란 수준으로 격하시키면서 우리의 기억에서 애써 지우려고
하고 있었다. 더구나 초중고 국정교과서에서도 남북 분단의 이유라는 근본적 문제의 이해보다는 막연한
평화통일의 당위성만 강조하고 있다. 남침설의 언급을 피한 채 소련의 적화 전략은 언급조차 하지 않고,
오히려 유엔군이 참전하므로써 국제전으로 확대되었다는 엉뚱한 주장을 늘어놓고 있다.
심지어 남한이 먼저 북침을 했다고 가르치는 교사들도 있다고 한다. .요즘 세대들에겐 동족상잔의 비극 6.25가
먼 옛날 이야기나 남의 이야기처럼 들리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6.25전쟁은 지금도 우리 곁에서 현재진행 중에
있다. 이러한 시국에서 전쟁을 몸소 체험한 우리 세대는 6.25전쟁을 올바로 기술함으로써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서 산화한 호국 영령들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를 다해야 할 것이다.
특히 자라나는 우리들의 후손, 청소년들에게 사실에 입각한 바른 역사를 전하는 것은, 바로 우리 세대와
지식인들이 부담해야 할 책임이고 의무라 할 것이다. 필자는 항상 후손들에게 귀중한 재산을 물려주기보다는
왜곡되지 않은 올바른 역사관을 이해시키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 왔다.
호국보훈의 달 6월입니다.
6월 중 어느날을 잡아 각 가정별로 자녀들을 비상소집하여 가정안전보장회의라도 개최하여 보십시요.
여기에서는 틀림없이 의장의 인사와 함께 6.25전쟁에 관한 의장의 언급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 경우에 위 간추려 정리한 필자의 6.25한국전쟁이 참고가 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붙임 : 피해통계 <국방부군사편찬연구소>
■국군 및 유엔군의 피해
국군 총 621,479명 (전사137,899, 부상450,742, 포로 및 실종32,838)
유엔군 피해 총 154,878명 (전사40,667, 부상104,280, 포로및실종 9,931)
공산군 피해(추정): 1,773,600명 (사망 및 부상: 1,646,000명, 포로 및 실종: 127,600명)
■민간인 피해
총 990,968명 (사망373,599, 부상229,625, 납치 및 실종387,744)
※기타 피난민: 320만, 미망인: 30만, 고아: 10만
2022. 6. 5. 無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