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기록원 - 6.25 전쟁
중공군 침공 및 유엔군 재반격기
중공군의 침공 및 유엔군 재반격시의 진출선(1950.11.25 ~ 1951.6.23)
30여만명에 달하는 중공군의 출현으로 공세가 꺾인 국군 및 유엔군은 미처 방어태세를 갖출 겨를도 없이 11월 30일을 고비로 철수를 가속화하였다. 서부전선의 미 제8군은 12월 4일 평양에서 철수하였고 12월 중순에는 38도선 북방까지 후퇴하였으며, 12월말에 이르러서는 임진강-연천-춘천- 북방-양양을 연하는 38도선 부근에 방어선을 형성하고 중공군의 공격에 대비하였다. 동부전선의 미 제10군단과 국군 제1군단은 중공군에게 퇴로를 차단당함으로써 부득이 흥남으로 철수하여 12월 14일~24일간에 부산으로 해상 철수하였다.
중공군 개입으로 후퇴하는 UN군과 국군(1950)
징병 입대 신체검사 모습(1951)
12월 하순 38도선 북방에 이른 공산군은 12월 31일 38도선을 돌파하기 위한 공격작전을 개시하였는데, 이 공격을 중공군의 제3차 공세 또는 신정공세(新正攻勢)라고 불렀다. 이로 인하여 국군 및 유엔군은 격전을 치르면서 다시 38도선에서 물러났으며 1951년 1월 4일에는 서울을 빼앗기고 7일에는 평택-삼척선으로 후퇴하여 그곳에 새로운 방어선을 편성했다.
1월 8일 수원-여주-강릉선까지 진출한 중공군은 그 동안의 전력손실로 공격역량이 한계점에 도달하였다. 이를 간파한 국군 및 유엔군은 1951년 1월 25일을 기하여 일제히 반격작전을 개시하였다. 국군 및 유엔군은 한강 남안-횡선선에 이르러 다시 중공군의 반격(제4차 공세: 1951.2.11~18)에 부딪쳤으나 지평리, 원주일대에서 중공군을 격파하고 진격을 계속하였다.
국군 및 유엔군은 3월 15일에 서울을 다시 탈환하고 이 여세를 몰아 3월 말에는 38도선을 회복하였다.
이 때 유엔군은 38도선 방어에 유리한 임진강-영평천-화천저수지-남애리를 연하는 요지를 점령하고 중부지역에서는 철원-김화로 진격을 계속했다.
국군 단속과 범법 군인 조사 처벌에 관한 건(1951)
1951년 비상계엄령 실시 이후 군인들이 공장이나 사가(私家)에 들어가 피해를 주고 있으니, 이런 폐단을 막아 군인의 엄정(嚴正)한 태도와 품행으로 민간인을 보호하도록 지시한 문서이다. 특히, 국군이 서울에 입성했을 때, 군인들이 민간가옥을 점거하고 재물을 탈취하는 등 타국 군인의 침략행동에 못지 않았다는 정보에 대해 국회에서 공개토의까지 했으니, 국방부장관과 사령관이 책임을 지고 헌병사령관들에게 엄격한 조사를 명령해서 범죄자들을 법대로 처벌하여 이후로는 이런 폐단이 발생하지 않도록 주의할 것을 지시하였다.
정전반대 시민궐기대회 모습(1951)
이 시점에 중공군의 다섯 번째 공세인 춘계공세가 시작되었다. 이 공세는 중공군의 최대병력이 동원된 마지막 공세로서 당시 중공군의 가용병력은 4개 병단 16개 군단 51개 사단 규모였다. 중공군은 이 병력과 북한군을 총 동원하여 4월(4.22~30)에 서부전선(개성-화천), 5월(5.16~22)에 동부전선(양구-인제)에 대해 공세를 펼쳤다.
국군 및 유엔군은 사력을 다하여 이를 저지하였고 공산군의 공세는 구파발-홍천-하진부리-강릉을 연하는 선에서 저지되었다. 국군과 유엔군은 반격작전을 계속하여 5월 말에 세 번째로 38도선을 회복하고 6월 15일에 문산-연천-철원-김화-화천-간성에 이르는 주요 지역을 점령한 다음 강력한 방어선을 구축하였다.
이 때부터 전선은 고착화되었으며 전투는 국지전 형태를 띈 채 소모적인 전투만을 반복하기에 이르렀다. 쌍방은 38도선 부근의 새로운 전선(임진강구-연천-철원-김화-서화-간성)에서 서로 대치하였고, 소련의 제의로 7월 10일 개성에서 휴전회담이 개시되면서 전선은 교착전 양상을 띠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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