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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한 찬양으로 하나님께 영광 올려드린 의병부 여러분께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음명부 한 분 한 분의 평생에 하나님의 그 크신 은총과 은혜가 평생 함께 가득하시길 기도합니다.
우리는 종종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어떠한 시대인가, 어떤 세상 속에서 살고 있는 것일까 생각합니다. 요즘 우리나라에서 일어나는 일련의 사건들을 보면서 저와 여러분은 지금의 시대 상황에 씁쓸한 마음과 안타까운 마음을 모두 갖고 있으시리라 생각하면 됩니다. 그 이유는 내가 생각하고 중요시하는 가치가 지금의 현실과는 많은 격차가 있기에 그러합니다.
각 시대에는 나름의 지배적인 가치들이 있습니다. 현대 사회는 개인의 자율성, 다양성 혹은 포용성, 효율 등등의 가치관을 중요시합니다. 이러한 가치는 우리 삶에 동기를 부여하고 성장에 도움을 주며 내적인 평안을 가져다줍니다.
기독교인인 우리는 기독교 가치관인 영적으로 성장하고 사람들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며 세상과 하나님 앞에 진실하고 신실한 사람이 되고자 하는 좀 더 높은 차원의 가치를 우리 삶에 부여합니다. 그 가치관으로 살면서 변화하고자 하는데 실제 나타나는 행동은 그렇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왜냐하면 가치관은 하룻밤 사이에 변하지 않으며 시간을 두고 변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가치관을 변화시키는 지혜를 깨닫게 되면 사람들은 행동하기 시작합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하나님의 백성이라 칭함을 받은 모든 사람들의 가치관을 변화시키는 지혜를 주시고자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읽는 성경은 우리를 변화시킵니다.
우리의 가치관을 우리의 신념을 그리고 우리의 행동을 변화시킵니다. 오늘 주시는 말씀을 통하여 예수님은 우리에게 어떤 생각과 어떤 가치관, 어떤 합당한 행동을 원하시는지, 그래서 우리를 통해 이 시대가 어떻게 변화되기를 원하시는지에 대해 함께 나누어 보겠습니다.
먼저 말씀 15절에서 17절 함께 봉독하겠습니다.
귀 있는 자는 들을
오늘 말씀은 예수님께서 그 당시의 세대에 대해 비유로 말씀하시는데, 정상적으로 일어나야 하는 일들이 일어나지 않고 오히려 비정상적인 일들이 정상적인 것처럼 일어난 일에 대해 탄식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11장의 전반부에서는 헤롯 안티파스의 부적절한 결혼에 대한 비판으로 감옥에 갇힌 세례 요한이 그의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내어 당신은 누구십니까를 묻는 질문과 그 질문에 예수님께서 답하시는 내용이 나옵니다.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까 우리가 다른 일을 기다리오리까 하는 세례 요한의 질문에 예수님의 답변은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알리되,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 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못 듣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세례 요한의 질문에 예수님은 직접적으로 그렇다 내가 바로 오기로 예언된 미시아다라고 말씀하지 않으시고, 대신에 자신이 행하시는 행동을 말씀하심으로써 메시아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십니다.
예수님과 겹치는 시기의 삶을 살았던 세례 요한은 역사가들의 그 표현에 의하면 한 발은 구약 시대에, 다른 한 발은 신약 시대에 두었던 전환적인 시대의 인물이라고 말합니다. 이 전환적인 시대에 살고 있던 세례 요한의 삶은 광야에서의 삶이었습니다. 이사야 40장 3절에 외치는 자의 소리요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와 같이 적막한 광야에서 오직 하나님의 음성에 집중하며 메시아의 오심을 선포하고, 그를 위해 모든 백성이 회개하며 세례를 받게 하는 사역을 감당합니다.
예수님은 공생의 사역을 시작하시고자 요단강에서 이런 삶을 살고 있는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십니다. 죄인들이 받는 세례는 내가 죄인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죄가 없으신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시는 것은 회개가 필요한 죄인, 군인, 인간들 사이에서 그들과 함께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죄인들과 동일시되는 것에 동의하시는 예수님의 사랑, 하나님의 구속사에 순종하고자 하는 그의 겸손함을 보여주는 행동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사랑과 겸손을 보여주는 이 세례식을 세례 요한에게 받으셨다는 것은 그만큼 그를 높게 평가하신 것입니다.
당시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택받은 유대인들의 희망의 상징적 중심지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현실적으로 억압과 불의로 얼룩져 있었고, 성전은 도둑과 강도에 소홀히 되어 있었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맹목적으로 따르며 본래의 의미를 잃었고, 그 결과 율법 중심의 사회는 정제와 차별, 불신과 불통으로 가득 찼습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사람들은 서로 이해하지 못하고 소통이 단절된 삭막한 사회로 변해버린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그 세례를 향하여 회개하고 그 징표로 세례를 받으라고 외칩니다. 회개와 세례를 통하여 새로운 시대를 받아들이기에 합당한 세대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동시에 예수님은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수많은 사람들을 고치시고 가르치시며 복음을 전파하십니다. 예수님을 통하여 새로운 시대가 열리는 순간입니다. 즉 예수님이 나타나신 그때부터 사회의 정치, 문화, 경제, 역사 등의 여러 측면에서 예수님에 의한 공통된 특징과 경향이 나타나는 새로운 가치가 지배하는 시대가 열렸다는 것을 또한 의미합니다.
그러나 당시 세대에 대해 오늘 예수님은 귀 있는 자들은 들을지어다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슬피 울어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고 말씀하십니다. 당시 근동 지역의 관습에 따르면, 결혼식에서 피리 소리를 반주로 하여서 벌어지는 축제에 남성들이 주로 춤을 추고, 장례식에서는 여성들이 애곡하며 어린아이들도 그 놀이로 흉내내곤 하였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새 시대에 피리로 복음의 기쁨을 전해도 아무 반응이 없고, 세례 요한의 회개를 촉구하는 애도의 곡을 불러도 슬퍼하지 않는 이러한 세대의 완고함과 영적 무감각을 오늘 예수님은 책망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 세례 요한과 예수님의 각기 다른 방식으로 전해진 하나님의 메시지를 모두 거부하며 이 시대의 새로운 징조를 깨닫지 못하는 이 사람들은 자신들의 편견과 기대에 맞지 않으면 받아들이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는 세대였습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이 세대는 어떤 모습일지 한번 되새겨 봅니다. 여호와의 시대의 그 완고함과 영적인 무감각이 여전히 존재하지는 않은지 생각해 봅니다.
또한 저와 여러분은 어떠하십니까? 나 자신은 내 삶 속에서 하나님의 메시지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지, 하나님의 방법이 나의 기대와 다르더라도 기꺼이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지, 아니면 내 개인적인 신념과 가치에 갇혀 복음에 무관심하게 반응하고 있지는 않은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은 우리에게 마음을 열고 하나님의 음성에 귀 기울이며 그분의 뜻에 반응하는 삶을 살기를 바라신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피소리에 마음껏 기쁨의 춤을 추고 슬피 우는 이들과 함께 진심으로 슬퍼하며 위로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예수님의 시대 새로운 언약의 하나님 나라는 무엇을 나타내며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 가치는 무엇인가에 대해 다음 말씀과 함께 나누어 보겠습니다. 다 함께 18절과 19절 전반부와 함께 봉독하겠습니다. 요한이아서
율법을 지키고 완성하기 위해 구약의 많은 선지자들이 금욕하며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자 하였습니다. 세례 요한 역시 광야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며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고 예수님께 세례를 베풀고 예수님이 하나님의 어린 양임을 증언하셨습니다. 금욕적인 생활로 모든 것을 최소화하며 생활한 그에게 그 시대 사람들은 귀신이 들렸다고 말합니다. 제대로 먹지도 마시지도 아니하면서 열심히 회개를 외치고 세례를 베푸는 그가 흡사 귀신에 들린 것처럼 보인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이러한 비판은 예수님에 대해서도 같았습니다. 로마 제국에서 해방시켜줄 메시아를 기다렸더니, 오히려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으로 세리와 죄인들이 오직 그의 친구들이라는 것입니다. 결국 당시의 세대들은 하나님 하시는 일을 어떤 방식으로 선포하여도 듣지 않고 오히려 비판을 하며 아니면 귀를 아예 닫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을 위해 오신 예수님께서 이 요한의 시대에 오신 것은 더 이상 광야에 머물지 말고 광야로부터 나오라는 것이었습니다. 광야에서의 삶의 방식은 세례 요한까지의 삶이었습니다. 이제 예수님의 삶의 방식과 사역은 이전의 선지자들과 구별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선지자와 율법의 가르침은 세례요한까지만 해당되고, 예수님의 시대는 그와는 다른 새로운 질서가 새로운 가치로 시작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하나 짚어보아야 할 것은 새로운 하나님 나라를 가져오신 예수님은 왜 세리와 창기와 죄인들을 그의 곁에 친구처럼 가까이 두셨는가 하는 것입니다.
앞에서 요한의 당신은 누구십니까라는 질문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행적을 보면 맹인이 눈을 뜨고 걷지 못하던 사람이 걸으며, 나병 환자가 치유되고 귀머거리가 다시 듣게 되며, 죽은 자가 살아나고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이 전해지는 일입니다.
이것이 과연 율법이 완성되는 것과 어떤 상관관계가 있으며, 새로운 하나님 나라로의 전환에 어떤 영향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구약 전체에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사상 스프릿 중에 하나는 하나님의 정의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구약에서 일반적인 정의 개념 체다카의 의미는 하나님께서 명하신 율법과 규례를 따라 올바르게 살아가는 인간의 의롭다 함과 또 인간의 처지를 불쌍히 여기시고 바로 잡으시고 건지시는 하나님의 의로움이 최다과 정의입니다.
이렇게 체다가는 인간과 하나님과의 관계적인 개념으로 하나님의 긍휼과 회복을 통한 인간과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 회복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습니다. 그러나 죄로 인하여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하나님을 닮은 자신의 본질을 잃어버립니다. 이것이 인간의 모든 괴로움의 원천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신의 잃어버린 피조물에서 눈을 떼지 않으십니다. 불쌍히 여기시고 건지시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제다카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배척과 차별이 없는 공동체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은 그의 행적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모든 이에게 열려 있음을 선언하신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이제 더 이상 한 민족에 국한되지 않고 또한 율법에 제한되지 않는 것입니다. 오직 믿음을 통해 누구나 초대될 수 있음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오신 예수님의 행동은 세리와 죄인의 친구 되심이었습니다.
요한의 시대에서는 상상할 수 없었던 일입니다. 물론 그 당시에 선행과 베품을 통하여서 고아와 과부하 나그네에게 도움을 주고 격려는 하였지만, 진정 세리와 같은 죄인들과는 함께 친구가 될 수는 없었습니다. 율법의 정결한 사람들이 아니기에 격리의 대상이며 멀리해야 할 대상인 그들을 같은 장소에서 같은 식탁에서 식사를 하며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치유해 주시는 예수님의 행동은 모든 율법을 초월하신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하나님 정의의 기초가 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약 시대의 새로운 이념이자 가치이며, 그리스도인들의 변화되어지는 행동의 지표가 되어가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새로운 엑소더스 출애굽을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광야에 살던 세례 요한의 시대와 자신의 시대가 이제는 완전히 다르니 거기에서 나와 이제는 율법이 완성되고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기쁨과 능력을 모두가 누구나 다 함께 나누자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 시대의 하극상이었던 세리들과 율법에 적합하지 않으면 모두 죄인이라 부르는 그들의 예수님은 잃은 양, 잃은 은전, 잃은 아들 탕자의 비유로 자신의 식탁에 초청하여 잔치를 베푸시는 것입니다. 같은 식탁에서 예수님을 바라보며 먹고 마시는 그 행위는 결국 구원의 표정이며 하나님 나라의 정의가 실현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시대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예수님 시대에 패러다임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에 구체적으로 어떻게 실현될 수 있을까 하는 것입니다. 함께 다음 말씀을 통하여 살펴보겠습니다. 다 같이 19절 마지막 부분 9절 함께 봉독합니다.
이 짧은 말씀이지만 이 말씀을 풀어보면 지혜는 예수님을 지칭하기도 합니다. 제가 풀으면 예수님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며 그들을 친구 삼으심으로 새로운 언약, 새로운 하나님 나라의 하나님의 정의를 옳게 행하셨다는 뜻입니다. 그가 행하신 것은 친구 삼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옳았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며 정의이기에 그러합니다. 그것이 또한 하나님의 나라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심리학적 관점에서 친구라는 의미는 공감, 신뢰, 서로 돕는 관계를 바탕으로 정서적 안정과 정신 건강에 중요한 요소로 봅니다. 공감이란 다른 사람의 감정이나 입장을 함께 느끼고 이해한 것을 언어나 비언어로 나타내는 감정 능력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이 세리와 죄인을 친구 삼으셨다는 의미는 그들을 신뢰하고 그들의 입장을 이해하면서 그들에게 정서적 안정을 주시고 그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인정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공감적 이해 능력이 최고치신 분이셨습니다. 이러한 공감이 이루어지면 상대방은 좀 더 개방적이며 솔직하게 되고 자신을 방어하지 않고 자신과 직면하여 좀 더 현실적이고 객관적이 된다는 것입니다. 위협감을 느끼지 않으므로 그들의 삶이 창조적으로 되고 삶을 스스로 변화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공감받지 못한 사람은 정서적 고립과 외로움, 자존감 저하와 우울 및 불안, 분노가 증가합니다. 사회적으로는 소통과 인간관계가 단절되고 사회적 갈등과 폭력, 그리고 범죄가 증가하게 되고 불신의 사회가 된다는 것입니다.
미국의 경제 사회학자인 제레미 리프킨은 그의 책 유러피언 드림에서 인류를 이끄는 새로운 비전, 새로운 가치로서 공감을 제시합니다. 개인주의와 자유를 중시하고 경쟁과 성공을 강조하던 아메리칸 드림의 허구를 이야기하면서 유럽식 삶의 방식과 가치관이 공감과 협력을 중시하는 사회 모델을 지향한다고 주장합니다.
또한 그는 공감이 개인주의적 가치보다 공동체적 가치를 중시하는 사회를 형성하는 데 아주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며, 결국 더 평등하고 지속 가능한 사회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이 리프킨의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현대에 와서 수많은 학자, 저술가들이 공감의 필요성과 그에 대한 중요성을 많이 이야기합니다.
2천년 전 예수님이 보여주신 그 공감적 이해 능력을 이 시대의 학자들이 다시 불러오는 것입니다. 함께 춤추고 함께 울 수 있는 마음, 연약한 자들인 병든 자와 죄인과 소외된 그들과 교제하며 그들의 고통을 이해하는 마음, 그러한 공감을 통해 예수님은 새로운 시대,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나타내고자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공생애 동안 우리와 함께 우셨으며 함께 기뻐하셨으며 함께 슬픔을 나누셨던 분이십니다. 나사로의 죽음을 슬퍼하시고 마리아의 향유를 기뻐받으시고, 엠마오 마을로 가는 두 제자의 옆에서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시고 공감해 주시고 말씀해 주심으로 그들의 마음이 뜨거워졌음을 고백하게 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이 땅을 사셨던 예수님께서 진정 원하셨던 것은 어떤 종교적 행위나 신조보다 먼저 마음으로 소통할 수 있는 공감할 수 있는 힘이 있는 세대들이었습니다. 그것이 새로운 시대의 가치이며 새로운 언약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의 신학자 몰트만은 그리스도인이 사회에서의 실천적 책임을 강조합니다. 기독교인들은 예수님의 공감적인 삶을 본받아 사회적 변화를 촉진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것이 지금 이 시대에 갖추어야 할 기독교인들의 주요 가치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지금 어느 때보다 격변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진실이 무엇인지 무엇이 올바른 가치인지 구별하기가 어려운 시대에 놓여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은 아마도 요한의 시대와 마찬가지로 진지하게 듣고 반응하기보다는 완고함과 영적 무감각의 세대가 이어져 온 결과일지도 모릅니다.
오늘 예수님은 바로 그런 세대, 공감 없는 세대를 책망하셨습니다. 더불어 지혜는 그 행한 일로 인하여 옳다함을 얻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즉 예수님은 공생애 동안 우리가 보고 배우며 함께 겪은 그 모든 일 속에서 우리와 함께 춤추시고 함께 아파하셨습니다. 예수님이 그 옳은 행동을 통해 진정한 가치와 정의를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공감과 가치가 우리와 함께할 때 우리는 새로운 시대에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 주님의 사역에 동참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바라기는 저와 여러분이 그 길을 걸어가며 예수님 시대에 하나님 나라를 넓히시는 예수님의 친구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Messenger’s Note:
“In his heart, a man plans his course, but the LORD determines his steps.” (Proverbs 16:9)
“Nevertheless, not my will but yours, be done.” (Luke 22:42)
“And when the angel stretched out his hand toward Jerusalem to destroy it, the LORD relented from the calamity and said to the angel who was working destruction among the people, ”It is enough; now stay your hand.“ And the angel of the LORD was by the threshing floor of Araunah the Jebusite.
And David built there an altar to the LORD and offered burnt offerings and peace offerings. So the LORD responded to the plea for the land, and the plague was averted from Israel.” (2 Samuel 24:16,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