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레기통을 들고 현관문을 나가는데 앞집 문이 열려있다. 열린 문고리를 잡고 안을 살짝 들여다보니 이사센터 직원이 이삿짐을 싸고 있다. 갑자기 무슨 일이 있는가 하고 다시 살펴보니 아무도 없다. 이삿짐을 부탁하고 어제 모두 떠난 듯하다. 돌아서 생각하니 좀 섭섭하다. 내가 무얼 잘못했나? 그래도 눈앞에 사는 이웃인데 인사라도 하고 갔으면 좋으련만.
그러고 보니 우리는 일 년 동안 서로 마주 보는 대문을 두고 왕래가 없었다. 어쩌다 전할 말이 있으면 벨을 누르고 열린 문을 사이에 두고 할 말을 전하고, 밖에서 얼굴이 마주치면 “안녕하세요?” 하고 인사하는 정도였다.
늘 바쁘다는 핑계로 이웃과 차도 한잔 나누지 못했다. 차를 나눠야겠다는 마음은 먹었지만 주인 아주머니가 워낙 말수가 적어 차 한잔하자는 말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아주머니도 외국어 학원에 다닌다고 해 집에 없는 날이 많았고, 나도 소일을
하던 터라 담소를 나눌 시간을 맞출 수가 없었다.
문득 이사는 허물을 벗는 것이라는 생각을 해 본다. 뱀은 일 년에 한두 차례 허물을 벗는다. 매미 역시 여름 한 철을 살기 위해 고통의 허물벗기를 마다않는다. 새들도 네발짐승도 해마다 털갈이를 한다. 사람의 이사도 이러한 이치가 아닐까.
이사의 허물을 자주 벗는 사람도 있지만, 드물게는 평생에 한 번도 벗지 않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일생에 몇 번은 이사의 허물을 벗는다. 굳이 가장이 전근을 가지 않아도 아이들이 상급학교에 진학을 하지 않아도 사람들은 묵은 환경의 때를 벗고 싶을 때 이사를 간다. 부동 재산을 늘리고 싶을 때도 마찬가지다.
우리 집은 이사 온 지 십오 년이 되었다. 사오 년 넘어서도 쉬이 정이 들지 않아 이사를, 갈까 생각하다. 이사를 해야 할 뾰족한 이유도 없고 해서 지금까지 이렇게 눌러앉아 살고 있다. 물론 햇수를 정해놓은 것은 아니지만 사오 년 살다 보면 벽도 누렇게 변색 되니 보기에, 좋지 않다. 집안 공기도 답답할 때가 있다. 그럴 때는 집을 수리하거나 옮겨보고 싶다는 생각이, 물씬 든다.
이사 갈 때는 집도 좀 크고 나은 걸 장만하고 싶고 가구도 새것으로 바꾸어 들이고 싶은 욕심이 든다. 그 또한 이사를, 가지 못하는 이유 중의 하나인지 모른다. 하지만 더러는 새 아파트가 들어설 때마다 집을 마치 징검다리 건너듯 옮기는 사람이 있다. 성격 탓일 수도 있겠지만 대부분 투자의 가치를 쌓고자 하는 심리가 더 크게 자리한다.
친구는 현해탄을 건너 이사를 갔다. 말도 글도 생활방식도 다른 낯선 땅에서 뿌리를 내리는데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고 한다. 새순을 올리는 아픔이라고 할까. 가지의 혹독한 겨울나기를 수없이 겪고서야 정착의 꽃을 피웠으니 말이다.
요즘 우리나라도 외국인들이 많이 들어와 산다. 인종도 문화도 뒤섞여 이면의 한국화가 되어가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들을 겉으로 보면 우리나라 사람이란 착각마저 든다. 같은 땅에 발을 딛고 공기를 마시고 살면 생김새도 닮아가는 모양이다. 그들은 모국을 떠나 먼 타국에서 환경의 껍질을 깎아내는 고통을 견디며, 과감하게 생존의 길을 모색하며 그들만의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 간다.
어느 해 여름, 아버지도, 이사를 하셨다. 고향 마을 뒷산 서너 평의 자리에 혼자 외롭게 누워 계시더니 많이도 외로우셨는지 몇 해 전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천주교 공원묘지에 두 분이 나란히 누우셨다. 그 자리가 무척이나 편하신 듯 봉분 위에 자란 푸른 잔디가 나풀거리고 햇살이 살갑게 반짝인다.
이태 전에도 고향 선산으로 다시 이사를 가셨다. 선산에는 조상이 모두 모여 층층으로 위계의 질서를 지키고 계신다. 이승에서 뿔뿔이 흩어져 살던 사람들도 저승에서 다시 만나 마을을 이루고 정답게 살아간다는 생각마저 든다. 그러고 보면 이사는 삶과 죽음의 경계를 초월한 듯하다.
가을이 깊어 감에 따라 산길의 나뭇잎은 하나둘 떨어지고, 허물 벗은 나뭇가지는 동면을 준비하고 있다. 앞집의 이삿짐이 빠져나가고 나니 갑자기 한기가 든다. 잠시라도 내가 이웃의 온기가 되어주지 못한 것이 못내 미안하다. 나도 이 가을에 묵은 환경의 허물을 벗고 새 보금자리를 찾아 떠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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