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평양성의 관문은 개주 비사성
항구가 이루워지는 지형조건은 배가 편리하게 정박할 수 있어야 되고, 출항과 기항이 항로의 조건과 맞아야
됩니다. 이러한 조건들과 맞아 떨어졌던 곳이 개주였다는 사실을 우리는 너무도 늦게야 알았습니다.
개주는 평양과는 바다길로 500여리나 떨어져있는 항 포구였습니다.
발해의 물길이 타원형의 형태로 순환하는 길목에 위치했던 것입니다.
물길이 돌기 때문에 이 곳에는 입출항이 가능하지만 항로는 일방 통행이어서 왔던곳으로는 다시 갈 수가
없었던 비밀이 있었습니다.
등주에서 출발한 수로는 북황성도에 이르러 동쪽으로 바라보이는 300여리의 해역을 건너지 못하고 물길을
따라 다시 북쪽으로 올라갔다 동으로 건너 연안항로를 따라 항해하는 순서를 밟았습니다.
그렇게 해서 개주는 실재적인 평양의 관문이었습니다.
1,2번 그림으로 볼수있는 발해는 마치 크나큰 저수지처럼 생겼습니다.
이 저수지의 제방(堤防)역활을 발해해협의 묘도군도가 하고 있습니다. 황하 에서만 년 11억톤의 물이
쏟아져 들어 온다고 하니 모두합하면 100억톤이 넘는 물을 이 제방이 막고 있는것입니다.
그래서 물은 제방 가까이 까지 와서 바로 바다로 빠져 나가지 못하면 자연스럽게 물이 움직이는방향으로
돌게 되어 있습니다. 눈으로 볼수있는 이곳 발해해협의 바다물은 사실 여수로(餘水路)에 불과 한것입니다.
물론 평양성으로 통하는 관문이 개주에 있었기 때문에 그 관문을 지키던 성이 비사성(卑沙城)이었습니다.
이 성 뿐만이 아니라 개현안에 무려 8개나 되는 성들이 포진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합하면 9개나 되는것이지요.
1. 적산산성 2. 고려성산산성 3. 손가와보산성 4.
분동산성 5. 성자구산성 6. 연동산산성 7. 개현현성
8. 건안성
다시 만약 고구려나 고조선이 한반도에 있었다면 압록강을 건너오는 길목에 무수한 성들이 있었어야 될텐
데 기억나는 성들이 몇개나
됩니까?
그러나 요동반도의 남부인 개주현 인근의 보란점 내역에도 일곱개의 성이 있습니다.
1. 고려성산산성 2. 오고산산성 3.
노백산산성 4. 풍산산성 5. 고려성산산성 6. 용담산성 7. 마권자산산성
이 성들 역시 요동반도의 남쪽에 위치한 요해를 통하여
여순앞바다를 통과하는 적들을 방어하기 위해서
입니다. 요해에서 등주로 향하는 해류는 역류에 방해되지 않는것으로 보입니다.
다시 인근의 장하현에는 정성산 산성과 성산 산성 이 있고, 대련인 금현에는 대흑산 산성이 있습니다.
이 성을 일명 비사성이라고 하여 개주의 비사성과 혼동을 많이 하고 있는데 비사성이라는 이름이 이쪽
으로 옮겨온데는 사연이 있습니다.
개주의 비사성은 바다에 있던 해성이었는데 서기668년 당나라의 이세적이 점령한 이후 발해로 윤몰되
었기 때문입니다.
비사성(卑沙城)이란 성이름 자체가 높은산에 있던 성이 아니기때문에 금주의 대흑성산에있던 성이 될
수가 없는것입니다. 낮을비 자에 모래사 자를 이름으로 쓰는성이 어찌 높은지대에 있을수가 있겠습니까?
이 성은 바닷가 모래위에 세웠던 평지성 이었습니다.
규모가 비교적 넓은
둘래 9리나 되었고, 석성이었다고 기록되어있습니다.
개주의 바닷가쪽은 산이 없으므로 산성이 없고 북쪽의 영구시에도 평지성이 하나 있습니다.
개주의 비사성은 서쪽에서 들어가는문이 하나밖에 없었고, 금주의 비사성은 남북이 2리 이고 성문은
남쪽문밖에는 없다고 하였습니다.
필자도 답사를 하였지만 발해와 요해를 동시에 감시할 수 있는 이점이 있고 성내가 좁아 많은 인원을
수용하기는 어렵습니다.
비사성에 대한 전투기록은 수나라의 3차 침입때 매번 고구려 침입시 마다 패전하고 물러섰던 수나라의
수군장수 래 호아(來護兒)가 마침내 비사성을 함락하고, 해로로 평양으로 향하려던 찰라 수양제로 부터
내려진 철수명령을 받던 모습입니다.
[래호아에 인솔된 적 수군은 이 때
요동반도에 상륙하여 고구려의 비사성을 공함하고 나아가 해로로
평양으로 향하려고 할 즈음에 양제로부터 전군에 대한 철귀령이 내려졌다....]
비사성은 평양으로 향하는 해로의 관문이라는 대목입니다.
<수서> 권 4 양제대업 10년 7월조에 "갑자, 고려견사, 청항,수송 괴사정,상대열 8월기사, 반수"
이병도저 <한국고대사연구> 437쪽
서기 644년 당나라의 고구려 침입 당시 기록입니다.
[육로군에 있어서는 이세적을 요동도행군총관으로 삼아 요동방면에 향하게
하고, 수로군에 있어서는
장량을 평양도행군총관으로 삼아 평양으로 향하게 하였는데, 전자는 6만여,후자는 43000, 마 만필,
전함 500쌍에 달하였다 한다.] 이 기록중에도 수로군이 평양도행군총관을 맡게 된 연유가무엇일까가
궁금합니다. 이병도저 <한국고대사연구> 443쪽
고구려 보장왕 20년(661)당나라와의 전쟁기록입니다.
[8월이었다. 당으로서는 첫 시험 이었던 만큼 맹렬하였으나, 워낙 아군의
굳센 저항으로 말미암아 이를
어찌하지 못하고 엄동을 마지하였다. 이해의 추위는 유심하였는데, 당군은 운제, 형차등 모든 공성기를
사용하고, 또
토산을 쌓고 진을치고 소리를 지르면서 수 없이 달려들었다.
그러나 아군은 몇백배나 더 용감하게 싸워 적의 토산 두개를 쳐서
빼앗고, 남어지 두개를 마져 뺏으려
하니, 적은 싸움의 괴로움과 추위에 견디지못하여 무릅을 껴앉고 우는등 기운이 꺾이고 힘이 다하여 성을
함락치
못하고, 또 새해를 마지하였다.
2월에 이르러 당의 별장 방효태의 군은 평양부근의 사수(蛇水)란 곳에서 려상 연개소문군과 싸워
전패를
당하고 효태도 그의 아들 13인과 함께 여기서 전몰하였다.
생각컨데, 소문은 적의 사기가 저상한것을 보고 친히 군사를 이끌고 성 밖으로 나가 싸웠던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어떻튼 이 사수의 싸움은 적에게 치명적 타격을 주었던 모양으로 소정방은 이 달에 당주의
허락을 받아 평양의 포위를 풀고 전군을 돌이키었다.
당군의 평양성 공위(攻圍)는 전후 6,7개월에 걸친 수,당이래 일찌기 보지못하던 장기전이었다.]
이병도저 <한국고대사연구>
452쪽
이상의 글에서 사수전투가 중요한데 평양부근에 사수라는 물이 어디있다고 보십니까?
역시 평양성을 맹공하던 소정방도 수로군 장수였습니다. 만약에 이곳이 대동강의 일부였다면 이미 소정방
군에게 소탕이 되었다고 봐야 옳을것 같은데 특별한 설명이
없습니다.
필자가 주장하는 사수의 현장을 그린 지도가 위에 올린 세번째 그림입니다.
물이 역수로 흐르는 모습을 마치 새끼줄처럼 또는 뱀처럼 그린 지도를 말합니다.
이 전쟁을 수 천명의 생명을 수장시킨 고구려 3대 대첩의 하나로 단제 신채호선생은 기록 하였습니다.
일명 비류수인 사수의 물은 그만큼 무서웠습니다.
다음은 치욕적인 645년 4월의 기록입니다, 당나라는 장량이 이끄는 4만여 명에 달하는 대규모 수로군으로
비사성을 공격한 뒤, 다음달 초 정예병으로 서문을 기습 공격하였습니다..
이 공격에서 고구려군은 중과부적으로 패하고, 퇴로가 없어 살아남은 8,000여 명은 포로가 되었다고 적고
있습니다. 그러나 당 태종이 이끌던 막강한 당군이 안시성 싸움에서 패하고 물러서자 당 수군도 모두 철군
하고 말았다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전과를 올렸던 흔적을 금주의 대흑산(해발 668M)산성 바로 아래 당왕전(唐王殿)이란 건물을 지어
놓고, 당태종과 장량, 설인귀등 세사람의 흉상을 만들어 세우고 기념하고 있는것입니다.
이 들은 본 개주의 비사성이 발해로 살아지자 이곳을 대신으로 이름을 옮기고 역사를 왜곡하고 있는것입
니다.
혹시 답사자들께서는 속지 마시기 바랍니다.
국내의 강단사학계 통설은 현재 금주의 대흑산산성을 비사성으로 하는 왜곡설을 따르고 있습니다.
만약 금주에있는 대흑산산성을 비사성이라고 우긴다면 육로군과 수로군의 역활이 무엇인지를 다시 공부
해야 될 것입니다. 금주의 대흑산산성은 산이 깊고 성터가 높아서 도보로 공격할려면 적어도 수일은
걸리는 거리인데 배를 무기로하여 싸우는것을 생명으로 하는 수로군들이 섬도아닌 육지로 상륙하여
수일간씩 걸려 싸운다면 육로군은 필요가 없게 되는것입니다.
본래 개주에 있던 비사성은 일명 해성으로 부르던 성인데 후일 이 성이
발해로 가라 앉아 없어지자 성의
이름은 약 500여리의 남쪽으로 옮겨지고 해성이란 지명은 북쪽 내륙으로 옮겨져 안산시와 대석교시의
중간에 놓여 있습니다. 이곳에서 요하를 건너 반산시로 가는 철도가 갈라집니다.
이곳에서 북상하다가 동쪽으로 약 6KM 지점에는 영성자산성 (일명 안시성)이 있습니다.
안시성전투는 내용을 생략하더라도 전쟁에 패한 당태종이 철수병력을 개주로 집합시키고 철수하기전에
마지막 사자들을 위한 위령제를 지냈던 곳이 현재 개주공원 주변의 탑이 세워진 주변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현지에 알려져 있는 또 하나의 구전(口傳)전설은 연개소문장군이 강가에서 화살을 맞고 쫓겨와
탑근처에서 죽었다는 얘기가 초등학교 수학여행때 마다 선생들이 들려주던 레파토리었다고 합니다.
연개소문이란 이름자들을 한자 한자 분석하여 보면, 淵蓋가 개주의 사수와 관련은 없는지 궁금한 대목
이기도 합니다.
서기 612년에 시작된 수나라의 고구려 대거침략으로 부터 서기668년에 끝난 당나라와의 최종전투까지
적어도 병력이 100만명이상이 동원됐던 전투가 많았는데도 압록강 도강전투는 찾아볼 수 도 없고 주변
이나 한반도의 북부에 위치했던 성터에서도 전쟁을 했던 기록은 찾아볼 수 없는데도 고구려는 전쟁에서
졌습니다. 무슨 이유일까요.
수나라의 침입 이후 기록에 나타난 전투는 많치않습니다. 요동성. 백암산성.
개모성. 신성. 안시성. 건안성.
비사성.(해성) 평양성등 열 손가락안에 드는 숫자입니다.
압록강 주변에 있던 그 많은 성들은 전쟁할 기회를 만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평양성은 함락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수. 당의 침략군은 고구려의 개마대산(단단대령)을 넘지 못한것입니다.
그렇다면 서기 668년 평양성은 대동강을 통해 들어온 적군에게 망했다는 추측밖에 할 수 없는것 아니겠
습니까?
이게 가능한 얘기일까요.수로군이 통과했을 서한만의 요해는 수로군과의 전쟁기록이 전연히
없습니다.
<연개소문전>을 쓴 김용만님은 645년 당나라의 고구려 침입당시 전투중, 이 대목을, [당나라 해군은
요동반도를 놔둔 채, 행군총관 구효충으로 하여금 군대를 나누어 압록강 어귀로나가 고구려군의 대응
태세를 탐문토록했다. 요동반도 남부의 해안을 따라 진격한 당나라해군은 이후 아무런소식이 없었다.]
이후 서기 667년 당의 3차 침입시 북쪽으로 진출하여 신성을 중심므로 16개성을 함락하고, 이어서
총사령관 이세적이 이끄는 당군의 주력은 서기 668년 더 북으로 진출하여 부여성을 위시하여 주변 40
개성을 함락한뒤 평양을 치기위해서 압록강 주변으로 모이게 되는데, 여기서 봉황성보다 후방에 있던
대행성을 함락시키켰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압록강 전선의 고구려 수비군과 맞섰으나 상대가 되지못하여 욕이성 등을 큰
저항없이 무너트리고
평양성에 도착하여 앞서 도착한 계필하력이 이끄는 50여 만명과 합쳐 약 100여 만명의 병력으로 평양성
을 공격 하였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3차 공격시 특이 한것은 과거 침입시 수 차례에 걸쳐 행하여졌던 요동반도의 남서쪽방향에 대한
공격이 눈에 띠지 않는것입니다.
그러나 대총관 이세적이 평양성의 관문인 비사성을 쳐서 함락 시켰다는 기록을 <요사>지리지는 밝히고
있습니다.
압록강으로 멀리 우회했던 이유가 요동반도의 남쪽바다를 이용하여 발해해협의 평양성으로 가기위한
차선책이었던 것으로 추측은 가지만 기록으로 밝혀놓은 근거가
없고,
평양성이 함락당할 무렵의 전투가 점점 치열 해 지는것이 상식인데 반대현상이 보였던 기록들도 이해하기
어렵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전쟁이 끝났는데도 항복하지않코 저항을 계속하던 성들은 대부분 동북쪽으로 멀리 떨어져 있던 성들이었
습니다.
다시 개주현으로 돌아가서, 이곳을 알고보면 고조선시대부터의 수수께끼들이 무척이나 많이 숨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것입니다. <
한단고기>의 북부여기 상은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기고 있습니다.
비사성의 전 이름은 해성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성은 고조선시대부터 있었던 성이었고, 위만조선의 우거왕과 부여의 4세 고우루간에 있었던 전쟁 얘기
입니다.
[4세 단군 고우루(혹은 해우루) 재위
34년
신유 원년(B,C 120년) 장수를 보내 우거를 토벌하였으나 이로움은 없었다.
고진을 발탁하여 서압록을 수비토록하니 병력을 늘리고 많은 성책을 설치하여 능히 우거를 대비하는 데
공이 있었으므로 승진시켜 고구려후로 삼았다.
계해 3년 우거의 도적들이 대거 침략하니
우리의 군대가 크게 패하여 해성 이북 50리의 땅이 모조리
우 거의 땅이 되었다.
갑자 4년 단제께서 장군을 보내 성을 공격하였으나
석달걸려도 이기지 못하였다.
병인 6년 단제가 몸소 병력 5000을 이끌고 습격하여 해성을 격파하고 추격하여 살수에 이르르니
구려하의
동쪽은 모두가 항복해왔다.] 하략
이상의 글을 통해서 위만조선의 우거왕은 내륙의 발판인 개주를 절대적으로 확보해야 되었고, 반대로
부여왕은 우거의 진출에 위험을 느낀 남어지 수시로 우 거의 내륙 진출을 막기 위하여 전쟁을 벌렸던 사실
입니다.
또 하나 기억해야 될것은 개주에서 멀지않은 곳에 살수가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개주에서 동으로 건안성을 지나면 봉황성으로 통하는 길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 길의 중간쯤에서 요동반도의 남쪽인
요해로 흐르는 벽류하를 만나게되고, 이 물길을 따라가면 봉황성
으로 빠지지않코 피구라는 항구로 빠져 요해로 통하는 길이 됩니다.
이 강이 살수로 추정되는 곳이므로 기억해 두시기 바랍니다.
수나라의 별동군 30만명이 무엇때문에 이 길을 택하였다가 을지문덕 장군의 밥이 되었을까요.
이해하기 어려웠던 서기 668년 고구려의 항복 직전의 전투 상황에서, 당군이 북쪽의 신성을 위시한 부여성
등을 쳐 함락 시키고, 나아가 대행성(大行城)을 치고 압록수중의 욕이성을 함락시켰다고 한 부분을 정밀
분석하였던바 그것은 한반도를 지칭한 기록이 아니라는 결론을 얻었기에 신당서가 밝힌 이 대목을 추가로
올려드립니다.
욕이성(辱夷城)은 발해내역에 있던 성으로 간주되지만 이후 기록에서 나타나지 않는것은 이 성도 발해로
윤몰된 것으로 추정이 됩니다.
신당서는 전쟁당시에도 지진이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었다는 사실을 부기해두고
있습니다.
<신당서>의 관계문항입니다.
[男建以兵五萬襲扶餘, 勣破之薩賀水上, 斬首五千級, 俘口三萬, 器械牛馬稱之.
進拔大行城. 劉仁願與勣會,
後期, 召還當誅, 赦流姚州. 契苾何力會勣軍于鴨淥, 拔辱夷城, 悉師圍平壤.]
[남건이 병사 5만으로
부여를 습격하니, 적이 살하수 위에서 그것을 격파하고, 오천급을 참수하고, 3만을
포로로 잡았고, 기계와 우마를 가렸다. 더 나아가 대행성을 빼앗고, 유인원은 이세적과 만났던일로, 후에
소환되어(공격명령을 어긴죄) 주살을 당함이 마땅 하였으나, 사면되어 묘주로 유배를 갔다. 설필하력이
적의 군사와 압록에서 만나 욕이성을 빼앗고, 모든 군사로 평양을 포위했다.
고구려를 망하게 한 주요원인중의 하나는 남건의 반란입니다.
적군인 당군을 앞장서 안내하고 자기의 조국을 배반하는 비극을 보시기 바랍니다.
이 문단의 말미에 지진으로 곤욕을 당하던 기록도 같이 있습니다.
유달리 당나라때의 기록 에 많히 등장하던 "후 몰어발해(後沒於渤海)"라는 어구에 대하여 괴변으로 우겨
대던 의문들이 이제는 풀렸으면 합니다.
{高麗鼓而進, 銳甚. 仁貴橫擊, 大破之, 斬首五萬級, 拔南蘇, 木厎,
蒼岩三城, 引兵略地, 與勣會. 侍御史賈
言忠計事還, 帝問 [軍中云何], 對曰 [必克. 昔先帝問罪, 所以不得志者, 虜未有舋也. 諺曰<軍無媒, 中道回>.
今男生兄弟鬩很, 為我鄉導, 虜之情偽, 我盡知之, 將忠士力, 臣故曰必克. 且高麗祕記曰<不及九百年, 當有八
十大將滅之.> 高氏自漢有國, 今九百年, 勣年八十矣. 虜仍荐飢, 人相掠賣, 地震裂, 狼狐入城, 蚡穴於門, 人
心危駭, 是行不再舉矣.] }
[고려가 북을 치며 전진하니, 아주 정예로웠다. 인귀가 옆에서 습격하여 크게 깨고, 오만급을 참수하고,
남소 목저, 창암의 3성을 빼앗고, 병사를 이끌어 땅을 노략직하며, 적과 만났다.
시어사 이언충이 일을 꾀하고 돌아오니, 황제가 "군중의 상황이 어떠한가"하고 물으니, 대답하여 말하기를
"반드시 승리할 것입니다. 옛날에 선제께서 죄를 물었을 때 뜻대로 되지 않은 것은, 적에게 빈틈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속담에 '군대에도 중매잡이가 없으면 중도에 돌아선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제 남생이 형제끼리 싸워 우리의 향도가 되니, 오랑캐의 정보와 거짓됨을 우리가 모두 알고 있고,
장수들은 충성스럽고 군사들은 힘을 다하고 있기 때문에 신이 반드시 승리한다고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고려의 [비기]에는 '9백년이 되지 못하여, 응당 80대장이 있어 멸망시킨다'라는 말이 있으니,
고씨가 한 나라 때 나라를 세운지 지금 9백 년이 되었고, 적의 나이가 80입니다.
오랑캐들은 거듭 배고프고, 사람들은 서로 노략질하고 팔려갔으며, 지진으로 땅이 갈라지고, 이리와
여우가 성에 들어오고, 두더지가 문에 구멍을 뚫으며, 사람들의 마음이 위기에 있으니, 이번에 행하면
다시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하였다. ]
<신당서> 가 설명하는 사수(蛇水)의 위치입니다. 이 곳을 영남(嶺南)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영남이란 단단대령의 남쪽을 가리키므로 여순의 남쪽을 말합니다.
이 사수 전투 때문에 거의 종결될뻔 했던 고구려의 운명은 연장을 하게 되었습니다.
[八月,
定方破虜兵於浿江, 奪馬邑山, 遂圍平壤. 明年, 龐孝泰以嶺南兵壁蛇水, 蓋蘇文攻之, 舉軍沒;
定方解而歸.]
[ 8월, 정방이 패강에서
오랑캐 병사를 깨고, 마읍산을 탈취하고, 드디어 평양을 포위하였다.
다음해, 방효태로 하여금 영남 병벽에 있는 사수를 막도록 하니, 개소문이 그것을 알고 공격하여,
몰살시켰다. 이 때문에 정방이 평양성의 포위를 풀고 되돌아갔다.]
당나라의 3차 침략시에는 요동반도의 개주를 중심한 성들은 가능한 건드리지않고 북쪽으로 공격을 강화
하여 신성을 위시한 16개의 성을 빼았고 계속 북으로 진출하여 부여성을 위시한 40여개의 성을 함락시
켰다고 하였습니다. 이 작전은 과거에는 쓰던 작전이 아닙니다. 이 작전은 과거 수나라도 몰랐던 작전입
니다.
그러나 고구려를 너무나 잘 알고 있던 남건이가 반역하여 앞장서서 취약한 비밀의 경로를 안내한 것입니다.
그 들은 방어가 극심한 요동반도의 방어망을 건드리지않고 작전 목표지와는 정 반대방향인 부여 지역을
치고 요하의 수로를 이용한 것입니다. 이러한 비밀스럽던 작전내용을 너무나 기뻣던 남어지 기록으로 남겨
두었습니다.
[속담에 '군대에도 중매잡이가 없으면 중도에 돌아선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제 남생이 형제끼리 싸워 우리의 향도가 되니, 오랑캐의 정보와 거짓됨을 우리가 모두 알고 있고,
장수들은 충성스럽고 군사들은 힘을 다하고 있기 때문에 신이 반드시 승리한다고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고려의 최초 동경(東京)은 신라의 동주낙랑부(東州樂浪府)인 봉황성이다.
봉황산의 원경입니다. 이산의 이름은 신숭산(神嵩山)옥산 (屋山). 횡산(橫山).웅산 (熊山). 오골산 (烏骨山).
봉황산(鳳凰山)등이 있습니다. 둘래 16키로미터의 요령성에서 최대 석성입니다.
-사진제공:심양K,S 민박
고려왕이 거주하였다는 개주 촉막군(開州 蜀莫郡)은 신라 동주 낙랑부였던 고구려의 경주다.
따라서 개주(開州)라는 지명은 원래 거란으로 부터 시작된 개주봉국군(開州奉國軍)인 봉황성을 말하는것
이다. 최초의 개주(開州)는 경기도의 개성이 아니었다.
《요사》동경 개주(開州)는 고구려에서는 경주(慶州)라 하였고,발해에서는 용원부(龍原府)였다.
상경 영안현은 원래 용원부 경주(慶州)의 현 이름이다.
태조(遼)가 발해를 평정하고 그 사람들을 옮겨서 여기에 있는 성채에 두었다.
《일통지》에 의하면 요말(遼末)에 고려에 다시 편입되어 이를 촉막군(蜀莫郡)이라 한것으로 개원이 폐현
되었기 때문에 개주의 치소가 되었던 것이다.
발해에서는 용원현이 경주(慶州)의 치소인즉 경주가 용원부에서 가까운 주이기 때문에 용원현에서 가까운
현인 영안.오산.벽곡.웅산.백양등 다섯현도 역시 경주에 소속된것이 분명하고 조선의 경상도의 경주가
아니다.
또 금나라에 있었던 경주는 요나라의 회주.조주의 땅으로서 역시 이와는 다르다.
장진근역《만주원류고》경주부분 주석 (315쪽)
봉황성은 현존하는 요동지방의 고구려성 중에서는 그 규모가 최대로 크고 견고하다는 정도로 알고 있었습
니다. 그러나 그 성이 고구려 대조대왕이 동순하였을때의 책성이었다는 사실은 몰랐었지요,
강단 사학계에서는 이 책성을 두만강의 훈춘지역으로 비정하고 있었으니까요.
이유는 책성은 고구려의 동쪽이라는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집안지역을 고구려의 탄생지로 알고 있었으니까 무리도 아니지요.그러나 이곳을 고구려가 어느땐가 경주로
부르고 오골성으로 불렀다는 사실까지 알게 되었지만 고구려의 패전 이후 신라가 점유했었다는 사실은
전연히 알수가 없었지요.
이러한 사실을 <삼국사기>나 <삼국유사>도 숨겼고, 아예 신라는 압록강 이북으로 진출한 사실이 없었다고
하였으니까요.가슴아픈 일입니다.
그러나 어쩝니까 영원한 비밀은 없는것이지요. 마치 판도라의 상자같은 봉황성의 비밀을 <문헌통고>와
<만주원류고>가 실토를 한 것입니다.
이 성을 신라가 계승하여 신라의 왕성으로 삼았고, 고려는 신라의 동주 낙랑부를 동경으로 부르고, 금주
(金州)금마군 (金馬郡)즉 대련을 남경으로, 남평양을 귀속되었다고 하였습니다.
백제의 동남변경이 익산의 금마지역에 있다면 어떻게 발해와 거란으로 귀속될 수가 있겠습니까.
서경으로 불렀다는것입니다.
그러니까 남평양이란 암연현의 서남쪽에 있다는 고평양을 말한것입니다.
일단 고 평양은 당나라가 요양으로 옮겼었으니까요.
그리고 발해가 동경 용원부 책성(東京 龍原府柵城)으로, 요(遼)가 개주 진국군(開州鎭國軍)으로,
원(元)이 동령로 봉황성으로, 금(金)이 석성현 봉황성으로, 명(明)이 봉황성보(鳳凰城堡)로 불렀다는
기록이 밝혀졌습니다.
*그런데 《통고》의 주석에는 "백제의 동남 변경 전부를 신라가 통합하였다가 후에 발해및 거란으로
이메지의 출전<文獻通考--卷三百二十五·四裔考二 > [南平壤爲鎭州護西京]에서 '護字'는 '號字'의 오기
협곡으로 접어드는 성문 입구
새롭게 단장된 성문
재정비된 석물들과 성문의 위용
요계관방도에 그려진 봉황성 책문도(鳳凰城柵門圖)
<98년 책성(柵城)을 순수한 고구려 태조대왕>
기록에 따르면 태조왕은 태어나면서부터 눈을 떠서 볼 수 있었고 어려서도 총명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태조왕의 나이가 어려 태후가 수렴청정하였다. 태후의 수렴청정 기간은 알려져 있지 않다.
55년 요서 지역에 10개 성을 쌓아 후한(後漢)의 침공에 대비하였고 56년에는 동옥저(東沃沮)를 병합하여
동으로는 창해(滄海), 남으로는 살수(薩水, 지금의 청천강)에 이르렀다.
68년에 갈사국(曷思國) 왕의 손자 도두(都頭)가 나라를 들어 항복하니 그를를 우태(于台)에 임명했고,
70년에는 관나부(貫那部) 패자(沛者) 달가(達賈)를 보내서 조나(藻那)를 병합하였다. 7
2년에는 환나부(桓那部) 패자 설유(薛儒)를 보내 주나(朱那)를 병합하고 그 왕자 을음(乙音)을 고추가에
임명하였다.
일반적으로 이러한 주변 소국 정벌 활동은 중앙집권화의 흔적으로 보고 있다.
또한 98년에는 책성(柵城)을 순수, 102년에는 책성을 안무(安撫), 114년에는 남해(南海)를 순수하는 등
확장된 영역에 대한 중앙의 통제력을 강화하는 작업을 진행하였다. <출전 위키백과>
*그러나 <삼국사기>의 원문에는 왕이 책성으로 동순(東巡)하였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살수를 청천강으로 비정한것은 벽류하로 바로 잡아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56년에 병합한 동옥저 영역에 책성인 오골성이 있었고, 114년에 순수한 창해와 남해는 모두가
요동반도의 남쪽 서한만을 가르키는것입니다.(필자 주)
#15卷-高句麗本紀3-大祖大王-46年
○四十六年, 春三月, 王東巡<柵城>, 至<柵城>西< 山>, 獲白鹿. 及至<柵城>, 與群臣宴飮, 賜<柵城>
守吏物段有差, 遂紀功於岩, 乃還. 冬十月, 王至自<柵城>.
이게 중요한 얘기가 됩니다. 만약 책성의 위치가 왜곡되게 끼워넣은 훈춘이 아니고 봉황성이라면 당시
고구려의 탄생지는 요동반도의 서쪽이라는 등식이 성립되는것이지요. 이때가 초창기에 해당하니까요.
그런데 이 책성의 위치에 대해서 《위서》<고구려전>에는 중요한 기록이 보입니다.
<東至柵城, 南至小海>라는 기록입니다.
그러니까 고구려의 동쪽으로는 책성에 이르고 남쪽으로는 소해(서한만)에 이른다는 얘기지요.
그리고 후일 발해가 동경 용원부로 부르던 책성과 동일한 장소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발해의 동경용원부에는 다음과 같은 지명이 있어 현재의 봉황성임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중국역사지도집》요나라 동경도:고구려의 중도성이 있었던 환주(桓州)를 중심으로 정주(正州). 녹주
(綠州)는 모두가 요양의 서남쪽 200여리에 있었다는 《요사 지리지》의 권38,지리지 462쪽의기록을 무시
하고 이들을 모두 집안(集安)지역으로 옮겨놓은 지도다.
그들은 이 지도에서 고구려의 서경 압록부인 녹주까지 같이 옮겼다.
그러고 보니 고구려의 동경이었던 봉황성을 서경압록부의 서쪽에 그릴 수 없어 더욱 동쪽으로 옮겼지만
봉황성이란 지명은 빼버렸다.
따라서 요동지역에서 중요한 요새로 등장하였던 봉황성이란 이름은 묵서(墨書)로는 볼 수 없고, 주서(朱書)
로만 봉성(鳳城)이라고 표시하고 있다.
그렇다면 왜 옮겨졌을까 본래의 자리가 바다로 변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왜곡된 기록을 합리화 시키기 위해서다.
그러나 암연현(巖淵縣)의 위치를 지도에 그리고 있다는것은 거란과 신라의 국경을 구분할 수 있는 기준이
되었다.그렇다면 최대의 수수께끼로 남아있는 현의 서남쪽에 고 평양이 있었다는 기록은 어떻게 풀려질
것인지 조금 더 기다려보기로 하자.
<청일통지> 龍原府 漢時玄토郡地 晉時屬平州 隋時高句麗慶州地 唐時屬安東都護府 入渤海爲龍原府
遼時開州鎭國軍 金時石城縣 元時屬東寧路鳳凰城 金鳳凰城
용원부는 한나라때 현토군이었는데 진(晉)나라때는 평주, 수나라때 고구려의 경주였다.
당나라때 안동도호부에 속했었고, 발해에 들어 용원부, 요나라때 개주(開州) 진국군(鎭國軍), 금나라때
석성현, 원나라때 동령로 봉황성, 금나라때 봉황성. (신라와 고려때를 제외시킴)
<요사> <지리지> 龍原府 濊貊古地亦曰柵城府爲日本道
용원부는 예맥의 옛땅이며, 책성부라 불렀고, 일본으로 가는 길이다.
龍原府 東南濱海 高句麗慶州疊石爲城 周圍二十里 唐薛仁貴伐高句麗 擒善射於石城 卽此
용원부는 동남쪽으로 바다에 이르고, 고구려가 돌을 쌓아 성을 만들고 경주라 하였다.
성의 둘레가 20리이다. 설인귀가 고구려를 치고 사냥을 하였다는 곳이 이곳이다.
《중국역사지도집》요나라 동경도:고구려의 중도성이 있었던 환주(桓州)를 중심으로 정주(正州). 녹주
(綠州)는 모두가 요양의 서남쪽 200여리에 있었다는 《요사 지리지》의 권38,지리지 462쪽의기록을 무시
하고 이들을 모두 집안(集安)지역으로 옮겨놓은 지도다.
그들은 이 지도에서 고구려의 서경 압록부인 녹주까지 같이 옮겼다.
그러고 보니 고구려의 동경이었던 봉황성을 서경압록부의 서쪽에 그릴 수 없어 더욱 동쪽으로 옮겼지만
봉황성이란 지명은 빼버렸다.
따라서 요동지역에서 중요한 요새로 등장하였던 봉황성이란 이름은 묵서(墨書)로는 볼 수 없고, 주서(朱書)
로만 봉성(鳳城)이라고 표시하고 있다.
그렇다면 왜 옮겨졌을까 본래의 자리가 바다로 변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왜곡된 기록을 합리화 시키기 위해서다.그러나 암연현(巖淵縣)의 위치를 지도에 그리고 있다는
것은 거란과 신라의 국경을 구분할 수 있는 기준이 되었다.
그렇다면 최대의 수수께끼로 남아있는 현의 서남쪽에 고 평양이 있었다는 기록은 어떻게 풀려질 것인지
조금 더 기다려보기로 하자.
*고려 삼경에 대한 해석에 신라의 동주낙랑부를 동경으로,백제의 금주금마군을 남경으로,평양의 진주를
서경으로 삼았다고 하였다....그러나 이러한 지명들은 한반도에 없었기 때문에 《삼국사기》에서도 침묵을
지킨것으로 보인다.그렇지 않고서야 한 나라의 삼경이라는 중요한 지명을 역사서에서 빼놓을수가 있겠는까.
그리고 옛날에 인용되었던 자료들을 다시 확인할려고 하면 찾을 수가 없는 예가 많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전자도서의 진실에 대해서도 의심을 가져봐야 될것이라는 말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만주원류고》에서 인용한 기록이 없을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위에 올려진 《중국역사지도집》에는 開州에 開遠이라는 지명이 같이 보인다.기록에 따르면 이 개원이
폐지되어 고려가 촉막군을 설치했다고 하였다.
따라서 어찌 되었던 개주의 촉막군은 봉황성이었다는 흔적을 남긴것이다.
그 지도에서 한반도에 있는 개경(開京)에는 開遠이라는 전 촉막군이었다는 지명은 보이지 않으니 말이다.
慶州
遼史東京開州髙麗置慶州渤海為龍原府上京永安縣本龍原府慶州縣名太祖平渤海遷其人置寨於此
*(按一統志開州遼末復入於髙麗謂之蜀莫郡開逺廢縣故開州治也
渤海為龍原縣慶州治焉則慶州為龍原府附郭之州而龍原縣為附郭之縣永安烏山壁谷熊山白楊五縣亦為慶州所
屬明矣非朝鮮慶尚道之慶州也又金有慶州係遼懐州祖州之地亦與此異
지금까지 고조선사에서 난해한 대목으로 등장하였던 동옥저의 위치에 대해서 몇가지 문제를 풀어 보고자
합니다.
마치 봉황성의 위치에 대한 설명에서 "용원부는 동남쪽으로 빈해(濱海)에 이른다" 는 대목과 같이 동옥저의
위치를 비정하는 대목에서도 '동쪽으로 빈대해(濱大海)'라는 대목이 공통성을 갖는 위치라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동옥저의 생산품 중에서 소곰이 나는데 봉황성의 동남쪽 대양하 바다 근처에 있는 대염주
(大鹽州)와 소염주(小鹽州)가 그곳입니다.
이곳의 소곰 생산은 의외로 산에서 소곰을 파내는 염장으로 알려저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해안선 지형의 특성상 옥저의 영토는 동북은 좁고 서남은 길어 천리가 된다는 표현을 이해할수
있을 것입니다.
아래 글은 <삼국지> <동옥저전>의 일부 기록입니다. 앞선 글에서 많은 인용이 있었기에 번역은 생략합
니다. 고구려의 개마대산과 한나라의 단단대령은 같은 산맥입니다.
*東沃沮在高句麗蓋馬大山之東,濱大海而居。其地形東北狹,西南長,可千里,
北與挹婁、夫余,南與(水歲)貊接。戶五千,無大君王,世世邑落,各有長帥。其言語與句麗大同,
時時小異。漢初,燕亡人衛滿王朝鮮,時沃沮皆屬焉。
漢武帝元封二年,伐朝鮮,殺滿孫右渠,分其地為四郡,以沃沮城為玄菟郡。後為 夷貊所侵,徙句麗西北,
今所謂玄菟故府是也。沃沮還屬樂浪。漢以土地廣遠,在單單大領之東,分置東部都尉,治不耐城,
別主領東七縣,時沃沮亦皆為縣。漢光武六年
고려말 우왕때에 신라 경주를 한반도로 옮긴 기록
卷五十七 志 卷第十一 >地理 二 >慶尙道
本新羅古都.
始祖赫居世王, 開國建都, 國號徐耶伐, 或稱斯羅, 或稱斯盧, 後稱新羅. 脫解王九年, 始林有雞怪,
更名雞林, 因以爲國號. 基臨王十年, 復號新羅.
본 신라고도이다.시조 혁거세왕이 신라에 도읍을 세우고 국호를 서라벌 혹은 사라라 하고 나중에 신라라
하였다.탈해왕 9년 처음에
숲에 닭이 기괴하여 국호를 계림이라 하였다. 기림왕때 다시 신라라 하였다.
太祖十八年, 敬順王金傅來降, 國除爲慶州.
태조18년(938) 경순왕 김부가 들어와 항복하였다.나라이름을 없애고 경주라 하였다.
二十三年, 陞爲大都督府,
改其州六部名, 梁部爲中興部, 沙梁爲南山部, 本彼爲通仙部, 習比爲臨川部,
漢祗爲加德部, 牟梁爲長福部.
태조23년(943) 대도독부로
승격시키고 6부명을 고쳐. 량부를 흥중부, 사량을 남산부,본피를
통선부,한지를 가덕부,모량을 장복부로하다.
成宗六年,
改爲東京留守,
성종6년(986) 동경유수로 고치다.
十四年, 稱留守使, 屬嶺東道.
14년(993) 유수사로 칭하고
영동도에 속하게하다.
顯宗三年, 廢留守官, 降爲慶州防禦使.
현종3년(1012) 유수관을 폐하고 경주방어사로 강등시키다.
五年, 改安東大都護府.
현종5년(1014) 안동대도호부로 고치다.
二十一年, 復爲東京留守.
時銳方所上三韓會土記, 有高麗三京之文, 故復置之.
현종21년(1030) 다시 동경유수로하고, 예방이 삼한회토기를 올려 고려3경의 글이
있었는데 옛대로 회복
하다.
神宗五年, 東京夜別抄作亂, 攻劫州郡, 遣師討平之.
신종5년(1202) 동경야별초가 난을 일으켜
공격하여 주군을 위협하니 장수를 보내 평정하다..
七年, 印京人造新羅復盛之言, 傳檄尙·淸·忠·原州道, 謀亂,
降知慶州事,奪管內州府郡縣鄕部曲, 分隷安東·尙州.
신종7년(1204) 동경사람들이 신라부흥을 하자는 말이돌아 상,청,중,원주도에 격문이 전해지고 란을 모의
하자 경주사가 항복하고 관내 주부군현향부곡을 빼앗자, 안동과 상주로 나누어 예속시키다.
高宗六年, 復爲留守.
고종6년(1228) 다시 유수로 하였다.
忠烈王三十四年, 改稱雞林府.
경주를 계림부로
고쳤다
辛禑二年, 府與金州, 爭使營. 都評議使奏,金州賊殺按廉, 且置營歲月, 不及雞林. 况近海濱, 倭賊可畏,
乞移置雞林. 禑從之. 別號樂浪
【成廟所定】. 有赫居世王陵, 金庾信墓. 又有瞻星臺【新羅善德女主所築】ㆍ奉德寺【新羅惠恭王, 鑄大鍾,
重銅一十二萬斤, 撞之, 聲聞百餘里】.
屬郡四, 縣十. 領郡五【防禦郡四, 知事郡一.】.
신우2년(1389) 계림부를 금주로 하고 도평의사로 하여금 금주의 도적무리들을 죽이고 안무하다.
영을 설치하여 세월이 지났으나 계림에 미치지 못하였으며 바다와 가까운 형세로 왜적이 두려우니 계림을
옮겨 설치해달라 조르자 우왕이 따랐다.
별도로 낙랑이라 하였다. 혁거세왕릉과 김유신 묘가 있고 첨성대가 있다.
(九山)
만주,북방고토의 '고려(高麗)'지명 위치와 분포.
만주,북방고토에는 "高麗"라는 이름이 붙은 지명이 얼마나 남아 있을까.북경과 요녕성 일대에 몇 곳 정도?
북방의 어디 쯤에 가서
산성의 무너진 돌무더기를 살펴 보고 기와나 도기 조각을 찾아 다니는 것 만큼,
지명유래를 추적해 보는 것도 중요하지 않을 수 없다.
"高麗"를 고구려로 보든, 고려로 보든 "고려"라는 단어가 들어 간 지명이 있는 곳엔 그 이름이 붙어서 기백년
이래 까지 전해오는 연유가 있을것이다. 그곳에 가면 우리역사의 흔적이 있음은 말 할 나위도 없으리라.
우리 학계에 이러한 통계나
연구자료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당연히 있어야 하고 없다면 정말이지
심각한 수준이다.
(아래의 전체분포도는 상,중,하 3개 방안으로 되어있으며 방안별 확대가능).
고려(高麗)지명 위치와 분포도.
*분포도 설명
위의 고려지명 분포는 현재까지, 혹은 얼마 전 까지 지도상에 남아 있는 것들이다.
"高麗"와 이의 변형임이 확실한"高力", 두 단어만을 참고로 하였다. 이 분포를 보고 과거 고구려나 고려의
강역을 추정하는 것은 옳치않다. 옛 왕조의 강역이었던 곳의 지명 모두에 "高麗"를 붙혀 전해 오지도 않았을
것이고, 남아 있는것들 보다 잊혀 진 것들이 더 많을 것이고, 지도에 표기된 숫자보다 표기되지 않은 숫자가
더 많을 것이기 때문이다.
지나가 북방지역을 제대로 관리하기 시작한 것은 기껏해야 300년 전후다.
청왕조가 성경시대를 끝내고 북경으로
천도를 하고서도 오랜동안 유조변 안쪽 정도만이 관리가 되었으니
북방의 상세한 지도가 남아 있지가 않은 것이다.
거기에 현대와 같은 지도작법으로 제작한 북방지역
상세지도는 19c 말 에야 나왔으니 지도 만으로 생각한
다면, 자료 자체가 없다.오히려 청왕조 보다는 만주 대륙을 노리던 러시아와 일제에 의해 제대로 된 지도
들이 먼저 등장 한것이다.
정확하게는 현대식 지도작법을 유럽에서 도입한 일제가 러시아의 만주일대 지도에 한자지명을 써 넣었던
것인데, 이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것이 언어 문제다.
"高麗"라는 말을 몽고나 여진족들이 듣고 발음하여 그것을 다시 한자로 받아 적는다면 제대로 "高麗"라고
기록될리가 없다.
요녕성등지 보다 상대적으로 내몽고나 송화강 북부, 연해주등지에 고려지명의 분포가 별로 눈에 띄지 않는
것은 위와 같은 몇가지 이유 때문이지 고구려 왕조의 강역한계와는 하등 관계가 없다.
아울러 고려지명과 현재의
조선족 거주지 와도 전혀 상관이 없다.
조청(朝-淸)시대나 그 후의 조선족 거주지에 고려를 붙힐 이유가 없고, 고려촌(高麗村)이나 고려판(高麗板)
같은 민간 거주지 였을 것으로 보이는 곳도 고려영(高麗營),고려성(高麗城) 같이 그 대상은 모두 고구려이다.
혹, 위의 지명 중 한곳과 현재 조선족이 거주하는 곳이 일치 하더라도 고려지명에
조선족이 유입된 것이지
조선족이 거주하면서 고려라는 이름이 붙혀진 것은 아니다.
*개별 고려지명의 상세위치
(개별 고려지명의 상세위치는 분포도의 하,중.상 방안,서에서 동의 순서이고 모든 지도 이미지는 확대가능).
1.북경 북부의 고려영(高麗營). 북경 순의구(順義縣) 서북의 소고려영(小高麗營).
북경 경산(景山)의 동문밖
고려관(高麗館).
2.승덕(承德)서북, 풍녕(豊寧)의 북방인 동아납조(東阿拉潮)의 고려영자(高麗營子,NM3).
3-1.산해관 동북쪽의 고려성산(高麗城山),고려하(高麗河),고려하성(高麗河城),고려참(高麗站),고려하구
(高麗河口).
3-2.송령산맥의 북단인 오자산(五子山)의 대고려구(大高麗溝).산해관 동,
전둔위(前屯衛) 북쪽의 고려하
(高麗河).
고려참은 고령(高嶺) 또는 고령참(高嶺站)으로,고려하성(高麗河城)은 고아하성(高兒河城)으로,
고려하구는 고아하구(高兒河口)로 변조 되었음을 볼 수 있다.
4.의현(義縣:義州)서북, 청하문(淸河門)서북방의 고려묘자구(高麗廟子溝).
북진(北鎭)서북의 고려판(高麗板)과
봉천(奉天:瀋陽)서남방 혼하(渾河)변의 서고려장자(西高麗庄子).
5.요하(遼河)하류변 일대의 대고려방(大高麗房), 고려방(高麗房), 고려방(高麗坊).
6.요동반도 복주(復州:瓦房店)의 고려성자(高麗城子)와 그 동북방 장하(莊河)의 동고려성자(東高麗城子).
신의주 서북방 봉황성(鳳凰城)의 고려문(高麗門).
7.철령(鐵領)서남방 고려판(高麗板), 철령북부의 대고려둔(大高麗屯)과 고려참(高麗站).
심양(瀋陽)동쪽의
고려영자(高麗營子).
8.개원 동쪽, 서풍(西豊)의 동남방 고려목자(高麗木子:高麗木),토문하(土門河)인 휘발하 상류의 고려반도
(高麗盤道).
9.요양 동쪽의 고려형?(高麗螢)과 그 동쪽 청하성(淸河城) 동,서방의 고려영(高麗營)과 소고려영(小高麗營).
10-1.통화(通化)서남방의 고려묘자(高麗墓子)와 동남방의 고려성자(高麗城子).
10-2.고려묘자 북방의
고려성(高麗城)과 동남방의 대고려하(大高麗河).
11-1.백두산 서남의 고려보자(高麗堡子,NK52-7)와 서북의 고려와(高麗窩).
11-2.고려와 서북,
화전(樺甸) 동남의 고려구자(高麗勾子,NK52-4).
*분포도의 상,중,하 방안 중, 중방안 고려지명들의
상세지도.
1-1.내몽고 돌천(突泉)서쪽에서 달리호(達里湖) 서북까지 대각선으로 구축된
고려성(高麗城:高句麗城)과
파림좌기(林東)의 고려성지(高麗城趾).
1-2.고려성의 다른지도로 고려성지를 고려성자(高麗城子)로 표기.
2.내몽고 돌천(突泉) 남쪽, 광증호(廣增號)북쪽의 고려판(高麗板,NL51-10).
3.통요(通遼)와 요원(遼源)사이 고려영자(高麗營子).
이통(伊通)서남방 대고산(大孤山)남쪽의
소고려묘자(小高麗墓子,NK51-3)와
대고산 서쪽 혁이소촌(赫爾蘇村)의 고려판(高麗板). 장군총(장수왕릉)인근에 고려묘가 있다.
그런데 그 훨씬 북쪽인 장춘 남,이통(伊通)의 서남에는 소고려묘가
있다.
25만:1의 지도에 표기될 정도의 대능이 있다는 것인데 이에 대한 사료도 보도도 접해 본 적이 없다.
고구려 누구의
능인가.
더구나 이 소고려묘자의 동북방 교하(蛟河)는 3000년전 3단 피라미드 고분군이 발견된 지역이다.
4-1.백두산 북방 길림성 화전(樺甸)남쪽의 고려영자(高麗營子).
하고려외자(下高麗?子,NK52-5)와
상고려외자(上高麗?子)
4-2.고려외자가 표기 된 다른지도와 같은 안도(安圖:娘娘庫)동부의 고려부(高麗府).
5.혼춘(琿春)북부의 고려령(高麗嶺)과 대고려령(大高麗嶺).
(고려령은 고령(高嶺), 대고려령은
대려령(大麗嶺),고려령산맥 이라고 표기한 지도도 있다.)
혼춘관내 서남부의 두 고려성(高麗城).
6-1.대고려령 서남단의 화소포(火燒?)의 고려구(高麗溝)와 대고려령 동부의 고려평(高麗坪).
6-2.고려평지역과
고려평 북부의 조선인부락(朝鮮人部落).
7. 경박호(鏡泊湖) 동쪽의 고려둔(高麗屯:高麗村,NK52-2).
8-1.합이빈(哈爾濱)동쪽 빈현(賓縣)의 고려묘(高麗廟)와고려모자(高麗帽:高麗帽子).
8-2.고려묘와 고려모의
다른지도와 고려모 동쪽 방정(方正)의 고려구자(高麗溝子,NL52-8).
9.고려묘(高麗廟)남쪽 주하(珠河)의 대고려산(大高麗山)과 삼고려산(삼고려산).
주하의 고려영(高麗營), 주하
서남 육도하자(六道河子 )의 고려영(高麗營).
10.흥개호 서북쪽 밀산(密山)의 고려영(高麗營).
밀산서남 평양진(平陽鎭)의 조선둔(朝鮮屯)과 조선둔 서쪽의
고려둔(高麗屯,NL52-9).
*분포도의 상,중,하 방안 중, 상방안 고려지명들의
상세지도.
1-1.흑룡강성 서부의 제제합이(齊齊哈爾) 서북방의 고려지영자(高麗地營子,,NL51-2)
1-2.고려지영자
다른지도.
2.의란(依蘭) 서남방, 통화(通河)서북의 고려청(高麗淸).
3.러시아 하바로프스크(Khabarovsk) 서남방, 중국령 흑룡강변의 고려둔(高麗屯,NL53-2).
4.흑룡강과 송화강이 만나 아무르강으로 유입되는 지점의 고려도(高麗島)와 고려성자(高麗城子,NL53-1).
5-1.흥개호 서북에 위치한 호림(虎林)의 북부에서 오소리강(烏蘇里江)으로 흘러드는 칠호림하
(七虎林河)변의 고려둔(高麗屯,NL53-4)과 호림 서남부의 고려둔(高麗屯),
서고려영(西高麗營).
5-2.서고려영 동쪽 오소리강변의 고려대(高麗臺)와 고려영(高麗營).
* 참고지도
위의 모든 고려지명들은 일부를 제외하고 대부분 복수 이상의 지도를 참고로 했으며 참고한 지도들은
다음과 같다.
- 정로전국지장도 (1904, 일, 나카무라 구마오).
- 50만대:1 중국여도 (1918, 중,
참모본부제도국).
- 동아대륙도 (1927. 250만:1, 일,육지측량부).
- 항공우로도 (1932, 중, 250만:1).
-
대만주국상도 (1932, 일, 병용도서주식회사).
- 100만대:1 중국여도 (1943 ,중 국방부측량국).
- 미 군용지도
(1954, 25만:1), 기타등.
(분포도의 바탕지도: 일,경도대학 소장 동아대륙도).
(향고도)
첫댓글 예 ~ 잘 읽었습니다. 저는 현재 지금 설명하는 지역에 거주하고 있습니다. 님의 관련글도 많이 접하였고
관심있게 읽고 있습니다. 저희 지역 현재 중국 요녕성 영구시는 지금 설명하시는 개주시, 대석교시를
포함하는 광역시 개념입니다. 저도 항상 우리지역에 정말 많은 고려의 지명이 있다는 사실과 고려와 관
련된 여러 다른 한자지명도 관심있게 찿아 가고 있습니다. 주변엔 중국 고지도와 현재의 지도등에 나
타난 2~30여개의 고구려 성관련 유적이 있지만 국내에선 말로만 앞서고 항상 다른이의 자료만 반복하는
수준등등 중국의 국내사이트의 자료보다못한 수준의 글들로 고서등의 글장난으로 허송세월만 보내는 것은 아닌지..
지금 중국사이트에 그냥 고려성만 입력해도 너무나 잘 나오는 수준보다 못한 박사님, 교수님들의 맨날 고서
운운 수십년전 지식에 해도 너무 한다 싶기도하고..또한 현지에 이십여년 살아보니 이전의 지명과 성의 위치
를 현재의 지도와 고지도의 차이를 감안치 않고 그냥 이해함에서 많은 차이가 납니다. 현재 님의 설명에서도
비사성 부분에 저처럼 현지에 살아보면 아하 건안성, 안시성, 요동성, 백암성의 입지적인 여건등이 이해가
갈것입니다. 고구려 멸망이후에 현재에 이러기 가지 많은 간척사업과 현대화등으로 바다가 메워지고 산이 허
물어져 현재의 지도로는 이해하기 어렵고 고지도론 설명이 안되는 것들도..
많습니다.
수십년동안 고구려사를 연구하신분들의 자료를 보면 현재 접할수있는 고구려의 유적중에 산성유적이 절대적인데
이것을 누구하나 연구하여 그냥 중국 넓은 지역에 분포되어 고구려성으로만 치부되는 수많은 성들도 제대로 연구
못하면서 동북공정 어쩌구 고구려역사 탐방 어쩌구하며 약장사인냥 우리 지역에 오시는 것을 보면... 우리지역엔
현재 제가 발품팔아 확인한 고구려성이 약 27개정도 됩니다. 아마 중국만주지역 단일시로는 최고 많은 곳입니다.
하지만 이것을 확인하고 연구 하시는 분은 아무도 없어.. 맨날 청셕령 건안성, 안시성, 백암성등등 약팔때 현혹되
는 그런성에만 현혹되거나 위패산성, 성상산성등 완전 중국화한
그런성에만 사진올리고... 허물어지고 깨어진 지금은 거의 이름만 존재하는 작은 성, 크지만 잊혀진 성에는 관심도 없
는... 그 많은 자료들중에 중국동북에 그 많은 고구려 성의 유치를 확실하게 표시하거나 설명하는 분이 한분 없으니..
지역에 등산을 십수년 다니다 보면 중국의 북경대등등 대학교 박사논문등등 중국 학자들을 십여차례 만날수 있었습
니다. 그들은 정말 오랜 준비끝에 둥북 전역의 고구려 산성을 발품을 팔며 사진과 자료 수집을 하는 학자들이었습니
다. 하지만 그동안 한번도 한국학자는 만나보지 못하였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많은 사이트에 고서등을 토대한 이
론으로 엄청 격렬한 토론등에 집착한것을
많이 보았습니다. 행동하지 않는 믿음 지식은 죽은것이라고.. 3~4년전까지 중국에 고구려성 관련 유적엔 전부 가리고
숨기고 지도에도 지우고 하였지만 3~4년 전부턴 당당하게 고구려성 유적이란 표석을 큰 화강암으로 세우며 설명도
잘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고서등으로 말만 앞세울때 중국은 실제 현재의 유적을 놓고 연구하여 완결판을 완성하였습
니다. 우리가 항상 역사 논쟁등에 고서등등 이론이나 말만 앞서는 동안 중국은 후세에게 보여주기 위한 실제 유적에
합당한 설명으로 정당화 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긴 이야기지만 .. 암튼 지역의 고구려성유적을 올
려볼까합니다. 많은 조언 도움 부탁드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