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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겨진 과제와 비전] 영도는 명실상부 한국 조선 산업 부흥의 시발점이자 견인차 역할을 한 옥토였다. 그 후 한국의 조선 산업은 연간 4천여 톤의 목선이나 건조했던 1950년대의 여명기를 지나 근대 조선 공업의 확립을 위하여 강선 건조 기술의 확립을 서둘렀던 1960년대의 근대화기, 대단위 조선소를 신설하여 선진 조선국의 면모를 갖추게 된 1970년대 이후의 비약기로 그 추이를 더듬어 볼 수 있다. 그리고 현재 한국은 세계 제1의 조선 강국이 되었으며, 조선 산업은 국가 기간산업의 하나가 되어 외화 확보의 효자로 한국의 경제 발전에 크게 공헌하고 있다. 영도구에서도 특히 대평동은 ‘조선소 지대’로 알려진 곳이다. 이 지역에는 어선들이 정박하는 부두가 있어 엔진 등 부품들을 제작하거나 수리하는 업체가 많다. 대개의 공장이 영세하여 건물 하나 안에 공장이 2개 이상 있는 경우도 많은데, 그 업체의 종사자 대부분은 50~60대를 넘겼다. 그런 광경은 공장들이 입주한 건물의 모습만큼이나 낡았다. 그들이 말하는 ‘왕년’의 영광과는 거리가 있어 보이는 모습이다. 과연 이 지역은 과거에 제법 부를 누리기도 했으나 지금은 영도에서조차 가장 낙후한 지역 중 하나이다. 부근에는 약국도 파출소도 없는데, 모두 위쪽 남항동으로 옮겨 갔다. 게다가 최근에는 STX조선의 부도로 일자리가 줄어 한때는 줄을 서서 식사를 해야 했던 식당이 파리를 날릴 지경이다. 주민들에게 물으면 공통적으로 “예전에는 참 잘 살았던 곳인데, 이제 이곳은 더 이상 발전이 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주민들 다수는 더 이상 발전을 기대하지도 않는다고 잘라 말하는 대평동이야말로 영도가 ‘떠나는 지역’임을 웅변으로 보여 준다. 영도, 그중에서도 대평동이 이렇게 된 것은 선박 수리업이 사양길을 걷고 있기 때문이다. 일부 주민들은 그 이유를 공단 유입과 어업 협정으로 꼽는다. 공단의 유입이란 토지의 가치를 올리기에만 급급해 공장을 유치하느라 환경을 제대로 지키지 못해 원래 살던 주민들이 내쫓긴 일을 말한다. 또 어업 협정은 일본과 맺은 조약으로 어로 구역 상당 부분을 양보하였고, 그 여파로 큰 배들이 줄어들어 수리업도 쇠락하였다는 것이다. 당연히 그로 인해 대평동 주민들도 서서히 떠나게 되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다른 의견도 있다. 원래 월명기에 고등어가 산란할 수 있도록 어획을 하지 않고 다른 시기에도 새끼 고등어[갈고등어]가 성장할 기간을 주는 게 상례인데, 큰 배들이 ‘쓸어오는 식’의 마구잡이 어획을 한 탓에 어자원이 줄고 배가 줄어 조선소도 줄었다는 것이다. 아무튼 대평동 노후 주택의 대문 앞에는 청구서가 가득 쌓여 있는 모습을 심심찮게 볼 수 있고 골목은 대낮에도 조용하다. 젊은 사람은 보기 어렵고 대체로 나이 많은 어르신들인데, 자식들이 취직해 나가 살겠다고 하면 잡을 방법이 없다. 소음과 먼지가 많은 공장 지대라 거주에 쾌적한 환경이 아니며, 지금도 비어 있는 집이 늘어 가는 중이다. 그러면 이곳을 부활시킬 방안은 무엇인가. 깡깡이 아지매의 전설을 곁들여 ‘이야기를 품은 조선소 테마 거리’로서의 부활을 꿈꾸어 봄직하다. 일본은 막부 말기에 나가사키에 건너온 영국 조선 기사 ‘토마스 그라바’가 설립한 소형 조선소인 ‘그라바 조선소’를 ‘미쓰비시[三菱]중공업’이 관리하다 최근 나가사키 시 문화재로 지정하였다. 이 문화재는 역사적 가치로 각국 조선 애호가들의 눈길을 끌고 있으며, 많은 관광객들이 찾는 명소가 되었다. 마찬가지로 한국도 반류회의 기념비가 세워져 있는 현 ‘대평초등학교’ 자리를 기점으로 그 인근이 ‘근대 조선 산업의 발상지’임을 알리고 ‘조선(造船)박물관’을 세운다면 조선 발상지로서의 위상을 높이고 관광객도 유치할 수 있다. 한국 최초의 ‘마일 포스트(MILE POST)’가 영도에 있었음을 생각한다면 박물관이 형성되어야 할 당위성은 영도에 있다. 현재도 대평동 거주민은 조선 수리업체에서 일하는 노동자, 기술자가 많다. 이름을 밝히기를 한사코 거부하는 54세 포장마차 주인은 집안 형편 때문에 17세에 포장마차를 시작해 지금까지 일궈 왔다고 말한다. 지금은 사업이 번창해 가게도 늘리고 돈도 많이 벌었지만 손을 놓지 않는 이유는 몸에 밴 근면함 때문이다. 그들의 모습 자체가 시대의 웅변이자 살아 있는 박물관의 일부이다. 그처럼 대평동은 그들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가족애의 감동과 휴머니티를 느낄 수 있는 공간이다. 주민들이 외지인의 질문에도 친절하게 답변을 해주는 적극적이고 친절한 면을 발견할 수 있다. 이 지역이 조선의 역사를 더듬어 볼 수 있는 테마 거리로 다시 태어날 가능성을 던져 주는 것이 그런 주민들의 태도에서 엿보인다. 특히 깡깡이 아지매에게 대평동이란 예나 지금이나 여전한 삶의 터전이고 기억의 공간이다. 그렇다고 그들을 관광 상품화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렵다. 멀쩡한 사람을 동물원의 원숭이 다루듯 해서는 부작용이 일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의 일하는 모습을 직접 보여 주기보다 벽화로 형상화하거나 동상을 세우는 방식 등으로 그 치열하고도 숭고한 삶의 이력을 기리는 것이 좋겠다. 아울러 선박 수리하는 모습을 일반인들이 보기 쉽게 만들면 가족이나 학생들이 와서 견학하는 장소로 손색이 없을 듯하다. 나아가 체험 활동도 고려해 봄직하다. ‘부모 세대의 애환’이라는 테마와 연계하여 조선소를 직접 견학하며 체험하게 하면 이 지역의 관광 자원화에 큰 보탬이 되지 않을까 싶다. 물론 직접 체험하면 위험한 일들이 많다. 깡깡이질을 하느라 ‘아시바’라 부르는 작업 난간을 잘못 걸으면 아래로 떨어지게 마련이고, 미싱기를 잘못 돌리면 손이 상할 수도 있고, 페인트칠로 머리가 어지러울 수도 있다. 하지만 안전 문제가 일어나지 않게 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런 체험을 통해 우리 조선 산업이 어떻게 성장했는지, 부모 세대가 얼마나 힘든 일을 하며 자식들을 키웠는지를 깨닫게 할 수 있고, 자식과 부모의 관계를 돈독하게 하는 효과도 얻을 수 있다고 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