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8월 17일 굴산사 가는 길 출발지 남항진...(09:50)
굴산사 가는 길
예부터 동대문 밖 강릉이라는 말이 있다. 동대문 밖을 나가서는 강릉이 가장 살기 좋다는 뜻인데,
강릉은 삶과 문화와 예술이 함께 어우러진 도시다.
강릉 바우길 6구간 굴산사 가는 길은 남항진해변에서 시작하여
청량동 입구, 중앙시장, 모산봉, 장현저수지를 지나 학산오독 떼기 전수관을 도착하는 코스이다.
소요 시간은 7시간 정도 걸리며, 주요 관광 포인트로는 다양한 먹거리로 유명한 강릉중앙시장,
유네스코가 선정한 인류 문화유산으로 천년의 향기가 깃든 축제 한마당인
강릉단오제를 체험할 수 있는 강릉 단오문화관, 동해를 한눈에 바라볼 수 있는 모산봉 전망대,
통일신라의 선승인 범일국사가 태어난 굴산사 절터, 연화와 무월랑의 사랑 이야기가 담긴 정자 월화정이 있다.
따가운 햇살에 아랑곳 않고 한 손에 연장(?)을 챙겨 들고 보무도 당당히 걸어오고 있는 4 구간지기 옥연님
오늘은 걷는 내내 따가운 햇살이 우리를 힘들게 할 것 같았다
오늘도 처음 나오신 분을 애타게 찾고 있는 국장님...(그 옆으로 사무국 실땅님, 팀장님)
6 구간지기 틸리초님 인사
부군(夫君 ) 레이니어님은 다리 부상으로 함께 걷지 못하고... 레이니어님의 빠른 쾌유를 기원합니다.
남항진 앞바다 방파제
남항진동 南項津洞
남항진은 남대천 과 섬석천 이 만나 바다로 빠지는 곳에 있는 포구로,
옛날 송정에서 한송사(寒松寺) , 한송정(寒松亭) , 불하산(佛下山)으로 가는
남쪽 길목에 있는 나루라는 뜻에서 생긴 지명이다.
1914년 강릉군 덕방면(德方面) 남항진리가 되었다.
1920년 덕방면과 성남면을 통합한 성덕면의 남항진리가 되었다.
1955년 9월 1일 강릉읍이 성덕면과 경포면(鏡浦面)을 병합하여 시로 승격됨에 따라
강릉시 입암동(笠巖洞) 관할의 남항진동 이 되었다.
1965년 두산동(斗山洞) 관할이 되었다가, 1988년 성덕동 관할로 바뀌었다.
강릉 남대천 하구 건너편 남쪽 해안가에 있으며,
남대천 하구의 섬석천 이 바다와 만나는 곳에 위치한 길이 600m, 2만4천㎡의 백사장이 있는 간이해변이다.
[현황]
남항진동 에는 여러 자연 마을이 있다. 나루터는 마을 앞에 배를 대는 나루가 있었던 곳이다.
강릉시 남항진동 산12-2번지 에 있는 한송사지 는 신라 때의 고찰 한송사 가 있었던 곳으로써
황폐된 연대는 기록이 없으나 한송사지 에 한송사란 암자가 유지되고 있다.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한송사 석조 보살 좌상 은 현재 국보 제124호로서
국립 중앙 박물관 불상 전시관에 보존되어 있으며,
한송사지 석불 좌상 은 국보 제81호로 지정되어 강릉시청사 내에 보존되어 있다.
한송사지 석불 좌상 은 통일 신라 시대의 작품으로 7세기경
중국 산서성 태원(太原) 천룡산(天龍山) 석굴의 자유스럽고 사실적인 조각과 흡사하다.
전설에 의하면 당시 한송사 는 200여 간의 큰 사찰이었다고 하는데,
지금도 주위 200여 미터까지 기와, 자기 조각의 잔해가 많이 나타나고 있다.
안목과 남항진을 연결해 주는 인도교 솔바람다리가 2010년 4월 9일 완공되어
바닷바람과 강바람을 함께 쐬며 열대야를 잊기에 최적의 명소로 자리 잡고 있다.
여기에 또 최고의 먹거리 삼교리동치미막국수가 있어 더위를 식히려는 관광객의 발목을 사로잡는다.
주변에는 횟집들이 많고, 주차장이 넓어서 주차하기도 용이하다.
또한 주변에는 깨끗이 정비된 민박집도 있어서 조용하게 하루를 묵으며 새해를 맞을 수 있는 곳이다.
굴산사 가는 길... '더위~ 네까짓 것쯤이야 !' 더위를 개(?) 무시하면서... 힘차게 출발한다...(10:13)
병산동柄山洞
강원도 강릉시에 속하는 법정동.
병산동 은 강릉시 중심부에서 남동쪽에 위치한 법정동으로 섬석천 을 사이에 두고
동쪽은 월호평동 과 남쪽은 남항진동 에 접하고 있다.
마을의 생김새가 북두칠성의 자루 끝 형상이어서 ‘자루미’를 한자로 쓴 병산동(柄山洞) 이라고 한다.
병산동 은 원래 강릉군 덕방면에 속한 지역으로 1914년에 자가곡면 하시동리를 합하여 병산리로 하였다.
1920년에 성덕면에 편입되었다가 1955년 강릉시에 편입되면서 법정동이 되었다.
병산동 은 월대산 에서 동쪽으로 내려온 줄기 끝에 있다. 병산동 의 북쪽으로는 남대천 이 흐르고,
남쪽으로는 섬석천 이 동네를 가로질러 동해로 유입되며, 섬석천 주변으로 농경지가 발달하였고,
논 주변으로는 송림이 우거진 솔밭이 형성되어 있다.
[현황]
병산동 에 있는 주요 지명으로는 자루미 , 조강골 , 괴봉산, 팔명산, 덕정봉이 있다.
병산동 주변에는 제18전투비행단을 비롯한 주요 군사시설이 있으며,
입암동 에서 송정동 공항대교와 연결되는 4차선 지방도로가 개설되면서 교통여건이 개선되었다.
주요 기관으로는 강릉시니어클럽 , 교통안전교육장이 있고,
덕정봉(德亭峯) 아래에 고려 말 인물인 최영 장군을 기리기 위해
후손들이 지은 덕봉사(德峯祠) 와 덕봉사비(德峯祠碑) 가 있다. 병산동민 대부분은 농사나 자영업에 종사한다.
남항진교를 건너면서...
섬석천 剡石川
강원도 강릉시 남쪽의 유산동 과 신석동 사이를 흐르는 하천.
섬석천 은 구정면 과 왕산면 의 경계가 되는 칠성대(953.6m)를 최고봉으로 하는 일련의 산줄기로부터
북사면으로 흐르는 작은 계곡의 물들이 경사급변점에 설치된 칠성저수지와 동막저수지 에 저장되고,
이 저수지로부터 흘러나온 물들이 구정면 장현저수지 의 물과 합하여 동해로 흘러나가는 하천이다.
칠성저수지와 동막저수지로부터 흐르는 물은 산지와 산지 사이에 완만한 부채꼴 모양의 지형을 흐르면서
고도가 점차 낮아지고 결국 장현저수지 로부터 흘러나오는 물과의 합류지점으로부터 본격적인 섬석천 의 유로가 나타난다.
[현황]
섬석천 의 영향을 받아서 농사짓는 지역은 상류의 어단리 , 부채꼴 모양의 중간 지점인 학산리 와 금광리 ,
그리고 그 아래쪽에 담산동 과 박월동 , 섬석천 본류의 영향을 받는 신석동 과 운산동 ,
더 나아가 하류의 넓은 저 평지 속에 자리 잡은 월호평동 등이다.
그리고 2002년 태풍 ‘루사’가 내습하였을 때 섬석천 에 물 공급을 주도했던 장현저수지 의 제방이 붕괴되어
저수지 하류의 섬석천 유역에 있는 농촌인 신석동 , 월호평동 , 그리고 그 하류 지역들이 심한 피해를 입었다.
뜨거운 햇살 아래... 지기님과 선두
뜨거운 태양이 작렬하는 '산우에 바닷길'을 당겨 본다.
찜통더위의 말씀 /정연복
일주일 가까이
내가 힘을 좀 썼더니
너희들 거의
숨넘어갈 지경이구나.
좀 덥기로서니
마음을 다스리면 될 것을
못 살겠다 못 살겠다고
갖은 안달을 떠는구나.
초록나무들이 땡볕 아래
어떻게 하고 있는지
말없는 인내와 끈기의
모습을 가만히 보라.
앞으로도 며칠은 내가
너희들 곁에 있을 테니
마음공부 한다고 생각하고
평상심을 잃지 말라.
아직 황금벌판은 아니지만 노랗게 변해 가고 있는 들판...
낱알들이 무거워 벼들이 고개를 숙여가고 있었다. 조만간 수확의 계절이 오지 싶었다.
자초들紫草-
강원도 강릉시 청량동 섬석천에 있는 넓은 들.
자초들[자초아]은 예부터 마을 앞 냇가에 자초풀(지치)이 많이 자라 그 풀이름이 지명으로 되었다.
자초들은 청양이 앞 섬석천 냇가에 있는 들인데, 위쪽에는 섬둘이 있고, 아래쪽엔 남항진이 있고,
앞에는 월호평이 있고, 뒤에는 월대산에서 내려온 줄기가 있다.
[현황]
자초들에 있는 자초풀[紫草]은 섬석천을 정비하면서 없어졌다.
마을 앞으로 흐르는 섬석천에 있는 유다리를 건너면 월호평동이 된다.
이 무더운 날에도 먹이를 찾아 어슬렁 거리는 굶주린 하이에나....
강원 교육청 교육 연수원 별관 앞을 지나간다...(10:27)
색상이 고운 나팔꽃
가로수 그늘 아래서가 아니고... 백일홍 그늘 아래서 짱돌님....
학동 한옥 펜션 앞에서 잠시 쉬어간다...(10:40)
솜솜님이 모시고 온 어머니...
(올해 연세가 80이신데도 불구하고 이 뜨거운 날에 너무도 잘 걸으셨다.. 항상 건강하십시오)
성덕로에 접어 들면서...
성덕동城德洞
강원도 강릉시에 속하는 입암동·병산동·학동·남항진동·두산동·청량동을 관할하는 행정동.
강릉시청 의 동남쪽에 있다. 동쪽은 바다, 서쪽은 노암동 ,
남쪽은 강동면 상시동리 와 하시동리 , 북쪽은 남대천 과 접해 있다.
또한 항공 교통의 요충지인 공항이 자리 잡고 있는 강릉시의 관문 지역이다.
[명칭 유래]
‘성덕(城德)’은 1920년에 성남면(城南面)과 덕방면(德方面)이 합쳐져서 생긴 이름이다.
[형성 및 변천]
1955년 9월 1일에 강릉읍이 시로 승격하면서 성덕면에 속해 있던
입암·청량·두산·학동 ·병산·남항진 마을이 합병하여 입암동 이 되었다.
1965년에 입암동 관할 법정동인 입암, 청량동 은 행정동을 입암동 으로,
입암동 관할 법정동인 두산, 학동 , 병산, 남항진동 은 행정동을 두산동 으로 각각 분리하였다.
성덕동(城德洞) 은 과소 행정동 통합에 따라 1998년 10월 1일에 강릉시 조례로
입암동 ·병산동 ·학동 ·남항진동 ·두산동 ·청량동 을 합쳐 만든 행정동이다.
[현황]
관내에는 성덕 초등학교 ·중앙 초등학교 ·강릉 중학교 ·강릉 중앙 고등학교 , 강원도교육연수원행정연수부,
강릉종합사회복지관 , 강릉보육원 , 강릉반석행복한홈스쿨, 하늘아동센터가 있다.
성덕동 특색사업으로 성덕공원 조성(2015),부기촌 벽화마을 조성 사업(2015),
동절기 설해 최소화를 위한 주민자율제설단 발대[2014] 등이 있다.
최근 대규모 아파트 신축으로 강릉시 행정동 가운데 인구가 많다.
농업, 어업, 공업 등 다양한 산업에 인구가 종사하는 신흥 개발 지역이다.
청량골 숲 길로 들어 간다...(11:08)
청량동 靑良洞
강원도 강릉시 에 속하는 법정동.
‘청량동’이란 명칭은 청량미가 잘 자라는 청량들이 있어 생겨난 이름이다. 청량동 의 옛 이름은 ‘청양이 ’이다.
1955년 9월 1일 강릉읍이 시로 승격하면서 성덕면에 속해 있던 청량동 은
두산, 입암, 학동 , 병산, 남항진 마을과 함께 합병하여 입암동 이 되었다.
1965년에는 입암동 관할이던 법정동인 입암동 , 청량동 은 행정동을 입암동으로,
법정동인 두산동 , 학동 , 병산동 , 남항진동 은 행정동을 두산동 으로 하여 각각 분리되었다.
1998년 10월 1일 과소 행정동 통합에 따라 청량동 이 속해 있던 입암동 과 두산동 이 통합되어 성덕동 이 되었다.
[자연환경]
청량동 은 밋밋한 산줄기들로 이어진 고을이고 땅이 비옥하여
곡식을 심으면 잘 자라고 땅이 좋아 소나무가 늘 푸르른 동네이다.
마을 앞[남쪽]으로 늘목재[구정면 구정리 ]와 칠성산 [구정면 어단리 ] 밑에서 흘러온 섬석천 이 흐르고,
내 건너 남쪽에는 월호평의 넓은 들과 공군 비행장이 있다. 마을 뒤에는 산줄기가 여러 갈래로 길게 뻗어 내리고 있다.
[현황]
예부터 청량이는 물이 풍부하고 토질이 좋아 논농사가 잘 되었고, 그래서 농토를 구입해 농사짓기가 어려웠다고 한다.
마을 앞 냇가에는 남쪽 마을인 월호평동 으로 가는 ‘유다리’가 있다.
유다리는 ‘율다리’란 말의 준말로 과거에 밤나무로 다리를 만들어 율다리라 했다고 한다. 지금은 시멘트 다리로 바뀌었다.
이 다리를 건너면 넓은 월호평이 되는데 옛날 정월 대보름에 월호평동 사람들과
이 다리를 먼저 밟기 위해 이 다리에서 횃불싸움을 했다고 한다.
횃불싸움을 마치고 마을 사람들은 이 다리에 모여 나이 숫자만큼 다리를 밟는 다리밟기를 했다.
주요 지명으로는 석밭골, 새우자리, 웃모퉁이, 아랫모퉁이, 자초들 [자초아], 유다리, 해남방축 등이 있다.
유다리에서 율곡로 까지 철로가 가로지르고 있으며, 주변에 공군 비행장이 접해 있다.
굴산사 가는 길 중..... '청량골'은 걷기 좋고 아름다운 길이다.
노암 터널
입암동에서 시작해 중앙시장 월화 거리까지 이어지는
강릉의 숨은 명소로 예전에는 실제로 기차가 드나들던 길목이었으나
KTX 철로가 신설되면서 원래의 기능을 잃고 관광지로 탈바꿈했다.
지금은 한국 3대 트레킹코스로 손꼽히는 강릉 바우길에 속한다.
터널 안에는 오래전 흔적들이 곳곳에 남아 색다른 볼거리를 선사하며,
터널 안에서 바깥을 바라보면 특유의 신비로운 분위기도 느낄 수 있다.
노암 터널은 6.25의 아픔이 기억되는 피학살 현장이다
강릉시 노암동에 위치한 이곳은 6.25 당시 반공 인사 100여 명이
북한 공산도당에 의하여 비참하게 집단 학살당한 원통한 현장이다
1985년 6월 25일 한국방송공사가 희생된 영령들을 추도하고
피 흘림 없는 조국 통일을 기원하며 삼가 이곳에 비를 세웠다
터널 안 의자에 앉아서....
터널 안은 상당히 시원했다.
지기님이 점심 식사 후.... 다시 모이는 장소를 설명해 주고 있다...(11:57)
식사 후 칠사당에서 모이기로 한다.
월화정月花亭
연화부인(蓮花夫人) 과 무월랑(無月郞) 의 설화가 깃들어 있는 연못 구지(舊址)에 있는 누각.
[명칭유래]
연화부인 과 관련된 설화로 인하여 연화정(蓮花亭)이라는 명칭이 유래되었다.
예전에는 명주각(溟州閣)이라고도 하였다.
월화정 은 강릉 남대천 가에 있던 연화봉(蓮花峯) 옛 자리에 있었으며,
신라 때 연화부인(蓮花夫人) 이 물고기를 길렀는데,
그 물고기가 김무월랑(金無月郞) 에게 편지를 전해 주었다는 옛 자취가 있으므로
이에 그 후손들이 양어지(養魚池) 바위 위에다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정자를 지었다.
1930년 강릉김씨 종인들이 무월랑 과 연화부인 의 설화가 깃들어 있는 곳을 기념하기 위해 정자를 신축하였는데,
영동선 철도 부설로 강릉시 성산면 금산리 명주성 내로 이건 하였다가 1961년에 철거되었다.
2004년 옛터 인근에 관리사 1동과 함께 월화정 을 복원하였다.
[형태]
2004년에 복원된 월화정 은 돌기둥 위에 누각을 올렸으며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사방이 확 트였다.
지붕은 겹처마 팔작 기와지붕이며 바닥은 나무마루로 만들었다.
[현황]
월화정 은 강릉김씨 대종회 에서 소유와 관리를 하고 있다.
예전에 기차가 다니던 철 다리였던 월화교를 건너간다
예전 열차가 다닐 때... 열차 맨 뒷 칸에 서서 노암 터널을 배경으로 서 있던 걷자...
먹이를 찾아 납작 엎드린 무더위에 약한 하이에나 2
남대천을 바라보니.... 가뭄이 상당히 심해 보인다
태풍이 오던 비가 내리던... 암튼, 빠른 시일 내에 뭐라도 오긴 와야 할 것 같다
남대천 南大川
강원도 강릉시 중심지로 흐르는 내.
강원도 강릉시 왕산면 대화실산(大花實山)[1,010m]에서 발원하여 북류하다가
왕산·성산·구정 등 3면의 경계부에서, 역시 왕산면 에서 발원하는 지류를 합친 뒤,
성산면 과 구정면 의 경계를 북동류하고, 강릉 시역(市域)에 들어와서 동북동으로 유로를 바꿔
강릉 시가지 남쪽을 거쳐 하구부에서 섬석천(剡石川) 을 남안(南岸)으로 받아들이면서 동해로 흘러들어 간다.
길이 32.86㎞, 유역면적 258.65㎢이다.
[명칭유래]
남대천 은 강릉대도호부의 관아 앞(남쪽)으로 흐르는 큰 내여서 생긴 이름이다.
[변천]
예전에는 경포호 하구로 흘렀으나 지금은 하평에서 동해 바다로 흐르는데 강을 직선화하여 물의 흐름이 빠르다.
[자연환경]
상류의 산지에서는 좁은 곡저평지(谷底平地)를 대상(帶狀)으로 형성하고,
하류의 해안에서는 영동(嶺東) 해안평야 중 가장 넓은 평야의 하나로 꼽히는 유역평야를 형성하여
영동 제일의 도시 강릉시를 발달시키고 있다.
[위치와 교통]
남대천 은 강릉의 서쪽지역에서 발원하여 동쪽으로 흘러 강릉의 중심부를 지나기 때문에
남쪽지역과 북쪽지역의 교통이 원활하지 못했다.
그래서 남대천 을 중심으로 남북을 잇는 도로가 생겼는데, 영동고속도로 , 동해대로, 7번 국도, 영동선 등이 있다.
[현황]
남대천 상류에는 오봉저수지 가 있고, 하류에는 죽도봉이 있고,
죽도봉이 있는 앞목과 남쪽 남항진을 잇는 솔바람 다리가 있다.
예전에는 영동선 외 4개의 교량이 있었으나 교통량이 늘어나면서 다리가 많이 늘어났다.
남대천 주위에는 금선정 , 연어대, 방구정, 영귀암, 삼포암 , 이구산, 상임경당, 하임경당,
월화정, 와룡암, 서출지, 연화담 등의 정자와 명소가 있다.
월화거리 月花-
강원도 강릉시 강릉~원주 고속 철도 도심 구간 지하화로 생긴 폐철도 부지에 조성 중인 거리 공원.
‘월화거리’라는 지명은 강릉 지역의 고유 설화인
‘무월랑(無月郞) ’과 ‘연화 부인(蓮花夫人) ’의 애틋한 사랑 이야기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남대천 옆 연화봉 반석 위에 정자가 있었는데 신라 29대 태종 무열왕 6세손인 강릉 김씨 시조
명주군왕(溟州郡王) 의 아버지인 무월랑 의 ‘월’자와 어머니 연화 부인 의 ‘화’자를 따서 ‘월화정(月花亭)’이라 하였다고 한다.
원래의 월화정 은 1936년 대홍수로 유실되어 현재는 그 자리에 표지석을 세웠으며, 복원된 월화정 이 남아 있다.
[제정 경위 및 목적]
2014년 4월 강릉~원주 고속 철도 도심 구간[강릉시 교동 강릉역 ~노암동 부흥 마을 ]의 지하화가 결정되었다.
이 구간은 교동 , 중앙동 , 옥천동 , 강남동 등 4개 지역을 관통하는 길이 2.6㎞, 폭 30m로 면적은 약 5만여㎡에 이른다.
그동안 이 부지의 활용 방안을 두고 공원, 도로, 주차장 등 여러 가지 논의가 있었다.
강릉시는 2014년 도시 재생 사업을 통해 그간 쇠퇴화가 진행되던 구도심 지역의 공동화 현상을 해소하고
지역 경제를 활성화한다는 목표를 설정하고 폐철도 부지를 대상으로 월화거리 를 조성하기로 하였다.
[내용]
월화거리 조성 사업은 2016년부터 시작되어 2단계로 나누어 추진되고 있다.
1단계 사업은 강릉시 교동 강릉역 에서 노암동 부흥 마을 에 이르는 지역을
8개의 사업 구간으로 구성해 ‘말 나눔터 공원’, ‘숲길’, ‘임당 광장’, ‘역사 문화 광장’, ‘생활 문화 광장 및 전망대’,
‘철도 보도 육교’, ‘물놀이 시설, 노암 터널’, ‘월화정 숲길’ 등으로 조성되었다.
‘임당 광장’, ‘역사 문화 광장’ 등에는 89개의 풍물 상점도 문을 열었다.
현재 1단계 사업이 2018 평창 동계 올림픽 개최 전 완공을 목표로 추진되고 있다.
2단계 사업으로는 2018년 평창 동계 올림픽이 끝난 이후 민자 유치 등을 통해 남대천 철교를 이용한
하늘 카페, 노암 터널 리모델링, 월화정 옆 어린이 물놀이 공원과 소규모 포켓 공원이 조성되고
강릉시 노암동 부흥 마을 에는 라벤더 공원, 공방거리 등이 조성되어 관광 명소화하는 사업이 추진된다.
[의의와 평가]
월화거리 는 강릉역 에서 부흥 마을에 이르는 2.6㎞ 구간에 조성된다.
월화거리 로 진입하는 도입부는 '말 나눔터 공원'으로, 이어지는 임당 광장은 '풍물 시장'으로,
그리고 홈플러스 옆은 '역사 문화 광장'으로, 중앙 ·성남 시장 지역은 '생활 문화 광장'으로 조성 중이다.
이로써 그동안 극심하게 쇠퇴의 길을 걷던 강릉의 구도심 지역이 새로운 도약의 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한 여름의 하늘 풍경...
식사 후... 대도호부관아 옆 칠사당으로 모이고 있다...(13:15)
야행 준비로 주위가 부산스러웠다.
강릉대도호부 관아 (江陵大都護府 官衙)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에 걸쳐 중앙의 관리들이 강릉에 내려오면 머물던 건물터이다.
강릉시 용강동에 위치한다.
국보로 지정된 객사문과 보물로 지정된 칠사당이 관아 경내에 남아 있다. 강릉대도호부 관아는 1994년 사적 제388호로 지정됐다.
고려 태조 19년(936)에 세워져 중수를 거쳐서 동헌과 객사를 비롯하여 총 83칸 건물이 들어서 있었으나
일제강점기에 거의 모두 헐렸고 지금은 강릉 객사문과 칠사당만이 제자리에 남아 있다. 이 외에도 관아 건물의 일부가 남아 있는데, 강릉시 남산에 위치한 오성정, 금산의 월화정,
경포의 방해정 등이 관아 건물들의 일부를 옮겨 지은 것이라고 한다.
이 정자들은 조선시대에 강릉도호부 관아의 건물들 중 일부를 헐었을 때 그 자재들을 가져와 새로 세웠다. 일제강점기인 1929년에 임영관을 헐고 강릉보통학교를 세웠다.
1975년 9월에 강릉보통학교 자리에 강릉 경찰서가 들어섰다가,
강릉경찰서가 포남동 신청사로 이전함에 따라 공터로 남아 있었다.
이 공터에 강릉시청사를 신축하기 위해 땅을 파던 중에
관아 유구가 발굴되면서 공사가 중단되고 발굴조사가 행해졌다.
1993년 발굴조사 이후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되었다
칠사당 앞 ... 많은 바우님들이 먼저 와 쉬고 있다.
칠사당
명칭은 조선시대 수령의 주요 업무가 칠사(七事)로 규정되었던 데서 연유하여 명명한 것으로 보인다.
칠사란 농사, 호구, 교육, 병무, 세금, 재판, 풍속을 말한다.
최초 건립연대는 확실치 않으나, 1632년(인조 10년)에 중건하고, 영조 2년(1726)에 크게 확장하였다.
이후 1867년(고종 4년) 화재로 소실된 것을 부사 조명하가 이듬해에 다시 지었다.
일제강점기부터 1958년까지 군수나 시장의 관사로 사용되다가 1980년에 다시 옛 모습을 되찾았다.
강릉대도호부 동헌이었던 칠사당 주변에는 다음과 같은 주요 관아 건물이 있었다.
내아(內衙) : 지방관 및 지방관 가족 생활 공간 (칠사당 동쪽 소재) 문루(門樓) : 강릉 대도호부 동헌 정문 (칠사당 남쪽 소재) 군관청(軍官廳) : 군관 업무 공간 (문루 앞 소재) 부사(府司) : 호장(戶長) 공간 (칠사당 동쪽 소재) 질청[作廳] : 아전(衙前) 공간 (부사 남쪽 소재) 향청(鄕廳) : 유향소(留鄕所) 공간 (칠사당 서남쪽 소재) 임영관(臨瀛館) : 강릉 객사 (칠사당 동북쪽 소재) 포즈가 참 거시기 하다...ㅎ
점심 식사 후 배가 부르니.. 만사(萬事)가 귀찮은 나른한 표정으로....
칠사당은 고풍스러운 느낌이 물씬 배어있다.
지기님이 그만들 쉬고 출발한다고...(13:25)
시나미 명주 골목
‘시나미’는 강원도 사투리로 ‘천천히’ ‘명주(溟州)’는 신라시대부터 불린
강릉의 옛 지명으로 ‘바다와 가까운 아늑한 땅’이란 뜻이다.
명주동·남문동 일대를 아우르는 명주동은 강릉 시민들 사이에서 아날로그 골목의 대명사처럼 쓰인다.
‘시나미 명주 골목’은 ‘시간도, 풍경도 천천히 흐르는 명주 골목’이라는 뜻이다.
과거 명주동은 천년이 넘는 시간 동안 강릉의 행정과 문화 중심지였다.
일제강점기였던 1940년대에는 적산가옥 등 일본식 건축물이 골목 곳곳에 들어서기도 했다.
지금의 경강로가 생기기 전 가구 판매점들이 밀집해 가구골목으로 유명했던 동네는
2000년대 초 강릉시청 청사가 홍제동으로 이전하면서 활력을 잃기 시작했다.
노암동 단오회관으로 건너가면서....
노암동 魯巖洞
강원도 강릉시 강남동 에 속하는 법정동.
강릉 시내를 가로질러 흐르고 있는 남대천 의 오른쪽에 있는 지역으로
동쪽으로 입암동 ·청량동 ·신석동 , 서쪽으로 내곡동 , 남쪽으로 장현동 과 박월동 , 북쪽으로 명주동 과 접해 있다.
강릉시의 중심부와 접해 있어 강릉 시내로 접근하기는 편리하다. 행정동인 강남동 관할이다.
노암동 에는 냇물이 서쪽에서 동쪽으로 흐르는데,
이 냇물이 중국 노나라의 냇물과 같다 하여 ‘노간리(魯澗里)’ 또는 ‘노가니’라고 불렀다.
또는 노산군 으로 강등된 단종 임금이 서쪽[서울]에서 동쪽[영월]으로 귀양을 갔는데, 그 이름을 딴 것으로 보기도 한다.
우리나라의 ‘노’ 자가 들어간 이름은 대개 쫓겨난 조선 임금 단종 을 추모하여 붙였거나,
공자가 태어난 노나라를 뜻하는 경우가 많다.
본래 너레바우가 있어서 너레바웃골이라고도 하였으며 노간리와 너레바웃골을 합하여 노암동 이 되었다.
[형성 및 변천]
노암동 은 본래 강릉군 남이리면에 딸린 지역으로, 1914년 행정 구역 통폐합 때 아죽리를 병합하여 노암리라 하고
성남면에 편입되었다가 1920년에는 성덕면에 편입되고 1955년 9월 1일에 강릉시에 편입되어 노암동 으로 고쳤다.
1955년 9월 1일 성덕면에서 강릉시로 승격되면서 행정동이 노암동으로 되었고,
법정동으로는 노암동 과 유산동 으로 구분하여 관리되다가
1998년 10월 1일 과소 행정동 통폐합 정책에 따라 기존의 장현동 , 월호평동 과 함께 강남동 으로 되었다.
[현황]
노암동 지역은 강릉시 중심부의 남대천 변에 위치하고 있어서 매년 강릉단오제가 개최되는 시기에 가장 붐빈다.
2004년 단오문화관 이 개관되어 노암동 은 단오제의 중심지로 거듭났다.
단오문화관 에는 상설전시장이 있고, 전통문화교실과 전통민속 정기공연이 개최된다.
단오 개최 시 단오문화관 을 중심으로 한 남대천 주변에서 다양한 전통공원화 체험이벤트가 개최되고, 난장들이 운영된다.
노암초 앞에서 후미를 기다리면서...(13:54)
어마무시하게 높은 모산봉으로 오르기 직전.... 지기님이 몸이 가벼워야 한다고 화장실에 다녀들 오라고 한다....(14:07)
무더운 날.... 모산봉으로 오르는 일도 고역이다.
실땅님 넉 다운되기 일보직전이다.
항상 사이가 좋아 보이는 누나와 동생...
엄청나게 높은 모산봉 정상에 올라 떡(?) 실신이 된 후...잠시 쉬어간다...(14:24)
모산봉 母山峰
강원도 강릉시 강남동 에 있는 산봉우리.
모산봉 은 강원도 강릉시 강남동 을 품고 있는 이 마을 최고봉으로, 높이는 105m이다.
모산봉 은 강릉의 안산으로 불리는 명산이다. 밥그릇을 엎어 놓은 것처럼 생겨 ‘밥봉’이라고도 하고,
볏짚을 쌓아 놓은 것 같다는 뜻의 ‘노적봉’으로도 불린다. 또 인재가 많이 배출된다 하여 ‘문필봉’으로도 불린다.
[현황]
모산봉 은 2005년 강남동 향우회 등 지역 단체들이 복원 운동에 나서 현재 봉두의 높이가 105m로 높아졌다.
『임영지(臨瀛誌)』 의 기록에 따르면, 조선 중종 때 강릉부사 한급(韓汲) 이
강릉 지역에 인재가 많이 배출되는 것을 막고자 하여 이 지역 명산인 모산봉 의 봉두를 인위적으로 낮추었다는 전설이 있다.
이에 근거해 옛 정기를 되찾고자 지역 주민들이 복원운동을 벌인 것이다.
강릉 남대천 남쪽에 있는 봉우리로 강릉을 떠받혀주는 네 개의 기둥산 중 하나이다
모산봉은 어머니의 품 같이 포근하고 아늑하다고 해서 그리 부른다고 한다.
봉우리 생김새가 노적가리같다 하여 노적봉이라 하기도 하고,
고봉으로 담은 밥그릇 같다고 밥봉이라고도 하며,
강릉에 인재가 많이 난다고 문필봉이라 부르기도 한다.
강릉에는 네 기둥산(四柱山)이 강릉을 떠 받치고 있어 강릉은 오랫동안 명맥을 유지해 왔고,
이 네 개의 기둥산은 강릉을 중심으로 마름모꼴로 버티고 있으면서 터를 단단하게 다진 것이다,
남대천을 기준으로 하여 남쪽에 2개, 북쪽 2개를 합해서 네개의 기둥산이 있다.
먼저 유천동에 있는 땅재봉은 옛날 이 봉에 당을 지어놓고 당재를 올렸다고
당재봉이라 하다가, 나중에는 땅재봉으로 되었다고 하며,
저동에 있는 시루봉은 생김새가 시루처럼 생겼다고 시루봉이라 하고,
두산동의 월대산은 초저녁 보름달이 떴을 때 동헌(東軒)인 칠사당에서 이 달을 바라보면
마치 산 위에 걸린 것처럼 보인다고 하여 월대산이라고 한다.
모산봉은 강릉의 부와 명예를 동시에 떠 받쳐주는 봉우리로 인식했기 때문에
강릉의 안산이 되고, 그러므로 모산봉을 보고 집을 지으면 잘 살 수 있다고 한다.
레이니어님 대신 선두에서 멋진 리딩을 해 주신 지기님....
이곳에서 레이니어님이 불편한 몸에도 불구하고 바우님들을 기다리다 맛있는 사과를 나누어 주었다.
장현저수지에 도착해서...(15:07)
장현저수지 長峴貯水池
강원도 강릉시 장현동 에 있는 저수지.
장현저수지(長峴貯水地) 는 장현동 에 있는 저수지로 구정면 여찬리 , 내곡동 , 장현동 에 걸쳐 있는데
저수지 주위에는 송파정 , 장안성 , 왕고개 , 장안재, 진재 등이 있다.
장현저수지 로 들어오는 물줄기는 늘목재(구정면 구정리 와 왕산면 도마리 사이에 있는 고개)
밑에서 흘러 구정리 와 여찬리 를 지나 온 물이다. 이 물은 저수지를 지나 신석동 , 월호평동 으로 흘러간다.
한국 농어촌 공사 강원 지역 본부 강릉 지사에서 관리하고 있다.
장현저수지 는 관개 개선과 지목 변환 목적으로 1941년 11월에 착공하여 1947년 9월에 완공하였다.
2002년 태풍 루사 때 제방이 40m가량 붕괴되어 돌과 흙으로 다시 쌓았다.
2002년 12월 모두 71억 1400만 원의 사업비가 투자돼 저수지 복구공사가 시작됐고,
2004년 12월 지금의 현대적인 모습으로 완공되었다.
환경부의 스마트 그린도시 공모사업에 최종 선정돼
생태복원사업이 이루어진 강릉 장현저수지 시는 지난 2020년 스마트 그린도시 공모에 선정되자 사업비 36억여 원을 들여
장현동 462번지 일대 저수지 둘레 1.91㎞에 생태복원 사업을 실시했다.
시는 농어촌공사에 공사를 위탁해 온실가스 감축과 수질개선 등을 위한
생태습지 2개소와 녹조 방지장치 3개소, 수질정화여울 1개소, 접촉산화수로 135m를 조성했다. 특히 저수지 둘레를 자연친화적으로 조성, 주민들의 운동코스로 자리 잡을 수 있도록
인도교를 설치해 연결하는 등 친수 공간으로 재탄생시켰다. 출처 : 강원도민일보
사과 한 입 크게 베어 물고 저수지를 바라본다.
뜨거운 태양 아래 세월을 낚고 있는 낚시꾼들...
가뭄을 말해주 듯.... 저수지 수위가 너무 낮아 있었다.
물속에 잠겨 있던 나무도 물 밖으로 나와 있고...
레이니어님이 이곳에서 또 기다리면서.. 시원한 음료와 물을 공급해 주었다...(16:15)
(오늘 같은 날.... 레이니어님이 사막의 오아시스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무 고마웠다)
국장님이 소리친다....' 여기서 단체 사진 한 장 찍고 갑시다...'
무더위와 맞짱 뜨면서 끝까지 함께 한 단체 인증 사진....(모두들 전혀 지쳐 보이지 않는다... 대단한 사람들이다.)
기온이 얼마나 뜨거운지 나무에서 이상한 수액들이 흘러나와 투명한 구슬을 만들고 있었다.
드디어 버스가 보인다....
학산 오독떼기
학산마을 은 민요 「학산오독떼기」 로 유명하다.
1985년 강원도 무형 문화재 제5호로 지정된 ‘학산오독떼기 ’는
예로부터 전해지고 있는 농업 노동요로서 강릉의 토속민요를 대표하는 곡이다.
노래의 정확한 유래는 알 수 없으나 신라시대부터 즐겨 불렀다고 하며
『조선왕조실록』에는 세조 가 동해안 일대를 둘러보면서
「오독떼기」 를 잘하는 사람을 뽑아 노래하게 하고 상을 주었다는 기록이 있다.
「오독떼기」 는 다섯 번 꺾어 부르기 때문에 「오독떼기」 라 한다는 설과
「오독떼기」 가 동서남북중의 오독을 떼기(개척)한다는 뜻에서 왔다는 설,
‘오’는 신성하고 고귀하다는 뜻이고 ‘독떼기’는 들판을 개간한다는 뜻에서 생겼다는 설,
신라 때 화랑들이 강릉지방을 순력하면서 풍류도를 닦을 때 부르던 노래가 곡조만 살아서 내려왔다는 설 등이 있다.
「오독떼기」 는 벼농사를 하면서 부르는 노래로 강릉 지방을 대표하는 농사노래다.
한두 사람이 앞소리를 메기면 여러 사람이 소리의 후반을 제창으로 이어받는 메기고 다는 방식으로 노래를 부른다.
앞소리를 메기는 사람이 뒷소리가 이어받을 가사의 첫 글자의 운을 떼어주는 가창 방식도 특이한데,
강릉 지방을 벗어나면 남쪽으로는 동해시 일부, 북쪽으로는 양양군 일부에서도 비슷한 가락의 「오독떼기」 가 불려졌다.
「학산오독떼기」 는 강원도민속예술경연대회에서 제1회(1985. 원주)우수상, 제2회(1984. 강릉)우수상,
제5회(1987. 홍천) 종합우수상을 수상하였으며, 학산리 에서는 학산농요보존회를 만들어
사라져 가는 전통 농요 보존을 위하여 매년 경창대회 개최 등 계승 발전을 위하여 노력하고 있다.
강릉 굴산사지 江陵掘山寺址
강원도 강릉 지역에서 신라 말부터 조선 초기까지 존속한 굴산사 의 터.
신라 말기에는 지금의 학산(鶴山)이 굴산(掘山)이었으므로 굴산사 라 하였다.
범일(梵日) 의 명성을 들은 명주도독(溟州都督) 김공(金公)이 범일 에게 명주 땅에서
법(法)을 펴줄 것을 요청하자 범일 은 나이 40세에 굴산사 를 창건하였다.
[발굴조사 경위]
1974년 이후 관동대학교 사학과 및 박물관에서 약 10여 년 동안 지속적인 지표조사를 실시하여
건물지 주초석(柱礎石), 비편(碑片) 5점, 명문(銘文) 기와편 30여 점, 막새류 20여 점 등을 수집하였다.
특히 비편에는 ‘…화상언의(和尙言意)…’, ‘…소이년삼(所二年三)…’, ‘…명주도독은부도독(溟州都督銀副都督)…’ 등이
새겨져 있었고 명문 기와편에는 ‘굴산사’라는 기명이 표기된 것이 대부분이었다.
막새류에는 연화문 수막새, 당초문 암막새, 귀목문 암막새 등이 있다.
이들 유물들은 현재 관동대학교 박물관 에 소장되어 있다.
1983년에는 농업용수로 공사에 따른 일부 지역 30여 평을 강릉원주대학교 박물관 에서 발굴조사하여
건물지 축대가 확인되었으며, 명문 기와편과 암막새, 수막새, 청자편, 고려토기편 등이 출토되었다.
2002년 태풍 루사 때 사지의 중심 지역이 물길로 바뀌고 토사에 쓸려가 법당지로 추정되는 지역이
주초석을 드러내어 2002년 말과 2003년 두 차례 발굴조사를 실시하였다.
2003년 6월 2일 강원도기념물에서 사적으로 변경 지정되었고 사지 전역의 민가를 이주시키고
연차적으로 토지 매입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사적으로 재지정되었다.
[위치]
강릉시 구정면 학산리 597번지 일원으로 학산천과 북쪽에 나란히 이어진 능선과의 사이에 형성된 평지에 해당된다.
구정면 소재지에서 왕고개 를 지나 학산1리에서 우회하여 대성사 방향으로 가다가
학산2리의 「강릉학산오독떼기」 전수회관이 있는 지역이다.
[변천]
850년(신라 문성왕 12)에 창건되어 고려 말이나 조선 초에 폐사된 것으로 추정될 뿐이다.
전성기 때에는 수천의 승려들이 기거할 정도로 15만 평 규모의 웅장한 사찰이었다.
절집의 반경이 300여m에 이르고 수도하는 승려만 200여 명이나 되었다고 하는데
이때 쌀 씻은 뜬 물이 섬석천 을 지나 남항진 앞바다까지 흘렀다고 한다.
[현황]
조선 초기에 훼철되었지만 지금도 그 규모를 짐작하게 하는
당간지주(幢竿支柱)[보물 제86호]와 부도(浮屠)[보물 제85호],
그리고 석불입상(石佛立像)[지방문화재자료 제43호] 등이 있다.
이 중에서도 특히 당간지주는 일석식(一石式)의 거대한 석재 지주(石材支柱)인데
우리나라에서 규모가 가장 큰 지주 중의 하나이다.
지주에 걸맞은 강경(强勁)한 수법은 통일신라의 작품다운 웅대한 조형미를 보여 준다.
[의의와 평가]
범일 이 창건한 굴산선문(掘山禪門)은 신라 말기와 고려를 거쳐
구산선문(九山禪門)의 일맥(一脈)을 형성하면서 수많은 고승을 배출하였다.
특히 오늘날 한국 불교의 정통이라 할 수 있는 조계종(曹溪宗)의 창시자인
불일(佛日) 스님과 보조(普照) 스님은 범일 의 법손(法孫)이다.
따라서 굴산종(掘山宗)은 현대 한국 불교의 전통을 지탱해 온 정신적 지주라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에어컨 바람이 시원한 버스 안으로 ...(16:45)
이 무더운 날에 포기 않고 끝까지 함께 한 당신들이야 말로 진정한 거시기입니다.
서로를 배려하고 웃으면서 함께한 거시기님들 대단히 수고하셨습니다.
설빙에 찾아 가 국장님 이름 달고(?) 시원한 빙수 한 그릇씩 드시길 권 합니다...^^
카페 게시글
6구간-굴산사 가는길
기억을 걷는 시간 ... 굴산사 가는 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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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작년 여름 " 굴산사 가는 길 "을 걷다가 땀 한바가지 쏟았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때 아마도 34도가 넘는 햇빛 쨍쨍한 날씨였던 걸로 기억합니다.
마지막 포장도로를 걷다가 양산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꼈었죠.
오늘도 만만치않게 더웠을 듯한데,
무더운 날씨에도 굴하지 않고 씩씩하게 걷는 바우님들의 열정에 찬사를 보냅니다.
발바닥 통증을 빌미로 한 주 쉰다고 빠진 제가 부끄러워지네요.
후기 감사합니다 걷자님. ^^
무더운 날 걸었던 울트라 후유증이 조금은 있나 봅니다.
저 역시 울트라 6 구간 아스팔트 길을 걸었더니 양쪽 발가락에 물집이....
이번에 굴산사 걷다가 또 터졌다는...
어여 건강 회복하시고 다음에는 함께 할 수 있기를...
근데, 굴산사 길...정말 더럽게 더웠습니다...ㅎ
걷자님 사진도 찍고 힘든 바우님들 (저포함 ) 챙기실라 참으로 힘드실 텐데 늘 한결같은 평온한 모습이 너무 너무 좋습니다.
감사합니다.
굿밤되시어요.
예전부터 산행 하면서 해 오던 습관 때문인지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움직이고 있습니다.
길을 걷고 산을 오를 때 속도 보다는 지구력입니다.
본인 컨디션에 맞춰 여유롭게 걷기를 권 합니다.
무더운 날....끝까지 정말 수고하셨습니다.
언제 걷자님께 여쭤 본 적이 있어요~^^
걷자님은 안 더우세요??
안 힘드세요??
땀이 안 나세요??
ㅋㅋ
레아님 말씀대로 한결같은 평온한 모습이 존경스럽기도,
부럽기도 합니다
걷자님이 계셔서
늘 든든합니다 !
감사합니다~걷자님
🫰🫰🫰😍
저는 추위 보다 더위에 더 약하답니다.
저도 인간 인지라 힘들고 지칠 때도 많습니다.
저는 땀이 아니라..육수가 흐른답니다.
격려해 주시던 그런 말씀에 힘을 얻어 열심히 걷습니다
항상 고맙습니다.
지난 5구간에서 발목 아프신 이야기를 하셔서
못오실거라 생각했는데,걷자님이 계셔서~
참 대단하시다라는 생각을 했어요~
그간 혼자 사진을 담으며 마음속 부담감도 있었는데 이제는 그런 부담이 없어졌어요~
든든한 종신보험같은 걷자님~
수고 엄청 많으셨어요~~!!!^^
산에 가거나 길을 걸을 때...가끔은 가기 싫을 때도 많지요
그럴 땐 스스로에게 물어 봅니다.
'지금 안 가면 하루 종일 누워서 뒹굴 것 아니냐?'
'놀러 가는 게 아니고 운동하러 가는 거야...' 마음속으로 다독이지요
나는 길을 걸으면서 뒤에 어슬렁 거리는 하이에나(?)가 있어 맘이 편하다는...
더위를 이겨내는 보약이 뭐가 있을까?
산에 가서 뱀이라도 잡아 푹~고아 주어야 하나...ㅋ
무더운 날 얼마 남지 않았으니... 화이팅 하시길...
@걷자(서울/강릉) 앗~~뱜은 절때루 패스입니다~~ㅋ
무더운 날 함께 걷는 바우님들의
땀방울이 생생하게 보이네요~
저도 같이 땀 흘렸으면 좋았을텐데~
저희 가족은 그날 서울에 일이 있어서.......
수고하셨습니다.~~
이번 여름 걸었던 날 중에 제일 햇살이 따가웠던 날 같았습니다.
가족들이 안보여서 궁금했었다는...
엄마, 아빠 보다 령관이가 더 보고 싶었습니다...ㅎ